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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도 용장사와 용장성(전남 진도군 군내면 용장리)
    여행방/섬여행 2024. 7. 17. 11:14

    진도 용장사와  삼별초 옛 궁궐터 용장성 

     

    2024.   7.   17.

     

    2024.  7.  11 ~ 14 (3박 4일).  가족여행으로  함께한 진도 여행길이다...

     3박 4일 일정으로  진도  쏠비치 리조트에서 편히 쉬며 진도를 둘러 볼 계획이다.   

     

    2024.  7.  12.  진도여행 둘째 날 ~

     쏠비치 호텔 &  리조트 진도를  출발해서 오늘은   고려 삼별초의 배중손(裵仲孫)장군이 용장성을 쌓을 때 조성한 것으로 전해 오는 삼존불이 모셔진  용장사와  삼별초 옛 궁궐터 용장성,  쌍계사와  쌍계사 상수림,  전통남화의 성지 운림산방,   고려 후기 삼벌초를 이끌고 대몽항쟁에 나선 왕온의 묘,  진짜 옛날에 와 있는 듯한 거친 성곽  진도 남도진성,  윤고산 사당 등 진도의 여행지를  둘러보기로  한다....

     

    2024.  7.  12.  진도여행 둘째 날  첫 여행지는 고려 삼별초의 배중손(裵仲孫)장군이 용장성을 쌓을 때 조성한 것으로 전해 오는 삼존불이 모셔진  용장사와  삼별초 옛 궁궐터 용장이다...

     

     

     

     

     

    쏠비치 호텔 &  리조트 진도에서 맞이한 진도에서의  2일째 아침이 시작된다.

     

     

     

     

     

     

     

     

     

     

     

     

     

     

     

     

    아침 식사 후 진도 용장사와 용장성으로 향해본다...

     

     

     

     

     

     

     

     

     

     

     

     

     

     

     

     

     

     

    용장성 삼거리 입구를 지나면

     

     

     

     

     

     

     

    바로 용장사와  용장성 홍보관 아래  주차장 도착이다...   진도 쏠비치에서 이곳까지 거리는 23km, 차로 30분 거리이다. 

     

     

     

     

    고려항몽 충혼탑에서 이 땅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을 기릴 수 있다.

     

     

     

     

    해마다 5월에 고려항몽 충혼탑 앞에서 항몽 순의제를 지낸다고 한다.   홀로 충혼탑 앞에 섰다.   삼별초 용사들의 기운이 뜨겁게 느껴졌다.  그들의 외침이 점점 크게 다가왔다.

     

     

     

     

    광장 중앙에  고려항몽 충혼탑과

     

     

     

     

     

     

     

    주변으로  돌 책장(?)에 삼별초의 활동을 기록해 놓고 있었다.

     

     

     

     

     

     

     

     

     

     

     

     

     

     

     

     

    고려항몽충혼탑  해마다 항몽 순의제를 지내며 삼별초군을 추모한다고 한다.  고려 항몽충 혼탑에서 이 땅을 지킨 이들을 기려보자

     

     

     

     

     

     

     

    항몽 투쟁을 이끈 배중손 장군 동상이 용장성 고려항몽충혼탑 옆에 세워졌다.  배중손 장군의 동상과 사당은 원래는 다른 곳에 있었는데 이곳으로 옮겨진지 얼마 되지 않았다.

     

     

     

     

    사당 앞의  배중손 장군 항몽 순의비

     

     

     

     

    굴포 바닷가에 있던 배중손 사당의 현판과 삼별초의 지도자인 배중손 장군 동상과 배중손장군 항몽 순의비가 이곳으로 고려항몽 충혼탑 옆으로 옮겨졌다.

