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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법광사와 옛 법광사터(사적 제493호)- (경북 포항시 북구 신광면 상읍2리)
    사찰여행/경상도 2018. 9. 25. 22:33

    법광사와 법광사터(사적 제493호)



      2018.  9.  25. 



    2018.   9.   25.   이어진 추석 연휴로 작은 딸,  남편과 셋이서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신광면에 위치한 법광사와 송원사 여행 이다.. 


    먼저 법광사 여행부터 ...

    법광사(法廣寺) 터는 포항시 신광면 상읍리, 학이 알을 품고 있다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형국이라는 비학산(飛鶴山) 산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법광사는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왕명을 받들어 창건한 절이라고 전해 오는데, 진평왕의 할아버지인 23대 법흥왕의 법명을 따서, 불법을 널리 편다는 뜻의 법광사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감나무로 둘러싸인 작은 공터에 차를 세우고 또 작은 계곡을 건너면 바로 법광사가 나온다. 














    법광사는 일제 강점기인 1936년에 벽허당 장눌선사가 법광사터에 법광사를 지었다 하는데...   법광사 터 서쪽 골짜기 개울가에 자리한 법광사지(法光寺址)에는  현재  1952년에 건립된 작은 규모의 현재 법광사(法廣寺)가 있다.








    법광사의 주전각은 원통전이다.

    높은 석축 위에 원통전이 자리하고 있고 그 뒤로 산령각이 있으며 마당엔 근래에 세운 삼층석탑이 있다.   좁은 마당을 사이에 두고 원통전 좌우로 요사와 종무소가 있다.








    원통전을 바라보며 왼쪽으로는 요사가 있고...





    원통전을 바라보며 오른쪽으로는 종무소가 있다...  종무소마루에 앉아 있는 우리딸...





    원통전 앞 마당에는 근래에 세운 듯한 삼층석탑이 있다.





    배례석은 현재의 법광사의 마당, 새로 만든 탑 앞에 향로가 놓여 있는 것이 배례석이다.

    지대석과 대석이 각각 다른 돌이다.

    지대석은 가로 174cm, 세로 93cm이다.  앞면에 1개 뒷면에 2개 모두 3개의 돌로 짜맞추고 윗면 가장자리에 차츰 줄여가며 3단의 굄대를 만들었다.

    대석은 통돌로 다듬었는데,  가로 152cm,  세로 75cm, 높이 25cm이다.  앞면과 뒷면에 똑같이 3개씩, 양쪽 옆면에 2개씩 안상을 새겼다.  윗면에는 지름 37cm의 연꽃을 돋을새김하였다.  연꽃무늬는 가운데 있지 않고 앞쪽으로 많이 당겨져 있는데 그 까닭은 알 수 없다.  연꽃무늬는 신라 와당에서 보는 연꽃과 흡사하다.








    이 절의 기단이나 법당에 오르는 계단 등은  옛 법광사 터에 흩어져 있던 석재들을 모아 일제 강점기인 1936년에 벽허당 장눌선사가 지은 것이다.





    한쪽에 모아진 석조물들...





      절 계단 밑의 돌에 새겨진 화불의 모습





    원통전(圓通殿)은 팔작지붕에 정면 3칸과 측면 2칸으로 되어 있다.


                                      白衣觀音無說說   백의관음은 말없이 설법하시네.

                                  南巡童子不聞聞   남순동자는 들은바 없이 듣노라.

                                  甁上錄楊三際夏   꽃병 위 푸른 버들 삼제의 여름이요

                                  巖前翠竹十方春   바위 앞 푸른 대나무 시방세계 봄이로다.





    안에는 지장보살존상, 관음보살, 석가여래 존상, 아미타존상, 석조 보살존상, 후불탱이 있다.





    향 부처님 우측 불단 벽에는 칠성탱과 신중탱. 약사여래탱이 있다.





    향 부처님 좌측 불단 벽에는 아미타탱이 있다.





    법광사 산령각 앞에서 바라본 법광사








    원통전 후면  외부 벽화로 십우도를 그린듯 하다..





