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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람드리 고목들로 이어진 진입로 숲길이 너무도 아름다운 김용사(경북 문경시 산북면 김용리 410)사찰여행/경상도 2015. 9. 17. 10:03
아람드리 고목들로 이어진 진입로 숲길이 너무도 아름다운 김용사
2015. 9. 17.
2015. 9. 14. "한국불교대학 大관음사 포항도량" 에서 108순례로 이번에는 가까운 경상북도 문경의 대승사와 윤필암 그리고 김용사로 나들이 기도를 출발한다.
경북 문경은 '기쁜 소식을 듣는 곳'(聞慶)곳이란 뜻이다. 그래서 그런지 문경에 갈 마음이 설렌다. 오늘은 어떤 기쁨이 기다리고 있을까?
07:00 출발하여 대승사를 10:00에 도착하여 주차 후, 대승사 너머엔 새색시 같은 고운 자태를 감추고 있는 비구니 스님들의 수행처 선방으로 알려진 대승사의 부속암자인 윤필암을 걸어서 먼저 순례 후 아름다운 창건설화가 있는 곳 대승사로 와서 점심공양 후 대승사 순례 후 같은 문경의 운달산의 다른 계곡에 자리한 김용사로 향한다...
세월이 참 빠르다.
엊그제가 봄인가 싶더니 어느새 짙은 숲과 시원한 계류가 그리워지는 계절이 지나 조석으로 선선한 가을 초입에 들어 섰다.
초록의 기운에 파묻혀 듣는 해맑은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는 그 자체가 행복이다.
거기에 향내 그윽한 산골의 조용한 절집에서 풍경소리까지 들을 수 있다면 무엇을 더 바라랴? 문경의 김룡사(金龍寺)가 그런 도량이다.
문경시 산북면 김용리에 위치한 김용사는 신라 진평왕 10년(588) 창건된 고찰로 한때 건물이 48채가 있었으며 전국 31본사의 하나로 45개의 말사를 거느리고 수십명의 스님들로 항상 북적거리던 거찰이었다. 지금은 김천 직지사의 말사로 스님도 4명뿐이다. 인근 고찰인 봉암사와 대승사가 참선도량이라면 김용사는 포교도량, 강원(講院)도량이다. 스님들의 활동도 포교에 많은 땀과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1천400년이 넘는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김용사에는 몇차례의 큰 화재와 이곳에서 수행을 한 선사들의 영향으로 화려한 문화유산은 없는 편이다. 지방문화재 자료인 대웅전과 극락전, 설선당, 측간 등 10여개의 건물과 괘불, 약사여래입상 등이 전부다.
융성하던 시절 14개에 이르던 암자도 대부분 없어지고 지금은 화장암, 양진암, 대성암, 금선대 등 4개의 암자만 남아 있다.
시원하게 하늘을 향해 뻣어있는 전나무 뿐만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활엽수들이 길을 따라 펼쳐지는 참 시원한 길이 이어진다. 울창한 숲길 따라 김용사로 향한다.
일주문 못 미쳐 오른쪽으로 비석 몇기가 보이고 그 뒤로 일주문이 보인다...정봉당탑으로 광서 13년 정해(1887년)립 이라고 음각되어 있다.
김용사 들어가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는 향탄봉산 비석
김용사 절숲이 왕실에 숯을 공급하기 위한 용도로 지정된 향탄봉산(香炭 封山)이다.
비석의 앞면에는 ‘김용사 소유 지’, 뒷면에는 광무 6년(1902) 10월에 세워졌다는 기록과 함께 ‘향탄봉산사패금계’라 고 새겨져 있다. 김용사 절숲이 왕실에 숯을 공급하기 위한 용도로 지정된 향탄봉산(香炭 封山)이며, 이 곳은 고종이 김용사에 하사한 토지이니 일반인이 함부로 들어가는 것을 금 한다는 뜻이다.
길가에서 조금 벗어나 있는 몇몇 부도들도 보인다.
그리고 멋진 나무 사이로 김룡사 일주문이 모습을 보인다. 김용사는 운달계곡의 시원함 속에 자리 잡고 긴 세월을 지키고 있다.
아늑하다는 느낌이 드는 김용사 일주문 위쪽에는 ‘홍화문(弘霞門’ 일주문 안쪽에「운달산(雲達山) 김룡사(金龍寺)」라고 쓴 편액이 걸려 있는데 운달산(雲達山) 김룡사(金龍寺)」라 쓴 김규진의 편액 글씨가 이채롭다.
일주문 현판엔 '홍하문(紅霞門)'이라 쓰여 있다. ‘붉은 노을 문’이라! 그러나 이는 그리 낭만적인 뜻이 아니다.
‘붉은 노을은 푸른 바다를 꿰뚫는다’는 홍하천벽해(紅霞穿碧海)에서 따왔는데, 이는 성철 스님이 평소 즐겨 하시던 말씀으로 ‘용맹정진을 통해 얻는 깨달음’을 말한다. ‘홍화문(弘霞門’ 편액은 독립운동가 김가진의 글이다.
김룡사 일주문에서 공포보다 눈에 띄는 것이 네 개의 보조기둥 위에서 교차하는 가로-세로 부재들의 머리 장식인데 정면 오른쪽 귀퉁이를 보면 세로부재 보가 기둥과 맞물린 뒤 앞으로 튀어나온 끝부분 보뺄목(보머리)을 용머리로 조각했다.
황룡이 위에 겹친 보뺄목을 받치는 듯한 모습이다.
왼쪽 보뺄목은 봉황이다.
가로부재 평방을 받치는 부분은 양쪽을 연꽃과 연대궁, 연봉으로 연결해 새기고 오른쪽 위에는 물고기를 조각했다. 일주문에서 물고기까지 보는 것도 처음이다.
기둥과 평방이 교차하는 안쪽엔 평방 받치는 부분을 연봉과 용으로 처리했다.
일주문은 작은 문이지만 대개 다포식으로 꾸며 정면 가로 부재와 처마 사이 공포가 화려한데 공포의 세로부재 살미가 셋 내민 삼출목을 덩굴무늬와 연꽃 봉오리로 장식하고 맨 위 익공은 봉황으로 처리했다.
정면에서 바라보고 오른쪽 뒷부분 보조기둥은 보머리가 봉황이고 평방 받침 안쪽은 황룡, 바깥쪽은 인동문으로 장식했다.
