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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축산이 병풍 친 통도사 산내암자 세번째, 극락암사찰여행/경상도 2021. 2. 12. 22:09
영축산이 병풍 친 통도사 산내암자 세번째, 극락암
2021. 2. 12.
2021. 2. 8. 나홀로 경남 양산시 통도사 암자순례로 통도사 산내암자 17암자를 두 번에 나누어 순례하기로 하고 이번에는 11암자를 순례한 부처님 법향 가득한 하루였다...
통도사의 산내 암자는 현재 17개의 암자가 있는데, 통도사를 중심으로 서북산 쪽과 남산 쪽 그리고 산문 밖으로 나뉘어 있다. 이 중 서북산 쪽 암자는 9개로 백운암. 비로암. 극락암. 반야암. 자장암. 금수암. 서축암. 안양암. 수도암이고 남산 쪽 암자는 보타암.취운암. 서운암. 사명암. 옥련암. 백련암 등 6개 암자가 있으며 산문밖 암자로는 관음암과 축서암 2개로 통도사 산내암자는 모두 17개 암자이다...
영축산 자락 715m에 위치한 백운암을 제외하고는 모두 도로가 잘 나 있고 암자마다 주차장이 딸려있어 차로 입구까지 쉽게 닿을 수 있다.
통도사는 수시로 와보는 사찰이지만 늘 통도사에 속한 암자는 몇 군데만 다녀오곤 했는데 이번에는 11암자 중 서북산 쪽 암자로 백운암. 비로암. 극락암. 반야암. 자장암. 금수암. 서축암. 안양암. 수도암 등 9개 암자와 내려오는 길 남산쪽 통도사 근처의 암자 보타암과 취운암 2개 암자 까지 11개를 보기로 하고
양산 통도사에서 한참을 꼬불 꼬불길을 올라 와서야 만나게 되는 청정 숲 속의 작은 암자 비로암을 나와 통도사 암자 세 번째로 영축산이 병풍 친 극락암 으로 향해본다...
한국의 정원 처럼 아름답게 꾸며 놓은 사찰 비로암을 나와
비로암에서 약 500m 떨어진 곳에 위치한 극락암은 비로암을 나와 300m쯤에 비로암 삼거리 갈림길에서 직진하여 200m 내려가면 통도사 세번째 산내암자 극락암쪽으로 내려간다....
비로암과 백운암 갈림길에서 극락암 쪽으로 200m 내려오면 소나무 사이로 극락암이 보인다.
비로암을 지나 극락암에 이르는 길은 500m로 짧다. 극락암 직전 길 양쪽에 나무껍질은 회색으로 곱다...
극락암 직전 길 양쪽에 근육처럼 울퉁불퉁한 허리 굵은 서어나무들이 사열하고 있다. 숲은 오랜 시간에 걸쳐 서서히 변화해가는 천이과정(遷移過程)을 거친다. 숲의 모습이 안정된 마지막 단계 대표적인 나무인 서어나무가 자생하는 지역은 산림이 최소 200년 이상 된 숲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재목으로 쓸모없어 서있는 나무고, 산불 때 기름 붓듯 타는 나무이다.
비로암에서 내려와 극락암 갈림길에 도착한다.
극락암은 주차 공간이 넓찍하니 좋다...
영축산이 병풍 친 극락암 전경이다...
극락암 입구의 풍경으로 홍교가 유명하고 암자 뒤의 영취산 자태가 너무도 도도한 극락암이다.
통도사 극락암은 우리나라 3대 명당의 하나로 알려져 있으며, 진입로는 아람드리 소나무가 울창한 명물 산책길이며, 솔바람 소리, 대나무 흔들리는 소리를 만끽할 수 있다.
극락암은 인기가 많은 암자다.
검소한 삶을 사신 고(故) 경봉 스님의 거처였던 까닭도 있겠지만 앉은 자리가 기막히다. 성큼 다가온 영축산이 극락암을 보듬고 있다. 산 기운이 여기로 몰릴 것 같다. 주차장 마당에서 본 극락암은 삼색 울타리에 싸여 있었다. 연초록 대밭이 한 겹, 진초록 적송 군락이 두 겹, 연갈색 영축산이 세 겹째였다. 이 정도면 명당이 아닐는지?
