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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고성 옥천사(경남 고성군 개천면 연화산1로 471-9, 고성군 개천면 북평리 408)사찰여행/경상도 2019. 11. 1. 15:19
경남 고성 옥천사
2019. 11. 1.
2019. 10. 28. 108순레단 '달마야 놀자' 와 함께한 10월 사찰 순례는 경남 고성의 운흥사, 보현암, 문수암, 옥천사로 오늘은 경남 고성의 사찰 길 여행이다..........
경남 고성의 운흥사. 보현암. 문수암을 차럐로 둘러보고 나와 오늘 네번째 사찰여행지 옥천사로 이동 이다...
고성군 개천면 지방도에서 옥천사로 접어드는 길은 고즈넉하다. 몇몇 식당과 숙박지가 절 입구임을 차분하게 알린다.
이어지는 작은 연못 소류지(沼溜地)는 고요하다. 시원스레 흘러내리는 계곡이 있을 법 하지만 옥천사 입구의 차분한 분위기에 맞게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집단시설지구 주차장에서 5분 정도 오르면 옥천사계곡물을 모은 저수지가 나온다. 그의 명칭은 옥천소류지로 연화산이 베푼 계곡물이 옥천사를 끼고 졸졸졸~♪ 흐르다가 이곳에 모여 끝없는 대장정을 준비한다. 겨울의 절정을 누리며 처절한 아름다움을 비치는 나무들과 알을 품은 어미 새처럼 푸근하기 그지없는 연화산 산줄기는 수면에 비친 자신의 매무새를 다듬으며 몸단장에 여념이 없고, 삼삼한 숲에 둘러싸인 호수의 자태는 첩첩한 산중에 안긴 비밀의 호수처럼 신비롭고 아름답기 그지없다.
연화산 옥천사 일원은 경상남도기념물 제140호로 지정됐을 만큼 울창한 숲과 계곡의 경관이 빼어나다.
옥천사 일원은 울창한 숲과 계곡이 유명하여 사시사철 많은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선유봉, 옥녀봉, 탄금봉 등 그 명칭이 붙어 있는 봉우리가 10개나 되는 연화산은 심산유곡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물로 '연화팔경'이라 불릴 정도로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다.
소류지(沼溜地) 옆 주차장에서 옥천사까지 천천히 걸어 10분 정도 걸리는 길이다. 오른쪽으로 맑은 물소리가 들리는 계류를 끼고 느릿하게 걷는다.
주차장을 지나 산굽이를 돌면 바로 하늘을 찌를 듯 고목들이 도열해 방문객을 반긴다.
길은 포장되어 있지만 스님들의 의지로 확장공사를 막아 승용차 한 대만 지날 수 있고, 구불구불한 옛길의 동선이 그대로 살아있어 나무 사이로 걸어가는 맛이 쏠쏠하다. 주변에 요란한 치장을 하지 않아 산사로 들어가는 호젓한 느낌을 만끽할 수 있어 좋다.
활엽수들이 아직 본격적인 단풍옷을 입기 전이라 간간이 보이는 노송의 붉은 수피와 파란 잎이 나목들 사이에 돋보인다. 고목들의 오랜 연륜을 반영하듯 뒤틀리고 꺾이고 부러진 가지들이 걸려있고, 기생식물들이 수피에 붙어 있기도 한다. 계곡의 바람은 잠들고 가을철의 햇빛은 나뭇가지 사이로 스며들어 분위기가 안온하다.
옥천사 진입로는 걷기 좋은 길이기 때문에 걸어야 맛이다. 길은 넓고 나무는 높다. 도토리가 풍성한 참나무에 소나무, 느티나무의 모양새가 여느 나무와 다르다. 옆으로 뻗은 가지가 없고, 위로만 키를 키웠다. 가지에 손을 댔을까? 김정희 선생의 세한도에 나오는 키만 큰 소나무가 여기 있다. 때문에 숲은 가려지지 않는다.
옥천사 주차장에서 5분을 오르면 옥천사의 관문인 일주문이 마중을 한다.
옥천사 일주문(一柱門)
이 일주문은 1984년에 지어진 것으로 현판에는 '연화산 옥천사'라 쓰여 이곳의 정체를 밝혀주며, 문을 들어서면 아름답기 그지 없는 옥천사 숲길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일주문의 ‘연화산 옥천사’ 편액은 청남 오제봉님 글씨로 단아하다.
일주문 안은 더욱 그럴 듯하다. 10월 하늘과 나뭇가지에 단풍색으로 담은 숲길이 또 한 겹을 벗긴 채 사람 앞에 선다. 이렇게 걷는 시간이 진짜배기다.
옥천사 숲길은 하늘을 가리며 솟아난 늘씬한 나무들로 거대한 수해(樹海)를 이룬다. 숲 밖은 훤한 대낮이지만 숲 안은 오히려 그늘지게 어두워 따사로운 햇빛마저 우걱우걱 삼켜버린다. 산사(山寺)로 가는 숲길 치고 아름답지 않은 길은 거의 없겠지만 옥천사 숲길은 그중에서도 천하 으뜸이라 할 정도로 아름다움이 깊다. 길을 가다가 선녀님이 툭 튀어 나와도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로 말이다.
나무들이 베푼 선선한 산바람에 번뇌는 날려가지 않으려고 발악을 한다. 허나 결국은 날려간 모양이다. 마음이 가뿐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멀리 날라가지는 못하고 소류지에서 물놀이를 하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으니 번뇌의 무게가 참 무겁긴 무거운 모양이다.도열한 고목들 사이로 걸어가는 맛이 아늑하다.
숲은 나무의 군집이다. 혹은 나무와 나무 사이의 공간이다. 그 공간에 동물이 산다. 사람도 그 속에서 살아왔다. 여느 동물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삶에서는 일생동안 나무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며, 나무 없는 곳에서 산다는 것은 생각하기조차 삭막한 일이다. 나무가 많은 숲은 사람에게 더없이 풍요롭고 아늑한 보금자리다.
10여분을 걸으니 옥천사가 수줍은 듯 입구를 슬며시 내어준다.
옥천사 오르다 길 왼쪽에 1987년에 만든 옥천사의 내력이 적힌 사적비와 공덕비 그리고 옥천사와 인연이 깊은 승려의 승탑(僧塔)이 있는 옥천사 부도군이 숲속에 터를 닦았다.1987년에 만든 옥천사의 내력이 적힌 옥천사 사적비
공덕비
부도 들어서며 사적비 우측에 홀로 있던 백연당 부도
일주문 들어서서 천왕문 조금 못 미쳐 왼쪽 언덕받이 산기슭에 평평하게 땅을 고르고 옥천사의 승탑을 모아 놓은 부도전이 있다. 앞줄에 근세부도4기와 뒷줄의 조선후기 부도 5기의 승탑이 나란히 있는데 마모가 심하여 판독이 어려운 편이다.
