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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산내암자 여덟번째, 홍제암사찰여행/경상도 2020. 7. 31. 12:17
해인사 산내암자 여덟번째, 홍제암
2020. 7. 28.
2019년 11월 초순 가을에 오고 거의 9개월 만에 다시와 보는 해인사이다.......
그때 길상암만 둘러봐서 오늘은 해인사 동쪽암자 5군데와 해인사 큰절도 보고 다시 해인사 서쪽 암자 3군데를 둘러볼 예정이다...
법보종찰 가야산 해인사에는 16개의 산내암자가 있다.
해인사에는 산내암자가 16곳 있는데... 1.해인사 길상암 2.보현암 3.금강굴 4.삼선암 5.금선암 6.원당암 7.홍제암 8.용탑선원 9.지족암 10.희랑대 11.백련암 12.국일암 13.약수암 등 13개 암자는 해인사를 애워싸고 있고 14.고불암 15.고운암 16.청량사 등 3개 암자는 해인사로 부터 다소 멀리 떨어져 있다.
2020. 7. 26. ‘달마야 놀자‘ 회원 18명과 함께한 경상남도 합천군 해인사 암자순례로 약수암. 백련암. 희랑대. 지족암. 국일암 등 해인사 동쪽 5암자와 해인사 큰절 그리고 해인사 서쪽암자 중 용탑선원. 홍제암. 원당암 등 해인사 서쪽 3암자 등 해인사 산내암자 16곳 중 8암자와 해인사 큰절을 순례한 부처님 법향 가득한 하루였다...
해인사 동쪽 5암자를 둘러보고 해인사 큰절에도 들린 다음 해인사 서쪽 암자 중 해인사와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는 용탑선원을 보고 가까운 곳에 있는 홍제암으로 이동한다...
용탑선원에서 나와 홍제교를 만난다...
해인사 일주문 지나서 홍제암으로 가는 길에 있는 홍제교(弘濟橋)라고 교명(橋名)을 써 놓은 구조물이 특이하다. 마치 석종형 부도처럼 생겨 인상적이었다.
용탑선원에서 가까운 곳에 홍제암이 있다. 해인사에서 서쪽으로 200m 지점에 있는 홍제암은 사명대사가 입적한 곳으로 유명하다.
해인사 홍제암은 사명대사가 입적한 곳으로 유명하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 이곳에 은거하던 사명대사는 광해군 2년에 속세 나이 예순일곱으로 입적하였는데, 광해군은 스님의 열반을 애도하여 자통홍제존자(慈統弘濟尊者)라는 익호를 내리고 이곳에 스님의 비를 세웠다. 그 뒤로부터 스님의 익호를 따라 이 암자를 홍제암이라 하였다.
용탑선원에 홍제암 들어오는 입구에 가산당 지관대종사 (伽山堂 智冠大宗師) 부도탑과 탑비가 있다.
2017년 가산당(伽山堂) 지관대종사(智冠大宗師) 열반 5주기에 탑비를 세웠다. 비의 글은 시인 고운이 짓고 서예가 송천 정하건이 썼다.
지관(智冠 : 1932.5.11.~2012.1.2)스님은 경상북도(慶尙北道) 포항시(浦項市 청하면(淸河面) 유계리(柳溪里)에서 출생(出生)하셨다.
지관(智冠)대종사는 대학자이며 율사이며 종무행정에 특별한 선지식인이다.
1947년 합천 해인사(陜川 海印寺)에서 자운(慈雲)스님을 은사(恩師)로 출가(出家)하여 자운(慈雲)스님의 계맥을 전수했으며 운허 대강백 문하에서 교학을 연찬 운허 스님의 강맥을 이었다. 그런가하면 당대에 종무행정의 으뜸으로 꼽히는 영암대종사를 모시고 종무행정을 배우고 익혔다. 스님을 일컬어 삼장(경. 율. 론)에 정통 하고 이치와 일에 무애(無碍)한 어른이라고 칭송하는데는 이러한 세분의 스승을 모신데서 연유하고 있다.
해인사 강주, 주지, 해인총림 전계사, 第 32代 대한불교 조계종(大韓佛敎 曹溪宗) 총무원장(2005.11~2009.10), 동국대 총장 등을 역임(歷任)하시고 서울 경국사(慶國寺)에서 2012. 1. 2 법람 66세 세수(歲首) 81歲로 입적(入寂)하셨다.
