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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을의 합천 해인사
    사찰여행/경상도 2019. 11. 10. 12:04

    가을의 합천 해인사

     

     

    2019.   11.   10.

     

     

    2019.  11.    7.  라온제나테마여행 회원 36명과 함께  경상남도 합천군 해인사 소리길 트레킹 하며 들러본 해인사 ........ 

     

     

     

     

     

     

     

     

     


     
     해인사 소리길을 6.2km  걸어 드디어 해인사 성보박물관 입구 도착이다....

     

    해인사 성보박물관

     

    문화재 및 유물의 안전, 관리를 위해 뜻 깊은 스님들이 산중회의를 거쳐 1997년부터 해인사 성보박물관 공사를 진행해 2000년에 완공,  200275일 개관 이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해인사 성보박물관은 지하 1지상2층  총 1,028평의 건물로 실내 전시공간과 유물 수장고, 학예실세미나실, 대장경 인경 체험실, 괘불 전시실 등을 갖춘 종합적 성격의 사찰 박물관이다. 1층의 5개 전시실은 역사실불교조각실불교회화실, 불교공예실, 서화실로 구성되어 있다.   2층은 백남준선생의 고려대장경 비디오 아트와 대장경을 직접 찍어보는 인경체험을 접목하여 불교 문화유산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다.

     

    대장경홀

    해인사 대장경홀에는 폐업경과 초조대장경, 팔만대장경의 판본이 전시되어 대장경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장경각(대장경판전) 판가(板架) 모형을 통해 팔만대장경판이 보존되고 있는 현장을 느껴볼 수 있으며, 또한 해인사에 소장되어 왔던 경판 이외의 목판들이 전시되고 있는 목판전시실을 내려 볼 수 있다.

     

    역사실

    역사실은 창건 이후부터 현재까지 해인사의 역사를 보여주는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창건주인 순응, 이정 화상의 진영을 비롯해 중창의 역사를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해인사 중수기, 해인사를 대표하는 역대 고승들의 진영 및 관련 유물들을 통해 해인사의 장구한 역사를 이해할 수 있게 꾸며져 있다.

     

    불교조각실

    해인사 대장경홀에는 폐업경과 초조대장경, 팔만대장경의 판본이 전시되어 대장경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장경각(대장경판전) 판가(板架) 모형을 통해 팔만대장경판이 보존되고 있는 현장을 느껴볼 수 있으며또한 해인사에 소장되어 왔던 경판 이외의 목판들이 전시되고 있는 목판전시실을 내려 볼 수 있다.

     

    불교회화실

    불교회화실에는 팔상도 병풍, 33조사도 병풍, 심우도 병풍, 아미타극락회상도, 지장시왕도, 감로도, 신중도, 산신도 등 다양한 종류의 불화가 전시되어 있어 관람객에게 불화에 대한 관심과 이해를 돕고 있다.

     

    불교공예실

    불교공예실에는 홍치 4년명 범종(보물 제1253)을 비롯해 대표적인 공양구인 정병과 향로, 왕실에서 하사한 것으로 전해지는 칠보 촛대와 옥화 등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사찰에서 일상 생활에 사용하던 불교 공에의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여기서 해인사까지는 0.9km를 더 걸어야 팔만대장경을 만날 수 있다.

     

    허덕교에서 바라본 모습으로 수백년 됨직한 나무들과 어우러진 단풍길,   홍류동 계곡은 불그레한 물빛에 가슴이 저릿하다. 단풍이 계곡물에 불 붙었다.

     

     

     

     

     

     

     




    계수대를 통과한다.

     

    길을 따라 그 노란은행 잎의 행렬.   여느 은행잎과 같은 그런 잎이 아니다.   그곳 은행잎은유난히 크고 , 샛 노랗다.   어쩜 그리도 샛 노랗게 물들었을까?   길을 따라 은행잎과 단풍이 번갈아 그 색갈로 취하게 만든다..   빨강과 노란색의 대비.   헌데유난히도 샛 노란 은행잎이 많은거 같다.   줍기도 아까운 노란 은행잎이 길에 뒹구는 운치..   밟기도 아까운 그런 잎들이 발아래 뒹군다..

     

     

     

     

     

     



    바람이 일렁일 때마다 간신히 매달린 나뭇가지의 매마른 나뭇잎은 위태롭게 하늘거린다.   바람이 나뭇잎에 부딪치면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경쾌하다

     

     

     

     

     

     

     

     

     

     

     

     

     

     



    선재카페 입구에도 단풍이 한창이다...

    해인사의 가을 풍경.   이런 곳이 사철 어느때고 아름답지 않을까만......  가히 가을의 해인사는 어느 절도 따를수 없는 절경이리..

     

     

     

     

    해인사 소리길을 대장경 테마파크에서 6.7km를 걸어 해인사를 0.4km 앞둔 지점 도착이다...

     

     

     

     

    김 영환 장군이 안 계셨다면 팔만대장경도 모두 폭격 맞아 불 타고 없었다고 생각하니...   대장경을 지킨 빨간 마후라 김 영환 장군...

     

     

     

     

     

     

     

     

     

     

     



    하늘을 찌를 듯한 숲길을 따라 걸으면서....  저 멀리 숲에서 나는 새소리와 물 소리노란 눈 처럼 떨어지는 은행잎그런 길을 걸음 누구나 시인이 된다.   지금도 눈에 삼삼히 어린 그 아름다운 가을 길..  걸으면서 가을 시를 한 귀절 읊고 싶은 날이다.

     

     

     

     

     

     

     



    해인사 관광 안내소를 지난다...

    장엄한 해인총림의 선기(禪氣)는 우측에 봉안돼 있는 자운. 성철스님을 비롯 역대 고승들의 부도와 탑비에 아련하게 서려 있다.   한 시대를 치열하게 살다간 대덕스님들의 법력을 찬탄하는 듯,   울긋불긋한 단풍은 불꽃처럼 피어오른다.

     

     

     




    자운스님 사리탑과 비

     

    자운스님은 성철스님과 동 시대를 사신 대 율사이시다. 현 조계종의 각종 계율을 정리하는데 큰 역할을 하셨다한다. 즉 스님의 복식에서 부터 각종 의식과 전각의 배치에 이르기까지.......

    부처님의 가르침인 율장의 예에 따라 여법하게 해석하고 정리하셨다 한다. 팔각 원당형 기단 위에 원형 탑신으로, 옥개석과 상륜부 등이 아주 웅장하다.

     

     

     

     

     

     

     

     

     

     

     

     

     

     

     

     

     


     

     

     

     

     

     

     

     

     

    혜암대사 사리탑과 행적비

    성철스님 열반 후 다음번 종정이신 혜암스님이시다.조선시대에 유행한 종형 부도로 간결하면서도 위엄이 있다. 상하 기단에는 안상을 조각하고, 특히 상대기단에는 해태(사자?)를 배치하여 스님을 위호하도록 하였다.

     

     

     

     

     

     

     




    동곡당 일타스님 부도와 비

     

    일타스님은 일가족 41명이 출가한 것으로도 유명하지만 (출가 이야기는 책으로 한권을 써도 모자랄 판이니다)  글씨 면 글씨, 글 이면 글, 그림이면 그림 등 뭐 하나 모자란 것이 없었다 한다.  그 손재주가 수행에 방해된다 하여 손가락을 태우는 연비를 감행하셨다.

    법문하실 때의 그 낭랑하신 목소리는 지금 들어도 신심이 증장된다.

    검박하신 스님의 일상을 닮아 멋 없는 멋을 지닌 부도를 꾸몄다...

     

     

     

     

     

     

     

     

     

     

     

    영암대종사 부도탑과 탑비

     

     

     

     

     

     

     

     




    1998111일 세수 59세로 홀연히 열반에 든 동광당(東光堂) 명진(明振) 대화상.
    전북 정읍에서 태어난 명진 스님은 54년 계룡산 신원사로 출가한 뒤 57년부터 해인사에서 주석해왔다. 해인사 교무국장과 총무국장을 거쳐 82~84년 해인사 주지를 지내며 대규모 중창불사를 이뤄냈고 길상암과 함께 부산 사리암, 대구 청룡사, 의정부 삼은사 등을 창건하기도 했다.

