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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물 위에 뜬 연꽃을 닮아 아름다운 예천 금당실 마을& 금당실 송림(경북 예천 용문면 상금곡리)
    여행방/경상도 2024. 8. 26. 17:05

    물 위에 뜬 연꽃을 닮아 아름다운 예천 금당실 마을&  금당실 송림

     

    2024.   8.    26. 

     

     

    2024.  8.   25.    가배산악회와 함께한 물 위에 뜬 연꽃을 닮아 아름다운 금당실 마을 &  오랫동안 마을을 지켜 온 소나무 숲 ‘송림’인 금당실 송림, 경북 예천에 위치한  해발 730m에 위치한 공원으로 어림호 주변 경관과 전망대에서 보는 소백산 백두대간의 모습이 너무도 아름다운 곳인 소백산 하늘자락공원,  윤장대 꽃살문이 아름다운 절 용문사차례로 돌아보는 경북 예천 여행길로

     

    오늘 첫 여행지는 물 위에 뜬 연꽃을 닮아 아름다운 금당실 마을 &  오랫동안 마을을 지켜 온 소나무 숲 ‘송림’인 금당실 송림을 돌아보는 여행 이다....

     

     

     

     

     

    시장 입구에서 내려 ~

     

     

     

     

    용문초등학교 교문 앞을 지나

     

     

     

     

     

     

     

    용문 행정복지센터 도착이다...

     

     

     

     

    용도천문(龍跳天文) 跳  뛸도,  뛸조

     

     

     

     

    용도천문(龍跳天文) ,  용이 천문에서 뛰논다.

     

     

     

     

     

     

     

     

     

     

     

     

     

    반서울 금당실 마을 안내도

     

     

     

     

    용문행정복지센터 앞 50m를 지나왼쪽 골목길로 들어가면 마을회관 앞에 넓은 주차장이 잇다.  이곳에 주차하면 금당실 마을을 돌아보기가 좋다.

     

     

     

     

     

     

     

     

     

     

    마을을 지켜준 수호신 ‘당산나무’

    마을 입구에 자리한 거대한 느티나무는 마을 수호신이라고 할 수 있는 당산나무로 나이가 450년이 넘었다.   마을 수호신으로 450년 동안 마을을 묵묵히 지켜보았을 이 느티나무는 어떤 사연을 가지고 있을까?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이 나무를 누가 심었는지에 관해서는 두 가지의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첫째는, 원주 변씨 금당실 입향조 (어떤 마을에 맨 먼저 정착한 사람이나 조상) 이자 변응녕의 증조인 귀계 변희리(1435~1506)가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들어와 은거할 때 심은 것이라는 이야기와

    두 번째는, 변응녕이 집의 당호를 사괴(사괴는 4그루의 느티나무를 뜻한다)로 한 것으로 보아 그가 네그루의 느티나무를 심고 집의 당호도 사괴라고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이야기다.   주민들에 따르면 원래 4그루를 심었는데 3그루는 죽고 현존하는 것은 남은 1그루라는 것이다.

     

    누가 심었는지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원주 변씨들이 심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마을 주민들이 전하는 이야기로는 원래 이 나무는 원주 변씨의 유적인 사괴정이라는 정자 앞에 있던 것으로 옛날에는 느티나무 앞에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현재 면사무소는 사괴정 터가 아니었을까 추정되며 이 부근일대가 원주 변씨의 영역이었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금당실마을의 역사와 함께 한 이 나무는 마을 주민들의 모임의 장소로 또는 의식의 장소로 이용되었으며, 지금도 그 역사는 이어지고 있다.

     

    때는 1919년 4월 3일 밤 10시 초간종가의 종손인 권석인이 이 나무 아래에서 3.1운동의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행사를 진행했다. 독립선언문 낭독 후 여기 모인 마을 주민들과 함께 만세를 외치며 장터로 행진을 하였다. 이날 시위로 11명이 체포되었고, 그 뒤에 다시 6명이 검거되어 모두 17명이 체포되어 실형을 언도받은 사람이 10명이었는데 이중 금당실 사람이 9명이었다고 한다.