대칭되는 왼쪽 뒷부분 안쪽 평방받침은 청룡이다.
또 일주문 주련엔 이렇게 쓰여 있다.
‘이 문에 들어 오거든 안다는 것을 버려라(入此門來莫存知解)
비우고 빈 그릇에 큰 도가 가득 차리라(無解空器大道成滿) ’ . 그래 한번 다 버리고 들어서 보자.
일주문 들어서서 안쪽에는 '나무아미타불'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왼쪽에는 한글로도 쓰여 있고 주련과 나무아미타불 편액은 이름난 분의 글씨는 아닌 듯하다.
일주문에서 조금 오르면 오른쪽 길 옆에 비석이 하나 보인다. '퇴경당 권상로 대종사 사적비(退耕堂權相老大宗師事蹟碑)'라 쓰여져 있다.
퇴경당 권상로 대종사 사적비는 여초 김응현이 썼으며 산북면 김룡리 운달산 김룡사 일주문 뒤 도로변에 서 있다.
선생은 1879년 산북면 석봉리에서 태어나 어려서 한학을 배우고 1896년 김룡사의 서진선사를 은사로 출가하였다.
경흥강원, 성의강원의 강사를 거쳐 1918년부터 수년간 교편생활을 역임. 해방후 동국대학교수, 학장을 거쳐 동국대학교 초대 총장이 되었다. 1962년 대한민국 문화대훈장을 받았으며, 이와 전후하여 불교조계종 원로원장등 불교계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입적 후 대종사의 법계에 올랐다.
일주문을 지나자 시원한 나무 그늘이 늦더위를 잊게 한다. 바깥 세상과 전혀 다르다.
김용사 가는 길은 우거진 숲과 시원한 바람, 그리고 운달산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계곡 물이 가슴 속까지 시원함을 준다. 누구든 한번쯤 걸어가 보면 운치나 분위기가 절과 참 잘 어울린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절 아래 주차장에서 '사하촌'을 지나면 호위하듯 길 양쪽으로 줄지어 선 아름드리 나무가 일주문을 지나 절 마당 바로 밑까지 늘어서서 절을 찾는 길손에게 인사를 한다. 이곳은 스님들도 가끔 명상을 하며 걷는 코스이기도 하다.
김용사 입구 매표소와 주차장에서 김용사 까지는 1.5km 더 간다.
매표소를 지나면 비포장 길에 산림이 무성하고 계류가 흐르는 자연이 그대로 살아 있는 곳으로 아직까지 남은 더위의 잔재를 시원하게 식혀 준다.
절로 올라가는 길은 많은 피서객들로 붐비는 운달계곡을 끼고 있어 여름에는 입구에서 입장료를 받고 있다.
물이 차가워서 냉골이라고 불리는 개울가와 계곡 끝자락에는 텐트를 칠만한 야영장도 있다. 길은 비포장이라 차가 지나가면 먼지를 일으킨다 .
일주문 지나 절 근처 주차장에 주차한다.
한적한 시골길을 달려 만난 편백숲 길, 하늘을 모두 가린 아람드리 고목들로 이어진 진입로 숲길이 너무도 아름다운 김용사... 더구나 울창한 숲까지 가득하고...
운달산(1,097m) 서남쪽으로 흐르는 운달계곡으로 들어서면 수림으로 둘러싸인 김룡사가 문득 나타난다.
국내에서 유명한 오대산 월정사나 변산 내소사의 전나무 숲보단 연륜이 짧고, 길가의 전봇대가 거슬리긴 하지만 제법 품위가 넘친다. 그 숲엔 단풍나무, 느티나무, 떡갈나무가 짙다.
김룡사 숲이 이렇게 잘 보존된 이유는 운달산이 능묘의 제사에 쓰이는 향목과 목탄을 조달하기 위해 수목을 보호하던 향탄봉산(香炭封山)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숲도 불법도 모두 울창한 김룡사의 으뜸은 이렇듯 자연의 후광이라 할 수 있다.
김용사는 운달산에 위치한 천년 고찰로 운봉사 입구에 있는 용 소 부근에 살던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이 용왕의 딸과 결혼하여 김용이란 자식을 하나 두었는데, 자식을 얻은 후 가문이 운수대통하여 김룡사로 바뀌었다고 한다.
김용사가 위치한 곳이 소가 길게 누워 있는 형태이다.
김용사는 근세기 인재 배출의 산실이였다.
초대 동국대학교 총장이었던 권상로 대종사를 배출하였고 성철, 서암, 서옹 등 많은 선지식들이 주석(駐錫)하기도 하였다.
전나무가 도열해 있는 오른편 길이 김룡사 경내로 들어가는 길이다..
경내 입구에 멋진 모습으로 도열해 있는 전나무 길을 따라 보장문으로 가는 길이 거리는 짧지만 참 운치있고 아름다운 사찰길이다.
숲속에 마련된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쭉쭉 뻗은 전나무 사이를 걸어가면 절집 문인 보장문( 寶藏門)이 있다. 김룡사입구 보장문으로 들어가는 길의 전나무 숲길이다.
아기 중의 전설도 꽤나 유명하다.
옛날 한 동자승이 김용사에 수도승들과 함께 지냈는데 하루는 주지가 상추를 씻어 오라고 해 냇가에서 상추를 씻고 있었다. 상추를 씻던 중 동자승의 눈앞에 갑자기 활활 타는 절의 모습이 나타났고 자세히 보니 산 너머 대승사였다.
동자승은 불을 꺼야 한다는 생각에 염불을 외면서 시냇물을 불길을 향해 퍼부었고 이때 상추도 함께 날아갔다. 불이 꺼진 뒤에 보니 상추는 몇잎 남지 않았고 부랴부랴 주지승에게 남은 상추를 갖고 갔지만 호되게 야단만 맞았다. 동자승은 자신이 겪은 일을 얘기해 봤자 믿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 매를 맞으면서도 말하지 않다가 잠자리에서 옆의 스님이 묻자 자초지종을 밝혔고 다음날 새벽 절을 떠났다.
동자승의 이야기를 들은 스님은 다른 스님들에게 전했고 사실여부를 놓고 서로 옥신각신하다 대승사에 가서 직접 확인해 보니 절은 불탔고, 어디선가 상추가 날아와 불을 껐다는 이야기를 듣고 동자승의 말이 거짓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았으나 동자승은 이미 떠난 뒤였다고 한다.
