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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함안 벽송사 ( 함양군 마천면 광점길 27-177,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259 )
    사찰여행/경상도 2020. 1. 1. 11:31

    함안 벽송사(碧松寺)

     

     

    2020.   1.   1.

     

     

    2019.  12.    29.  '달마야 놀자' 108순례팀 회원과 함께  전라북도 남원의 사찰인 실상사의 부속암자 백장암과 실상사,  그리고 경남 함안군의 벽송사와 사암정사를 두루 둘러보며 부처님 법향에 젖어 보는 순례길이었다  ........ 

     

    오늘 그 세번째 순례지는 경상남도 함양의 사찰인 벽송사 이다...

     





    경남  함양군에서 마천면 지나 추성리쪽으로 쭉쭉 가다가 산 오르막을 조금 오르다보면 이렇게 서암정사와 벽송사의 함께 쓰는 주차장  겸 휴게소가 나온다.   주차장에는 간단하게 먹을 것을 파는 매점도 있다.  벽송사 & 서암정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가파른 길을 올라본다.





    추성리 칠선계곡 들머리에서 왼편으로 벽송사와 서암정사로 향하는 표지판이 나온다.    왼쪽으로는 서암정사 가는 길이고 오른쪽으로는 벽송사 가는 길이다. 











    주차장 바로 위에 갈림길이 있다.  오른쪽으로 가면 벽송사로 가는 길이고 서암정사는 왼쪽으로 가면 된다. 예전에는 벽송사 가는 길이 비포장길이었다. 지금은 절 입구까지 시멘트로 포장이 되어 있어 졍겨움은 덜하다.





    벽송사 가면서 내려오다 본 칠선계곡





    오르는 길목에 복제해 놓은 '금호장군'과 '호법대신’을 지난다.   벽송사엔 일주문도 천왕문도 없다.  대신 2개의 목장승이 절 길목에 서 있다.








    지리산 칠선계곡은 험하기로 유명하지만, 이 곳 계곡의 아름다움은 지리산에서도 으뜸이다.   일곱 개의 폭포가 연달아 있는 이 계곡은 가을 단풍이 들면 가히 선경이다.   이 빼어난 산속의 제법 넓직한 터에 벽송사가 있다.





    지리산(智異山) 벽송사(碧松寺)  전경,  절 뒤편으로 편안하게 늘어선 능선이 여유롭다.  터가 좋다.


    원통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건물이 한 채씩 있고높은 자리에 위치한 종루와 뒤쪽으로는 아담한 산신각이 있는 조용한 절이다.


    벽송사를 흔히 '한국선불교 최고의 종가'라고 한다.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수행하여 도를 깨달았으며 아울러 선교를 겸수한 대종장들을 108명이나 배출한 명실상부한 '조선 선불교  최고의 종가'를 이루었다.

    옛 사람들이 벽송사를 '운거천상(雲居天上) 구름 위 하늘 세계별유천지(別有天地) 인간 세상 밖에 따로 있는'라고 표현했듯이 벽송사는 수려한 풍광 속에 위치하고 있다.

     

    벽송사(碧松寺)는 갈고리 모양으로 굽은 산맥의 안쪽에 안긴 형세로서 예로부터 "청학포란형(靑鶴抱卵形-푸른 학이 알을 품고 있는 것과 같다)'이라 부르기도 하고. ‘연꽃이 활짝 핀 모양새와도 같다며 부용만개형(芙蓉滿開形)이라 부르는 첩첩산중 안에 박힌 절집이다

     

