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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장대 꽃살문이 아름다운 예천 용문사 & 주변 태실(경북 예천군 용문면 용문사길 285-30, 용문면 내지리 391)
    사찰여행/경상도 2024. 8. 27. 12:36

    윤장대 꽃살문이 아름다운 예천  용문사 &  주변 태실

     

    2024.   8.    27. 

     

     

    2024.  8.   25.    가배산악회와 함께한 물 위에 뜬 연꽃을 닮아 아름다운 금당실 마을 &  오랫동안 마을을 지켜 온 소나무 숲 ‘송림’인 금당실 송림, 경북 예천에 위치한  해발 730m에 위치한 공원으로 어림호 주변 경관과 전망대에서 보는 소백산 백두대간의 모습이 너무도 아름다운 곳인 소백산 하늘자락공원,  윤장대 꽃살문이 아름다운 절 용문사 차례로 돌아보는 경북 예천 여행길로

     

    오늘 두번째 여행지로 경북 예천에 위치한  해발 730m에 위치한 공원으로 어림호 주변 경관과 전망대에서 보는 소백산 백두대간의 모습이 너무도 아름다운 곳인 소백산 하늘자락공원뒤로하고 오늘 마지막 여행지  윤장대 꽃살문이 아름다운  용문사로  향해본다.

     

     

     

     

     

    사찰에 들어가는 시작점으로 일주문은 사찰의 경계이자 신성한 공간으로의 첫걸음을  상징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이 문을 통해 방문객들은 세속을 벗어나, 불교의 가르침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함께 느낄수 있는 고요하고 성스러운 공간으로 들어가게 된다.

    '영남 제일 화엄도량 소백산문'이라고 쓰인 큰 규모의 근래의 일주문이 있다.

     

     

     

     

    근래의 일주문을 지나오면 옛 일주문이 자리한다.

    사찰의 첫 문인 일주문은 기둥 2개에 지붕을 올린 구조로 사찰의 경계를 표시한다.   일주문은 聖과 俗을 구분 짓는 종교적 의미뿐만 아니라 邪됨을 막는 벽사의 기능도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일주문에는 寺名과 사찰이 소재한 山名이 적힌 편액, 혹은‘자하문紫霞門’,‘ 조계문曹溪門’과 같은 편액이 걸리기도 하는데, 용문사 일주문에는 현재  ‘小白山 龍門寺’란 편액만이 걸려 있다. 「속용문사적기續龍門事蹟記」에는 1608년에 시작된 용문사 중창의 막바지 불사로 1689년에 건립될 예정이라고 적고 있다. 이후의 중창 기록은 전하지 않지만 공포의 조각수법이나 장식은 17세기보다는 18세기 후반의 건축적 형식이 강하게 드러난다.   대장전의 공포와 유사한 것으로 미루어 대장전 중창과 궤를 같이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주문 추녀마루에는 얼마 전까지도‘昭和十三年’명 암막새가 놓여 있어 1938년에 보수가 되었음을 알수 있다. 공포대는 두 개의 간포間包와 두 개의 귀포로 이루어져 있으며, 출목은 앞뒤 모두 2출목이다. 공포는 하나의 수서와 두개의 앙서, 그리고 권비형拳鼻形운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지붕 형태는 우진각 지붕으로 중국의 패루牌樓와 닮았다.

     

     

     

     

    용문사는 870 (신라 경문왕 10)에 두운 선사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전해온다. 고려 태조 왕건이 신라를 정벌하러 내려가다 이 사찰을 찾았으나 운무가 자욱하여 지척을 분간치 못했는데, 어디선가 청룡 두 마리가 나타나 길을 인도하였다하여 용문사라 불렀다고 한다.

    고려 명종 때 용문사 창기사로 개명했으나 조선 세종대왕의 비 소헌왕후의 태실을 봉안하고 성불사 용문사로 다시 고쳤고, 정조 때 문효세자의 태실을 이곳에 쓰고 소백산 용문사로 바꿔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 때 영남 제일강원으로 불릴 만큼 큰 사찰이었으나 화재로 인해 사세가 크게 줄었다고 한다.  

     

     

     

     

    옛 일주문 주차장에 주차 후   다리건너  숲길을 통해 절로 오른다.

     

     

     

     

     

     

     

    소백산 자락이 흘러내려 이룬 용문산은 아름답다.

     용문사 일주문에 이르면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왼쪽은 근래 새로 낸 길이고,   오른쪽은 옛부터 있던 길로,  옛길로 난 길의 계단을 오르면 회전문에 도착한다.

     

    일주문을 지나자 마자 도로옆으로 난 짧은 숲길을 따라 오르면 용문사 경내까지의 거리는 매우 짧지만 울창한 숲이 주는 느낌이 너무 좋다.

     

     

     

     

    소백산 용문사 현판이 쓰여진 일주문을 지나서 처음 만나는 문이 회전문(廻轉門)이다.

     

    사천왕상이 모셔져 있는 회전문과  해운루를 통과하면 고요한 적멸의 공간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첫인상이 유난히 정갈한 사찰이다

     

     

     

     

    회전(廻轉) '윤회전생(輪廻轉生)'의 줄임말로 일반사찰의 사천왕문(四天王門)에 해당된다.

