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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삼층탑을 가진 군위 지보사(持寶寺)-경북 군위군 군위읍 상곡리 280사찰여행/경상도 2018. 6. 25. 12:14
화려한 삼층탑을 가진 군위 지보사(持寶寺)
2017. 6. 25.
2017. 6. 23. 형제들과 이맘때 엄마생신 즈음이면 친정엄마 산소에 와서 산소도 들러 보고 산소 근처의 정자에서 맛난 고기도 구워 먹으면서 친정엄마를 기념한다.
친정 엄마 산소 가다가 덤으로 볼수 있었던 군위군의 법주사를 나와서 우리 고향 선산에 묻혀 계시는 울 엄마를 만나러 길을 달려 간다......
친정 할아버지 산소와 엄마 산소에 인사드리고 우리 형제들과 아버지와 함께 산소 옆 정자에 모였다..
새 신랑과 신부인 질녀 내외의 노래 인사..
각각 준비해온 음식과 함께 고기도 맛있게 구워 먹고
가족들과 그렇게 함께 하루를 보냈다... 다시 내년에도 이렇게 만나기를 약속하며..
그렇게 가족들과 헤어지고 포항으로 돌아오는 길에 경북 군위군 군위읍 상곡리 280번지 지보사로 향해본다..
전형적인 시골길로 들어서면 과수원 길이 나온다. 먼 곳에서 바라보면 더욱 멋스러운 '지보사' 들어가는 시골길이다.
상곡리 마을 지나 선방산 가는 길로 쭉 올라가면 이렇게 지보사가 바로 나온다. 절 앞까지 자동차로 갈 수 있다.
경상북도 군위군 군위읍 동북쪽에 해발 437m에 이르는 그리 높지 않은 산이 하나 솟아 있는데 그 모습이 마치 배를 띄운 것 같다고 해서 선방산(船放山)이라 한다.
선방산은 옛부터 단청의 물감으로 쓰이는 오색 흙이 나는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지보사(持寶寺)
군위읍 상곡리 동북쪽에 있는, 해발437m 선방산 산중턱에 자리하고 있는 선방산(船放山)의 남쪽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지보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인 은해사의 말사로 신라 문무왕 13년(673)에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오는 천년고찰(千年古刹)이다.
이 절에는 창건 당시부터 맷돌, 가마솥, 청동향로 등 세 가지 보물을 지니고 있었다 하여 지보사라 불렀다.
그러나 창건 이후 근대까지의 역사는 전하지 않는다. 1942년에는 천오(天梧)와 동허(東虛)가 중수하였고, 1972년에는 만오(晩悟)가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지보사(持寶寺)는 예로부터 보물(寶物)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는데 신라시대부터 전해온 청동향로와 열 사람이 들어가고도 남을 만큼 큰 가마솥, 아무리 갈아도 물만 부으면 처음 모습으로 되돌아가 닳지 않는 맷돌 등 3가지 보물이 있었는데 임진왜란 당시 소실되었다고 하고 또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가져갔다고 전할 뿐 지금은 남아 있는 것이 없다.
극라교를 지나 똑바로 오르면 보화루를 거쳐 대웅전으로 이어지는 선상이다..
사찰의 초입에 자리한 비석은 모두 4기로 대웅전불사공덕비(2000), 동허대선사지비(1967), 지보사중창사적비(1946), 통일기원일붕선시비(1982)가 한 곳에 모여 있고, 작은 개울을 끼고 옆에는 연못이었을 듯한 작은 웅덩이가 잡초에 쌓여 있었다.
중창주 동허대선사지비. 1967年 丁未 건립.
백동허(1871-1966)
1883년 13세에 고운사에서 출가해 수월(水月)스님의 문하에.
1925년 부터 압곡사, 주월암, 각화사 등의 주지를 역임.