     

     

     

     

     

     

     

     

     

     

     

    그리고 우측 맨 끝에는 아주 소박한 석종형 부도 2기도 있었다...

     

     

     




     

    그 유명하신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라고 말씀하신 퇴옹당 성철 스님 부도탑

     

    소중한 가르침, 무소유의 청빈한 삶, 장좌불와의 올곧은 수행정신으로 유명하신 성철큰스님의 부도탑이다.

     

     

     

     

     

     

     

     

     

     

     

     

     

     

     

     

     



     

     

     

     

     

     

     

     

     

     

     

     




     

    비석거리, 비림

     

    해인사 사적비를 비롯한 20여 기의 공덕비들이 일주문에 다다르기 전 길 옆에 안치되어 있다.

     

     

     

     

     

     

     

     

     

     

     

     

     

     

     

     

     

     

     

     

     

    해인사 사적비

     

     

     



     

    해인사 길상탑(보물 제1242)

     

    서기 약 900년경에 건립된 것으로 당시 오랜 전쟁으로 굶주린 병사들을 위해 해인사의 훈혁스님이 농촌에서 벼 한 다발씩을 덜어 군량미로 충당하고 나머지는 이 탑을 만들었다 한다.
    그래서 이 탑을 전몰병사와 호국안민을 위한 호국탑(護國塔)이라고 부른다.   높이 약 3m, 3층탑으로 전형적인 신라형 탑이다.

     

     

     

     

     

     

     

     

     

     

    사명대사비와 길상탑 그리고 해인사 사적비

     

     

     

     



    사명대사비(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45)

    홍제암 입구에 있는 이 비석은 임진왜란 당시 승군(僧軍)의 힘을 모았던 사명대사의 비석이다. 1738년에 세워진 것으로 일제강점기에 일본 경찰에게 파손되었던 것을 다시 복원하였다. 높이 약2m

     

    사명대사의 비문

    해인사의 일주문에서 200m 거리에 있는 홍제암은 사명대사가 입적한 곳으로 유명하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이곳에 은거하던 사명대사가 입적하자 광해군은 스님의 열반을 애도하며 자통홍제존자(慈統弘濟尊者)라는 익호를 내리고 이곳에 스님의 비를 세웠다.
    그 뒤로 스님의 익호를 따라 홍제암이라 하였고 비문은 홍길동전의 허균이 지은 것으로 대사의 행장이 소상하게 적혀 있어 사적값어치가 크다.

     

     

     

     

     

     

     

    가람 안내도

     

     

     

     


     

     

    원경왕사 비(보물제128)가 있다.

     

     

     

     

     

     

     

     

     

     

    고려중기의 명승 원경왕사의 탑비이다.   고려시대의 고승 원경왕사를 기리고자 인종3년에 세운비다.

     

     

     

     

     

     

     

     

     

     

     

     

     

     



    영지(影池)

     

    예전에는 아주 넓은 연못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근간에 만들어진 작은 못이 있을 뿐이다.

    전설에 의하면 해인사 전경이 이 연못에 비치었다고 전하며 그래서 못의 이름을 영지(影池)라고 했다고 한다.

     

     

     

     

     

     

     

     

    세계문화유산 표지석.. .   일주문  맞은편에 있다.

     

     






     


     

    홍류동 계곡이 다하고 이제 곧 해인사 일주문이다...

     

    해인사성보박물관에서 일주문까지 15분 정도를 걸었는데 시원한 계곡에서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울긋불긋 화려한 오색 단풍을 구경하니 너무 좋았다.  

     

     

     



     

    늦가을 해인사를 찾았다.   해인사는 통도사, 송광사와 더불어 한국의 3대 사찰로 불려질 만큼 이름있는 곳으로 한국 화엄종의 근본도량이자 우리 민족의 염원이 담긴 팔만대장경을 모신 사찰로 불교신자는 물론 일반 여행자들도 많이 찾는 곳이다.

     

     

     

     

     

     

    해인사 당간지주

     

    무심코 지날수 있는 석물속에 '나모아미타불'이란 글자가 선명하게 세겨진 석물 당간지주,  잘 생긴 석조물을 만나는 것은 가람을 찾는 또 다른 재미다.

    절집의 행사를 알리는 깃발(당)을 달던 간대를 세우던 기둥이다.  해인사 일주문 앞에 세워져 있는 이 지주는 불. 보살의 위신력과 공덕을 표시한 깃발을 매어 달기 위해 기둥을 세우는 곳이다.

     

     

     



     

    홍류동 10리길 끝에 자리잡은 해인총림 법보종찰 해인사.   고고한 수행가풍이 천년세월 면면히 이어져온 청정수행도량이다.

    신라 애장왕 3(서기 802) 순응. 이정 스님이 창건한 고찰이다.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인 장경판전과 세계기록유산 팔만대장경을 봉안하고 있는 법보종찰이다. 땅의 기운이 해동제일이며 깨달음의 산이란 뜻을 가진 가야산 700m고지에 위치한 한국불교의 상징이자 대표적인 불교성지다.

    사시사철 약 500여 명의 스님들이 참선수행과 불경 등을 수학하고 있는 해인사엔 16개의 산내암자가 있다.

     

     

     



     

    일주문

     

    큰 절에 들어설 때마다 처음 만나는 것이 일주문이다.

    절의 어귀에 서있는 제일문으로서 절의 위용을 느끼게 해주는 일주문은 모든 중생이 성불의 세계로 나아가는 길의 첫 관문을 상징한다.

    절의 어귀에 서있는 제일 문으로서 절의 위용을 한눈에 느끼게 해 주는 일주문은, 곧 모든 중생이 성불의 세계로 나아가는 길의 첫 관문을 상징하니 초발심을 나타낸다고 하겠다.
    일주문은 기둥이 양쪽에 하나씩 세워져 문을 지탱하고 있는 건축구조에서 그 이름이 비롯되었다. 해인사의 일주문은 홍하문이라고도 하며, 그 소박한 아름다움과 주위 경치와의 어우러짐이 일품인 까닭에 일주문 가운데에서도 가장 이름이 나 있다.
    신라시대에 절을 처음 세울 때부터 일주문은 지금의 자리에 있었겠지만, 조선시대 세조3년 봄에 중수하여 그 뒤로 지금까지 다섯차례에 걸쳐 중수하였다는 기록만이 전해 오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 건축 양식은 조선시대 초기의 양식인 듯하다마지막 중건은 1940년에 있었다.

     

     



     

    상쾌한 바람에 발걸음은 가볍고 정신까지 맑아진다. 오르막을 걸어도 바람에 실려 나가듯 가벼운 몸 상태가 느껴지니 힘든줄 모르고 오른다. 해인사를 찾은 방문객들은 얼마 남지 않은 가을이 아쉬운 듯 연신 예쁜 단풍 사진을 찍으며 나름대로 가을을 즐기고 있다. 오르면 오를수록 숲속은 단풍의 찬란한 빛으로 오감을 즐겁게 한다

     

     

     



     

    해인사는 한국의 고가람 가운데에서 가람의 배치가 두드러지게 아름다운 사찰이다.

    일주문에서 시작하여 법보전까지 일직선을 그리며 놓인 문과 집들을 가운데에 놓고 그 양쪽으로 당우들이 들어섰는데 , 다른 사찰에서 찾아볼수 없는 정형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일주문 정면에 있는 현판의 글씨 '가야산 해인사'는 근대 서가의 대가인 해강 김규진의 글씨로서 산문의 격을 한층 더 높여 준다.

     

     

     

     



    안에서 본 해인사 일주문.. . "해동제일도량"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차례대로 봉황문, 해탈문, 구광루, 대적광전, 경판전, 법보전이 일직선상으로 이어진다. 일주문 저 안으로 정면에는 해인사 사격을 나타내는 "해인총림"이란 현판이 붙은 문이 보인다.