     

    원래 배중손 사당은 마을 당집이 있던 곳 굴포 바닷가에 있었다. 굴포 신당 유적비와 고산윤선도선생 사적비와 배중손 장군 항몽순의비가 세워져 있었다. 시대를 뛰어넘어, 마을 신과 고산 윤선도와 배중손 장군이 사이좋게 한 지붕 밑에 있었다. 그곳 가까이 있는 남도진성과 아울러 그럴듯한 스토리텔링이 만들어진 뒤에 생긴 일이다.

    용장성을 빼앗긴 뒤 배중손 장군은 남도진성으로 터전을 옮겼다. 그러나 이곳마저 무너지고 바닷가를 따라 물러나다 굴포에서 마지막을 맞았다. 이를 바탕으로 마을 당집이 배중손 사당으로 바뀌고, 배씨 문중에서는 이곳에 동상을 세웠다. 배중손 장군은 오른손을 치켜들고 굴포 앞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굴포 바닷가에 있던 배중손 사당에 있던 현판과 배중손 장군 동상과 배중손장군항몽순의비를 2021년 용장성 고려항몽충혼탑 옆 이곳으로 옮겨졌다.   먼 길을 돌고 돌아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로 이제야 돌아왔다.

     

     

     

     

    삼별초를 이끌었던 배중손 장군모시는 정충사 사당

     

     

     

     

     

     

     

    용장성 홍보관도 바로 인근에 있다.

     

     

     

     

    용장성 홍보관에는 삼별초의 활동을 영상으로 보여주는 영상관과 삼별초의 의의와 활동상을 안내하고 있다.

     

     

     

     

     

     

     

    입구에는 쉼터도 있다..

     

     

     

     

    직원 사무실

     

     

     

     

     

     

     

     

     

     

    용장성 홍보관에서 대몽항쟁에 대한 역사를 좀 더 깊게 배울 수 있다.  시대적 배경과 시간 순서대로 대몽항쟁을 잘 정리해 놨다.

     

     

     

     

    삼별초가 뭐냐고?

    고려 무신정권 때의 특수부대로 별초는 용사들로 조직된 선발군이라는 뜻이다.

    몽고의 침략으로 강화도로 천도한 후, 고려는 40여 년을 항쟁했고 결국 고려왕조의 항복으로 개경 환도를 강행하자 고려 정부에 맞선 삼별초군이 진도로 근거지를 옮겼다.   그곳이 바로 배중손 장군이 쌓은 용장성이다.

     

     

     

     

     

     

     

     

    삼별초의 역사를 만나볼 수 있던 것도 이번 진도 기행의 큰 수확이다.

    배중손 등 삼별초의 장군들은 군민 1만여 명을 배에 태워 진도에 산성을 쌓고 궁을 지었다. 그 터가 용장성이다.

    계단식으로 견고하게 석축을 만들고 행궁을 지었다.  고려 무인정권의 강화도 임시 수도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규모가 웅장하다.  여몽 연합군에 끝까지 결사 항전하던 삼별초는 진도에서 제주로 건너가 마지막 전쟁을 벌였지만, 진도에 있던 대부분의 군민은 전쟁터의 화살받이로 죽임을 당하거나 몽골로 끌려갔다고 한다.

     

     

     

     

    진도에 세워졌던 또 하나의 고려 정부는 아홉 달 만에 사라졌다.   후유증은 컸다.   몽골군에 맞섰던 사람들은 포로가 되거나 노비 신세로 전락했다.   살기 위해, 슬픔을 가슴에 묻고 가락에 몸을 맡겼다.

    제주도로 건너간 삼별초는 두 해 동안 싸우다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제주에서 살아남은 삼별초군이 오키나와로 건너갔다"라고 몇몇 학자가 주장했다.  오키나와 우라소에성에서 나온 수막새와 "癸酉年 高麗瓦匠造(계유년에 고려의 기와 장인이 만들다)"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를 증거로 내세우고 있다.

    참말이라면,  몽골에 맞섰던 삼별초는 바다 건너 먼 이국땅에 자리 잡았다.   750여 년 전, 그곳에서 새로운 문명 시대를 열었다.   성을 쌓고 국가의 틀을 잡는 데 도움을 주었다.   놀랍고, 반갑고, 자랑스러운 일이다.

