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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효대사가 수도하고 김유신 장군이 통일을 염원하던 사찰, 불굴사(경북 경산시 와촌면 불굴사길 205,와촌면 강학리 5)
    사찰여행/경상도 2018. 10. 8. 09:33

    원효대사가 수도하고 김유신 장군이 통일을 염원하던 사찰,  불굴사

      

      

    2018.     10.    8 .

      

      

    2018.   10.   4.    혼자서  경상북도 경산시 대한리에 위치한 갓바위(관봉석조여래좌상)에 기도 올리고  대구 방향으로 하산하다가 약사암 방향으로 해서 선본사 주차장으로 내려와서 선본사를 들러보고 대한리로 내려가다 용주암의 마애석불도 만나보고 불굴사도 들려보는 여행 이다.. 


    세번째 여행지 팔공산 자락의 조용한 사찰 원효암과 마애여래좌상응 만나보고  오늘의 네번째 여행지를 만나러 불굴사로 향한다......

      

      




    ㅇ팔공산 원효암과 갓바위에서 내려오는 합류 길에서 한참을 내려오면 송림 한옥마을과





    예쁜 카페들을 지나





    대한리 표지석도  지나면...





    대한리에서 나오다가 사거리의 대형  갓바위 표지판에서 서쪽으로 바로 직진하면 굴불사 들어가는 초입이 나온다.





    팔공산에서 남쪽으로 줄기 쳐 나온 환성산의 북쪽 자락에 놓여 있는 불굴사를 찾아 간다.





    불굴사는 환성산의 북쪽 사면 산중턱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데 절을 향하는 산비탈은 매우 가파르다.





    가파른 산비탈을 몇 분 오르면 넓은 주차장과 함께 절터를 다져 놓은 석축들이 눈에 들어온다.








    2013년에 와 보고 5년만에 다시 들러 보는 불굴사...


    불굴사는 팔공산 남쪽 기슭에 있으며 자연으로 이루어진 석굴 안에 부처님을 모셨다고 하여 불리워진 이름이다. 신라 신문왕 10(690)에 창건한 것으로 흥성기에는 50여동의 와가(瓦家) 12개의 부속암자, 8대의 물방아를 갖춘 대사찰이었다고 전해 온다. 불굴사는 신라 신문왕 10년에 창건된 사찰로 고려를 거치면서 사세가 번성하였고 조선 전기까지도 그럭저럭 사세를 유지해 온 듯한대 조선 영조 12(1739)폭우로 인해 산사태가 일어나면서 절이 퇴락하였고 그후 순천 송광사에 기거하던 노스님이 현몽을 꾸어 이곳에 와서 절을 중건하였고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불굴사 주차장에서 올려다본 불굴사 홍주암(紅珠庵)





    절터를 다져 놓은 석축들이  성벽같은 불굴사 오름 길의 하늘이 참 이쁘다.   '나무아미타불' 표지석과




    입구 좌우의 금강역사가 길손을 맞는다...



    사찰 마당으로 발을 들여 놓기전에 좌측으로 종무소 아래로 범종각이 자리하고 있다.





    종무소도 보인다.





    불굴사라는 이름은 이곳에 사찰이 창건됙 이전에 원효대사가 수도한 작은 석굴이 있기 때문에 원효암이라고 불리우다가 불굴사라는 명칭으로 변화된 듯 하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적멸보궁·약사보전·독성각·산령각·요사 등이 있고, 그 밖에 원효와 김유신이 수련하였다는 원효굴 또는 불암으로 부르는 석굴에는 홍주암(紅珠庵) 독성전이 있다.





    불굴사 마당을 들어서면 적멸보궁 바라보며 우측으로 염불당 요사가 있다.





    염불당 현판은 대구의 근대 서화가 석정 변성규 선생의 글씨이다.








    염불당 한쪽 끝에는 지장전을 조성하여 지장보살을 봉안하였다..








    좌측의 요사 염불당 우측으로는 주지스님이 머무시는 향적전이 자리하고 있다..





    우측의 향적전은  불굴사 마당에서 보면 단층으로 보이지만






    원래는 2층 건물로 1층에는 공양간이 있고





    그 공양간 2층이 향적전이다..





    요사 염불당과 향적전이 ㄱ 자형태를 이루고 있다..