극락암(極樂庵)은 경남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영축산에 있는 절로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인 통도사(通度寺)의 부속암자이다.
통도사에서 서북쪽으로 1.5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극락암은 근현대의 고승인 경봉스님이 주석하셨던 곳으로 유명하다. 고려 충혜왕 복위 5년(1344)에 창건되었다고 전하며 창건주는 알 수 없다. 그 뒤 영조 34년 (1758)지홍대사가 중건하였고 1968년 이후 가람 전체를 경봉스님이 중건 중수하였다.
극락선원(極樂禪院)은 많은 수행인들을 배출하였다. 1953년 11월 대선사 경봉(鏡峰)이 조실(祖室)로 추대되자 많은 수행승들이 모여들었다. 선원의 증축이 불가피해지자 1968년 경봉은 가람 전체를 중건, 중수하여 9동 104칸의 선원으로 만들었다. 1973년부터는 신도를 대상으로 매월 첫 일요일에 정기법회를 개설하였는데, 언제나 1,000명 이상이 참여하였다.
극락암은 한암 ,월하, 벽안 ,보안, 혜암스님 비롯하여 수덕사 전 방장 원담스님, 은해사 전 조실 일타스님, 해인사 원로 도견스님, 화엄사 전 주지 도광스님 등 제방의 조실스님들이 모두 이곳에서 정진하는 등 한강 이남의 제일가는 호국선원이라 할 수 있다.
극락선원(極樂禪院)이 있어 수행승들이 끊이지 않아 한창때는 선원이 9동 104칸이나 됐다고 한다.
선방인 호국선원 앞에는 영월루(暎月樓)가 있고 연수당((延壽堂). 수세전(壽世殿). 독성각(獨聖閣)과 함께 33조사의 영정을 봉안한 조사당이 있다. 경봉스님의 거처였던 아담한 삼소굴(三笑窟)과 함께 여시문 등이 남아 있고 암자로서 매우 큰 규모이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극락암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는 법당(法堂)을 중심으로 연수당(延壽堂)ㆍ정수보각(正受寶閣)ㆍ조사각(祖師閣)ㆍ수세전(壽世殿)ㆍ영월루(映月樓)ㆍ삼소굴(三笑窟)ㆍ여시문(如是門)과 요사채 4동 등이 있다.
극락암 입구에 있는 벗나무 노거수 아래로 돌로 만든 탁자와 나무의자가 정겹고 극락영지 위로 홍교가 그리고 그 앞으로는 영월루. 정수모삭등이 차례로 보인다...
극락영지와 홍교, 영축산 봉우리가 비친다는 '극락영지' 연못과 이를 가로 지른 '홍교'를 보고 있노라면 어지럽고 불온한 생각들이 달아난다.
노거수 옆에는 작은 연못이 자리하고 있다. 연못의 이름은 영지이고 반월형의 계단은 홍교라고 한다.
암자 입구의 극락영지는 영축산의 봉우리가 비추는 연못으로 유명하며, 가로질러 놓은 홍교와의 조화가 아릅답다.
극락영지(極樂影池)는 영축산의 봉우리가 비치는 조그마한 연못이 있는데 유명하며, 연못을 가로질러 놓여있는 홍교(虹橋)와의 조화가 그림처럼 아름답다. 통도 8경 중 하나. 홍교는 속세에서 극락으로 가는 다리라고 한다. 다리를 걷는 것만으로도 속세의 죄가 씻어지는 느낌이다.
2018 새로이 증수한 '달빛이 비치는 누각'이라는 뜻의 영월루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형 누각 건물로 극락영지에서 보면 영월루 이고 이곳에서 보면 2층으로 보이는데 법당마당에서 보면 설법전으로 1층 처럼 보인다...
'영월루'와 '정법안장' 이라는 현판 글씨가 나라히 있다.
나란히 달린 '영월루' 현판은 석재 서병호의 글씨이고 '정법안장' 은 청남 오제봉의 글씨이다...
영월루 주련은 경봉스님의 선시와 글씨이다...
