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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명대사 유적지-기념관. 사당과 생가 (경남 밀양시 무안면 사명대사생가로 642 ,무안면 고라리 399)
    여행방/경상도 2018. 5. 10. 09:18

    사명대사 유적지(사명대사 기념관,  사당과 생가)  

      

      

    2018.     5.    10.

     

     

    2018.   5.   6 . 사돈들 8명과 함께 촉촉히 비가 내리는 요일에 김해.밀양 일원으로 떠난 여행이다.. 

    김해 장유사. 봉화마을을 보고 밀양으로 이동 후 밀양 만어사를 본 후 삼량진에서 점심식사 후 다음 여행지 밀양 서산대사 유적지로 향해본다..






    밀양 만어사에서 내려와서 삼량진의 송원 메기매운탕에서 점심을 먹기로 한다..  참빠가사리탕 4인분과 메기찜 4인분을  시킨다..





    수제비가 듬뿍 들어간 참빠가사리탕 4인분..   음식의 김이 올라와서 카메라가 흐리다..





    메기찜 4인분





    그런데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수제비가 듬뿍 들어간 참빠가사리탕이 훨신 맛있는거 같다...





    점심식사 후  밀양시 무안면 사명대사 유적지로 향한다..





    사명대사 유적지를 표시하고 있는 입석





    사명대사 유적지 안내도

     




    밀양출신인 사명대사의 호국정신과 애민애족의 숭고한 얼을 기리기 위해 지난 1999~2006년까지 부지면적 49,146(기념관 40,670, 유적지 8,476)에 사명대사 동상과 사명대사 기념관, 추모공원, 기념비 등을 조성하여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곳은 수백 년 동안 풍수사(風水師)들이 찾아와 전하기를 뒷산은 천리를 달려온 목마른 말이 엎드려 물을 먹는 형상이요, 주산은 동자형(童子形)이며, 그 아래 좌청룡과 우백호가 감돌고, 맑은 연못이 있다. 안산은 범이 엎드려 있고, 원안은 보검인데, 외원안 다섯 봉우리가 읍()을 향하고 있는 형국이라 하여, 삼국의 명장(三國名將)이 날 명산이라 하였다.





    사명대사의 유적지를 표시하고 있는 입석을 지나 기념관으로 간다.





    기념관으로 들어가는 외삼문인 "충의문"으로, ‘사명대사의 숭고한 충의 정신을 기리며 널리 계승해 나가는 의미로 지어진 문이다.







    사명대사 유적지 외삼문 충의문을 지나  삼강문이 있는 중앙광장으로 향한다..








    삼강문이다.

    중앙광장은 주광장의 진입부를, 사명당의 세계로 가는 길로 개념을 설정하고, 세개의 구조물로 묘사하는 삼강문을 설치했다고 한다.





    왼편 그림 벽화는 타일 벽으로 사명대사가 포로 송환을 위해, 사신으로 일본에 건너 갔을 때의 불로 시험을 하였으나 수염에는 고드름이 어는 등,일본에서의 활약 등을 상징적 그림으로 묘사해 두었다.




    오른편 벽화 그림으로 사명대사의 탄생과 성장과정 그리고 입산, 승군 활동 등의 업적과 생애를 상징한 그림 등이 새겨진 백을 만난다.






    중앙광장을 지나면 사명대사 기념비관이 있으며,











    중앙의 문으로 기념관으로 들어가 본다.






     사명대사 기념관 내로 들어가는 통로


    사명대사 기념관 내부에는 사명당의 성장과정, 불교입문, 대사의 가계도. 입산수도, 사명당의 전투 등으로 구성되어 잇어 사명당의 나라사랑 정신을 체험 할 수 있게 조성되어 있다.





    직지사에 선문에 들어가기 위한, 삭발의 형상을 문살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임진왜란때 승군이 사용한 칼과 활 병장기도 있다.





    입산후의 사명대사의 유물들이 전시가 되어있으며, 사명대사 기념관에는 청동함은향완사명대사 가사 장삼 등,















    장삼,  수저,  금강저





    사명대사에게 내린 교지





    화승총 외 농기구 등도 무기로 사용하였다유물의 복제품 65점이 전시가 되어 있으며,





    사명대사의 평양성 탈환 이다.,

    195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정의 근왕문과, 스승 휴정의 격문을 받고 의승병을 모아 순안으로 가서 휴정과 합류 하였고, 그곳에서 의승도대장이 되어 의승병 2,000명을 이끌고 평양성과, 중화 사이의 길을 차단하여 탈환의 전초 역활을 했다고 한다.