    적멸보궁 앞에 오래된 석등은 2013년에 왔을 때는 약사보전 앞에 있었는데 지금 이곳으로 옮긴 듯 하고 통일신라시대에 조성한 석등으로서 이 자리가 원 위치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불굴사 삼층석탑(보물 제429)


    높이 7.43m.  석탑은 불굴사(佛窟寺) 절의 경내에 자리하고 있다이 절이 창건되었을 때의 이름은 알 수 없으며,  당시의 법당은 현재 받침 부분 일부만 남아 있는 상태이다.





    석탑은 2층 받침돌 위에 3층의 몸돌과 지붕돌을 올린 전형적인 신라 석탑의 모습이다. 상륜부(相輪部)의 일부만 없어졌을 뿐, 비교적 온전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





    바닥돌인 지대석(地臺石) 둘레에는 길고 넓은 돌로 탑구(塔區)를 마련하였고다시 그 안쪽에 긴 돌을 네모나게 결구(結構)하여 바닥돌을 삼았다아래층 받침돌은 하나의 돌에 모서리 기둥과 가운데 기둥을 새긴 면석 4장으로 구성하였다덮개돌은 2장의 널돌을 옆으로 이어 덮었으며윗면 가운데 부분에는 둥글고 퇴화된 각진 테두리 장식이 마련되었다윗층 받침돌은 4장의 널돌로 돌려진 면석과 1장의 널돌을 올린 덮개돌로 구성되어 있다. 면석은 2장의 널돌에 모서리 기둥과 가운데 기둥을 새겼지만, 다른 2장의 널돌에는 가운데 기둥만을 조각하고서 모서리 기둥을 새긴 널돌의 옆면을 다듬어 돌출시켜 모서리 기둥의 효과를 내게 하였다.   얇은 덮개돌에는 밑면에 좁은 부연(副椽)을 새겼고, 윗면에는 바깥쪽으로 완만한 경사를 내고 가운데 부분에 둥근 2단의 테두리 장식을 조각하였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조성하였다. 각 층의 몸돌에는 모서리 기둥을 새긴 것 외에 다른 장식이 없다. 각 층의 지붕돌은 비교적 얇은 편인데, 윗면 가운데 부분에 2단의 각진 테두리 장식을 두었고, 밑면에는 4단의 받침을 새겼다. 윗면의 낙수면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서 전각(轉角)은 반전(反轉)을 크게 하여 곡선을 과장시킨 모습이다. 상륜부에는 3층 지붕돌 위에 놓인 노반(露盤)과 함께 엎어놓은 주발 모습의 복발(覆鉢)만 남아 있다.


    이 석탑은 전체적으로 지붕돌을 비롯하여 옆면으로 나타나는 모든 석재의 가공이 얇고, 지붕돌의 전각과 둥근 굄은 크게 부각시키면서 각진 굄은 형식화하였다. 따라서 전형적인 신라 석탑의 조성 비례는 따랐지만, 신라 하대에 새로 나타나는 경쾌한 조형미를 의식한 특징을 보인다.





    현재 적멸보궁인 옛 사찰의 대웅전 터 앞 축대 아래에는 오래되어 보이는 괘불대가 자리해 있다두쌍의 괘불과 탑 주변으로 많은 석조유물들이 자리하고 있다..

    원래 대웅전 자리에 적멸보궁이 세워졌다고 하니 괘불대 역시 원래의 괘불대로 추정된다.





    절 마당의 중심에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 전각이 자리하고 있다.

    원래는 절이 창건되었을 때 대웅전이 놓여 있었던 자리였는데 폐허로 복구되지 못하고 있던 것을 1988년 원조 스님이 인도에서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이곳으로 모셔 오면서 새로 조성한 전각이다.



    불굴사 적멸보궁


    불굴사의 주전각인 적멸보궁은 1980년 지어졌으며 정면 3,   측면 3칸의 구조로 맞배지붕의 양식을 지닌 주심포 공포형식의 법당이다.   3단의 높은 화강암 축대 위에 세워진 적멸보궁은 좌우로 석조계단과 사자상이 각각 마련되어 있다.

      



    1988년 원조 스님이 본래의 대웅전 위치를 찾아 그 자리에 인도에서 모셔온 부처님 진신사리를 봉안하기 위하여 적멸보궁을 지어 오늘에 이른다.








    적멸보궁은 1988년 인도에서 모셔온 진신사리를 봉안하기 위하여 지었는데, 이 자리가 본래 있던 대웅전 자리라고 한다.  2013년에 왔을때만 해도 적멸보궁 안에 진신사리가 안치되어 있었는데  현재는 전각 밖에 3층탑을 설치하여 적멸보궁 안에서 전각 밖의 삼층석탑을 유리를 통해서 볼수 있도록 해 두었다.