     

     

     

     

     

     

     

    회전문은 불교의 윤회사상을 담고 있는 윤회전생(輪廻轉生)에서 온 말로 회전장치가 있는 건물의 회전문과는 다르다.   ‘회전문(回轉門)인사라는 말이 정치판에서 사용되고 있는데 불교의 연기사상을 담고 있는 회전문(廻轉門)’을 이해한다면 정치인들도 달라지지 않을까 싶다.

     

     

     

     

    용문사 회전문은 소조 사천왕상을 모셨다.  양쪽 들보 위로 청룡과 황룡이 머리를 내밀고 있다.  서까래 양록 단청과 뒤에 댄 판재의 붉은 단청이 통도사 불이문 천장 같은 분위기를 낸다.​

     

     

     

     

     왼쪽 지국천왕, 오른쪽 증장천왕

    흙으로 빚어 칠을 한 ​소조상으로  회전문 안에는 사방을 지키고 불법을 수호하는 4명의 천왕상이 있으며 좌우 2구씩 목책안에 안치되어 있다.

    보광명전으로 들어가는 왼쪽 앞쪽에 서방 광목천왕(廣目天王), 뒤쪽에 북방 다문천왕(多聞天王),   오른쪽 앞쪽에 남방 증장천왕(增長天王), 뒤쪽에 동방 지국천왕 (持國天王)이 배치되어 있다.

    사천왕상은 흙을 사용하여 의자에 걸터앉은 자세로 천왕이 든 지물은 다문천왕이 당() ,   광목천왕은 용()과 보주(寶珠) 지국천왕이 비파를 증장천왕이 검을 들고 있으며 얼굴은 불법을 수호하기 위하여 험상궂은 표정을 하면서도 눈썹과 수염 등에서 부드럽고 해학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사천왕 발아래에는 악귀들이 천왕의 다리를 받쳐 들고 있다.  1688년에 사천왕상이 제작되었다.

     

     

     

     

    왼쪽 광목천왕, 오른쪽  다문천왕

     

     

     

     

    회전문 다음 석축에는 해운루가 올라서 있다.​   회전문을 지나면 해운루가 나오고 해운루를 지나면 바로 경내로 들어간다.

     

     

     

     

     

     

     

    누각 아래를 통해 절 마당으로 드는 마지막 관문이고 ​1984년에 불타고 새로 지었다.

    해운루'는 보광명전에 대응하는 문루(門樓)이며, 대장전에 대응하는  '자운루' 문루(門樓)와 나란하게 서 있다 해운루(海雲樓)에 걸린 '소백산용문사' 편액은 해인사에 머물렀던 불교계에 이름난 서예가 송월(淞月) 스님이 쓰셨고 왼쪽 관지에 '고희'라고 적혀 있는 걸로 보아 세속 나이 일흔이던 ​1995년에 쓴 것 같다.

     

     

     

     

    올려다본 불국토로 들어가는 길,   회전문을 지나 계단을 올라 해운루 누각을 지나면 보광명전을 비롯 많은 전각들이 눈에 들어온다

     

     

     

     

    해운루 또한 1984년 화재때 소실되었다가 1990년에 복원된 건물이다.

     

     

     

     

    해운루 편액은 누각 올라서서 뒤쪽에 걸려 있다.

     

     

     

     

    해운루에 올라보면  2층에는 법고와  창 쪽으로 벤치가 놓여 있어서  주변 경관을 앉아서 관람할 수 있다.

     

     

     

     

    해운루  2층 내벽에는 산수화가 장엄하다.

     

     

     

     

    주변 경관을 앉아서 관람한다.

     

     

     

     

     

     

     

    해운루 앞에 회전문이 내려다 보인다.

     

     

     

     

    해운루에서 바라본 용문사 대광명전과   좌측의 5층석탑과 우측의 3층석탑과 이다.

     

    해운루를 누하 진입식으로 통과하면 높다란 계단 위에서 보광명전이 위엄있게 우리를 내려다본다. 험준한 소백산맥의 지형을 이용해 만든 사찰이다.

    보광명전을 중심에 두고 거대한 쌍탑이 좌우로 굳건히 지키고 있는데 그 모습이 장엄하고 웅장하다.

     

    좌측의 탑은 5층이고 우측의 탑은 3층으로 구성되어 있어 독특하다는 생각이 든다.

     

    1984 화재 이후 용문사는 중창불사에 힘을 쏟고 있다.   옛 건물과 신축한 시설물이 어울리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그런 것에 당황하거나 안타까워 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절을 찾는 이유는 채우러 가는 것이 아니고 비우러 가기 때문이요,   유명한 문화재가 있고 없고 많고 적음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 숨은 부처를 찾으러 간다는 것 이상의 명분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도 계시는지 모르겠지만 주지스님인 청안스님은 모 이동통신사의 광고에 영화배우 한석규와 차밭을 거니는 스님으로 등장해 세인의 관심을 끌었던 분이다 또한 용문사 중창불사에 대한 끊임 없는 원력을 가지고 계신 분이다

     

     

     

     

     해운루는 누각에서 조망을 감상하면서 휴식을 취하는 곳으로 천왕문(회전문)과 연결되어 경내로 들어오는 입구 누각이다.