    이 절은 사적기 등의 자료가 없어 언제 누가 창건했는지에 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장원급제로 장군이 되어 전장에 나섰던 송지암, 그는 죽고 죽이는 전쟁터에서 인생무상을 느껴 출가수행을 결심하고 명산대천을 찾아다니며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도하던 중지엄의 나이 57세가 되던 해에 지리산에서 법계정심대사를 만나 깨달음을 얻고 계를 받아 벽송대사로 새로 태어나서 벽송사를 창건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뒷쪽 옛절터에 있는 삼층석탑으로 미루어 볼 때 벽송사는 신라 말이나 고려 초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 중종 때 벽송 지엄선사가 중건을 하고 그의 이름을 따 벽송사가 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벽송사는 스님들의 수행처로 많이 이용되었으며 일명 백팔조사 행화도량(百八祖師 行化道場)’으로 벽송지엄(碧松智嚴, 1464~1534) 선사 이후 지금까지 청허 휴정, 환성 지안 등 108명의 조사가 배출돼 수행과 전법에 몸담은 사찰이란 뜻이며 앞으로 깨달음에 이를 사람이 아직도 892명이나 남았다는 것이다.

    가히 한국 선()의 조정(祖庭)으로 받드는 까닭을 알 만하다.

     

    벽송사 선방에서 도인이 너무 많이 나와서 선방 문고리만 잡아도 성불한다는 말이 여기서 생겨났다고 한다.





    사찰 중심 가운데에 여느 사찰이라면 대웅전(大雄殿)이 서 있어야 할 자리에 대웅전에 버금가는 모습의 벽송선원(碧松禪院)이 있다. 또한 벽송선원의 좌측에는 간월루(看月樓)가 우측에는 종무소가 있다.





    지리산(智異山) 벽송사(碧松寺) 주차장에서 중앙 방향으로 들어가면 좌측에 안국당이, 우측에 청허당이 있다.


    우측의 벽송사 청허당(선원), 청허당은 청허유정 '서산대사'를 기리는 뜻에서 붙여진 당호라고 한다벽송선원 넓은 마당 양편에는 승방요사인 '안국당'과 선원 '청허당'이 쌍둥이처럼 서 있다이곳은 원래 벽송사 텃밭(감자밭)이었다고 한다.


    청허당은 벽송사 선원의 살림이 매우 곤궁해서 공양 굶기가 일상사이던 시절에 있던 체소 밭으로써 그 동안 수좌들의 수행 중 많은 식량에 조금이라도 보템이 됐던 곳이었으나 서울 안국선원에서 신도님들께서 많은 불사를 하시어 대선방을 대대적으로 중창하시게 되었다. 지금은 청허당 대선원의 수좌들이 거쳐할 수 있는 공간으로 넓고 깨끗하며 고요한 곳으로 예로부터 벽송사 선방의 문고리만 잡아도 성불할 수 있다는 전설이 서린 곳이라고 한다.





    벽송사 '안국당'  승방요사, 안국당은 안국선원 선원장 수불스님께서 도움을 주셔서 지은 것이라고...  안국당은  선방이라기 보다는 수좌들의 숙소로 쓰이는 곳이라고 한다.





    벽송사 방장선원(方丈禪院), 아무런 방해도 받을 수 없는 적막한...   너무 조용하다...   발걸음을 옮기는데 가슴이 조린다.    찰칵하는 셔터소리에 심장이 뛴다... 이곳은 조계종 선상 종가이다.


    벽송선원 주련

     

    靈光獨露逈脫根塵(영광독로형탈근진)   신령스런 빛 홀로 드러나 근진을 멀리 털어내고

               體露眞相不拘文字(체로진상불구문자)   본체가 드러난 참모습은 문자에 구애받지 않네

               眞性無染本自圓成(진성무염본자원성)   참된 성품 물들지 않아 절로 원만하게 이루어지며

     

               但離妄緣卽如如佛(단리망연즉여여불)   망령된 연을 여의면 그대로 여여한 부처라네

               高嶽峨嶺智人居處(고악아령지인거처)   높고 험준한 산은 지혜로운 이의 거처요

               碧松深谷行者所棲(벽송심곡행자소서)  푸른 소나무 우거진 깊은 골은 수행자가 머무를 처소로다








    벽송선원 내   부처님 뒤에 후불탱화 대신 '반야심경' 액자가 눈에 띈다.





    석가모니 한분만 계셔 사랑방을 느끼게 해줬다.