    적멸보궁 안의 북쪽으로 신중단이 있고..





    적멸보궁 안의 남쪽으로 영가단이 있다..

    진신사리탑이 전각 안에 있던 예전보다 적멸보궁이 많이 넓고 정리정돈이 잘 되어 있는 느낌이다...








    3단의 높은 화강암 축대 위에 세워진 적멸보궁 좌우로 석조계단과 사자상이 각각 마련되어 있다.








    적멸보궁  전각 뒤의 진신사리 안치석탑(원조스님 1988년 인도 가져옴)은 최근 조성한 것 같다.








    적멸보궁에 달아 놓은 멋진 풍경








    적멸보궁 외벽에는 심우도가 그려져 있다.





    산령 독성각은





    근래에 조성한 산신탱과 독성탱을 봉안하였다.





    산령 독성각에서 바라본 너무나 멋진 불굴사 경내 전경

     




    적멸보궁의 오른편에 약사보전이 자리하고 있다.





    역시 마찬가지로 조성 연대가 그리 오래 되지 않아 보이는 전각이다.








    불굴사 석조입상(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 401호)


    약사보전 전각 안에는 고려 시대 조성된 약사여래불이 모셔져 있다.










    불굴사 석불입상은 1736년에 내린 큰비로 사찰 전각이 무너질 때 매몰된 것을 현몽을 꾼 노스님이 조선 후기 새롭게 중창 불사를 일으키는 과정에서 땅 속에 묻혀 있던 것을 약사보전으로 옮겨 모신 것으로 고려 시대 어간에 만들어진 불상으로 볼 수 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갓바위 약사여래불과 같은 시대에 조성된 불상으로 족두리를 한 여성의 모습을 띠고 있어 갓바위 석불이 남편이고 불굴사 석불은 부인이 되는 부부 불상으로 조성되었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








    특이한 것은 불굴사 주변 일대에 우기가 있으면 불상의 얼굴 부분에 땀이 나고 특히 큰비가 오기 전에는 불상의 온몸이 흠뻑 젖는다고 하는데 지금도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가 있거나 하면 반드시 석불의 몸에 습기가 가득 찬다고 한다.





    상호의 표정과 신체의 표현, 그리고 대좌 양식 등으로 볼 때 고려시대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땅 위의 화강암 위에 받침대를 세우고 그 위에 약사여래를 조각해 모셔놓았다.   불상의 상호는 타원형의 얼굴로 귀가 크고 어깨까지 길게 늘어졌다머리에는 굵고 둥근 육계가 솟아있고머리모양은 별 장식이 없는 민머리 형태이나 얼굴과의 경계는 뚜렷하게 구분 지었다.   얼굴의 입, , , 귀는 훼손되어 큼직한 얼굴에 맞게 다시 새겼고, 굵은 목에는 삼도가 표현되었다.   불의는 길어서 발등까지 덮었고 오른손은 손바닥을 바깥으로 향하도록 허리춤에 대고 있으며 왼손에는 약합(藥盒)이 들려져 있다.   혹자는 이 약합을 보주로 보아 미륵입상으로 보기도 한다.   연화대좌는 둥근 원형으로 하단에 복련(覆蓮)으로 장식되어 있다.   불상의 뒷면에도 옷주름이 뚜렷하게 표현 되었고목 아래쪽과 머리쪽에 큰 구멍이 있어 광배를 부착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불굴사 전설

     

    불굴사의 이러한 쇠락에 관련하여 인근 강학리에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조선시대에 불교가 탄압을 받고 있을 때의 이야기다.   본래 불굴사는 굉장히 큰 절이었는데 절이 있는 계곡 안으로 들어가 보면 골짜기 마다 절이 있었고 밭이 곳곳에 있었다. 그때는 은해사도 불굴사의 말사였다.

     

    그러나 불교가 탄압을 받기 시작하자 스님들은 일반 백성들에도 멸시를 받았다.   지나가는 과객들도 절에 와서 괜히 스님을 업신여기고 밥 해 달라, 뭐 해 달라 하며 큰소리를 쳤다그러다가 조금만 잘못하면 덮어놓고 스님들을 때리기 일쑤였다.   불굴사는 이러한 과객들의 폐단이 깊었다그러나 스님들은 과객에게 항거할 수 없었다.   마침내 스님들은 참다 참다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었다그때 마침 한 점잖은 과객이 이 절에 들르자 스님들은 이 같은 폐단을 털어놓고 절에 손님이 적게 오는 방법이 없는지 물었다.