     

    봉황문

     

    일주문으로 들어서서, 수문장처럼 버티어 서 있는 전나무숲이 웅장하게 우거져 천년고찰임을 말하고 있다.천년 노목의 가로수를 따라 그 정취에 취해 걷다 보면 두번째 문인 봉황문이 나타난다.

    이 봉황문은 천왕문이라고도 불린다.

     

     

     




     

    햇볕은 높디 높은 가야산 봉우리에 부딪쳐 이곳 해인사까지 부서져 내려 왔다. 

     

     

     

     

     

    봉황문이다. 두번째 문이다. 밖에는 해인총림, 안에는 봉황문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봉황문은 정면3칸, 측면2칸에 5량구조의 맞배집이다.

     

     

     

     

     

     



     

    해인사 고사목

     

    신라 애장왕3년 순옹과 이정 두 스님의 기도로 애장왕후 난치병이 완치되자 왕이 이 은덕에 감사하여 두 스님이 수행했던 자리에 해인사를 창건하게 하였는데, 이때 이를 기념하여 식수한 나무라고 한다.

    이 느티나무는 1200년의 장구한 세월 동안 해인사와 더불어 오다가 1945년 수령을 다해 고사하고 지금은 등치만 남아 있다.   해인사에 장구한 역사를 말해준다.

     

     

     

     

     

     

     




    해인사의 제2문. 1985년 11월 14일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154호로 지정되었다.

    창건연대는 알 수 없고 조선시대인 1717년(순조 17)에 중수하였고, 1761년에 재건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1817년 화재로 전소됨에 따라 1821년에 중건하였다.

     

     

     

     



     

    해인총림(海印叢林)

     

    지금 소개하는 것은 환경 스님의 글은 아니다. 이 편액은 환경 스님과의 인연으로 해인사 봉황문에 걸려있다유당 정현복 선생의 글씨이다. 

     

    해방 후 1946년 주지로 임명된 환경 스님은 왜색화된 불교에서 벗어나는 길을 수행뿐이라는 것을 늘 강조하셨고 해인사의 수행가풍을 되살리고자 효봉 스님을 방장으로 모셔 한국불교 최초의 총림을 설치하였다.

     

    당시 서예 국전심사위원을 맡고 있었던 유당 정현복 선생에게 부탁하여 해인총림 편액을 쓰고 봉황문에 걸었다.   한국불교 최초의 총림이 이때 탄생하였으며 이후 6.25동란이 발발하여 총림은 흐지부지 되었다. 하지만 수행가풍을 바로 세우고자 했던 스님들의 노력은 1967년도에 결실을 맺어 성철 스님을 방장으로 모시고 현대적의미의 총림을 해인사에 세웠으며 1946년 수행가풍을 살리고자 내걸었던 해인총림 편액은 지금까지 이어져 봉황문(사천왕문)에 당당하게 내 걸려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종합수행도량으로 지금도 이어오고 있다.

     

     

     

     

     

    봉황문(천왕문)이다.   저 안으로 해탈문이 보인다.


    큰 절은 으레 천왕문이나 사천왕문 또는 금강문으로 불리는 문을 갖고 있기 마련인데, 이 안에는 돌이나 나무 등으로 조각되거나 탱화에 그려진 사천왕상이 모셔져 있는데 이곳 사천왕은 그림(탱화)으로 모셔져 있.


    사천왕은 본디 욕계 육천 가운데 사왕천에 머물면서 천상으로 들어오는 여러 착한 사람을 보호하는 선신으로 수미산의 동서남북에 위치하여 악한 것을 멸하고 불법을 옹호하려는 서원을 세웠으므로, 산문 입구에 봉안하여 수문역과 도량 수호역을 맡게 하였다. 이러한 신중들은 대부분 힌두교의 영향이며, 불교가 대중화하는 가운데 인도의 민간 신앙과 함께 접합될 때 생긴 사상이다.



     

     

     

     

     

     

     

     

    봉황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익공계 단층 맞배지붕으로 건평은 21평이다.

    1838년 탈색한 문수(文殊),  보현상(普賢像)과 함께 가야(伽倻), 제파(堤婆) 등 사위(四位) 탱화를 새로 조성하여 봉안하였고, 1932년 산청에 있는 화백 지송파(地松坡)가 동서 양 벽면에 사천왕 탱화를 조성하여 이듬해 점안(點眼)하였다.

     

     

     






    해동원종대가람 밑에 우측에 국사단이란 작은 건물

     

     

    국사단은 국사대신을 모신단으로서 국사대신은 도량이 위치한 산국을 관장하는 산신과 토지가람신을 가리킨다.

    가야산신인 정견모주는 하늘의 신 이비가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두었다.

    큰아들 아진아시왕은 대가야국을 ,작은 아들은 수로왕은 금관가야국을 각각 건굴하였다.

    국사대신은 인간세상을 손바닥 보듯이 한면서,신비스런 현풍을 떨쳐 해인사에 재앙을 없애고 복을 내린다.

    가람은 수호하는 신을 모셨기 때문에 도량 입구에 배치되어 있다.

     

     

     

     

     

    국사단에 모셔진 탱화

     

     

     



     

    국사전 앞의 소원지를 잔뜩 달고 있는 소원나무

     

     

     



     

    우화당,  해인사 첫번째 출입문인 봉황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보이는 것이 요사채인 우화당이다.

     

     

     

     



     

    사천왕문을 지나면서 잇따라 '해동원종대가람'이란 현판이 걸린 '불이문'으로 들어 선다.


    해탈문

     

    일주문과 봉황문을 지나면 해인사의 제 3문인 해탈문이 있다중문에 속하는 문으로써 일반 사찰의 불이문에 해당한다. 사찰에서 본전에 이르는 마지막 문이 불이문(不二門)이다.

     

     

     



     

    앞에는 "해동원종대가람", 안에는 "해탈문"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12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가야산 해인사는 팔만대장경을 품고 있는 법보종찰이다속세와 불교 세계를 구분하는 첫 번째 일주문에서 부터 두 번째 봉황문을 거쳐 세 번째 해탈문까지 걸어 올랐다.

     

    마치 영원히 떨어지지 않으려는듯 가파른 계단을 연인이 두손 꼭 잡고 오른다.   계단을 더 높이 오를수록 연인들의 두손은 힘이 더 들어간다.   잡을수 있고 잡아줄수 있는 손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고 소중한 인연인지 부처님은 지금 깨달음을 주고 계신다

     

    해인사는 산지가람이다.  즉 경사진 산비탈을 깍고 채워 세운 절이다.  그리하여 경사가 급하기도 하고 계단과 석축이 유난히 많다.

     

     

     

     

     

     

    진리는 둘이 아니며 진정한 불이(不二)는 모든 번뇌를 벗어나 참된 해탈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라 하여  불이문을 해탈문이라고도 하는데 이곳 해인사 불이문에도 내부에는 '해탈문(解脫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해탈문을 지나면 완전한 불법의 세계는 주·,   세간과 출세간선과 악옳고 그름나고 죽음 등 대립하는 상대적인 것들을 초탈한 불이법문의 세계로써 삼존불을 모신 건물 앞으로 나아감을 뜻한다.
    일주문에서 해탈문에 들어설 때 까지 33계단을 거치는데, 도리천 곧 33천의 궁을 상징한다.

     

    해동원종대가람 입구에 들어서면 구광루가 웅장하게 보이면서 넓은 마당이 관람객을 편하게 한다.

     

    해탈문을 들어서자 너른 마당이 나온다.

    그러나 대웅전은 보이지 않고 전면에 "九光樓"라는 2층 전각이 있다.

    구광루는 흔히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는 뜻의 "보제루" 또는 "만세루"라 부르는, 법회때 승려나 신도들의 집회 강당으로 쓰여지는 건물로 보통 누각으로 지어지나 누각의 기능을 없애고 경내 마당으로 들어가는 통로로 건물 좌,우에 계단과 작은 문을 만들었다.

