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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천시 임고면의 선원동 철조여래좌상과 선정사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 환구길 144, 영천시 임고면 선원리 770)
    사찰여행/경상도 2020. 5. 15. 15:20

    영천시 임고면의 선원동 철조여래좌상(보물 513호)과 선정사


     

    2020.   5.   15.

     

     

    2020.  5.  12.  오늘은 나홀로 여행으로 집에서  08:00에 일찍 출발하여 영천시 금호읍과 임고면 지구를 중심으로 탐방한다..

     

    영천시 금호읍 오계리의 금산당과 만취당, 보물 465호인 신월리 삼층석탑이 있는 신흥사,  철조 여래 좌상(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425)이 있는 죽림사, 영천시 임고면의 보물 513호인 선원동 철조여래좌상과 선정사,  경상북도 민속자료 87호인 환구 세덕사와 산수경치 빼어난 영천의 무릉도원 선원마을을 두루 돌아보며 길 위에서 보낸  행복한 하루였다.....

     

    오늘 다섯번째 여행지 일정은  철조여래좌상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425)이 있는 영천 죽림사에서 나와 영천시 임고면의 보물 513호인 선원동 철조여래좌상과 선정사를 향해 다시 길을 달린다...

     





    대환교를 건너면 '마을 뒷산의 언덕이 고리모양으로 마을을 감고 있다'하여 '환고'라고도 불리는 임고면 선원2리인 대환마을이 나온다.

    임고는 영천의 동북쪽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 일대는 포은 정몽주로부터 비롯된 영일 정씨 후손들이 많이 주거하고 있다,








    동쪽은 언덕 위 선원마을과 접하고 북쪽은 학산이 우뚝 솟아 있으며 서쪽은 천길 언덕인 나비등과 그 밑에 지금도 큰비가 오면 물귀신이 나타나 사람들을 괴롭힌다는 전설이 깃든 고래소, 등 너머에는 아죽곡이라는 긴 골짜기가 길게 펼쳐져 있다.

     

    남쪽은 고양들이 넓게 펴져 이 마을 곡창지와 생명선을 이루며 들을 끼고 유유히 흐르는 자호천은 강류가 큰 들을 다 삼키고 산기슭에 이르러 비운을 겪었던 과거와 달리 잘 정리되어 연중 맑은 물줄기를 이룬다.

     

    복숭아와 딸기농사가 유명한 이 마을에는 산기슭에 철불좌상이 도사리고 앉아 고양들을 굽어보고 있다. 고려시대(추측), 이 마을에는 굉귀사라는 화려하고 웅대한 고찰이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사찰은 불타버리고 주인 없는  철불좌상만 길가에 버려진 채로 수백 년이 흐르면서 불상의 왼쪽 손목이 절단되어 없어지고 다시 오른쪽 팔뚝이 잘리는 등 비운이 잇따랐다고 한다.

     

    그러던 중 1860년경 이 마을에 살던 정진수라는 사람의 꿈에 부처님이 나타나 나는 이 근처에 있는 부처인데 머리가 차가와 견딜 수가 없으니바라건대 눈비만 피할 정도로 신경을 써준다면 그대의 은공을 갚겠노라!” 하기에 그 장소에 가보았더니 정말 부처의 머리가 노출되어 있었다.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리고 주위를 깨끗이 정리한 뒤 작은 오두막을 지어 눈비에 맞지 않도록 했고 그 후 부처의 은덕으로 8대독자로 내려오던 이 집안에 손자 4형제를 얻었으며, 또한 가난했던 살림이 점점 늘어나게 되었다는 전설이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마을길을 따라 가장 깊숙한 자리에 나말여초의 철불 한 구가 모셔져 있다.


    한옥의 건축들이 가득 들어 차 있길래 꽤나 절이 번창하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가까이 가 보니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활약한 호수 정세아 선생과 그의 아들 정세번을 모신 사우다.   환구 세덕사 불리는 이 건물군은 예전에 호수 정세아 선생을 모신 서원이었으나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건물 몇 동이 헐리고 충효각과 서고·고직사 등 부속 건물 약간이 남았다.

     




    그 건물들 뒤로 현재는 '선정사' 라는 조그마한 절이 세워지고 대웅전 한 채와 산신각. 요사가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에 철조여래좌상이 놓여 있다.   선정사라는 절은 철불을 모시기 위해서 세워진 절로 보인다.   유교의 건물군과 불교의 건물군이 어우러져 있는 모습이 참 묘한데 왠지 숨겨진 사연이 많을 것 같다

     

    아마도 나말여초에 세워졌던 절이 언제인지 모르게 폐사 되었고 조선 시대에 이르러 옛 절터에 서원이 들어서지 않았을까...

    절이 폐사된 뒤에도 절터 한 구석에 묻혀 있던 철불은 대원군의 철폐령 이후 서원이 헐리고 난 뒤에 제 자리를 찾아 간 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






    선정사는 절 표지석도 하나 없고 달랑 대웅전 편액 하나만 걸려 있도 모든 전각은 성도 이름도 없고 적막강산으로 아무도 없는 너무나 쓸쓸한 사찰이었다.  이 철불을 만나러 이곳에 들른 사람은 거의 없어 보인다.






    마당에 들어서며 좌측 당우로 공양간이 있는 요사인듯...








    마당에 들어서며 우측 당우로 역시 요사인듯...








    마당 입구 채전 옆으로 오래된듯한 우물도 보인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아담한 대웅전이다...