길은 비포장 도로. 걷는 것이 좋다. 운치가 있는 전나무 숲길이다.
보장문을 향한다. 조용하다. 들려오는 것은 새소리 뿐이다. 가끔 산사의 풍경소리에 놀란 산새가 푸드덕 거리며 고요를 깨뜨린다. 숲길을 통과하면 김용사의 전각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전나무들이 도열해 있는 보장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꽃비를 맞으며 환영을 받을 것이고, 자가용을 타고 옆길로 가는 사람은 300년 된 해우소 쪽으로 가게 된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보장문 입구에 도착한다.
여긴 사찰입구의 솟을대문이나 기와모양, 처마로 내려오는 곡선, 건물외벽 등을 보면 언뜻어뜻 마치 서원같은 유교적 냄새가 난다.
'보장문'은 '보물이 가득한 곳으로 들어가는 문'이란 뜻이다. 부처님의 말씀으로 가득찬 곳이니 정말 보장문이다.
문에 그려진 간략한 기법의 금강역사상인 듯한 모습을 보며 보장문을 들어선다.
보장문의 천정이다.
김룡사 보장문은 금강문에 속하는 문으로 솟을 대문처럼 생긴 문 앞에 좌. 우측으로 금강역사상이 지키고 있다. 금강역사가 삼지창이 아니라 도깨비 방망이와 칼을 들고 있는 특이한 모습이다.
금강역사는 오백의 신을 거느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수호하는 신이다.
보장문 들어서서 바라본 모습이다.
보장문을 들어서면 왼편 석축 위에 범종각인 '봉명루'가 자리하고 있다.
정면과 측면 각 1칸. 겹처마에 다포식이며 4각 모임지붕 형식의 건물이다. 주위에는 사방으로 돌 난간이 둘러져 있고 근래에 조성된 범종이 안치되어 있다.
범종의 장엄한 소리를 상서로움을 상징하는 봉황의 소리로 표현한 편액이 이채롭다.
'봉명루' 현판은 초정 권창륜의 글씨이다.
종 아래의 울림 부분이 땅을 둥글게 파서 만든 것이 아니고 화강암을 둥글게 파서 종 아래에 놓고 바깥부분에는 연화무늬를 넣은 것이 특이해 보였다.
조선조 숙종 때 뛰어난 장인이며 승려였던 사인비구에 의해 만들어진 동종은 보물제 11-2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그 동종은 전통적인 신라 종의 기법에 독창성이 가미된 것으로 직지사 성보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범종은 지옥중생을 착한 길로 인도하여 해탈의 길로 승화시켜 주는 의식구로 사바세계에 은은한 종소리을 울려 깨달음에 이르게 한다는 김용사 범종각 앞을 지나 천왕문으로 향한다.
범종각 오른쪽 천왕문, 그 뒤로 설선당 .보제루로 이어지는 모습. 자연지형을 그대로 이용해서 석축을 쌓고 전각을 비치한 것이라 한다.
천왕문 주련
四大天王威勢雄 (사대천왕위세웅) 사대천왕의 위엄 크고도 웅장하여라
護世巡遊處處通 (호세순유처처통) 세상을 지키시고 모든 곳에 나투시며
從善有情貽福蔭 (종선유정이복음) 온 세상 사람 착한 일엔 복을 주고
罰惡群品賜災隆 (벌악군품사재륭) 악한 무리에게 벌을 주어 재앙을 내리도다
편액을 문 위 창방에 붙이지 않고 서까래 아래 평방에 높이 붙여 천왕문 앞에 서도 편액이 보이지 않는다.
보장문을 들어서서 천왕문 계단을 오르자 특이하게 화강암으로 조성된 사천왕이 모셔져 있다. 천왕문은 부처님이 계신 곳을 수호하는 사천왕을 모신 문이다 .
천왕문의 천정
죄를 지은 사람이면 통과하기 어렵다는 천왕문이다.
다른 절이 나무로 된 사천왕상을 세워 놓은 것에 비해 돌로 된 사천왕상이 서 있어 이채롭다.
사천왕상을 특이하게 돌로 조각하였다.
김용사 천왕문에는 원래 나무로 조각한 사천왕 상이 모셔져 있었다고 하나 도둑을 맞게 된 이후 무거운 석조물로 만들어서 모시고 있다고 한다.
동서남북 사방을 수호하는 수호신장인 사천왕이 각각 비파, 칼, 탑, 용을 들고 서있는 조각상은 화강암의 질감 때문인지 보통 사찰에서 볼 수 있는 채색된 목각상보다 위엄이 있어 보인다.
속세에서 갖고 온 번뇌 망상과 탐욕, 분노 등을 모두 사천왕에게 조복 받고 깨끗한 마음으로 들어서라는 뜻도 있다고...
사천왕 석상마다 발 아래 하나씩 악귀를 밟고 있다.
공포는 기둥 위에만 꾸민 주심포 익공식이어서 간략하고 보머리엔 봉황이 내밀고 있다.
오른쪽에는 요사체, 보제루로 오르는 계단 옆에 샘물이 있는데 물이 고이는 부분을 용이 둥글게 틀고있는 조각으로 만들어 놓았다.
문경 김용사의 우물 용천속의 용
이 산의 형태가 와우형태라서 샘물이 우윳빛이라고 하지만 주변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지 않고 물의 양도 적어서 우유빛인지 구별하기가 좀 애매하다.
정면에 보이는 누각 보제루 昔濟樓, 그 옆의 측면이 보이는 건물이 대강당인 설선당(設禪堂)이다.
천왕문을 들어서면 바로 앞에 2층 누각의 보제루가 있고 좌측의 설선당과 사이의 계단으로 출입을 하도록 되어 있다.
보제루는 현대식으로 깔끔하게 지어졌다.
대웅전과 마주보는 보제루는 '널리 중생을 제도 한다.'는 뜻이고 예불과 법요식 등이 거행되는 장소 이다.
보제루 마당 쪽에 두 편액이 나란히 걸려 있다.
하나는 보제루,
하나는 '운달산 김룡사'로 역시 권창륜님 작품이다.