    불교용품점, 박물관, 창고로 쓰이는 이곳은 잘못 지어진 건물로 혹평이나 있다.

     

     

     

     


     

    해인사 구광루(九光樓) 영역


    해인사를 찾은 사람들의 미소가 반갑다.   부처님에 이끌려 소담스런 돌담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   천진난만한 사람들의 미소 뒤에는 부처님의 자비로운 얼굴이 번뜩 거린다.   내가 만나고자 하는 자비의 미소가 저 사람들이 아닐까

     

     

     

     



     

    종각

     

    종각에는 사물이라고 불리는 법기(法器)가 설치되어 있다.

    사물은 범종 · 법고 · 목어 · 운판을 말하는데 이 범종각은 사찰의 경내에서 마당을 내려다 보았을 때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어 왼쪽을 체로 오른쪽을 용으로 말하는 화엄의 사상에 따라 설치 된 것이다.

     

    범종

    지옥에서 고통을 받는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하여 친다.

    많은 사람이 모이도록 하거나 때를 알려 줄 때도 쓰며, 예불 · 의식할 때도 타종을 한다.

     

    운판

    청동으로된 구름 모양의 판.
    허공 중에 떠 다니는 모든 중생들의 괴로움과 아픔을 구제하기 위해 치는 것으로서 예불 · 의식할 때 또는 때를 알릴 때 쓰이기도 한다.

     

    목어

    예불 또는 의식을 행할 때 두드리는 법기이며 물속에 있는 모든 중생들의 고통을 구제하기 위하여 소리를 낸다.
    물고기는 눈을 뜨고 자기 때문에 항상 마음의 눈을 뜨고 열심히 수행하라는 뜻이다.
    이것을 작게 한 것이 목탁이다.

     

    예불 때와 의식할 때 치며 북소리가 널리 울려 퍼져나가는 것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이 널리 펴져서 모든 이에게 언제나 참다운 이치를 전하여 준다는 뜻이며 짐승 세계의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하여 두드린다.

     

     

     

     

     

     

     

     





    종각 뒷편으로 청화당이 있다.

    청화당(淸和堂)은 백호 부분인데 이 부분을 보호하고 북풍을 막기 위해서 정미소와 쌀 창고는 등산로 곁으로 옮기고 1984년 새 건물을 짓고 서전이라고 편액을 달았다가 1989년 청화당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현재는 주지실로 사용되고 있다.

     

     

     

     



     

    우측의 사운당

     

    덕 많은 수행자와 신심 깊은 신도들이 사방에서 구름처럼 모여든다는 의미의 이 건물은 창건년도는 알 수 없고 1490년에 중수되어 그 이후에 몇 차례의 중창과 중수를 거치게 되는데 지금의 건물은 1984년에 완전중수되어 지금은 종무소와 종무소임자들의 방사(房舍)로 사용되고 있다.

     

     

     



    넓은 마당에 해인도가 그려져 있고 서운당과 범종각 그리고 범종각 뒤의  청화당

     

     

     

     


    보경당

     

    이 건물은 근래에 불교회관으로 지어졌다.

    여러 큰 불사에 집회장과 법당으로 쓰이도록 설계되었는데, 해인사의 다른 건물들에 견주어 지나치게 크게 지어진 감이 없지 않으나, 지하층도 크게 내어 여러모로 쓸모있게 지어진 집이므로 불사 때에 유용하게 사용된다.

     

    보경당 뒤편으로 만월당(템플스테이)이 있다.

     

     

     

     

     

    석조수각

     

     

     

     

    범종각 뒤 담장 안으로 적묵당. 경학원. 궁현당이 차례로 보인다.

     

     




    구광루

     

    구광루는 해인사의 모든 건물 가운데에서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다.

    구광루라는 이름은 화엄경의 내용에서 따온 것인데, 화엄경에는 부처님께서 아홉 곳에서 설법하시면서 그 때마다 설법하시기 전에 백호에서 광명을 놓으셨다는 이야기가 있다.

    옛날에는 노전스님을 비롯한 큰스님들만이 법당에 출입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 누각은 법당에 들어갈 수 없는 일반 대중들이 모여 예불하고 설법을 듣는 곳으로서 지은 것이다. 지금은 전시장으로 쓰이고 있다.

     

     

     

     

     

     

    햇볕은 높디높은 가야산 봉우리에 부딪쳐 이곳 해인사까지 부서져 내려 왔다. 눈부시도록 밝은 빛은 우리들의 눈을 더욱 초롱초롱 빛나게 하고, 윤기 나는 머리카락을 더욱 곱게 한다. 이곳에서는 무엇하나 사소하게 지나칠 수 없는 것들이 많다.

     

     

     

     

     

     

     

     

     

     

     

     

     

     

     

     

     

     

     

     

     

     

     

     

     

     

     

     

     

     

     

     

     

    구광루 왼쪽 계단을 올라 대적광전 영역으로 들어 간다.

     

     

     





    양쪽으로 계단을 올라 작은문으로 들어서면 맞은편 높은 곳에 해인사 중심 전각인 대적광전이 보인다.


    해탈문을 지나고 뒷편 넓은 마당에 해인도가 그려진 구광루를 거쳐 이곳 해인사의 주불전인 대적광전 앞에서 잠시 멈춘다.

     

    구광전 마당을 지나 올라서면 웅장한 대광적전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산속에  '어떻게 우리 선조들은 이 험하고 깊은 곳에 커다란 절을 짓을까?' 궁금증이 든다.

    지금이야 시대가 시대인 만큼 쉽게 할수 있겠지만, 그 옛날 아주 먼 옛날에 오르지 사람 힘으로만 지었을 해인사!

     

     

     

     

     

     




     

    2019년 가을을 해인사에서 맞은 사람들... 각자의 마음속에 각기 다른 가을을 담았다.   어쩌면 기억 하지도 못할 시간이 된다 해도 어렴풋이 기억나는 시간이 될지라도 함께한 사람들에게 일부분 내가 기억되는 시간이 된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석등과 석탑 사이의 바닥의 바닥돌은 멀리 부처님을 향해 이마를 땅에 대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절하는 정례석이다.

     

     

     

     



     

    정중삼층석탑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254호)

     

    해인사 대적광전(大寂光殿) 아래 넓은 뜰에 자리잡고 있어 정중탑(庭中塔)이라 한다.

     

    전체적으로 신라 석탑의 기본 형식이 나타나 있고 조각 수법 등으로 미루어 통일신라 말기인 9세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높이 6m로 큰 탑에 속하며,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   3층기단(基壇) 위에 3층 탑신(塔身)이 있고 정상에 상륜부(相輪部)가 있는데, 원래는 2층 기단이었으나 1926년 중수할 때 1층이 더해졌다.

     

    기단부는 상층 기단 양쪽에 우주(隅柱)와 장주를 하나씩 모각했으며, 탑신에는 우주 이외의 별다른 조각이 없다.

     

    옥개받침은 모두 5단으로 되어 있고, 옥개석의 전각에는 후대에 설치한 풍경(風磬)이 달려 있다. 처마 끝의 반전은 심하지 않으며 탑의 상륜부에는 노반, 앙화, 구륜(九輪), 보주(寶珠)가 남아 있다.

     

    19266월 중수할 때 상층 기단의 석함(石函) 속에서 9개의 작은 불상이 발견되었는데, 중수가 끝난 뒤 다시 석탑 안에 봉안했다.

    석탑 앞에 놓여 있던 안상과 연화무늬가 새겨진 직사각형의 봉로석(奉爐石)은 석등 앞으로 옮겨 놓았다.

     

     

     

     

     

     

     

     

     

     

     

    일부는 떨어져 나갔지만 옥개석 끝에 풍탁이 달려 있기도 하다.

     

     

     

     

     

     

    해인사 3층석탑, 구름 모양의 풍경 소리가 유난히 청아하다.