    법광사 산령각 (山靈閣)

     

    원통전 좌측의 산령각은 맞배지붕에 정면 측면 각 1칸으로 되어 있다.





    산령각내 독성탱과 산신탱화





    그리고 호랑이 2마리를 그린 그림이 있다.








    진영각 앞에서 바라본 산령각








    법광사 진영각

     

    원통전 좌측 뒤로는 진영각기 있고,  진영각은 조사각이라고도 하며 고승대덕의 영정을 봉안하는 곳이다.

    '조사'라고 하는 말은 어느 학파를 창건하거나 또는 크게 중흥시킨 선덕으로서 후학들에게 존경을 받는 큰스님을 일컫는 말로 특히 선가에서 즐겨쓰는 말이다.





    진영각 안의 창건주 벽허당 장눌선사 존영




     

    법광사 진영각내 불화








    2년전에는 없었는데 진영각 옆으로 아미타 부처님을 조각해 모셔 두었다...











    법광사지 가는길


    법광사 담장을 따라 사리탑 가는 길은 어릴 적 학교에 갔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처럼 정겹다정겨운 법광사 담장길이 너무나 운치가 있다.

    편안하고 고요한 우리네 호젖한  시골 담장 같지 않은가?





    법광사 옛 절터로 오르며 바라본 현재의 법광사 모습이다.


    신동국여지승람」과 「동경잡기」등의 조선시대 문헌에도 사찰의 이름과 위치 등이 정확히 실려있는 법광사 터는 현재 사적 49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절터에는 연화대좌,   석가모니불 사리탑​이라 전해오는 삼층석탑,  석가모니불 사리탑 중수비,  쌍귀부 등이 남아 있다.

    법광사는, 창건 당시에는 불국사에 버금가는 규모와 수준을 과시했다고 하며,  호화로운 장식은 왕궁보다 더 사치스러울 정도였다고 한다.

    절이 지어지자 진평왕은 여러 차례 법광사 대웅전을 찾아 직접 불공을 올렸으며,  친필로 쓴 편액을 대웅전에 걸기도 하였다고 한다.   진평왕은 기골이 장대하고, 삼국유사에 의하면 키가 11척이라 했는데, 이는 당척(唐尺)으로 계산하면 3m가 넘는다.

     

    어쨋거나,  법광사 창건 설화는 법광사 터에 있는 "법광사 석가사리탑 중수비"의 비문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비문에 따르면, 신라 24대 진흥왕 10년에 중국 양(梁)나라 무제가 부처의 진신사리 22과를 사신을 통해 보내오자,  진흥왕이 이를 궁으로 맞아 들였으며,  훗날 손자인 진평왕이 원효로 하여금 법광사를 짓도록 명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중수비문을 세우던 1750년(영조 26) 당시만 해도,​ 약 5천여 평 규모의 경내에는 대웅전, 2층으로 된 금당, 향화전 등 모두 525칸에 이르는 대찰이었으나, 철종 말년인 1863년에 불이 나서 모두 타버리고 폐사가 되었다.





    법광사 뒤편으로 돌아가면 옛 절터(법광사지 사적 제493호)가 나온다.

     

    법광사는 신라 진평왕(재위 579∼631) 때 건립된 사찰이다.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으며, 법광사 터에는 석가불사리탑,  연화석불좌대,  쌍두귀부,  당간지주 등의 유물이 남아 있으며,  조선 영조 때에 세운 사리탑 중수비가 있어 법광사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옛 절터는 모두 밭으로 변해버렸고 석가불사리탑인 삼층석탑이 홀로 푸른 하늘을 이고 서 있다.   밭 사이에 불상연화대좌, 쌍귀부 등이 남아 있고 밭 중간 중간에 건물의 주춧돌이 보인다.





    법광사의 옛 절터로 오른다.  현 법광사를 돌아 가면 바로 뒤에 있다.





    석거불사리탑 앞에 세워져 있는 법광사지 안내판





    공덕비.  사리탑이 보인다...  석가불사리탑인 삼층석탑이 홀로 푸른 하늘을 이고 서 있다.