영월루는 법회나 대중의 집회장소로 사용되의 불교의 가르침을 받드는 장소가 되는 한편 자연과 더불어 풍류를 즐기는 여유로움과 자유의 공간이다.
영월루는 법당마당에서 보면 설법전으로 1층 처럼 보인다... 설법전 현판은 경봉스님의 글씨이고 주련은 경봉스님의 선게이다...
영월루 앞의 수각
극락암에는 오래된 노거수들이 엄청 많다... 봄날 벗나무 노거수가 피워낼 벗꽃을 상상해 본다...
영월루 좌측의 풍경으로 여여문 뒤로 정수보각과 요사 그리고 보수중인 수세전이 보이고 그 앞으로는 역시 오래된 동백과 향나무가 극락암의 세월을 말해준다...
극락암 뒤를 감싸고 있는 영취산이 극락암을 보듬고 있다.....
여여문(如如門)문으로 올라 본다.
여여문(如如門)은 수행승의 문이다. 여여부동(如如不動)하라! 한결같이 변함없이 깨달음에 정진하는 자의 문이다. 편액은 문의 앞뒤로 하나씩 두 개가 걸려있다...
여여문(如如門) 편액은 경봉스님이 쓴 글씨이다.
여여문(如如門)문 올라서면 바로 만나는 정수보각
요사 정수보각
정수보각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세월의 흔적이 건물의 나무에 배어있다... 과거는 선원이었지만 조사각에 그 역할을 넘긴 후에는 요사체 역할을 하고 있다...
정수보각 마당의 새월을 말해주는 향나무와 동백 그리고 배룡나무
극락암 법당의 풍경이다.
무량수각은 서방 극락세계에 머물고 계시는 아미타부처님을 모신 곳이다. '무량수'란 '헤아릴 수 없이 오랜 수명인 극락' 을 의미한다.
무량수각은 고종 30년(1893) 중건하였다. 현 법당은 1982년 신도회장 우성호와 경상남도의 후원으로 중창한 맞배지붕 형식의 정면 7칸, 측면5칸 건물이다.
법당에는 앞쪽에 '극락암'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고 극락암 현판 뒤로 '무량수각' 현판이 보인다. 무량수각의 중앙의 ‘극락암’ 현판은 청남 오제봉(1908~1991)님의 글씨이다...
'무량수각' 현판은 추사 김정희 선생 글씨이다.
향 무량수각 우측의 한켠에 사무를 보는 종무소가 함께 있다.
극락암 가경 이십삼년 신중탱(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385호)
이 불화는 1818년 통도사 극락암의 신중탱으로 대자재천을 비롯하여 모두 18위의 천인이 묘사되어 있다.
화면의 상단 중앙에는 삼목팔비(三目八臂)의 대자재천을 중심으로 좌우에 범천ㆍ제석천 등 3위가 원형 두광을 갖추고 합장한 모습으로 배치되어 있다. 대자재천과 범천ㆍ제석천의 가장자리에 산개(傘蓋)를 든 동자상 1위, 당번을 든 동녀 2위가 그려져 있으며, 그 아래쪽 화면 가장자리에는 일궁ㆍ월궁천자가 시립하고 있다.
그리고 화면 하단 향좌측에는 주악천녀 4위와 합장형의 천녀상 1위를 배치하고, 반대쪽 향우측에는 위태천과 검을 쥔 신장상 2위, 사갈라용왕과 합장인물상들을 구름으로 구획지워 앞의 그룹들과 구분하고 있다.이 신중탱은 화기에 의해 가경(嘉慶)23년(1818)에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도상 내용이 인물의 위치가 반대로 되어 있는 점만 다를 뿐, 경북 은해사 기기암에 봉안된 신중탱(1771년)과 거의 흡사하여, 동일계 초본을 사용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무량수각의 오른편 마루 끝에는 신중단에 신중탱화가 모셔져 있다. 법당이 아니 바깥 마루에 신중단이 모셔져 있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은 아닌 듯하다.
법당 상단엔 아미타삼존불과 후불탱화를 모셨다.
