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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리산의 문수도량 칠불사(경남 하동군 화개면 범왕리 1605)
    사찰여행/경상도 2017. 11. 19. 14:52

    지리산의 문수도량 칠불사

      

      

    2017.    11.    19.

      

      

    2017.  11. 17.  한국불교대 도반들과 함께한 경남 하동 여행으로 삼성궁을  보고 제첩 모듬정식으로 맛난 점심 식사 후  칠불사로 이동 후 칠불사와 쌍계사를 차례로 둘러보는 일정이다.


    하동 첫번째 여행지 삼성궁을 둘러보고  11:20  하동 제첩특화구역 도착 후 제첩 맛집 금양가든에서 제첩모듬정식으로 맛난 식사 후 칠불사로  향한다...







    하동 제첩특화구역  제첩 맛집 금양가든에서 맛있는 점심 식사로...













    제첩 모듬 정식을 먹는다..









    제첩회를 김에 싸서 먹으면 짱!!




    맛나게 제첩으로 점심 식사 후 식당 뒷편의 섬진강을 바라 본다..



    강물이 많이 빠져 잇네..  조금 있으면 다시 물이 가득 찬다..





    옆의 제첩 조형물에서 단체사진 촬영이다..





    점심식사 후 하동 쌍계사 쪽으로 이동한다...









    봄에는 수 많은 행락객이 벗꽃 마중하던 길을 지난다..









    이어지는 쌍게사 벗꽃 10리길..





    쌍계사를 입구를 지나 칠불사로 차는 달린다..





    창문을 내리고 화개십리 벚꽃 길을 계곡의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천천히 차는 달린.  

    쌍계사가 자리한 계곡을 건너다 보면서 범왕계곡을  한참 오르다 보니 범왕교도 지나고 법왕교 근처의 서낭당도  지난다..




    범왕교를 건너 꼬불꼬불 산길을 오르자 넓은 주차장과 일주문이 우리를 반긴다. 일주문 우측 통행로로 진입하면 칠불사 앞 마당까지 차를 가지고 올라갈 수 있다.







    지리산 반야봉 남쪽 해발 약 830m 고지에 자리 잡은 칠불사(경남 하동군 화개면 범왕리 소재)2000년전 삼국 시대 초기 김해 지방을 중심으로 낙동강 유역에 있었던 가야(伽倻), 일명 가락국(駕洛國)의 태조이자 오늘날 김해 김씨의 시조가 되는 김수로왕(金首露王)의 일곱 왕자가 이곳에 와서 수도를 한 후 모두 성불하였다고 해서 칠불사라 불리고 있다.




    칠불사는 쌍계사 북쪽 20리 되는 곳인 지리산 토끼봉(1533m) 아래 800m 고지에 있는 절이다.

    연담 유일(1720-1799)이 쓴 칠불암 상량문에 의하면 신라 신문왕 때 지리산 옥보선인이 부는 옥피리 소리를 들은 일곱 왕자가 입산하여 6년만에 도를 깨닫고 이 절을 창건했다고 한다.

    그러나 전설에 따르면 선사 옥보를 따라 출가한 가락국 수로왕의 7왕자가 지리산에 운상원을 짓고 수행하여 6년만인 1038월 보름에 성불했기 때문에 칠불암으로 고쳤다고 한다.

    신라 옥보고는 이 절의 운상원에서 50년 동안 거문고를 공부하고 30곡을 지어 세상에 전하였다고 한다.

    칠불사는 1948년 여순반란군토벌 때 불에 타버려 다시 지었다.




    일주문에는 지리산칠불사(智異山七佛寺)’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일주문은 일심(一心)을 상징하는 문이다.   불교의 경전을 크게 분류하면 경, , 론 삼장이다.   삼장의 내용은 계, , 혜 삼학이고,   삼학의 근본은 일심이다.



    이 일심을 깨달아 부처가 되는 곳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찰에 들어가는 입구에 일주문을 세워 놓았다.   대체로 일주문에 신령스러운 광명이 어둡지 않아(神光不昧) 만고에 빛나는 법이다(萬古輝猷) 이 문안에 들어와서는(入此門內) 분별지해를 두지마라(莫存知解)’라는 게송을 적은 현판이 걸려 있다.


    일주문 현판 글씨는 제월통광 스님이 쓰고, 서각은  정도화 교수가 했다.






    일주문을 지나면 칠불사 명상의 길이 시작된다이 길은 영지 못까지 이어진다..





    일주문 옆으로 난 도로를 따라 칠불사로 오른다.  10여년 만에 찾은 칠불사예전에 비해 정비가 많이 되어있었다.










