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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주 소수서원(경북 영주시 순흥면 소밸로 2740 ,내죽리 152-8)
    여행방/경상도 2022. 12. 3. 21:26

    영주 소수서원 (사적 제55호)

     

    2022 .   12.   3.

     

    2022.   12.   1.  라온제나 테마여행에서  함께했던  주 여행으로  부석사와 소수서원 그리고 무섬마을 나무다리를 걸으며  즐긴  힐링여행이다...... 

     

    오늘 첫번째 여행  영주 부석사를 보고 다음 여행지 소수서원으로  향해본다.....

     

     

     

     

     

     

    소수서원의 넓직한 주차장에 도착한다...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55호에 지정되고,2019년 7월 10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 되었다.

     

     

     

     

     

     

     

     

     

    매표소

     

     

     

     

     

     

     

     

     

    관람시간 (입장시간은 관람종료 1시간전까지)

     봄, 가을 (3월 ~ 5월, 9월 ~ 10월) : 09:00 ~ 18:00

                                          여름 (6월 ~ 8월) : 09:00 ~ 19:00

                                          겨울 (11월 ~ 2월) : 09:00 ~ 17:00

     

     

     

     

    소수서원 입구의 소나무 숲길을 걸어  서원 입구로 향한다. 

     

     

     

     

     

     

     

     

     

     

     

     

     

    영주 소수서원(榮州 紹修書院)의 1543년, 중종 38년에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이다.   당시 풍기군수였던 주세붕이 이 지역출신으로 성리학을 한반도에 처음 도입한 고려때의 유학자 안향(安珦) 선생을 배향(配享)하는 사당과 후진양성을 위한 사립학교를 함께 건립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처음에는 백운동 서원이라 불렸으나 1550년 퇴계 이황의 요청으로 명종으로 부터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현판을 하사받았다.

    1868년, 흥선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을 내렸으나 우리나라 최초로 세워진 서원이라는 상징성 때문에 폐쇄되지 않고 현재까지 남아있게 되었다. 

     

     

     

     

    1542년(중종 37) 풍기군수(豊基郡守) 주세붕이 풍기 지방의 교화를 위해 이곳 출신으로 성리학을 우리나라에 처음 도입한 유학자 안향(安珦)의 신주(神主)를 모시기 위해 통일신라 시대에 세워졌었던 숙수사(宿水寺) 터에 사우(祠宇)를 세웠다.  이듬해 1543년(중종 38) 사우(祠宇) 앞에 향교 건물을 옮겨다 재실(齋室)을 마련하고 선비들의 배움터로 삼음으로써, 서원의 대체적인 골격이 이루어졌다.

    서원의 시설을 정비한 주세붕은 주자(朱子)의 《백록동 학규(白鹿洞 學規)》를 채용해서 유생들에게 독서와 강학(講學)의 편의를 주었으며, 한양의 종갓집에서 안향의 영정을 옮겨와 봉안하고서 처음으로 이름을 '백운동 서당'(白雲洞 書堂)이라고 하였다. 이후 1545년(인종 원년) 에 안축(安軸)과 안보(安補)의 영정도 함께 배향하면서 백운동 서원(白雲洞 書院)이라 부르게 되었다.

     

     

     

     

    소수서원이 위치한 자리는 원래 '숙수사'라는 이름의 사찰터로, 서원 입구에는 현재까지 4m 높이의 보물인 당간지주가 남아있다.

     

     

     

     

     

     

     

     

     

     서원배치도

     

    영풍군은 본디 영주, 풍기, 순흥 세 고을이 비슷한 규모로 솔밭처럼 나뉘어 오랜 역사를 이루어온 곳이다.

    주세붕은 임백령이나 이언적 등의 도움을 받아 제향과 교육을 위한 재정 기반을 마련하고, 서책을 사들여 서원 문고를 조성하였으며, 주세붕 자신도 종종 서원에 들러 고을 선비들과 함께 성리학 강론에 직접 참여하기도 하였다.