극락암 도광원년 아미타 후불탱(梁山 通度寺 極樂庵 道光元年 阿彌陀後佛幀) - 경상남도의 문화재자료 제384호
이 불화는 1821년 통도사 극락암 무량수각에 봉안된 아미타 후불탱으로, 주색 바탕의 비단에 백색 선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화면 중앙의 아미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6대보살과 범천ㆍ제석천ㆍ사천왕ㆍ아난ㆍ가섭존자를, 화면 상단부에는 용왕ㆍ용녀ㆍ팔금강ㆍ4위의 신중상 증을 대칭적으로 배치한 군집구도이다.
원형의 두광과 신광을 갖춘 아미타여래는 중품 하생인을 취하고, 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모습으로 넓은 어깨와 당당한 가슴, 비교적 넓은 무릎너비로 안정적인 신체비율을 보인다.
6보살상의 좌우측으로 비파를 들고 있는 동방 지국천왕과 장검을 들고 있는 남방 증장천왕, 용과 여의보주를 쥔 서방 광목천왕, 보탑과 창을 든 북방 다문천왕이 갑옷과 천의를 입고 힘찬 기세로 서 있다.
서방 광목천왕의 수염은 담먹을 전체적으로 바르고 세필로 굵고 가는 먹선을 여러 차례 교차로 그은 후, 그 위에 백색선을 그었다. 남방 증장천왕의 수염은 녹청을 두껍게 바르고 먹선을 그었으며, 북방은 백색과 군청을 두텁게 바르고 그 위에 먹선으로 표현하였다. 다문천왕의 수염화기를 통해 도광원년(道光元年)(1821)에 조성하여 극락암에 봉안한 작품으로, 화원 계의(戒誼)·관보(琯甫)를 비롯하여 수명이 관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향 불단 우측의 양산 통도사 극락암 석조관음보살좌상(梁山 通度寺 極樂庵 石造觀音菩薩坐像) -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383호
통도사 극락암 무량수전에 안치되어 있는 이 석조관음보살상은 조선 후기 불상으로 헌종1년 통도사 옥련암에서 제작되어 1885년9고종 22) 개금하였다.
이 석조관음보살상은 양손을 모아 복전(腹前)에 두고 왼손바닥에는 현재 정병이 놓여 있다.
신체에 비해 두부가 매우 큰 반면 어깨 폭은 좁다. 머리에 착용한 보관은 상단부가 팔엽형의 곡선을 이루며, 보관 전면과 측면에는 당초문이 장식되어 있다. 정부에는 보계가 솟아올라 있으며, 보계의 아래 부분에는 금색 띠를 둘러 마무리를 하였으며, 귀 볼을 거쳐 흘러내린 보발은 양쪽 어깨 위에서 둥근 원을 이루며 세 가닥으로 흘러내리고 있다.
발제 선을 따라 보관 아래에 노출된 머리카락은 갈래를 나눠 구분하고 머릿결은 마치 빗으로 빗은 듯 음각 선으로 나타내었으나, 그 간격이 균일하지 못하다.
고개를 아래로 약간 숙인 얼굴은 길이에 비해 폭이 넓은 방형(面長: 面幅=8.3:10.9cm)으로, 이마는 편평하고 넓게 처리하였고, 작고 가는 눈은 수평 상으로 얕게 새겼으며, 낮은 코는 콧볼 좌우를 얕게 선각하였으나, 콧구멍은 별도로 표현하지 않았다.
입술 역시 얕게 새겼는데, 윗입술을 아랫입술보다 약간 두껍게 처리하였으며, 양쪽 끝이 살짝 올라가면서 약간 패여 미소를 머금은 듯하다. 무릎 위에 둔 양손은 오른손 위에 왼손을 겹친 상태로, 왼손 위에 작은 정병을 받치고 있다.
착의는 양어깨 위로 폭이 좁은 숄 형태의 천의를 걸쳤는데 배면은 완만한 U자 상의 이단(二段)으로 주름 잡힌 상태이다. 양쪽 겨드랑이 아래로 흘러내린 천의 자락은 팔꿈치 아래로 동그랗게 원을 그리고 다시 팔목 위를 거쳐 아래로 흘러내렸으며, 양쪽 어깨에 드리워진 천의의 끝자락은 살짝 외반된 상태이다. 팔목에 두른 천의 두께는 2cm 이상으로 꽤 두껍게 처리하였는데 조선후기 석조 재질에 보이는 현상이기도 하다.
