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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0년 된 우람하고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는 사찰, 청도 적천사 (경북 청도군 청도읍 원동길 304, 원리 981)사찰여행/경상도 2021. 8. 14. 15:44
850년 된 우람하고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는 사찰, 청도 적천사
2021. 8. 14.
2021. 8. 12. 작년 10월에 울산 슬도와 대왕암공원을 둘러 보고 무려 10개월만에 다시 딸과 모처럼 함께 해보는 경북 청도 여행이다...
서둘러 이른 아침 7:30 포항을 출발해 청도 대운암과 작천사를 보고 읍성 근처에서 통뼈 감자탕 화양점( 청도군 화양읍 합천리 387, 054-371-0630)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청도향교. 석빙고. 청도읍성을 돌아보고 용천사도 본 후 와인터널과 대적사를 돌아보는 바쁜 일정이다.....
오늘 첫 번째 일정으로 청도의 멋진 전망이 있는 절, 대운암에서 한참을 앉아 풍광속에 빠져 있다가 용각산 8부 능선 해발 400m에 위치한 멋진 전망이 있는 절, 대운암에서 산길을 내려서서 용의 꿈틀거리는 등과 같은 산 능선 길 따라 내려가면 용머리에 해당하는 청도읍 내호리 마을로 내려선다...
그리고 청도 두번째 여행지인 850년 된 우람한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는 사찰 청도 적천사 주소를 네비로 찍고 적천사로 향해본다...
적천사를 갈려면 조그만 산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야 한다... 그러다 무심히 바라본 풍경이 너무 아름답다... 잠시 차를 세우고 사진 한 장을 담아봤다...
한참의 산길을 따라가면 적천사에서 길손을 가장 먼저 맞는 것은 사천왕문 앞의 850년 된 우람한 커다란 은행나무 이다...
적천사 바로 앞에 850년 된 은행나무...
녹색의 은행잎이 너무나도 푸르고... 맑은 모습으로 방문객을 맞아준다...
청도 적천사 은행나무(천연 기념물 402호)
적천사 사천왕문 앞의 거대한 은행나무 두 그루 가운데 오른쪽에 있는 큰 나무가 천연 기념물 402호 청도 적천사 은행나무이며 수령은 약 850년으로 추정되고 있다.
나무의 높이는 28m, 가슴 높이 둘레는 11m로 은행이 달리는 암나무이다. 적천사 은행나무는 보조 국사가 1175년(명종 5년)에 적천사를 다시 지은 후 짚고 다니던 은행나무 지팡이를 심은 것이 자라서 이처럼 거목이 되었다고 전해 온다.
은행나무 앞에는 築普照國師手植銀杏樹碣(축보조국사수식은행수갈」이라는 비석이 서 있다.
보조국사가 이 은행나무를 손수 심은 것을 기념하는 비석인데 1694년(숙종 20) 태허 경일스님이 글을 짓고 새긴 비석이 무너지자 1835년(헌종 1)당시 주지 충계를 비롯한 신관, 덕명, 경호, 상옥 등의 노장 스님들이 힘을 모아 다시 건립한 것 이다.
비문의 내용은 보조 국사가 적천사를 중창 할 때 불립문자라는 선종의 뜻에 따라 사적기를 쓰지 않고 이 은행나무를 심어 창건을 나타내려 하였다는 것과 그 뒤 혜철스님이 광주에서 내려와 적천사에 왔다 보조국사가 심은 것을 알아보고 보조국사의 뜻을 기념하여 나무 주위에 흙과 돌로 축대를 둘러 보호하면서 자그마한 기념비석을 세웠던 일 그리고 그 일에 감명 받아 다시 비석을 세운 이야기가 적혀 있다.
적천사에 며칠 머물다 간 인각대사는 그의 시에서 이 은행나무가 곧 보조국사의 유적임을 아래와 같이 노래한다.
