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구미 금오서원(경북 구미시 선산읍 유학길 593-31, 선산읍 원리 276)
    여행방/경상도 2022. 11. 27. 14:35

    구미  금오서원

     

    2022.  11 .  27.

     


    2022.  8 .  22.  108사찰 순례단에서  11명이 함께했던  구미 지역 사찰과 문화재를 탐방해 보는  힐링여행이다...... 

     

    9시 포항에서 출발하여  구미 보천사와 해평리 석조여래좌상  →  도리사  → 구미 낙산리 삼층석탑 . 점심식사 →  구미 낙산리 고분 →    의구총  → 대둔사   →   금오서원 까지   구미에서 즐긴 힐링여행....

     

    여섯번째 여행지 구미 대둔사  대둔사를 보고  오늘 구미지역 마지막 여행지 금오서원으로 향한다.....

     

    금오서원(金烏書院)은 선산 읍내를 막 벗어난 원동, 야트막한 남산에 기대어 발밑으로 휘도는 낙동강과 넓게 펼쳐진 들판을 바라보며 자리잡고 있다.

     

     

     

     

     

    주차장에서 올려다 본 금오서원 돌담벽이 운치를 더한다...

     

     

     

     

     

     

     

     

     

    '부백김공사철송공비'라고 적힌 비석이 안내판 옆에 서있다.  조선말기 부사였던 김사철이라는 사람의 공덕비인데, 후에 친일파로 돌아섰다고 한다.

     

     

     

     

    금오서원 (金烏書院) 표지판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나면 높이 서있는 읍청루를 마주하게 된다.

    정면을 바라보면 서원의 읍청루가 보이는데 보통 서원 입구에 세워 외삼문을 겸한 누각으로  유생(儒生)들의 모임과 여가를 즐기는 곳으로 사용된 곳이다.

     

     

     

     

    다락집 형태의 누문인 금오서원 읍청루의 건물 규모는 정면 3칸 측면2칸의  2층누각이다.

     

     

     

     

     

     

     

     

     

    1570년(선조 3)에 창건되었으며, 길재의 위패를 모셨다. 1575년에 사액을 받았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곧바로 복원되어 1609년(광해군 1)에 다시 사액을 받았다. 그뒤 김종직· 정붕· 박영· 장현광이 추가 배향되었다.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때에도 남아 있었다.

     

    1567년(조선 명종 22년)에 지역의 사림이 선산부사에게   길재가 마지막으로 세상을 뜬 금오산에 서원과 사당을 건립하기를 청하였고, 당시 선산부사 송기충(宋期忠)이 경상감사에게 이를 전하여 장계를 올려 재가를 받아 1570년(선조3년)에 금오산아래의 지금의 금오지 자리에 서원을 건립하였다.

    1572년에 송정 최응룡(崔應龍)이 ‘금오서원봉안문’(金烏書院奉安文)을 지어 길재의 위패를 모시게 되었다.

     

    1575년에는 사액 현판과 서책이 하사되었으나, 임진왜란때 건물이 전소되면서 함께 소실되었다. 난이 끝나고 1602년에 금오산은 외진 곳이라 서원을 지킴에 어려움이 있다는 청에, 선산부사 김용(金涌)이 지금의 선산읍 남산(藍山)에 복원하게 되었다.1609에 중건하였다.

     

    금오서원은 길재 이외에도 김종직,  정붕,  박영,  장광현의 5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읍청루 누문이 잠겨져 있어 동재 옆 협문으로 들어선다.

     

     

     

     

     

     

     

     

     금오서원 강당 앞에서 바라본  읍청루 모습으로  건물 규모는 정면 3칸 측면2칸의  2층 누각이다.

    서원으로 딱 들어서는 다락집 형태의 외삼문 격의 누문인 읍청루  좌우에는 유생들의 주거공간인 기숙사 격인 동재와 서재가 있다. 

     

     

     

     

     

     

     

     

    기숙사 격인 서재인 일건재(日乾齋)

     

     

     

     

    기숙사 격인 동재인 시민재(時敏齋)

     

     

     

     

    서원으로  들어서는 다락집 형태의 누문인 읍청루, 좌우에는 기숙사 격인 동재와 서재가 있고, 이 보다 한단 높게 건물의 중심으로 학문을 강론하던 강당인 정학당이 있다.

     

     

     

     

    읍청루 안으로 들어서면 더 높은 곳에 금오서원 현판이 걸려있는 금오서원의 중심건물인 정학당이 나타난다. 정학당(正學堂~강당)은 유생(儒生)들이 강론을 듣고 공부하는 곳이다.