    2층의 간월루(看月樓), 단청조차 하지 않은 전각은  뽀얀 기둥과 서까래의 나뭇결들이 나신처럼 그대로 드러나 있다.   간월루 좌측은 지대방




     

    벽송사 '종무소'




     

    벽송선원(碧松禪院) 뒤쪽에 원통전(圓通殿)과 산신각이 커다란 소나무(장군송 과 미인송) 가기 전에 있다.




    원통전 소맷돌의 문양(물결 속에 피어오른 연꽃과 염주)













    벽송선원 뒤로 원통전과 산신각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원통전 주련

     

    正法明王觀世音 (정법명왕관세음)     정법명왕 여래이신 관세음 보살님.

                        寶陀山上琉璃界 (보타산상유리계)     보타산 위 맑은 세계 유리계에 계시면서

                        影入三途利有情 (영입삼도이유정)     그림자는 삼도에 가 모든 유정 보살피고

                        形分六道曾無息 (형분육도증무식)     모습은 육도 나퉈 일찍이 쉼없다네.




    원통전( 예전에는 보광전 편액을 달고 있었다)





    이곳에는 관세음보살이 모셔져 있는데, 대웅전(大雄殿)이 없는 대신에 원통전(圓通殿)이 법당 역할을 하고 있다.





    관세음보살을 중앙에 향 관세음보살 좌측에는 신중탱이 우측에는 지장탱이 모셔져 있다.








    법당 중심의 관세음보살








    원통전 뜰에서 바라본 장군송





    지리산(智異山) 벽송사(碧松寺)의 산신각(山神閣)이다.





    산신각(山神閣)은 한국 토속신앙이 불교화 되어 산신이나 호랑이를 모시는 곳이다.



    원통전과 산신각 뒷곁에는  쭉 뻗은 대나무로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원통전  옆에서 바라 본 벽송선원...





    원통전  옆에서 바라 본  종무소





    원통전  옆에서 바라 본 벽송선원과 간월루 그리고 지대방






    원통전 위쪽엔 1000년 묵은 소나무가 자라는데 도인송(道人松)이다나이에 걸맞은 굵고 반듯한 줄기에 잎들은 원뿔 모양으로 뭉쳤다.

    어느 노승이 들고 다니던 주장자를 땅에 심으며 500년 뒤 다시 돌아오겠다고 공언하고 열반했다. 그때 심은 주장자가 소나무로 승화하여 자라났으며 귀환하겠다는 시기는 아마도 1520년 무렵 도를 깨친 벽송지엄 선사가 사찰을 창건했다고 전하는 해라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법당에서 삼층석탑(미인송과 도인송) 가는 길의 오솔길,  그나마 이 짧은 오솔길이 있어 예전의  벽송사 가는 길의 호젓함을 상상해 볼 수 있으니 그나마 위안이 된다.





    도인송 송진채취를 위해 칼집을 낸 흔적





    도인송 옆에는 미인처럼 잘 생긴 미인송이 있는데 너무 크고 기울기가 심해서 미인송이 부러질 위기에 처해지자 받침대를 세워 놓았다.





    미인송과 도인송, 절의 이름은 벽송(碧松) 지엄대사가 중건하여 지어졌다고 하나,  벽송이라는 말이 이 두 그루의 소나무와도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다.










    삼층석탑 옆에있는 미인송(좌측)과 석탑 아래쪽에 있는 장군송(우측) 이다.

    앞쪽 굽은 소나무가 미인송 뒷쪽 바로 선 나무가 도인송이다.

    벽송사 선방 뒤 탑전 앞에 어떤 바람에도 미동하지 않을 것 같은 천년의 세월을 묵묵히 정자세로 수도하는 도인처럼 떡하니 서 있는 것이 있는 도인송(道人松)과 자세히 보니 호리호리하게 늘씬하게 요염한 자태로 비스듬히 왼쪽의 기울어져 누운 자세를 하고 있는 게 미인송(美人松)이다. 두 그루의 소나무가 절세미인의 모습과 의젓한 수도자의 형상으로 서 있다

    도인송의 기운을 받으면 건강을 이루고 한가지 소원이 이루어지며 미인송에 기원하면 미인이 된다는 말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같은 모습으로 법당 뒤쪽을 지키고 있는 미인송과 도인송.