홍제암 옆에 있는 부도밭
홍제암 입구 왼쪽 부도밭에 먼저 들른다. 홍제암 건물 바로 옆에 있다.
부도는 대개 본 건물과 떨어져 있게 마련인데 담장 하나 사이로 이렇게 부도와 비가 있는 것은 드문 일이다.
좌로부터 계파당(桂坡堂) 성능(性能) 대사 부도, 송파당 각민(松坡堂 覺敏 1596~)대사 부도, 환적당 지경탑 , 예봉당 평신 사리탑(禮峯堂 平信 舍利塔) 이다.
사명대사 승탑 및 석장비(보물 제1301호)
사명대사로 널리 알려진 조선 후기의 승려 유정(惟政)의 승탑 및 석장비는 대사의 일대기를 기록한 것으로 1612년(광해4년)에 건립하였고, 석장비의 비문을 쓴 분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홍길동을 지은 허균(許筠) 선생이 지은 것이고 비문의 내용이 한국인의 민족혼을 불러일으킬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1943년에 일본인 합천 경찰서장이 네 조각을 내어 길가에 방치하였던 것을 광복 후 이 비문을 명월당(明月堂)에 보관했다가 1958년에 철봉으로 속을 연결하고 파손된 부분을 석회로 때워서 현재의 위치에 세워 복원하였으며, 사명대사 부도와 함께 보물 제1301호로 지정되었다.
자통홍제존자사명대사(慈通弘濟尊者四溟大師) 석장비는 네 조각난 흔적이 있다.
승탑전에 위치하고 있는 석장비는 현존하는 사명대사비 가운데 가장 먼저 건립된 것으로 귀부· 비신· 이수가 갖추어져 있으며 전체 높이는 3.15m이다.
2면비이며 앞면 윗부분에 篆書體로 ‘자통홍제존자사명송운대사석장비(慈通弘濟尊者四溟松雲大師石藏碑)’라 새겨져 있고, 끝에 ‘만력 40년 12월립(萬曆四十年十二月立)’이라 기록된 점으로 보아 1612년(광해군 4) 12월에 건립된 사명대사의 승탑에 딸린 탑비임을 알 수 있다.
許筠이 지은 것이라 전해지는 비문의 내용에 따르면
‘사명대사는 1610년 8월 26일 해인사에서 입적했고, 11월 20일 문도들이 화장하면서 정주 1구를 얻었는데, 석종을 만들어 그 안에 간직하고 탑을 세웠다’고 한다.
선생은 비문에서 "나는 비록 유가(儒家)에 속하는 무리이지만, 서로 형님 아우 하는 사이로 누구보다 스님을 깊이 알고 있다."고 적고 있다.
이 "자통홍제존자사명송운대사석장비"를 쓴 허균은 국가가 강적과 대적해 싸우는 전시를 당했기 때문에 " 미혹한 중생의 번뇌를 털어 없애주고, 씻어주는 일을 제대로 할 겨를이 없었다"라고 사명대사의 생애를 안타까워한다. 내킨 김에 허균은 이렇게 사명당을 옹호한다.
스님을 깊이 알지 못하는 사람들 중에는 사명 스님이 중생으로 하여금 미진(迷津)인 차안(此岸)에서 피안(彼岸)으로 건네주는 일을 등한히 하였고, 구구하게 나라를 위하는 일에만 급급하였다고 비판하지만, 그들이 어찌 나라를 침범한 악마를 죽이고, 국난을 구제하는 것이 곧 불교의 한량없는 공덕을 짓는 일인 줄 알 수 있겠는가! 유마거사의 무언(無言)이 바로 불이법문(不二法門)에 들어가는 것이어늘, 어찌 요란스럽게 말로 훈도(訓導)할 필요가 있으랴! 불녕(不侫)이 비록 유가(儒家)에 속하는 무리이지만, 서로 형님 아우라고 호칭하는 친한 사이로 누구보다 스님을 깊이 알고 있다.
*불녕- 재주가 없는 사람이란 뜻으로 자기를 겸손하게 이르는 말
허균이 어디에선가 사명당을 헐뜯는 얘기를 들었던 모양이다. 목소리가 약간 흥분된 어조다.