     

     

     

     

     

     

     

     





    해인사 석등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255호)

     

    통일신라시대에 건립한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 높이 약 3.1m로 대석(臺石)은 1면에 2개씩 안상(眼象)을 새기고, 하대석은 밑을 8각으로 하여 높이 6cm 가량의 층을 두었다. 그 위에 8잎의 복련(覆蓮)을 새겼는데, 연꽃 잎면에는 보상화무늬를 음각으로 나타냈다. 상대석은 하대석을 역으로 뒤집어놓은 형태로서 지름 110cm이고, 8각 앙련(仰蓮)을 음각으로 새기고 연판 사이에 보상화무늬를 새겼다.

    상대석 위에 놓인 8각의 화사석(火舍石)은 높이 67cm, 지름 68cm로 4면에 사천왕상(四天王像)을 양각하고 그 사이에 4개의 등창(燈窓)을 내었다. 옥개석(屋蓋石)은 8각으로 지름 140cm이며 그 위에 5개의 보주(寶珠)로 마감하였고 귀꽃을 새기지 않았다. 높이 49cm, 지름 57cm의 기둥은 8각으로, 중간에 간석(竿石)이 새로 보충되었다. 석등 바로 앞 서쪽에 봉로석(奉爐石)이 있는데, 본래 삼층석탑 앞에 있다가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측면의 안상, 윗면의 연화무늬 등 조각이 모두 정교하다.

     

     

     

     

     

     

     

     

     

     

    석등 사이로 본 세상

     

     

     

     

     

     

     

     

     

     

     

    석등 뒤쪽의 전각은 궁현당이다...

     

     

     

     

     

     

    구광루와 궁현당 그리고 석등과 정중삼층석탑

     

     

     



     

    고즈넉한 사찰은 오늘도 쉼터를 찾은 여행자들에게 구석구석을 내어 준다.   아끼지도 아까워하지도 않고 그래서 마음 편하다.   너무 편한 것일까?

     

     

     

     




    사진으로 좌측의 전각이 관음전으로 구광루 오른쪽에 관음전(觀音殿)이 있다.   현재 강원(승가대학)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약 100여명의 스님들이 경전을 연마하고 있다. 건물의 현판은 궁현당과 같이 두 개인데 그 하나는 심검당(尋劍堂)이다 심검이라는 말은 모든 번뇌를 베어 버릴 수 있는 지혜의 칼을 찾는다는 뜻으로 수행의 목적을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말이다. 이 건물도 해인사 강원(승가대학)으로 사용하고 있다.

     

     



    궁현당

     

    창건년도는 확실히 알 수 없고 1940년에 중창되었으며 이후에도 몇 차례의 중수를 거듭하게 된다.

    현재의 건물은 1988년에 완전 복원된 건물로서 해인사 승가대학(강원)의 교사(校舍)로 사용되고 있다.

    '깊고 오묘한 진리를 탐구한다'는 뜻의 궁현당은 달리 '부처를 가려 뽑는 곳'이라는 뜻의 선불장(選佛場)이라 불리기도 한다.

     

    선불장選佛場

     

    해인사는 환경 스님이 주지로 취임하면서 효봉 스님을 방장으로 모시고 최초의 총림을 설치하였다. 총림이란 선원, 율원, 강원, 행자실등 기초교육기관부터 참선 수행하는 선원까지 스님들의 종합적으로 수행하는 수도도량이다. 그곳에서 대선사가 나오고 대강백이 나오고 대율사가 나오는 것이다. 선지식, 부처를 뽑는 총림이 바로 선불장이다.

    위없는 깨달음을 구하고자 삭발염의한 수행자들이 진리를 구하기 위해 치열히 정진하는 곳. 이 선불장 편액이 강원 궁현당 마루에 걸려있다.

     

     

     

     



     경학원

     

    지금 도서관으로 사용하고 있는 경학원은 가의대부 민형식의 주선으로 범운화상이 창건하였는데 본디 왕과 왕후와 태자의 만수무강을 비는 경홍전이라 편액하였던 건물이다.

    그 뒤에 1946년에 이르러 환경스님이 주지로 있을 때 손수 경학원이라고 글씨를 써서 건물의 이름을 바꾸었고, 1947년 쓴 이 글씨는 해방후이년 병술지추 사문 환경(解放後二年 丙戌之秋 沙門幻鏡)’이라는 관지款識가 편액에 쓰여 있다. 1968년에 지월화상이 중수하여 이듬해 부터는 해행당에 봉안되어 있던 역대 고승들의 영정을 옮겨 모셨다가, 1975년부터 승가대학의 도서관으로 사용해 오고 있다.

     

     

     



     

    마르지 않는 샘처럼 부처의 자비도 마르지 않는다. 휴식이 필요하고 힐링이 하고 싶다면 자연이 함께하는 사찰여행 떠나 보자잠시 무상무념의 시간을 가져 보자. 그래서 새로운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기회를 해인사에서 가져 보면 어떨까?

     

     

     



     

     

    해인사 중심에 자리한 해인사 중심 전각인 대적광전이다.

     

     

     

     



     

    대적광전

     

    한사원의 큰 법당에는 부처상이나 보살상이 모셔져 있는데 큰 법당의 이름은 그 안에 모신 주불에 따라 결정된다.

    그 주불이 바로 그 사원의 정신적인 지주임은 말할 것도 없다.

    해인사는 화엄경을 중심 사상으로 하여 창건되었으므로, 거의 모든 절이 흔히 모시고 있는 석가모니 부처님 대신에 화엄경의 주불인 비로자나부처님이 모셔져 있다.

    그래서 법당의 이름도 대웅전이 아니라 대적광전이다.

     

     

     

     

     

     

     

     




     


     

     

     


     

     

    지금의 건물은 창건주인 순응스님과 이정스님이 802년에 지은 건물 자리에다 1818년에 다시 지은 것이며, 법당 안에는 일곱 불상이 모셔져 있다.

    법당에 들어서 보면 왼쪽부터 철조관음보살, 목조 문수보살, 목조 비로자나불이 있고, 그리고 맨 가운데에 본존 비로자나불이 있고 다시 그 옆으로 목조 지장보살, 목조 보현보살, 철조 법기보살이 차례로 안치되어 있다.

     

    본존 비로자나불은 1769년에 조성되었는데, 그 왼편에 있는 또 하나의 목조 비로자나불상은 가운데의 본존불을 모시기 전까지의 본존불이다.

     

     

     

     



     

    본존 비로자나불은 1769년에 조성되었는데, 이 목조 비로자나불상은 그 좌우의 보현보살상, 문수보살상과 더불어 삼존불로서, 고려시대에 가지가 셋인 큰 은행나무 한 그루를 가지고 만든 것이다.

    삼존불은 처음에는 경상북도에 있는 금당사에 모셨다가, 지금은 터만 남아 있는 가야산의 용기사를 거쳐,1897년 해인사 대적광전에 모시게 되었다. 그밖의 불상들은 조성 연대가 알려져 있지 않다.

     

    '비로자나'는 산스크리트어인 바이로차나 Vairocana에서 온 말로서, 영원한 법 곧 진리를 상징한다. 그러므로 비로자나부처님을 모신 대적광전은 부처님의 진리의 몸이 화엄경을 언제나 두루 설하는 대적광토의 역할을 하고 있다.

     

     

     

     

     

     

     

     

     

     

     

     

     

     

     

     

    대적광전은 네 방향에 각기 다른 이름의 현판이 걸려있다. 정면의 '대적광전'

     

     

     

     

     

     

     

     

     

     

     

     

     

     

    대적광전 우측에는 "금강계단"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대적광전 뒤에는 "대방광전"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대적광전 좌측에는 "법보단"이란 현판이 있다.

     

     

     





    대비로전 앞에서 대적광전을 바라본 광경

     

     

     




    명부전

    명부전은 지장전이라고도 하고 지금 건물은 1873(고종 13)에 지어졌다.

     

     

     




     

    지옥 중생을 모두 제도하기 전에는 성불하지 않겠다는 큰 서원을 세운 지장보살이 목조로 조성되어 주불로 모셔져 있고 그 좌우에 각각 도명보살과 저승에서 죽은 이들을 재판한다고 하는, 일명 시왕이라고 하는 십대왕이 있다.
    명부전은 저승에 간 이들의 넋을 제도하는 곳으로사십구재를 비롯한 갖가지 제의들이 이곳에서 행해진다.

