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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시황릉의 내부가 아직 개발되지 않아 이를 여러 가지 자료들을 모아 추측으로 만든 전시관인 진시황릉 지하궁전
    중국 -산시성 (서안. 화산) 2024. 6. 21. 20:04

     진시황릉의 내부가 아직 개발되지 않아 이를 여러 가지 자료들을 모아 추측으로 만든 전시관인  진시황릉 지하궁전

     

     

    2024.    6.    21.

     

      

    2024.   6.  12 ~  16,   3박 5일 일정으로  포항농협 조합원 해외문화탐방으로  조합원 50명과 농협 직원 6명이 함께한  부산 → 중국 서안  여행이다. 

      

    6.  14.  여행의 세째날은 당 현종에 의해 만들어진 온천 별궁인  화청궁.  진시황릉의 내부가 아직 개발되지 않아 이를 여러 가지 자료들을 모아 추측으로 만든 전시관인  진시황릉 지하궁전.  2000여 년간 황제를 지킨 지하 군대로 세계 8대 불가사의로 꼽히는 병마용갱. 

    7세기경부터 실크로드를 따라 동양으로 온 이슬람인들이 모여 살며 문화와 먹거리들이 모여 있는  회족거리 야시장을 돌어보는 일정인데

     

    여행의 세째날  서안 동쪽 교외에 위치한 麗山(리산)의 산록에 위치한 온천으로 당나라 시대 황제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 이야기가 깃든 정원으로 아름다운 정원과 건축물들을 감상할 수 있는 華淸池를 떠나  세째날 두번째 여행으로   점심 식사 후 진시황릉의 내부가 아직 개발되지 않아 이를 여러 가지 자료들을 모아 추측으로 만든 전시관인  진시황릉 지하궁전으로 향해본다....

     

     

     

     

     

     

    진시황릉 지하궁전 가기전 5분거리의  95년 된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한다.

     

     

     

     

     

     

     

    중식은 하나씩 나오니 사진찍기가 좀 그렇다.   다른분 식사하는데  카메라 비칠수도 없고...

     

     

     

     

     

     

     

    95년된 유명식당이라 음식도 맛있고 엄청 종류도 많았다...

     

     

     

     

    어제에 이어 오늘은 황금색의  20년산 서봉주는 솔 잘못하는 내가 보기엔 독하긴 한데 풍미가 좋고  입안에서 향이 오래 남는다.

     

     

     

     

     

     

     

    독특한 면이고  처음보는 면이라서 ~ 

     

     

     

     

     

     

     

    진시황릉 지하궁전으로 향하며 바라본 우리가 점심 식사했던 95년된 식당의 뒷모습이다.

     

     

     

     

    차창가로 바라본 진시황릉으로 추정되는 릉

    서안에서 약 30km 떨어진 곳에 고대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제가 잠들어 있다. 진시황릉은 동서로 345m, 남북으로 350m의 단을 쌓고 높이 43m의 거대한 무덤이다.   중국에는 ‘사사여생 (事死如生)’이란 말이 있다.   죽어서도 영원히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황제들은 자신들의 능묘 건설을 중요시하였다.

    13세에 황제의 자리에 오른 진시황도 36년의 세월과 최대 70만 명의 노동력이 투입하였다고 항다. 중국학자들이 1962년부터 본격적인 진시황릉 연구를 시작한 이후 지금까지 지질탐사와 항공관측 등을 통해 사마천의 이야기가 허구가 아니라는 사실도 밝혀지고 있다.

    흙 표면에서 35m 아래에 지하궁전이 있으며, 주변에는 성벽이 둘러쳐져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또 지표면의 수은 함량을 조사한 결과 정상보다 20~30배 많은 것도 확인했다.   중국 문화재 당국은 현재의 고고학 발굴 기술로는 진시황릉의 훼손이 불가피하므로 앞으로 수십 년간은 발굴 계획이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아쉽지만 여행자가 볼 수 있는 것은 진시황의 화려한 능이 아닌 나지막한 야산뿐이다.

     

    사마천이 쓴 사기-진시황 본기에 따르면 진시황릉은 땅을 깊게 파서 구리 녹인 물을 사방에 부은 다음에 궁전 모형과 문무백관의 자리를 만들고 진귀한 보물로 가득 채웠다고 한다. 후세에 보물을 노리는 침입자를 대비해 화살이 자동으로 발사되는 기계를 설치하였고, 무덤 주위에는 수은이 섞인 강물을 흐르게 했다.