사명대사의 비문은 홍길동전으로 더 잘 알려진 석학 허균이 지은 것으로서, 문장도 아주 빼어날 뿐더러 대사의 행장이 비교적 소상하게 적혀 있어 사적으로서의 값어치가 높다.
내 어린 날의 영웅 사명대사에게 작별을 고해야 할 시간이다. 이제 영웅을 기다리는 시대는 멀리 갔다. 그들은 벌써 오래 전 하나둘씩 땅으로 끌어내려졌다. 그래도 어릴 적 영웅만은 아직 높은 곳에서 끌어내리고 싶지 않다. 모든 작별에는 의식이 필요한 법, 다시 석장비로 다가가서 그 생채기를 어루만지면서 깨알 같은 글씨를 읽어 내린다.
맞다, 승병을 일으켜 왜와 싸웠을 망정 나라고 어찌 수도자로서 수행에 전념하지 못한 회한이 없을 손가? 전란의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누군가 나 대신 책임을 져 주었더라면, 내 어찌 부휴 선수 스님 같이 수행에 몰두하여 오로지 부처 되기만 꿈꾸며 살 수 없었겠는가? 그러나 아무리 그렇기로소니, 내 어찌 중된 자로서 "중생의 번뇌를 씻어 줄 겨를조차 없었노라"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으랴.
비록 사명당의 호국의지가 임금의 은혜를 갚으려는 것이었다 해도 그건 사명당이 살던 시대의 한계일 뿐이지, 사명당 개인의 한계는 아니었다. 이 땅의 그 누구도 임진왜란의 왜적을 물리치는데 사명당이 크게 기여했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좌로부터 ( ) .해인사사적비(海印寺事積碑) . 경성당 덕률대선사비(警惺堂 德律大禪師碑) . 해인사금담화상비(海印寺錦潭和尙碑) 이다....
부도 옆으로 만월문(滿月門)이 보인다...
홍제암 정문인 보승문을 들어선다....
홍제암 (보물 제1300호)
홍제암 인법당은 1614년(광해군 6년) 혜구 스님이 사명대사의 영정을 봉안하기 위하여 영당을 건립한 이래 수차례 개·중수되었다고 한다. 인법당이란 큰 법당이 없는 절에서 중이 거처하는 방에 불상을 모신 집을 말한다. 1770년(영조 46) 해봉이 중건했다고 하며 그 이후에도 수차례 보수한 것이라고 한다. 현 건물은 1979년 10월에 완전 해체 복원한 것이다.
홍제암은 해인사 경내와는 사못 다른 고즈늑한 분위기였다.
아무도 없는 곳.. 천천히 안으로 들어가기가 왠지 옷깃을 추스리게 한다.
법당과 생활공간의 기능을 겸한 인법당(因法堂) 형식의 건물 1동으로 되어 있으나 일반적인 인법당과는 달리 사명대사와 관련이 있는 여러 기능의 공간들이 한 곳에 모여 있는 특이한 형태를 이루고 있다. 기본 평면은 工자형으로 가운데 법당을 중심으로 조사전, 영각, 홍각, 조실, 시자실 등이 있으며, 각각의 공간은 툇마루를 통해 모두 연결되고 있는 특이한 형태의 건물이다. 건물이 참으로 특이한 모습을 했는데 좌우측 끝이 모두 여염 양반집 사랑채처럼 누각 형식이다.
경사진 대지를 이용하여 홍각과 지장전은 돌출된 누각형으로 만들고, 법당 및 다른 공간은 단층의 구조로 만드는 재미있는 공간 배치를 보여준다. 또한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윗부분에 구성한 공포의 수법도 각 공간의 위계에 따라 달리 표현하였으며, 기둥과 기둥의 간격인 칸의 크기도 각 공간의 기능에 따라 각기 달리 하였다. 밖으로 노출된 기둥은 둥근기둥을 사용하고 안에 있는 기둥은 사각기둥으로 처리한 점도 특이하다.
법당 중앙의 홍제암 편액
건물 중앙부는 법당이 자리 잡고 있다. 아미타부처님을 봉안하고 있으며,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양쪽에서 협시하고 있다. 아미타부처님은 무량수와 무량광을 보장하는 자비로운 부처님으로 서방극락 정토를 주관하는 부처다.
향 법당 우측의 신중단과 영가단
향 법당 좌측의 백중 영가단
법당 우측으로 표충사 편액을 달고 있는 법당 건물 옆 조사전으로 향해본다...