    평양성 탈환 디오라마와 영상실, 정보 검색실 등이 사명대사 기념관에 설치되어 있다.

    디오라마는 작은 공간 안에어떤 대상을 설치해 놓고 틈을 타서 볼 수 있게 한 입체 전시물을 말한다.





    밀양시 무안면 고라리 399번지 일대는  학계 등전문가들의 고증을 통해 사명대사 유적지로 선정되어, 199210월 지방기념물 제116호로 지정되었다.

    밀양 출신인 사명대사의 호국정신과 애민애족의 숭고한 얼을 기리기 위해, 1999~2006년까지 부지면적 49,146(기념관 40,670, 유적지 8,476), 사명대사 동상과 사명대사 기념관추모공원기념비 등을 조성하여,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다고 안내가 되어 있다.








    전시관 뒤에는 추모광장이 있어서, 사명대사의 높은 뜻을 기리고 계승할 수 있도록, 추모공간이 구성되어 있으며 사명대사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사명대사 동상.


    사명대사 속명은 응규이고 출가 후 법명은 유정, 자는 이환, 호는 종봉, 사명당, 송운 등이 있다.








    다시 기념관을 통하여 광장으로 나간다.




    사명대사 유적지는 대단한 규모인데 찾는 사람이 거의 없다.





    사명대사 유적지는 광장도 넓고 쉴 곳도 많은 공간이다.




















    기념관을 나와, 입구의 공원으로 조성이 되어 있는 저수지 쪽으로 나온다.





    중촌 소류지의 한쪽에는, 나무데크로 조성이 되어 있어서 산책하기에도 그만 이다저수지를 끼고 정비된 풍경은 삶과 풍운을 쉬어가기에 부족함이 없다.






    사명대사 기념관을 나와 길 건너 마주한 밀양시 무안면 사명대사 생가지는 서쪽 산골짜기 아래에 위치하고 있어 찾는 사람이 거의 없다.






    문화해설사의 집 혹은 매점  인듯 한데..  아무런 표시가 없다..




    사명대사 기념관 입구 길과 마주보고 자리하고 있는 사명대사 생가를 향하면 맨 처음 사당의 왼쪽 앞에 사명대사의 유허 기념비가 있다.





    사명대사 생가지 좌측에 위치한 유허비에 새긴 글


    우리 대사의 가르침은 온 세상을 구제하는 것이지만

    자기 몸으로 돌아와서는 물병과 밥그릇 한 벌 뿐이오

    세상에 나아가서 사용하면 국위를 크게 선양하게 된다.

    이제 이 돌에 새기노니 거룩한 공덕 천년만년 밝게 나타나리라

     





     

    사명대사 유허비 우측에 위치한 한옥은 사명대사 영전을 모신 사당이다.





    사명대사의 사당 입구에는 예쁜 작약꽃이 촉촉한 빗방울을 머금고 만발했다..






    분충서난문현판을 달고 있는 사명대사의 사당으로 들어가는 정문이며 외삼문이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사명대사의 사당인 "숙청사"가 자리해 있다.








    숙청사(肅淸祠), ‘맑고 고상한 유상에 대해 엄숙하게 경의를 표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사당에 모셔진 대사의 영정이다.

    사명대사의 호는 사명당송운종봉이라고 하며성은 임(),  자는 이환법명은 유정(惟政본관은 풍천이다.

     

    사명대사는,

    임진왜란(1592)이 일어나자 승병을 모아평안도 순안으로가서 서산대사와 합세 하였으며 그곳에서 '의승도대장'이 되었다.

    이후 대사는 여러 전투에 참여했으며,  1593년 명나라 구원군이 주축이 되었던 평양성 탈환전투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고네 차례나 왜군의 진영에 들어가 휴전 협상을 벌이며왜군이 제시한 휴전 내용의 모순과 그들의 죄악을 낱낱이 들추어 냈다고 한다.


