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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날 물안개 속의 밀양 만어사(경남 밀양시 삼랑진읍 만어로 776 , 용전리 6 ) , 055)359-5644사찰여행/경상도 2018. 5. 9. 08:30
비오는 날 물안개 속의 밀양 만어사
2018. 5. 9.
2018. 5. 6 . 사돈들 8명과 함께 촉촉히 비가 내리는 雨요일에 김해.밀양 일원으로 떠난 여행이다..
가야의 역사와 문화를 품고 있는 장유사를 나와서 봉화마을에서 한때 우리나라의 중심에 서 있었을 전직 대통령의 발자취 여행을 해보며 나만의 생각속에서 다시금 역사를 되돌아 보며 다음 여행지 밀양 만어사로 향해본다..
만어사 가는 길이다.
오월 즈음에서 만난 산과 들은 싱그럽다. 신록이다. 신록은 연두와 초록의 중간에서 서성일 때 가장 아름답다고 했는데, 이즈음 산하의 때깔이 그러하다. 만어사 초입. 사하촌 삼거리의 이정표는 절집까지의 미지의 공간을 숫자로 알려주고 있다. 만어사 4km ! 꽤 멀다. 그런데 사람들이 '멀다, 가깝다' 라고 분별하는 인식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나(我)라는 아상(我相)에 집착하여 크다거나 작다거나, 혹은 맞다거나 다르다거나 하는 등의 시비와 분별심을 내게 하는, 즉 무명(無明)의 어리석음에서 비롯된 것일 것이다.
만어사 가는 길은 산자락으로 난 포장도로를 따라서 간다. 이 길엔 햇볕을 가려주는 울울창창한 나무도 시원한 계곡도 없다. 계곡을 만날 수 없으니 계곡의 물소리 또한 들을 수 없다. 이 길에선 약간의 인내가 필요하다. 가는 길 내내 구름이 가려 풍경을 보여주지 않는다.
길의 중간쯤에서 거대한 돌너덜을 마주한다. 만어사 어산불영으로, 그 모습이 마치 산을 거슬러 오르는 물고기떼 같지만, 자세히 보면 피안의 세계로 건너가려는 우리 중생들의 모습을 닮았다.
구비 더 돌아서자 만어사 들머리가 나온다. 오른쪽은 만어사이고 왼쪽 길은 만어산 꼭대기로 가는 길이다.
만어사는 꼬불한 길을 한참이나 들어가야 했는데 비가 오는 중이라 안개가 자욱해서 운치가 더욱 좋았다.
전설의 만어사(萬魚寺)다.
삼랑진읍 만어산 중턱 만어군 상단부에 있는 하늘에서 떨어진 듯한 만어사(萬魚寺) 절집은 가락국 수로왕 때 창건하였다고 하나, 이전의 역사는 전설로만 전한다.
만어사가 역사에 다시 등장한 것은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흐른 뒤인 서기 1180년(고려 명종 10년) 때 일이다. 三國遺事 3券 萬魚佛影條에 又按大定十二年庚子 卽明宗十一年 始創萬魚寺(삼국유사 3권 만어불영조에 우안대정십이년경자 즉명종십일년 시창만어사삼국유사 3권 만어불영조에 우안대정십이년경자 즉명종십일년 시창만어사)라는 기록이 있어 고려 명종 11년(1181년) 이전에 동양보림대사가 창건한 절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금관가야 수로왕이 창건 했다고 전하나 미상이다.
만어산의 본래의 산 이름은 자성산(慈成山)이라 하였다. 만어산은 고사산에서 왔으며, 삼랑진읍 가운데에 우뚝 솟아 동쪽으로는 천태산이 되고 서쪽으로는 자시산을 두었는데 그 가운데의 세줄기는 서로 나란히 달리다가 낙동강에서 만나 웅장하고 아름답다.