    주세붕이 처음 서원의 터를 닦은 뒤, 1546년(명종 원년)  안향의 후손으로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한 안현(安玹)이 경상도의 각 고을에 협조 요청하여, 서원에서 일할 노비와 제수에 필요한 식량, 어염(魚鹽) 등을 확보하고, 서원의 관리와 운영을 위한 운영 규정을 정하여 서원의 원장 임명 문제와 원생의 정원수, 제향 절차 등을 상세하게 규정하였다. 이렇게 하여 백운동 서원이 보유한 전답 30결(9만 평)에 어장과 염분 및 보미(寶米)도 운영하게 되면서 서원은 토대를 굳히게 되었다.

    1549년(명종 4) 퇴계 이황이 풍기 군수로 부임해 와서 서원의 격을 높이고자 했다. 그래서 송(宋) 시대의 예를 언급하며 국가에서 서원에 대한 합법적인 인정과 정책적인 지원을 해줄 것을 당시 경상도 관찰사 심통원에게 요청하였다. 1550년(명종 5) 어전회의에서 좌의정 심연원(심통원의 친형)의 주청으로 마침내 당시의 국왕이었던 명종은 친필로 소수 서원(紹修書院)이라 사액(賜額)을 내렸다. 아울러 《사서오경》과 《성리대전》등의 서적, 노비도 하사했다. '소수(紹修)'는 "이미 무너져 버린 교학을 다시 이어 닦게 했다(旣廢之學 紹而修之)"는 데서 온 말이었다.

    이것은 소위 사액서원의 시초였으며, 이로써 나라가 인정하는 사학(私學)이 되었다. 사액된 뒤 입학 정원도 10명에서 30명으로 늘어났으며, 또한 서원의 원생들이 배움에 충실하도록 이황은 서원에서의 학업 규칙도 정하여, 배움의 장으로서의 서원의 위치를 공고히 하는데 힘썼다. 당시 입학 자격은 초시에 합격했거나 학문에 정진하는 자들이었고, 학문에 정진하지 않고 과거 시험에만 한눈을 팔거나 미풍양속을 어기는 경우 곧바로 퇴원당했다. 소수서원에서 공부한 유생은 4천 명에 달했으며, 그 중에는임진왜란때에 경상우병사로 진주성에서 전사한 김성일, 선조 때의좌의정이었던 정탁도 있었다.

    1544년(중종 39)에 안축(安軸)과 안보(安輔)를 추가 배향하였다. 1633(인조 11)에 주세붕을 추가 배향하였다. 1871년(고종 8) 흥선대원의 서원 철폐령에도 훼철(毁撤)되지 않고 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가 되었다.

     

     

     

     

    500년된 은행나무 보호수

     

     

     

     

     

     

     

     

     

     

     

     

     

     

     

     

     

     

     

    사원 진입 영역으로 서원 정문인 지도문,  지도문 입구 좌측 잔디밭은 제사를 지낼때 사용할 가축의 흠결을 살피고 잡던 제단터인 서생단 이 있고 지도문 오른쪽은 죽계수를 따라 펼쳐지는 멋진 경관을 바라보며 학문을 이야기 하던 곳으로 주세붕이 세웠다는 경렴정도 보인다.

     

     

     

    사주문(정문) 입구  죽계 건너편 물가에는 경자바위와   

     

     

     

     

     

     

     

     

     

     

     

     

     

    취한대가 위치해  있다.

     

     

     

     

     

     

     

     

     

     

     

     

     

     

    사주문(정문)입구에 경렴정(景濂亭)이라는 정자가 있고 그 옆으로 500년 된 은행나무 보호수가  서 있다..

     

     

     

     

     

     

     

     

    스승인 퇴계 이황의 앞에서 떨리는 마음으로 썼다고 전해지는 초서의 대가 황기로의  '경렴정' 현판이 남아있다.

     

     

     

     

    사주문(정문)입구 좌측 잔디밭은 제사를 지낼때 사용할 가축의 흠결을 살피고 잡던 제단터인 서생단 이 있다.

