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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 도잠서당과 도잠서원(경북 영천시 대창면 용호리 140)여행방/경상도 2018. 8. 2. 18:04
도잠서당과 도잠서원(경상북도 문화화재자료 100호)
2017. 8. 2.
2017. 7. 30. 태풍 '종달이'의 영향으로 연일 36도를 넘어서던 사상 초유의 더위와 작열하던 태양빛도 조금은 주춤해진 오늘 시원한 바람 맞으며 영천으로 혼자만의 여행을 떠나본다.
오늘 여행은 영천시 북안면의 돌할매. 만불사 그리고 도계서원을 보고 영천시 대창면으로 이동하여 도잠서원과 영지사를 둘러볼 계획이다.
영천 도계서원을 보고 50여분을 달려 오늘 네번째 여행지 도잠서당과 도잠서원으로 향해본다....
도화담의 두터운 못둑. 그 못둑에는 오래묵은 회나무와 버들나무가 서식한다. 좌측으로 도잠서당이 보인다..
도잠서원과 조호익 신도비는 같은 동네에 위치하고 있으며 100m 정도 거리를 두고 있다. 두 곳 모두 도잠서원이지만 편의를 위해 건물 명칭으로 구분하자면 신도비 ·도잠서당과 도잠서원으로 나눌 수 있다. 유적지에 갔을 때 먼저 만나는 것은 신도비와 도잠서당 건물이고 그곳에서 부터 조금 걸어 올라가면 도잠서원을 만나게 된다.
도잠서당 입구에 세워진 하마비(下馬碑)는 즉 지위를 막론하고 말에서 내려 걸어가라는 비이다.
道岑書院(도잠서원)
도잠서원은 창건 당시에는 지봉서원이라고 불렀다. 1678년(숙종 4) 현재의 위치인 용호리로 옮겨 세웠는데 이때 도잠(道岑)이라는 편액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폐되었다가 1914년에 복원했으며, 1981년에 보수 · 정화작업을 하여 경내를 정리했다.
망회정과 조호익 신도비각
도잠서원에 있는 조호익 신도비의 규모는 높이 2.67m, 폭 0.9m, 두께 0.2m이고 비각 정면과 측면이 1칸씩으로 되어 있다.
신도비는 1642년(인조 20)에 건립되었다.
망회정은 1603년(선조 36)에 조호익이 건립하여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道岑書堂(도잠서당) 강당
高宗(고종) 5년(1868)에 철폐되었다가 1914년 복원 1981년 정부의 지원으로 보수, 정화되었다.
인기척이 없는 뒷뜰에도 여전히 여름의 그림자가 쓸쓸함을 느끼게 한다.
아무도 없는듯 담장 너머로 바라본 마당에는 파란 잔디만 곱게 집을 지키고 있다.
공이 후학을 가르쳤던 도잠서당
담장 너머에서 바라다 본 도잠서당
망회정과 조호익 신도비각 사이로 본 도잠서당
도담서당 측문쪽에서 바라본 전경이다.
서원 앞에서 건너다 본 도화담
물 위에 비친 세상은 조용하기만 하고 치마폭 주름처럼 아늑하게 두른 산 자락 또한 은근한 멋을 풍긴다.유적지에 갔을 때 먼저 만나는 것은 신도비와 도잠서당 건물이고 그곳에서부터 조금 올라가면 도잠서원을 만나게 된다.
새로이 신축한 道岑書院(도잠서원) 전경이다..
도잠서원 표지석
도잠서원 지수문의 위용
선조 임금이 내린 '관서부자關西夫子' '夫子(부자)'라 함은 공자나 주자같이 덕행이 높아 모든 사람의 스승이 될 만한 사람에 대한 존칭이다.
도잠서원(道岑書院)은 지산(芝山) 조호익(曺好益, 1545~1609)의 학덕과 충의를 추모하기 위해 1612년(광해군 4) 영천에 창건되었다. 조호익은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연구한 학자이다.
조호익은 최황(崔滉, 1529~1603)에게 반항한 죄로 평안남도 강동(江東)에 유배된 적이 있다. 1576년(선조 9) 경상도 도사 최황이 부임하여 조호익을 군적검독관(軍籍檢督官)으로 임명했으나 상을 당하여 사퇴하자 최황은 명령을 거부하는 토호라고 상주하여 그를 평안도 강동으로 유배 보냈다.