     

     

     

     

     

     

     

     

     

     

     

     

     

     

     


     

    응진전

     

    나한전이라고도 불리는 응진전은 1488(성종 19)학조대사가 처음 세워졌는데, 지금의 건물은 1817년에 성안대사가 다시 지어진 것이다.

     

     

     


     

    처음에는 역대 선사의 영정만을 봉안했는데, 1918년에 판전 서재에 봉안되었던 십육 나한을 옮겨와 모셨다. 응진전 가운데에는 석가여래상이 소조로 조성되어 있다.

     

     

     



      선열당

    선열당은 종래에 하선원으로 사용되다가 현재는 노전실과 부방장실과 영정 안치실로 쓰이고 있다.

    특별히 노전실은 응향각이라고도 하는데 응향각은 향을 사른다는 뜻이고 노전은 의식을 집전하는 곳이라는 뜻이다.

     

     

     

     


    극락전

     

    지금 율원으로 사용되고 있는 극락전은 독립된 산내 암자로서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쳤으며, 1965년에 자운스님께서 화주가 되어 건물을 완전히 해체하여 지금의 선원 자리에 중수하였고, 그 뒤에 다시 1973년에 봉주화상이 주지로 있을 때 대장경판전을 신축하기 위하여 건물을 지금의 자리인 100자 아래 지점에 새로이 옮겨세워 지금에 이르고 있다. 율원으로 쓰이는 한편 한주 스님들의 거처로도 사용되고 있다.

     

     

     

     

     

     

     




    선원으로 올라가는 계단

    계단오르면 있는 이 선원은 19736월에, 박정희 대통령의 특명에 따라, 장경각이 목조여서 화재의 위험이 있다 하여, 시멘트로 신장경각 건물로서 건축한 것이나, 대장경을 옮겨 모시기에는 여러가지로 부적합하여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던 건물이다. 그러다가 1983년부터 선원으로 사용되어 오고 있다.

     

     



     

     

    대비로전

     

    20071124일 정면 3, 측면 3칸 그리고 다포형식을 가진 대비로전을 낙성하고 대적광전과 법보전의 동형쌍불(同形雙佛)인 두 비로자나 부처님을 나란히 안치하였다.

     

     

     

     

     

     

     

     




     

     



     

    쌍둥이 비로자나불은 20057월 개금하는 과정에서 불상 내부에 문서가 발견돼 883년 통일신라시대 제작된 국내 최고(最古)의 불상임을 확인하였다.

     

     

     

     

     

     

     

     




    앞쪽의 승가대학의 도서관으로 사용해 오고 있는 경학원,  중앙의 해인사 승가대학(강원)의 교사(校舍)로 사용되고 있는 궁현당,  가장 오른쪽의 스님들의 생활공간으로 쓰이는 적묵당이 차례로 보인다.

     

     

     

     

     

     

     

     

     

     

     

     

     

     

     

     



    대비로전 앞에서 바라본 해인사 전경이다.  가을 하늘이 너무 멋지다.   축복인 거 같다.....

     

     

     

     

     

    독성각


    6각형의 건물로 사찰에서는 보기드문 형태의 전각이다. 대 비로전에서 조금 더 좌측으로 나오면 보인다.

     

     

     




     

    한때 독성 용왕 삼신상을 모시고 삼성각으로 불리기도 했으나 현재는 독성 한 분만을 모셔서 독성각으로 불린다.

    말세 중생에게 큰 복을 내린다는 나반존자(那畔尊者)를 모신 곳이다. 나반존자는 남인도의 천태산에서 로(獨) 선정을 닦고 있는 성자(聖)이기 때문에 나반존자를 모신 전각을 독성각이라 한다.

     

     

     

     

     

     

     

    학사대 고목

     

     

     




     

    학사대 전나무' (천연기념물 제541)

     

    '학사대(學士臺)'는 신라 시대 고운(孤雲) 최치원 선생(崔致遠, 857~?)이 해인사 대적광전 주변에 작은 정자를 짓고 선생이 역임한 한림학사란 벼슬 이름을 따 학사대라고 했다. 여기서 선생이 가야금을 켜면 학이 날아와 고운 소리를 들었다고 전해진다.

     

     

     

     

     

     

     

     

     




    선생이 이곳에 지팡이를 꽂았는데 이 지팡이가 자라 전나무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이 전나무는 최치원 선생이 심은 전나무의 손자뻘쯤 되는 나무로 역사성과 문화적 가치가 매우 높고 규모가 커서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해인사 팔만대장경(국보 제52호)  영역


    대장경을 보려는 급한 마음에 대적광전 뒤로 돌아서니 또 다시 급경사의 계단이 앞을 가로 막는데 "八萬大藏經"이란 현판이 보인다.

    이제 저 계단을 올라서면 일주문 부터 108계단을 올라 서는 것인데 번뇌망상을 쉬고 분별심을 여의는 수행자의 모습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올라서고 있는것인지 염려가 된다.

     

    대적광전 위에는 장경판전이 자리하고 있다.

    장경판전은 대장경을 모신 건물로, 이 형국은 대적광전의 비로자나부처님께서 법보인 대장경을 머리에 이고 있는 것을 나타내므로 더욱 뜻깊다.

     

     

     

     

     

    장경문

     

     




     

    성종 19(1488)에 학조대사가 왕실의 후원으로 다시 지어 보안당이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대적광전을 지나면 고려대장경판을 보관하고 있는 장경판전을 만날 수 있다. 이곳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8만 여장의 대장경판을 보관하고 있는 건물로 해인사에 남아있는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곳이다. 이곳은 자연의 조건을 이용한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건축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곳 내외부는 대장경판 보관 기능을 위해 별다른 장식을 하지 않았다. 통풍을 위해 창의 크기를 남쪽과 북쪽을 서로 다르게 하고 각 칸마다 창을 내어 놓았다또한 내부 흙바닥 속에 숯과 횟가루, 소금을 모래를 차례로 넣어 습도를 조절했다.   이 때문에 오늘날까지 대장경이 잘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합천하면 해인사, 해인사하면 팔만대장경

    누구나 해인사하면 팔만대장경을 가장 먼저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해인사는 팔만대장경만 기대하고 찾아온 사람들에게 그 이상의 것을 보여준다.

    팔만대장경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은 팔만대장경을 모신 건물인 장경판전이다. 수다라전, 법보전, ·서 사간전으로 되어있는 장경판전은 해인사의 3개의 문을 넘고 대적광전까지 지나야 비로소 마주할 수 있었다.

     

     

     

     

     

    팔만대장경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인증서

     

     



     

    천년의 시간을 숨어 지낸 가야산의 마지막 절경, 그 숨겨진 보물이 수려한 자태의 속살을 드러낸다.

     

     

     



     

    사찰의 가장 깊숙한 곳에 모셔진 장경판전에는 고요하고 삼엄한 분위기가 풍기는 듯 했다. 아쉽게도 내부에는 들어갈 수 없어 고개를 내밀고 창문 틈 사이로 팔만대장경을 엿볼 수밖에 없었다. 가장 완벽한 보전 기술과 장치로 팔만대장경을 지키고 있는 장경판전은 현대의 건축기술로도 따라갈 수 없다는 평가를 받는다.

     

     

     

     

     

    세계에서 가장 완벽하고 오래된 '고려대장경판(팔만대장경)'은 장경판전에서 직접 관람할 수 있다.

     

     

     

     

    대장경판(국보 제32)

     

     

     




    바닥은 소금과 숯, 횟가루, 모래를 차례로 쌓아 알맞은 평균습도를 유지시키며 창문의 각기 다른 크기는 자연 통풍이 가능하게 한다. 이런 장경판전의 보살핌 덕분에 지난 2011년 합천에서는 대장경 조성 천년이 되는 해를 기념하여 ‘2011년 대장경 천년 세계문화축전이 열리기도 했다.