     

     

     

     

     

     

     

     

     

    사주문(정문)인 지도문을 들어서면

     

     

     

     

    먼저 만나는 제향영역으로

     

     

     

     

    문성공묘(보물 제1402호) 이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집으로 장대석으로 마무리한 낮은 기단 위에 둥글게 다듬은 주좌(柱座)를 놓고 배흘림 두리기둥을 세웠으며, 기둥머리에 주두를 놓고, 첨차를 내어 그 위에 소로가 주심도리의 장혀를 받치고 있다.  보 방향으로는 쇠혀[牛舌]를 내고 안쪽으로는 보아지 모양을 하여 툇간의 보를 받치는 초익공식 구조를 이루고 있다.

    가구는 5량으로서 대들보를 전면 고주(高柱)와 후면 평주 위에 걸고, 첨차로 짜인 동자기둥을 놓아 종보를 받치고, 이 위에 판대공을 놓아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맞배지붕의 양측 박공에는 풍판을 달았다.  건물의 좌측과 뒷면에 장대석으로 축대를 쌓았으며, 사방에 돌담을 두르고, 정면에 외단문을 설치하고 우측에 협문을 두었다.

     

     

     

     

     

     

     

     

     

    영주 소수서원 문성공묘(文成公廟)는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 소수서원 안에 있는 제향 기능의 사당으로, 안향을 비롯하여 안축, 안보, 주세붕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문성공(文成公) 안향(安珦)을 주향(主享)으로 하는 사우로, 1544년(중종 39) 추배(追配)된 문정공(文貞公) 안축(安軸), 문경공(文敬公) 안보(安輔), 그리고 1633년(인조 11) 추향(追享)된 문민공(文敏公) 주세붕(周世鵬)의 위패를 함께 봉안하고 있다.   

    주향인 안향(1243 ~ 1306)은 고려 1260년(원종 1)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1286년(충렬왕 12) 왕과 공주를 호종(扈從)하여 중국 원나라에 들어가 『주자전서(朱子全書)』를 보고 주자학을 연구했다.   섬학전(贍學田)이라는 육영재단을 설치하였고, 국학 대성전(國學大成殿)을 낙성하여 공자(孔子)의 영정을 모셨으며, 제기(祭器), 악기와 육경(六經), 제자(諸子), 사(史) 등의 서적을 사들이는 등 주자학의 도입과 정착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기에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로 일컬어진다.

     

     

     

     

     

     

     

     

     

     

     

     

     

    서원에 영정각이 있는 것도 특이한 일이며 1975년 지어진 건물이다.

     

     

     

     

     

     

     

     

     

    영정각에는  주세붕. 이덕형 초상 등을 소장하고 있다...

     

     

     

     

    허목. 이원익 초상

     

     

     

     

    주자. 안향의 초상

     

     

     

     

    다음은 강학영역이다...

     

     

     

     

    문성공묘 우측으로 강학영역으로 강학당과 장서각. 일산재.직방재가 차례로 보인다.

     

     

     

     

     

     

     

     

     

    강학당(보물 제 1403호)

    정면 4칸에 측면 3칸으로 장대석 바른층쌓기의 높은 기단 위에 주초를 놓고 두리기둥을 세웠다. 평면구성은 마루방 3칸과 온돌방 1칸으로 사면에 폭이 좁은 쪽마루를 돌렸다.   기둥 윗몸은 창방으로 결구, 기둥 위에 주두를 놓고 쇠혀를 하나 내어 이들을 서로 결구한 굴도리 초익공의 구조를 이루고 있다.   

     

     

     

     

     

     

     

     

     

     

     

     

     

     

    백운동(白雲洞) 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이 대청은 원생이 모여 공부하던 곳이고 소수서원 글씨 아래로 방문이 보이는데 방은 교수가 거처하는 공간이다.

     

     

     

     

    강학공간의 멋진 천정

     

     

     

     

    주두위에 놓인 대들보의 보뺄목은 일부에선 사면으로 끊겼으나 방을 둔 곳에서는 초각하여 둥글게 처리했다.   상부가구는 5량가이고 앞뒷면에 놓인 평주들의 간살은 통칸으로, 20여 척 이상이 되나 대들보를 전후 평주 위에 놓고 잘 치목한 대량 위에 주두와 초각 보아지를 끼운 동자주를 두어 종량과 중도리를 받쳤다.   종도리는 소로를 끼운 파련대공 위에 올려져 있다.