     

    과객은 그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라면서 산 너머 솔밭에 가면 큰 거북돌이 하나 있는데 그 거북의 눈을 빼버리면 오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그 절의 스님들은 과객들 때문에 워낙 지쳐 있었으므로 그 말을 듣고 좋아하며 거북의 눈을 빼버렸다그러자 청전 하늘에 갑자기 뇌성벽력이 치고 비가 쏟아지더니 이 산 저 산 다 떠내려 와서 절이고 암자고 다 묻혀버리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러다 보니 이 절을 따르던 은해사 암자가 오히려 큰 절이 되고 불굴사는 결국 은해사의 부속 암자가 돼버렸다.








    약사보전 옆 연지



    약사보전 옆 연지 위로 새로이 관음전을 불사 중이다..





    관음전 아래 연지에 있는 부처님 관욕대






    '팔공산 불굴사 원조 회광대선사 공덕비'는 근래에 들어 불굴사를 일궈낸 원조스님의 공덕을 기리는 비이다.







    적멸보궁을 비롯한 불굴사의 모든 주련은 한글주련으로 되어 있다.








    홍주암은 요사채 앞을 지나 250m쯤 오르면 홍주암을 만날 수 있다.











    홍주암은 250m를 걸어서 15분이 걸린다.





    홍주암 가는 길...




    멀리 보이는 바윗돌 위에 그 홍주암이 있다.








    홍주암을 오르는 108계단 조성을 기리는 공덕비와 홍주암에 대한 안내문이 세워져 있다.





     상세하게 설명해 놓은 홍주암 안내판





    108번뇌 계단길과  돌탑이 보인다.

















    밑에서 본 홍주암 바위 전경








    홍주암 아래 측면바위 전경














    홍주암 오름  돌계단 옆에는





    앞으로 튀어 나온 자연석 돌 아래로 부처님과 탑.동자승를 모셔두었다...





    홍주암 입구





    붉은 구슬의 의미 태양을 뜻하는데 음의 기운을 가지고 있는 불굴사 경내에서 가장 이른 시간에 해가 솟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장소로 주위 경관이 수려하다.





    암벽사이 좁은 길








    불굴사 우측으로 돌아가면 200m지점 아찔한 암벽계단 오르면 원효굴로 알려진 석굴이 나온다.





    불굴사가 창건되기 전 원효대사가 수도하던 곳, 또한 김유신 장군이 17세때 삼국통일를 위해 몸과 마음을 정진 하던 석굴이라 전하는 굴이 있는데 이를 "원효굴"이라 부른다.





    석굴내 범종





    원효석굴


     김유신 장군 수도처로 부처님 좌우 금강역사 신위 앙각상은  최근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석굴은 1976년에 내부를 보수하던 중 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청동불상 1점이 발견되었으며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흥주암 원효굴의 아금강역사
































                                               

                                      흠금강역사





    홍주암 석굴내부 석굴 속의 죄측 약수터는 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아동제일약수(我東第一藥水) 라는 글귀가 뚜렷하게 새겨져 있다.





    홍주암 옆에 있는 제일 약수로 구전에 의하면 이 약수는 장군수라고도 하는데김유신 장군이 이 물을 마시면서 삼국통일의 염원을 기도할 때원효대사께서 수도할 때 약수로 쓰였다 한다.





    홍주암은 암벽 중간의 석굴이라





    석굴에서 위로 올라가면 독성각이 있는데, 석굴 내부에서 통로 따라 올라 갈수도 있고





    석굴 바같쪽 계단 따라 올라갈 수도 있다.





    석굴에서 올라오는 통로로 오르다 내려다 보고





    또 올라 본다.  인공적으로 통로를 뚫지 않았나 생각되어 진다.





    동굴 계단 옆으로 나온 나무 뿌리가 인상적이다..





    통로를 올라오면 외부 계단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난다.





    왼쪽 통로와 오른쪽 외부 계단이 합류하여





    위로 올라가서








    또 석실로 된 통로를 지나





    바깥쪽으로 빠져나가




     

    아래에 보이는 건물은 경북강남 요양병원 이다.








    위로 올라오면 독성각 이다.





    독성각은 워낙 높은곳이라 바람도 심해 유리로 앞을 막아 놓았다.