    수령은 300년이며, 수고 35m, 둘레 1.2m로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45도 각도로 비스듬이 구부러진 미인송(美人松)은 환성지안 선사의 죽음과 사랑이 서린 나무다. 마치 미인송이 도인송을 보호하는 형국인데 넘어질 듯 하면서도 도인송이 비를 맞을까 불볕에 탈날까 감싸고 있는 듯하다.

    부용낭자는 남몰래 지안스님을 연모하던 여자였다. 스승이자 정인(情人)의 억울한 죽음을 접한 그녀는 천년학(千年鶴)이 되어 다시 돌아오겠다는 유언을 했다. 벽송사에서 스님의 정령을 수호하겠다는 서약이었다. 간혹 백로가 이 나무에 날아와 앉을 때면 부용낭자가 학이 되어 날아온 것으로 여기고 환대했다고 한다.

     







    송진채취를 위해 칼집을 낸 흔적,  미인송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또 다른 사연이 있다.   미인송은 송진을 채취하기 위하여 줄기를 긁어낸 부분에서 부터 휘어져 있다.  세계2차대전 시 일본군은 부족한 연료를 충당하기 위하여 우리나라 전역의 굵은 소나무에 칼집을 내고 소나무의 송진을 채취하였던 것이다. 이 미인송에도 그런 전쟁의 상처가 깊게 베어있는 것이다.
















    삼층석탑(보물 474호)


    원래는 대웅전의 동편에 있었으나 법당이 아래로 내려가고 탑만 남는 바람에 탑이 법당의 위에 있는 것처럼 되고 말았다.

    벽송사의 창건연대가 조선중종 15(1520)인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신라양식 탑이라는 점에서 매우 주목되는 작품이라는 해설이 있으나 이보다는 신라 말이나 고려 초에 세워진 절터에 벽송사가 중건된 것으로 보이며 석탑 역시 신라 또는 고려 초기 탑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

     

    일반적으로 법당 앞에 탑을 두는 것과 달리 탑을 절 뒤쪽의 언덕 위에 세우고 있어 조금은 특이한 구조로 보이나 원래는 주존불당이 탑이 서 있는 곳의 서편 빈터에 있었으나 절을 증 개축할 때 불당을 모두 탑이 있는 언덕 아래로 내려서 지었기 때문에 특이한 구조로 보일 뿐이다.

    석등의 좌대가 동쪽에 있어 서쪽에 본당이 있었음을 진작할 수 있다.

     










    석등의 대좌 (동쪽에서 본 모습)





    미인송과 도인송이 석탑을 모시고 있는 듯 하다.  부처를 모시는 불제자처럼....  이 곳은 한적하여 따스한 겨울 햇볕을 쪼이며 사색에 잠기기에 딱이었다.











    삼층석탑 뒤로무명의 승탑3기





    삼층석탑에서 바라 본 벽송사...  겨울날씨 답지않게 포근한 지리산 자락...





    석탑에서 바라보이는 지리산 자락의 아름다움은 높고, 푸 하늘과 더욱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간간히 들려오는 풍경소리...   어디선가 흘러 나오는 바스락거리는 산죽나무 빗대는 소리...





    지리산에는 산죽이 곳곳에 있다.  대나무 보다 키가 작은 산죽 숲은 한국전쟁 전후로 지리산 빨치산의 비밀 아지트로 주로 사용되었다.  겨울에도 푸르름을 간직하여 몸을 숨기기에는 이 보다 적당한 곳은 없으리라. 주로 빨치산 환자나 부상자의 비밀 아지트로 활용되었다고 한다.








     종무소 바로 옆에 있는 범종각











    오솔길에서 바라본 뒷모습의 청허당





    절  오솔길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지리산 공비토벌루트 입구라는 표식이 있다.