     

     

     

     

     

     

     

     

     

    강학당과 서재 직방재. 동재 일신재

     

     

     

     

    서재 직방재.  동재 일신재

    동·서재는  서원의 기숙사 구실을 하는 곳이다.  동·서재가 한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정면 6칸, 측면 1칸 반의 납도리 소로수장집이다.  평면구성은 가운데 2칸 마루방을 중심으로 양측에 온돌방 2칸을 두고, 온돌방 앞에는 퇴를 깔아 헌함을 세웠다.

     

     

     

     

    장서각. 동서재.영각. 학구재가 차례로...

     

     

     

     

    학구재와 지락재

     

     

     

     

     

     

     

     

     

    원생들이 거처하면서 공부하던 곳인 지락재

     

     

     

     

     

     

     

     

     

     

     

     

     

     

     

    원생들이 거처하면서 공부하던 곳인 학구재

     

     

     

     

     

     

     

     

     

     

     

     

     

     

     

    장서각

     

     

     

     

     

     

     

     

    강학당.  동서재. 전사청. 영정각. 학구재가 차례로...

     

     

     

    일영대는 해시계이다...

     

     

     

     

     

     

     

     

     

    영정각 소수서원 사료관으로 향해본다.

     

     

     

     

    소수서원 사료관

     

     

     

     

     

     

     

     

     

     소수서원을 방문한 인사들이 남긴 방명록인 심원록

     

     

     

     

     

     

     

     

     

     

     

     

     

     

     

     

     

     

     

     

     

     

     

     

    소수서원 사료관에서 충효교육관 방향으로 향한다...

     

     

     

     

    소수서원 사무실과 충효교육관

     

     

     

     

     

     

     

     

     

    충효교육관 뜰의 숙수사지 출토유물이다.

     

     

     

     

     

     

     

     

     

     

     

     

     

     

    충효교육관에서 사원 후문을 나서면 소수박물관과 선비촌 방향이다.

     

     

     

     

    갈림길에서 우측이 소수박물관,  좌측이  선비촌 방향이다.

     

     

     

     

    뒤돌아 본 소수서원 후문

     

     

     

     

    후문 앞 광장도 온통 소나무 숲이다. 비록 소나무는 어리지만....

     

     

     

     

     

     

     

     

     

    죽계별곡 시비 앞에서 인증 샷 ~

     

     

     

     

     

     

     

     

     

     

     

     

     

     

     

     

     

     

     

    소수 박물관 방향으로 향해본다...

     

     

     

     

    백운교를 지나면 소수서원 박물관 이다...

     

     

     

     

     

     

     

     

     

    소수서원 박물관 입구 정자

     

     

     

     

     

     

     

     

     

    소수서원 박물관  별관 기획전시실 (특별기획전시실)은 영주시의 우수하고 다양한 문화유산을 소개하기 위하여, 특정 주제를 선정해 연 1회 기획전을 하는 공간이다.

     

     

     

     

    소수서원 박물관  본관과 기획전시실

     

     

     

     

    소수서원 박물관의 공자. 주자. 안향

     

     

     

     

     

     

     

     

     

     

     

     

     

    그리고 주세붕과 이황

     

     

     

     

    소수박물관은 유교와 관련된 전통문화 유산을 체계화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유교의 이상을 간직한 소수서원을 통하여 민족 정신의 뿌리를 찾아가는 민족문화의 전당이다.

    이곳은 조선 유학의 메카답게 서원과 관련한 귀중한 문화유산과 유학의 전말을 눈으로 체험해 볼 수 있는 유교박물관이다. 소수박물관은 2004년 9월 22일 개관을 시작으로 영주의 귀중한 유물과 유적을 체계적으로 보존하고 전시함으로써 지역문화의 활성화와 생동감 있는 역사 체험을 위한 공간이다.

     

     

     

     

    영주 바느레 소나무

     

     

     

     

    죽계 제월교 비

     

     

     

     

    괴헌고택 기증유물전 이다...