     

     

     

     

     

     

     

     

     

     

    해운루 외벽의 벽화

     

     

     

     

    해운루 우측으로 관리사인 보경당.  성보박물관.  괘불탱 보호각이 차례로....

     

     

     

     

    성보박물관은 보수 중이라  문이 닫혀 있어 많은 문화재를 볼 수가  없어 아쉬웠다.

     

     

     

     

    성보 박물관의 현판은 이곳 예천(醴泉)출신의 서예대가 초정(艸丁)권창륜(權昌輪)선생, 주련(柱聯)은 석재 서병오 선생의 글씨다.   초정 선생은 문경 김용사(金龍寺)에도 많은 편액글씨를 남기신 분이다.

     

    성보박물관은 연 면적247 건평 118(지하1,지상1) 2006년에 지어진 신축건물이다.   이곳에는 모형 윤장대 탱화· 영정 불상· 존자 불교 제례도구 등 230여점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민속공예품과 첨단영상물을 함께 전시하는 공간으로써 산사(山寺)의 역사와 자연을 동시에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

     

     

     

     

    해운루와  범종각. 자운루가 일렬로 늘어서 있다.

     

    자운루와 해운루 옆쪽으로 범종각을 만난다 범종각은 범종을 달아 놓은 전각을 말한다.   모임 지붕 중에 사모 지붕에 속한다.

    당호는 절에 따라 범종루·  종각·  종루라고 하는데,   일반적으로 단층일 경우 각()이라 하고 중층일 경우 루()라고 한다.

    규모가 큰 사찰에서는 중층으로 세워 법전사물(法殿四物)을 함께 두기도 한다.   전각의 외양은 대개 기둥과 목책이 있는 사각의 단층 건물이거나,  2층 누각이다.

     

    보통 불이문(不二門)을 지나 사찰 경내에 들어서면 법당 앞에 있거나 일주문 왼쪽에 있는데, 중층 누각의 경우는 다르다   경상북도 영주 부석사(浮石寺)의 경우는 해탈문인 안양루 아래에 있고 청도 운문사(雲門)의 경우는 누각 밑이 바로 사찰 진입로이다.   전라북도 완주 송광사(松光寺)의 경우는 평면이 십자형이다 영암 불갑사(佛甲寺)의 범종루는 6각의 중층 누각으로, 1층에 목책을 두르고 범종을 안치했으며 난간을 두른 2층 다락은 비워두었다.   고창 선운사(禪雲寺)에서는 천왕문 2층에 범종과 법고를 함께 둔다.

     

    범종각에 범종과 함께 두는 법전사물은 범종(範宗). 법고 .운판(雲板목어(木魚)이다.

    바로 그것이 하늘의 소리(雲板),  땅의 소리(法鼓)  , 바다의 소리(木魚), 그리고 그것이 모여 울리게 되는 종소리(範宗) 이다

    범종각에는 범종과 운판, 목어가 있고 법고는 해운루에 있다.

     

     

     

     

     

     

     

    영남제일강원

    조용한 경내에는 햇살만 넘실거릴 뿐 고요하다. 그리고 그냥 지나칠수 없는 커다란 법문이라든지 설법을 하는 '영남제일강원'으로 가보자넓은 마당을 두리번거리다 영남제일강원의 주련 앞에 섰다 

     

    그곳엔 '화장찰해'란 현판이 걸려져 있다.

     

    漢武玉堂塵已沒 (한무옥당진이몰)    한무제의 궁궐은 이미 티끌이 되었고

    石崇金谷水空流 (석숭금곡수공류)    석숭의 별장에도 쓸쓸히 물만 흐르네

     光陰乍曉仍還夕 (광음사효잉환석)    세월은 빨라 새벽이다 싶으면 이내 곧 저녁이 되고

     草木春卽到秋 (초목재춘즉도추)    초목은 겨우 봄인 듯했는 데 어느덧 가을이 되고마니

     處世若無毫末善 (처세약무호말선)    세상을 살면서 털끝만한 선행도 못하면

    死將何物答冥侯 (사장하물답명후)    죽어서 염라대왕에게 무엇으로 대답하리

     

    약간의 나른함이 밀려드는 오후의 시간, 번쩍 정신이 든다.   갱년기로 우울해 있던 나를 향한 죽비였다. 고개를 들 수가 없다.

    선행은 말로, 혹은 마음 속에서만 머물다 늘 엉뚱한 것에 밀려 잊혀지곤 했다.   쫓기듯 하루를 보내고 잠자리에 들 무렵이면 정체 모를 허기감이 몰려왔다.   그것은 삶에 대한 경고였다.   땡볕에 우두커니 서서 나를 돌아본다.