    무덤 위쪽에는 보석으로 천체의 별을 장식하고, 벽에는 일월성신을 그려 넣었다. 바닥에는 산천지형도를 표기했으며, 고래 기름으로 촛불을 밝혀 오랫동안 불이 꺼지지 않도록 했다. 그리고 후궁 가운데 처녀들과 보물과 기계의 위치를 아는 사람은 모두 순장한 것으로 전해진다. 마지막으로 릉 위에 흙을 덮은 다음 나무를 심어 그곳이 진시황의 무덤인지를 알지 못하게 마무리했다고 한다.

     

    진시황릉은 동서 485m, 남북 515m, 높이 약 76m의 구릉형 묘이다. 시황제가 즉위하자마자 공사를 시작하여 70여 만명의 인원이 동원되어 완성하였다니 대단한 공사였을 것이다.   내부에 지하 궁전을 비롯한 여러가지 시설이 있다.   하지만 아직 발굴되지는 않았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 진짜의 진시황릉 내부를 볼 수 있을까 ?

     

     

     

     

    식당에서 걸어서 5분거리의  진시황를 지하궁전 매표소

     

     

     

     

    건물 앞에 있는 병마용 모형동상

    진황지궁 (秦皇地宮)진시황릉 지하궁전이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진시황릉의 내부가 아직 개발되지 않아 이를 여러 가지 자료들을 모아 추측으로 만든 전시관으로 사마천의 사기 기록을 바탕으로 재구성하였다.

     

    진시황의 지하궁전은 사마천의 진릉지궁에 대한 묘사에 근거하여 만든 관광지로 진시황릉 서쪽 약 2km에 위치해 있다.

     

     

     

     

     

     

     

     

     

     

    1층 로비에 진나라가 다른 6개국을 흡수해서 문화. 생활방식. 문자. 자. 단위. 돈을 통일한 그림이 있다.    황제가 타던 4두 마차로 여러대의 마차를 동원하여 암살에  대비하였다고...

     

     

     

     

    진시황때의 업적인 화폐. 문자. 도량형 등 통일과 관련된 자료들이 있었다...

     

     

     

     

     진나라 군기와 무기

     

     

     

     

    진나라 통일된 화폐

     

     

     

     

    진나라 통일된 화폐와 진나라 통일된 문자

     

     

     

     

     

     

     

     

     

     

     

     

     

    진시황릉 지하궁전은 진나라의 예술과 과학기술이 집약되어 있는 궁전이다.   모형이지만 지하궁전이기 때문에 대낮이라도 들어가면 어둡다.

     

     

     

     

     이런 복도를 지나면

     

     

     

     

     

     

     

    지하에 갇혀있던 백성들의 시신이다.    지하궁전 설계도는 비밀인데 비밀을 아느 사람을 이렇게 묻었다고 ...

     

     

     

     

    지하궁전 입구이다...

     

     

     

     

     

     

     

    진시황 지하궁전은 진시황릉을 적외선 투시등을 통해 확인한 바탕으로 상상해서 만든 것이다. 진시황은 자신의 무덤이 아니라 아예 궁전을 지어 놓았다. 그리고 그 위에 흙을 쌓아 그냥 산을 하나 만들어 놓은 것이다. 다른 왕릉에 비해 너무커서 오랫동안 그냥 산인 줄 알았다고 한다.

     

     

     

     

    지하궁전은 대지면적 16650평방미터, 건축면적 4500평방미터로 상하 2층으로 나누어 진시황릉원과 지하궁전을 재현하여 관광객들에게 2천여 년 전 진시황릉의 웅장하고 휘황찬란한 모습을 재현하였다.   궁전 내부  안에는 성을 쌓고 외부에 방어 시설을 만들었다.

     

     

     

     

    묘역 중앙에 진시황 사후 주거지 지하궁전이 자리하고 궁전을 보호 할 내성과 외성이 망루와 함게 만들어지고 주변에 병마용깽 같은 갱들이 즐비한 모습, 능원의 규모가 축구장 33개 수준이라고...

     

     

     

     

    외부에 뱡마용갱 1. 2. 3호갱

     

     

     

     

    진시황릉은 시안(西安)에서 35㎞ 떨어진 곳에 있으며, 43m 높이의 거대한 봉분은 지금도 주요 역사적 건조물이다.   능은 동서남북 기본 방위에 대응하는 네 개 각각에 문이 달린 최초의 정방형 담장 안에 지어졌다.   그리고 이 정방형 담장은 다시 남북으로 뻗은 더 큰 장방형 담장으로 에워싸여 있다.