     

     

     

     

     

     

     

     

     

    좌로부터 월은정 현판, 중앙의 지암. 쌍평 현판,  우측의 괴헌. 관수헌 현판

     

     

     

     

    관복

     

     

     

     

     

     

     

     

     

     

     

     

     

     

     

     

     

     

     

    성학십도 병풍

     

     

     

     

     

     

     

     

     

     

     성학십도목판(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17호)

    이황이 선조가 성군이 되기를 바라는 뜻에서 군왕의 도에 관한 학문의 요체를 도식으로 설명한 것으로 1568년(선조 1) 12월 왕에게 올린 것이다.

    ‘성학십도’라는 명칭은 본래 ‘진성학십도차병도(進聖學十圖箚幷圖)’로 퇴계문집 내집과 퇴계전서에 수록되어 있으나 일반적으로 ‘성학십도’로 명명되고 있다.  이 목판은 본디 이산서원에 소장되어 있던 것으로 괴헌가에 전래되어 오다가 박물관에 기증한 것으로 현존하는 목판 중 크기나 상태가 가장 좋은 것이다.  태극도(太極圖) · 서명도(西銘圖) · 소학도(小學圖) · 대학도(大學圖) · 백록동규도(白鹿洞規圖) ·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 · 인설도(仁說圖) · 심학도(心學圖) · 경재잠도(敬齋箴圖) · 숙흥야매잠도(夙興夜寐箴圖)이다.

     

     

     

     

    소수서원 제 1전실이다.

     

     

     

     

    소수서원 제 1전실은  영주의 역사에 관한 기록을 전시한 곳이다.

     

     

     

     

     

     

     

     

     

     가흥리 바위그림

    암각화(바위그림)란 선사시대 사람들이 바위나 동굴의 벽면에 기호나 물건,  동물 등의 그림을 새겨 놓은 것을 말하며, 풍요와 생산을 기원하는 주술행위의 결과물로 보고 있다.  가흥리 바위그림은 영주시가지 서쪽으로 흐르는 서천변에 자리하고 있다.  그림이 새겨진 바위는 거친 화강암으로 위. 아래 두층으로 이루어졌으며, 그림은 바위의 윗부분에 새겨져 있다.   청동검의 손잡이 모양과 원형이 연결된 형태의 그림으로 모두 15기가 새겨져 있다.

     

     

     

     

     

     

     

     

     

     

     

     

     

     

     

     

     

     

     

     

     

    순흥 읍내리 벽화고분

    순흥 읍내리 벽화고분은 외형은 둥글고 내부는 널방과 널길로 이루어진 굴식돌방무덤이다.   널방의 동편에는 주검받침이 자리하고, 서북편 모서리에는 부장품을 두었던 곳으로 보이는 별도의 방형 대가 마련되어 있다.  벽화는 천정을 제외한 널방과 널길의 모든 벽면에 그려져 있다.   인물상, 물고기, 뱀 등의 동물계, 연화, 버드나무 등의 식물계, 산악, 구름 등의 무생물계에 이르기까지 다채롭게 그려져 있다.  벽화는 그림의 내용이나 필치가 고구려 고분벽화의 전통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강한 지역적 특색을 보여주고 있다.  신라와 고구려의 접경지대에 위치한 순흥 지역은 두 나라의 정치적, 외교적, 군사적, 문화적 길목에 해당되었다.  이처럼 역사적, 지리적으로 의미 깊은 순흥 읍내리의 벽화고분은 삼국시대 회화사는 물론 당시의 종교관과 내세관, 고구려와 신라의 문화 교류를 살필 수 있는 중요한 고고학적 자료임에 틀림없다..

     

     

     

     

     

     

     

     

     

    영주의 불교문화

     

     

     

     

    부석사와 비로사

     

     

     

     

    미륵 반가사유상

     

     

     

     

    영주 읍내리석조여래좌상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48호)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읍내리 순흥면사무소 야외에 전시되고 있다가 현재는 소수박물관으로 옮겨 보관되고 있다.  원래는 절터 부근에 있었던 것이다.  머리가 없어졌으나 전체적인 보존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엎어 놓은 연꽃잎이 새겨진 대좌(臺座) 위에 바르게 앉아 있으며, 왼쪽 어깨에만 옷을 걸치고 있다.  오른손은 가슴에 대고 왼손은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전체적으로 조각수법이 세밀한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으로 추정된다.