     

     

     

     

    석축 오른쪽 끝에 강원이 있는데  많은 학승을 배출한 유서 깊은 강원이지만 보광명전과 함께 불타 새로 지었고 편액 글씨는 진주 서예가 죽헌 정문장님이 썼다.

     

     

     

     

    해운루 오른쪽으로는 자운루가 보인다.

    '자운루'는 대장전에 대응하는 문루(門樓)이며, 보광명전과 대응하는 '해운루'와 나란하게 서 있다.

     

    임진왜란 시 승병들의 지휘소로 이용되었던 자운루가 용문사에 아직도 남아있어 호국불교의 기풍을 후손들에게 전하고 있다.

    해운루 옆에 위치한 자운루는 고려 의종 20년에 처음 세워졌고 조선 때 2차례 고쳐 지은 적이 있으며 1979년에 다시 고쳐 현재의 모습을 하고 있다.

     

     

     

     

     

     

     

    자운은 보랏빛 구름, 즉 상서로운 구름을 뜻한다.​

     

     

     

     

    자운루는 임진왜란 당시 승병들의 회담 장소이자, 백성들이 승병을 돕고자 짚신을 만들었던 곳이기도 하다.

     

     

     

     

    이런 호국의 장소이기도 한 자운루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자료 제169호

     

     

     

     

    용문사 자운루(경북도지정 유형문화재 제476

     자운루는 2층 누각집으로 고려 의종 20(1166)에 자엄스님이 세웠으며 조선 명종 16(1561) 고쳐 짓고 광해군 13(1621)에도 고쳐지었다.   그 뒤, 1979년에 보수하여 오늘이 이르고 있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새 날개 모양으로 짠 익공 양식으로 꾸며져 있으며 안쪽 천장은 뼈대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연등천장이다.

    임진왜란 때는 승병들을 지원하기 위해 이곳에서 짚신을 만들어 조달한 신방의 기능을 수행한 호국의 장소이기도 하고 건축 양식으로 보아 조선 중· 후기의 기법을 지니고 있으며,   불교 행사가 있을 때 법공양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해운루 보다 훨씬더 오래된 듯한 자운루는 용문사의 운치를 한껏 더 돋보이게 해주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해운루로 오르는것 보다 옛날을 느끼기에는 자운루로 오르는것이 더 나은듯 하다.

     

     

     

     

    누의 역할은 사찰마다 약간 차이를 보이는데 주로 휴식과 수행의 공간으로 사용되거나 출입문의 역할을 하는 등 복합적인 성격을 가진다. 자운루는 평면형의 구조나 대장전 쪽을 제외한 좌측과 정면에 개폐가 가능한 벽체가 설치되어 있는 점으로 미루어 수행과 휴식의 공간으로 사용되었다고 본다.

     

     

     

     

     

     

     

     

     

     

     용문사의 주불전인 보광명전

    보광명전은 1984년 화재때 소실된 것을 최근에 복원한 전각으로 보광명전(普光明殿) 편액은  송월(淞月) 스님 글씨다.

     

    佛身普遍十方中 (불신보변시방중)    부처님 몸  두루하여 시방세계  충만한데

    三世如來一切同 (삼세여래일체동)    삼세의  여래 또한   모두가  한 몸일세.

    廣大願雲恒不盡 (광대원운항부진)    넓고 크신  자비원력  항상하여  다함없고

     汪洋覺海渺難窮 (왕양각해묘난궁)    넓고 넓은  깨침바다   헤아리기  어렵다네.

     

     

     

     

    보광명전 앞에서 본 모습으로 경내에 세운지 오래되지 않은 석탑들과 해운루의 모습 뒤로 보이는 풍경이 너무 멋지다.

     

     

     

     

    원래는 용문사의 본전은 보광명전이지만 연륜은 대장전이 높다. 주요 전각이기는 하나 1984년 용문사에 큰불이 난뒤 새로 세운 건물이다.

     

    화재로 소실되어 최근에 중수한 보광명전은 새 전각답게 깔끔하고 화려하다 반들반들 윤이 나는 마룻바닥의 촉감이 채 가시기도 전에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에 매료되고 말았다 흔들림 없이 빈 몸으로 불어오는 듯하지만 성성한 기운이 실려 있는 바람을 보광명전 기둥에 기대어 서서 온 몸으로 맞는다

     

     

     

     

    보광명전의 장엄한 용두

     

     

     

     

    보광명전 내부 중앙에는 높은 수미단 위에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삼존불은 지권인을 결한 본존인 진리의 법신불(法身佛)인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서방 극락정토의 주존불인 아미타불(阿彌陀佛)과 동방유리광세계의 주존불인 약사불(藥師佛)을 함께 모셨다.   

    재미있는 것은 비로자나불상은 철불,   아미타불상은 목불,   약사여래상은 흙으로 빚은 소조불로 각기 다르다는 점이다.

     

     

    문화재 가치가 큰 것은 향 불단 왼쪽 목조 아미타불좌상으로 복장 유물에서 1515년에 중수한 발원문이 발견되어  개조 시기와 제작자, 시주자 이름이 나온 보물 1637호이다.