    영지 못까지 이어지는 명상의 길은 붉은 단풍이 여행객을 맞는 길로 붉은 단풍이 마치 꽃보다 이쁘고 따뜻하게 느껴진다..










    대렴차 문화원이 보인다.





    칠불사 입구에 있는 영지는 가락국 김수로왕과 허황후가 출가한 일곱 아들을 만나러 왔다가 연못에 비친 일곱 왕자의 얼굴만 보고 갔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다.






    칠불사 입구에 이르면 영지(影池)라는 둥근 인공 연못이 고요한 지리산 반야봉을 담고 있다.


    칠불사의 영지는 칠왕자의 그림자가 나타났다는 연못이다수로왕 부부가 출가한 일곱 왕자를 만나기 위해 이곳에 와서 왕자를 보려 하자 장유화상은 왕자들은 이미 출가하여 수도하는 몸이라 결코 상면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꼭 보고 싶으면 절 밑에 연못을 만들어 물 속을 보면 왕자들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장유화상의 말에 따라 김수로왕 부부는 연못을 만들어 놓고 그 연못을 보니 과연 일곱 왕자들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를 보고 수로왕 부부는 환희심을 느끼고 돌아갔다고 한다그로 인하여 이 연못을 영지라 부르게 되었다.





    지금은 비단잉어들이 유영하고 있었다...














    대렴차 문화원이 조금 더 가까이 보인다...






    칠불사 복원불사 사적비와  제월통광스님 비






    영지못 맞은 편에는 20여년간 칠불사를 복원한 기록을 새긴 칠불사 복원불사 사적비가 서 있다.


    온 우주법계가 부처님의 도량 아님이 없고 산하대지와 삼라만상이 부처님의 나투심 아님이 없나니, 과거칠불의 스승이신 문수보살의 상주도량으로 가락국 시조 김수로왕의 일곱 왕자가 梵僧 장유보옥화상의 가르침을 받아 동시 성불한 것을 기념하여 수로왕이 국력으로 창건하였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의하면 수로왕은 서기 42년에 탄생하였으며 남해바다를 통해 매형인 장유보옥화상과 함께 가락국에 도착한 인도 황하 상류의 태양왕조인 아유다국 공주인 허황옥을 왕비로 맞아 102녀를 두었다. 그중 장남은 왕위를 계승하고 23남은 어머니의 성을 이어 받아 김해 許氏의 시조가 되었고, 나머지 일곱 왕자는 외숙인 장유화상을 따라 출가하여 가야산에서 3년간 수도하가다 의령 수도산과 사천 와룡산 등을 거쳐 서기 101년 이곳 지리산 반야봉 아래에 雲上院을 짓고 정진한지 2년 만에 모두 성불하였다.

     

    이 사실은 한국불교의 南方海路 직전설을 뜻하며 인도에서 중국을 거쳐 고구려 소수림왕 2년인 서기 372년 처음 불교가 들어 왔다는 北方陸路 전래설보다 약 3백여년 앞서는 기록이다. 가락국 제8대 질지왕은 공주의 최초 도래지에 왕후사를 세우고 장유화상의 주석지에 장유사를 세워 가야에 불교가 처음 전해진 것을 기념하였다. 신라 경덕왕때 옥보고가 이곳 운상원에 들어와 50년 동안 거문고를 연구하여 왕산악 금법을 정리 신곡 30곡을 지어 속명득에게 전했다. 신라 효공왕때 김해에서 온 담공선사가 벽안당 선실을 亞字형으로 축조하였으니 한번 불을 지피면 100일간 따뜻하였다. 이 아자방은 이중 온돌구조로 되었는데 방안 네모퉁이의 높은 곳은 좌선처이며 형으로된 낮은곳은 경행처이다. 세계 건축사전에 기록된 아자방은 불가사의한 공법뿐만 아니라 수많은 고승들이 배출되었고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다.