     

     



     

    학창시절 국사문제에 빠지지 않고 등장했던 팔만대장경. 누구나 이름은 들어보았지만 그 모습을 실제로 본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인 팔만대장경은 부처님의 말씀을 집대성한 불교경전의 총서를 말한다. 오래될수록 부식되어 판수가 줄어들기 마련이니 정확한 판수는 아무도 알 수 없다고 한다. 단지 현재는 약 81,258장이라고 추정할 뿐. 팔만대장경은 고종이 1236년부터 1251년까지 대장도감을 설치한 후 약 16년 동안 만들어졌다. 최소 1800여 명의 경판 판각각수를 포함해 최소 20만 명에서 50만 명이 대장경을 엮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대장경은 경 · · 논의 삼장을 말하며, 불교경전의 총서를 가리킨다.   이 대장경은 고려 고종 2435(12371248)에 걸쳐 간행되었다.   이것은 고려시대에 간행되었다고 해서 고려대장경이라고도 하고판수가 8만여 개에 달하고 84천 번뇌에 해당하는 84천 법문을 실었다고 하여 8만대장경이라고도 부른다.
    현존 대장경 중에서도 가장 오랜 역사와 내용의 완벽함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지니고 있는 문화재이다또한 2007년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600여 년간 팔만대장경을 보관해온 경남 합천의 해인사 장경판전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서관10선에 올랐다.

    1826년에 창간된 프랑스 유력 일간지인 피가로(Le Figaro)의 부동산특별판 르 피가로 이모빌리애가 선정한 세계 아름다운 10대 도서관중 일곱 번째로 해인사 장경판전이 꼽힌 것이다.

    장경판전은 국보 제 52호이자 유네스코지정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곳이다.

     

     

     

     

     

    해인사 장경판전 살창

     

     




    무엇보다도 이 건물은 대장경을 보관하는 데에 절대적인 요건인 습도와 통풍이 자연적으로 조절되도록 지어졌다는 점이 두드러진다.

    장경각의 터는 본디 그 토질 자체도 좋거니와, 그 땅에다 숯과 횟가루와 찰흙을 넣음으로써, 여름철의 장마기와 같이 습기가 많을 때에는 습기를 빨아들이고, 또 건조기에는 습기를 내보내곤 하여서 습도가 자연적으로 조절되게 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그 기능을 더 원활하게 하려고, 판전의 창문도 격자창 모양으로 하였으며, 수다라전의 창은 아랫창이 윗창보다 세배로 크게 하였고 법보전의 창은 그 반대 꼴을 이루고 있는데, 이는 아주 과학적인 통풍 방법으로서, 오히려 건축 방식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따라가기 어려운 우리 선조들의 슬기를 잘 보여 준다.

     

     

     

     

     

     

     

     

     

     

     

     

     

     

     

     



     

    해인사에는 팔만대장경이 있다. 장경판전 문창살 너머 가지런히 놓인 경판 바라보면, 그 많은 경판의 숫자에 놀라고, 700여년의 시간 동안 오롯하게 보존된 상태에 한 번 더 놀란다.   험난한 시기 극복하려는 고려 민중들의 바람과 희망이 이토록 간절하게 남았다.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

     

     

     



     

    국보 52호로 지정된 이 장경각을 처음 세운 연대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나, 대장경이 해인사로 옮겨진 때가 1397년임을 미루어 볼 때 지금의 건물은 조선초 무렵인 1488년 쯤에 세워졌으리라고 여겨지는데, 여러 차례에 걸친 부분적인 중수를 거쳐서 오늘에 이르렀다. 장경판전은 모두 네 동으로 되어 있다.

     

     

     

     

     

      

    남쪽의 건물을 수다라전이라고 하고

     

     

     

     

     

     

     

     

     

    수다라전 현판

     

     



     

    남쪽의 수다라전과 마주보고 있는  북쪽 건물 법보전이 보인다.

     

     

     

     

     

    해인사 대적광전에서 대장경판전 구역으로 오르면 만나는아름다운 문으로 그 모양이 둥글어 월문이라 부른다.

     

     



    북쪽의 건물을 법보전이라 한다.  합천 해인사 법보전 정면

     

     

     

     

     

     

     

     

     

     

     

     

     

     

     

     

     

     

     

     

     

     

     

     

     

    해인사 장경판고의 앞면 살창

     

     

     

     

    뒷면살창

     

     




    북쪽의 건물을 법보전이라하고 남쪽의 건물을 수다라전이라고 하는데, 이 두 건물을 잇는 작은 두동의 건물에는 사간판대장경이 모셔져 있다. 이 장경각은 지금까지 남아 있는 조선조 초기의 건축물 가운데에서 건축 양식이 가장 빼어나서 건축사적인 면에서도 퍽 중요하게 여겨진다.

     

    장경판전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8만여장의 대장경판을 보관하고 있는 건물로, 해인사에 남아있는 건물 중 가장 오래 되었다. 처음 지은 연대는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조선 세조 3(1457)에 크게 다시 지었고 성종 19(1488)에 학조대사가 왕실의 후원으로 다시 지어 보안당이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산 속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어 임진왜란에도 피해를 입지 않아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광해군 14(1622)과 인조 2(1624)에 수리가 있었다.
     

    앞면 15· 옆면 2칸 크기의 두 건물을 나란히 배치하였는데,   남쪽 건물은 수다라장이라 하고 북쪽의 건물은 법보전이라 한다.   서쪽과 동쪽에는 앞면 2· 옆면 1칸 규모의 작은 서고가 있어서, 전체적으로는 긴 네모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대장경판을 보관하는 건물의 기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장식 요소는 두지 않았으며통풍을 위하여 창의 크기를 남쪽과 북쪽을 서로 다르게 하고 각 칸마다 창을 내었다. 또한 안쪽 흙바닥 속에 숯과 횟가루, 소금을 모래와 함께 차례로 넣음으로써 습도를 조절하도록 하였다.
    자연의 조건을 이용하여 설계한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점 등으로 인해 대장경판을 지금까지 잘 보존할 수 있었다고 평가 받고 있다.
    해인사장경판전은 15세기 건축물로서 세계 유일의 대장경판 보관용 건물이며대장경판과 고려각판을 포함하여 1995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또한 장경판전은 해인사 건축물 중 가장 오래된 건축물로, 팔만대장경판을 봉안하고 있는 남북의 큰 건축물인 수다라장과 법보전,   해인사 고려각판을 보관하고 있는 동·서 사간판전 등 4채의 건물로 구성돼 있다.

    또한 장경판전은 팔만대장경판 보존에 용이하게 바람의 방향이나 방습효과, 실내 적정온도 유지에 유리하게 특별 설계된 특징이 있다.

     

     

     

     

     

     

     

     

     

     

     

     

     

     

     

     

     

    대방광전, 장경각에서 보이는 대적광전의 후면의 다른 이름이다. (대방광불을 모신 전각이란 뜻이다.)

     

     




    삼국시대 백제와 신라계 건축양식 중 치미라는 것이 있다.

    용마루 양 끝에 봉황의 날개(?)처럼 생긴 장식을 말하는데 흡사 인디언의 깃털 장식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길상과 벽사의 의미가 있다는데....

    조선시대에는 사라졌지만 요사이 치미장식을 하는 건물이 많다.  또한 추녀마루를 장식하는 용면 또는 귀면형태의 기와도 있고...

    어찌되었던 부처님 계신 전각을 장엄하고 삿된 것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지붕 하나에도 나름의?

     

     

     

     


    대장경전에서 바라본 해인사 전경

     

     

     

     

     

     

     

    유네스코도 인정한 팔만대장경판이 있는 입구를 내려온다.

     

     

     




     퇴설당


    퇴설당을 처음 창건한 시기는 알 수 없고, 다만 해인사에 여섯번째로 큰불이 나던 해인 1817년에 그 불로 모두 타 버리자 제월대사가 중창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다시 1965년에 근담화상이 해체하여 보수하였다.