뒷줄의 조선후기 부도 5기의 승탑 중 하나인 월파당 月波堂 부도는 연봉형 보주 모습으로, 당호를 가로로 새긴 것도 이채롭다.
그 옆으로 월암당 月庵堂 도홍종사 부도는 방형지대석 위에 상륜과 일석으로 조성하였다.
월연당 부도
삼인당 부도
추담당 부도
앞줄의 근세부도도 4기가 차례로 있다.
부도군에는 조선 후기부터 근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대의 승탑(부도)들이 시간을 초월하며 어깨를 나란히 한다.
부도밭을 지나 왼쪽으로 휙 꺾이는 길을 보류하고 오른쪽으로 가면 천왕문이 나온다.
나무사이로 멋진 옥천사와 소류지로 흘러 들어갈 계곡물도 보인다..
경남 고성군 개천면 북평리 연화산 북쪽에 자리한 옥천사는 676년(신라 문무왕 16)에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옥천사는 고성의 진산인 거류산과 더불어 가장 알려진 연화산이 품은 천년고찰이다. 대웅전 뒤에 맑은 물이 나오는 샘이 있어 ‘옥천사’라 이름 붙었다.
의상은 중국 당나라 유학 시 종남산에서 화엄종의 시조 지엄선사로 부터 화엄의 오묘한 뜻을 깨닫고 화엄학을 배우고 귀국해 의상이 화엄대의를 선양하며 국내의 영지를 골라 강론한 곳으로 지리산 화엄사, 가야산 해인사 등과 함께 10대 불찰을 세웠는데 이를 화엄십찰이라 부르는데 옥천사도 그중 하나로 꼽힌다.
옥천사는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연화산의 북쪽 기슭에 자리한 사찰로, 신라 문무왕 10년(670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쌍계사의 말사이다. 신라시대에는 최치원 선생이 화엄십산이라 부를 만큼 번성했었으나 그후 화재와 중창을 거듭하다가 한때는 도둑의 소굴로 쓰이기도 했다고 한다. 그후 조선 후기에 다시 큰 중창이 이어져 다시 한 번 사세를 크게 확장했다고 한다. 당시 옥천사에 상주하던 사람만 340명에 이르고 물레방아만 12개가 돌아가던 거찰이었다고 한다.
옥천사는 한때 스님(승군)이 300명을 넘고, 부속 암자가 12개에 이르는 큰절이었으나 지금은 청연암·백연암·연대암 등 3개의 부속암자도 눈길을 끈다.
절 소유 땅을 농민들에게 소작을 주어 거둬들이는 곡식이 1,000석이나 됐다고 한다. 절 위세는 조선 후기에 쇠퇴하게 되는데, 왕실에서 쓸 ‘어람지’(임금이 보는 문서 등에 쓰던 한지)를 생산해 진상하는 사찰로 지정됐기 때문이다. 스님들이 닥종이 만드는 고된 노역에 시달리다 하나둘 절을 떠났다고 한다. 당시 옥천사엔 닥종이 생산을 위한 물레방아가 12개나 있었다고 전한다. 한때 머무는 스님이 10여명까지 줄었다가, 철종 때 닥종이 부역이 면제되면서 다시 위세를 되찾았다.
이 사찰은 정유재란 때 왜병들에 의해 불태워지는 등 숱한 수난을 겪었다. 진주목 관아의 지원을 받고 권력자들의 시주가 잇따랐던 절이어서, 진주농민 항쟁이나 동학농민 항쟁 때 성난 농민들에 의해 파괴되거나 불태워지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현재는 옥천사는 중심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해 자방루, 적묵당, 심검당, 팔상전, 나한전 등의 당당한 당우를 거느린 작지 않은 사찰이다.
현재 옥천사에는 보물 제495호인 임자명반자 외에 많은 문화재가 있으며, 또 절의 이름이 된 옥천(玉泉)이라는 샘이 유명하다.옥천사에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자방루, 1701년에 주조된 대종, 1816년 제작된 청동은입사향로, 대웅전 등 120여 점의 문화유산이 보관돼 있다.
천왕문 앞에서 바라본 옥천사 입구의 풍경이다. 여기서 직진하지 않고 왼쪽으로 천왕문을 지나 계곡을 따라 옥천사 경내로 진입한다.
고성군 개천면·영현면을 포함하는 연화산 일대는 1983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됐다. 높이 528m로 산정을 중심으로 비교적 경사가 완만하며, 산 중턱에는 대나무가 빽빽이 들어찬 큰 대밭이 있고 주변에 오래된 사찰과 문화재가 많다. 북쪽 기슭에는 유서 깊은 옥천사(玉泉寺)와 연대암·백련암·청연암 등의 암자가 자리하고 있다.
우측에 계곡을 두고 길을 따라 오르면 천왕문이 나타난다.
경내와 사방은 고찰답게 노거수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어 피안이 바로 여기인 듯하다. 다른 지역에도 연화산이란 이름을 가진 산이 있지만, 이곳처럼 아늑하고 품위 있는 곳은 찾기 어려울 것이다. 풍수적으로 보더라도 기막힌 명당임을 알 수 있다.
뒤쪽에는 방화림으로 조성된 편백나무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천왕문(天王門)
일주문에서 10분 정도 오르면 절의 2번째 문인 천왕문이 마중한다. 이 문은 1989년에 만든 것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사천문 안에는 익살맞은 목조 사천왕상이 아직도 건재해 있다. 천왕문의 주인이자 부처를 수호하는 사천왕(四天王)이 눈을 부라리고 중생을 검문한다.
사천왕은 부처 및 불법을 지키는 경호 대장에 걸맞게 대단한 외모과 풍채를 자랑한다. 눈초리가 매섭긴 하지만 쳐다보면 볼수록 정이 드는 밉지 않은 얼굴이다. 허나 사천왕에 밟힌 악귀들은 사정이 그렇지를 못해 한결같이 인상들이 고약한데 그들 눈빛은 원망과 살기로 가득해 보인다.
천왕문을 지나 옥천사로 들어가는 길은 하늘을 가릴 만큼 키가 큰 전나무와 편백나무 ...등 울창한 나무들이 줄지어 늘어 서있고 왼쪽으로는 붉은 벽돌담에 둘러싸인 ‘선경비’비각(碑閣)도 보인다.
천왕문을 들어서면 붉은 벽돌 담장에 둘러싸인 조그만 비각을 만나게 된다.
비각에 안긴 선경비(善敬碑)
비각 안에는 지붕돌을 얹힌 비석이 안겨져 있는데, 이 비는 옥천사에 시주를 많이 한 어느 사대부를 기리고자 세운 것이다. 비문 내용은 '贈 戶曹判書 安公 善敬碑'라 쓰여 있어 나중에 호조판서로 추증(追贈)된 안씨 성을 가진 사대부가 비석의 주인임을 알 수 있는데, 비석이 세워진 것은 1922년이다.