     

    고려조의 정명, 조선조의 조능, 서산, 부휴, 백암, 무가, 인허, 월송선사등이 대표적이며 대은, 금담 두 율사는 이곳에서 용맹기도 끝에 서상수계를 받아 해동계맥을 자립했다. 초의 선사는 이곳에서 茶神傳을 초록하였으며 근세의 선지식으로 선,,율을 겸한 용성선사가 납자들을 제접하는 여가에 歸源正宗을 저술하였고 석우, 금오, 서암선사등이 이곳에서 수선안거 하였다. 임진란에 퇴락한 가람이 서산, 부휴대사에 의하여 중수되었으며 서기 1800년에 보광전, 약사전, 10여동의 사찰의 모든 전각이 실화로 전소되었으나 금담, 대은 두 율사의 원력으로 완전 복구되어 동국제일선원으로서의 위풍을 떨쳤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51년 지리산 전투의 참화로 대가람이 모두 불타버리고 말았으니 폐허에는 잡초만 무성할 뿐이었다. 1964년 제월 통광선사가 행각 차 이곳을 지나가다가 천고의 성가람이 찬 재 속에 묻쳐 있는 것을 통탄하고 반드시 옛 절을 복원하리라는 서원을 세워 산죽과 억새풀로 작은 초막을 짓고 문수보살님께 1000일 기도를 하고 10여년간 수행정진하다가 마침내 문수보살의 가피를 받아 복원 불사를 시작하였다.

     

    1978년 문수전을 시작으로 대웅전, 설선당, 요사채를 차례로 복원하고 1983년 지방문화재 144호 아자방을 복원하고, 그후 보설루, 종각, 주지실, 채공실 준공, 대웅전 내에 목각으로 삼존불상, 칠불탱화, 신장탱화를 새로 조성하고 허북대에서 칠불에 이르는 상수도 설치, 경내 진입로 확장, 사찰주변 임야 50만평 매입, 1989년 운상선원 확장 복원에 이어서 대웅전, 문수전, 설선당, 보설루, 주지실, 종각, 등을 동기와로 바꾸어 이고, 연동에서 칠불사까지 약 5km의 수도공사, 장경각, 식당, 요사채 건축, 1994년 초의선사 다신탑비건립, 1995년 일주문 착공 조경을 마무리하여 마침내 18년에 걸친 대작불사가 원만히 회향하게 되었다. 이는 오로지 시방삼세의 불보살님과 역대조사의 가피력과 참선납자들의 정진력과 화주, 시주 및 신심 단월들의 성원과 장인들의 공력과 당국의 협조로서 통광선사의 대원력이 이루어진 것이다. 돌이켜 보건대 운상원 아자방이 있는 동국제일선원 칠불사는 허황후가 일곱왕자의 성불을 목격한 영지, 추월 조능선사의 치열한 구도행, 문수동자의 화현, 대은 스님의 서상수계 등 수 많은 일화를 간직한 한국 불교의 빼어난 성지이다. 장엄하여라 칠불사 복원이여! 사해의 승니도속이 운집하여 지혜의 눈을 맑히고 명안종사가 출현하고 용상대덕이 배출되어 무량한 중생을 제도할 것이며 천룡팔부의 옹호로 삼보광명이 법계에 가득하여 영원토록 무궁하리라.

     




    제월통광스님 비














    오래된 부도 2기와 근래의 부도 1기도 있었다..






    제월통광(霽月通光)대선사 부도


    6·25전란으로 인해 19511월경에 전소되어  27년간 폐허로 남아 있던 것을 제월통광(霽月通光) 스님이 1978년부터 15여년에 걸쳐 대웅전문수전아자방운상원설선당보설루원음각요사영지,  일주문 등을 복원 중창했고, 이 외에 선다원, 사적비, 다신탑비 등을 세웠다.






    무가당 스님 부도






    백암성총(栢庵性聰, 16311700) 부도탑






    대렴차 문화원이다.   아래에서 보면 3층인데 칠불사사 마당에서 바라보면 1층처럼 보이는 전각이다.










    하동이 차로 유명하니 이곳에서 차 문화를 배울 수 있다고 한다.






    선다원


    선다원은 조선후기의 대선사(大禪師)이자 한국 다도(茶道)의 중흥조이신 다성(茶聖) 초의선사(1786-1866)의 덕()을 기리고, 다도와 선법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 건립하였다. 선다원 내에는 초의선사의 진영을 모셔 놓았다. 영찬은 다음과 같다.

    見月悟道달을 보고 도를 깨달아理事無碍이와 사에 걸림이 없네述頌禪茶서문사변만어를 저술하고 동다송을 송하여垂敎萬世그 가르침 만세에 드리웠네


    초의선사의 많은 저서 중에 대표적인 다서(茶書)로서는 다신전동다송이 있고, 선서(禪書)로는 선문사변만어를 들 수 있다.


    다신전(茶神傳)1828년 아자방에서 모환문(毛煥文)이 엮은 만보전서다경채요(茶經採要)에서 초록한 것이고, 동다송은 정조대왕의 사위인 해거도인(海居道人) 홍현주(洪顯周, 1793-1865)가 진도 부사인 변지화(卞持和)로 하여금 초의선사에게 다도에 관해 물어 오므로 청을 받아들여 저술한 것이다.