    보봉당대선사 비와 부도











    근래에 만들어진듯한 벽허당 장눌대선사 새로운 법광사 창건 공덕비 








    탑 주위에 담장이 둘러져 있고 그 안에 석가불사리탑이 있다.








    석가불사리탑 (釋迦佛 舍利塔)  3층 석탑

     

    이 석탑은 현재 사찰 중심부에서 서남쪽 언덕 위에 있는데 현재는 탑 주위에 담장이 둘러져 있고,  옆에는 1750년(영조 26)에 세운 비석이 있다.  옆에 있는 비문에 의해 828년(흥덕왕 3)에 세운 것임을 알 수 있다. 





    석가불사리탑 사리장엄


    사리장엄의 하나로 발견된 탑지석의 내용에 의하면 828년(흥덕왕 3) 탑을 세우고 846년(문성왕 8) 지금의 위치로 이건되었는데,  당시 왕실의 지원이 있었음이 암시되어 있다.   탑의 높이는 420㎝이다.


    1968년 석탑이 도굴되어 사리장엄이 불법 반출되었다가 나중에 회수되었다. 이 때 되찾은 사리장엄으로는 청동제 및 납석제(蠟石製) 사리호 각 1개씩과 탑지석 2매 등이 있다. 특히 납석제 사리호 안에는 사리 8립(粒)이 들어 있었다.

     

    청동제 및 납석제 호는 둘 다 형태가 둥그스름하여 인도 초기 사리장엄구로 유행하였던 원구형(圓球形) 사리기의 영향을 느낀다.

     

    납석제 사리호는 높이 4.3㎝이며 겉면에 먹으로 쓴 크기 약 1㎝의 ‘불정존승다라니(佛頂尊勝陀羅尼)’ 글씨가 4행으로 적혀 있는데, 서체가 온후하며 묵흔(墨痕)도 비교적 선명하다. 전체적 양식으로 보아 신라 하대에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청동제 사리호는 높이 7.5㎝에 뚜껑이 있어 자그마하지만 납석제 사리호를 안에 넣을 만한 크기는 충분하여 이것을 사리 외함(外函)으로 볼 수 있을 듯하다.

    이 청동제 사리호는 양식으로 볼 때 경상북도 봉화 서동리 삼층석탑 출토 납석제 사리호에 바로 앞서는 선행(先行) 양식으로 생각되며, 9세기 말~10세기 초에 나타나는 이른바 복발형탑(覆鉢形塔) 사리기와도 관련 있는 양식으로 추정된다.

     

    또한 신라 하대와 조선조 후기에 각각 만들어진 2개의 탑지석 각 면에는 이탑(移塔)의 연월이나 그 때의 관계기록뿐 아니라, 그보다 앞서는 건 탑 및 후대 중수의 연월과 인명이 새겨져 있다.  그리하여 신라 법광사 석탑에 관한 확실한 관계지견을 얻을 수 있으며,  법광사 삼층석탑이 828년에 조성되었음을 확실히 알 수 있어 신라 하대 석탑의 표준 작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이 같은 의미에서 법광사의 사리장엄을 비롯하여 탑지석,  중수비 등은 우리의 금속공예사 및 탑파사에 있어 매우 의미 있는 작품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탑지석이란 탑을 세운 인연과 발원자 등을 적은 글로 중국에서 흔히 보이는 것과는 달리 우리나라에서 사리장엄에 포함되는 것은 무척 드문 일이다.  이 탑지석에는 건탑(建塔)과 이건(移建) 및 2회에 걸친 중수 사실이 각각 그 연대를 달리하면서 각 면에 새겨져 있었다.  또한 훗날 희강왕(僖康王)에 오르는 김균정(金均貞, ?~836)이 사단월(寺檀越)이었다는 내용이 보여 대구 팔공산 동화사와 비교해서 무척 흥미롭다.  왜냐하면 동화사는 왕위를 놓고 김균정과 적대하였던 민애왕(敏哀王, ?~839)의 원찰이었기 때문이다. 이 두 사람은 모두 불행한 최후를 맞이하였는데, 그들의 원당과 원탑이 이같이 따로 건립되었던 것이다.   사리장엄구 일괄은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높이 4.2m의 이 탑은, 진흥왕 10년에 중국의 양무제가 사신을 통해 보내준 석가모니 진신사리 22과를,  훗날인 흥덕왕 3년(828)에 왕족 출신의 승려 향조와 원적이 사재로 탑을 세우고, 그 안에 진신사리를 봉안했다고 전해지는 탑이다.  탑비에는 5층탑이라고 되어 있으나, 정밀 조사 끝에 3층탑임이 밝혀졌다.