     

    또한 이곳에서는 매년 정월 대보름이 되면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제사인 동제가 진행된다. 1980년 이후에는 동제의 통폐합에 따라 오미봉 제단에서 합동으로 올려지고 있다. 수백 년 전 시작된 제사가 오늘날까지 전통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다.

     

    한편, 옛 사람들은 마을 주변의 산이나 언덕, 나무나 바위 등에 신령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이들을 잘 섬겨야 마을에 평안이 찾아온다고 생각한다. ‘당산’은 이렇게 마을에서 섬기는 자연물로 일종의 마을 수호신인 셈이다.

    “예로부터 마을 사람들은 ‘삼신당’ 나무 그늘에 모여 담소를 나누고 소원도 빌었어요. 이곳에서 자녀의 출산과 번성을 빌면 신령한 나무가 그 기도를 들어준다고 믿었을 만큼 ‘삼신당’은 마을 사람들의 정신적 지주 같은 존재랍니다.”

    따라서 마을 사람들은 물론 이곳을 찾는 방문객들은 자신의 소원을 적은 ‘소원지’를 이 당산나무에 매달고 소원을 빈다.

     

     

     

     

    21세기 바쁘게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고향같이 정겹고, 고향 사람 같은  따뜻한 인심이 있는 이곳 금당실 마을은  예로부터 천재지변, 전쟁 등에 안심하고 살 수 있는 땅으로 십승지마을 중 최고로 뽑히는 곳이 바로 이 곳 금당실 마을이다.

    금당실 마을은 청동기시대의 고인돌, 금곡서원, 초가집 등 고종시대의 99칸의 저택터도 남아있는 전통가옥 및 아름다운 돌담으로 전국에서 가장 긴 정겨운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마을로 들어서자 돌담길이 길게  이어진다.   돌담길은 7.4km에 이른다고 한다.  고즈넉한 골목길로 사색하기에도 좋다.

     

     

     

     

     

     

     

     

     

     

    초가 대문채가 정겹게 맞아주는 ‘우천재’

     

     

     

     

     

     

     

     

     

     

    우천재는 1870년경에 건립된 가옥으로 현재는 박좌상의 소유이다.   건립 후 몇 차례의 수리를 거쳐 오늘에 이른 것으로 보이는데, 우천재는 마을의 지세가 남동향으로 되어 있는 것과 달리 남서쪽을 향하고 있으며 이는 대지의 모양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우천재는 대문채와 사랑채, 곳간채, 안채로 구성되어 있는데 대문채는 일자형이고 사랑채와 곳간채, 안채는 ㅁ자형의 형태로 배치되어 있는 건물이다.   우천재의 공간은 바깥마당공간과 안살림 공간, 사랑공간으로 구성된다.

    대문채를 들어서며 바깥마당을 사이에 두고 오른쪽에는 우물이 정원수 뒤편으로 장독대가 놓여 있어 안채에 장독대가 놓여있는 보통의 집들과 다르다. 장독대에서 안채로 가는 동선은 가깝지 않고 사랑채의 중문을 지나야 한다.

    안살림공간은 일자형 안채와 ㄷ자형 사랑채가 조합된 ㅁ자형으로 안마당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우천재의 사랑공간은 바깥마당의 사랑채 외에도 안채의 오른쪽에도 마련되어 있는데 안채의 건너방과 건너방 오른쪽 마루를 중심으로 동쪽 담장 사이에 있는 작은 마당이 구성되어 있다.

     

     

     

     

    안채 한 동의 건물 안에 안살림공간과 바깥사랑공간이 함께 구성되어 있는 특징적인 모습은 광서당과 유사하다.