축성전 터를 지키는 하마비의 위엄
지체 높은 고관대작(高官大爵) 마저 꼼짝 못하게 만든 하마비 3글자에 자못 위엄이 서려 보인다.빛바랜 단청이 오래되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비각의 돌담 옆에 '하마비'가 서있다.
비각 앞에는 하마비(下馬碑)가 서 있는데, 그렇다고 선경비를 위해 세워진 것은 절대로 아니다. 이 자리는 원래 제왕의 수복(壽福)을 빌던 축성전(祝聖殿)이 있던 곳이라 아무리 고관이라도 이곳에서부터 말에서 내려 걸어서 오라는 뜻의 하마비를 세운 것이다. 과거를 기억해 현재를 돌아보는 일은 미래를 전망하는 소중한 과정이다.
하마비(下馬碑)를 지나 오른쪽으로 경내로 들어가는 높은 계단 좌우에는 편백나무들이 짙은 그늘을 드리워 너머의 광명을 예고한다.
계단을 따라 옥천사 경내로 들어가 본다.
시원하게 뻗은 편백 녀석이 보기 좋다. 주위에 있는 편백 향이 정신을 맑게 한다. 코를 넓게 펴서 한껏 빨아들였다.
경내를 목전에 둔 전나무 숲길
비각을 지나 다리를 건너면 길 좌우로 늘씬하게 솟은 전나무가 조촐하게 숲길을 이룬다. 비록 10m 남짓의 짧은 거리지만 소소하게 멋을 풍기며 옥천사의 아름다움을 수식하는데 일조한다.
가을도 반하여 머물다간 그 숲길 바닥에는 한 시절 폼 나게 살다간 낙엽들이 더러 깔려 그 흔적을 말해준다. 귀를 접고 누운 낙엽을 보면서 올해도 이제 봄이 성큼 와 있음을 실감나게 하니 세월의 자비 없는 조급함에 그저 한숨만 나올 뿐이다.돌계단을 딛고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간다. 아름드리나무들이 반갑다. 맑은 물소리가 경쾌하게 옆으로 따라 흐른다.
그런 숲길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범종각 너머로 자방루 뜨락이 나온다.
계단을 오르면 널찍한 마당이 나오고, 자방루(滋芳樓)가 우뚝 서 있는 인근엔 다른 건물들도 오밀조밀하게 나열해 있다.
옥천사 전각 배치도
옥천사 범종각
전나무 숲길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연병장처럼 넓은 자방루 뜨락이 펼쳐진다. 뜨락 왼쪽에는 옥천사 범종각이 자리해 있는 범종각...
팔작지붕으로 조성된 전각으로 범종을 봉안하고 있다. 범종(梵鍾)과 법고(法鼓), 운판(雲版), 목어(木魚) 등 옥천사의 범종각에는 사물(四物)을 한군데 모셔 두었다.
운판은 금속판으로 구름모양을 하고 있어 운판이라고 한다. 금속판으로 만들어 장식적이며, 허공에 떠다니는 중생들이 고통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마음이 담겨있다. 법고는 북을 말하는데 종과 더불어 중요한 법구이다. 조석예불이나 의식행사때 절도 있게 두들깁니다. 이 북소리는 모든 축생들이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있다. 목어는 나무로 깍아 만든 물고기로 항상 눈을 뜨고 있어 물고기처럼 졸지 말고 정진에 힘쓰라는 의미이다. 범종은 범종각 안에 모셔져 있는 종으로 위에는 한 마리의 용으로 된 용뉴가 있고 상대와 하대, 유곽에 보상화문과 당초문이 화려하게 새겨져 있다. 또한 구름 속에서 차(茶)를 받치고 있는 공양상이 명문과 함께 돋을 새김 되어 있다.
범종 같은 경우는 1776년에 주조된 대종(大鐘)이 있었으나 현재는 보장각에 있으며, 1987년 재일교포 박명호가 시주하여 만든 종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박명호는 어린 시절 할머니와 이곳을 자주 찾았다고 하는데 당시의 추억을 잊지 못해 거금을 시주했다고 한다.
그리고 사물 외에도 조선 때 싸리나무로 만든 큰 구시가 있는데, 이것은 큰 불사나 법회 때 밥이나 물을 담던 커다란 나무통이다.자방루 뜨락 좌측에 자리한 또 다른 샘터 옥천사 수조
자방루 마당 우측으로 옥천사에서 출가한 청담 큰스님의 부도와 사리탑비가 자리하고 있다.
자방루 마당 경내에서 보장각으로 가는 길목에 옥천사에서 출가한 근대 불교의 1인자 청담대사의 승탑과 탑비가 있다. 옥천사에서도 가장 특별한 존재라 경내에 그의 사후 공간을 만들어 두고두고 그를 기린다.
옥천사에서 출가했고 한국불교의 중흥을 위해 활약한 고승 청담 이순호(李淳浩:1902∼1971) 큰스님의 부도와 사리탑비가 자리하고 있다.
옥천사는 20세기 들어서는 광복이후 교단정화와 불법정화를 위해 청담대종사가 1927년에 첫 승려생활을 한 곳으로 유명한 곳이다.
전각 무우당 앞에 청담 큰스님의 부도와 사리탑비가 자리하고 있다.
청담대종사의 사리탑
빼어난 조형미를 자랑하는 청담대종사의 사리탑 비
마당 한쪽에는 청담대사 사리불탑이 세워져 있다. 교단 정화와 불법 중흥을 위해 헌신한 청담대종사가 1927년 첫 승려 생활을 한 곳이다. 비석 받침돌이 거북이가 아니라 여의주를 문 용이다. 용은 정면을 보지 않고 숨 고르는 듯 왼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입에 보주(寶珠)를 물고 오른쪽으로 머리를 돌린 귀부에 생동감이 넘쳐 보인다.
하얀 피부의 수려한 조각을 자랑하는 승탑에는 청담스님의 사리가 담겨져 있으며, 그 옆에 청담의 일대기를 담은 탑비가 있다.
옥천사는 진주에서 출생한 청담(1902~1971) 스님이 26세에 출가한 사찰이다. 대한불교 조계종의 총무원장과 종정을 두 번 역임했다. 스님은 1969년 총무원장에 취임해 종단 발전에 헌신하다 1971년 11월 15일 세수 70세(법랍 45세)에 홀연히 입적했다. 사리 15과는 스님이 주석했던 도선사와 문수암, 옥천사에 나눠 봉안했다.
경내로 들어가면 보이는 마당 쪽에서 본 옥천사 '자방루(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3호)
고성 옥천사 대웅전으로 가다 걸음을 멈췄다.
