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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주 굴불사지 석조 사면불상(보물 제121호)-경북 경주시 동천동
    여행방/경상도 2020. 5. 2. 10:39

     경주 굴불사지 석조 사면불상(보물 제121호)

     


    2020.   5.   2.  



    2020.  4.  29.  지인과 둘이서 경주여행을 한다...

     
    신라 4대 탈해왕릉과 표암재를 보고 소금강산으로 오른 다음 굴불사지로 내려와서 백률사를 거쳐 다시 탈해왕릉으로 돌아와 신라 26대 진평왕릉, 설총묘를 보고 미담한정식으로 식사 후 41대 헌덕왕릉을 돌아보고 헌덕왕릉 근처에서 쑥도 뜯고 행복한 하루를 보낸 날이다.....

     

    오늘 네번째 일정으로 소금강산을 산행 후  이차돈의 순교 사찰인 백률사를 보고 내려오며 보물 제121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으로 향해본다...

     



     






    백률사에서 굴불사 절터로 내려가는 숲속길,  백률사에서 내려가는 계단 끝에 고운 초록 사이로 경덕왕때 세웠던 사면불이 있던 굴불사 사면불상이 보인다....








    경상북도 경주시 소금강산의 백률사로 가는 길목에 있는 것으로 이곳은 굴불사라는 절터로 알려져 있는데 그 유래가 삼국유사3 탑상 사불산굴불산만불산조에 보인다.

    백률사 바로 밑에 있던 굴불사 절터의 흔적을 가지고 있는 사방불로 삼국유사 기록에 의하면 신라 35대 경덕왕이 백률사에 행차하여 산 아래에 이르렀을 때, 땅속에서 염불소리가 들려 파게 하니 4면에 불상이 새겨진 사방불을 새긴 돌이 나왔다 하여 그곳에 절을 세우고 굴불사라 하였다고 한다.

    이 기록에 의해 사면석불 조성연대의 하한을 경덕왕대로 추측할 수 있다.





    높이 350cm. 이 사면불상은 서면의 삼존상을 중심으로 사면에 불상이 새겨져 있다.





    마애탑 굴불사지 사면석불상  (보물제121)


    동서남북 4면에 불상을 조각하는 것은 사방정토(四方淨土)를 상징한 것으로, 대승불교의 발달과 더불어 성행한 사방불 신앙의 한 형태로 보인다. 불교 경전이나 불상에 나타나는 사방불의 명칭은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이 불상의 경우 어느 특정 경전에 의한 것으로 보기보다는 당시의 대승불교에서 가장 널리 모시던 불상들을 배치한 것으로 생각된다.

    창건연대는 8세기 중엽으로 사방불은 원래 동서남북에 불상을 조각하는 것으로 사방정토를 상징하며, 대승불교의 발달과 더불어 성행한 사방불 신앙의 한 형태라고 한다.








    서면에는 아미타삼존불


    불교 경전이나 불상에 나타나는 사방불의 명칭은 매우 다양한데 이 석불의 서면에는 사방정토를 관장하는 아미타삼존불이 대세지보살과 관세음보살입상을 협시로 하고 있다.


    사면석불의 서면은 오른쪽의 보살입상은 두부가 파손되었지만왼쪽의 보살입상의 보관에서 화불(化佛)이 확인되고 있어 서방(西方) 극락세계(極樂世界)를 관장하는 아미타삼존불로 여겨진다.

     

    서쪽 면의 상은 양 협시보살은 별석으로 조성되어 있으며본존은 머리 부분만 따로 조성하여 바위 면에 조각된 몸 위에 얹어 놓았다.

    서쪽의 아미타여래는 신체만 돌기둥에 조각했고, 머리는 따로 만들어 놓았는데 머리가 얼굴보다 크게 표현되었다. 서면의 아미타여래상이 가장 먼저 조성된 불상으로 보고 좌우에는 다른 돌로 보살입상을 세워 놓아서 3존불의 모습을 띄고 있다.

     왼쪽은 관세음보살, 오른쪽은 대세지보살이다.