     

     

     

     

     

     

     

     

     

     

     

     

     

     

     

     

     

     

     

     

     

     

     

     

     

    특히 바깥사랑공간은 행랑채 오른쪽으로 드나들 수 있도록 마당이 열려있는데 사랑마루와 연결된 사랑마당에서 안채로 직접 드나들 수 있는 작은 쪽문이 사랑마루 앞에 있는데 드러내 놓고 드나드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작은 쪽문으로 되어 있다.

     

     

     

     

     

     

     

     

     

     

     

     

     

     

     

     

    남녀의 활동공간을 내외담으로 구분한 ‘광서당 고택’

     

     

     

     

     

     

     

    1850년경에 건립된 광서당(光瑞堂) 고택은 안살림공간과 사랑공간을 뚜렷이 구분한 내외담이 설치되어 있는 것이 매우 특이하다.

    이곳은 마을 지세와 달리 건물들이 남서쪽을 바라보고 앉아있다.   건물을 가운데 두고 비교적 넓은 텃밭이 조성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광서당 또한 3개의 공간으로 구성된다.

     

    대문채를 들어서면서 만나는 것은 바깥마당공간으로 대문채와 문간채, 그 사이에 형성되어 있는 바깥마당을 말하며 이곳은 주로 남자들의 공간이다. 바깥마당 왼쪽에는 우물이 하나 있다. 바깥마당을 지나 문간채 왼쪽에 나 있는 문을 지나는 이곳은 안살림공간으로 안채와 문간채로 구성되는 ㅁ자형 건물 내에 있는 안마당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은 건물 양편에 마련된 텃밭으로 텃밭이 차지하는 범위가 매우 넓다. 특이한 것은 광서당의 안채는 대청을 사이에 하고 안살림공간과 사랑공간이 공존하는 것이다.

     

    그러나 안채의 경우 전반적으로 안마당을 바라보게 하고 있으며, 사랑채에는 사랑마루를 두고 이를 통해 텃밭이 조성되어 있는 마당으로 드나들게 되어 있어 안채 내에 있는 별도의 공간으로 구분을 해 놓았다. 게다가 사랑공간과 안살림공간을 구분하였던 것으로 보이는 내외담이 사랑방 뒤쪽으로 설치되어 있어 두 공간이 하나에 조성되어 있지만 동선을 달리한 것이 특징이다.

     

     

     

     

     

     

     

     

     

     

     

     

     

    청렴한 선비 김빈의 삶을 엿 볼 수 있는 반송재(伴松齋)고택

     

     

     

     

     

     

     

    초가 대문채가 정겹게 맞이하는 반송재(伴松齋)고택은 조선 숙종 때 인물인 갈천 김빈이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와 거처하던 집이다.   조선시대 영남북부지방의 전형적인 사대부 가옥배치와 평면구성법으로 고풍스런 멋을 풍기고 있다.

    금당실마을 중간쯤에 위치하고 있으며, 갈천(葛川) 김빈이 1670년에서 1690년 사이에 터를 잡고 당호를 ‘반송재(伴松齋)’라 하였다.   이 후 후손들이 가세가 기울어 이 집을 매각하게 되었고 여러 사람을 거쳐 1899년 서울에서 살던 이유인이 금당실마을에 내려와 반송재(伴松齋)를 매입하였다.   이 때 반송재(伴松齋) 건물을 해체하여 현재의 위치로 옮겨 놓고 그 터,  즉 사괴당 동쪽에 있는 ‘이유인 집터’로 불리는 터에는 99칸 규모의 대저택을 지었다고 한다.   이후 현 소유자(김철훈)의 선대에 다시 반송재(伴松齋)를 매입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마을의 지세가 남동향으로 치우쳐져 있는 것에 반해 반송재(伴松齋)고택은 남서향을 바라보고 앉아 있으며, 건물 배치법과 평면 구성 및 건축의 세부 구조와 수법에서 조선 후기 경북 북부지방의 반가(양반집) 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반송재는 3개의 공간으로 구성되는데 대문채를 들어서자마자 만나는 사랑마당을 중심으로 한 사랑채가 있다.