대웅전 앞 마당에서 본 보제루(普濟樓), 역시 초정 권창륜의 글씨인 '보제루'와 '운악산 김용사' 편액이 걸려 있다.
보제루에 있는 북과 북채를 물고 있는 목어이다.
왼편 계단으로 해서 천왕문을 지나 보제루 사이 길로 올라가면 대웅전이 나온다.
보제루와 설선당 사이의 계단을 오르면 대웅전 뜰에 서게 된다.
대웅전 마당에는 흔히 볼 수 있는 석탑이나 석등 대신에 노주석 2기만 서있는 게 특이하다. 야간 행사가 있을 땐 석등이 아니라 노주석 위에다 밤에 관솔을 피워 주변을 밝게 하는 시설로 보제루 앞 좌우에 하나씩 설치되어 있다.
여기에 명문이 있는데 소화십오년(昭和十五年) 경진시월일(庚辰十月日)이라 새겨져 있다. 소화(昭和)라는 글은 누가 정으로 쪼아 마모시킨 듯하다. 소화(昭和)는 일제의 연호인데 단기로는 4283년이요, 불기로는 2484년이며, 서기로는 1940년입니다. 일제 말기의 흔적이다.
마당에는 노주석이 있는데 문양이 다소 특이하며 문명도 기둥에 새겨져 있다. 건물들이 다 단아하고 조용한 사찰로 입구부터 마음을 고요히 달래기에는 충분한 그런 곳이다.
김용사 대웅전(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35호)
대웅전은 인조(仁祖) 3년(1625)에 중창했다가 인조 21년(1643)에 소실된 것을 인조27년(1649)에 건립하고 오늘에 이른다.
기둥의 둘레가 약2m나되며, 건축양식상 특이한 것은 기단 위에 초석의 수평을 잡지않은 상태에서 원주를 세워 각 원주의 높이가 모두 다르고 각 기둥 모두가 대웅전의 중심을 향새서 약간씩 기울어지게 하여 건물자체에 안정감을 주는 특수기법을 사용하였다.
대웅전은 정면3칸, 측면3칸, 겹쳐마 팔작지붕 다포계의 건물로 외3출목 내4출목으로 되어 있고, 상부가구는 오량가이다. 그리고 천장은 3종류의 반자를 이용하여 재치있게 처리하고 있는 등 한국건축의 조형상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는 건물이다.
인조 27년 설잠대사가 조성한 대웅전의 불상은 그 규모가 웅대하며 기예 또한 현묘하다.
삼존불로 목조석가여래불을 주존불로 하여 좌우에는 협시불로 각각 약사여래불과 아미타여래불을 모시고 있다 .
목조석가여래불 뒤로 성균대사가 만든 후불탱화가 보존되어 있다.
대웅전 불단 오른쪽위에 '佛日增輝法輪常轉(불일증휘법륜상전)' 과
대웅전 불단 왼쪽위에 '大韓民國國運隆昌(대한민국국운융창)'이라고 적힌 원패가 있다.
1644년 조성한 삼장탱화(三藏幀畵) 가 불단을 보며 왼쪽에 봉안되어 있다. 대웅전 삼장탱은 지장탱이 발전하여 확대된 그림으로 우리나라에서만 나타나는 둑특한 예이다.
삼신 신앙처럼 법신에 해당되는 분이 천장 보살이며 보신은 지지보살, 화신은 지장보살 이다. 중심에 연꽃을 든 천장보살이 배치되어 있고 진주보살과 대진보살이 협시를 이루고 있다. 오른쪽에는 민머리에 얇은 수건을 쓰고 석장을 들고 있는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도명존자와 무독귀완이 협시를 이루고 있다.
불단 오른쪽의 영가단
대웅전 내부 벽화
선녀(仙女)가 악기를 연주하는 주악비천상이 그려져 있다.
우물반자로 마감한 천정에는 하늘을 나는 비천상이 주악을 연주하고 있는 모습의 그림이 눈에 생생하다 .
김룡사 괘불함
김용사 괘불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03호)
김용사 괘불(掛佛)은 숙종 29년(1703년)에 조성된 것으로 높이가 10m에 달할 만큼 큰 불화(佛畵)이다. 괘불은 옥외에서 법회를 행할 때에 밖에 내다 걸 수 있게 만든 걸개그림으로, 임진왜란 이후 많은 사찰이 복원되면서 괘불 제작이 활발하였다고 한다.
대웅전에 보존되어 있는 이 괘불은 중앙의 본존불을 화폭의 1/3을 차지할 정도로 크게 표현하였고, 그 아래쪽에 2구의 보살과 사천왕을 배치하였다. 사천왕 뒤쪽으로는 다시 6구의 보살을 일렬로 배치하고 본존불의 머리 좌우로 5구씩의 십대제자를 그려 넣었으며, 보살상의 외곽에 인왕과 팔부중 등을 배치하였다. 외곽의 괘선 밖에는 범(梵 : 불교문자)자를 원 속에 써서 배열하고 있는데 거대하면서도 비교적 섬세하고 다양한 선을 사용하여 돋보이고 있는 작품이다.
괘불의 아래에는 제작 동기와 시기를 적은 29줄의 기록이 남아 있다. 이에 따르면 이 괘불은 숙종 29년(1703년)에 상주 북면에 위치한 운달산 운봉사의 괘불로 처음 만들어졌다 한다. 이곳 김용사로 옮긴 과정은 알 수 없으며 다만 운달산과 김용사가 상주의 관할 아래 있었다는 사실만이 『성주읍지』에 나타나 있다.
대웅전의 특이한 점은 처마 밑의 살미가 다른 한옥 건물과는 조금 다르다. 살미는 공포에서 첨차와 직교하며 건물의 앞뒤 방향으로 내민 부재를 말하는데 조금은 독특한 모양인것 같다.
보통 사찰의 대웅전에는 어간문의 좌우 기둥의 창방이나 평방위에 용두가 조각되어 있지만 이곳 용문사 대웅전에는 가장 바깥에 있는 기둥의 창방 뻘목에 용두가 조각되어 있다.
대웅전은 공포의 처마밑 장식인 살미가 아름답다. 살미 사이엔 물고기, 다람쥐, 새, 국화꽃, 연꽃문 등 다양한 동식물이 보일듯 말듯 하니 숨은 그림 찾기를 하는 즐거움이 있다.