隔林遙聽出山鍾 숲 너머 산에서 종소리 멀리 들려 나오니
知有蓮坊在峯 틀림없이 푸른 봉우리에 절이 있겠구나
樹密影遮當戶月 나무 짙게 우거져 문 비추는 달빛 가리고
谷虛聲答打門 골짜기가 비어서 문 두드리는 지팡이 소리가 계곡에 울리네
水鋪白練流全石 물은 흰 명주를 깔아놓은 듯 큰 바위에 흐르고
虹曳靑蘿掛古松 무지개 끌어 들인 양?푸른 넝쿨은 고송에 걸리었네
莫怪者人留數日 스님이여. 늙은 이 며칠 여기에 머무름을 괴이타 마라
當年普照示遺 이미 옛날 보조국사가 그 유적을 보였네
청도군 청도읍 원리 981번지에 자리 잡은 적천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이다.
적천사는 신라 문무왕4년(664년)에 원효대사(元曉大師)가 토굴로 창건하였으며 신라 흥덕왕3년(828년)에 흥덕왕(興德王)의 셋째 아들인 심지왕사(心地王師)가 중창하였다. 1175년 고려 명종5년(1175년)에는 보조국사(普照國師,1158∼1210년)가 오백대중이 상주하는 대가람으로 중건하여 동북쪽에 영산전(靈山殿)을 세우고 오백성중(아리한)을 모시는 한편 오백대중(나한)을 상주케 하고 자련암, 옥련암, 은적암, 목탁암, 운주암 등의 암자를 세워 불교 입문자를 참선 수행케 함으로써 많은 고승대덕이 배출되었으나 임란 때 병화로 소실되고 헌종5년(1664년)에 사원은 다시 중건되었다. 그 후 숙종 20년(1694년)에 태허선사가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은 천왕문과 조계문, 가람 중앙에 남쪽을 향해 자리잡은 대웅전을 중심으로 적묵당, 명부전, 조사전, 영산전, 요사채 등이 옹기종기 앉아 있는 조그만 사찰이다.
보조국사가 적천사를 중창할 때 도적 떼들이 이 곳에 모여 있어 국사가 말하기를 『이 곳에 절을 중창하려 하니 너희들은 이 곳에서 물러가라』하였으나 무리들이 물러가지 않고, 오히려 대항하려 하자 국사는 남산에 올라가 신통력으로 가랑잎에 호(虎)자를 써서 때마침 불어오는 북풍에 날렸더니, 큰 호랑이가 되어 도적들을 몰아내어 이 사원을 중수 할 수 있었다. "... 적천사 안내문
850년된 은행나무와 마주한 맞배지붕형 목조건물 적천사 천왕문
은행나무 바로 앞으로 속가의 현관격인 일주문과 해탈문도 볼 수 없고 곧바로 천왕문이 보인다...
적천사가 임란 이후 새롭게 중건되는 과정에서 지어진 아주 오래된 목조 건물인 천왕문이다...
천왕문 내부에는 1690년(숙종 16)에 만들어진 목조사천왕좌상(경북유형문화재 제153호)이 불법을 수호하고 악귀를 물리치려 사방을 지키며 자리를 잡고 있다. 적천사 사천왕상이 재미있는 것은 사천왕들의 표정이 모두 웃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웃고 있는 사천왕상은 각자 발아래에 악귀들을 짓밟고 있는데, 비열한 듯, 고통스러운 듯 일그러진 악귀들의 표정도 재미있다.
적천사의 사천왕은 나무를 이어서 만든 목조이며 사방을 지키는 천왕들은 날개 같은 천의에 갑옷을 두른 무장의 모습을 한 채 앉아 있는데 높이가 3.4m- 3.8m로 상당히 큰 편에 속한 대단한 거구여서 외관만으로도 보는 이를 압도한다. 1981년 보수 중 복장에서 사리 3과 경전 목판본 80여 매, 다라니경, 장삼, 두루마기 등 의류 23점이 발견되었고 ,함께 발견된 원문에 조성 시기가 1600년(숙종 16)으로 밝혀져 제작 연대도 뚜렷하고 조성 기법도 뛰어난 작품이다. 나름 오래된 흔적이 군데군데 보인다...