     

     

     

     

     서쪽 병마용

    현재 발견된 곳은 서쪽인데 진시황을 지키는 병사라서 동서남북에 다 있다고...

     

     

     

     

    성 외부 부대 시설

    진시황릉의 내부구조를 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라고 할수 있다.

    관이 들어있는 매장실은 아직까지 발굴되지 않았기에, 현재 중국 고고학계가 주로 발굴, 조사하는 곳은 진시황릉을 넓게 둘러싸고 있는 외성과 내성 부분이다.  또한 무덤 동쪽에 있는 병마용 또한 워낙 그 규모가 방대하기에 이 유물들만을 조사하는 데에도 시간이 많이 걸린다고 한다. 병마용은 진시황을 사후세계에서도 지키기 위해 만들어졌고, 이 또한 아직까지 완전히 발굴되지 못하였다.

    사마천 사기의 진시황 본기 편에 따르면 기원전 246년, 그가 13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을 때 진시황릉의 공사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다만 이처럼 산 하나를 통째로 쌓아 거대한 무덤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221년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고 난 후였다.

     

    시황제는 왕권과 왕조의 기틀을 공고히 하기 위해 자신의 능묘 건축,   만리장성 등에 대토목공사를 벌였다.

    이와 함께 초호화궁전 아방궁을 쌓도록 해 국고를 탕진하는 등 중대한 실책을 저질렀다. 막대한 권력욕에 취한 황제는 영생을 위해 불로초를 구해오라는 명을 내려 대신들을 곤혹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황제는 자신의 바람과는 달리 지방 순행 중 병고로 50세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생전 황제가 누린 부귀영화는 덧없는 일장춘몽으로 끝났지만, 능묘의 군대 병마용과 함께 여전히 사후세계를 호령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예전 서안의 모습이 모형으로 만들어져 있어서 한 눈에 볼 수 있었다.

     

    세계의 역사를 바꾼 100명의 위인 중 한 명,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한 중국 최초의 황제 진시황 지하궁전을 관광한다.

    능묘는 37년이 걸려 완공되었는데, 무덤의 둘레가 6㎞, 높이는 40m에 달한다. 무덤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야산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진시황이 무덤을 설계할 때, 훗날 도굴을 방지하기 위해 수은 등을 이용한 여러 가지 함정들을 설치해 두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 비밀을 풀 수 없어, 입장료를 내고 들어간다고 해도 내부는 볼 수가 없다.

    묘실 배수로 지금도 완벽 가동이어 탐사대원들이 뤄양삽을 동원한 전통적인 발굴방법을 이용해 그동안 첨단과학기술의 측정으로 얻어낸 잠정 결론을 실제 확인하는 작업에 들어가 지하궁전의 위치를 확인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동안 이룬 탐사 성과는 진시황의 유해를 안치한 지하궁전이 진시황릉 봉토 지하 35m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또 지하궁전의 묘실이 동서 170m, 남북 145m의 직사각형으로 축구장의 1.5배 크기의 중국 최대의 묘실임이 드러났다. 이밖에 담장이 지하궁전을 둘러싸고 있다는 사실도 새로 확인했다.   묘실을 담장이 둘러싸고 있는 것은 중국 역사상 처음 보는 것이다.

     

    황릉 지표면의 수은 함량을 조사한 결과 정상보다 20~30배 많음을 확인했다. 사기가 기술한 "수은으로 백천(百川) 강하(江河) 대하(大河)를 만들고 그 수은을 흐르게 했다"는 내용이 사실임이 확인된 것이다. 묘실이 물에 잠기지 않고 완벽하게 보존돼 있는 것은 묘실에 만든 배수로가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완벽하게 가동되고 있기 때문이다.

     

     

     

     

     2층으로 올라가면 진시황 지하릉 벽화가 있다....   이렇게 마을 젊은이들을 끌고가서 부려먹었다. 

     

     

     

     

     

     

     

     만리장성 건설을 지휘하는 몽염 장군

     

     

     

     

    만리장성 건설에 강제 동원된 백성들 ~

     

     

     

     

    이때 지어진 만리장성은 토성(土城)이라는 점 ~

     

     

     

     

    진시황 아들 호해와 몽염 장군

     

     

     

     

    지하궁전은 죽은 자를 위한 산자의 희생 38년 엄청 오래동안 지었다고...