    선조는 그의 공을 크게 인정하여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의 벼슬을 내렸으며전쟁이 끝난 뒤인 1604(선조 37)일본과 강화를 위한 사신으로 임명되어 일본으로 건너가,  3,000여명의 조선인 포로를 귀국시키는 등 많은 공을 세웠다.

    일본에서 돌아온 뒤대사는 모든 공직을 버리고 묘향산으로 들어갔으며광해군 2(1610) 해인사에서 제자들을 모아놓고 설법하시던 중 그대로 입적하셨다.

    대사가 입적하신 뒤 나라에서는 '慈通弘濟尊者자통혼제존자'라는 시호를 내렸으며저서로 사명당대사집7권과 분충서난록1권 등이 있다.



    사당 외삼문을 나선다..





    사명대사 생가로 향하다 돌아본 사당이다..



    사명대사의 생가는 경상남도 기념물 116호이다.현재 생가터에는 대문채, 사랑채, 안채가 복원되어 있다.









    사명대사의 생가로 들어가는 첫 번째 출입문인 대문채





    생가 외삼문의 현판이다.

    현판에는 사명대사를 "송운대사"라고 한 것은사랑채 당호와의 혼돈을 피하기 위해서 라고 하며대사에 관한 기록은 사명보다 송운이라고 기록에 더 많이 나오고 있으므로, "송운대사구택" 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사랑채 사명당의 모습으로 대문을 들어서면왼쪽에는 하인이 기거 하였을 듯한 방 한칸과오른쪽에는 창고의 용도로 보이는 곳이 양쪽에 있다.




    사랑채인 사명당이다.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명당자리 라는 이곳에서 조부때부터 살았다고 하며증조부 임효곤은 문과에 급제하여 장악원정이 되어 대구 수령으로 있다가 밀양에서 살았는데사명당의 조부는 괴과에 급제하여 강계부사를 지낸 유학자이다.





    사랑채의 내부에는찾는 이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가구나 소품 등으로내부를 재현해 두어 일반 고택 등에서의 허전함 보다 실제 사람이 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어 따뜻함이 느껴진다.





    방안에는 좌식 책상과 책이 놓여 있다.








    사랑채 사명당에는 방 두칸에 마루가 있으며 창고도 있다.   창고에는 짚으로 짠 멍석과 농기구가 들어 있다.








    사랑채의 뒤편에는 내당이 있다이곳 사명대사 생가지는 1992년에, 경상남도 기념물 제116호로 지정되었다.





    사명대사가 태어나고,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육영당" 이다.

    사명대사의 어머니 달성 서씨는 어느날흰 구름을 타고 누런 두건을 쓴 금인(金人)만 길이나 되는 높은 대에 올라가 머리가 허옇게 쉔 신선을 만나, 예를 올리는 모습을 꿈에 본 후 대사를 잉태하였으며,  1544년 갑진(甲辰) 1017일에 부친 임수성 공과 달성서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안채의 내부도 사랑채와 마찬 가지로, 그 당시의 실내 모습을 재현해 두었다.









    13세 때인 명종 11(1556) 유촌 황여헌 선생으로 부터 글을 배우다  "세속 학문은 천하고 비루하여 시끄러운 세상 인연에 얽매여 있으니, 어찌 번뇌 없는 학문을 배우는 것과 같을 것인가?" 하고 그 해 가을 황악산 직지사로 가서 신묵화상에게 머리를 깍고 선문에 들어가게 되었다.










    육영당의 옛날 부엌의 모습이다.












    사명대사는 어린 시절을 여기서 보냈으며, 사명당이 이따금씩 고향으로 돌아 올때 쉬었다는 바위가 아직 그대로 남아 있으며마을 뒷산 서쪽 기슭에 사명대사의 조모와 부모의 묘소가 있다.









    사람이 살고 있는 듯하게 많은 장독들도 놓여 있다.




    생가 담장 밖으로 사당 외삼문이 보인다..





    생가 뜰에는 탐스러운 함박꽃이 비를 맞아 더욱 무거운 얼굴을 들어 올리고 있다..








    사명대사 향기를 따라 사명대사 유적지인 사명대사 기념관,  사당과 생가를 두루 들러 보고  오늘의 5번째 다음 여행지인 대법사를 향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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