    왼쪽 보살의 한쪽 다리를 눈여겨보면 재미있다무게중심을 한쪽 다리에 두고 있는 삼굴자세다.


    이들 사면불상들의 표현 양식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서면의 아미타불상은 다른 불상들보다 크며 돋을새김으로 표현되어 있다머리는 별개의 돌로 조각하여 얹었으며, 오른손은 떨어져 나갔다법의는 양어깨에 걸쳤고, 앞에는 U자형의 주름이 계단식으로 조각되었는데, 표현이 조금 딱딱하게 되어 있다.


    양쪽의 협시보살상은 둘 다 독립된 돌에 둥글게 조각하였다오른쪽 보살의 윗부분은 파괴되었고, 왼쪽 보살은 삼곡(三曲)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은 삼국시대 말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통일신라시대에 들어와서는 더욱 유행하며, 불상의 자연스러운 자세를 나타내고, 균형이 잡힌 신체 비례를 보여 준다.


    삼곡 자세의 원류는 인도 굽타시대의 불상에서 시작하는데, 그 양식이 중국의 수()와 당()나라를 거쳐서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이다보살의 몸에는 목걸이와 X자형으로 교차된 달개장식이 있으며, 천의(天衣)나 치마의 표현은 매우 자연스럽고본존인 아미타불상보다 더욱 세련된 표현을 보여주고 있다국보 제81호 감산사석조미륵보살상이나 국보 제312호 칠불암 마애불상군과 비교하여 옷주름이 더 자연스럽고손동작이나 삼곡의 자세가 더 유연하게 나타나고 있어 더 후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면 중에서 서쪽 면의 아미타삼존상은 이들 조각군 중에서는 가장 먼저 제작된 불상으로 판단된다이 삼존불상은 8세기 후반 일본 불상에서도 나타나는데나라현(奈良縣)의 도쇼다이사(唐招提寺)의 목조불상들과 비슷한 점이 발견된다.

     




    북면에는 석가 삼존불


    북면에는 두 개의 보살상이 있는데왼쪽에는 얕게 선각(線刻)으로 표현된 십일면의 얼굴과 여섯 개의 손이 달린 십일면육비(十一面六臂)의 관음보살이 있다.  

    십일면육비의 관음보살상은 8세기 통일신라시대 신앙에서 밀교적 신앙을 지녔다 하여 매우 귀중한 자료의 예라한다. 


    오른쪽에는 부조(浮彫)로 표현된 보살상이 있는데, 형태상의 특징은 없으나 보살 중 장차 부처가 될 미륵보살이 아닌가 추측된다.


    중간의 석가모니도 두부가 파손되었다.

     

    북쪽 면의 돋을새김으로 된 보살입상은 높이 틀어 올린 머리에 보관을 쓰고 있다. 손을 든 자세나 천의를 두른 모습이 남면의 보살상과 매우 비슷한 형식이지만, 보존 상태는 별로 좋지 않다. 그 왼쪽에 선각으로 된 보살상은 여섯 개의 손이 있는데, 두 개는 양어깨 위로 올리고, 두 개는 가슴 앞에 모으며, 두 개는 양옆으로 내려진 것이 확인된다.

    양쪽 귀 옆으로 보살 2면이 있고, 머리 위에 5, 그 위에 2, 맨 위에 1면이 있어, 모두 11면의 얼굴을 가진 십일면육비의 관음보살을 표현하였다. 이는 관음상의 변화형으로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능력을 발휘하여 다방면의 신통력을 보여 주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이 사면석불은 대체로 719·720년 석조미륵보살입상과 감산사석조아미타불입상보다는 더욱 진전된 조각 양식을 나타내고 있어 삼국유사에 나타나는 경덕왕대와 부합됨을 알 수 있다. 발견 당시부터 조각이 이미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조각 양식 면에서 보면 경덕왕대, 742765년 사이나 그보다 약간 올라가는 시기에 조각된 것으로 보인다.