     

     

     

     

     

     

     

     

     

     

    삼별초 항쟁 이후 진도는 사실상 버려진 섬이나 마찬가지였다.

    임회, 지산면의 경계 지대에 군마 사육장이 설치되기도 했으나 고려 말기에 왜구의 잦은 침입에 시달리다 1350년엔 아예 진도 모든 주민은 영암으로 삶의 터전을 옮겨야 했다.   공도화를 겪어야 했던 진도에 다시 주민이 살기 시작한 것은 세종 때부터다.   북진과 함께 왜구 격퇴에도 적극적이었던 세종은 진도 남서쪽에 옛 삼별초가 쌓았던 남도석성을 개축해 왜구의 침입을 막을 요충지로 삼았다. 요즘 명칭은 남도진성이다.

     

     

     

     

    삼별초의 대몽항쟁, 삼별초의 난(1270~1271년 진도 몽골과 고려의 연합군에 의해 배중손 사망 함락 후 제주도로 일부가 이전했으나 1273년 완전 소멸)

    삼별초의 진도 왕궁터와 용장사 그리고 왕이었던 온의 묘를 만나며 역사는 흐르듯 지나 가지만 기록자들의 시각에 따라 그 역사적 사실이 후세에 어떻게 기록되어 알려지는지 또한 아주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며 조용히 되뇌어본다

    삼별초의 대몽항쟁, 삼별초의 난 ㅡ.

     

    진도는 고려시대 몽골에 항전하기 위해 강화도에서 내려온 삼별초가 독자적인 국가를 세우고 본거지로 삼은 곳이다.   비록 3년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삼별초는 진도에서 대몽항쟁을 치열하게 했다.

     

     

     

     

    그곳에서 나온 유물들에 대해 좀 더 쉽게 볼 수 있다..

     

     

     

     

     

     

     

     

     

     

     

     

     

    이 시절의 슬픈 역사를 알려주는 장소가 하나 있다.   삼별초 궁녀둠벙이라고 이름 붙여진 곳인데 삼별초가 왕으로 추대한 승화후 온(溫)이 몽골군에게 잡혀 죽임을 당하자, 그를 따르던 궁녀와 부하들이 고갯길을 넘어 도망치다 끝내 몸을 던져 목숨을 끊은 장소다.

    백제가 망할 당시 3천 궁녀가 낙화암에서 몸을 던졌다는 설화와 비슷하다.  예전엔 훨씬 넓었을 둠벙의 수심은 바다와 연결돼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깊다고 한다.   슬픈 이야기가 오랫동안 구전된 탓에 이곳은 불과 20여 년 전까지 사람이 다니지 않았다고 한다.   비가 오는 밤이면 어김없이 여인들의 슬픈 울음소리가 들렸다니, 담력을 시험할 젊은 청춘들 아니면 찾아갈 엄두를 내기 힘든 곳이다.  게다가 둠벙 위로 을씨년스럽게 폐가까지 남아 있어 생각하기에 따라선 등골이 오싹하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사람이 만들고 지어낸 이야기일 뿐이다.   인적이 드물어서인지, 둠벙 인근 사방으로 녹음이 더욱 푸르다고...

     

     

     

     

     

     

     

     

     

    홍보관을 나와 용장사로 향했다.

     

     

     

     

    용장사 입구에서 본 용장사

    사찰내부로 들어가는 길은 일반사찰과 다르게 커다란 돌들이 하나씩 쌓여 성벽처럼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는 돌계단으로 올라가는 길은 도심속 거리와는 조금 다른 풍경이지만 이 또한 진도 용장사만의 멋이다.

     

    용장산성 안내판에 따르면 본래 용장산성 내 행궁의 중심에 부처님을 모신 대웅전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의 용장사는 용장산성 행궁터에서 바로 옆에 있는 경사진 대지 위에 자리하고 있다.