가슴에는 꽃잎처럼 주름 잡힌 승각기가 드러나 있다. 하반신을 감싼 군의는 양쪽 발 좌우로 2조의 의습선이 균일한 간격을 이루며 새겨져 있으나, 자연스럽지 못하고 형식적으로 딱딱하게 처리된 상태이다.
보살상의 손발은 매우 작고 뭉퉁하게, 손톱은 얕게 음각하여 처리하였는데, 이 또한 조선후기 석조상에서 보이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향 아미타삼존불 좌측 벽면으로는 영가단과 경봉스님의 존영도 모셔졌다.
경봉 정석(鏡峰靖錫, 1892~1982)스님은 우리나라 근현대의 불교계를 대표하는 큰 스승이었다. 통도사 극락암에서 91세 입적하실때 까지 수행 정진하시면서 불교의 대중화를 위해 헌신하셨다.
무량수각 마루에 걸린 ‘호국선원’은 경봉스님의 글씨이다.
극락암 호국선원은 금강경의 진리는 ‘어느 때 부처님깨서 사위국기수급고독원에서 큰 비구 천이백오십인과 함께 계셨다는 첫 구절에 모두 다 들어있다.’라고 설파했던 경봉선사가 주석했던 곳이다.
경봉스님은 한시와 묵필에도 뛰어 났으며 선지식으로는 드물게도 70여년 동안 쓴 일기를 남기기도 했고, 지금 흔히 쓰는 해우소(解憂所)라는 말을 지었다.
아름다운 무량수각의 긴 회랑 왼편 마루 끝에는 청동반자가 있다.
극락암 청동반자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86호)
반자(쇠북)는 ‘사찰사보(寺刹四寶)’로 알려진 범종, 법고, 운판, 목어와 함께 대표적인 의식용 법구인데 금고(金鼓)라고 불리기도 한다.
범종이 주로 예불이나 법회 때 사용된 것에 비해 반자는 공양 시간을 알리는 등 보다 단순한 용도로 사용되었다.
통도사의 청동반자는 현재 극락암의 무량수전에 있다.
이 반자는 직경이 85.5~85.8cm로서 대형 반자에 속한다.
측면에는 반자를 걸거나 고정하는데 사용하는 반원형 고리가 두 개 있다. 고리 사이에는 원형의 돌기가 2조씩 짝을 이루어 측면을 돌아가며 장식하고 있다. 돌기는 총 44개이며 원형 돌기 안에는 범자문이 있다. 반자 후면에는 지름 65cm의 구멍이 뚫려있다.
청동반자 중앙에는 원을 중심으로 태극문양이 돋을새김 된 당좌가 있다. 태극문을 중심으로 양 측면에는 직사각형의 구역을 나누어 각각 발원문을 기록하였다. 그 내용은 향 우측의 것이 “대황제폐하만만세(大皇帝陛下萬萬歲)”, “순비저하수제년(淳妣邸下壽齊年)”, “영친왕저하수제년(英親王邸下壽齊年)”이고, 향 좌측은 “황태자전하천천세(皇太子殿下千千歲)”, “황태자비전하수제년(皇太子妣殿下壽齊年)”이다.
명문의 내용으로 보아 대한제국 시기 황실의 안녕과 수복을 기원하기 위해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무량수각 주련은 북한의 사찰인 금강산 마하연 선원에 있었던 8언 절구로 경봉스님의 사형인 구하 천보(1872~1965)스님의 글씨이다.
건물 외벽에는 본성을 찾는 것을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하여 그린 '심우도'와 사군자, 연꽃, 매화 등의 그림이 있다.
수세전은 지금 해체보수 공사 중이었다...
해체 보수 전의 수세전 모습이다...
수세전은 다른 사찰의 삼성각 또는 칠성각에 해당하는데 ‘수세’는 ‘수명을 연장한다’는 뜻도 있다고 한다.