    독성각 내부에는 독성과 독성탱이 봉안되어 있는데 유리로 막아 놓아 사진이 잘 나오지를 않는다..





     이곳을 찾는 객들이 저마다의 기도문을 올리고 나름대로 표시를 해둔 모습이다.





    불굴사에서 독성각 까지 공양물을 실어 오르 올리는 삭도도 독성각 한쪽에 있었다..





    독성각 주변에는 저마다의 손원을 담은 소원지가 매달려 있다.





    독성각 옆 암벽





    이런곳에 암자를 세울 생각을 했다니 옛날 분들도 참 대단하시다...





    독성각에서 내려다본 모습으로 경산시 전경이다..














     

    소나무가 바닥을 뚫고 올라와 있다.





     아래에 내려와 보면 천정을 뚫고(위에서 보면 바닥) 올라간 소나무가 보인다.








    홍주암에서 내려가는 길








    암벽 바깥쪽으로 아슬 아슬하게 계단을 설치해 놓았다.





    홍주암 오르 내리는 절벽 철계단을 타고 그리고 돌계단을 타고 홍주암을 내려간다.





    홍주암 옆 등로를 따르면 무학산으로 산행을 할수 있다고 한다.





    홍주암에서 내려가는 길








    홍주암 내려오는 길 마지막 공양간옆 해우소  아래로 내려서면 불굴사 부도를 만난다...





    부도전은 명문을 알수 없는 조선 후기 부도 3기와 근자에 조성한 1기가 있다.

     




    '원조당 회광대선사'는 근래에 들어 불굴사를 일궈낸 원조스님 이다.








    다시 불굴사 경내를 지나...




    새로이 불사 중인 관음전 옆길을 따라  미륵불 입상을 만나러 간다.





    미륵불 입상은 백설암 가는 철문 왼쪽 등산로를 따라 150m 쯤 오르면 된다.




    산중턱에도 부처님이 ~ 






    미륵불 입상오르다 돌아 보니 미륵불 오르는 길과 불굴사와 홍주암이 보인다.






    미륵불 입상 앞에서 바라 본 부처님





    미륵불 입상으로 경내 남동쪽 언덕 위에 근래에 조성한 석조 미를불 입상을 봉안하였다.










     

    미륵불 입상 앞에서 내려다본 경내불굴사 위쪽에 보이는 바위 위에 석굴 홍주암이 있다.





    다시 경내로 돌아와








    불굴사 주차장으로 내려 간다.







    원효대사가 수도하고 김유신 장군이 통일을 염원하던 사찰 불굴사를 나와 다시 중생들의 사바세계로 돌아간다.
     
    남자는 마음으로 늙고,   여자는 얼굴로 늙는다고 하지만,  나이가 들면 들수록 꽃 같은 인품의 향기를 지니고  넉넉한 마음으로 살게 하소서
    늙어 가더라도 지난 세월에 너무 애착하지 말고언제나 청춘의 봄날로 의욕이 솟아 활기가 넘치는 인생을 젊게 살아가게 하소서
    우러난 욕심 모두 몰아내고언제나 스스로 평온한 마음 지니며 지난 세월을 모두 즐겁게 안아 자기 인생을 사랑하며 살게 하소서
    지나간 과거는 모두 아름답게 여기고 앞으로 오는 미래의 시간표마다 아름다운 행복의 꿈을 그려 놓고매일 동그라미 치며 사는 삶으로 인생의 즐거움이 넘치게 하소서
    아침마다 거울을 보면 한 줄씩 그어지는 주름살 나이가 들어 인생의 경륜으로 남을 때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살아가며 마음의 부자로 여기며 살게 하소서
    신이 살아 오면서 남긴 징표를 고이 접어 감사한 마음을 안고 나머지 삶도 더 아름다운 마음 지니며 큰 기쁨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인생이란 결국 혼자서 가는 길.   살아온 날 들이 너무 많아 더 오랜 경륜이 쌓인 그 무게,   노여워도 노여움 없이 무조건 마음으로 모두 나누어 주어 아무 것도 마음에 지닌 것 없이 자연스런 마음으로 다시 돌아가 백조가 너무나도 평온하게 노니는 이 세상에서 가장 푸르고 잔잔한 마음의 호수 하나 가슴에 만들어 놓고,   언제나 기도하는 마음에서 우러난 근심 없는 시간으로 살아가게 하소서그게 인생의 가장 큰 행복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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