     

    사면석불의 북쪽 면에 십일면육비의 관음보살상이 표현되어 있는 것은 8세기 통일신라시대에 모시던 불상 중에 밀교적 성격을 띠는 불상이 있었음을 보여 주는 매우 귀중한 예이다.

     




    동쪽 면의 불상은 보주를 들고 있는 약사불


    양발을 무릎 위로 올리고 앉아 있는데몸 전체가 앞으로 숙여져 있다.

    동쪽 면의 약사불상은 결가부좌(結跏趺坐)를 하고 있으며왼손에는 약그릇을 상징하는 보주를 들고 있다. 오른손은 약간 파손되었으나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취하고 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와 같은 수인은 칠불암 사방불 동면과 경주 남산 미륵곡 석불좌상 광배 뒷면 상에서도 나타난다그러나 8세기 중반 이후의 대부분의 약사불상들은 대부분 왼손에는 약합을 들고 오른손을 무릎위로 올리고 있어서 시무외인을 결한 형식의 약사불상은 초기 형식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남쪽 면의 불상은 석가삼존불로 추정된다.

    남쪽 면은 불입상을 가운데 두고 양 옆에 보살상이 있었던 삼존불로 추정되나 우측 보살상이 결실되어 있다.   현재는 두부가 모두 파손된 여래입상 한 구와, 보살입상 한 구가 위치한다.

    남쪽의 불상과 보살상은 8세기 후반 일본 불상 양식에서도 볼 수 있는 나라현의 당초제사의 목조불상과 그 양식이 비슷하다고 한다.

    남쪽 면에 현재 남아 있는 보살상과 불상은 비교적 보존 상태가 좋은 편이다형태의 균형도 잘 잡혀 있고 주름이나 몸체의 굴곡 표현이 자연스러우며, 세련된 조각 기술을 보여 주고 있다두 개의 불상이 모두 높은 돋을새김으로 조각되었는데 머리 부분과 오른팔이 떨어져 나갔다. 보살상은 오른손 부분이 없어졌다.


    불상의 모습은 경주 국보 제82호 감산사석조아미타불상과 비슷한 형식의 옷주름을 하고 있다. 가는 허리와 도드라진 다리의 윤곽이 더 강조되었고, 주름의 처리가 감산사불상보다는 더욱 간략히 처리되면서 부드러운 곡선으로 이루어졌다. 이렇게 사실감이 더해지면서 신체와 법의가 밀착되어 조화 있게 표현된 것은 8세기 전반기의 통일신라 조각 양식의 한 특징으로 볼 수 있다.


    보살상 또한 넓은 어깨, 가는 허리 등 팔다리의 윤곽선이 강조되고, 천의는 부드러운 주름을 이루면서 늘어졌는데, 좀 투박하고 도식적인 느낌이 있으나 감산사석조미륵보살입상(국보 제81)에 비하면 훨씬 진전된 조각 양식이다.   왼쪽 어깨부터 오른쪽 겨드랑이를 사선으로 묶은 낙액(珞腋)이 표현되어 있고 천의가 2단으로 감겨 있는 것은 석굴암(742765) 감실 보살상에서 보이며, 목걸이의 표현 등에서도 비슷한 모습이 보인다.

     




    1981년 가을에 이 사면석불의 주위를 발굴하였는데이때 서쪽 면과 남쪽 면의 불상대좌가 노출되었다. 서쪽 면의 대좌는 팔각의 내림연꽃받침이 있고남면대좌는 이중으로 된 연화대좌가 팔각의 중대(中臺)로 연결된다.

    윗부분은 앙련(仰蓮)에 홑꽃잎이고, 밑부분은 복련(覆蓮)에 겹꽃잎의 받침으로 서쪽 면의 불상보다는 복잡하고 장식적이었다.








    굴불사지에서 내려와서  절 옆구 담장을 끼고 탈해왕릉으로 방향을 잡으면





    굴불사를 지나고 표암재에 도착하면 바로 옆 탈해 왕릉으로 돌아왔다.   이제 보문동으로 다음 여행지 신라 26대 진평왕릉으로 향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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