    1750년에  조선 영조시대에 세운 사리탑중수비(舍利塔重修碑)가 남아 있어 법광사의 중요성을 말해주고 있다.





    눈여겨 볼 것은 탑이 서 있는 좌대로  두개 돌 중앙에 좌대 홈이 있는대도 불구하고 뒤편으로 치우치게 다시 좌대홈을 낸후 비를 새운 것이다. 두 개의 돌의 악력 문제로 비신이 바로 서지 않아서일까?





    석가불사리탑 중수비

      

    이 비는 1750년(영조 26)에 세운 것으로,  비문은 신유한(1671~1752)이 지었다.

     

    신유한은 1713년(숙종 39)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은 봉상시 첨정(奉常寺 僉正)까지 올랐으며, 문장에 능하고 시도 잘 지었다고 한다. 말년에는 불교에 심취하여 고승들과의 교류도 잦았다고 한다.


    높이 1.17m 너비 50cm 두께 18cm의 대리석으로 조성된 이 비는,  지붕돌의 문양이 매우 독특하다.   지붕돌 앞면에는 비늘 조각이 뚜렷한 물고기 한 마리를 가운데 두고,  양 옆에는 국화꽃 무늬를 새겼는데,  이같은 문양이 지붕돌에 새겨진 예는 이것이 유일하다

    단아한 서체로 잘 새겨진 비문은, 비교적 보존이 좋은 상태이다.


    비석의  '법광사 석가불사리탑중수비'로서 법광사 사리장엄의 내용에 대한 언급이 자세하여 중요한 자료가 된다.  중수비 내용 가운데는 이 석탑의 수호를 위하여 탑계(塔契)가 있었으며,  탑에 빌어 사내아이를 얻으면 모두 이름에 탑(塔)자를 넣었다는 말이 있어 재미있다. 

    한편 중수비에는 사리장엄구에 대한 언급도 함께 있어,  조선시대에 중수하면서 한 차례 사리장엄이 열려졌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같은 개탑(開塔)에 이어서 진신사리 출현시의 이적(異蹟)이 적혀 있는데,  비문에는 그 날 밤 사리를 열자 서광이 하늘까지 이어져 비쳤으며, 닷새 동안 둘레를 온통 환하게 비추었다(其夜 瑞光亘天連五夜 草木欄洞 晃如晝)라 하였다.  이같은 일이 있은 이후로 이 고을을 신광현(神光縣)이라고 불렀다한다.


    석탑을 수리한 후에는 사리구를 재봉안 하였는데, 그 시기는 대체로 중수비가 세워진 1750년으로 보여 진다.  비문에서 재봉안하였던 사리에 대하여 언급하기를,  '옥함(玉函)이 있고 그 안에 순은(純銀) 사리함이 들어 있으며 다시 그 속에 자수(刺繡) 놓은 비단으로 싼 사리가 봉안되어 있다.'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석함 - 옥함 - 비단 - 사리로 중첩되어 봉안되었는데,  이것은 인도와 중국,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예로부터 하던 사리봉안의 방식과 대체로 부합된다.   그리고 비석 자체의 양식만 놓고 보더라도 이수(栗首) 부분에 어문(魚紋)이 나타나는 희귀한 예이다.