공포는 쇠서가 셋 내민 삼출목 위에 사익공이 내밀었고 맨 위 보머리엔 봉황을 새겼다.
그늘진 처마 밑에..
당초무늬가 아주 역동적이다.
꿩도 있다.
이 맨 아래 살미엔 다람쥐가 숨어 있다.
다람쥐가 탐하는 것은 도토리가 아니다.
도토리 대신 잘 익은 연밥을 먹으려 한다. 별화의 소재는 다양한 부처 모습 화불과 신선 외에도 용, 거북, 봉황, 기린, 네 가지 영험한 짐승 사령수(四靈獸)와 천마, 사자, 호랑이 같은 맹수, 학 오리처럼 상서로운 길조(吉鳥),매란국죽 사군자에 화초도 있다. 그런 별화 소재 짐승들이 살미 위에 숨은 그림처럼 목각상으로 올라 앉았다. 그런데 다람쥐는 이곳 김룡사 대웅전에서 처음 본다.
연꽃에 올라앉은 새는 원앙인 듯하다.
이 살미엔 짐승이 두 마리 숨어 있다.
연꽃 모양이 정말 다양하다.
셋 다 연꽃인데 각기 다른 표현방식을 썼다.
살미마다 국화들이 아름답게 피었다.
연잎 위에 올라앉은 물고기로 자유롭게 헤엄쳐 다니는 물고기는 원천적 자유를 상징한다. 물고기가 깨어 있을 때나 잠 잘 때나 눈을 감지 않는 것처럼 불자도 자지 말고 항상 부지런하게 도를 닦으라는 뜻도 지닌다.
귀기둥의 앞쪽은 용머리가 옆쪽은 봉황이 내밀고 있다. 대웅전 공포와 기둥을 참 다양한 꽃과 동물들로 장엄했다.
멋진 동물 목각상은 모퉁이 귀기둥에도 있다.
귀기둥 옆쪽으로 삐져 나온 평방뺄목은 봉황이 받치고 있다.
호랑이 위에 있는 새는 극락조?
김룡사 대웅전 살미에 숨은 호랑이 달리던 호랑이가 뒷다리를 치켜든 채 뒤돌아 본다.
사실적으로 묘사한 호랑이이다.
모든 짐승들이 각기 연꽃, 연잎, 연밥과 어우러졌다.
법당 안 천장이나 문살 위에 꽃을 그리거나 새겨 장엄하는는 것은 많이 봤지만 살미(쇠서)에 이렇게나 다양하고 고운 꽃 목각들을 올려 놓은 것은 참 드물게 본다.
그런데 살미에 꽃만 있는 게 아니고 맨 아래 살미에 뭔가 숨듯 앉아 있다.
그리고 물고기까지 갖은 짐승들이 대웅전 살미 사이에 숨어 있다.
이건 모란인 듯하다.
포효하는 용을 역동적으로 묘사했다.
양쪽 끝에선 귀기둥에는 용머리를 조각해 붙였다. 보가 기둥 앞쪽으로 빠져나온 보뺄목을 용이 머리로 받치고 있는 형상이다.
뺄목을 청룡이 받치고 있다.
연잎에 올앉은 것은 꿩이다.
측면 공포도 삼출목이지만 정면보다는 단순한 편이다.
대웅전은 공포의 처마밑 장식인 살미가 아름답다.
건물마다 벽면에 다양한 그림들이 있어 천천히 둘러보는 것도 좋다.
빛 바랜 세월의 무게가 엿보이는 대웅전 문살
이처럼 멋진 소나무들이 대웅전 주변을 호위하듯 둘러 싸고 있다.
대웅전 뒤에서 노송은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김용사 둘레를 반원 형태로 받쳐주는 소나무숲. 수백년 노송이다. 가람을 포근히 감싸고 있는 금강송은 절을 지켜주는 금강역사 같다.
대웅전 계단 앞의 괘불대
대웅전 올라가는 구름 문향의 계단
뒤에서 바라본 대웅전
대웅전 뒤쪽엔 불화를 내걸 때 쓰는 나무 걸대가 있는데 드물게 잘 보존된 걸대라고 한다.
대웅전 옆의 소전대도 특색이 있다.
대웅전 옆의 두꺼비 형상의 바위가 대웅전 지킴이 같은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도 재미있게 보이고...
대웅전 좌측, 요사 해운암 맞은 편에 있는 강원건물 설선당
국내 최대 강원 건물로 300명을 동시에 수용하는 온돌방이라는 설선당은 1965년 성철스님이 강론을 처음 시작한 곳이라고 하며 1997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이듬해인 1998년에 복원했다.
설선당 편액 역시 권창륜님이 썼다.
한때 강원(講院)으로 사용했던 설선당(說禪堂)은 파계사 성전암에서 10년 동안 동구불출(洞口不出)하신 성철큰스님께서 1965년 김룡사로 와서 머무시면서 30년 동안 홀로 수행하다가 김용사에서 처음 사자후를 토해냈는데, 이것이 스님이 일반 대중 앞에 선 첫 법문이였다고 하니 더욱 감회(感悔)가 새롭다....
설선당 안의 석가모니 부처님과 후불탱
써까래도 세 개만 양록 단청을 했다.
설선당 주련 중에서 가장 왼편에 있는 주련이 눈길을 잡는다.
흰 바탕에 큰 글씨로 '시심마(是甚麽)'란 휘호가 서각되어 있는데 이 역시 초정 권창륜 선생의 힘찬 글씨다.
'시심마'란 유명한 '이 뭐꼬'라는 말의 한자어로 선원에서 깨달음을 얻어 도에 이르려는 선승의 자기 성찰이 응축되어 있는 문구로 인생의 모든 생활 현상에 관한 근본적인 의문을 뜻한다고 한다.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냐'라는 뜻이며 텅빈 마음으로 돌아가 사물의 모든 경계에 대한 마음의 울림을 듣는 것이 '시심마'의 의미라고 한다.
36평이 조금 넘는 크기인 설선당은 불이 나기 전 아궁이가 어린이들이 서서 들어갈 만큼 컸다고 하나, 복원하면서 아궁이는 현대식으로 바뀌었다.
설선당은 예전엔 경흥 강원(講院)이라고 불렀다는데 온돌방 하나에 300여명이 한꺼번에 들어갈 정도로 커서 젊은 학승들을 가르치는 강원중에서도 큰 곳에 꼽혔다고 한다.