천왕문과 마주보고 있는 무차루(無遮樓)는 배룡나무에 애워 싸여있다....
무차루(無遮樓)의 ‘무차(無遮)’는 ‘막힘(遮)이 없다(無는 뜻으로 부처님 세계로 들어오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평등하기에 아무도 막지않는다는 관대함을 이른다는 누각이다.
한데... 임진왜란과 구한말에 소실되어 옛 영화를 잃었지만 1993년에 중창한 누각 무차루(無遮樓)는 중창하면서 사찰 살림이 넉넉치 못했던지... 아래층을 콘크리트로 지어놓아 막힘이 없다는... 무차루(無遮樓)가 시멘트에 갇힌 것 같아서 아쉽다.
누각 오른쪽 아래에 회연당(晦然堂)이라는 현판이 보인다. 회연(晦然)은 삼국유사를 쓴 일연의 자(字)다.
무차루를 지나 돌아보니 화악산적천사(華岳山磧川寺)라 되어 있다.
적천사(磧川寺)라는 사찰이름은... 서덜 적(磧), 내 천(川)을 쓰는 절 이름도 독특하다.
산길에 많이 널려 있는 돌을 "너덜" 이라 하고, 냇가에 많은 돌은 "서덜" 이라고 한다. 절 아래 계곡에 돌이 지천으로 널려 있어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적천사 무차루에서 바라다본 대웅전
隔林遙聽出山鍾 知有蓮坊在翠峰 숲 넘어 산에서 종소리 멀리 들려오니 푸른 봉우리에 절간이 있겠구나.
樹密影遮當戶月 谷虛聲答打門 나무가 빽빽하여 문 비추는 달빛 가리고,골짜기가 비어서 문두드리는 지팡이 소리에 대답하네
水鋪白練流全石 虹曳靑蘿掛古松 물은 흰 깁(비단)을 깔아 갖춘 돌에 흐르고, 무지개는 푸른 깁(비단)을 끌어다 고송에 걸었네.
莫怪老人留數日 當年普照示遺 늙은이 며칠 머물음을 괴이타 마라. 그 옛날 보조(普照國師)가 유적을 보였네.
인각 대사가 적천사를 읊은 시가 ‘무차루’에 걸려 그 서정을 대변하고 있다...
대웅전 앞에서 바라본 무차루
적묵당 옆에서 바라본 무차루
무차루와 원음각과 명부전
무차루를 누하 진입하면 정면에 대웅전, 좌축 뒷편 영산전, 우측 뒷편 산신각, 앞 좌우에 명부전, 적묵당이 자리하고 있어 산지중정 전형의 가람배치기 눈에 들어온다.
천왕문을 지나 몇개의 돌계단을 올라서면 적천사의 온전한 모습이 보인다... 지금은 조그만 사찰이지만... 1300년이나 된 오래된 고찰이라고 한다. 과거에는 500분의 스님들이 수양을 했던 곳이라고 하는데... 지금의 규모로는 상상이 잘 가지 않는다...
대웅전 앞의 적천사 괘불탱 지주
대웅전 앞마당에는 일반인들이 쉽게 보기 어려운 300여년 연륜의 괘불탱의 괘불(관음보살상)을 걸기 위해 돌로 만든 괘불대 지주 한 쌍이 서 있었다. 적천사 쾌불탱과 괘불탱 지주는 보물 제1432호이다....