    탑의 사리공에서 출토된 사리함. 이 안에 들어 있던 사리 22과는, 일부는 탑에 다시 봉안되고 나머지는 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비의 뒷면에는 이 중수비를 세우는데 도움을 준 인근 사찰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동화사,   불국사,   은해사,   저개사,   보경사,   원항사,   천곡사,   천룡사,   안국사, 거동사이다.





    공덕비.  사리탑.  석탑을 보고... 





    인근의 연화석불좌대(蓮花釋佛座臺), 쌍두귀부(雙頭龜趺),  진평왕의 위패를 모신  사당 '숭안전'을 만나러 간다 ...





    법광사지는 한때 525칸의 건물이 있던 대찰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시골의 호젓한 옛절집터 이다.





     연화석불대좌


    법광사지 경내에 있는 이 연화석불좌대는 소실된 대웅전 석가불의 좌대로 추측되는데  높이 1.1m, 직경 1.1m, 직경 2.2m, 둘레 7.3m이며 귀부는 창건 당시 사적비의 좌대라고 하며 높이 1.4m, 직경 1.8m, 원경 0.5m이다.


    학계에서는 법광사 터를, 신라 왕실 사원으로서의 성격과 출토 유물들의 우수성 등을 고려할 때, 여주 고달사 터, 원주 법천사 터에 못지 않은 학술적 가치가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연화석불좌대만이 그 옛날 법광사의 영화를 짐작하게 한다.





    금당터는 넓은 밭 한가운데 있다.  한변의 길이가 약 20m, 높이 1m쯤 되는 네모난 흙단으로 되어 있다.





    연화석불좌대는  절터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으며, 대웅전(大雄殿)의 석불(石佛)을 안치했던 것이라고 전해지고, 일반적인 불대좌(佛臺座)의 양식으로 구성된 것인데 그 규모가 엄청나게 크다.


     현재 아랫부분의 복련하대(伏蓮下臺)는 지상에 노출된채 남아있으나 서북쪽면의 연화무늬가 많이 깨어져있다. 윗면에 3단의 굄을 마련하고 8각의 중대석을 올렸다.

     아랫부분인 하대석(下臺石)의 지름이 2m 20이고 둘레가 7m 30나 된다. 그리고 중대석까지 현재의 높이는 1m가 조금 넘는다. 이러한 불좌는 그렇게 흔지 않다고 하는데 불좌주변에 많은 주춧돌이 박혀있어 이것은 불좌를 중심으로 건물이 조성됐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 불좌가 언제 지금처럼 처참하게 파괴됐는지 알 수 없다. 또한 이 불좌위에  안치되어 있었을 거대한 불상은 어떻게 됐는지 더더욱 모를 일이다.





    연화석불좌대와 장대석


    이 좌대에 놓였던 거대한 석불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좌대 사방으로 놓여 있는 장대석을 보니 이 석불을 모신 법당 건물의 규모를 짐작할 수가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도 주변의 터를 보니 규모도 어마어마 하지만 남쪽으로 보이는 넓은 신광벌이 한눈에 들어 온다.

    아마 부처님의 눈길이 이 신광벌로 향한 듯 했다

     

    두개의 원형으로 구성된 하대석은 16개 안상, 16잎 복련을 새겼다. 중대석은 8개 탱주가 보이며 상대석은 뒤집힌 채 뒹굴고 있다.



    금당터는 넓은 밭 한가운데 있다.

    한변의 길이가 약 20m, 높이 1m쯤 되는 네모난 흙단으로 되어 있다.

     

    「석가불사리탑비」에 따르면 18C 중반까지 대웅전 말고 따로 2층 금당이 있었다고 한다.  주춧돌은 사방을 돌아가며 안쪽과 바깥쪽으로 두 줄,  불상대좌 주위로 4개가 남아있다. 