양산 통도사 극락암 칠성탱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36호
통도사의 산내암자인 극락암에 봉안되어 있는 칠성탱화로, 9폭이 1조를 이룬 불화이다. 화기(畵記)에 자세한 내용은 없고, 다만 왕실의 안녕과 수명장수를 축원하는 글만 있다. 이는 어전에서 그림을 그리게 되어 감히 작자의 낙관을 찍을 수 없었던 때문으로 보인다. 조선 말에서 대한제국 시기에 제작된 작품이다.
원광제와 삼소굴 앞에서 바라본 극락암 전경이다...
무량수각 옆에는 원광제와 삼소굴이 있다. 원광제와 삼소굴이 자리잡은 곳의 풍경이다.
원광제는 스님의 생활공간이다. 원광제의 '원광(圓光)'은 경봉스님의 호이다. 원광제는 경봉스님의 유물을 보관하고 극락선원장 명정스님의 거처로 사용하는 곳이다.
원광제 앞에는 남천이 붉은 열매를 맺고
홍매화가 꽃을 피울 준비를 하고 있다.
원광제(圓光濟) 편액은 대구 출신의 석재 서병호 선생의 글씨이다.
향 원광제의 우측에 걸린 호쾌대활(好快大活)과 향 원광제의 좌측에 걸린 노송운영(老松雲影)은 추사 김정희 선생 글씨이다.
경봉스님은 ‘기껏 살아봐야 백년을 더 사는 사람은 드물다. 그러니 언제나 쾌활하고 낙관적인 기분으로 활기찬 생활을 해야 한다. 여지껏 생화해온 모든 사고방식과 생활 관념에 잘못이 있으면 텅 비워 버리고 바르고 참되고 활발한 정신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향 원광제의 가장 오른 쪽의 무진장(無盡藏)은 경봉스님의 글씨이다...
원광제 측면으로 정감가는 장독대가 자리하고 있다...
삼소굴은 1982년까지 경봉스님이 기거하시면서 수행승들을 지도하던 곳이라 한다.
삼소굴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건물은 순조 31년(1831)에 경봉스님이 '토굴'로 지어서 출발했다 한다.
삼소굴은 한국 현대불교의 대표적 고승 경봉스님이 36세부터 1982년 91세로 입적하기까지 50 여 년간 생활하던 공간으로 머물다 입적한 곳으로 지금은 불교화가 김범수님이 그린 경봉스님 영정 그림을 모셔 놓았다.
경봉스님은 시·서·화 삼절에 선과 차까지 갖춰 오절로 불렸던 대선사께서 거처 하시던 곳으로 유명하다.
경봉스님은 1927년 11월 20일 삼경에 방안의 촛불이 치직하고 소리를 내며 흔들리는 모습을 보고 '자성'을 깨닫고는 기쁜 마음에 문을 박차고 나와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고 한다.
향 삼소굴 우측의 오래된 산수유 나무
삼소굴에서 바라본 호성당
삼소굴 주변은 오래된 노거수들이 많다...
삼소굴에서 바라본 원광제....
원광제의 회랑은 빠질 수 없는 포토존이다. 나이테가 그대로 드러나는 기둥이며 마루바닥이 낡은 듯 하지만 멋스러움을 그대로 간직한다..
난 원광제 마루에 오면 꼭 여기에 앉아 본다. 신선의 세계에 와 있는 듯하다. 편안하게 앉아 몸과 마음을 턱~ 내려놓고 조용히 명상하기 딱 좋은 장소다.
삼소굴 전각의 풍경이다.
‘삼소’는 ‘세 사람이 웃는다’는 의미로 ‘호계라는 시냇가에서 세 사람이 웃는다.’ 에서 따왔다.
삼소굴(三笑窟) 편액은 대구 출신의 석재 서병호 선생의 글씨이다.
方丈 글씨도 경봉스님이 쓰셨다.
삼소굴 기둥의 주련은 경봉스님의 오도송으로 회산 박기돈의 글씨로 알려져 있다.
'내가 나를 온갖 것에서 찾았는데
눈앞에 바로 주인공 나타났네.