2개의 기둥을 한 조로 이루는 돌기둥에는 둥글거나 네모난 구멍이 있어 괘불을 꽂는 지지대 역활을 한다. 지주석에는 강희 40년(1701)에 거사 경순 등이 참여하여 만들었음을 알려주는 명문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17세기 말 괘불 및 괘불을 거는 지주의 모습이 이와 같았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중정 괘불대에는 조성시기가 1701년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 적천사 관음괘불탱, 목조 사천왕상과 더불어 동시대에 큰 불사가 있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괘불탱(보물 제1432호)은 주요 의식이 있을 때만 그 모습을 세상에 드러낸다.
세로 12.55m, 가로 5.27m의 삼베바탕에 세로 11.48m, 가로 4.54m의 크기로 채색한 적천사 괘불탱은 숙종 21년(1695년), 상린, 해웅, 지영, 성종, 상명 등의 화원이 참여하여 수륙재(水陸齋)를 위해 제작했다고 한다.
수륙제란 물과 육지에서 헤매는 외로운 영혼과 아귀(餓鬼)를 위로하기 위해 불법을 강설하고 음식을 베푸는 불교의식이다.
사진을 통해 본 적천사 괘불탱은 머리에 보관을 쓰고 오른 어깨로 비켜 올려 연꽃가지를 들고 서 있는 독존도 형식의 그림이다. 다른 인물이나 배경을 전혀 그려 넣지 않은 단순한 구성을 보이고 있다. 보관(寶冠)은 중앙에 5구의 화불(化佛)을 안치하고 그 앞쪽 좌우에 걸쳐 금박 처리한 봉황장식을 두었다. 신체는 머리에 큼직한 관을 쓰고 어깨를 넓게 표현하여 다소 둔중해 보이지만, 타원형을 이루는 얼굴은 눈, 코, 입을 단정하게 그려 넣어 우아함이 느껴진다.
잠시 눈을 감고 괘불탱이 걸린 하늘, 수륙재를 열고 있는 야외법당을 상상해 본다. 태징잽이, 바래잡이가 찬불가를 부르고 법악기를 연주한다. 목어와 운판과 법고 소리의 파문이 고승대덕의 법문처럼 허공에 스민다. 배고픈 귀신들이 모여들어 차려놓은 음식을 배불리 먹느라 왁자지껄하다. 물과 육지에서 헤매는 외로운 영혼들이여, 훨훨, 훨훨 떠나가거라, 바라춤과 나비춤이 떠도는 영혼들의 어깨를 다독인다. 오색 연등 행렬이 서방정토로 가는 길을 환하게 밝혀주고 있다. 그래서일까? 하늘에 펄럭이는 괘불탱 속 부처님 모습이 편안해 보인다.
대웅전(경북 문화재 자료 제321호)
일제 때 대웅전이 화재로 소실되자 조선 후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인근 옥련암의 대웅전을 뜯어와 복원한 것이 지금의 대웅전이라 한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다포 맞배집의 특성을 잘 간직하고 있는 건물로 막돌로 쌓은 기단 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상부에 배흘림의 원주를 세웠다. 칸살의 구성은 정면과 측면 모두 3칸이고 정면 어간(御間)은 4분합문, 양 협칸은 3분합문으로 구성한 빗살무늬의 들어열개 문이다. 빗창살 문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多包) 양식으로 꾸몄다. 건립연대는 조선시대 후기로 보여 지지만, 조선시대 초기의 수법도 부분적으로 볼 수 있다.
적천사 대웅전 안에는 삼존불로 석가여래 좌상과 협시불로 아미타여래좌상 약사여래 좌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모두 17세기의 작품이다.
석가모니불은 왼손은 결과부좌한 발 위에 놓고 오른손은 무릎 위에 놓아 아래를 가리켜서 마귀와 같은 번뇌를 항복시킨다는 뜻의 항마촉지인의 수인을 하시고 양쪽 협시불은 오른손을 어깨 높이로 들어 손바닥을 펴서 밖으로 내보이는 모습이 두려움을 없애주고 왼손은 자연스럽게 내려뜨려 손바닥을 위로 가게 하여 원하는 바를 들어줌을 상징하는 시무외여원인의 수인을 하고 수미좌위에 앉아 계신다.