오른쪽 조사전에는 중심에는 유정·휴정·영규의 상을 모셨다.
조사전 우측으로 9분을
조사전 좌측으로 4분을 모셔 모두 16분의 고승 존영이 모셔져 있다.
조사전 좌측 하단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사진이 눈길을 끈다...
법당 우측으로 표충사 편액을 달고 있는 표충사(表忠祠)사당이 있는데
1614년(광해군 6) 혜구대사(慧球大師)가 사명대사의 眞影을 봉안하기 위하여 영당(影堂)을 건립하였지만...
사명당은 안 계시고 백중 기도 영가 위폐가 가득하다...
처음 사명대사의 영정을 모셨을 때는 표충사라고 했으나 밀양의 표충사에도 사명대사를 모신 곳이 있다고 하여 이곳을 폐했다. 그러나 밖에 붙은 현판은 여전히 '표충사'라고 돼 있다.
왼편에도 역시 누각형식의 긴 건물이 붙어 있다. 여섯 칸 큰 건물이 맞붙어 있는 모습이 대단하다.
법당 왼편 누각형식의 긴 건물 앞의 소종
법당 왼편 누각형식의 긴 건물 안에는 다른 사찰의 명부전 비슷하게 전각 중심에 지장보살님과 지장탱을 모셔 두었고...
전각 중심 좌측에는신중탱과 산신탱을 모셔 두었다... 그리고 지장보살 마주보는 벽면에는 영가들의 사진이 가득하다...
지장보살 우측의 벽면 탱화
비로소 숨통이 트인다. 이내 편안해진다. 한여름 어린시절 학교 교정에서 느꼈던 진한 외로움이 밀려 들어온다. 너무 더워서 지친 오후의 무기력감 같은 아득함...
서래당(西來堂)이다.
인법당 왼쪽에는 서래당이라고 가로로 기다란 건물이 있다. 서래는 조사서래(祖師西來)의 준말이다. 달마대사가 서쪽인 인도에서 동쪽인 중국으로 온 것을 말한다.
통으로 터진 건물 형태나 전면에 노출된 계자난간으로 봐서 아마도 재가 신도 등을 교육하는데 쓰이는 공간이 아닌가 싶다.
마당에 큰 석조도 이색 스럽다. 갈증이 난다. 깨끗한 물을 한바가지 담아서 목을 축인다.
먼 하늘을 한참 응시하는 내 모습을 그려보는 시간이 그렇게 달디 달 수가 없었다. 그것은 어쩌면 내가 마음껏 불러다가 뜨개질을 하듯 엮어낼 적막에 대한 향수의 맛일 것이다.
서래당 뒤쪽에는 자운 스님의 진영을 모시는 영각이 있다.
다시 눈길이 멈추는 곳....
좌측의 자운 스님과 우측의 지관 스님
자운 (1911~1992) 스님은 근현대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율사이시다. 진영은 한지에 먹선을 그려 채색한 수묵채색화다. 주장자를 들고 있는 모습, 꼭 다문 입, 근엄하고 꼿꼿한 모습을 보면 율사가 천분이었던 분 같다.
홍제암 입구 부도탑이 있던 가산당 지관대종사 (伽山堂 智冠大宗師)
서래당 뒤 자운대율사영각 옆에는 석빙고와 장독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장맛을 변치 않게 하는 건 장독이다. 들락날락 숨을 쉬게 하는 장독이 없다면 장은 곧장 썩어 버린다. 장독은 장을 가두기도 하지만 장을 장답게 하는 원천이기도 한 것이다.
계율도 그런 것 아닐까? 스님이라는 장맛을 유지시켜주는..... 그런 점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율사의 영각 옆에 장독이 있다는 건 매우 절묘한 배치인지 모른다.
장독대에 내리는 따가운 햇살이 오히려 더 지독한 고요함을 부른다.
창살무늬가 유난히 화려하다. 화려한 만큼 찾는 사람 없어서 더 쓸쓸하게 보인다.
햇살이 부서진다. 뒷마당에... 누구하나 없지만 나의 마음은 충만하다...
그냥 앉아서 쉴 곳을 찾아본다. 주저 앉아서 한참을 쉬었다 가고 싶다...