     

     

     

     

    지하궁전을 쌓을 때 일하는 백성들 ~

     

     

     

     

     

     

     

     

     

     

    벽에는 병마용을 만드는 과정이 그려져 있다.   병마용 제작 과정을 보면 환기를 위해 몸통과 머리를 따로 만들었다고 한다.   몸통 제작 과정 ~

     

     

     

     

     머리 제작 과정

     

     

     

     

     

     

     

    병마용갱을 만들던 모습도 재현하고 있고, 만든 사람들의 이름도 다 새겨 놓았다고 한다.

     

     

     

     

    축소판이라고 하지만 아직까지 진시황릉이 발굴 안 된 상태에서전국에서 모인 70만 명의 노동자들은 황제가 죽을 때까지 거대한 고분 안에 지하도시를 건설하기 위해 쉬지 않고 일했다.   그곳은 궁전과 제국, 세계의 진정한 비례 모형이었다.   무덤 도굴꾼들을 막기 위해 고안된 자동발사 무기가 무덤의 보물들을 지켰다.   진시황이 죽은 후, 지하 무덤과 관련된 주요 건축가들은 비밀 유출을 우려한 다음 왕의 명령에 따라 감금당했다.

     

     

     

     

     

     

     

     

     

    당시 주변 6국의 생활 모습

     

     

     

     

     

     

     

     

     

     

     

     

     

     

     

     

     

     

     

     

     

     

    진시황능의 내부구조이다.

    문헌 그대로 천정은 천제를 본 따서 일, 성, 월. 진을 만들었고 지면에는 진시황제가 통일하였던 지역을 표시하였으며 중간에 진시황제의 금관과 부장품 및 순장시킨 궁녀들을 재현시켰다고 한다.

    축소판이라고 하지만 아직까지 진시황릉이 발굴 안 된 상태에서  진시황릉의 내부구조를 볼수 있는 유일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지면에는 진시황제가 통일하였던 지역을 표시하였으며 중간에 진시황제의 금관과 부장품 및 순장시킨 궁녀들을 재현시켰다고 한다. 관을 둘러싸고있는 아방궁과 주변에 흐르는 수은 강 ~

     

     

     

     

     

     

     

     

     

    진시황은 내세를 믿고 불멸을 꿈꾼 인물로도 유명하다. 그는 자신이 세상을 떠난 후 사후세계로 이동한다고 믿고, 즉위 초부터 남북 515m, 높이 약 76m에 달하는 거대한 무덤을 짓기 시작했다.

     

    진시황릉의 내부에 수은으로 만든 강과 바다가 있고, 천상을 모방한 지하궁전이 존재한다고 전하고 있으나, 아직까지 실제로 발굴되지는 않고 있다.

    198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병마용은 세계 최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히는 동시에, 진시황릉이 가진 가치의 ‘빙산의 일각’이라는 기대가 있을 정도다.   2009~2022년 진행된 1호갱 발굴에서도 수백 개의 병마용이 발굴됐다.

    중국 당국은 진시황릉의 학술적‧유물적 가치가 상당하다고 보고, 발굴과 공개에 신중을 기하고 있다.   후세에 물려주기 위해 진시황릉의 완전한 발굴은 하지 않겠다고 밝혔지만, 전 세계의 중국학자와 아시아 역사학자들은 진나라 시대의 유물이 온전히 매장되어 있을 것으로 보이는 진시황릉에 대해 갈수록 뜨거운 호기심을 보내고 있다.

     

     

     

     

     

     

     

    진시황이 묻힌 봉분은 도성 건축을 모방한 내성과 외성이 둘러 있고 그 주변에 산재한 수백 개의 배장갱(培藏坑ㆍ무덤에 딸린 구덩이)과 배장묘가 능원을 형성하고 있다.

     

    우주를 상징하는 이 지하궁전에는 수은을 채운 강과 바다가 있고 온갖 귀중한 보물이 가득하다고 한다.   파 보자는 얘기는 반세기 전부터 있었다.   최근 들어 중국 서부 내륙 개발과 관광 붐을 타고 다시 발굴론이 나오고 있지만, 중국은 지하궁전을 건드리지 않고 있다.   유물 훼손 없이 발굴하기에는 아직 기술과 전문 인력이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해 후세의 몫으로 남겼다.

     

     

     

     

     

     

     

     

     

     

     

     

     

     

     

     

     

     

     

     

     

     

     지하궁전은 어차피 모형인데 너무 어두웠다.

     

     

     

     

    진시황이 타던 4두 마차

     

     

     

     

    진시황제 초상화

    진시황, 그는 누구인가?