현재의 만어사는 절 앞에 펼쳐진 거대한 돌너덜로 유명하다. 또한 이른 새벽과 비 내리는 날이면 주변에 피어오르는 운해가 장관으로, 어산불영이라 불리는 돌너덜은 밀양의 3대 신비로, 만어사에서 바라보는 운해(雲海)는 밀양 8경의 하나로 세간에 알려져 있다.
만어사엔 그 흔한 일주문도 없다. 승(僧)과 속(俗)을 가른다는 산문, 일주문이 없는 관계로 이곳에선 의식의 경계가 허물어져 드나드는 바람의 향훈도 티 없이 맑다. 그런데 승과 속은 과연 유별한 걸까? 결론부터 말하면 불이(不二)다. 물론 머무는 곳은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으로 엄연히 나뉜다. 하지만 인간다운 삶을 추구하는 세간의 휴머니즘과 진리를 깨치려는 치열한 구도행은 '지극함'이란 근본(根本)에서 하나로 만나기 때문이다.
* 만어사의 설화
만어사의 옛이름은 자시산이었다. 근처에 옥지라는 연못이 있어 못된 독룡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 독룡은 성질이 사악하여 농민들이 농사를 지으면 모두 뜯어 먹고 짓밟아서 농사를 망치게 만들었다. 때는 김해 수로왕 시절이었다. 수로왕은 자시산에 큰 절을 창건하여 그 낙성식에 참석하러 자시산으로 행차를 하였다. 왕의 행차가 낙동강에 이르렀는데 수많은 새떼가 날아와 지저귀는 것이었다. 왕이 저 새는 무슨 새인가 하고 좌우에 물으니, 좌우의 한 사람이 까치라는 새로서 자고로 길조라고 전해온다고 아뢰었다. 왕이 다시 그 곳 지명을 물으니 그 곳은 아직 이름이 없다는 대답이었다. 그래서 수로왕은 그곳을 까치 두둘이라 부르도록 명을 내렸다. 수로왕의 행차는 다시 길을 재촉하여 마침내 자시산에 이르렀다. 이 때 인근의 백성들이 몰려와서 왕에게 옥지에 사는 독룡의 폐단을 고하고 퇴치해줄 것을 청하였다.
왕은 백성들의 간청을 부처님께 기원하였다. 부처님은 수로왕의 기원을 받아들여 옥지의 독룡을 불러 꾸짖었다. 부처님은 꾸짖음에 자신은 본시 부처님의 제자 되는 것이 소원이었는데, 그 소원을 이루지 못하여 그 동안 해코지를 하였다고 하고, 이에 부처님은 쾌히 독룡을 제자로 받아주었다. 그런데 이러한 소문이 멀리 동해 용궁에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그 곳 용왕의 아들 역시 이 소문을 듣게 되었는데, 그도 평소 부처님의 제자 되는 것이 소원이었는지라 못된 독룡도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는데 내가 못 될 것이 없다 생각하고 수 만 명의 물고기 부하들을 이끌고 이 자시산 부처님을 찾아와 제자 되기를 간청하였다. 그리하여 자시산에는 온갖 물고기들이 불공을 드리며 불도를 닦게 되었다.
이런 연유로 자시산은 만어산이라 이름하게 되었고, 김해 수로왕이 창건했던 절은 만어사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만어사 근처에는 물고기 형상의 온갖 바위들이 널려 있으며, 그 중에서 특히 큰 바위 하나가 있어 흡사 미륵불 형상을 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용왕의 아들이 변해서 된 것이라고 전해진다.찾아가는 길이 험하고 워낙 외진 곳에 위치한 만어사는 늘 한적하고 고즈넉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다. 험한 길을 이리 저리 미로 찾아 가듯이 절 집에 도착하면 대웅전 아래로 넓고 길게 시선을 사로잡는 장관이 펼쳐진다.
만어산 정상 아래, 탁 트인 산자락으로 천년고찰이 우두커니 먼 산을 바라보고 앉아 있다.