허허, 이제 만나 의혹 없으니
우담바라 꽃 빛이 온 누리에 흐르네' ~ 경봉스님 오도송 ~
삼소굴 내부에는 경봉스님의 존영이 모셔져 있다...
삼소굴(三笑窟) 유래
지리산중 깊숙이 자리한 암자 중에서 도솔암 만큼 깊으면서도 밝고도 시야가 시원한 곳은 드물다.
도솔암 요사채에 눈길을 끄는 편액이 있으니 삼소굴(三笑窟)이 그것이다.
삼소굴에 대하여 경봉 스님은 “삼소의 ‘삼’은 우주의 극수인 3이요, ‘소’란 염주를 목에 걸어놓고 이리저리 찾다가 결국 목에 걸린 것을 발견하고는 허허 웃는 것”이라고 선문답 하듯 일러주었는데, 정확한 어원은 중국 동진시대(381년)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토종의 초조 헤원(慧遠)은 381년에 여산 동림정사를 창건하였다.
이후 그는 그림자는 산을 나서지 않고 발자취는 속세에 들이지 않는다(影不出山 足不出俗)라는 금율을 세워 30년간 산문을 나가지 않았다.
어느날 절을 찾은 당대에 이름난 전원시인인 유가(儒家)의 도연명과 도가(道家)의 육수정을 배웅하다 깊은 대화에 빠져 그만 동림정사 아래에 있는 계곡인 호계를 건너 산문을 넘고 말았다. 이를 경계하던 절간 호랑이의 표효에 뒤늦게 깨닫고 유불선의 세사람이 함께 웃었다는 옛 일화 호계삼소(虎溪三笑)에서 따온 이름이다.
금년 병오년에서 무진년을 계산하면 39년간인데 그 동안 내가 받은 부고가 무려 640여 명이구나….
이 많은 사람들이 다 어디로 갔는지 한번 가고는 소식이 없구나.
옛 부처도 이렇게 가고 지금 부처도 이렇게 가니 오는 것이냐 가는 것이냐…
청산은 우뚝 섰고 녹수는 흘러가네.
어떤 것이 그르며 어떤 것이 옳은가.
쯧쯧쯧….
야밤 삼경에 촛불 춤을 볼지어다.
지허노호지(只許老胡知) 불허노호회(不許老胡會)
(노호(老胡)의 지혜를 허용할 뿐 노호에 부합하기를 허용하지 않는다)
범안개처(凡眼開處) 수류화개(水流花開)(범안(凡眼) 열린 곳에 물 흐르고 꽃 피네)
세상에서 가장 급한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찾는 일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진짜 급한 일은 잊어버리고 중요하지도 않은 일로 바쁘다고 한다.
경봉 스님은 16세에 출가하여 35세에 깨달음을 얻었다. 고요한 방에서 촛불을 바라보고 앉아 있는데 갑자기 한줄기 바람이 불어와 촛불이 춤을 추었다. 그 순간 활짝 마음이 열려 그 심경을 노래하였다. 그것이 경봉스님의 오도송이다...
내가 나를 온갖 것에서 찾았는데
눈앞에 바로 주인공이 나타났네
허허 이제 만나 의혹 없으니
우담발화빛이 온누리에 흐르는 구나.
법당 뒤 독성각 가기 전에 조사각이 자리하고 있다...
조사각에는 석가모니불과 선종의 법을 잇는 33분의 조사(祖師), 한국의 선맥을 잇는 지눌(知訥)ㆍ보우(普愚) 스님을 포함하여 총 서른 여섯분의 등의 영정을 봉안하고 있다.
조사각(祖師閣) 현판은 구하스님이, 삽삼전(卅三展) 현판은 월하스님이 쓴 글씨이다.
원래 영각 이었지만 지금은 선원으로 스님의 수행처로 매년 음력 10월 30일 역대조사의 뜻을 기리는 추모대제를 봉행하고 있으며 이때는 일반인에게 개방된다.
석가모니불과 한국의 선맥을 잇는 지눌(知訥)ㆍ보우(普愚) 스님을 포함하여 총 서른 여섯분의 등의 영정을 봉안하고 있다.