     

     

     

     

    만사와 제문  

    제2전시실은 유교의 전래에 관한 자료를 전시한 곳이다...

     

    유교의 형성에서 근본이념, 전개의 공간이다.   공자에 의해 개창되어 수천년 동안 중국, 한국, 일본 등 동양사상을 지배하여 온 철학사상인 유교가 우리지역의 문화형성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는 공간이다.   그리고 중곡 송(宋)대에 발달한 동국도학(東國道學)의 성립,  수성,  발전과 유교가 우리지역에 어떠한 영향력이 있었는지에 대하여 전시한 공간이다.    이곳에서는 이산서원 소장본인 퇴계 이황의 성학십도(聖學十圖)를 비롯하여 사서삼경,학맥도 등이 전시되어 있다.

     

     

     

     

    제3전시실은 서원과 향교에 관한 자료를 전시한 곳이다.

    선비들이 모여서 명현(名賢)또는 충절(忠節)로 이름 높은 위인들을 받들어 모시고 그 덕망과 절의를 본 받고자 배움을 익히던 사학(私學)기관인 서원(書院)과 지방의 유풍(儒風)을 진작시키고 인재양성의 목적을 둔 향교(鄕校)에 대하여 서술한 공간이다.

     

    제4전시실은 소수서원의 자료를 전시한 공간이다.

    숙수사지와 소수서원, 신재 주세붕 선생의 업적과 소수서원 창건이야기, 사액의 경로, 소수서원에 배향된 인물 등 소수서원과 함께 한 역사를 알 수 있는 공간이다. 그 외에도 소수서원 인근의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모형, 전시된 자료를 검색하고 상세한 자료를 알 수 있는 사이버 자료실, 소수서원에 관련된 역사를 알기 쉽게 영상으로 만날 수 있는 영상실, 영주의 자연, 전통, 특산물과 축제 등 다양한 이야기를 준비 기획한 공간이다.

     

     

     

     

     백운동현판

    소수서원의 전신前身인 백운동서원의 현판이다. 현판에‘ 만력경술춘각萬曆庚戌春刻’이라는 제작 연대가 기록되어 있어 1543년(중종38) 백운동서원 건립 당시 현판을 1610년(광해2) 봄에 새로 새겼음을 알 수 있다.

     

     

     

     

     

     

     

     

     주세붕 영정(보물 제 717호)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신재 주세붕(愼齋 周世鵬, 1495~1554) 선생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풍기군수로 역임 시 안향安珦선생을 기리기 위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건립하여 우리나라 서원의 시초를 이루었다.  이 그림은 오사모烏紗帽에 관복을 입은 주세붕의 반신상半身像으로 화폭의 상단 3분의 1정도는 여백으로 처리하였다.   얼굴은 변화가 없는 선으로 간략히 묘사하였다.   얼굴은 약간 앞으로 내밀고 몸은 움츠린 듯한 모습이며, 어깨 부분은 둥그렇게 과장되게 표현하였다.   이 그림은 정확한 제작연대를 알 수 없지만 전체적인 양식과 보존상태(색이 많이 바래고 화면과 재질이 손상된 상태 등), 그리고 다른 초상화와 비교를 통해 대략 16세기 후반 경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죽계지

     

     

     

     

    죽계지 목판중 회헌 안향 영정

     

     

     

     

    죽계지 목판

     

     

     

     

    사액 경로

     

     

     

     

    명종어필소수서원현판(明宗御筆紹修書院懸板)-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30호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의 현판으로 조선의 13대 국왕인 명종의 어필을 판각한 것이다.   현판의 오른쪽은 명종의 어필이라는 명종의 어필임을 기록한 글씨(明廟御筆)’,   중앙에는 명종의 어필(紹修書院),  왼쪽은 1550년(명종 5) 4월 어느 날에 임금이 직접 쓰서 하사하였다(嘉靖二十九年四月日 宣賜)라는 글자가 판각되어 있다.  소수서원이라는 이름은 당시 대제학 신광한(申光漢)이 중종의 명을 받아 이미 무너진 교학을 다시 이어 닦게 하라는 뜻으로 지은 것이다.