만어사 마당으로 이어진 가파른 돌계단을 따라 오른다. 마주한 절집은 한눈에 다 들어올 만큼 아담하고 소박하다.
만어사의 소원돌. 소원돌에 소원을 빌고 들었을 때 들리지 않아야 소원이 이루어 진다는데... 이제는 만어시의 명물?
만어사는 가야시대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는 절이지만 지금의 만어사는 고려 때의 삼층석탑과 근래에 지어진 대웅전과 범종각, 삼성각과 요사 한 채로 이루어진 조촐한 절이다.
종각에서 보는 전경도 멋질진데 운무에 가려서..
종무소와 공양간
지금은 요사체로 쓰고 있는 단층의 팔작지붕 목조 가와가 정면 4칸, 측면 2칸의 건물이 원래의 만어사 대웅전 또는 대웅전지라는 견해도 있다. 금관가야 수로왕전 또는 대웅전지라는 견해도 있고....
만어사 대웅전 건물은 조선시대의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맞배지붕 목조 기와이며 주심포 양식의 건물이다.
절 마당 발치에 서서 대웅전 부처님의 눈길이 머무는 곳으로 시선을 돌린다. 탁 트인 절 앞으로 펼쳐진 너덜지대 너머로 크고 작은 산들과 낙동강의 조화, 부석사 무량수전 앞 안양루에서 바라보는 풍광 못지않게 시원한 시야가 터였다. 원효스님의 오도송처럼 '첩첩이 이어지는 청산이 곧 부처님 도량이요, 망망한 푸른 바다가 모두 다 적멸보궁(靑山疊疊彌陀屈 滄海茫茫寂滅宮)....' 운무 부서지는 산자락으로 신록이 뭉게뭉게 피어 오른다.
아담한 대웅전 아래쪽에는 보물466호 만어사 삼층석탑이 있다. 지금의 대 웅전이 자리한 위치와는 조금 떨어져 있으나 석탑의 뒤편에 건물터로 보이는 대지가 있어 이곳이 본래의 법당터로 여겨진다고 한다. 이 석탑도 지금의 위치가 원래 세워져 있었던 자리로 추정된다.
1단의 기단 위에 올려진 3층 석탑으로,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모두 한 돌로 구성되어 있다. 몸돌 모서리에는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고,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3단이다.
탑의 머리장식에는 보주(寶珠:연꽃봉오리 모양의 장 식)가 얹혀 있으나 후에 보충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탑의 바닥돌이 드러 나 있고 지붕돌이 약간 파손된 상태이지만,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있어 정돈 된 모습을 보이는 뛰어난 작품이다.
일부에서 퇴화된 자취가 엿보이지만 각 부의 구조와 수법으로 보아 고려 중기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추정된다.먼저 대웅전에서 부처님을 뵙는다. 반쯤 열린 법당 밖으로 향내가 번져나고 있다.
이른 시간이라 법당 안에는 아무도 없다. 산사의 정적이 엄습한다. 들려오는 것은 여기저기 산새 소리뿐, 적요(寂寥)다. 이 고요한 산사의 정적, 정말 좋다. 이것이야 말로 절이 좋아 절집을 찾아 다니는 사람만이 느끼고 누릴 수 있는 환희이자, 특권인 것이다.
불단 오른쪽의 지장보살과 신중탱
대웅전의 측면 외부벽화
운무에 싸인 대웅전과 삼성각
운무에 싸인 요사
만어사 삼성각
내부에는 독성. 칠성. 산신탱을 모셨다..
벽 한쪽의 관세음보살상
삼성각 앞에 서서 주변을 둘러본다.
어느새 또 다시 운무가 절마당에 가득하다. 바람은 건듯 불어 마당을 건너고 삼층석탑에 드리워진 구름은 더욱 짙어만 간다.
삼층석탑 옆의 약수
산자락의 아미타부처님도 고개를 내밀고 어서 오라 손짓을 한다.
아미타부처님도 뵙고..
아미타부처님 앞에서 내려다본 만어사 전경이다..