    선문사변만어(禪門四辨漫語)는 백파긍선(白坡亘琁, 1767-1852)의 선론에 대한 반론인 동시에 초의선론의 요지를 담고 있다. 백파의 선문수경(禪文手鏡)은 임제3(臨濟三句)에 각각 조사선(祖師禪), 여래선(如來禪), 의리선(義理禪)을 배대하여 그 우열과 심천(深淺)을 분별하고, 선문의 제종(諸宗)을 판석(判釋)하려는 선론(禪論)을 전개하고 있다. 초의선사는 이 선문수경의 오류를 지적하고, 옛 선사들의 말씀을 들어 그 잘못된 곳을 낱낱이 바로 잡았다.


    선문사변만어의 전반부에서 백파선사의 주 논지인 삼처전심(三處傳心)의 살활(殺活) 문제와 이선대비(二禪對比), 삼종선(三種禪)과 임제삼구의 대비, 선문오종(禪門五宗)에 대한 조사선과 여래선의 대비와 우월 등을 전제한 후 자신의 선론을 피력하면서 고덕의 제설(諸說)을 인용하여 논증하였으며, 후반부에서는 이선래의(二禪來義),격외의리변(格外義理辨), 살활(殺活), 진공묘유변(眞空妙有辨)등 사변(四辨)으로 일목요연하게 그 개념을 설명하고 있다.


    다신전, 동다송, 선문사변만어는 다인들과 참선을 하는 이들의 필독서이다. 통광스님은 이 세 책을 함께 묶어 초의다선집이라는 이름으로 역주하여 출판했다.















    가야불교의 중심사찰로 성장한 칠불사는 1100여 년 전 신라 효공왕 때 한 번 불을 때면 온기가 100일은 간다는 아자방(亞字房)을 지음으로써 더욱 유명해졌다. 그 후 전란으로 소실된 것을 1978년 제월당(霽月堂) 통광(通光) 대선사께서 중창(重創)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쌍계총림 말사인 칠불사는 경남유형문화재 144호인 아자방으로 유명한 사찰이지만 실재로는 문수보살도량(文殊菩薩道場)으로서 수많은 고승을 배출한 선찰(禪刹)이기도 하다. 동국제일선원이라는 명호처럼 청정한 운수납자(雲水衲子)들이 모여들어 김수로왕의 일곱 왕자들처럼 우리의 본래자성(本來自性) 자리를 찾기 위해서 용맹정진(勇猛精進)하는 곳이기도 하다. 또 칠불사는 다성(茶聖)으로 유명한 초의선사의 다신전(茶神傳)을 초록한 다도(茶道)의 중흥지로도 유명한 곳이다. 그 외에도 김수로왕의 부부가 일곱 왕자들의 얼굴을 보기위해서 만들었다는 영지(影池) 등 불교의 전통이 고스란히 간직된 지리산 반야봉에 자리 잡은 전통사찰이라 하겠다.






    보설루,  원음각, 설선당이 나란히 일직선상에 자리하고 있다..






    보설루(普說樓)


    정면5칸의 맞배지붕으로 누각 건물로 문()의 역할을 한다보설루의 정면에는 "동국제일선원(東國第一禪院)"이란 편액이 걸려 있다.   창건 이후 이 절은 수도승들의 참선도량으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왔다.






    '동국제일선원' 현판이 붙어 있는 보설루


                      春山無伴獨相求 춘산무반독상구 : 봄산에 벗이 없어 홀로 찾으니

    伐木丁丁山更幽 벌목정정산갱유 : 나무베는 소리 쩡쩡하여 산은 더욱 깊어라

                      澗途餘寒歷氷雪 간도여한역빙설 : 시냇가 오솔길에 남은 얼음 밟고가다

                      石門斜日到林丘 석문사일도림구 : 돌문에 노을 비낄때 임구 땅에 닿았네

                      不貪夜識金銀氣 불탐야식금은기 : 탐심을 내지 않으니 금과 은의 기운을 알고

                      遠害朝看米鹿遊 원해조간미륵유 : 해칠 마음 멀리하니 아침에 사슴이 와서 노는 것을 보네

                      乘興杳然迷出處 승흥묘연미출처 : 도의 흥을 타니 돌아갈 길 아득해지고

                      對君疑是泛虛舟 대군의시범허주 : 그대 얼굴 마주하니 텅빈 배를 띄우겠네


    * 두보(杜甫)의 심장씨은거(尋張氏隱居) 81, 2, 5, 6이다.