1936년 지보사로 옮겨 1942년 불사를 시작으로 1966년 입적할 때까지 대불사를 이루었다.지보사중창사적비(持寶寺重炷事蹟碑) 1967年 건립
통일기원일붕선시비(統一祈願一鵬禪詩碑)1982年 건립
과수원 길을 따라 올라 가면 지보사 경내가 눈에 들어오고, 일주문을 대신한 은행나무가 보여진다.
지보사에 오면 이 모습을 가장 먼저 보게 된다. 가운데 계단 옆에 은행나무가 정말 멋지다.
일주문,천왕문, 불이문도 없이 고목이 된 나무들이 지키고 있는 돌계단을 올라가면서 마음은 착잡했었다.
들머리에 좋은 글귀 한 번 읽고 간다.
계단 옆에는 부처님의 말씀이 새겨져 있다.
"생각이 말이 되고
말이 행동이 되고
행동이 습관이 되고
습관이 운명을 좌우한다‘ 부처님의 말씀을 읽으며 돌계단을 오른다.계단을 거의 올라서야 300년 넘은 은행나무 옆 보화루의 모습이 살짝 드러난다. 저 안쪽으로 보이는 계단을 올라서야 실제 경내로 들어서게 된다.
절 마당 누대로 오르는 가파른 돌계단이 숨을 가쁘게 한다.
보화루는 대웅전을 가로막고, 아름드리 은행나무는 긴 가지를 늘어뜨려 또한 보화루를 숨기고 있다.
겹겹이 가리고 막아 방문자의 걸음을 절로 느리게 한다.일주문도 천왕문도 불이문도 없는 산길을 올라 좁다란 절 앞 계단에 오르면 우뚝선 누각(樓閣)이 앞을 가로 막는데 경내로 들어서는 관문의 구실을 한다. 1994년, 옛 모습대로 중수한 보화루이다.
보화루(寶華樓)는 정면 3칸과 측면 2칸의 규모로 지어진 19세기 건축물로 추정되고 있다.
원래 내부에는 선방산 지보사 불사사적기(1826), 지보사등촉계창설기(1826), 지보암중수기(1942), 위령실신축기(1963),지보암불사기문(1972), 불사(1972), 강화당불사기(1981) 등 모두 7점의 현판이 걸려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보화루가 종무소로 탈바꿈하면서 창방을 달고 단청불사도 새롭게 하는 과정에서 모두 떼어내고 따로 보관 중에 있다고 한다.
보화루 앞의 300년 넘는 은행나무가 기품을 자랑한다..
은행나무 앞에서 바라본 요사이다.
삼층석탑 (보물 제 682호)
계단을 오르면 대웅전을 앞에 두고 왼쪽으로 비켜 서 있는 빛바랜 석탑이 회색 얼굴을 드러내고 있다.
켜켜이 무거운 세월을 떠안고도 그 태어난 기품과 선미를 지키고 서 있어 절로 숙연해진다.현재 지보사(持寶寺)에 남아있는 보물(寶物)이라면 통일신라시대 때 축조되어 보물 제682호로 지정된 지보사 삼층석탑(持寶寺三層石塔 )이 있다..
이 탑은 본래 산 너머 극락사(極樂寺)란 절에 있었으나 극락사가 폐사되면서 군위읍내의 동부리 절골로 옮겼다가 다시 지보사로 옮겨왔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이유인지는 몰라도 통상적으로 대웅전 앞뜰에 위치하는 탑(塔)과는 달리 지보사 삼층석탑은 대웅전에서 한쪽으로 물러나 대웅전 마당보다 한계단 아래에 위치해 있다
비록 높이 4.2m의 작은 탑이지만 전반적으로 기단도 높고 탑신도 높은 편이어서 상승감과 안정감을 주며 빼어난 조각 솜씨와 여러 가지 특색을 보이는 탑이다.
기단은 균열되고 지리석(地履石) 1부가 없어졌으며 1층 옥개석과 2층 옥개석 일부가 파손되었으나, 나머지는 비교적 양호하다.