    안두리는 주춧돌의 배열로 보아 정면,  측면 3칸이었을 것이다.   주춧돌,  고막이돌,  신방석이 모두 남아있다.   앞면과 뒷면의 가운데 신방석이 있어 이곳에 문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주춧돌과 주춧돌을 연결하는 고막이돌이 4면에 둘러져 있어 안두리에도 벽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바깥두리는 정면,  측면 5칸으로 주춧돌과 고막이돌이 북쪽과 남쪽에 대부분 남아있다.  남북 가운데 칸에 신방석이 남아있어 이곳에 출입문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앞뒤 양면에도 문이 있었겠지만 신방석은 보이지 않는다.  물론 바깥두리 사방 벽에는 벽체가 있었을 것이다.

    금당은 사방으로 계단이 있는 높직한 기단 위에 4면에 출입문이 있는 정면,  측면 5칸의 2층 건물이었을 것이다......

    '계단 문을 들어가면 바깥벽과 안벽 사이 통로,  곧 회랑에 들어서게 된다.   이곳에는 녹색 유약이 발린 네모난 綠油塼이 깔려 있었다.  이 점은 금당터 주변에 흩어져 있는 전돌로 알 수 있다.  그 통로를 따라 탑돌이 하듯 세 바퀴 돈 다음 다시 문을 열고 높은 돌 대좌에 앉은 붓다를 참배할 수 있었다.   2층까지 트인 이 공간에는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으로 녹유전들이 반사되어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만들었을 것이다. '..........





    금당터 주변에 흩어져 있는 전돌

     




    복원할때 필요한 전돌에는 일련 번호를 새겨두었다.

     



    널부러진 주춧돌, 고맥이돌 그리고 신방돌. 밭 전체가 석조 부재요 파편이다...




    어려운 애기이지만 이 터에 법광사를 복원한다고 하면 멋진 법광사가 될 것이다.

    앞은 끝 간데 없이 일망무제로 트여 시원함을 선사하고 뒤에는 병풍처럼 둘러 처진 비학산이 있고 거기에서 흘러 내린 계곡물은 심신을 적셔주고...

    무엇보다 정남향의 위치가 좋아 따스한 햇살을 온 종일 받는 길지이다.





    법광사 북쪽방향 150m 지점에는 신라 26대 진평왕의 위패를 모신 '숭안전'이 있다진평왕의 넋이 항상 이 법광사지에 머물러 있는 현장이다.





    崇安殿

     

    법광사 북쪽방향 150m 지점에는 신라 26대 진평왕의 위패를 모신  사당 '숭안전'이 있다.  崇安殿은 절터 중심에서 북쪽으로 약간 비켜선 뒤쪽에 있다.  

     

    ※ 신라 제26대 진평왕(579~632 재위)은 이름은 白淨(석가의 아버지 이름)이다. 진평은 시호이다.  이 무렵 신라 왕가의 족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제24대 진흥왕(540~576 재위)의 아버지는 입종갈문왕, 어머니는 只召부인이다. 입종갈문왕은 천전리 각석 명문에도 나타나는 사람이다.  지소부인은 제23대 법흥왕(514~540 재위)과 보도부인 박씨의 따님이다.

     

    ② 진흥왕은 사도부인 박씨와 銅輪을, 지도부인 사이에서 舍輪(또는 金輪)을 낳는다.

     

    ③ 舍輪(또는 金輪)은 제25대 眞智王(576~579)이 된다. 진지왕은「삼국유사, 제1권 기이 제1 도화녀와 비형랑」조에 따르면, “나라를 다스린지 4년에 주색에 빠지고 음란하고 정사가 어지럽자 나랏사람들이 그를 폐위시켰다.” 이 기록처럼 그렇게 나쁜 왕은 아닐지도 모른다.   무슨 개혁을 하려하자 화백들과 갈등으로 쫓겨났을 것이다.

     

    ④ 그래서 왕통은 동륜 쪽으로 넘어간다. 동륜과 입종갈문왕의 따님 萬戶夫人 사이에서 白淨, 진정갈문왕 白飯, 진안갈문왕 國飯(또는 國分)이 태어난다. 진평왕의 동생 白飯과 國飯이란 이름은 석가모니의 아버지인 정반왕의 동생 白飯과 斛飯(Droṇodanarāja)에서 각각 따왔을 것이다.