만어사를 등지고 서서 돌밭 너머로 강물 이 유유히 흐르는 들판을 보고 있으면 뿌연 안개비가 내리는 모습이 동해의 파도가 밀려오는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비내리는 날 만어사 아래로 펼쳐진 돌밭을 고기로 생각하면서 일망무제로 바라보고 있노라면 고래가 수영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용왕 나라에서 올라온 거북이가 유영을 하는 것 같기도 하다.
만어사의 경석(천연기념물 제 528호).
만어산 암괴류.. 크고 작은 바위를 두드리면 쇠소리가 나는 경이로움으로 밀양의 3대 신비..
1번은 여름에 어름이 언다는 얼음골
2번은 사명대사 비석에 흐르는 땀.. 표충비 .. 나라에 큰일이 생길 때마다 운다는..
3번은 종소리가 나는 이... 경석이라는..
미륵전에서 시작하여 넓은 계곡을 따라 펼쳐진 검은색 돌의 무리들이다. 작게는 초가집 추춧돌만한 것에서 부터 집채만한 바위 돌들이 넓은 계곡을 따라 이어지면서 넓은 평원을 이루고 있다.
높은 산등성이에 오랜 세월 강물에 씻겨 닳은 것처럼 가지런히 펼쳐진 것은 설화처럼 신의 조화일까? 자 연의 아름다움일까?이 지역에 전해오는 설화를 보면 옛날 동해 용왕의 아들이 수명이 다한 것을 알고 낙동강 건너에 있는 무척산의 신승을 찾아가 새로 살 곳을 마련 해 달라고 부탁했다. 신승은 가다가 멈추는 곳이 인연 터라고 일러주었다.
왕자가 길을 떠나니 수많은 종류의 고기떼가 그의 뒤를 따랐다. 왕자가 길을 가다가 머물러 쉰 곳이 만어사 미륵전 자리였다. 그 뒤 용왕의 아들은 미륵돌로 변했고, 수많은 고기들도 돌로 굳어져 장관을 이루는 돌밭으로 변해 버렸다고 한다.대웅전에서 조금 벗어나면 왕자가 변했다는 미륵돌을 모셔 놓은 미륵전이 있다.
미륵전 안에 미륵불이 없고 대신 커다란 바윗돌이 있다.
높이 5m 정도의 뾰족한 자연석은 전각 안에 다 들어서질 못하고 엉덩이 부분이 빠져나와 있다. 아들을 얻지 못하는 여인이 기원을 하면 득남을 하고, 위급한 일이 생기면 땀을 흘린다는 바위다. 사람의 눈에 따라 사리를 입은 부처님의 모습이 보인다는 신비로운 돌이다.
만어사 미륵전 미륵바위
미륵바위 또는 미륵불상이라 불리는 높이 5m 크기의 자연석이 신앙의 대상으로 미륵전에 모셔져 있다.
이 바위는 전설 속 동해 용왕의 아들이 변한 것이라고도 하는데, 표면에 붉은색이 감도는 부분이 마치 가사(袈裟)와 같아 신비감을 자아낸다. 또한 해마다 0.3cm씩 커진다고도 하며, 임진왜란ㆍ병자호란ㆍ갑오농민전쟁ㆍ한일합방ㆍ6.25 당시에 땀을 흘렀다고 하는 신비한 바위이다
인공이 가해지지 않은 자연 그대로 서 있는 길쭉한 큰돌이다.
설화에 나오는 미륵돌은 현재 미륵전 안에 있는 커다란 바위를 가리킨다.