     

    고려 무신정권 때의 장수 배중손(裵仲孫 ?~1271)이 이끌던 삼별초가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여 항쟁을 벌였던 진도 용장산성(龍藏山城, 사적 제126호) 내에 있는 고려시대 사찰 용장사(龍藏寺)의 터이다.   용장산성의 건물 터 초석의 형식 등으로 보아 삼별초가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용장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용장사지 가까이에 근래에 복원한 용장사(한국불교태고종 사찰)가 있는데 용장산성 내에 위치하고 있는 용장사이다.

     

     

     

     

    용장사 도량에 세워진 오층 석탑과 석등, 뒤로 용장사 극락전과 염불전이 보인다.

     

     

     

     

     

     

     

     

     

     

    최근에 지은 범종각

     

     

     

     

    요사채

     

     

     

    극락전 앞에서 보니  아래에는 스님이 계시는 요사채 건물이 있고 또 최근에 지은 종루가 있었다.

     

     

     

     

    용장성과 가까운 부지에 위치한 이곳, 간 김에 둘러보기 좋은 곳이다.

    넓찍한 주변 경관 누군가의 손길로 깔끔하게 정리되고 있는 모습,  조용하게 산책하기에 참 좋았다.

     

     

     

     

     

     

     

    극락전과  염불전 앞을 우리 딸이 가고 있네 ~

     

     

     

     

    극락전

     

     

     

     

    드디어 만난 그분 ~ 이곳 극락전 불단 중앙에 고려시대에 제작된 약사삼존불상인  '용장사 석불좌상(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17호)'이 모셔져 있다.

     

     

     

     

    용장사 석불좌상 안내문

     

     

     

     

    사각형의 대좌(臺座)위에 사각형 광배(光背)로 등에 붙이고 앉아 있는 약사불상이다.

    머리칼은 두건처럼 묘사되었으며, 사각형의 큼직한 얼굴은 짙은 눈썹, 작은 눈,  긴 코,  알맞은 입 등으로 안정되고 투박한 모습이다.   가슴이 빈약하게 처리된 신체는 어깨와 팔이 두드러지게 표현되어 있으며, 하체는 너무 높고 커서 고려 불상의 독특한 비례감각을 보여주고 있다.   오른손을 내리고 왼손을 무릎 위에 올려 약그릇을 들고 있는 두 손과 무릎 위에 올려놓은 두 발의 투박하고 큼직한 표현은 신체 비례감각과 함께 불상의 모습을 무척 친근하게 보이게 한다.   凸형의 옷주름이 빈틈없이 표현된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데, 목깃을 U자모양으로 약간 내리면서 반전시켜 변화를 주고 있다.   대좌에는 연꽃무늬가 소박하게 묘사되어 있고, 광배는 의자의 등처럼 보이는데 도식적인 무늬가 새겨져 있다.

     

     

     

     

    불상 좌우에는 본존불과 비슷한 인상으로, 상체는 벗고 하체에 치마를 입은 신라식 보살상이 서 있으나, 고려 불상 특유의 표현법을 보여주고 있어 이 불상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용장사 석불좌상은 고려 삼별초의 배중손(裵仲孫)장군이 용장성을 쌓을 때 조성한 것으로 전해 오는 삼존불이다.   중앙의 약사여래는 4각 양연문 좌대에 놓여 있으며 어깨너비 27㎝, 얼굴너비 25㎝, 좌불높이 2m로 양편으로는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이 입상으로 있다.

     

    실제의 모습에서 오랜세월 거쳐온 세월의 흔적뿐 아니라 말로 설명할수 없는 특별한 기운이 느껴진다.

     

     

     

     

    극락전 불단 우측벽의 신중탱

     

     

     

    극락전 불단 좌측벽의 지장탱

    극락전의 한 편 벽에는 지장보살탱화가 걸려있어 슬픈 영혼들의 극락왕생을 빌며 향을 사르고 나왔다.