이중기단 위에 3층을 올린 형식으로 상층 기단 면석에는 2개의 우주, 1개의 탱주 사이에 빼어난 팔부신중을 정교하게 양각하였다.
상층기단은 4장의 판석을 세워 만들었는데 남쪽과 북쪽의 판석 양끝에 우주를 새겨넣고 동쪽과 서쪽의 판석은 그 사이에 끼워 넣었다.
각 면의 가운데 탱주를 새겨 이분할하고 분할된 면마다 팔부중상을 돋을새김으로 새겨 넣었는데 부조가 깊고 조각은 섬세히면서도 화려하다.
서면의 가루라와 아수라
얼굴이 셋, 팔이 여섯 달린 아수라상
칼날이 불꽃에 휩싸인 화염검을 들고 역시 불꽃이 타오르는 여의주를 쥔 가루라상, 금강저로도 상처하나 입히지 못하는 막강한 힘을 가졌다. 새부리가 표현되었을 가루라상의 얼굴 부분이 파손되어 있다.
남면의 건발바와 야차
길게 이어진 구슬을 입에 물고 있는 야차, 야차는 나무와 광물을 지키는 신인데, 이 상들이 물고 있는 염주 구슬은 보리수 나무나 보석으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공후라는 현악기를 능숙하고도 여유롭게 뜯고 있는사자관을 쓴 건달바
팔부중은 불사리를 지키는 호법신만은 아니다.
이들은 다른 중생들과 마찬가지로 부처님의 말씀을 통해 깨달음과 구원을 얻어야 하는 존재이다. 수많은 경전에서 팔부중은 설법장에 모인 중생의 하나로 소개되고 있으며, 특히 탑과 관계된 부분에서 공양을 드리거나, 설법을 듣는 모습으로 자주 등장하고 있다.
팔부중은 그 자신이 법을 증득해야 하는 무리이기도 하며, 한편으로는 중생의 화합이나 친목을 위해 도움을 주거나 재앙을 막고 복을 가져다 주는, 말하자면 신자와 신앙대상 사이의 매개자 또는 중간자와 같은 존재이다.
지보사 삼층탑의 기단부 팔부중상은 신체 동작의 표현이나 세부 묘사가 매우 사실적이고, 각 상들이 지닌 상징성도 잘 드러난 작품이며 또한 통일신라 석탑 부조상의 역동적이며 복합적인 상징성을 엿볼 수 있다.
이만한 부조상은 우리 경주지역에서도 찾기 쉽지 않을 정도로 멋진 작품이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마후라가상과 아수라상을 제외한 모든 상들의 표면 박락현상이 매우 심하댜. 손만 대면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 같으며 현재도 진행되고 있어 특별한 보존조치를 하지 않으면 멀잖은 시간에 지금의 아름다운 모습을 영영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또한 어느 문화재 단체의 소행인지는 알 수 없으나 탁본을 한 뒤 남겨놓은 검은 먹자국은 보는 이의 마음을 검게 물들게 한다.
동면의 용과 긴나라
새와 마소의 옆 얼굴이 보관에 나타난 긴나라상
머리 위에 용을 얹고 있는 용상
북면
북면의 마후라가와 천신
머리 위에 거대한 물고기(마카라)를 얹은 수천 바루나신으로 대표되는 천신
뱀을 머리 위에 올린 마후라가상
하층기단 면석에는 2개의 우주, 1개의 탱주를 새기고 그 사이에 여러형태의 사자상을 양각하였으나 일부분은 마멸이 심하다.
하층기단 사자상
이 탑의 하대면석에는 각 면마다 두 마리의 사자가 조각되어 있다.지보사 탑에는 팔부중상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층기단에 새겨진 여덟 마리 사자상에는 균류와 이끼, 흙먼지가 덮여 있어 그 모습을 제대로 감상하기는 힘들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여간 재미있는 조각이 아니다.