마당에서 대웅전은 바로 보이지 않는다. 자방루(磁芳樓)가 마치 성채처럼 절 외곽을 둘러쌓아 대웅전을 가린다. 정면 7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지붕 건물이다. 안내판에서는 전략 요충지에 비상시를 대비한 군사 목적 사찰을 건립한 예가 있는데 옥천사는 군사용 회합장소로 대공간이 필요해 만들었다고 한다. 절을 보호하는 외곽 방어용 성채 역할도 했을거라 한다.자방루 좌우에 안내판이 서 있다.
의상대사가 창건한 옥천사를 대표하는 건물은 대웅전과 자방루(滋芳樓)다. 누각인 자방루 기둥에 온몸을 맡긴 채 기대고 앉아 앞마당과 연화산의 풍경을 감상하노라면 시간 가는 걸 잊을 정도다. 맑은 날 연화산의 풍경도 좋지만, 비 내리는 날 연화산 산등성이를 춤추듯 흘러 다니는 물안개는 마치 무릉도원에 있는 것처럼 느껴질 만큼 한가롭다. 복잡한 세간을 떠나 여유로운 산사, 즉 자연 속에서 자연과 대화를 나누는 일, 그것이 곧 불법이요, 수행이 아니겠는가?
자방루 정면의 처마 밑‘玉泉寺’편액은 영조 말기에 경상감사를 지낸 정수혁의 글씨이다.
자방루는 경내에서 유물전시관인 보장각을 제외한 가장 큰 건물로 옥천사의 오랜 명성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옥천사 자방루 전경. 조선 영조 때 건립된 옥천사의 누각이다.
먼저 마주치게 되는 자방루는 옥천사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멋진 건물이다. 영조 때 처음 짓고 고종 때 중수한 건물인데, 흔히 2층 누각 밑을 통과해 대웅전으로 오르는 형식인 여느 절과 달리 단층 누각으로 지어져, 누각 옆문을 통해 대웅전 앞마당으로 오르게 돼 있다. 왜군 침입에 대비한 승군 교육을 위해 지어진 건물이라고 한다. 옥천사는 경남지역의 대표적인 승군사찰·호국사찰이었다.
경내의 중심인 대웅전으로 가려면 자방루의 옆구리를 싫든 좋든 거쳐야 된다. 옥천사의 속살을 속세에 드러내기가 싫었던지 대웅전 주변을 꽁꽁 가리고 있어 바깥에서는 내부가 전혀 보이질 않는다.
영조 40년(1764년)에 지은 당당한 모습을 지닌 자방루는 정면 7칸 측면 2칸에 주심포 팔작지붕의 강당인데 기둥 사이를 모두 문으로 막고 앞마당과 전면만을 개방 성채같이 견고해 보인다. 이런 유형은 산지에 큰 뜰을 갖춘 절에서 흔히 볼 수 있지만 옥천사 자방루는 그 크기와 형태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1888년 농성이 중건하고 1984년에 보수를 벌였는데, 이 건물은 승장(僧將)이 승군을 지휘. 통제하던 곳으로 최대 340명까지 담을 수 있다. 훈련 외에는 불교 강의나 행사 장소로 쓰였으며, 너른 앞 뜨락에서는 승병들이 훈련을 하거나 군사 사열을 받았다고 한다.옥천사가 독립운동의 근거지였음을 안내하고 있다.
자방루의 왼쪽 출입문
다른 절집과는 달리 대웅전으로 가는 길이 누각인 자방루 옆으로 돌아 들어간다. 오래된 사찰임을 말해주듯이 단청의 색들이 많이 바랬지만 그나름의 멋이 느껴지는 곳이 바로 이 옥천사이다. 자방루로 올라가는 계단 옆으로 앙증스런 바위 하나 놓여 있다. '복두꺼비'란다.
자방루 왼쪽 좁은 출입문으로 들어갔더니 자방루 들어서며 왼쪽 입구 바라 보이는 취향전 요사와 적묵당이 한지붕으로 연결된 것 같았다.
옥천사 청동금고(靑銅金鼓) 보물 495호를 흉내낸 근래에 조성한 금고
자방루 왼쪽 출입문으로 들어가면 오른쪽으로 자방루의 옆구리를 만난다..
'꽃다운 향기가 점점 불어난다'는 뜻을 가진 자방루 다락에 올랐다. 조선 시대 영조 40년(1764년) 뇌원 대사가 창건해 고종 25년(1888년) 중수한 250년이 넘는다.
사찰에서 누각은 일반적으로 대웅전과 마주보고 있는데, 자방루 역시 앞마당과 누각의 마루를 거의 같은 높이로 하여 대웅전 앞마당에서 출입하기 쉽도록 하였다.
대웅전 마당 쪽을 향하는 면은 난간을 설치하여 개방하였고 서쪽과 북쪽 면은 벽을 설치하였는데, 특히 북쪽 면은 7칸 모두 2짝씩의 널판장문을 달아 밖의 경치를 볼 수 있게 하였다.
자방루 대들보에 걸린 그 많던 현판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를 않는다.
자방루는 영조 40년(1764)에 뇌원대사가 창건하고, 고종25년(1888년)에 농성화상이 중건한 건물이다.
특히 조선 후기 단청장 스님들이 1888년 단청을 하면서 그려놓은 비천상(선녀가 피리를 불며 하늘을 나는 그림)과 비룡상(용이 꿈틀거리며 날아오르는 그림)이 살아 움직이는 듯 아름답고 우리나라에서 새 그림을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희귀한 건물이다.
건물 내부에는 1888년에 그려진 비천상(飛天像)과 비룡상(飛龍像)을 비롯해 새 그림 40여 점이 내부를 수식하며, ‘자방루’란 이름은 ‘꽃다운 향기가 점점 불어난다’는 뜻으로 ‘불도를 닦는 누각’이란 뜻이다.
내부 대들보와 기둥머리 등에 그려진 비천상· 비룡· 새· 꽃 단청이 고색창연한 빛을 내뿜는다. 조선말 단청장들의 작품이라고 한다.
옥천사 자방루 기둥에 있는 용두. 누각을 끌고 피안의 세계로 들어가려는 듯 환희심 가득한 표정이 인상적이다.
6개 대들보에는 하늘을 나는 비천상과 비룡이 그려져 있다. 찬찬히 고개를 들어 살피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자방루는 대웅전 방향만 개방된 형태이고 천왕문 방향은 문을 열고 닫는 형태이다. 내부는 누마루로 바닥을 짰고 단일부재인 대들보에 기둥이 없는 통 칸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단순하면서도 간결한 분위기를 준다.자방루의 서쪽 ‘연화옥천‘과는 별도로 걸려 있는 ’慈芳樓‘ 편액은 영조 때 이조참판과 대사헌을 지낸 조영채(曹命采, 1700~1764)가 옥천사에 들렸을 때 쓴 글씨이다.
자방루 처마에 쓰인 편액을 당겨 본다. '연화옥천'이라는 글귀가 보인다.