삼존 불 뒤 후불탱화는 1896년 조성된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이다.
탱화를 조성하여 예배드리는 것은 육성취(六成就:信.聞.時.主.處.衆)가 합하여 불법이 성립하므로 설법을 들으려 할 때는 언제나 석가모니부처님이 영산회상에 12,000의 비구와 보살 등의 구도자에게 설법한다는 뜻을 표현한 이곳 탱화는 예전의 소속암자인 옥련암 탱화를 봉안하고 있다.
주불인 석가모니불은 항마촉지인을 하시고, 협시불과 8대 보살 10대 제자와 사천왕이 그려진 후불탱화로 사진으로 실사한 것으로 도난을 우려해 진본은 동화사 성보 박물관에 보관 중이고 현재는 사진 본이 걸려 있다.
향 불단 좌측 벽에는 최근 조성한 신중탱화가 있다...
대웅전의 소종
대웅전 하단벽의 내부 벽화
공포는 내 . 외 3출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칸에 3구씩의 포가 배치되어 있다. 가구는 측면을 2고주 현상으로 평방 위에 기둥을 덧대어 올리고 내부는 불벽을 세우기 위한 내 고주(高柱)를 측면의 뒤쪽 고주 열 보다 조금 뒤로 물려 세우고 이 내 고주 위에 대량을 올리고 퇴량을 걸었다. 내 고주 뒤에 가재모양의 우미량 부재를 꽂아 배면기둥 상부 평방에 걸치게 하여 보강을 한 것은 특이한 부분이다.
대웅전 상단벽의 내부 벽화
우물 정(井) 천정과 고운 단청
적천사는 텅 비어서 적막했고, 적막해서 고요했고, 고요해서 청정했다.
적천사는 적막한 절이다. 평일이라고는 하지만 온종일 절집에 들린 속인이라고는 포항에서 풍문을 듣고 찾아온 우리 딸과 나, 두 명의 여인이 전부다. 적천사는 인적이 드물어서 오히려 고맙고 편안한 절집이다.
대웅전 측벽 상단의 외부 벽화
대웅전 측벽 하단의 외부벽화 심우도
향 대웅전 좌측의 영산전
영산전 내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좌우에 갈라보살(羯羅菩薩)과 미륵보살을 협시(脇侍)로 봉안하고 16나한을 모셨다...
대웅전 아래로 명부전이 자리한다...
법당에는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좌우에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을 협시(脇侍)로 봉안하고 있다. 그리고 그 좌우에 명부시왕상을 안치하며, 시왕상 앞에는 시봉을 드는 동자상 10구를 안치한다. 이 밖에도 판관(判官) 2구, 녹사(錄事) 2구, 문 입구에 장군(將軍) 2구 등 모두 29개의 존상(尊像)을 갖추게 된다.
이들 중 주존불인 지장보살은 불교의 구원의 이상을 상징하는 자비로운 보살로 모든 인간이 구원을 받을 때까지 자신은 부처가 되는 것을 미루겠다는 대원을 세웠고, 천상에서 지옥에 이르는 육도(六道)의 중생을 낱낱이 교화시켜 성불하도록 하는 역할을 맡았기 때문에, 명부전은 조상의 천도를 위한 근본 도량으로 널리 이용되고 있다.
차례로 멍부전.영산전 그리고 대웅전
원음각 이름을 단 범종각에는 고통 받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법고와 범종, 목어, 운판이 있다.
대웅전과 요사로 사용중인 적묵당 사이의 수조, 아주 옛날 자갈밭 사이에서 적천(磧川)이 솟았다는 샘터인가 보다.....
대웅전 아래 명부전과 마주한 적묵당은
종무소와 옆방에는 차방을 겸하고 있다.