이 부엌 문을 열고 들어가면 어린아이가 선 채로 걸어 들어갈 만큼 큰 아궁이가 있다는데 문이 잠겨 있어 볼 수 없었다.
측면 중앙엔 난간 두르고 누각처럼 꾸민 곳이 있다.
설선당의 한 부분에 특이한 편액을 발견 했다.
일반 사찰에서는 거의 볼 수가 없는 붉은 바탕에 흰 글씨로 된 "응향각(凝香閣)"이다.
'응향'이란 '주불전에 올릴 향을 준비한다'는 뜻이라는데 일반 출입이 허용되지 않는 요사 이름으로 주로 붙인다. 특이하게 붉은 바탕에 흰 글씨로 썼는데 관지를 봤더니 현대 명필 일중-여초 형제를 사사한 경북 예천 출신 서예가이자 전각가 초정(艸丁) 권창륜님의 글로 주로 경북 지역 사찰에 작품을 많이 남긴 것 같다.
응향각의 옆으로 난 통로를 통해 본 설선당의 안쪽.
정려당(靜慮堂)의 안채 모습, 고요함을 생각해 보자.....
절하당도 초정 권창륜의 글씨이다...
김룡사 설선당 주련
一念現前微喚時 ( 일념현전미환시 ) 한 생각 나타나서 부른 적이 없어도
天地萬物不聞聞 ( 천지만물불문문 ) 천지만물 두두물물 들음 없이 들음이요
風雲造化無用處 ( 풍운조화무용처 ) 바람 구름 풍운조화 작용이 없는 곳에
眞空妙有不見見 ( 진공묘유불견견 ) 진공묘유 참된 이치 봄이 없이 보는도다.
채색된 단청과 그렇지 않은 단청이 서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어 이를 비교해서 바라보는 것도 즐겁다. 채색되지 않은 단청을 가진 건물은 전체적으로 수수한 느낌에 스님들이나 공부하는 행자들이 머무는 곳인지 싶다.
대웅전 우측, 설선당 맞은 편에 있는 스님들의 거처인 해운암 ( 海雲庵 )
설선당 맞은 편에 있는 스님들의 거처인 해운암 海雲庵을 포함하여 대웅전 주변의 전각들은 1997년의 불로 소실되어 다시 지어졌기에 고풍스런 분위기는 느낄 수 없다 하겠다.
대웅전 바로 붙은 우측으로 자리한 '향하당'은 노전으로 맞배지붕에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를 하고 있다.
행하당 기둥에는 "내 마음은 만가지 경계를 따라 가는데 마음 굴러 가는곳 모두가 그윽하여라. 흐름을 따라 성품을 깨닫는 다면 기쁨도 근심도 모두 없도다" 라는 주련이...
각 법당에 불공을 올리거나 재를 맡아 담당하는 스님을 노전스님이라 하는데 노전스님이 거쳐하는 곳이다.
극락전과 응진전 사이에 있는 상선원(上禪院)은 팔작지붕에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의 건물이다. 상선원(上禪院)은 스님들의 참선도량으로 출입이 금지 되어 있다.
수좌스님들이 참선 수행하는 곳인 상선원은 전에는 선원으로 사용했으나 지금은 35점의 고승 진영과 순조 30년(1830년)에 조성된 시왕탱, 철종 9년(1858년)에 조성된 지장탱을 봉안하고 있다.
상선원의 주련
催殘枯木依寒林 (최잔고목의한림) 꺾어진 고목이 찬 숲을 의지하고
幾度逢春不變心 (기도봉춘불변심) 몇번이나 봄을 만나도 그 마음 변치않네
樵客過之猶不顧 (초객과지유불고) 나무꾼 지나쳐도 돌아보고 그냥가니
靈人那得苦追審 (영인나득고추심) 영인이 와서 그 고난을 살펴 노래하네
상선원은 한때는 성철스님 등 많은 선지식들이 머물던 곳으로 유명하지만 현재는 요사채로 사용하고 있다.
오래된 느낌의 기와 담벼락 여느 절과는 사뭇 다른 느낌에 셔터에 손이 갔다.
김룡사 금륜전에는 현재는 칠성각과 독성각을 합해서 사용하고 있다. 금륜전에는 치성광 여래 좌상과 칠성탱, 산신탱, 독성탱이 봉안되어 있다.
치성광여래불 좌상과 칠성탱
산신탱
독성탱
수백년된 배룡나무(일명 백일홍) 속에서 자라고 있는 소나무 가지로 김용사의 명물 소나무와 베롱나무의 사랑....
최근에도 김용사에는 이적을 보이는 현상이 있다.
대웅전 오른쪽 뒤 금륜전 앞 뜰에는 수령 100여년 된 백일홍이 한 그루 있으며, 이 나무에는 소나무 두 그루가 뿌리를 내리고 자란다.
백일홍 나무 아랫부분에서 자라는 소나무는 1m 남짓이고 꼭대기 부근에 자리를 잡은 소나무는 30㎝ 가량의 연리목으로 스님들 말로는 성철 스님이 입적한 직후에 생긴 현상이라고 한다.
금륜전 주련
威光遍照十方中 (위광변조시방중) 위광이 두루두루 시방세계 비추심이
月印千江一切同 (월인천강일체동) 천강에 달 비추듯 일체도 이와 같네.
四智圓明諸聖士 (사지원명제성사) 네 가지 큰 지혜가 두루 밝은 모든 성인
賁臨法會利群生 (분림법회이군생) 이 법회에 왕림하여 많은 중생 이익 주네.
대웅전 오른편으로 올라가니 배롱나무 꽃이 활짝 핀 극락전도 만난다..
김용사 극락전은 대웅전에서 우측으로 조금 뒷 편에 있는데 전면 3칸 측면 1칸의 비교적 작은 규모의
맞배 지붕 건물이다.
김용사 극락전 내부에는 아미타불과 순조 22년(1822년)에 후불탱화를 조성하여 봉안하고 있다 .
조선후기에 조성되었다고 하는 자그마한 아미타불좌상이 있다. 유리로 보호막을 설치하여 사진을 찍으면 반사되는 데 각도를 살짝 틀으니 괜찮네.. 그런데 불상(佛像)에 비해 향로가 너무 크게 느껴진다.