    대웅전 입구의 영천 선원동 철조여래좌상 안내판





    대웅전 앞에 석탑재가 하나 있는데 석탑 지붕돌이다지붕돌 아래면의 층급받침은 4단이다지붕돌 위에 뚜렷한 우동마루가 있다영천지역에서 백제계 석탑에서 볼 수 있는 우동마루가 있는 석탑지붕돌을 만나는 것은 뜻밖의 일이었다.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 선원리 선정사(仙定寺) 대웅전(大雄殿)에 봉안되어 있는 고려시대의 불상으로  선원동 철조여래좌상(보물 513)이다.





    마을의 가장 안쪽에는 절집 선정사가 있다.

    625사변이후 정연대라는 사람이 산신각을 시주했고 건축용 자재를 동민과 함께 주선하여 사방8자 크기 두간의 법당을 건립, 규모는 작지만 아담한 절을 지어 선정사라 했다가 다시 최근에 전각들을 불사한 것으로 보인다.


    원래 이 마을에는 고려시대 '굉귀사'라는 큰 절이 있었다고 한다그러나 임란으로 절집은 불타고 모시던 철불만이 남아 길가에 버려졌다 한다그리고 오랜 시간이 흐르는 동안 철불의 손이 사라졌고불신은 흙에 묻혔다. 철불이 언제 발견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1860년경 마을 사람들의 꿈에 나타나 출토되었다고도 하고광복 전 밭 갈던 농부가 찾았다는 말도 있다.   마을 사람들은 막연히 미륵불로 여겼다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사람들의 꿈에 철불이 나타난다. “나는 미륵이 아니라 석가이다천수(天水)를 피하게 해 달라.”  이후 초가를 지어 모셨고 현재 선원동 철불좌상은 보물 제513호로 지정되어 선정사 대웅전에 모셔져 있다.







    선원동 철불선원 철조여래좌상은 높이 151, 48인 견실한 철불좌상이며, 모양은 비교적 완전한 편이지만 양손은 결실되었고 주조 후에 때운 흔적이 곳곳에 있을 뿐 대체로 완전한 편이다.









    높직한 육계에 중앙계주가 뚜렷한 나발의 머리모양, 얼굴면적에 비해 눈꼬리가 올라간 긴 눈작은 코와 입, 짧고 융기된 인중을 나타낸 굳은 얼굴표정은 이 시대의 특징을 잘 말해주고 있다. 넓은 어깨, 발달된 가슴, 잘쑥한 허리 등 몸의 굴곡이 표현된 건장한 신체로 앞 시대의 불상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가늘어진 팔, 양감이 줄어든 다리는 다소 어색한 느낌을 준다.









    안정된 신체에 얇은 우견편단의 법의가 간략한 옷주름을 형성하여 몸에 밀착되어 흐르고 있다이 불상은 고려전기의 양식을 대변해주고 있는 우수한 철불상으로 크게 주목받고 있다고 한다.








    나말 여초에 걸쳐 국내 정치의 혼란과 왜와의 관계 단절로 동 수요가 부족하게 되고 그에 따라 철로 만든 철불이 유행하는데 대표적인 사례로 광주 춘궁리 철불과 남원 실상사 철조여래좌상이 있다.  이러한 시대적 특성으로 이 시기 주조된 철불들에는 통일신라의 이상적인 아름다움과 고려시대의 개성적·향토적 서정이 동시에 나타나는데 선원동 철조여래좌상도 그러한 흐름을 잘 대변하는 작품이다.


    전반적으로 안정감 있는 신체의 비례와 양감 있는 체구는 통일신라의 불상양식을 잘 계승하고 있고 다소 경직된 얼굴 표현과 형식화된 법의·간략해진 신체 표현에서는 고려 초기의 불상양식을 동시에 읽을 수 있다.

    통일 신라 중대에 유행했던 자비롭고 인자한 표정의 부처는 나말여초의 혼란상을 지나면서 무뚝뚝해지고 날카로운 인상으로 변해간다. 





    천년 전 한 때의 영화 이후 오랜 세월의 풍상과 굴곡을 혼자서 쓸쓸히 견뎌온 불상의 내력을 왠지 마음으로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외로움과 쓸쓸함을 견뎌야 하는 건 오직 인간에게만 주어진 화두가 아닐런지도 모르겠다.   불상은 그렇게 또 오랜 시간을 쓸쓸하지만 홀로 잘 버텨갈 것 같다.






    이 불상은 예천 한천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과 함께 경주 인근에서 조성된 철불로서 중요한 의의가 있고, 또한 신라의 전성기 양식을 토대로 고려 전기에 제작된 복고양식의 대표적인 불상이라는 점에서 크게 주목된다.





    불상뒤로는 후불탱화 같은것은 없고 기와에 그린 그림들로 채워져 있었다.





    불단 우측 벽의 신중탱화





    불단 좌측 벽의 영가단





    법당의 소종





    대웅전 앞에서 내려다본 선정사 전경





    대웅전 왼쪽 뒤로 삼성각인듯한 전각이 이름표도 없이 서 있다...






    전각 내부의 산신탱과 칠성탱









    삼성각인듯한 전각을 지나 좌측으로 오르면...





    역시 이름표가 없는 전각인데 선방인듯 ~





    전각안의 관세음보살님





    전각 안의 풍경이다.








    선방 앞에서 내려다본 선정사 전경이다.





    다시 절 마당으로 내려와




     

    '선정사' 앞의  예전에 호수 정세아 선생을 모신 서원이었으나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건물 몇 동이 헐리고 충효각과 서고·고직사 등 부속 건물 약간이 남아 있는  '환구 세덕사' 불리는 건물로 향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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