두 앞다리에 턱을 괴고 잠자는 듯한 모습의 사자, 고개를 옆으로 돌려 앞발 위에 얼굴을 웅크린 사자, 고개를 홱 돌려 뭔가 노려보는 듯한 사자, 심지어 얼굴을 석탑 내부로 돌리고 있어 뒷통수만 보이는 사자도 있다. 엎드려 배를 대고 있는 모습이 공격성은 전혀 없고 오로지 이 탑만을 수호하려는 갓으로 느껴진다.
귀엽고 앙증맞은 사자상들은 경주 장항사지 불대좌에 있는 사자상과 같은 맥락에서 이 사자상들로 인하여 지보사 삼층석탑은 더욱 생기가 넘치는 작품이 되었다.
이 사자상을 새긴 조각가의 기술과 번덕이는 재치를 알게 해준다.
몸돌 받침돌, 이 탑의 또 다른 아름다움을 위층 기단 갑석 위에 놓여진 1층 몸돌 받침에서도 볼 수 있다.
상층기단 갑석과 1층 옥신 사이의 별석에는 연화문이 새겨 장식성을 더욱 가미하였다.
이 탑의 또 다른 아름다움을 위층 기단 갑석 위에 놓여진 1층 몸돌 받침에서도 볼 수 있다.
상대갑석 2단의 탑신괴임 위에 별도의 판석을 얹어 또 하나의 탑신괴임을 두었는데 호각형으로 2단을 두고 아랫단에 앙련의 연잎을 빙 둘러 조각하고 그 안에 꽃 장식을 하여 1층 몸돌을 떠받치고 있다.
이는 부처님이 계신 집이니 최고의 꽃 공양을 하기 위함인데 꽃잎은 살아 있는 듯 선명하고 생기있게 보인다.
문비와 탑신괴임
옥신은 우주를 모각하고 1층 탑신 면석에는 각 면마다 문비를 새겼는데 이렿게 4면 모두 문비를 새기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사실 문비라고는 했지만 문비가 아닌 감실을 표현한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문비라면 자물쇠의 흔적이나 아니면 문설주의 형식 따위, 아니면 문이라는 최소한의 표현이 보여야 하나 그런 형태는 없이 이중의 사각형태만 나타나 있다. 반대로 감실로 보기에는 깊이가 얉으며 불상의 흔적이 없으니 단정할 수는 없지만 화려한 아랫 조각들 때문에 오히려 간략하게 나타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탑의 주위에는 2중으로 장대석을 돌려 탑의 영역을 표시하였으며 이것은 탑에 대한 수호 의지를 보이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탑의 동쪽에는 배례석을 두었다.
탑의 상륜부
지보사의 커다란 은행나무와 잘 어울리는 삼층석탑
옥개석받침은 4단, 탑신고임은 2단으로 구성되었고, 상륜에는 사각형 노반(露盤)과 일부 부재가 남아 있다.
탑은 대웅전에서 비켜나 한 단 아래의 서쪽에 비켜나 있다. 탑 위로 대웅전이 보인다.
지보사는 사찰 전체의 규모도 작지만 법당으로 들어가는 누각 보화루도 작고 소담하다.
보화루에서 대웅전으로 들어가는 계단 입구의 돌계단을 오르니 누각 밑으로 대웅전이 보였다.
보화루 아래를 통해 대웅전으로 향한다.
지보사 보화루(持寶寺 寶華樓)의 현판은 누각의 안에 걸려 있었다.
보화루 누각에 올라앉아 넓게 트인 산 아래를 보노라면 세속(世俗)에 찌든 답답한 가슴이 저절로 탁 트이는 것 같다.
대웅전 마당에서 보ㅘ루를 보니 단층건물처럼 보였다...
경내로 들어 섰다. 그냥 조용~~하다. 발자국 소리도 맘대로 내면 안될 거 같아 아주 살살 걷는다. 보화루에서 서쪽을 바라보니 오도선원. 삼성각. 대웅전이 차레로 보인다.