     



    보설루는 많은 대중을 모아 놓고 설법하는 누각으로 보설루 후면 법당 쪽으로는 '보설루'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이 보설루에서 대중법문을 하고, 여러 불자님들을 위해 경전과 어록을 강설하며또한 영가 천도재를 지내는 곳으로도 사용하고 있다.





    山梅落盡野花飛 산매락진야화비 : 산매화 다 떨어지고 들꽃이 흩날리는데

         谷口春殘客到稀 곡구춘잔객도희 : 골입구에 봄기운 남았어도 오는손님 드물고

                        遙望千峰紅樹裏 요망천봉홍수리 : 멀리 산봉우리 붉은 진달래 바라보니

                        杜鵑啼處一僧歸 두견제처일승귀 : 두견새 우는 곳에 한 스님이 돌아오네

    * 해원(海源)선사의 산객(山客)


    荷葉團團團似鏡 하엽단단단사경 : 연잎은 둥굴둥굴 둥굴기가 거울같고

                          菱角尖尖尖似錐 능각첨첨첨사추 : 마름뿔은 뾰족뾰족 뾰족하기 송곳같네

                          風吹柳絮毛毬走 풍취류서모구주 : 버들개지 바람부니 솜털은 공처럼 굴러가고

                          雨打梨花蝶飛 우타이화협접비 : 배꽃에 비 뿌리니 꽃잎이 나비처럼 날으네

           * 夾山善會(협산선회)선사의 염송 (船子德誠화상의 법을 듣고 깨달아서 지은 시)






    보설루 아래 계단에서 보이는 대웅전

     





    칠불사의 금당인 대웅전(大雄殿)은 팔작지붕에 앞면과 옆면 각 3칸씩의 규모로, 근래에 지은 건물이다.







    현판과 주련의 글씨는 여초 김응현(1927-2007) 선생이 썼으며, 글씨의 서각은 정도화(?-2010) 교수가 일도각으로 새겼다.






    대웅전 안에는 최근에 동국대 교수인 청원스님이 조각한 삼계의 도사(導師)이시고 사생의 자부(慈父)이신 금동 석가모니부처님과, 좌우에 협시로 대지혜를 갖추신 문수보살과, 대행을 실천하시는 보현보살이 봉안되어 있고 후불 목탱화도 조성하여 모셨다.















    신중 목탱화






    칠불사의 어원인 김수로왕의 칠왕자가 성불한 칠불 목탱화





    부처님 모신 불간위로 닫집이 장엄하다..













    대우전의 문살





    대웅전주련


    佛身充滿於法界 (불신충만어법계) : 부처님은 법계에 가득하시며

                              普現一切衆生前 (보현일체중생전) : 모든 중생앞에 항상 나타나시네

                               隨緣赴感靡不周 (수연부감미부주) : 인연따라 다다라서 두루 보살펴 주시고

                               而恒處此菩提座 (이항처차보리좌) : 그리고 여기항상 보리좌에 계시네


                     * 석문의범(釋門儀範) 2장 예경편(禮敬篇) 7대예참례(大禮參禮) 7지심정례공양 여래불




    대웅전 마당에서 본 풍경으로 한옥의 특징이 문을 열면 자연이 집안으로 들어온다는 점인데 마치 가을 단풍이 가슴속으로 들어오는 느낌이다.






    칠불사의 모든 현판과 주련은 여초 김응현 선생이 쓰고, 정도화 교수가 서각했다.







    문수전(文殊殿)


    대웅전 오른쪽에 처마를 나란히 하여 문수전이 자리한다팔작지붕에 앞면 3,  옆면 2칸의 규모로 근래에 지은 건물이다.






    문수전 안에는 전각 이름대로 수미단 위에 지혜를 상징하는 보살인 최근에 조성한 금동 문수보살좌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왼손에는 꽃 위에 지혜의 그림이 그려있는 청련화를 쥐고 있다.






    불단 뒤로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지장보살과 관음보살이 협시를 이루고 십대제자와 사천왕이 그려져 있는 석가모니 후불탱화가 있다.






    신중탱화도 있다.






    이 문수전은, 칠불사가 문수신앙 도량임을 잘 나타내주는 전각이다.

     

    문수전에는 지혜를 상징하는 대지문수보살을 모셔 놓았다. 지리산은 문수보살 도량이며, 특히 칠불사는 생문수(生文殊) 도량이기 때문이다. 문수보살은 중생의 근기에 따라 몸을 나투시어 신통자재한 지혜력으로 중생들의 원하는 바를 다 성취시켜 주신다.