     

     

     

     

     

     

     

     

     

     

     

     

     

     

     

     

    불단 우측의 지장탱

     

     

     

     

    영가단의 위폐

     

     

     

     

    보광명전의 신중탱

     

     

     

     

    칠성탱

     

     

     

     

    장엄한 닫집과 천정

     

     

     

     

     

     

    공포 익공 위 보머리를 봉황으로 처리했다.

     

     

     

     

    보광명전의 측면

     

     

     

     

     

     

     

     

     

     

     

     

     

    보광명전을 중심으로 서쪽으로 가보면  계단아래 스님처소인 응향각이 있다.

     

     

     

     

     

     

     

    한때 영남제일강원으로 불릴 만큼 큰 사찰이었으나 화재로 인해 사세가 크게 줄었다고 하니 이전의 모습은 얼마나 웅장하고 장대했을런지 ?

     

     

     

     

    용문사는 산기슭에 자리잡은 지형의 탓인지 계단식으로 땅이 조성되어 있고 각 단마다 전각이 비치되어 있다.   보광명전을 중심으로 서쪽으로 가보면 응향각이라든지 관음전이라든지 산신각, 천불전이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있다.

     

     

     

     

    돌담위로 관음전이 자리한다...

    원통전은 관세음보살을 모신 전각이 사찰의 주된 전각일 때 붙이는 이름이다. 사찰 내의 1개 전각일 때는 관음전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중국에서는 관세음보살의 자비를 강조하여 대비전이라고도 한다. 관세음보살은 다른 부처나 보살과 달리 현세적인 이익을 주는 보살로, 모습이 다양하고 중생이 원하면 어느 곳에나 나타난다. 성관음(聖觀音)· 천수천안관음(手千眼觀音)· 마두관음(馬頭觀音)· 십일면관음(十一面觀音)· 여의륜관음(如意輪觀音)· 준제관음(准提觀音)· 불공견 삭관음의 칠관음이 대표적이다.

     

     

     

     

    이 전각에는 관세음보살상이 단독으로 모셔진다.

     

     

     

     

     

     

     

     

     

     

    만월당

     

     

     

     

    관음전과 산신각의 처마가 곱다...

     

     

     

     

    원통전에서 1단을 오르면 산신각이 자리잡고 있다.

    산신각은 산신을 모시는 전각이다. 사찰에 따라서는 산령각(山靈閣)이라고도 부른다.   또 삼성각(三聖閣)을 두어 칠성신·  독성(獨星)과 함께 모시는 경우도 흔하다.   본래 산신은 도교에서 유래한 신으로, 불교가 전래되기 전에 많이 믿던 토착신이다.   특히 산지가 70%나 되는 한국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조선 말에 이르기까지 산신신앙이 널리 유행하였다.   이 산신이 불교에 수용되면서 호법신중(護法神衆)의 하나로 자리잡았다.

          

    불교가 대중화되기 시작한 것은 삼국시대부터이므로 산신도 비교적 일찍 불교에 수용되었을 것을 여겨지나, 산신각이 세워진 것은 조선중기 이후부터이다. 대개 전각의 뒤쪽에 세우며, 크기는 정면1,   측면 1칸이 보통이다. 

     

     

     

     

    산신각 내에는 산신을 그린 탱화를 모시는데 대개 흰수염,   대머리, 긴 눈썹이 휘날리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용문사 경내가 한눈에 들어오는 절터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천불이다.  천불전으로 오르는 길이 결코 쉽지는 않다...

     

     

     

     

     

     

     

     

     

     

    천불전  내부에는 중앙의 비로자나불을 주불(主佛) 좌우에 석가모니불과 약사여래불을 모시고 천불(千佛)을 봉안하였다.

     

     

     

     

    천불전의 천불상(千佛象)

     

     

     

     

    천불을 용과 천인들이 호위하고 있다.

     

     

     

     

    용문사의 주위 풍경은 참 아름답다.

    바람도 쉬어 간다는 용문사의 주변 숲은 한여름에도 무더위를 뚫지 못할 만큼 시원한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용문사로 템플스테이 오시는 분들이 많다고 한다.

     

     

     

     

    천불전에서 바라보는 산사의 풍경은 그야말로 평온함과 고즈넉함의 극치를 보여주게 된다.  산사의 단아한 지붕과 소백산 줄기의 능선이 조화롭게 펼치는 아늑한 풍경이다.   일순간 절로 마음이 평안해짐을 느께게 된다.  주변은 고요함과 적막함만이 가득할 뿐이다.

     

     

     

     

    보광명전과 대장전 사이에 위치한 포대화상이 넉넉한 웃음을 선사한다.

     

     

     

     

     

     

     

    대장전은 보수 중 ~

    해운루 '소백산 용문사' 편액을 쓴 송월 스님이 대광명전 편액도 썼다.

    용문사에 오면 꼭 친견해야 할 곳이 바로 대장전인데 대장전에는 세 개의 보물이 있다. 맞배지붕의 균형미를 자랑하고 있는 대장전(보물 제145호), 목조 아미타여래삼존좌상 (보물989-1호), 용문사 윤장대(보물 684호)로 보수 중이라  그 많은 보물을 볼수 없어 너무 아쉽다.