     

     

     

     

    안향초상(국보 제111호)

    고려 중기 문신인 회헌 안향(晦軒 安珦 1243~1306) 선생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안향 선생은 원나라에 여러 차례 오가며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최초로 도입하여 연구하였으며, 섬학전贍學錢이란 장학기금을 마련하여 국학진흥에도 힘썼다.  화폭 상단에는 아들 안우기安于器 1265~1329가 쓴 찬문이 있으며 하단에는 안향 선생의 반신상半身像이 그려져 있다. 머리에 평정건平頂巾을 쓰고 홍포紅袍를 입고 있으며, 붉은 선으로 얼굴의 윤곽을 나타내었다. 옷 주름은 굵기의 변화가 없고 음영 없이 간략하게 처리하였다.

     

     

     

     

    해동명적(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18호)

    해동명적은 신공제(1469∼1536)가 신라 말에서 조선 초까지의 우리나라 명필들의 글씨를 모아 1515년경 목판에 새겨 간행한 법첩(法帖: 명필의 글씨를 돌이나 나무에 새겨 만든 서첩)이다.   1530년에는 목판본을 돌에 새겨 석판본으로도 간행되었다.   목판본과 석판본의 간행 시기와 선후 관계는 석판본 후집 말미에 새겨져 있는 경상도 관찰사 최세절(崔世節, 1479∼1535)의 발문에 의해 확인된다.   발문의 내용에 따르면, 김노(金魯)가 경상도 관찰사 최세절에게 부탁하여 자신의 부친 김희수(金希壽)와 박팽년(朴彭年)의 필적을 첨가하여 석판본으로 간행해 줄 것을 청하였고, 최세절이 안동부사 유희저(柳希渚)에게 부탁해 석공을 모아 돌에 새기게 하고 도사(都事) 안현(安玹)을 시켜 상세한 교정을 보게 한 뒤 1530년 7월에 개간 사업을 종료하였다.   따라서 석판본은 앞서 간행된 목판본을 모본으로 삼아 1530년에 개간된 후각본임을 알 수 있다.  목판본 간행 시기에 대해서도 신공제가 창원부사(昌原府使)로 있을 당시로 지목하고 있어 1515년경에 『해동명적』 목판본이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오리 이원익 초상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 1547-1634)의 영정 그림이다.

    이원익은 자는 공려(公勵),  호 오리,  본관은 전주로 태종의 아들인 익령군(益寧君)의 현손이며 억재(億載)의 아들이다.   1569년(선조 2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헌, 호조판서, 이조판서, 영의정 등을 지냈으며 조선시대 대표적인 청백리로 유명하다. 1604년(선조 37)에 임진왜란 때의 공으로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녹훈되었고 이를 기념하여 호성공신도상이 제작되었던 것이다.  소수서원에 소장된 영정은 우측에 ‘영의정 완평부원군 문충공 오리선생 진상 계묘춘이모(領議政 完平府院君 文忠公 梧里先生 盡像 癸卯春移模)’라는 기록이 있어 1663년 봄에 모사한 영정임을 알 수 있다.

     

     

     

    순흥도호부유물(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16호)

    봉서루는 고려시대 때에 건립된 2층 누각으로 원래 동헌의 남쪽 3리 지점에 있어 고을을 오가는 관문 역할을 하였다.   이 현판은 누의 정면에 걸려 있던 것인데, 순흥면사무소 구 유물전시관에서 보관하고 있다가 현재는 소수박물관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비봉산의 봉황이 날아가면 고을이 쇠퇴해지므로 고을의 남쪽에 누각을 지어 후면에는 영봉루라는 현판을,  전면에는 봉서루라는 현판을 걸어 봉황을 맞이하고 깃들게 하였다고 한다. 

     

    순흥부 인장은 순흥부에서 사용하던 인장으로 순흥도호부 시절 부사가 쓰던 것이다.