적묵당에는 다기와 차. 찻물을 늘 한자리에 놓아두고 아무나 와서 차를 마시라고 한다.
후면에서 본 적묵당으로 명부전과 적묵당 그리고 조사전이다...
적묵당 뒷쪽의 요사
적묵당과 조사전 그리고 적묵당 뒷쪽의 요사
조사전 뒤로 산신각이 보인다... 조사전은 내부 불사 중이었다...
뒤에서 본 조사전과 적묵당
차례로 조사전과 적묵당. 수조. 무차루와 대웅전
조사전 뒤로는 한 지붕 아래 산령각과 독성각 이름을 함께 단 전각이 있다...
한 지붕 아래 산령각과 독성각 이름을 함께 단 전각에는 삼성을 함께 모셨는데 동쪽 벽에는 칠성탱을
북쪽벽에는 산신탱과 산신상 그리고 독성탱을 모셨다...
측면의 산령각과 후면의 산령각이다...
산령각 옆으로 수국이 이쁘다...
산령각 옆에는 공양간이....
공양간 앞에서 바라본 은행나무 ~
명부전과 원음각을 지나오면 보이는 소대
원음각 앞의 전각은 ?
명부전 뒷쪽 아름드리 소나무가 버티고 있고 적천사 주변에는 아름드리 노송들이 많다. 키가큰 노송과 앉은뱅이 노송의 묘한 앙상블(ensemble)이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산책삼아 길이 있어 길을 따라 간다.
절 왼편으로 난 오솔길을 따르면 오솔길 입구에서 왼편으로 텅빈 암자 터들이 드문드문 보인다. 융성했던 시절의 절집규모가 설핏 머릿속에 그려진다. 옛날에는 이 일대에 암자가 여럿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도솔암만 남아 있다.
건국기념 오층석탑.
고개에서 1분정도 오솔길을 따라 걷다보니 왼편 숲속 위로 1947년 광복을 기뻐하며 건립한 오층의 건국 기원탑이 조금은 낯선 모습으로 서 있다.
광복을 경축하는 기념비가 독립기념관이 아닌 사찰에 새워져 있다면? 경북 청도 원리라는 마을에 위치한 적천사에 가면 광복을 주제로 한 건국기원탑비와 오층석탑이 있다. 이 탑과 탑비는 당시 1947년 주지 김동명 스님의 발기로 지역 주민들과 함께 자발적으로 모은 불사금으로 일제강점기로 부터 벗어난 조국의 광복을 경축하고 국난 극복을 기원하기 위하여 건립 1947년 2월에 세운 기념비적인 성보라 하는데... 장소가... 좀 생뚱맞다. 1945년 8월15일, 꿈에 그리던 해방을 맞은 사람들은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1947년 청도 적천사에서도 광복을 기뻐하고 나라의 밝은 미래를 염원하는 마음을 담아 탑과 기념비를 만든 것이다.
오층석탑 좌우의 건국기원탑비 모습이다...
건국기원탑비는 2기로 이뤄져 있다.
한 쪽 탑에는 탑을 세울 당시 보시금을 낸 수백 여명의 이름이 질서 정연하게 새겨져 있다. 보시를 많이 낸 순으로 출신지와 함께 기록하고 있어 이채롭다.
다른 한쪽에는 탑의 조성배경과 시기 등을 새긴 ‘적천사 건국기원탑 조성비명병서(磧川寺 建國祈願塔 造成碑銘幷序)’라는 명문이 있다.
문화재 전문가들은 탑과 관련된 기록물에 ‘설계(設計)’라는 근대적 용어가 등장한다는 점에도 주목했다. 근대 건축기술이 도입됨에 따라 시대적 흐름이 반영된 새로운 현상이라는 것이다.