     

    ⑤ 백정이 제26대 진평왕(579~632)이 된다. 아버지는 제24대 진흥왕(540~576)의 태자인 銅輪, 어머니는 萬戶부인으로 立宗葛文王의 딸이다.

     

    ⑥ 진평왕의 첫째 비는 麻倻夫人(석가의 어머니), 둘째 비는 勝鬘부인(석가 당시 사위국 파사익왕의 딸로「승만경」을 설한 승만부인)이다.  진평왕은 마야부인과 德曼과 天明夫人을 낳는다.  덕만이 제27대 善德女王(632~647)이 된다.

     

    ⑦ 동륜의 아들이며, 진평왕의 동생인 진안갈문왕 국반은 월명부인 박씨와 勝曼을 낳는다. 승만은 제28대 眞德女王(647~654)이다. 그러니까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은 사촌간이다.

     

    ⑧ 진지왕 舍輪은 기오공의 따님 知道夫人과 龍春(文興大王)을 낳는다. 용춘은 진평왕 따님 천명부인과 春秋를 낳는데, 그가 제29대 太宗武烈王(654~661)이다. 그러니까 선덕왕과 김춘추는 외가로는 이모,  친가로는 6촌 남매 사이이다.

     

    ⑨ 태종무열왕은 舒炫(김유신의 아버지)의 따님 文明王后 문희와 法敏을 낳는데 이이가 제30대 文武王(661~681)이다.  김춘추와 김유신은 처남 매부 사이이고,  문무왕은 김유신의 생질이다.  문무왕은 자의왕후와 제31대 神文王(681~692) 政明을 낳는다. 신문왕은 김흠돌의 따님 김씨부인과 제32대 孝昭王(692~702)을 낳고,  효소왕의 동생이 제33대 聖德王(702~737)이 된다.  가야의 마지막 왕 金仇亥 곧 仇衡王의 아드님은 武力이고 또 그 아드님이 舒玄이다.  서현은 진흥왕의 형제인 熟訖宗의 따님인 萬明夫人과 결혼하여 김유신,  문명왕후,  보희를 낳는다.

     




    진평왕의 위패를 모신  사당 '숭안전'은 문이 굳게 닫혀 있어 밖에서만 기웃거려 본다. 





    쌍두귀부(雙頭龜趺) 탑비 좌대 ( 塔碑座臺)


    귀부(龜趺)는 창건 당시 사적비의 좌대라고 하며, 높이 140㎝, 지름 180㎝이다.


    법광사지 쌍귀부의 지대석(비석을 받치는 맨 아랫돌)은 모서리를 다듬어 둥글게 만들었다. 이런 모양은 경주 창림사지 쌍귀부에도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이 두 귀부는 비슷한 시기에 조성되었을 것이다.

    법광사지 쌍귀부는 전체적으로 꽃 위에 쌍귀부가 서 있는 모습을 형상화 한 것이다. 거기에다 한 발은 땅을 딛고 다른 쪽은 마치 수영을 하듯 발을 옆으로 세워 지면을 헤치고 나가는 모습을 하고 있다.





    절터 위쪽의 언덕 밭 가운데에 놓여 있는 귀부(龜部)는,  거북 두 마리가 등을 나란히 한 쌍귀부이다. 귀부에 있어야 할 비(碑)와 비의 지붕돌은 없어지고 받침 부분인 귀부만이 남았으나,  파손이 심하다.


    두 마리 거북이 옆구리를 붙이고 나란히 엎드려 있다.   비신과 비머리는 없어졌다.   귀부도 머리를 포함하여 몸 전체가 많이 깨졌다.   등에 새긴 거북 무늬도 희미하다.

     

    비신의 높이는 알 수 없으나 폭은 대략 86cm두께는 19cm쯤 된다.

     

    쌍귀부비좌대(쌍거북 비석받침)가 있는 곳이 경주에서도 현재 4곳 뿐이다.  원성왕의 원찰인 숭복사지,  무장사지,  창림사지,  법광사지 등에 남아 있는데,   숭복사 것은 경주박물관 마당으로 옮겨 전시되고 있다.