     

    특히 칠불사에 문수보살이 화현하시어 기도를 성취시키고 공부인을 보살펴 견성 오도케 하셨다는 말씀들이 많이 전한다. 그러므로 칠불사에서는 매월 음력 4일 문수재일을 기하여 특별히 문수보살께 공양 올리고 법회를 열어 법문을 한다. 또한 칠불사에서는 칠일 문수기도, 백일 문수기도, 천일 문수기도를 한다고 한다.






    千峯盤窟色如藍 (천봉반굴색여람) : 천 봉우리 깊은 골짜기 쪽빛 같이 푸른데

                       誰謂曼殊是對談 (수위만수시대담) : 그 누가 말하리 문수보살을 만나 이야기 했다고

                       堪笑淸凉多少衆 (감소청량다소중) : 웃음을 참으며 청량산 대중이 얼마냐고 하니

                       前三三與後三三 (전삼삼여후삼삼) : 전 삼삼 후 삼삼이라 하네


    * 만수(曼殊)는 문수(文殊)라고 통칭하며 또 문수사리(文殊師利), 만수시리(曼殊尸利)라고도 한다.

    설두 중현(雪竇 重顯:9801052 /중국 운문종) 선사의 송이다.








    문수전 마당에서 바라본 가을 단풍이 가득한 칠불사는 지붕 처마의 단청과 잘 어울리는 단풍이다..




    문수전 오른쪽에 자리한 설선당(說禪堂)은 강설도 하고 참선도 하는 집이라는 뜻이다.


    一塢雲霞只寂然 일오운하지적연 : 노을진 산사의 언덕 적막함이 감도는데

                        十年甁鉢遠人煙 십년병발원인연 : 십년동안 수도생활 세속 인연 멀리했네

                        遙知槐穴千鍾祿 요지괴혈천종록 : 알았노라 조정의 천종록을 받은 부귀영화도

                        不博松窓半日眠 불박송창반일면 : 소나무 창가에서 반나절조는 것만 못한 것을


    * 아암 혜장(兒庵 惠臧, 1772~1811)대사의 산거잡흥(山居雜興) 20수 연작시 중의 하나이다.






    칠불사 설선당에는 관세음보살을 모셔 놓았으며, 대중방으로 사용하고 있다.

    관세음보살은 자비 보살로서중생의 근기에 따라 서른 두 가지 몸을 나투어 중생들의 모든 소원을 성취시켜 주시고모든 고통을 없애주시는 조건없는 큰 사랑을 베푸신다.









    歷劫轉轉無盡燈 역겁전전무진등 : 수억겁에 전하고 전하여도 다 함이 없는 등불이여

                  不曾桃剔鎭長明 부증도척진장명 : 일찍이 심지 돋은적 없어도 영원히 밝기만 하네

                  任他雨灑兼風亂 임타우쇄겸풍란 : 저 비 뿌리고 거친 바람 부는데 버려두어도

                  漏屋虛窓影自淸 누옥허창영자청 : 허술한 집 빈창에 그림자 스스로 맑디맑네


    * 해원(海源, 1691-1770)선사의 <心燈>





    麻衣曾不下山扃 마의증불산하경 : 누더기 베옷으로 산문밖에 나가지 않았건만

                     慙愧如今道未成 참괴여금도미성 : 여지껏 도를 이루지 못했으니 부끄럽기 그지 없네

                     柏樹工夫誰得力 백수공부수득력 : 화두 참구 참선공부 그 누구가 득력했나

                     蓮花世界但聞名 연화세계단문명 : 연화세계 극락정토 이름만 들었을 뿐이네

                     狂歌每向愁中發 광가매향수중발 : 미치광이 노래는 수심중에 튀어나오고

                     淸淚多因醉後零 청루다인취후령 : 맑은 눈물 취한 후에 하염없이 쏟아지네

                     坐罷蒲團還失笑 좌파포단환실소 : 앉아서 좌복만 떨어트려 쓴 웃음만 나오니

                     莫將吾輩算天氓 막장오배산천맹 : 나같은 무리를 훌륭한 수도자라 하지말게


    아암 혜장(兒庵 惠臧, 1772~1811)대사의 장춘동잡시 십이수(長春洞雜詩 十二首)중 일부

















    칠불사의 유천수











    유천수란 젖과 같이 뽀얀 물을 말한다.   유천이 나타나는 것은 두 가지 경우이다.   첫째는 수행자가 수행을 잘하고 공덕을 쌓으면 그 공력으로 나타나고,   둘째는 사찰인 경우 그 사찰이 발전 융창할 운이 돌아올 때 유천수가 나타난다고 한다.