     

     

     

     

    구미 금오서원 정학당 (보물2102호)

    구미 금오서원(金烏書院)정학당(正學堂)」은 야은(冶隱)길재(吉再)를 포함하여 선산부와 연고가 있는 점필재(拈筆齋)김종직(金宗直),신당(新堂)정붕(鄭鵬),송당(松堂)박영(朴英),여헌(旅軒)장현광(張顯光)이 배향된 금오서원(金烏書院)의 강당으로,임진왜란 직후 새로 건립하여 변형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또한 이를 증명하는 기록과 현판들이 남아 있어서 서원의 역사와 변천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건축 양식적으로는 영쌍창(靈雙窓)이 남아 있어서 임진왜란 직후의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다.   서원의 보편적 가치를 지키면서도 지역적 특징과 고유한 특성을 간직하고 있으며, 건축 미학적 가치가 뛰어나고 임진왜란 직후 창건된 건물로 조선중기 강당 건축의 모범을 보인다.

     

     

     

     

     구미 금오서원  현판

     

     

     

     

     

     

     

     

     

     

     

     

     

     

     구미 금오서원 정학당 현판

     

     

     

    구미 금오서원 정학당 내부 전경

     

     

     

     

     

     

     

     

     

     

     

     

     

     

     

     

     

    금오서원 중수기 (金烏書院 重修記)

     

     

     

     

     

     

     

     

     

     

     

     

     

     

     

     

     

     

     

    중심 건물인 정학당에는 대청 안쪽 벽에 붙은 현판에는 '7조'의 조항이 적혀 있는데 학생들이 서원이나 가정에서 지켜야 할 생활규범 일곱 가지 조항이다.

     

    창과 벽에 낙서를 하거나

    책을 망가 드리거나,

    놀면서 공부를 안 하거나,

    함께 살며 예의가 없거나,

    술이나 음식을 탐하거나,

    난잡한 이야기를 하거나,

    옷차림이 단정하지 않은

    이 일곱가지를 어긴 자는 왔으면 돌아가고 아직 오지 않았다면 오지말라.

     

    이 교훈에서 당시 학생들은 무엇을 느낄까 ?    규칙을 어겼을 경우, 당시 학생들에게는 어떠한 조치가 취해 졌을까 ?   생각하니 할 수록 궁금해진다.

     

     

     

     

     금오서원 정학당 천정

     

     

     

     

     

     

     

     

     

     

     

     

     

     

     

    금오서원(金烏書院)은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살아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처음 금오서원(金烏書院)의 위치는 길재(吉再)가 노년을 보냈던 구미 금오산으로 1572년 봄에 창건하였으나, 선조 8년(1575)에 사액(賜額)되었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화재를 당하여 선조 35년(1602) 선산부사(善山府使) 김용(金涌)과 지방사림(地方士林)들에 의해 지금의 자리로 옮겨 재건(再建)하였고 광해군(光海君) 원년(元年, 1609) 다시 사액되어 중수(重修)하였으며, 재건 이후 중건 기록이 없이 당시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청방칸에 고주를 사용한 가구구성, 영쌍창, 창틀 구성에서 고식 수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온돌방 부분까지도 원기둥을 사용하고 부재의 규격을 크게 하였으며, 장식은 배제하여 엄격한 느낌을 주며, 여기에 지붕가구 세부와 공포 형식에서 절제미 등 미학적인 건축 양식과 조형미가 돋보인다.

     

     

     

     

     

     

     

     

     

     

     

     

     

     

     

     

     

     

     

     

     

     

     

    정면 간살의 경우 정칸에 비해 퇴칸을 한 자 정도 크게 하여 일반적인 건물과는 반대로 하였는데 이는 기능적으로 온돌방을 크게 쓰려는 의도이지만 고도의 미학적 관점이 녹아있는 점이 뛰어나다.   정학당(正學堂)은 서원의 보편적 가치를 지키면서도 지역적 특징과 고유한 특징을 간직하고, 건축적으로 미학적 가치가 뛰어나며 임란직후 창건된 조선 후기의 강당건축의 모범을 보임으로서 가치가 충분하다.

     

     

     

     

     

     

     

     

     

     

     

     

     

     

     

     

     

     

     

    금오서원의 운치있는 담장

     

     

     

     

     

     

     

     

     

    정학당을 돌아 내삼문을 지나면 문묘의 대성전이라 할 수 있는 다섯 선현의 위패를 모신 상현묘가 터를 잡고 있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구조를 전학후묘라 한다. 전체적으로 매우 간결한 구조를 이루고 있다.

     

     

     

     

    강당인 정학당을 뒤를 지나 태극무늬가 그려진 내삼문(內三門)을 지나면

     

     

     

     

    다시 한 단을 높인 터에 문묘 대성전 격인 상현묘(常賢廟)가 자리하고 있다.

     

     

     

     

     

     

     

     

     

    상현묘

    정학당 뒤편에 사당인 상현묘도 있다.  상현묘의 건물규모는 정면3칸, 측면3칸의 맞배지붕이다.

     

     

     

     

     

     

     

     

    금오산에 있을 때는 야은 길재(冶隱 吉再)만을 향사(香祀)했으나 이곳으로 옮겨온 뒤에는 이곳 고장 출신이거나 과련이 있는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 신당 정붕(新堂 鄭鵬),송당 박영(松堂 朴英), 여헌 장현광(旅軒 張顯光) 등을 더하여 다섯 명의 유학자를 매년 봄.가을 두 차례 제향(祭香)하고 있다.