공루를 기웃거려 본다.
전각들 사이로 흐스름하니 특이하게 눈에 띄는 아래 층은 거처로 쓰이고 위 층에는 곳간을 들인 듯한 목조 건물은 곡식을 저장하던 곳인 공루로 2층 구조로 되어 있다.
진하게 피어 있는 배롱나무 너머로 웅진전이 나온다..
김용사 응진전은 전면이 3칸 측면이 3칸으로된 맞배지붕 형식의 14평 건물로 임진왜란 때 불탄것을 다시 숙종24년 (1698년)에 건립하였다.
석가여래좌상을 주존불로 하고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협시불로 하고 있다.
이 신중탱화는 다른 신중탱화와는 달리 위타천신(韋駄天)과 제석천(帝釋天)을 중심으로 천룡(天龍) 팔부중(八部衆)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본다.
김용사 응진전에는 부처님 당시의 16나한과 나한도가 모셔져 있다.
응진전에 독성탱이 ?
극락전 그 뒤쪽의 응진전에는 짐짓 엄숙한 표정을 하고 있지만 새하얗게 칠해진 얼굴 때문에 약간 우스운 모습이기도 한 나한상들이 나란히 앉아 있다.
장엄한 응진전 천정 단청
응진전에서 내려서서 약사여래불쪽으로 방향을 잡아 본다.
석조 약사여래입상 가는길...
편안하고 아늑한 잣나무숲 길을 걸어 가셨을 선지식들을 따르며 ....
웅진전 오른편 뒷쪽으로 오르면 3층 석탑과 약사여래석불이 있다.
무성한 풀을 헤치고 조금 올라가니 주변 아름다운 소나무 숲을 바라보며 서있는 석탑을 만났다.
참 아늑하고도 멋진 풍경이 펼쳐진다.
풍수가에 따르면 김룡사 가람이 소가 누운 와우형으로 지맥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으려고 대웅전 주변이 아닌 조금 떨어진 이곳에 석탑과 석불을 두었다고 한다.
절 위쪽으로 나있는 산길을 올라가면 좌측 산 능선에 삼층석탑이 서있다.
아무리 보아도 탑(塔)이 있을 자리는 아닌데 아마도 어디서 옮겨 놓았을 것으로 추정해 본다. 기단부는 땅속에 묻혀 있고 그리 높지 않은 삼층석탑인데 1층 탑신부 몸돌에는 동자승 같은 해맑은 모습을 하고 있는 동자(童子)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투박하게 생긴 3층석탑. 약사여래불 가는 길 산아래 위치해 있다. 대개의 석탑은 대웅전 앞에 자리 잡고있는데 왜 혼자 따로 떨어져 있을까?
김용사 3층석탑은 탑의 모양이 이상한 기형탑으로 산 중턱에 축대를 쌓아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탑을 올렸다. 석탑의 옥개석에는 낙수면이 없고 옥개의 끝부부은 올라갔으며 하나의 돌로 다듬어서 올려진 옥개석이다.
그런데, 웬일인지 탑은 금당 앞이 아니라 응진전 뒤쪽으로 물러나 있다. 응진전 뒤쪽 숲속에 있는 사찰을 수호하는 삼층석탑 한기를 만나고..
김룡사는 풍수지리 상 누운 소의 형상이라고 하는데 운달산의 맥을 보전하기 위해 석탑과 석물을 절 마당이 아닌 절 뒷 편에 두었다고 한다.
김용사에 석탑과 석상을 절 뒤에 세운 것은 그 선익을 진압하고 산혈의 촉 맥을 보우하는 뜻이라고 한다.
그리고 석탑을 내려와 왼편 다리를 건너 대리석 계단을 오르니 약사여래석불이 나온다.
산 능선에 삼층석탑 그 건너편에는 장승처럼 생긴 부처님이 우뚝 서 계신다.
새로 조성된 연화좌 위에 모셔져 있는 부처님은 둥근 얼굴에 삼각형의 뽀족한 육계를 하고 있으며, 귀는 크고 길게 늘어져 있고 좁은 어깨에 통견을 입고 있지만, 마멸이 심하여 옷주름은 보이지 않는다.
양손은 가슴과 배 앞에 대고 있는데, 희미하게 약합으로 보이는 지물을 손에 들고 있어 약사불(藥師佛)로 부르고 있다 한다.
얼핏 보면 상주 남장사로 올라가는 길목에 위치한 석장승으로 보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하고, 조선시대때 많이 세워졌던 길 표석으로 오해 받을 수 있는 석불이다.
높이 2.27m의 작지 않은 크기의 석불로서 화강석을 이용하여 조각하였다.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석불에서 많이 벗어난 양식이며 원래 이곳에 있지는 않아 보인다. 석불입상을 제외한 나머지 석물들이 근래에 조각되고 조성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좌대는 연화문을 이용하여 제작했으나 석불입상의 양식과는 거리가 멀어 보일 뿐만 아니라 기계로 가공하여 투박한 멋은 찾을 수가 없다.
몸전체에서 두상이 차지하는 부분이 많으며, 석재가 생긴 대로 조각하다 보니 이렇게 될 수 밖에 없는 한계가 있었겠지만 두상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그리 정교한 조각수법이 보이질 않는다.
후덕하고 왠지 천진스런 모습이 참 좋다.입가의 미소만 보고 있어도 병이 저절로 치료가 될것 같다.
운달산에 위치한 김용사터는 와우형혈로서 기본적인 의미로 살펴볼 때 매우 후덕하고 흙이 많은 지형으로 보인다. 이러한 지형지세에 만들어진 석불상인지라 두상부분을 매우 집중적으로 표현했으며, 특히 눈과 코, 입과 귀부분의 표현에 매우 신경을 쓴 흔적이 보인다. 입모양은 근엄하게 보이는 다른 부처상과는 달리 웃는 모습으로 조각이 되어 있으며 육계와 나발도 꽤나 진지하게 표현되어 있다.
제일 높은 곳에서 김용사를 내려다 보는 부처님이 있다.
김용사는 산지가람인 관계롷 일주문을 제외하곤 대부분 경사지에 건물이 배치되어 있다. 사천왕문에서 대웅전에 이르는 축만 일직선으로 배치되었을 뿐 나머지 전각을 산세를 중심으로 넓게 배치되어 있다. 이렇게 배치되어 있는 김용사를 한 눈에 감싸 안을 만한 큰 눈으로 지긋이 지켜보는 부처님이 있다. 퍽 오래돼 보이는 약사여래불 바로 김용사 석불입상이다.