     

     

     

    세월이라는 것 연륜이라는 것이 지닌 무게는 과연 얼마나 되는 것일까 ?   대장전 앞에 서면 이 자그만한 건물이 주는 무게가 그런 질문을 품게 한다.

     

     

     

     

    대장전 앞에서 본 자운루와 풍경

     

     

     

     

    보광명전과 대장전 위 석축을 따라 가운데로 나가면 정면 여섯 칸, 측면 네 칸 기와 한옥이 있다.

    대장전과 명부전 사이에 자리한 진영당은 과거 용문사에 주석 했던 선사들의 진영을 봉안하는 곳이다.

    현재 이전각에 진영당眞影堂이란 편액이 걸려 있지만 본래 기능을 상실하고   지금은 사찰 요사로 사용하고 있다.  편액 외에 건물 전면 고주에는 일제강점기에 작성한 진영당에 관한 현판이 있다. 이 현판 기록에 따르면이 전각은 조사전(祖師殿)인 동시에 시왕전의 노전이었다.

     

    1681년에 희인(希仁)대사가 신암자(新庵子)를 이건한 뒤 1893년에 혜옹강백이 중수하고 1934년에 주지 이광하(李晃夏)가 중수한 후 이 어 1935년 다시 중수하였다. 

     

     

     

     

     

     

     

    진영당 바로 아래쪽으로는  1682년 초창 정면 3칸 측면 2칸의 명부전이 있다.

    현재 명부전은 전면과 후면의 공포양식에 큰 차이를 보이는데, 전면의 공포는 조선 말기의 공포인 반면에 후면은 쇠서의 곡서의 곡선이 완만한 주삼포식(柱三包式)의 공포로 전면에 비해 세련된 조형미를 가지고 있어 조성시기를 17세기 후반까지 올려볼 수 있다.  특히 측면에 고주가 직접 종보를 받치는 수법은 측면의 고주가 대들보를 받치고 있는 대장전의 가구수법보다 선행하는 수법으로 17세기 후반에 중창되어 가구법의 기본형식을 그대로 유지한 채 현전하는 것으로 보인다.

     

     

     

     

    명부전에는 목조지장보살을 중심으로 무독귀왕과 도명존자가 협시하는 목조 지장삼존상을 모셨다. 둘러앉아 있는 명부시왕들은 아무리 지옥에서 받을 벌로 위협한다고 해도 고개숙이게 될것 같지 않은 편안한 얼굴들이다.  조선 후기 불교가 가졌던 친근성과 민중성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한다.

     

     

     

     

    명부 시왕상과 금강역사상  등을 봉안하고 있다.

     

     

     

     

    죽어 명부에 오는 사람의 업을 심사해 내세를 결정하는 시왕(十王)상이 벽을 따라 앉아 있다.  왼른쪽 끝에 책을 면류관처럼 쓴 이가 다섯번째 시왕 염라대왕으로 죄 짓고 명부에 간 중생에겐 겁나는 존재이지만 편하고 친근한 얼굴을 하고 있다.  민중에 보다 가까이 가려 한 조선 후기 불교를 ​말해준다.

     

     

     

     

     

     

     

    스님들의 생활공간인 2층의 종무소와 1층의 공양간으로 감로당 이다.

     

     

     

     

     

     

     

     

     

     

    공양간 앞마당 장독대에 크고 작은 장독들이 많기도 많다.

     

     

     

     

    명부전에서 북동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응진전이 나온다  응진전은 1785년 다시 짓고 1884년에 고친  정면 3, 측면 3칸의 자그마한 맞배지붕 건물이다.

     

    17세기 중반 초창한 대장전 서편 위쪽에 위치한 응진전은 삼존불 좌우로 16나한이 모셔져 있다.16나한상을 모신 전각으로 십육전(十六殿)이라고도 한다.

     속용문사적기續龍門事蹟記에 의하면, 이 전각은 17세기 중엽 학문(學文)에 의해 건립되었다. 응진전은 1785년에는 자하루와 함께 중창되었고, 1884년에는 명부전과 함께 보수되었다.

     

    응진전은 정면 3, 측면 2칸의 맞배집으로, 어칸에 분합문(分閤門)으로만 출입이 가능하다. 건물 내부의 삼면에는 많은 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이를 위해 측면에 문을 내지 않고 들창을 설치 한 것으로 생각된다.  들창은 채광과 환기를 위한 것이다. 수서와 앙서가 한 쌍을 이루고, 연봉과 봉두로 장식된 전형적인 주삼포(柱三包) 건물로 기둥 사이의 공포대에는 화반이 놓였으며 뒤뿌리가 짧은 부연을 달았다.   투박한 익공의 초가지 표현이나 나지막한 천정, 소규모 평면에 맞는 가구 처리 등에서 19세기 후반 혹은 이보다 늦은 시기에 중수 과정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응진전 주련

     圓覺山中生一樹  (원각산중생일수)      원각산에  한 그루  나무가 생겼는데

     開花天地未分前  (개화천지미분전)      천지가 나누기 전  이미 꽃이 피었다네.