     

    진평왕의 원찰인 법광사의 쌍귀부는 훼손상태가 실로 4군데 중에서도 가장 심하다.  머리를 포함한 몸 전체가 많이 깨어졌다.   등에 새긴 귀갑문은 마모가 심하다.   비신과 이수는 없어지고 비를 새웠던 받침만 남아 쓸쓸하게 밭 가운데 남겨져있다.

     

    경주를 벗어난 지역에서 나타난 쌍귀부라는 중요성 때문에 훼손 되었지만 잘 보관 할 희소성 가치는 분명히 있다.

     

    금당지 서쪽에 위치한 구릉에 동쪽으로 놓여 있다.  귀부는 쌍귀부좌대로 귀부는 창건당시 사적비의 좌대라고 생각되어 진다.

     

    진평왕은 선덕여왕의 아버지로 화랑세기 기록으로 미실이란 여인의 세력때문에 더욱 법력의 기운을 얻고자 불사에 힘을 기울인다.

     

    쌍귀부의 발가락 표현에서 느끼는 것은 사실적인 표현 기법을 엿 볼 수 있다.  또한 당시 조각 솜씨를 엿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비록 깨져 그 형체를 알아 보기가 쉽지 않지만 통일신라 시대에 유행하던 두 마리의 거북이가 한 몸이 되어 있는 것은 확인 할 수 있다.   이곳 법광사는 신라 왕실과 깊은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며 법광사의 주요 위상을 쌍귀부를 통해서도 익히 알리고 있다.





    법광사와 법광사의 옛터를 충분히 보고 현 법광사 앞의 주차장으로 내려 간다..


    나즈막한 돌담과 녹음이 자연스러움으로 아름답다.

    그저 손 가는대로 아무렇게 쌓은 돌담이 얼마나 정겨운지?

    더구나 높이까지 낳게 쌓아 눈이 즐겁고 돌담에 자연스럽게 덩굴이 올라 가는 모습과 떨어진 낙엽이 참으로 평화롭게 다가온다.

    나는 이 길을 왔다가 갔다가 여러번 반복하면서 돌담 너머로 절도 보고 계곡쪽도 기웃거려 보고 돌담도 만져 보고 주변에 풀도 살펴보고... 




    굽이 돌아 있는 담장을 따라 비학산의 아름다운 줄기에서  내려오는 계곡물이 시리도록 맑다.











    법광사 앞 주차장에서 차를 타고 이동하여...  법광사지 당간지주를 만나러 간다.





    부러진 법광사지 당간지주


    당간지주는 절터로 올라가는 막바지 왼편 논 가운데 있다.  아랫부분은 땅에 묻혀있고 윗부분만 160cm쯤 드러나 있다.

    지주의 머리는 2단으로 호를 이루었으며 그 안쪽에 네모난 간구를 마련하였다.  

    바깥면은 위로부터 90cm 지점에서부터 안쪽을 살짝 깎아 잘록하게 만들었다.  

    안쪽 면을 제외한 3면에는 세로 줄무늬로 장식하였다.

    지주 가장자리를 따라 6cm 너비로 도드라지게 모를 접어 띠처럼 둘렀다.  바깥면에는 중심선을 따라 위에서 아래로 솟아오른 줄무늬 하나를 길게 새겼다.


    잘리고 기운 지주는 폐사지에서 느끼는 감상을 걷어내고 퇴락한 절터를 직시하라는 암시같다. 하지만 아름다운 사람들 가족과의 동행은 퇴락하여 스산한 절터가 오히려 오감을 자극한다.


    오늘도 귀중한 우리 지역의 문화재들을 만나며 그 시대를 살았을 선인들을 생각해 보며 귀중한 법광사가 잘 지켜졌더라면 얼마나 장엄할지 상상해 보는것 만으로도 행복해 진다.

     

    오늘도 가족과 법광사에서 귀한 시간을 보내고 또 다른 신광 지역의 사찰 송운사로 이동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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