     

     

     

     

     

     

     

     

     

    상현묘(常賢廟)는 앞의 다섯분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사를 받드는 건물로 일반적으로 서원의 묘(廟)는 제사를 지낼 때 외는 개방, 공개하지 않는다.

     

     

     

     

     

     

     

     

     

    상현묘 우측에는  전사청(典祀廳)으로 제례에 쓰일 음식을 준비하던 곳이다.

     

     

     

     

    금오서원 내삼문을 나오며...

     

     

     

     

    바라본 금오서원 보존회 구역이다...

     

     

     

     

    선산 출신~야은 길재 : 冶隱 吉再에 대하여)

     

    야은 길재 선생은 정몽주, 이색과 함께 고려 삼은(三隱)으로 불리고 야은 길재(冶隱 吉再)는 고려 말 조선 초의 학자이다.

     

    선산(善山)의 해평에서 태어나 냉산의 도리사(桃李寺)에서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이색,  정몽주,  권근 등 여러 선생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으며, 그 후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에 올랐으나 장차 나라가 망할 것을 예견하고 늙은 어머님을 모셔야 한다는 핑계로 벼슬을 버리고 선산으로 돌아왔다.

     

    성리학적(成理學的) 대의에 입각하여 도학(道學)을 밝히고 이단을 물리치는 것으로 일을 삼으며 후학의 교육에만 힘써 그의 문하에서 김숙자(金叔滋)를 비롯하여 많은 학자들이 배출되었다.

    뒷날 유학자들은 조선 성리학의 정통이 고려말 성리학(成理學)을 체계화한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에서 시작하여 야은 길재(冶隱 吉再) ~ 강호 김숙자(江湖 金叔滋 )~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 ~ 한원당 김굉필(寒晼堂 金宏弼) ~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 로이어진다는 이른바 도통설(道通說)을 정립했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 인재의 반은 선산에 있다‘고 했다.  그 인재 가운데 길재와 김숙자, 김종직은 포은 정몽주에서 비롯된 사림(유교)의 학통과 정신을 주고 받으며 사림문화가 꽃피는 기틀을 닦았으니 선산이 영남사림의 본바닥이라 해서 지나칠 것이 없다고 한다.

     

     

     

     

    다시 동재와 강당 사이의 협문을 통해서 밖으로 나가면 금오사원 보존회 건물이 있다...

     

     

     

     

    당시 자연 속에 학문을 연마하고 자유 자재한 삶을 살고 간 선현의 가르침과 성리학을 이해하는 좋은 기회가 된 곳이 바로 금오서원이다.    앞으로 펼쳐진 확 트인 벌판과 넓은 모래사장은 낙동강을 유유히 흐르는 물처럼 현재의 순간도 역사로 남기고 있다.

     

     

     

     

    금오서원 보존회 구역에서 바라본 금오서원

     

     

     

     

    금오사원 보존회 건물

     

     

     

     

     

     

     

     

     

     

     

     

     

     

     

     

     

     

    금오사원 보존회 건물 옆에는 남산실과 청아재.금오정이 있다.

    서원의 동쪽에는 최근 성역화 사업으로 서원의 기능을 보완하고 지역에서 훌륭한 인재가 지속적으로 나오길 바라는 염원을 담아 남산실과 청아재를 중건하였다.

     

     

     

     

     

     

     

     

     

    남산실

     

     

     

     

    청아재

     

     

     

     

    남산실 뒤쪽으로 금오정 오르는 데크계단

     

     

     

     

    금오정

     

     

     

     

    언덕 제일 높은 곳에 있는 금오정이라는 정자도 새로 지은 듯하다. 서원과 부속건물들 주변으로는 대나무가 풍성하게 심어져 있다.

     

     

     

     

    금오정은 산비탈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푸르른 대나무를 벗 삼아 금오정 까지 올라가본다.

     

     

     

     

    금오정에서 바라본 금오서원과 선산들판 풍경

     

     

     

     

    금오정에서 내려다본 선산읍 원리의 모습이다.   탁 트인 조망이 가슴까지 뻥 뚫리게 해주는 곳이다.

     

     

     

     

    금오정에서 보이는 풍경이다.  옛날에는 꽤 큰 마을이었을텐데, 지금은 몇 가구만 살고 있는 시골마을이 되었다.   지금까지 가봤던 서원 중 제법 큰 서원으로 기억될 듯하다.

     

     

     

     

     

     

     

     

     

     

     

     

     

     

     

     

     

     

     

    금오정에서 내려서며 금오서원 관람을 마무리 한다...

     

    오늘도 행복하게 구미 보천사와 해평리 석조여래좌상  →  도리사  → 구미 낙산리 삼층석탑 . 점심식사 →  구미 낙산리 고분 →    의구총  → 대둔사   →   금오서원 까지   구미에서 즐긴 힐링여행 이었다....

    .

    .

    .

    .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