여기가 홍제암의 끝은 아니다.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가면 거기에도 정견각과 '귀로난야'라는 현판을 단 전각이 있다.
'귀로난야'라는 현판을 단 전각
전각 가운데 칸 위에는 "귀로난야(歸老蘭若)"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귀로'는 노년에 고향으로 돌아가 쉬는 것을 말하며 '난야'는 절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야말로 사명대사에게 딱 어울리는 글귀다. 이 글씨는 지관 스님의 글씨라고 한다.
이곳은 선원인 듯 ~ 법당도 꾸며져 있었다...
"귀로난야(歸老蘭若)"라는 편액이 걸린 전각 뒤로 이름 조차 독특한 정견각이 보인다...
툇마루에 앉아서 하늘을 본다.
다시 일어서서, 나의 친구가 되어주는 햇살과 그림자와 한옥을 찍어주었다.
내 삶은 여기서 적막을 만나고, 이 고요함속에서 햇살을 만났고, 나는 다시 햇살 아래에서 멈추었다......
"귀로난야(歸老蘭若)"라는 편액이 걸린 전각 마당 앞에서 바라본 홍제암 전경이다...
"귀로난야(歸老蘭若)"라는 편액이 걸린 전각 뒤에서 바라본 정견각
"귀로난야(歸老蘭若)" 편액이 걸린 전각 담벼락 밑의 수각조차 단아하다...
"귀로난야(歸老蘭若)"라는 편액이 걸린 전각 그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축대 위에 정견각이 있다. 사모지붕 건물이다. '정견(正見)'은 팔정도의 하나로 바른 견해를 뜻한다. 여기서는 산신각 역할을 하고 있는 듯. ...
정견각 안에는 독특한 산신과 산신탱화를 봉안했다. 산신은 민간신앙의 대상으로 신성시 되어 왔던 호랑이를 의인화한 것이다.
정견각 주변 풍경이다...
홍제암은 사명대사가 입적한 곳으로 이미 명성이 나 있으며 최근에는 배상문 선수(PGA 우승) 어머니가 기도한 곳으로도 알려졌다.
시간이 다시 멈추었다.
적막 머금은 홍제암의 마당, 아니 후원에서 ... 다시 행복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이제 이곳을 정견각을 떠나 홍제암으로 향해본다...
다리 건너에서 홍제암으로 향하다 바라본 홍제암 전경이다...
다시 뒤돌아 본 정견각 쪽~
다리를 건너서
슬슬 홍제암을 떠나간다.
내 어린 날의 영웅 사명대사에게 작별을 고해야 할 시간이다. 내 어린 시절의 영웅이여, 그만 안녕....
부도 옆 팬스가 쳐진 곳 옆으로 난 길을 따르면
초입에는 좁은 길이나 조금 오르면 돌계단으로 연결된 뒷동산으로 오르는 길이 나 있다....
뒷동산으로 오르면 사명대사 부도가 있는데... 사명대사의 승탑을 만나기 위해 언덕을 조금 오른다.
홍제암 북동쪽 약 20m 지점 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평범한 석종의 모습으로 만든 사명대사의 부도가 모셔져 있다.
사명대사탑은 조선 후기를 대표할 수 있는 거대한 종 모양의 탑으로, 당당한 형태와 조형미를 보여주고 있다.
조성 당시의 것으로 추정되는 담장의 석축이 있고 1석으로 조성된 기단은 하나의 돌로 2단을 이루었는데, 기단의 아랫단은 사각형이고 윗단은 둥근 형태를 보이고 있으며, 그 위에 종 모양의 몸돌을 올려놓은 모습이다.
탑의 꼭대기에는 연꽃 봉오리 모양의 보주(寶珠)를 올려 놓았다.
사명대사 부도는 고려의 승탑 형식을 계승하여 3단의 연화대좌와 종모양의 탑신, 둔중한 지붕들을 갖추고 있다. 부도는 사명대사의 사리를 봉안한 석조물로 1610년 입적하신 해에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명대사 부도에서 내려다 본 홍제암
사명대사 부도에서 내려 와서...
원당암 주차장으로 내려선다...
화려하고 웅장한 가야산 해인사와 적막하고 고요했던 홍제암 여행이 아름답게 마무리 된 것 같아서 즐거웠다......
이제 홍제암을 보고 인근에 있는 원당암으로 향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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