보화루에서 동족으로 바라보니 종무소와 요사가 보인다..
종무소 앞 요사 앞에서 바라본 전경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인 지보사의 주법당 대웅전
대웅전의 편액과 주련은 동곡당 일타 큰스님의 글씨라고 한다.
天上天下無如佛(천상천하무여불) 천상과 천하에 부처님 같은 이 없고十方世界亦無比(시방세계역무비) 시방세계에도 역시 견줄 이 없네.
世間所有我盡見(세간소유아진견) 세간의 모든 것을 내가 다 보았지만,
一切無有如佛者(일체무유여불자) 일체에 부처님 같은 이는 없네.독특한 현판 글씨는 은해사 조실이었던 동곡 일타스님이 쓰신 것이다.
대웅전 내부에는 조선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석조 석가모니 삼존불(三尊佛) 을 봉안하였다. 18세기에 경주옥돌로 조성하였다고 전한다.
향 삼존불 우측 동향의 신중탱
향 삼존불 좌측 서향의 영가단에는 문수스님 영전도 보인다..
대웅전에 있는 4대강 사업 중단을 계속 요구해 오다가 '소신공양'한 문수스님 영전
부리부리한 눈매가 나를 꿰뚫어 보는 듯 날카롭다.
신념을 위해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을 내던진 스님을 만나며 이땅의 생명들이 문수보살에게 얼마나 큰 빚을 졌는가를 느낀다. 스님의 자취는 간데 없고 여전히 천년 석탑만 자리를 지킨다.
삼존불 위로 닫집도 장엄하다..
대웅전(大雄殿)을 비롯한 대소 전각을 건립하고 사찰다운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며 대웅전을 옛날 크기로 복원하고 금단청(金丹靑)을 올렸다고 한다.
대웅전은 200여 년 전 화재로 소실되어 임시로 다른 건물로 이축하여 대웅전으로 사용하다가 1999년 정부의 지원으로 해체 복원한 건물로 1999년 대웅전 해체당시 나온 상량문에는 지보사의 '지(持)'가 '땅(地)'로 쓰여 있어 의상대사가 이 사찰을 창건한 후 이 절터 자체가 명당이라 보물(寶物)로 생각하고 붙인 이름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
대웅전이 앉은 돌담도 정겹다..
지보사 대웅전 외부벽화
대웅전의 처마와 지보사를 둘러 싸고 있는 주변의 소나무들...
대웅전과 삼성각 사이에 있는 1996년 조성해 놓은 근세 불상
향 대웅전 좌측 삼성각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이다.
내부에는 칠성 독성 용왕탱을 봉안하였다.
대웅전과 종무소 사이에 석조관음보살좌상이 보셔져 있는데 1996년 조성해 놓은 것이다.
향 대웅전 우측의 요사로 종무소이다..
향 보화루 우측의 요사이다.
지보사 요사(持寶寺 寮舍)
승려들이 식사를 마련하는 부엌과 식당, 잠자고 쉬는 공간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또한 기도하러온 신도들이 잠깐 쉬고 음식을 먹을 수도 있는 공간이다. 이곳에는 창고, 우물, 장독, 세탁시설 등 생활에 필요한 모든 시설이 한데 모여 있는 곳이다.요사 안에서 해우소 가는 길에 신비의 약수 우물도 보았는데 사진은 못 찍었네....
대웅전. 종무소 요사가 나란히 보인다..
대웅전 요사 보화루가 차례로..
불사중인 오도선원
근래에 건립한 오도선원(悟道禪院)은 정면 5칸 측면 5칸 규모이며 팔작지붕에 주심포 익공계 공포를 지니고 있다. 현재 오도선원은 스님의 수행처로 활용되고 있다.