자방루 뒷쪽(서쪽)에 걸려 있는‘蓮華玉泉’편액은 조선 말기에 형조. 병조판서를 지낸 위당 신관호의 글씨이다.
위당 신관호는 추사 김정희의 수제자로 추사 선생이 "나 보다 났다" 고 극찬 했던 명필이다,
원래 이름은 신관호(申觀浩)였으나 후에 신헌으로 개명했다
위당은 1862년부터 1864년까지 수군통제사로 통영에 내려가 있었으니 그 당시 썼을 것으로 보인다.
자방루를 나와 대웅전으로 향했다.
대웅전과 자방루와 좌우 요사채 사이에 놓인 아늑한 옥천사 안마당...
모든 가람은 지붕이 연꽃무늬처럼 배열되어 있어 독특하다.
연화산을 더욱 꽃답게 하는 곳이, ‘반쯤 핀 연꽃’ 한가운데 자리 잡았다는 천년 고찰 옥천사다. 쌍계사의 말사로 그리 큰 사찰은 아니지만, 자방루, 대웅전 등 자못 웅장한 당우들이 짜임새 있게 들어앉은 모습이 감상할 만하다. 대웅전과 앞의 자방루 그리고 좌우로 자리잡은 요사채인 적묵당· 탐진당(종무소)이 구성해 내는 마당은 건물 크기에 비해 지나치게 작아 보이지만, 그래서 더 아늑하기도 하다.
장대한 규모의 자방루와 드넓은 자방루 뜨락에 비해 대웅전 주변은 정말 협소하다. 뜨락 좌우로 적묵당과 탐진당이 꽉차게 들어앉아 있어 대웅전을 비롯한 건물 4동이 뜨락을 빈틈없이 포위한 형태이다.
탐진당(探眞堂)
향 대웅전 우측으로 있는 이 건물도 적묵당과 마찬가지로 시축(時竺)선사가 1754년(영조 30)에 세워진 건물로 신참 승려들이 머물던 방이었다. 지금은 종무소 및 영가(靈駕)를 봉안한 공간으로 쓰인다.探眞堂 현판 글씨도 진경시대의 특징을 드러낸 동국진체풍이다.
대웅전 앞에 있는 탐진당은 왕생계 영가 1,000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일부는 종무소로 쓰고 있다.
적묵당(寂默堂)
대웅전 앞의 향 대웅전 왼쪽에는 '적묵당'이 있다.
조선 영조30년(1754)에 건립된 'ㅁ'구조의 건물로 고참 승려들이 머물던 큰방이었다. 현재는 지장보살님을 모셔 놓았고 재를 올리거나 공부를 하는 강학당 공간으로 쓰이며, 2006년에 해채 보수 했다.옥천사 대웅전(경남 지방유형문화재 132호)
자방루 옆구리를 지나면 대웅전이 바로 모습을 비춘다.
높은 기단 위에 높직이 들어 앉아 법당(法堂)의 위엄을 드러낸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다포계 팔작(八作)지붕의 다포계(多包系) 양식 건물로 옥천사의 중심지이다.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계 양식이다.
이 대웅전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조선 시대 1657년(효종 8)에 용성화상이 중창하였으며 1677년 묘욱(妙旭)이 개수하고 1736년 보수를 했으나 건물이 너무 낡아 1864년 용운대사가 새롭게 만들어 현재에 이른다.
건물의 규모는 일반 대웅전과 비슷하나, 마주보고 있는 자방루나 적묵당의 크기에 비하면 초라하리 만큼 작은 편이다.
앞마당의 뜰(中庭)도 자방루에 비해 훨씬 작고, 부속 건물에 둘러싸여 답답한 느낌을 준다.
다만 높이 쌓은 석축 위에 건물을 조성함으로써, 이곳을 찾는 사람이면 누구든 위를 올려보게 하여 중심건물이 갖는 당당한 권위를 나타내고 있다.
또한 건물의 부재(部材)들 역시 고급스럽고 튼실하여 조선후기 남해안 지방에 건립된 일반 사찰에 비해 훨씬 고급스러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기둥의 장식물들은 길게 뻗어 있으면서도 완만하게 상승하고 있어서 힘과 유려함을 동시에 느끼게 해 주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아, 이 대웅전은 조선 후기 다포계 팔작집의 화려한 격식을 제대로 갖추고 있으므로, 당시의 대웅전 건축 양식을 이해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대웅전 주련 글씨가 보인다.
하늘 위와 하늘 아래에 홀로 높은 것은 이 마음이라는 '천상천하 독존자심(天上天下獨尊者心)' 글자를 되뇌었다.
마주하는 자방루에 비해 크기가 작다. 앞마당의 뜰도 자방루에 비할 바 아니다.
대웅전 앞 마당에 보이는 괘불지주로 부처님을 그린 괘불을 걸어 야외법회를 할때 사용하던 괘불지주 이다.
대웅전 계단 좌우에는 2쌍의 돌기둥인 괘불지주가 서 있는데 이는 괘불이나 깃발을 거는 용도로 조선 후기에 세워졌다. 기단을 이루고 있는 돌에는 푸른 이끼가 자욱이 끼어 중후한 멋을 선보인다.
밤에 소나무 관솔에 불을 피워 올려놓고 어둠을 밝히는 정료대
대웅전 현판의 위엄, 글씨에 생명력을 불어 넣은 듯 활력이 넘쳐 보인다.
대웅전 편액 글씨는 동화사 대웅전 현판을 모각한 것으로 영조 시절 동국진체풍(東國眞體風)의 대가인 동화사(桐華寺) 기성대사(箕城大師)의 글씨라고 전한다.
대웅전에 봉안된 석가모니3존불
장엄한 대웅전 부처님 닫집 아래로 수려한 보관(寶冠)을 쓴 온후한 표정의 석가불을 중앙에 모시고,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대동하며 중생들의 하례를 받는다.
대웅전에 봉안된 석가모니3존불은 세분 다 경주 옥돌로 조성했다고 하는데 중생의 소원을 잘 들어 주기로 유명하다.
내부의 천장은 2단으로 된 우물천장이고, 불단이 있으며 그 뒤에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영축산에서 법회를 열고 있는 장면을 그린 '석가모니 영산회상도’후불탱화가 걸려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을 문수, 보현보살을 협시보살로 10대 보살과 10대 제자 등을 배치했다.
폭 3.3m, 높이 3m 규모로, 불교미술작가협회장을 지낸 한승구 화백이 1년여간 제작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불화를 채용하고 현대적 요소를 가미했으며, 의습과 천의 문양은 순금분을 사용해 불화의 격을 높혔다.
또한, 천연채색을 사용해 최상의 재질을 유지했다고 한다.....대웅전 향 불단 좌측으로는 신중단이 있다...
대웅전 향 불단 우측으로는 지장탱. 아미타탱 등이 있는 영가단이 있다...