    여순반란사건 빨치산 잔당 200여 명이 지리산으로 입산하여 좌익 세력과 함께 제2 병단 지리산 유격대를 결성하였다. 이들 빨치산은 한국전쟁 당시 후방 교란을 목족으로 경찰서와 군부대를 습격하고 민가에 피해를 주는 등 그 폐해가 심했다.

    벽송사 근처에서는 수년간에 걸쳐 빨치산과 토벌대의 싸움이 벌어졌다. 싸움은 19538월 병단장이었던 이현상이 사살되고나서도 계속되었다.

    한국전쟁 당시에 인민군 야전병원으로 사용되었던 벽송사는 국군에 의해 전소가 되는 비극을 겪게 된다.

    한국근현대사의 아픈 과거이다. 최근 지리산 빨치산 출신들과 토벌군 출신들이 함양에서 만나 화해를 하는 장면을 텔레비젼에서 본 적이 있다.

    이들은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노무현 대통령에게도 남북화해를 촉구하는 공동서한을 써서 보내기도 하였다.

    지리산 구비구비마다 맺혀 있는 이러한 아픔들이 서로 용서되고 상처가 아물어지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벽송사 나무 장승(금호장군과 호법대장군)


    원래는 절 아래 입구에 서 있던 것을 보존상의 문제로 이 곳으로 옮겼다.

    왼쪽장승이 금호장군인데, 1969년 산불이 났을 때 머리 부분이 타 버려 참담한 꼴이 되어 버렸다.

    여장승인데 하필이면...  오른쪽 장승은 남장승으로 호법대장군이다.

    툭 튀어나온 눈과 뭉툭한 코, 입 아래 자세히 보면 수염이 있어 남장승임을 단박 알아차릴 수가 있다.

    재질은 밤나무이다.

     

    구전에 의하면 약 70년 전에 세운 것이라고 하는데, 목장승으로서는 시대가 오래되어 보기드문 모습이다.

     

    비록 눈· · 입이 과장되게 표현되긴 하였으나 무서우면서도 순박하고, 위풍 당당하면서도 익살스러운 장승의 모습을 잘 보여주며 질박한 조각수법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벽송사 입구에 세워진 이 장승은 사찰에 들어오는 악귀의 퇴치, 사찰 경내에서 행해지는 불법 어로와 사냥의 금지,  풍수지리상의 비보 역할 등 다양한 목적으로 세워졌다고 한다.  왼쪽의 왕방울 눈 하나만을 빼고는 원래의 모습을 상당 부분 잃어버린 ‘금호장군’ 과 오른쪽의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호법대신이 장승각 안쪽에 서 있다.








    벽송사(碧松寺) 목장승(木長承)의 설명문





    목장승(木長承) 옆의 석조물들....








    나무 장승 맞은 편 참나무의 옹이


    벽송사 일대는 판소리 여섯마당 중 외설적인 것으로 알려진 가루지기타령 '변강쇠가'의 무대이다.

    벽송사 부근에 살던 변강쇠와 웅녀는 성력(性力)을 타고 났다.

    하지만 어려서 글도 못 배웠지, 손재주도 없지,밑천도 한 푼도 없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밤낮으로 그 짓 뿐인 가난뱅이였다고 한다.

    하루는 나무를 하러 갔는데 그것도 안 하던 일이라 힘이 들어 궁여지책으로 길가에 있는 장승을 뽑아 땔감으로 써 버렸다.

    이에 격분한 팔도장승들이 통문을 돌리고 회의를 열여 변강쇠를 혼내준다는 내용이다.

    장승을 민중에 비유하고 변강쇠를 지배층으로 풍자한 민중문학으로 평을 받기도 한다.








    벽송사 내려오는 길목에는 유명한 고승들과 벽송사 주지스님들의 말씀들을 길가 나무에 걸어두어 오가는 행인들이 볼 수 있도록 해 놓았다.


    이렇게 몇년만에 다시와보는 벽송사를 구석구석 순례 후 다시 언제 와 볼수 잇을지 뒤돌아보며 벽송사를 나서 가까운곳에 자리한 사암정사로 발걸음을 옮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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