    지장보살은 지옥의 모든 중생들이 지옥의 고통에서 벗어나서 모두가 해탈 성불하는 날 자신도 성불하겠다며 서원한 보살이다.

    용장산성의 전투로 이승을 떠난 모든 영혼들도 그 지장보살의 염원에 따라 이승의 한을 다 내려놓고 극락왕생하길 바라며 지장보살 앞에 머리를 숙여본다.

    나무지장보살 나무지장보살, 나무지장보살 마하살 ~

     

     

     

     

    향 극락전 불단 우측의 칠성탱

     

     

     

     

    산신탱

     

     

     

     

    장엄한 극락전 단청

     

     

     

     

    극락전 문살

     

     

     

     

    극락전의 측면

     

     

     

     

     

     

     

    향 극락전 우측의  염불전 

     

     

     

     

    염불전의 불단

     

     

     

     

     

     

    볼거리는 많지 않지만 자연속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 있으면 이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아무리 살펴봐도 단촐한 사찰, 그럼에도 좋았던 점은 사람들과 부대끼지 않아도 된다는 점으로 조용한 사찰을 찾는다면 바로 여기 진도 용장사이다.

     

     

     

     

    뒤돌아본 용장사

     

     

     

     

    용장사 사찰의 작은 정원을 거닐어 나와 삼벌초의 궁터인 용장산성터로 향했다.  주차장이 제법 넓다.

     

     

     

     

     

     

     

    삼별초 호국 역사 탐방길도 있다.

     

     

     

     

     

     

     

    용장성 안내도

     

     

     

     

    용장성은 지난 2009년과 2010년 2년 동안 발굴 조사가 진행됐는데 20여 채의 건물이 치밀하게 배치됐던 것으로 확인됐다.   현재 성지가 부분적으로 남아 있고 성내의 용장사지와 행궁지가 보존돼 있다.

     

     

     

     

    용장산성(龍藏山城, 사적 제126호) 

     

     

     

     

    2009년~2010년에 진행된 궁궐터 전면 조사를 통해 20여 채 이상의 건물이 치밀하게 배치되었는데, 마치 개경 만월대를 연상시키는 구조여서 계획 하에 궁궐이 조성되었다고 보인다.   현재 성의 대부분은 원형이 사라진 상태이며, 성지가 부분적으로 남아 있고 성내의 용장사지 및 행궁지가 보존되고 있다.

     

     

     

     

     

     

     

     

     

     

    탐방로를 따라 본다...

     

     

     

     

     

     

     

    입구 풀이 무성한 목책 계단을 오르면

     

     

     

     

    동백림 사이로 길이 제법 가파른  계단길이 있다...

     

     

     

     

    13세기 고려시대 대몽항쟁이다. 그리고 대몽항쟁의 무대인 용장성의 터가 진도에 여전히 남아있다. 13세기 초 고려 고종 때부터 몽골의 침략은 본격적으로 거세졌다.   심지어 13세기 중반 원종 때 무신세력을 대표하던 임유무가 죽음을 맞이하면서 삼별초(고려시대 무신정권의 군사기구)는 해산 명령을 받았고, 문신세력이 주장하던 몽골과의 강화를 앞두게 됐다.

    이런 어두운 분위기 속에서 배중손이 중심이 된 삼별초는 끝까지 항전하며 전남 쪽으로 향했다.  왕족인 승화후 온을 왕으로 추대하고, 진도 용장사를 궁궐로 삼았다.   또 몽골에 항복한 고려와 몽골 연합군을 상대로 항쟁하기 위한 거점으로 용장성을 만들었다.   용장성은 궁터를 중심으로 둘레 약 12km의 규모다.   주로 돌로 만든 성으로 이뤄져 있는데,   흙으로 된 토성도 일부 섞여 있다.