     

    흥주도호부의 관아에 걸려있던 현판으로 흥주는 순흥부의 고려시대 지명이다. 현판의 글씨는 공민왕의 친필이라고 전해진다.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보물 제485호)

    공자(孔子, BC551~BC479)는 춘추시대 노나라 사람으로 유교를 처음 일으킨 성인이다.  이 그림은 공자를 중심으로 제자들이 앞에 길게 앉아 있는 모습이다.  맨 위에는「대성지성문선왕전」이라고 적힌 편액이 걸려 있고, 아래에 위치한 공자는 다른 인물보다 크게 그려 강조했다.   공자를 중심으로 네 제자인 안자,  증자,  자사,  맹자를 배치하고,  좌우에는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십철(十哲: 염경, 재여, 염구, 언언, 전손사, 민손, 염옹, 단목사, 중유, 복상) 을 그렸다.  아래쪽에는 좌우로 72명의 제자들을 배치하였는데, 사각관모를 쓰고 손에 홀笏을 든 모습이다. 제일 하단에는 당唐, 송宋, 원元대의 이름난 학자 10명을 그렸다. 그림 좌측 하단에 중국 명明나라 연호인 정덕正德8년(1513년, 중종8)의 화기畵記가 있어 1513년에 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서총대친림연회도(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38호)

    1560년(명종 15) 9월 19일에 왕이 창경궁 서총대에 문무관을 모아 놓고 친림하여 연회를 베풀던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큰 폭의 장지(壯紙)를 상, 중, 하 3단으로 나누어서 상단에는 그림의 제목을 쓰고 연회의 정경을 간략하게 그렸고 중단에는 당시 의정부 좌찬성(左贊成) 홍섬(洪暹)이 글을 썼으며, 하단에는 연회에 참석했던 74명의 문무대신 이름을 관직 서열에 따라 영의정부터 행예문관검열(行藝文館儉閱)까지 기록해 놓았다.

     

     

     

     

     

     

     

     

     

    묘당에서 제사드릴때 희생을 드리기 위한 의식절차를 적은 글인 성생홀기

     

     

     

     

     

     

     

     

     

     

     

    주세붕 교지

     

     

     

     

     

     

     

     

     

     

     

     

     

     

     

     

     

     

     

    김항희 기증 유물 전시관

     

     

     

     

     

     

     

     

     

     

     

     

     

     

     

     

     

     

    로비로 나온다...

     

     

     

     

     

     

     

     

     

    2층으로 올라가면

     

     

     

     

    야외유물을  전시한 야외전시실이 있다...

     

     

     

     

     

     

     

     

     

     

     

     

     

    야외유물 전시장은 영주시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유물들 중 부동산 유물을 이전 혹은 재현한 곳이다. 영주시 순흥지역에 시대별로 남아있는 장묘 문화를 통해 효(孝)를 배우게 되는 곳이기도 하다.

     

     

     

     

     

     

     

     

     

     부사 정중창 영세 불망비

    조선 중기때 순흥도호부의 부사를 지낸 정중창(숙종 19~24년, 1693~1698)의 재임중에 남긴 업적을 기리고자 향민들이 세운 일종의 공적비이다.   재임시 백성을 위하여 많은 선정을 펼친 그가 교체되자 백성들이 그의 고마움을 잊지 못하여 죽동역 길가에 불망비를 세웠다.   2004년 소수박물관을 개관하면서 이곳으로 옮겨왔다.

     

     

     

     

    소수박물관을 나오면 선비촌마을 입구이다...

     

     

     

     

    이곳에도 볼거리가 많지만 대충 둘러 보고 

     

     

     

     

     

     

     

     

     

     

     

     

     

     

     

     

     

     

     

     

     

     

     

     

     

     

     

    서원 입구로 향한다....

     

     

     

     

     

     

     

     

     

    고운 소나무 숲길 사이를 걸어 나오면

     

     

     

     

     

     

     

     

     

     

    소수서원 입구의  매표소가 나온다....

     

    오늘은 거의 8년만에 와 보는 소수서원에서 다시금 찬찬히 돌아보며 선인들의 발자취와 향기를 더듬어 본다.

    이렇게 건강하게 여행 다닐수 있음에 감사한 마음으로...

     

    영주 두번째 여행지 소수서원을 나와 오늘 마지막 여행지 영주 무섬아을로 향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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