장엄한 부처님 닫집
대웅전 내벽에 그려진 벽화
장엄한 대웅전 수미단
대웅전 내벽에 그려진 벽화
옥천사 괘
옥천사 괘불
옥천사 괘불함 부분(범자梵字)
고성 옥천사 괘불함(固城 玉泉寺 掛佛函)은 소나무 목판을 연결해 제작하였다.
일광(日光), 월광(月光) 명(銘) 장식과 글자와 고대 인도 문자인 범자(梵字)를 입사(入絲, 금속을 파낸 뒤 다른 색상의 금속을 넣는 것) 기법으로 새긴 장석(裝錫)이 붙어 있다. 괘불함 내부 묵서에는 진양목(晋陽牧, 진주)에 사는 김업발과 철성읍(鐵城邑, 고성)에서 활동하는 김윤평 등 장식을 담당했던 사람들의 이름이 남아 있다.
괘불함 옆으로 출입문이 있는걸 보니 괘불이동때 사용되나 보다...
오래된 빛바랜 대웅전 문살
대웅전 후벽 외부벽과 괘불을 고정하던 나무들...
대웅전 외부 공포
대웅전 외벽에 그려진 외부벽화로 부처나 관음보살 이야기 대신 꽃과 화병, 채소, 붓 등이 그려져 있다. 무슨 사연이 깃들여진 것일까? 절의 주요 고객이던 사대부를 위한 그림일까?
대웅전 부처님께 삼배를 올리고 바로 옆에 있는 지장보살을 비롯해 염라대왕 등을 모신 명부전으로 걸음을 옮겼다.
명부전 옆에는 흙과 기와로 빚은 정겨운 옛 굴뚝이 나란히 자리하여 모락모락 연기를 피우던 지난 추억을 그리워하게 한다.
대웅전 앞 에서 바라본 자방루의 풍경이다.
옥천사 명부전(경남 문화재자료 146호)
대웅전 좌측에는 지장보살(地藏菩薩)과 명부(冥府, 저승)의 주요 식구를 봉안한 명부전이 있다.
고종 32년(1895년)에 건립했으며, 정면3칸 측면 2칸의 주심포계의 다포계 팔작지붕 건물로 1730년에 지어 졌으며, 1895년에 중수했다. 쇠서를 이용하여 네 모서리마다 각 7마리의 봉황새를 앉혔으며 내부에는 활처럼 굽은 중보 2량을 가구하여 조선 건축의 아름다움을 한껏 표현하고 있다
옥천사 명부전 불단에는 포근하고 귀여운 인상의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무독귀왕(無毒鬼王)과 도명존자(道明尊者)가 시립(侍立)해 있다.
명부전은 지장보살을 모시고, 죽은 이의 넋을 인도하여 극락왕생 하도록 기원하는 전각이다.
연등이 고운 빛깔로 빛난다. 죽어도 곱게 붉게 죽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옥천사 명부전내 시왕상
‘시왕도’(보물 제1693호) 가 걸려있는 경남 고성 옥천사 명부전 내부
원래 10폭인 시왕도 중 일부가 도난당한 탓에 10개의 시왕상과 8폭의 시왕도가 엇갈리게 배치돼 있다.
명부전 출입문 좌, 우측에 비수를 들고 눈알을 부라리는 신장상
‘시왕도’(보물 제1693호)
명부전 외부벽화
옥천사 명부전의 공포가 아름다워... 명부전 처마의 날렵한 공포...
나한전에서 바라본 명부전의 후면이다..
명부전을 나와 칠성각으로 향하니 칠성각 옆으로 스님 수행공간인 취향전이 처마를 맞대로 있다..
차례로 칠성각, 조사각, 독성.산신각, 나한전
옥천사 칠성각(七星閣)
칠성각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칠성(七星)의 보금자리이다.
치성광여래를 본존으로 모시고 있는 전각으로 칠성각은 북두칠성의 칠성을 신격화시켜 천재지변을 다스리는 신을 모시는 전각이다.
내부에는 1981년에 만든 5점의 칠성탱화가 걸려있다.
동학란으로 대부분이 건물이 소실되자 이에 농성 화상은 더욱 분발하여 다음해 1895년에 곧바로 명부전(冥府殿)과 나한전(羅漢殿)을 복구하고 1897년(고종 34)에는 칠성각(七聖閣)과 독성각(獨聖閣), 산신각(山神閣)을 중건하여 사찰의 규모를 갖춰 놓았다.
경내에서 칠성각 다음으로 가장 뒤쪽에 자리한 옥천사 조사전(祖師殿)은 근래에 지어진 것으로 절을 창건했다는 의상대사의 진영(眞影)과 서응대사(瑞應大師) 채서응(蔡瑞應), 청담대종사의 진영이 봉안되어 있다.
조사전 중앙을 장식하고 있는 의상대사 진영
청담대종사와 백련 상오선사 진영
포광당 형진 스님과 서응 대강백 스님 진영
조사전 우측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작다는 독성각(1.08평)과 산령각(0.46평)이 앙증맞게 나란히 서 있다.
옥천사 독성각내부의 시원하게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독성도(獨聖圖)
왼쪽에 자리한 독성각은 독성(獨聖, 나반존자)의 보금자리로 1897년에 지어졌으며, 사람 1명이 들어가 앉으면 그냥 꽉 차버린다.
산령각
산령각은 산신(山神)의 보금자리로 역시 1897년에 세워졌는데,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독성각 옆에 나란하게 배치되어 있다. 1897년(고종 34)에는 중건된 것이며 신령스러운 산신을 모시는 전각이다. 산령각은 독성각보다도 작아서 사람이 아예 들어갈 수가 없다. 그래서 천상 밖에서 예를 올려야 된다.
산신 가족의 단란함이 엿보이는 산신도(山神圖)
대웅전 뒤쪽의 옥천사 나한전(羅漢殿), 나한전은 주로 십육나한을 모신 전각을 말한다.
나한전 주련
古佛未生前 (고불미생전) 옛 부처 나기 전에
凝然一相圓 (응연일상원 ) 한 상이 뚜렷이 밝았도다.
釋迦猶未會 (석가유미회) 석가도 오히려 알지 못했거니
迦葉豈能傳 (가섭기능전) 가섭이 어찌 전할 손가.
나한전 주련은 성파(星坡) 하동주(河東州)의 글씨로 그는 추사(秋史)의 필법을 이은 근래의 명필로 경남 거제에 살면서 많은 글씨를 남겼다. 이곳 나한전의 바깥 기둥의 주련도 그의 글씨
나한전 편액 글씨도 영조 때 동화사 기성대사의 모각 글씨이다.
대웅전 뒤쪽에 자리한 나한전은 16나한(羅漢)의 거처로 불단에는 정조 시절에 조성된 석가 3존불(석가불, 미륵보살, 제화갈라보살)이 봉안되어 있다.