     

    또 동다송에 의하면 차를 끓일 때 유천이 아니면 차의 싱그러움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했다이 말에 의하면 대체로 수질이 좋은 물을 유천수라고 할 수 있다.   예로부터 칠불사에 유천수가 있다고 전해온다근자에도 그 유천수를 마신 스님이 있다.






    칠불사 설선당(設禪堂) 마당에서 바라본 가을 전경이다..

















    보설루와 나란히 자리한 종각..  원음각(圓音閣)


    부처님의 음성을 원음(圓音)이라고 한다. 종소리는 부처님의 음성을 상징하기 때문에 종각을 원음각이라고도 한다. 지옥고를 받는 중생들이 종소리를 들으면 고통을 쉰다고 한다. 그러므로 종소리를 들으면 번뇌가 끊어지고, 지옥을 깨뜨리고 삼계에서 벗어난다는 게송이 있다.





    종각의 이름을 원음각(圓音閣)이라고 한다.




    원음각 주련


    願此鐘聲遍法界 원차종성변법계: 원컨대 이 종소리 법계에 두루 퍼져

                           鐵圍幽暗悉皆明 철위유암실개명: 철위산 깊은 무간지옥 다 밝아지고

                           三途離苦破刀山 삼도리고파도산: 지옥 아귀 축생의 고통과 칼산의 고통을 모두 떠나

                           一切衆生成正覺 일체중생성정각: 모든 중생 바른 깨달음 이루어지게 하소서


    *석문의범(釋門儀範) 제일장(第一章) 송주편(誦呪篇) 5 종송(第五 鍾誦) 조례종송(朝禮鍾誦)


    범종을 울리는 근본 뜻은 천상과 지옥중생을 제도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종신부는 항아리 모양으로 상대와 하대유곽에는 보상화문과 당초문이 새겨져 있고,  9개의 유두 주위에는 연꽃을 새겼다.   그리고 공양상 4구가 돋을새김 되었으며 명문이 새겨져 있다위에는 용뉴와 음통이 장식되어 있다.




    설산당 앞 마당에서 바라본 원음각과 아자방





    칠불사 전경이다..







    신라 때 김해에서 온 담공선사가 지었다는 아자방의 2중 온돌이 복원 중이.


    아자방(亞字房)은 세계건축대사전에 기록되어 있을 만큼 독특한 양식이다아자방은 신라 효공왕(897~912) 때 구들도사로 불린 담공선사가 만든 온돌방이다.

    전체 길이 8m이고방안 네 귀퉁이에 70cm씩 높여 좌선대를 만들었고가운데 십자 모양의 방이다난방을 위해 온돌을 이중으로 구축하였는데한 번 불을 넣으면 상하 온돌과 벽면까지 49일 동안 온기가 가시지 않는다고 하며 현재는 경남유형문화재 제144호로 지정되어 있다


    아자방은 화재와 전란으로 여러 번 소실되었지만, 온돌은 처음 만든 이래 1,000년을 한 번도 고친 일이 없다고 한다.









    아자방은 보수를 하고 있어 공사 가림막에 부착된 사진으로 만족해야 했다.


    이 아자방에서 참선공부 할 때는 장좌불와(長坐不臥, 늘 앉아만 있고 눕지 않는 것),  일종식(一種食, 하루 巳時에 한 끼만 먹는 것),  묵언(, 말하지 않는 것)의 세 가지 규칙이 있었다고 한다이러한 규칙을 지키면서 애써서 공부하였기 때문에 이 아자방에서 무수한 도승들이 배출되었다그리고 아자방에 문수보살이 화현하여 스님들이 발심정진케 한 이야기가 여러 가지 전해 오는데, 그 중 하나를 소개한다.