오도선원 주련
世尊當入雪山中(세존당입설산중) 세존이 설산 가운데 들어가셔서
一坐不知經六年(일좌부지경육년) 한 번 앉아 여섯 해 지남을 느끼지 못하네因見明星云悟道(인견명성운오도) 샛별 보고 도를 깨치셨으니
言詮消息遍三千(언전소식편삼천) 말씀하신 소식 삼천대천 세계에 두루하도다
'오도선원' 현판 글씨도 은해사 조실이었던 동곡 일타스님이 쓰신 것이다.
지보사 산령각(持寶寺 山靈閣)은 원래 대웅전 뒤에 있었던 것을 삼성각 뒤편 높은 지점으로 옮겨 놓았다는데 놓치고 보지를 못했다.
산령각은 1965년에 건립됐으나 1994년 현재의 장소로 이건했다. 정면 측면 각 1칸이며 맞배지붕에 주심포 양식의 공포를 하고 있다. 내부에는 5-60년 전에 봉안한 산신탱과 함께 1994년 조성한 산신상이 모셔져 있으며, 외부에는 1965년 만든 산령각 축원기가 걸려 있다고 한다.
향 선원 좌측 옆의 요사이다..
선원 앞에서 삼층석탑과 지보사 돌담이다.
참 조용하고 이쁜 지보사이다...
다시 한번 지보사를 되돌아 보고...
지보사의 커다란 은행나무와 너무나 잘 어울리는 보화루로 내려선다..
멋진 은행나무로 인하여 보화루가 한층더 멋져 보인다...
보화루 앞 돌담길을 내려오다가 또 다시 아쉬워...
보화루(寶華樓)앞 입구 돌계단에서 내려다 보니 들어 오는 산길이 훤히 내려다 보인다.
참 정갈하다..
내려서는 돌게단에서 극락전이 바로 보인다.
주차장 옆으로 사찰의 초입에 우측으로 멀리 따로 떨어져 있는 부도와 탑비 2기가 보인다.
2010년 4대강 사업에 반대하며 소신공양한 '무경당 문수종사' 부도탑과 탑비
좌측 비문에 세로로 쓰여진
"이명박 정권은 4대강 사업을 즉각 중지. 포기하라.
이명박 정권은 부정부패를 척결하라.
이명박 정권은 재벌과 부자가 아닌 서민과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을 위해 최선을 다하라"고 쓰여져 있었다.4대강 사업 중단을 계속 요구해 온 문수스님(세납47)이 2010년 5월 31일 오후 경상북도 군위군 군위읍 사직리 위천 잠수교 앞 제방을 지나가던 행인이 불에 타 숨져 있는 문수스님을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소신공양'은 부처에게 공양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불사르는 행위를 말한다. '현장에는 불을 붙이는 데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휘발유 통과 문수 스님이 남긴 것으로 보이는 유서가 발견됐다.' 라는 기사 내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비문의 일부는 문수스님의 유서였던 것이다.소신공양(燒身供養)하신 '지보사' 문수스님
사찰의 초입에 우측으로 멀리 따로 떨어져 있는 조선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석종형 부도탑 1기가 세월의 자취와 함께 남아있는데 ‘무염당’이라는 글씨가 희미하게 새겨져 있는데 원래 산기슭에 있던 것을 지금의 자리로 옮겨 놓았다고 한다.
부도 바로 앞의 '무염당수계명수언지입비(無染堂受戒命守彦之立碑) ' 1700년(숙종 26) 건립
부도 바로 옆에는 ‘무염당수계명수언지입비(無染堂受戒命守彦之立碑)’라 되어 있어 이 부도가 무염(無染)스님의 부도이며 그의 제자 수언(守彦)이 비를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일주문을 대신한 은행나무도
신비의 약수도 뒤로 하고...
너무나 조용해서 발자국 소리도 맘대로 내면 안될 거 같아 아주 살살 걸으며 돌아본 지보사를 뒤로 하고
지보사를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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