나한전은 1895년에 지어진 것으로 16나한 가운데 9상은 조선 후기 것이고, 7상은 근래에 나한을 손질하면서 새롭게 붙여 넣었다. 이곳 나한은 영험이 있다고 전한다.
첫번째는 바를 든 모습의 빈두르 존자, 두번째는 선악을 구별하는 능력이 있는 가나가바차, 세번째는 가나가바라타자, 네번째는 수빌타존자, 다섯번째는 등을 끍고 있는 나쿠라, 여섯번째는 참선하고 있는 모습의 바다라, 일곱번째는 한쪽 손가락을 구부리고 있는 카리카, 여덟번째는 바자라푸드라, 아홉번째는 지바카, 열번째는 판타카, 열한번째는 부처님의 아들인 라후라, 열두번째는 나가세나, 열세번째는 경전을 읽고 있는 안가다, 열네번째는 선정의 모습인 바나바시, 열다섯번째는 아지타, 마지막으로 현인의 모습인 수다판타카라고 한다. 이 분들은 왼쪽에는 홀수, 오른쪽에는 짝수의 배열로 봉안된다.
옥천사 팔상전(八相殿)은 대웅전 우측에 자리한 팔상전은 부처의 일생을 담은 8폭의 그림을 담은 맞배지붕 건물이다.
이 건물은 1890년(고종 27년)에 세워진 것으로 8상 탱화는 도난을 방지하고자 보장각에 따로 보관하고 있으며, 탱화의 사진을 대신 걸어 두었다.
화엄종 10대 사찰 중의 하나인 옥천사는 오래 묵은 건물과 빛바랜 단청들이 고색창연한 맛을 풍긴다.
옥천각으로 향한다. 대웅전 뒤 팔상전 오른쪽으로 가면 옥샘을 안내하는 팻말이 보인다. 팔상전을 돌면 샘물의 집인 옥천각이 있다.
팻말을 따라 옥샘으로 이동한다.
옥샘 옆의 수행중인 스님의 거처지지
옥샘(옥천)의 풍경이다. 옥샘을 보호하는 보호각인 옥천각이 설치되어 있다. 팔상전 옆에 사철 마르지 않는 샘이 있는데 솟는 물맛이 좋다.
옥천사의 명물인 옥천(玉泉), 둥그렇게 파인 샘에서 연화산이 베푼 옥계수가 쉬지 않고 솟구친다.
경내에 달고 맛있는 물이 끊이지 않고 솟는 샘이 있어 이름을 옥천수라 했다.
옥천은 물이 솟는 샘터로 절에서는 그를 위해 옥천각이란 수각(水閣)까지 씌웠는데, 이 샘터는 옥천사 창건시절 부터 있었다고 하며, 옥천사란 이름이 바로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전한다.
전설에 의하면 창건 이후 이 샘에서 물과 함께 매일 일정량의 공양미 흘러나와 그걸로 공양을 했다고 하며, 어느 욕심꾸러기 승려가 더 많은 쌀을 얻기 위해 샘을 파헤쳤는데, 샘이 크게 노해 쌀은커녕 옥수도 끊겼다고 한다.
그래서 다른 노스님이 지극정성으로 잘못했다고 기도를 올리며 샘을 달래니 샘도 화를 풀었는지 연꽃 1송이가 활짝 피어 나면서 물이 콸콸 솟아나 만병통치의 신통한 약효가 있는 약물이 되었다는 것이다.
고성 지역에 이름난 약수로 왕년에는 샘물에서 목욕을 하는 중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하며, 지금은 목욕은 못하고 물만 떠 마실 수 있다.
산사에서 마시는 샘물은 맛이 다 고만고만하지만 고성 옥천사의 물맛은 신선이 마시는 물처럼 뭔가 특별해 보인다. 물을 마셔보니 자연이 내린 특별한 양념이 담긴 듯 맛이 달콤하다. 옥샘을 시원하게 마셨다. 마음의 티끌까지 씻기는 기분이다.자방루 뒷면 대웅전 쪽에서 바라본 자방루
속세의 먼지를 씻어내듯 시원한 물 한 바가지 마시고 돌아나오니
탐진당 뒤로 새로이 불사한 제가불자들이 묵을 선주당과 공양간이 보인다.
금당 아래의 선주당 마당 한켠의 수조
새로이 불사한 제가불자들이 묵을 선주당
자방루의 오른쪽 출입문인 해탈문을 통해 자방루 마당으로 내려 선다...
대웅전 영역을 나와
청담대사 탐과 탑비가 있는 템플스테이관인 무우당 옆을 지나...
옥천사의 보물이 담긴 성보박물관인 보장각(寶藏閣)으로 향해본다.
2층 규모의 보장각이 늠름한 모습을 뽐내며 자리해 있다. 1999년 만든 불교유물 보장시설인 보장각이 설립된 뒤 2002년 유물전시관으로 명칭 변경하여 건평 200평, 2층 규모의 팔작지붕 누마루 형식을 갖추고 있다.
보장각은 옥천사의 귀한 보물을 간직한 꿀단지로 오래된 큰 절에 흔히 있는 성보박물관(聖寶博物館)이다.
경내에는 고려시대에 동(銅)으로 만든 옥천사 제일의 보물인 옥천사 청동금고인 임자명반자(玉泉寺壬子銘飯子:보물 495)를 비롯해 옥천사 자방루(경남 유형문화재 53)·옥천사 향로(경남 유형문화재 59)·옥천사대종(경남 유형문화재 60)·옥천사대웅전(경남 유형문화재 132), 신중탱화, 대종 등의 불화와 고문서, 불상, 여러 불기(佛器) 등 200여 점의 유물이 소중히 담겨져 있다.
옥천사에 이처럼 많은 문화재가 있었던 까닭은 그만큼 재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진주와 접해있는 덕에 진주의 권문세가들이 시주를 많이 했고 진주목과 경상우도 감영, 삼도수군 통제영, 고성현 등 관아의 도움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보장각은 1999년 정부의 지원으로 세워졌으며, 입장료는 없다. 매주 월요일은 문을 걸고 쉬지만 2.3층은 관람이 가능하다.3층부터 올라본다.
옥천사 대종(大鐘) 경남 지방유형문화재 50호로 대종은 1701년에 조성된 것이다.
옥천사 청동금고(靑銅金鼓) - 보물 495호
옥천사에서 가장 놓치지 말아야 할 볼거리는 1252년(고려 고종 39)에 제작된 옥천사 보장각 2층의 백미인 임자명반자(壬子銘飯子)라 불리는 청동금고가 아닐까 싶다. 청동금고는 말그대로 청동으로 만든 쇠북으로 1252년(고려 고종 39년)에 제작된 고려 후기 금고(쇠북)이다. 다른 말로 반자(飯子)라고도 하나 잘 쓰이지는 않는다. 표면지름 55cm, 측면너비 14cm로 전면에 굵은 융기선(隆起線)으로 4줄의 동심원(同心圓)을 두르고 후면은 비웠다.