     非靑非白亦非黑  (비청비백역비흑)      푸른색도  흰색도  검은색도  아니며

     不在春風不在春  (부재춘풍부재춘)      봄바람  하늘에도 있는 것이 아니라네.

     

     

     

     

     

     

     

    응진전 불단에 모신 소조 석가삼존불상이 눈길을 끈다. 

    흙으로 빚었는데 마치 석불 같은 질감에  부드러운 파스텔 색조를 칠해 아름답고 고풍스러워 보인다.    과거 부처의 화신 보살로 석가에게 수기를 전한 제화갈라보살과  석가로  부터 미래 부처가 되리라는 수기를 받은 미륵보살이 협시 한다.

     

     

     

     

    코너에 관복차림 전령의 모습을 한 입상은 사자(使者)상이라고 한다.

     

     

     

     

    석가의 제자 16나한상이 벽을 따라 앉아 있다.  역시 흙으로 빚은 소조상이고  삼존상 보다는 늦은 임란 후 17세기 전반 작품으로 추정한다.

     

     

     

     

    동향각으로 명부전 위쪽에 있는 스님 수행공간으로  가는 길로 

     

     

     

     

     

     

     

    1857년에 기록된 상량문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수행이 저절로 잘 될것만 같은 공간이다....

     

     

     

     

    천불전 앞에서 문효세자 태실로 향해본다.

     

     

     

     

     

     

     

     

     

     

    문효세자 태실 도착이다.

     

     

     

     

    경상북도 기념물 제173호  예천 문효세자 태실

     

     

     

     

     

     

     

    왕실 자녀의 태를 봉안한 곳을 태실이라고 한다. 1783년(정조 7년) 문효세자의 태를 봉안하였다.  용문사 대장전 뒷산 두운암 근처 50m 거리에 봉안하였다.   

    태실은 일제강점기 때 이왕직에서 그 내부를 수거해 가고 비석만 남아 있다.   다소 파괴된 것을 1977년에 복원하였다.   경북 예천군 용문사길 285-30번지 용문면 내지리 산 81에 위치하고 있다.  예천은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 태실이 있어서 정조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는 지역이다.

     

    아기비 앞면 : 건륭 47년생 9월 초7일 인시생 원자아기씨 태실 (乾隆四十七年九月初七日寅時生元子阿只氏胎室)

    아기비 뒷면 : 건륭 48년생 9월 초6일 립 (乾隆四十八年九月初六日立)

     

     

     

     

    태지석 앞면 : 임인년 9월 초7일 인시 생/원자아기씨 태 (壬寅年九月初七日寅時 生/元子阿只氏胎)

    태지석 뒷면 : 건륭 48년 9월 초6일생 오시장 (乾隆四十八年九月初六日午時藏)

     

     

     

     

    이 태실은 1783년(정조 7)에 조성된 문효세자의 태실이다.   문효세자는 조선 22대 왕인 정조의 맏아들로서 1784년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1786년 5세의 나이로 죽었다

    태실은 용문사 경내에서 약 100m 정도 떨어진 뒷산 중턱에 마련되어 있다. 1930년대에 발굴조사 되어 태항아리는 경기도 서삼릉으로 이장되었으며 현재는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옮겨져 보관되고 있다. 태실지에는 비신(碑身) 높이 100cm, 너비 52cm 크기의 태실비가 뒤로 약간 기운 상태로 방치되어 있는 상황이다.

    태실의 주요 유물인 태항아리와 태지석 등이 다른 곳으로 옮겨져 보관되고 있으나, 조선 왕실문화의 일면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라고 판단되므로 기념물(記念物)로 지정했다.

     

     

     

     

    문효세자는 정조대왕이 가장 사랑햇던 여인이었던 의빈 성씨 사이에 태어난 첫아들이다. 

    의빈 성씨의 이름은 덕임으로 어려서 정조의 모친 혜경궁 홍씨를 모셨다.  1782년  문효세자를 낳았고 1784년 옹주를 출생했으나  몇달 뒤 옹주가 사망했고 1986년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문효세자가 홍역으로 용절하고 4달 뒤 그 충격으로 의빈 성씨 마져 임신9개월의 몸으로 사망하고 만다. 

    어려서부터 고난의 연속이었던 정조는 힘들게 보위에 올라서도 소중한 사람들을 연이어 떠나보내는 극도의 슬픔을 겪으셨다.

     

     

     

     

    문효세자 태실을 보고 나와  폐비윤씨 태실로 향한다.

     

     

     

     

    이쁜 돌 징검다리도 건너고

     

     

     

     

     

     

     

    솔밭길 사이로 걷기 좋은 길을 따르면

     

     

     

     

    폐비윤씨 태실 방향을 따른다.

     

     

     

     

     

     

     

     

     

     

     

     

     

    저 돌께단을 오르면   폐비윤씨 태실이다.