     

    우선 대문채를 들어서면 마당을 중심으로 사랑채와 대문채 그리고 동·서쪽 담장이 둘러 쳐져 있다.. 사랑채는 남성들이 기거하는 곳으로 외부에서 손님이 오면 접대하고 머무르는 곳으로 이용된다.

     

     

     

     

    작은 협문을 통해 만나는

     

     

     

     

     

     

     

     안마당에 있는 살림채 그리고 살림채 옆의 텃밭이 바로 그것이다.

     

     

     

     

    두 번째 공간은 안채 또는 살림채로 사랑공간과 텃밭으로 둘러싸여 있어 외부와 직접 면하거나 통하지는 않는다. 이곳은 공간구성상 가장 닫혀있는 공간으로 동선상으로도 거리가 가장 길고 별도의 출입구를 통해야 한다.

     

     

     

     

     

     

     

     

     

     

    세 번째 공간은 사랑공간의 오른쪽을 지나 조성되어 있는 텃밭으로 살림에 필요한 채소류 등을 재배하거나 작은 나무들이 주변이 심어져 있다.   또한 텃밭의 북쪽에는 대문채 외에 작은 출입구가 하나 더 있어 길에서 쉽게 드나들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집의 형태는 ㄷ자형의 안채 앞에 ㅡ자형의 사랑채가 붙어있지 않고 떨어져 있는 튼 ㅁ자형을 하고 있다. 이는 금당실마을의 다른 고택들에서도 엿볼 수 있는 특징이다.

     

    한편, 반송재에서 살았던 갈천 김빈(1621~1694)은 1651년 진사가 되고, 1657년에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 예조좌랑, 도승지 등의 벼슬을 지냈다.   겸손하고 부지런한 학자일 뿐 아니라, 벼슬에 있으면서 주변 사람에게서 항상 칭찬을 받았고, 남의 헛된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으며, 또한 벼슬에 욕심을 내지 않고 모든 일에 정성을 다하여 소신대로 처리하였기 때문에 왕이 매우 아꼈다고 전해진다.

     

    더욱이 당시는 당파 싸움이 심한 때였지만, 김빈은 이르기를 “반대편이 반드시 소인이 아닐 것이고, 이쪽이 다 군자는 아닐 것이니, 나의 소신대로 정확히 일을 처리할 뿐이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중앙 요직에 있을 때는 항상 오만하지 않고 겸손하였으며, 벼슬에 있을 때는 가는 곳마다 백성을 위하여 정치를 잘한다고 칭송이 자자하였다.   관청의 문을 열어놓고 누구나 어려운 일을 호소할 수 있도록 하여 해결해주었으며,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기에 모든 힘을 쏟았다.  

     

     

     

     

    담장 밖에서 본 반송재(伴松齋)고택

     

     

     

     

    김대기 가족 방향으로 향해본다.

     

     

     

     

    굽이굽이 길을 걸으며 정겨움과 푸근함을 느낄수 있는 ‘돌담’

    금당실마을의 돌담길은 거미줄처럼 얽혀있다. 마을의 중심부에 위치한 당산나무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길이 방사선형으로 뻗어 있다. 마치 미로처럼 말이다.

     

    금당실마을에서는 돌담 복원사업을 통해 약 7km 이상의 돌담을 복원하고 담장아래에는 백일홍, 맨드라미, 채송화 등을 심어 놓았다.  천천히 꽃담길을 따라 걷다보면 눈이 즐거운 만큼 어느새 마음도 푸근해진다.

     

     

     

     

    금당실 마을은 조선시대부터 내려온 유교문화를 그대로 보존하여 거의 대문을 만들지 않고 돌담과 고유의 꽃과 식물을 가꾸어 마치 수백 년 전 마을을 걸어보는 기분이다.

     

     

     

     

     

     

     

     

     

     

     

     

     

     

     

     

    한옥민박체험 가능한 김대기가옥

     

     

     

     

     

     

     

    골목길을 계속 돌아가노라면 길 이름, 가옥 거주자 이름, 주막 등 자상하게 나무표지판으로 안내되어 있고, 또한 한옥체험관도 있다.  또한 방문객에게 편의를 제공코자 농산물홍보관, 주차장, 깨끗한 현대화장실 등 세심한 배려가 엿보인다.