     

    아쉽게도 현재 용장성의 모습은 당시의 웅장함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용장성터는 성곽 외부와 새로 쌓은 건물의 돌받침만 쓸쓸히 남아 있다. 그나마 성내의 용장사지 및 행궁터만 일부 복원돼 있다.

     

     

     

     

     

     

     

    비교적 성 둘레길은 잘되어 있다...

     

     

     

     

     

     

     

    이곳에서

     

     

     

     

    아까  초입에 올라온 만큼 계단을 내려선다.

     

     

     

     

    고려시대 몽고와 끝까지 항쟁하기 위해 강화도에서 진도로 이동하여 전투를 이어간 삼별초의 자주 항쟁 정신을 느낄 수 있는 중요한 장소다.

     

     

     

     

    용장성은 고려시대 삼별초가 진도를 근거지로 관군과 몽고군에 항전했던 성이다.   현재 성의 대부분은 원형이 사라진 상태이며, 성지가 부분적으로 남아 있고, 성내의 용장사지 및 행궁지가 보존되고 있다.

    고려 원종 때 몽고군의 침입을 받아 치욕적인 강화조약을 맺고 개경으로 환도하자 이에 반대한 삼별초군은 원종의 육촌인 온(溫)을 왕으로 추대하고 진도로 내려와 항거하는데 고려의 장군 배중손(裵仲孫)이 이끈 삼별초군이 대몽항쟁(1270~1271)의 근거지로 삼은 성이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성의 둘레는38,741척(尺), 높이 5척이라 하였을 뿐, 그 이상의 상황은 밝혀지지 않았다.성의 길이는 군내면의 용장리, 세등리, 고군면의 도평리, 벽파리, 오류리를 잇는 산등성을 따라 총 12.75km이며 높이는 4m 내외이다.

     

     

     

     

     

     

     

     

     

     

    진도의 용장성은 삼별초가 진도에 설치한 대표적인 항몽 시설이다. 산성은 진도 북쪽 해안의 산 능선에 있으며 북쪽 해안에는 진도의 관문인 벽파진이 있는데 울돌목으로 이어지는 조운로의 길목이기도 하다.

    배중손을 지도자로 한 삼별초는 왕족인 승화후 왕온을 새 왕으로 받들고 관부를 구성하고 관리를 임명하여 몽고에게 항복한 고려 조정에 대립, 정권을 세웠다.

    1,000여 척의 배에 재물과 인원 등을 싣고 진도 벽파진에 도착, 용장성에 터를 잡은 후 산성을 개축하고 성안의 용장사를 궁궐로 삼고 각종 건물을 지어 왕을 황제로 칭하였다.

     

     

     

     

    용정송 둘레길 맨 위까지 와서  성타를 밟으며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데  아직 이슬이 많아  신발을 적신다...

     

     

     

     

    해전에 약한 몽골군을 대비한 진도 용장성

    용장성은 고려시대 무신정권의 군사기구였던 삼별초가 왕족인 승화후 온을 왕으로 세우고 몽고에 항복한 고려와 몽고 연합군을 상대로 항쟁의 거점으로 쌓은 도성이다. 왕궁을 감싸고 있는 토성과 외곽의 나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외성은 강화도로 도성을 옮기고 몽고를 상대로 항쟁을 펼치던 1243년(고종 30)에 해전에 약한 몽고군에 대비하기 위해 섬 지역에 처음 산성이 세워지면서 방어용으로 활용되다가 삼별초가 왕을 세우고 진도에 도성을 건설하면서 나성으로 사용되었다.

    내성은 1270년(원종 11) 8월 삼별초가 진도에 들어서기 전에 이미 완성되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내성의 길이는 425m, 높이 1.5~2m이며 부속 시설물로는 건물지 50개소 등의 유구와 기와 · 청자 · 금속류 등 많은 유물이 확인되었다.