수많은 돌무더기 위쪽에 홀로 서 있어 이질적인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약간 비스듬 한 모습의 표면에는 예사롭지 않은 무늬들이 있어 신비감을 더해준다. 예전에는 야외에 그대로 드러나 있던 것을 현재의 미륵전 안에 봉안하여 숭배 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미륵전 뒤쪽으로 나온 용왕의 아들 모습
미륵전 아래에는 너비 100m 길이 500m에 이르는 거대한 암괴류(巖塊流)가 이색적인 풍광을 자랑하는데, `삼국유사`에 “동해의 물고기와 용이 화하여 골짜기 속에 가득 찬 돌이 되었다”고 전한다. 약 3만 년 전 빙하기에 주변부의 깊은 땅속에서 심층풍화를 거친 화강암이 얼고 녹기를 반복하면서 미끄러져 내려와 형성된 것이다. 우리말로 너덜, 너덜겅 혹은 돌너덜이라고 하는데 학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미륵전 아래 거대한 돌너덜을 바라보면 경이로움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물고기들이 크고 작은 돌로 변했다는 전설을 품고 있는 만어석(萬魚石)
돌 하나 하나를 물고기로 보아 수많은 고기들이 계곡을 덮었다하여 만어사라 하였다.
만어사를 자주 찾는다는 어느 신도의 말에 의하면 돌로 변한 바위 위에 빨래를 널어 말리면 빨래에서 비릿한 냄새가 나고, 옛날에 미륵전 옆에 있는 샘물의 높이가 동해의 밀물과 썰물의 높낮이에 따라 변했다 고 한다.
고려의 보림스님이 임금에게 올렸다는 보고서의 세가지 내용중 일연 스님은 「삼국유사」에서 두 가지를 확인했다고 했는데, 그 하나가 골속에 있는 돌의 3분의 2는 모두 금과 옥의 소리가 난다고 한 것이다.
그 말에 따라 계곡에 있는 돌들을 작은 돌로 하나하나 두드려 보면 신비하게도 온갖 소리가 난다. 어떤 것은 금속성의 종소리를 내기도 하고, 둔탁한 나무소리 를 내기도 한다. 물론 전부 소리를 내는 것은 아니다. 정말 3분의 2가량만 소리를 내는게 아닌가 싶다.이 거대한 물고기 떼, 만어사 돌너덜이 우리에게 전하는 것은 무엇일까?
일상에서 고요함을 유지하는 일은 쉽지 않다. 잠시 바위에 서서 대웅전과 삼층 석탑, 커다란 자연석에 조각된 부처님을 바라본다. 복을 바라고 화를 멀리 하려는 마음에서 비롯된 민간신앙의 흔적인 삼성각이 유난히 크게 보인다. 이 모든 것이 중생들을 진리의 세계로 인도하는 부처님의 화신이라면, 돌너덜도 다를 바 없다.
미륵전에 모셔진 미륵돌과 산허리를 채우고 있는 돌너덜은 같은 형상과 전설을 가졌지만, 다른 운명으로 살아간다. 성스럽다는 것은 외부의 규정에 의해서가 아니라 마음에서 비롯되는 일이다. 날마다 뜨는 태양, 풀 한 포기, 하나의 미물도 부처님의 화현일 수 있다. 삼라만상 모든 것이 존귀한 대상이다.
내 존재가 바로 서지 않으면 나를 부양할 수 없다. 오염되지 않고 집착 없이 사물을 대하는, 참 자아를 놓치지 않는 일상이 결국 기도하는 삶이다. 마음을 닦고 싶어 좋은 사찰을 찾아 다녔다. 어색하던 기도도 이제는 제법 익숙해졌다. 그런데 그 기도가 타성에 젖거나 일회성에 그친 것은 아닌지 돌아본다. 상처투성이가 된 만어사 돌너덜이 경종을 울린다.
밤이 오면 돌너덜은 아픈 몸으로 하늘과 소통할지 모른다. 왕자를 따라왔던 그 날처럼 산 아래 펼쳐진 운해를 향해 펄떡이며 나아가는 꿈을 꿀지도 모른다. 만 마리 물고기가 고통 없는 세상을 향해 힘차게 뛰어 오르는, 장엄한 불법의 세계를 상상하며 나는 조용히 두 손을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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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여행 > 경상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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