언덕의 약사여래석불 앞에 앉으면 금강송에 둘러싸인 아늑한 산사가 한눈에 들어온다.
풍수가들은 김룡사의 가람은 소가 누운 형국인 와우형(臥牛形)이란다. 그래서 지맥의 흐름에 따라 약사여래석불을 세우고 탑을 두었다. 이런 지세에선 큰일을 하는 인물이 나온다고 한다.
약사여래불을 내려 간다.
응진전 옆길을 지나 다리를 건너 명부전쪽으로 가본다.
약사여래석불에서 내려와 해탈교 건너에 있는 명부전으로 향한다.
해탈교를 지나면...
짧은 길이지만 명부전으로 가는 길이 무척이나 매력적으로 다가 온다.
오른쪽 다리 건너편에는 김용사 명부전과 전각 한채가 외롭게 앉아 있다.
명부전 마당 한가운데는 약수가...
명부전은 명부세계의 주인장인 지장보살과 시왕상등이 봉안된 전각이다.
김룡사 명부전 목조지장삼존상 및 제상(지방유형문화재 제285호)
주존인 지장보살이 대좌 위에 앉아 있고 그 양옆에는 젊은 수도승으로 합장하고 있는 도명존자와 홀을 든 문인의 모습을 한 무독귀왕의 협시가 서 있으며 이 지장삼존상의 좌우에 시왕상이 배열되어 있다.
김용사 명부전에 봉안된 불상은 지장보살삼존상을 비롯하여 시왕상, 판관, 사자, 인왕상 등 총 21軀의 목조상이다.
무독귀왕의 복장에서 발견된 발원문에 의하면 이 像들은 1714년(숙종40)에 조성된 것이 확실하며, 이들 목조상에 입혀진 채색은 18세기 당시의 것으로 물감 흔적이 선명하게 잘 남아 있다. 이처럼 제작연대가 뚜렷하며 각 시왕상에 그 명칭이 적혀 있는 등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라 판단된다.
금강역사상
조계종 종정을 지내셨던 성철· 서암· 서옹, 그리고 법전 스님이 이곳에서 수행을 하고 밖으로 나가 큰 이름을 떨쳤으니 허언은 아닌 듯하다. 고승들은 모두 소의 눈에 해당하는 동쪽 계곡 너머의 명부전에 머물렀다 한다.
가람의 배치도 재미있다. 김용사는 누운 소(臥牛)의 형국이다. 그리고 그 소의 눈에 해당하는 부분이 동쪽 계곡 넘어 명부전이다.
앞서 말한 스님들 모두 그곳에 머물렀다. 눈 밝은 스님들이어서 소의 눈을 찾은 것인지, 소의 눈이 스님들의 눈을 밝혔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연에 대한 눈뜸 없이 깨달음을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슬한 분위기가 돋보이는 사찰이다.
명부전 옆에는 철도 모르는 수선화가 어느 중생의 넋으로 피운건지?
명부전에서 바라 본 김룡사의 전경이다...
명단을 나와 해탈교를 건너 김용사 입구쪽으로 나간다.
아까 극락전에서 내려오며 응진전 가며 본 공루와 요사도 보이고...
공루와 요사 뒤로 상선원 보인다.
공루와 나란히 있던 요사 앞의 또 다른 요사도 지난다.
천왕문. 설선당. 보제루도 지나...
사천왕 문을 내려와 졸졸 흐르는 약수물로 목을 축이고 고운 초록잎을 눈에 담으며
보장문쪽으로 나간다...
김룡사를 거의 돌아보고 나오는 길에 김용사의 명물중 하나인 3백년된 해우소로 가본다.
김용사에서 또 하나 주목받는 것은 측간인 해우소이다. 김용사 해우소는 우리나라 사찰 화장실 중 그 형태를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곳으로 조선 중기의 측간이다.
김용사의 해후소는 완전 옛것이다. 지은지 300년이 된 목조건물이다. 처음 들어 가는 사람은 좀 겁이 날정도?
보장문과 담으로 연결된 절 입구에 있는 해우소.
이곳 해우소는 인분을 바로 퇴비로 사용하는 옛날 푸세식 형태의 화장실이다.
남녀가 각각 4명씩 '근심'을 풀도록 돼 있는 이 해우소는 정면 높이가 5.4m로 약간 겁이 날 정도로 화장실 바닥이 저 아래에 있다.
이제 해우소 옆길을 따라 김룡사를 빠져나간다. 이곳에서 보니 해우소가 단층이 아니라 2층의 모습이다. 아무래도 비료로 사용하기 위한 인분의 수거를 쉽게 하기 위해서겠지.....
현재도 사용하는 해우소 解憂所로 토속적인 목조 건물로 꼭 한번 확인하기를 권하는 특별한 장소다.
김용사의 명물 3백년된 해우소도 지나 보장문 앞의 전나무 숲길로 향한다.
천년 고찰임에도 전하는 유물(遺物)이 많지 않은데 지난 1997년 12월말 경 큰불이 나서 대웅전을 제외한 많은 전각과 주변의 송림(松林)이 함께 불타 버려 옛적의 고적(古蹟)함을 느낄 수 없는 것이 아쉽기 그지없다...
평일이라 사람들도 거의 없고 참 한적한 길을 걸었다.
그 한적한 길과 운치있는 사찰 그리고 시원하게 흘러내리는 계곡 물에 잠시 마음을 내려 놓았다.
독일의 인문과학 저널리스트인 '울리히 슈나벨'에 따르면 휴식(Muße)은 빈둥거림이 아니라 행복의 중심이며 자신의 내면과 대화를 하는 시간이라고 한다.
김용사의 숲 길을 걷는 동안 마음속 깊숙한 곳에도 잠시 휴식이 머물렀나 보다. 참 행복한 시간이었다.
김용사를 나와 좌측길쪽 김용사의 산내 암자로 발길을 돌려 본다.
김용사의 산내 암자로 비구니들의 수행처인 대성암과 양진암을 다녀올 생각이다... 고운 운달산 숲길을 걸어 암자로 향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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