    외성 길이는 13Km, 높이 1m 전후, 너비 약 320cm이며, 내부 면적은 8,514,000㎡(258만평)이다.   부속 시설물로는 성문 6개소, 적대 1개소, 치 3개소, 장대, 제사유적 등 많은 유구와 기와 · 청자 · 금속류 등 많은 유물이 확인되었다.

     

     

     

     

    진도 용장성: 몽골에 맞서 싸운 삼별초의 마지막 보루 ~

    진도 용장성은 전라남도 진도군에 위치한 산성으로, 고려시대 몽골의 침략에 맞서 싸운 삼별초의 마지막 거점으로 유명하다.

    1270년부터 1271년까지 약 1년간 삼별초는 용장성에서 몽골군과 싸웠지만 결국 함락되었고, 이후 삼별초는 괴멸되었다.

    용장성은 해발 434m의 용장산 정상에 위치하며, 총 길이는 약 18km에 달한다.   성벽은 석축과 토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곳곳에 성문과 망루가 마련되어 있다.   성 안에는 삼별초의 옛 궁궐터와 우물 등이 남아있다.

     

     

     

     

     

     

     

    엄청난 넓이의 궁터에 계단식 석축을 쌓아 건축한 다양한 모형의 터를 걸어보며 생각했던 것보다 그 규모가 대단했다

    1270~1271년의 짧은 기간에 13km의 용장 산성을 쌓고 이 처럼 웅장한 왕궁을 지었다는 사실에 놀라움과 함께 밀려오는 힘없는 민초들의 힘든 삶의 모습이었다.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성을 쌓고 왕궁을 짓는데 끌려왔을지 그 짧은 기간을 유지하며 사라진 나라를 위해 또 얼마나 많은 죄 없는 민초들이 쓰러져 갔을지 가슴이 아려왔다

    용장성 왕궁터  진도에 온 삼별초가 항몽의 본부로 삼았다.

     

     

     

     

     

     

     

    삼별초 옛 궁궐터로 삼별초가 용장성에서 사용했던 궁궐터이다.   현재는 석축만 남아있지만, 과거 궁궐의 규모를 짐작해볼 수 있다.

    용장성 망루는 성 안 곳곳에 마련된 망루로, 멀리 바다와 진도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여름 날 치고는 시원한 날 용장산성의 행궁 터를 돌아보고, 내려오면서 743년 전 1,272년에 수많은 고려인들의 급박했던 전투를 그려본다.

    그들이 이룩하고자 했던 꿈이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고, 자신들의 목숨까지 바친 슬픈 역사를 되돌아보았다.

     

     

     

     

     

     

     

    몽골군이 쳐들어와 국토가 유린되고 주검이 산처럼 쌓여가던 그 때를 회상한다면 지금은 너무도 극락 같은 세상일 테지만 지금도 우리는 늘 하루하루가 편안하기 보다는 절박함에 살아간다.

    그 때는 몽골군대가 쳐들어 왔지만, 이제는 더 많은 강대국들이 한국 주변에 있고, 또 북에는 우리의 같은 동포 한겨레라 하지만 화합하기 어려운 북한이 있다.

    북한 땅도 한겨레 땅이라 하지만 가 볼 수도 없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언제쯤 우리 한민족은 통일을 이룩하여 같은 형제로 화합하고 주변 강대국들 사이에서 그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살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을지 앞을 짐작할 수 없는 현실 속에 아쉬움만이 남는다.

     

     

     

     

     

     

     

    용장성 성문.  용장성의 정문으로, 웅장하게 다듬어진 돌담이 인상적이다.

    진도 용장성은 몽골 침략에 맞서 싸운 삼별초의 의지와 정신을 느낄 수 있는 곳으로 웅장한 성벽과 아름다운 자연 경관은 방문객들에게 깊은 감동을 선사한다.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방문해볼 만한 곳이다.

     

     

     

     

    용장성 홍보관도 뒤로하고

     

     

     

     

     

     

     

     

    용장성을 나와  다음 여행지  쌍계사와  쌍계사 상수림으로 향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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