     

     

     

     

     

     

     

    예천 폐비윤씨 태실(醴泉 廢妃尹氏 胎室)은 경북 예천군 용문면 내지리에 있는, 1478년 (성종 9)에 조성된 성종의 비(妃)이자 연산군의 생모(生母)인 폐비윤씨의 태실이다. 2016년 4월 28일 경상북도 기념물 제174호로 지정되었다.

     

     

     

     

    이 태실은 1478년(성종 9)에 조성된 성종의 비(妃)이자 연산군의 생모(生母)인 폐비윤씨의 태실이다. 윤씨가 왕비가 된 지 2년이 흐른 시점에 가봉(可封)되었다.

    태실은 용문사 경내에서 오른쪽 편으로 300m 정도 떨어진 산 중턱에 마련되어 있다.  1930년대에 발굴 조사된 후, 경기도서삼릉으로 이장되었고 현재 태항아리의 외호는 중앙국립박물관에, 태항아리의 내호와 지석 등은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태실지에는 거북모양의 기단 위에 비신이 놓인 형태의 가봉태실비가 남아 있는 상태이다

    이 태실은 우리나라 현존 세 곳의 왕비 태실 가운데 하나에 속하며, 가봉태실비가 남아있는 유일한 사례이다.   조선 왕실문화의 일면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라고 판단되므로 기념물(記念物)로 지정된다.

     

     

     

     

     

     

     

     

     

     

     

     

     

    조선 제9대 국왕성종의 계비이자, 제10대 왕 연산군의 친모이며 아들 연산군이 즉위 후에 올린 시호는 '제헌왕후(齊獻王后)'였으나 중종 반정 이후 추탈되었다.    능호는 '회묘(懷墓)' 이다.

    성종의 중전이었던 공혜왕후 한씨가 몸이 약하고, 혼인 후 6년 가까이 아이가 없어 신하들이 후궁을 들일 것을 청해 첫 후궁으로 간택돼 입궁하여 숙의로 책봉되었다.  1년 후 중전이 승하하고, 그로부터 공혜왕후의 3년상이 끝난 2년 후 성종은 따로 중전을 간택하지 않고 후궁인 숙의 윤씨를 중전으로 책봉하였다.   이렇게 왕의 계비가 된 윤씨는 마침내 왕실이 고대하던 아들을 낳는데, 그 아이가 바로 왕의 적장자이자 훗날의 연산군이다.   연산군은 왕의 적장자였으므로 자연스레 원자 칭호를 받게 되었다.

     

     

     

     

     

     

     

     

     

     

    폐비윤씨 태실을 내려오다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향하면

     

     

     

     

    사찰음식 체험관 앞으로 내려선다.

     

     

     

     

     

     

     

    자운루 앞을 지나고

     

     

     

     

    회전문 앞을 지나

     

     

     

     

    용문사 부도를 지나면서 바라본 하늘이 참 아름다운데 용문사는 오랜세월 만큼이나 진한 정취를 담고 있는 사찰이 아닌가 생각된다.   용문사에서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마음 속의 복잡한 찌꺼기를 씻어 버릴 수 있어서 좋았던 용문사 순례길이었다.

     

     

     

     

    그리고 계곡에서 족욕으로 체온을 내려주고

     

     

     

     

    일주문 옆을 지나서

     

     

     

     

     

    용문사를 나선다.

     

    부처님의 은혜 속에 살고 있는 우리는 행복하다.  늘 공경하는 마음으로 예경하면서 부처님 법을 배우고 실천하는 불자가 되어야 하겠다.

     

    살다보면 기쁘고 즐거운 때도 있고  슬프고 괴로운 때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결코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않는 것은  즐거움과 기쁨엔 깊이가 없지만고통에는 깊이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즐거움은 그 순간이 지나면 금세 잊혀지지만 고통은 우리의 마음 깊숙이 상처도 남기지만 그로 인해 배우고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몹시도 화가 나고 도저히 이해되지 않고 용서되지 않던 것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분노도 사그라져 그때 내가 왜 그렇게까지 화를 내었는지 자신도 잘 모를때가 가끔 있다.

    감정이 격할 때에는 한걸음 물러서서 치밀어 오르는 화는 일단 참으며  "그럴만한 사정이 있겠지"라고 생각하고 억지로라도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보면  뭔가 그럴만한 사정이 있어서 그랬을거라고 생각하고 함부로 말하거나 행동하지 않는다면 실수하거나 후회할 수 있는 일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불길이 너무 강하면 정작 익어야 할 고구마는 익지 않고 그 고구마 마저 태워버려 먹을 수 없는 것처럼 화는 우리를 삼킬 수 있다.   밝은 마음으로 생각하면 그것은 건강과 장수를 위해서도꼭 필요한 일이다.   말하기는 더디 하고  듣기는 속히 하라는 교훈처럼  화날 때 우리의 생각과 말을 성능 좋은 브레이크처럼 꽉~  밟고 서서히 브레이크에서 발을 뗀다면 무리 없는 인생을 살 수 있지 않을까 ?

     

    오늘도 부처님 세계에서 함께한 참 행복한 하루를 선사해주신 가배회장님 또 감사드립니다.

     

    관세음보살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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