    이 퇴설당은 최근까지 상선원으로 사용되었는데, 특히 1899년에 경허 대선사가 이곳에 주석하면서 동수정혜결사를 실천한 장소였던 점에서 역사적인 수행정신을 간직하고 있는 건물로서의 의미가 깊다.

    선원이 지금의 자리로 이전됨에 따라 현재는 총림 방장실로 사용하고 있다.

     

     

     




    수미정상탑

     

    장경각 뒤쪽에 있는 이 탑은 원래 돛대바위라 불리워지던 거대한 바위가 있었던 곳에 그 무게 만큼의 탑을 다시 세운 것이다.

     

     

     




    수미정상탑, 이 탑은 해인사 지형이 떠가는 배의 형국이라 돛대바위의 역할이 중요함을 감안하여 배 모양의 해인사에 돛대역할을 하도록 1986년 8각 7층 14m의 높이로 세워졌다고 한다.

     

     

     

     

     

     




    쭉 뻗은 계곡을 따라 이어진 도로..  그 산의 자락에 세워진 고찰...   사찰에서 내려다 보면 그 아래는 까마득히 보인다얼마나 가파른 길을 올라와야 하는가를 보여 준다..

     

     

     

     

    참 곱다. 가을이, 단풍이....

     

     

     

     

     

     

     

     

     

     

     

     

    앞의 승가대학의 도서관으로 사용해 오고 있는 경학원, 좌측의 해인사 승가대학(강원)의 교사(校舍)로 사용되고 있는 궁현당, 가장 오른쪽의 스님들의 생활공간으로 쓰이는 적묵당이 차례로 보인다.

     

     

     

     

     

     

     

    대적광전 영역을 지나

     

     

     

     

     

     

     

     

     

    구광루 영역도 지나고

     

     

     

     

     

     

     

     

     

     

     

     

     

    아쉬운듯 해인사 일주문을 향해 나오면서...

     

     

     

     

     

     

     




    해인사에 와서 그저 남이 기도하니까 나도 한다는 마음으로 해서는 안된다자신의 원력이 담겨져 있지 않는 기도는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108사암순례를 가겠다고 자신과 약속을 해 놓고 나왔다가 안 나왔다가 하는 이들은 제대로 된 원력을 세우지 못한 불자라고 할 수 있다원력이 굳건하면 기도로 저절로 이루어진다.

     

     

     

     

     

    11월 초순의 합천 해인사는 늦가을 풍경을 제대로 보여준다.   길을 따라 걷다 보면 걷는 소리마져 가을의 일부처럼 느껴진다.   마음은 열리고 몸은 즐겁고 해인사 길을 걷다보면 모든 잡념은 연기 사라지듯 어느새 없어진다.

     

     

     

     

     


    지그재그로 떨어지는 낙엽이 내 앞을 스친다.   한 여름 비바람도 이겨냈을 나뭇잎은 자연의 이치를 거스리지 않고 생명 다한 육신을 바람에 맡긴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바람에 몸을 맡긴 나뭇잎은 낙엽이 되어 마지막까지 예쁜 빛을 발산한다.

     

     

     



     

    바람이 한번 스칠 때 마다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은 해인사를 찾은 사람들에게 겸손을 가르친다. 영원함은 없다는 듯 욕심없이 배려하는 마음으로 살라는 충고를 소리 없이 전달하고 있다

     

     

     

     

     

     

     




    해인사 성보박물관 앞산 풍경

     

    해인사 성보박물관을  빠져 나가면서..   가을빛이 완연했다..    해인사까지 오르는 길은...
    소나무는 그 자체로 멋스럽고..
    곱게 물든 단풍은 감탄사가 절로 나올 정도로 아름다웠다..



     




    해인사 소리길은 경상남도 합천대장경 테마파크 주차장 도착(11:25)하여  대장경테마파크 - 소리길 입구 - 청량사 입구 - 소리길 안내소무릉교 - 칠성대 - 홍류동계곡 - 분옥폭포 - 농산교 - 농산정 - 길상암 - 명진교 -낙화당 - 가야산휴계실 - 성보박물관 - 해인사 - 해인주차장까지  8km구간의 아름다운 길이었다.  

    해인사 소리길 걸으며 들러본 해인사에서 빨강은 빨강대로 사람맘을 현혹시키 노란 은행잎은 그자리에 그만 주저앉게 할 정도였다..
    평일이어서 사람도 그리 많지 않아..  가을 단풍..  제대로 맛본거 같다..

     

    순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가야산에 걸쳐진 저문 해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아마 우리들의 마음속에는 해인사의 풍광(風光)이 빚어내는 절경들이 담겨져 있을 것이다그것은 다름 아닌 부처님의 법향(法香)이리라.

    오늘은 일상의 자잘한 이야기들이 클래식 소품처럼 녹아들고 별 것 아닌 일에도 가슴이 열린다화강암 위에 새겨진형체도 불분명한 여래불의 옅은 미소가 떠오르는가 싶더니로뎅의 `대성당`이 생각난다마주 잡지는 않았지만 각도에 따라 살짝 닿아 있는 것도 같고때로는 친밀하게 맞닿아 있는영원히 마주보는 두 오른손분명 우리는 살아있는 날까지 서로를 응시하며 함께 갈 것이다.

     

    초가을이 우리의 대화를 기도처럼 부드럽고 충만케 해 주었다햇살이 바래지면 이내 소슬바람이 불고, 숲은 다시 긴 침묵 속으로 빠져드리라. 그러나 봄이 온다는 것을 알기에 긴 겨울의 아픔을 견뎌 내고 기다릴 줄도 안다세월만큼 스스로를 낮추고 성숙하게 하는 선물이 또 있을까?   해인사를 내려오는데 하늘에 낮달이 홀로 외롭다.

    참회와 감사와 발원으로 이루어진 것이 기도다그런데 감사와 발원은 참회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우리 중생이 어디 이 한생만을 살았겠는가.   수많은 생을 살면서 쌓아온 허물과 무지에서 나온 지금 생의 허물을 바로보고 참회해야 진정한 기도가 된다.

    참회 기도의 으뜸은 3천 배다몸을 엎드리면 마음도 엎드려진다몸과 마음이 하나이기 때문이다내 몸을 상대방의 발 아래로 낮출 때 진정 참회가 되는 것이고그 참회 위에 세상 사람에 대한 감사 그리고 부처로 살아가겠다는 발원이 선다큰스님께서는 내가 잘했다는 생각이 조금도 없어야 진정한 참회가 이루어진다고 하셨다.

    많은 어머니들이 자식을 위해 기도를 한다입시철이 되면 절하는 사람이 더 늘어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부모와 자식의 인연은 천생만생의 인연 속에서 부모도 되고 자식도 되었으니, 큰 바닷물 보다 많은 어머니의 젖을 먹었고 태산보다 높은 뼈를 버렸다. 그만큼 자식과 부모 간의 인연은 지중하다.

    돈을 들여 과외를 시킨다고 부모 노릇을 다하는 것이 아니다. 부모가 돈주머니 역할만 하면 아이는 갈지자로 걸으면서 살게 된다.

    생명 있는 모든 것이 본능적으로 빛을 향하는 것처럼부모가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자란 아이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따라 하게 된다부모를 따라 절을 한 아이들은 심성이 반듯해져 빗나가기 쉬운 사춘기도 수월하게 넘기고공부하라는 잔소리를 할 일도 적다.   아이들이 본능적으로 부모를 믿으니까 잘 이끌어 주기만 하면 된다많이 말하지 말고 하루에 한 마디씩만 하는 게 좋다자식의 눈빛만 보아도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아야 한다.   회초리와 칭찬을 균형 있게 주어야 지혜로운 부모다.
    무엇이든 강요하면 역으로 간다. 그러니 스스로 걸어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어야 한다.

     

    오늘도 부처님 법향 아래서 평온한 마음자리를 볼 수 있어 많이 감사하고 행복한 하루였다...  부처님 당신이 계시어 참으로 좋습니다.  관세음보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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