1592년 임진왜란 발발 후 유배형에서 풀려난 조호익은 금오랑(金吾郞)으로 임명되어 임금이 있는 의주 행재소(行在所)로 갔다. 그는 소모관이 되어 군민을 규합했고 중화, 상원, 평양 등지에서 전공을 세웠다.조호익이 이끄는 의병은 1593년 1월 2일 명나라군과 함께 평양성 공격에 참여했다. 이들 의병은 평양성을 포위하고 명나라 장수 낙상지(駱尙志), 오유충(吳惟忠)을 따라 보통문 부근에서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사들과 전투를 벌여 적을 다수 사살한 후 내성(內城)을 공격했다. 일본군이 곤경에 처하자 명나라군 장수 이여송은 일본군의 퇴로를 열어주었고 그들이 야음을 틈타 도주할 것을 예측한 조호익은 대동강으로 가서 군사를 매복시켰다. 이날 밤 적이 나타나자 매복해 있던 군사들이 공격하여 일본군 수백 명을 참수했다. 또 퇴각하는 일본군을 추격하여 임진강변에서 타격을 가했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대가 퇴각하자 이번에는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를 추격하여 경기도 양주에서 군사를 매복시켜 기습작전을 전개하여 적을 격파하는 전공을 세웠다.
그 후 일본군을 쫒아 경상남도 양산까지 내려갔으나 명나라와 일본 간의 협상이 진행되면서 전투가 중단되자 자신을 따르던 박대덕, 김익상 등을 고향 강동으로 돌려보냄으로써 조호익의 의병부대는 해체되었다. 그는 전투공로를 인정받아 1595년에 안주목사가 되었다.
정유재란 때 다시 강동에서 의병을 일으킨 그는 나중에 선산부사(善山府使)로 임명되었으나 지병을 이유로 사퇴했다. 선조 임금은 그에게 관서부자(關西夫子)를 내렸으며, 사후에 시호 문간(文簡)과 이조판서의 직위를 내려 공로를 치하했다.서원의 삼문은 굳게 잠기어 침묵하고 있었고 낮은 담장 밖에서 안을 보고 담을 수 밖에 없었다...
대문은 굳게 잠겨 있고, 담너머로 보이는 쓸쓸한 마당에는 백일홍도 피어있고 겨울이 되면 낙엽 위로 흰눈이 쌓여 더욱더 고즈넉해보일 것 같다.
서원내부에는 사당, 강당, 사주문 포사 등이 있고 사당에는 위패를 모시고 해마다 3월과 9월에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낸다.
우측의 포사는 제사지 낼 때 제수를 장만하여 두며 서원을 지키는 사람이 머물던 곳이다.
강당 좌측의 서제인 봉원제와 우측의 동제인 희안제
도잠서원 강당은 회만당(會萬堂), 동협은 양원협(養源夾), 서협은 구단협(求端夾)이다..
담장 밖에서 엿본 도잠서원 속살의 일부, 도잠서원의 강당인 회만당(會萬堂)이 보인다.
도잠서원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1칸으로 2칸의 마루를 두고 오른쪽에 1칸방, 왼쪽에 두칸방을 구몄다.
사당은 강당 뒤로 있으며 성모묘(聖慕廟), 사원의 내삼문은 영수문(永綬門)이다..
도화담
지금으로부터 약400여년전 이곳에 터를 잡으신 지산 조호익 선생께서는 작은 연못을 만드시고 이름을 도화라 불렀다. 바로 이 저수지와 인접하여 조선 숙종 시대 사액받은 도잠서원이 자리하여 지금도 선생을 '관서부자'라 부르며 존중심을 나타낸다.
도잠서원의 외삼문은 지수문(止水門)이다.
春日偶成(천일우성)봄날에 우연히 짓다 / 조호익
門外晴雲洞外塵(문외청운동외진) 문밖 맑은 구름, 동네 밖엔 티끌인데
蕭然林下一幽人(소연림하일유인) 쓸쓸한 숲에는 세상을 등진 한 사람.
滿庭花落時行坐(만정화락시행좌) 뜰에 가득 꽃이 떨어질 때, 가다가 앉으면서
不信人間有錦茵(불신인간유금인) 세상에 비단 자리 있음을 믿지 않네도잠서당(道岑書堂)과 도잠서원(道岑書院)을 담장너머로 아쉽게 보고 5분거리에 있는 오늘의 마지막 여행지 영지사로 향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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