    조선 중엽 어느 해 음력 1014일 동안거 결제를 하려고 하는데 어린 사미승이 걸망을 지고 조실스님을 찾아와 아자방에 방부를 들여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조실스님이 보아하니 나이가 어려 도저히 아자방에 방부를 받아줄 수가 없었다그 이유는 아자방에서 정진하는 데는 장좌불와일종식, 묵언의 세 가지 엄한 규칙이 있는데, 어린 사미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힘겨운 일이기 때문이었다따라서 조실스님은 그 사미승에게 더 커서 오면 방부를 받아주겠다고 했다. 그러자 그 사미승이 부처님 말씀에 생사가 호흡하는 사이에 있다고 하셨는데, 어찌 클 때까지 기다릴 수 있겠습니까?” 했다.   조실스님은 매우 기특하게 여겨 방부를 받아 주셨다아자방에서 참선하는 대중들이 한방중이 되어 마구 졸면 그 사미승은 뒤로 벌렁 자빠져 꿍 소리를 내고그리고 땅을 치고 울면서 넋두리 하기를 생사의 괴로움이 아니라면 왜 자고 싶은 잠도 못자고먹고 싶은 밥도 제대로 못먹고하고 싶은 말도 못하고 이렇게 고생을 해야 하는가라고 했다. 그러면 졸던 스님들이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정신을 차리고 열심히 정진하였다한 철 내내 이렇게 되풀이 하며 해제를 맞이하였다해제 날 조실스님의 해제 법문이 끝나자 그 사미가 대중 앞에 나와 세 번 절을 하고 조실스님께서 방부를 들여 주셔서 한 철 공부를 잘 하였습니다.”라고 했다. 그 말이 끝나자말자 그 사미는 온데 간데 없었다그때야 비로소 대중 스님네들은 그 사미는 문수보살이 화현하여 나타나신 줄 알고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더욱 발심정진 하였고 한다.  칠불사에는 이 외에도 문수보살의 화현에 관한 말씀들이 많이 전하고 있다.









    칠불사는 아자방의 구조적인 특징 뿐만 아니라 선을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는 공간으로서도 의미가 크다. 고려의 정명, 조선의 조능, 벽송, 서산, 부휴, 백암, 초의 선사 등의 고승들이 칠불사 아자방에서 수행하여 선의 법맥을 이었다.





    담공선사의 축조 당시에는 한번 불을 지피면 100일간 따뜻하였으므로 신비한 온돌방이라 하여 세계 건축사에 기록되었다..





    두돌아 가본 아자방의 후면 아궁이 쪽이다..





    운상원(雲上院)은 큰 절에서 서북쪽으로 약 300m 위에 위치해 있다.

    운상원이라는 이름은 구름 위의 집이라는 뜻이다칠불사 골짜기가 구름 바다가 될 때 이 곳은 구름 위에 드러나 있는 까닭에 운상원(雲上院)이라고 했다.

     

    운상원은 옥보대라고도 하는데장유 보옥화상이 칠왕자를 데리고 와서 공부를 시킨 곳이므로 후인들이 장유 보옥화상의 이름을 거꾸로 바꾸어 옥보대라고 했다는 설과거문고의 전승자인 옥보고가 이곳에서 50년 동안 거문고를 연구했으므로, 그 이름을 따서 옥보대라고 했다는 설이 있다현재는 칠불사 대중선원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운상선원'이라고 한다.

     

    칠불사는 거문고의 전승자로서 신라 사찬공영의 아들 옥보고가 지리산 운상원에 들어 50년 동안 현금을 연구하여 새로운 곡조 30곡을 지었다고 한다..



    이제 칠불사를 둘러 보고 보설루 아래로 내려선다..









    지리산 칠불사는 아자방 선원과 운상선원이 있어 무수한 도승을 배출한 동국제일선원이다.





    칠불사(七佛寺)는 가야 불교의 발상지이며, 문수보살의 상주도량이며, 동국제일선원이다.





    '지리산'이라는 이름도 문수보살의 갖춘 이름인 '대지문수사리보살(大智文殊師利菩薩)'에서 ()’자와 ()’자를 각각 따온 것이다.

    지리산은 상봉인 천왕봉과 주봉인 반야봉으로 연결되는데,   반야봉은 곧 문수보살의 대지혜를 상징한다. 이와 같이 지리산은 문수도량인데, 특히 칠불사는 생문수(生文殊) 도량으로서, 칠불사에서 참선을 하거나 기도를 하면 문수보살이 근기에 맞추어 화현하여 기도를 성취시켜 주고, 또한 공부인을 보살펴서 견성 오도케 하는 영험 있는 도량이다.





    동국제일선원으로 오르 내리는 계단 옆에 아름드리 가래나무와 호두나무가 자라고 있어 두 나무를 쉽게 구분할 수 있지만 이미 잎은 지고 없었다.

     




    단풍잎을 덜군 칠불사, 뭉게구름 흐르는 늦가을의 하늘이 무척 아름답다...





    아직은 단풍잎을 달고 있는 가을한테도 고마움을 전해 본다..





    칠불사 일주문을 지나..






    지리산 중턱에 걸려 있는 칠불사를 나와 굽이 굽이 산길을 돌아 다음 여행지 쌍게사로 향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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