선종의 법을 잇는 33분의 조사(祖師)의 영정을 봉안하고 있다.
조사각 뒤로 독성각이 보인다...
극락암 뒷 편으로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울창한 대나무와 소나무 숲은 깊은 산속을 품은 듯 하다.
조사각 앞으로 원광제. 무량수각과 수세전 그리고 정수보각이 차례로 보인다...
다시 조사각 입구로 나와 중간의 길로 오르면 독성각 가는 길이다...
뒤쪽으로 올라가면 독성각이 있다... 법당 뒤로 커다란 고목의 감나무 사이를 지나 독성각 가는 길은 동백나무와 대나무가 어루러진 길이다...
법당 뒤 오른쪽으로 올라가면 단하각이 있는데 단하각으로 걸어가는 길에 울창한 대나무가 시원스럽게 보인다.
독성각, 나반존자를 모시고 있다.
단하각은 나반존자를 모신 독성각이다. 정면 1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건물이지만 전각 앞 공간을 더 많이 달아내어 실내를 넓게 개조한 건물이다.
독성인 나반존자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 때 미륵불의 출현을 기다리라고 부촉한 4명 중의 한사람인 빈두로 존자를 가르킨다. 말법시대의 중생에게 복을 주고 소원을 성취시켜 주는 분이시다.
단청이 고운 독성각 천정
전각 앞 공간을 더 많이 달아내어 개조해서 실내가 많이 넓었다.
독성각 외부의 독성벽화
독성각 주변에는 차나무가 많이 있었다...
극락암 제일 높은 곳에서 바라보니 무량수각. 정수보각. 조사각. 독성각이 파노라마 처럼 펼쳐진다...
원광제. 삼소굴과 무량수각 그리고 조사각이 시원스레 내려다 보인다...
독성각에서 기도하고 내려가는 길 ~
독성각에서 기도하고 나오니 조사각과 원광제 사이에 커다란 고목의 감나무와 하늘이 참 아름답다.
다시 돌아온 무량수각 옆 산정약수(山精藥水)
약수터가 조금 거창하다고나 할까 ?
무량수각 옆에 산정약수비(山精藥水碑)와 산정약수터가 있다.
영월루 우측의 공양간
최근에 불사한 호성당이다...
감로당과 호성당 전각이 연결되어 있다...
좌측의 감로당(甘露堂)과 우측의 호쾌대활(好快大活)
호성당 우측의 노송운영(老松雲影)
내려오며 올려다 본 최근에 불사한 전각 호성당
다시 극락영지 위의 홍교도 바라본다...
성큼 다가온 영축산 아래 극락암을 보듬고 있는 평화로운 모습을 바라본다.
극락암에서 마지막으로 갈곳은 주차장 앞에 경봉스님이 화장실을 고쳐 이름한 휴급소와 해우소이다. 자연친화적 공간에서 다급한 마음을 쉬어가라 근심걱정을 내려놓으면 된다.
돌아온 넓은 극락암 주차장이다...
잠시나마 극락에서 놀았던 극락암 나들이를 마무리 한다. 경봉스님의 흔적들을 돌아보며 내 자신이 지금처럼 늘 여여하길 바래보며 극락암을 내려간다...
극락암에서 내려와 극락암 입구 비로암 갈림길을 지나
극락암에서 내려 가는 길에 만나는 멋진 소나무들 ~
극락암 암자 500m 아래 아란야 선방이 있었는데
예전에 있었던 건물은 1969년 경봉스님이 창건한 2층으로 된 현대식 건물로서, 이곳에 들어가면 3년 이상 참선(參禪)에만 몰두하게 된다고 했었는데 지금은 극락암으로 선원을 옮겨 이런 상태이다.
내려 가는 길이 환상의 소나무 숲길이었다... 통도사 숲의 수만그루 소나무가 재선충에 걸리지 않도록 간절히 기도한다. 통도사 소나무야 반드시 살아야 한다.
송림의 자태가 귀하다... 극락암에서 내려오는 환상의 소나무 숲길을 지나 네 번째 통도사 산내암자 반야암으로 향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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