     

    진시황은 전국시대 7웅 중 하나인 진(秦)나라 사람이다.  그는 왕족으로 성이 영(?)이고 이름이 정(政)이다. 그러나 그는 진나라가 아니고 조(趙)나라 수도 한단(邯鄲)에서 기원전 259년 태어났다.  그것은 영정의 아버지 영자초(기원전 281~247)가 외교적 볼모로 한단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당시 영자초는 진소양왕(秦昭襄王)의 손자로 왕이 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이때 영자초는 한단에서 크게 장사를 하는 여불위(呂不韋)를 만난다.

    여불위는 영자초의 사람됨을 보고는, 그를 도우면 진나라의 왕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는 자신의 애첩인 조희(趙姬)를 영자초에게 바치고, 경제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여불위는 영자초와 함께 진나라로 돌아가게 되었고, 자초의 아버지인 안국군(安國君)을 소양왕의 정비인 화양부인(華陽夫人)의 양자로 삼아 태자를 만든다. 안국군은 기원전 250년 52세의 나이로 효문왕(孝文王)에 등극한다. 그는 자초를 태자로 임명하고, 왕이 된지 단 3일 만에 세상을 떠난다. 

     

    드디어 자초는 장양왕(莊襄王)으로 등극한다. 그러나 그도 역시 3년 후인 기원전 247년 세상을 떠난다. 그러므로 영정이 13세의 나이로 진나라 왕이 된다.   처음에 그는 여불위를 재상으로 삼고 조태후의 총애를 받는 노독의 도움을 받아 국정을 운영한다.  그러나 22살이 되면서 친정을 펴고, 이사(李斯), 위료 등을 중용한다.  그리고 법치주의와 중농주의 정책을 시행했다.

    이를 통해 국력을 강화한 진시황은 기원전 230년부터 통일대업을 이루기 위한 정책을 실시한다.  군사적으로 원교근공,  분심이간, 각개격파 전술을 사용하면서 한(韓), 조(趙), 연(燕), 위(魏), 초(楚), 제(齊)의 6개 나라를 차례로 멸망시킨다.  그는 기원전 221년 통일대업을 이룩하고 진이라는 제국을 건설한다.   그리고 봉건제도를 타파하고, 중앙집권제인 군현제(郡縣制)를 시행했으며, 자신을 황제라 칭한다.

     

    그는 중국 전체를 36개 군으로 나누고, 그 아래 현, 향(鄕), 정(亭), 리(里)를 설치했다. 중앙 정부는 3공 9경 제도를 채택해 국정은 승상이, 군무는 태위가, 감찰은 어사대부가 맡아하도록 했다.   9경은 궁중 사무를 맡아보는 자리로 낭중령(?中令), 봉상(奉常) 등 9개 직책이 있었다.   그리고 법률을 국가통치의 중요수단으로 삼는 법치주의를 채택했다.

    진시황은 또한 도량형,  문자,  화폐 세 가지를 통일, 중국을 진정한 통일국가로 만들었다. 그는 중농주의를 채택해 황하에 관개시설을 설치하고, 농지를 개간하도록 했다.   그는 도로를 정비해 전국을 순방했으며, 이를 통해 교통과 통신의 획기적 발전을 가능케 했다.   그는 또한 몽염(蒙恬) 장군을 북방에 파견해 흉노를 물리치고 만리장성을 축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만리장성 건설이라는 대규모 토목사업이 민심을 이반하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더욱이 그는 함양궁, 장락궁, 아방궁 등을 지으며 국고를 낭비했고, 자신이 사후 들어갈 여산릉을 짓는 데 너무나 많은 사람을 동원했다.   그는 또한 법치주의라는 이름으로 유가를 탄압해 분서갱유라는 전대미문의 사건을 만들기도 했다.  가혹한 정치, 도를 넘는 인력 동원과 경제적인 착취, 진시황 사후 왕위 계승의 잘못 등으로 인해, 진나라는 그가 죽은 지 3년 만에 망하고 말았다.

     

     

     

     

     

    진시황릉은  리산 남쪽 기슭에 위치하며 화청지의 동쪽이다.

    진시황릉의 내부가 아직 개발되지 않아 이를 여러 가지 자료들을 모아 추측으로 만든 전시관인  진시황릉 지하궁전을 나와 다음 여행지 2,000여 년간 황제를 지킨 지하 군대로 세계 8대 불가사의로 꼽히는 병마용갱으로 향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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