임자명 반자, 반자란 절에서 사용하는 금속으로 만든 일종의 타악기 이다. 금고 또는 금구라고도 하며 절에서 대중을 불러모으거나, 급한 일을 알리는데 사용한 도구이다.
금고 측면에는 187자에 이르는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는데, 첫머리에 '高麗二十三王 環甲之年 壬子四月十二日 在於京師工人家 中鑄成智異山 安養社之飯子'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어 1252년 고려 황제인 고종(高宗)의 환갑을 기념하여 만들었음을 알려준다. 만든 이후 지리산에 있던 안양사(安養社)에 두었는데, 그런 금고가 어찌 옥천사까지 흘러들어 왔는지는 전하는 바가 없다.
금고 제작자인 공인별장(工人別將) 한중서(韓仲敍)는 내소사범종(來蘇寺梵鍾) 등 여러 점의 유물을 남긴 인물로 고려 후기에 뛰어났던 장인으로 여겨진다. 귀족과 승려들이 발원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고, 안양사의 사(社)라는 이름에서 고려 말에 유행했던 신앙결사(信仰結社)의 한 형태로 조성된 작품으로 보인다. 이제는 760년이 넘은 노구(老軀)로 현역에서 은퇴하여 이렇게 박물관의 한 부분을 장식한다.
옥천사 장대청안목책(將大廳案目冊) - 1857년 작
옥천사지장보살및 시왕도 (보물 제1693호)
지장보살과 열 명의 왕들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는 조선 1737년, 비단에 색[絹本彩色]한 고성 옥천사 소장불화
1904년에 제작된 모연문(募緣文) - 경남 지방유형문화재 299호
옥천사지장계안록
칠성각 창건 모연문
옥천사 신중단장등계책
바라
금강령 오령 강쇠
목패 (나무관세음보살패)
옥천사 향로(香爐) - 경남 지방유형문화재 59호
옥천사 향로는 고려 후기에서 조선 초기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입 안쪽에는 점선으로 '의령수도사(宜寧修道寺)'란 글씨가 있어 그곳에서 왔음을 알려주며, 가경(嘉慶) 21년, 즉 1816년(순조 16년)에 보수했다는 내용이 있는데, 그때 향로 받침을 새로 한 것으로 보인다.
이 향로는 무늬를 먼저 새긴 다음 은을 입히는 방법으로 문양을 새겼으며, 표충사(表忠寺) 은입사 향로와 같은 수법을 보여주는 괜찮은 작품이다.향완
옥천사 승군들이 사용한 언월도(偃月刀)
옥천사 인장함과 인장
1866년에 강원 교재로 판각한 금강경 목판 - 19세기 작
연화옥천 편액과 기와 암막새
대방광불화엄경
능엄경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
불상아미타경
옥천사 나한이 돌아오기까지
아씨다 15존상
가낙가발리타사 3존자
벌나파사 14존자
옥천사의 보물이 담긴 성보박물관인 보장각(寶藏閣)을 나와
보장각 앞에는 속인(俗人)들이 끌고 온 수레들이 뒷 꽁무니를 들이밀며 바퀴를 접고 쉬고 있다.
보장각 마당에서 바라본 무우당으로 무우당은 템플스테이 공간이다. 옥천사는 휴식형(최대 3박4일)과 체험형(1박2일) 템플스테이도 진행하고 있다.
보장각을 지나 옥천사 경내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한 삼천불전의 풍경이다.
삼천불전 내부에는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대세지보살과 관음보살을 좌우협시로 모시고 있고...
정면, 좌측, 우측에 3,000불을 조성해 놓고 있었다.
삼천불전 앞 해우소 옆 수조가 참 정겹다.
뒤편 대나무를 따라 잠시 거닐었다. 바람이 불자 대나무는 온몸을 내어 사각사각 장단을 맞춘다.
잠시 눈을 감고 숲을 느껴보는 지금이 좋다. 스쳐 지나가는 바람마저 달달하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일상에 찌든 내 삶을 내려놓고 그리움을 담을 수 있어 좋다.
삼천불전에서 나와 옥천사의 풍경을 카메라에 담으며 옥천사를 다시 돌아 본다...
간간이 마주치는 사람들과 눈인사를 나누며 휘적휘적 걸었다. 나보다 몇 십 년이나 선배인 고목들을 섬기는 마음으로 수피를 쓰다듬기도 하고, 키를 가늠하러 고개를 들어 존경하는 마음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아직은 고즈넉한 피안으로 조금 후면 잔챙이들이 아옹거리는 사바로 접어들어야 할터이다.
경남 고성군 개천면 옥천사 주변은 경상남도 기념물 제140호로 지정되어 있다.
올해 3월 지심도 배가 안 떠서 갑자기 급 변경되어 찾았던 옥천사를 가을에 삼사 순례 차 다시 들려 보았더니 고운 단풍 숲이 쓸쓸하면서도 운치가 있었기에 발길 닿는 대로 추억을 떠올리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옥천사 주차장을 향해 걷는 발길을 따라 아름드리 나무들이 지친 일상에 활력을 준다.
한 폭의 한국화와 마주하는 옥천사 일주문도 지나...
고즈넉한 피안의 세계를 떠나 이제 나를 포함한 잔챙이들이 아옹거리는 사바로 접어든다... 소류지 옆 주차장 쪽에서 바라본 옥천 소류지(沼溜地)가 가을과 잘 어울린다.
옥천사를 충분히 돌아보고 다시 일주문을 나와 소류지 옆의 주차장으로 돌아와 옥천사 탐방을 종료한 후 고운 석양보며 다시 우리의 터전으로 돌아간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사람의 일생중에 가장 중요한 때가 언제인가?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 라는 세가지의 질문을 했다고 한다.
세가지 질문에 대한 답은 ‘가장 중요한 때가 바로 지금이고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만나는 사람이며,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하고 있는 일이라고 했다’ 한다.
또한 독일 태생으로 ‘나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이란 시로 유명한 샤퍼 시인은 또 다른 시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인생의 시계는 단 한 번 멈추는데 언제 어느 시간에 멈출지도 모르기 때문에 지금이 오직 내 시간이므로 살며 사랑하며 의지로 수고하고....'
그렇다. 오늘은 오늘이다. 내일을 걱정하기 위해서 오늘의 시간을 헛되게 보낼 수는 없다.
우리은 지금 무얼 하고 있나? 책을 읽고 있나? 음악을 감상하고 있요? 향기로운 차 한잔을 즐기고 있나? 여행을 하고 계신가?
무엇을 하고 있던 그 순간에 충실해야 한다. 순간, 순간, 매 순간에 다른 생각은 하지 마시고 오로지 지금하고 있는 일에 열중 해야한다.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하자. 언제까지나 그 시간들이 우리에게 결코 오지 않는다.
지금 이순간... 소중한 시간들임을 꼭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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