     

    도시의 갑갑하고 답답한 마음을 내려놓고 손에는 달랑 책 한 권만 쥐고 달밤과 새벽 맑은 바람을 맞이하면 세상 모든 근심, 걱정 사라지게 되는 좋은 힐링의 장소라고 느껴진다.

     

     

     

     

    덕용재 고택

     

     

     

     

     

     

     

    오랫동안 마을을 지켜 온 금당실 마을 소나무 숲 ‘송림’으로 향해본다.

     

     

     

     

     

     

     

     

     

     

    금당실 송림은 마을의 수해방지와 바람막이를 위하여 조성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를 금당실 솔둥지라고 한다. 솔둥지(송림 : 松林)가 천연기념물 제 469로 지정되면서 금당실 송림으로 붙여졌다.

     

     

     

     

     

     

     

    금당실 송림는 오미봉 남쪽 바로 아래에서 시작되어 동남방향으로 서촌의 북쪽 경계를 따라 흐르다가 금곡천(앞내)과 선리에서 내려오는 계류(선리천 또는 뒷내)가 만나는 지점을 지나 병암정까지 조성되었던 것으로 알려지지만 지금은 용문초등학교까지 800m만 남아있다.

     

     

     

     

     

     

     

     

     

     

     

     

     

     

     

     

    이 송림의 조성시기와 조성 이유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다만 풍수지리학적으로 마을의 허한 수구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비보림 조성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마을의 환경을 개선하는 데에도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즉 겨울에는 북서풍의 새찬바람을 막아주는 방풍림의 역할을 하였으며, 여름에는 주민들의 휴식처로 활용되고 또한 금곡천의 범람을 막아 홍수피해를 막아주는 방수림으로 이용되고 있다.

    금당실 송림에 대한 형성시기는 정확하지 않지만 시기를 짐작하게 하는 기록이 있다. 1892년 7월 금당실 사람들이 주축이 된 예천 군민들이 오미봉 일대에서 금을 잠채하던 광부들과 충돌하여 두 사람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광부들은 당시 러시아 광산회사에 고용된 사람들로 이 사건은 조선과 러시아 사이의 외교문제로까지 확대되었다.

     

    이 사건으로 마을 사람 둘이 구속되고 그 영향이 커졌는데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마을 사람들은 당시 친로파였던 양주대감 이유인에게 사건 해결을 부탁하였는데 배상금과 로비 활동을 위한 막대한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마을의 공동재산인 송림의 소나무들을 베어 팔았다고 전해진다.

     

     

     

     

     

     

     

     

     

     

     

     

     

     

     

     

    이 기록에 의하면 금당실 송림은 금당실 마을사람의 공동재산으로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높고 또한 마을의 공동재산으로 가꾸어져왔으며 필요한 경우 벌목을 통한 자금조달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현재는 약 800m가 남아있지만 원래는 2km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송림에서 금곡서원

     

     

     

     

    그냥 편한 마음으로 걷고 있으면 그림같은 풍경이 알아서 펼쳐지는 기분이다. 

     

     

     

     

     

     

     

    다시 초등학교 마당을 지나

     

     

     

     

    오늘 점심 식사를 할 오복 식당으로 향한다.

     

     

     

     

     

     

     

     

    이곳에서  점심식사를 한다....

     

    물 위에 뜬 연꽃을 닮아 아름다운 금당실 마을 &  오랫동안 마을을 지켜 온 소나무 숲 ‘송림’인 금당실 송림을   둘러 보고 점심 식사 후 경북 예천에 위치한  해발 730m에 위치한 공원으로 어림호 주변 경관과 전망대에서 보는 소백산 백두대간의 모습이 너무도 아름다운 곳인 소백산 하늘자락공원으로 향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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