이전까지는 절과 불상을 만드는데 경비를 후원했던 화주(化主)나 총책임자 등만 기록했다. 탑을 제작한 사람을 가리켜 ‘설계’라고 한 것은 근대적인 개념이 탑에 녹아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문가들은 이 탑과 탑비가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오는 시기의 석탑연구에 중요한 자료적 가치가 있다고 강조했다.
오층석탑 기단부 상층 기단에 새겨진 초화무늬
청도 적천사의 건국기원탑비와 오층석탑은 해방의 기쁨을 새로운 시대의 양식으로 보여주고 있다.
높이 851cm의 오층석탑은 전통양식을 따르면서도 근현대 양식이 가미된 성보다.
기단부의 경우 측면에 연꽃과 초화(草花)무늬를 각각 돋을새김 했다. 이 무늬가 무궁화라는 의견도 있는데, 중요한 점은 기단부에 이런 무늬를 넣은 사례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이전 시대에는 볼 수 없는 적천사 탑만의 특징이다. 해방 직후 만들어진 탑이어서 왜색의 영향을 받았다는 설도 있었지만 이는 명백하게 잘못된 의견이다.
상륜부는 불국사 다보탑과 비슷해 전통양식을 모방하고 있다.
석탑은 2단의 기단부, 5층 탑신부, 상륜부로 구성돼 있으며 전체적으로 길쭉한 느낌을 준다.
박경식 단국대 교수는 “오층석탑의 경우 중국이나 일본양식을 갖다 쓰지 않고 전통을 지키려고 애쓴 흔적이 보여 귀감이 된다”며 “해방 이후 조성된 근현대 문화유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건국기념 오층석탑과 건국기원탑비 앞으로 옛 백련암 자리 풀숲에 위치한 부도밭에는 종 모양의 고승의 부도 8기가 다정한 모습으로 모여 있다.
여름철에 들어선 산자락은 푸르름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다시 산책길 같은 오솔길을 내려와 적천사 원음각쪽으로 향한다...
적천사가 저만큼 보인다...
다시 적천사 마당으로 돌아와서...
다시금 작천사를 한번더 둘러보고
무차루 누각 아래를 지난다....
조그만 산사의 모습.... 상쾌한 여름날과 참 잘 어울리는 모습이다... 파란 하늘과 진한 녹색의 나뭇잎은 어떤 모습으로라도 참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 낸다...
적천사의 첫 문인 사천문을 나온다...
오백 도적떼와 지눌의 신통력과 원효의 토굴이 얼비치는 적천사, 800년 된 은행나무 아래서 오래 머문다.
사랑하는 당신에게, 아귀다툼의 세상에게,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근본으로 돌아가라. 마음이 곧 부처이니 그대 마음속을 들여다보라’ 던 보조국사 지눌의 청정한 가르침을 건네주고 싶었다.
우리는 무엇 하러 이 지구별에 왔는가? 걸인처럼 구걸하러 온 것은 아닐 것이다. 강도처럼 빼앗으러 온 것도 아닐 것이다.
침략자처럼 지배하러 온 것도 아닐 것이다. 무사처럼 싸우러 온 것도 아닐 것이다. 망나니처럼 망치러 온 것도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 하러 이 땅에 온 것일까?
반야심경은 이 땅에서 얻을 것이 없다고 귀띔해준다. 그렇다면 얻을 것이 없다는 것을 얻으러 이 땅에 온 것일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여름에 들어선 길을 다시 내려온다. 적당한 곳 아래에 주차해 두고 걸어 올라왔어도 좋았겠다 싶은 길이다. 모든 탐.진.치를 버리고 갈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바래본다.
적천사에서 내려가면 조그만 산길을 따라 한참을 내려가야 한다... 그러다 무심히 바라본 풍경이 너무 아름답다...
850년 된 우람한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는 사찰 청도 적천사에서 고운 산길을 내려와 청도 세번째 여행지인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07호 청도 향교 주소를 네비로 찍고 청도 향교적로 향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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