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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림산 안적사(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내리길 461-16)사찰여행/부산 2017. 8. 20. 22:28
앵림산 안적사
2017. 8. 20.
2017. 8. 17. 둘째 딸과 함께한 부산 기장일대 당일 여행으로 아홉산 대나무숲, 임랑해수욕장, 일광해수욕장과 안적사를 다녀왔다.
오늘 네번째 마지막 여행으로 일광해변을 보고 나와서 안적사로 길을 달려 간다..
방랑과 여행은 차이가 있다. 여행은 가는 목적지가 분명하지만 방랑은 그야말로 발길이 닿는 데가 목적지가 된다. 사실 난 여행보다 방랑을 좋아한다. 발길이 가는 곳에 걸음을 멈추면 의외로 근사한 곳을 만난다. 내동에 들어서니 안적사 가는 표지판이 손짓했다...
원효와 의상스님의 수행설화가 전해지는, 안적사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에 있는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14교구 본사 범어사의 말사이다. 원효와 의상스님의 수행설화가 함께 전해져 내려온 안적사는 예부터 기장현의 4대 명찰로 기록되어 왔으며 신라의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 광복 이후까지 소실 또는 폐사되었다가 중창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경내에는 대웅전, 적멸보탑, 삼성각, 최근 건립한 불보적멸탑실상수신문(佛寶寂滅塔實相修信門) 등이 있다.
송정 방향에서 안적사에 이르는 4㎞ 정도의 도로에는 포장과 비포장이 반복되어 나타나지만, 주변의 시골 풍경, 발을 담그고 싶을 정도로 깨끗하게 흐르는 계곡물, 수영과 낚시를 하고싶은 내동저수지, 배고픔을 달래주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백숙집과 민물 매운탕 집들, 화려하면서도 소박하게 반겨주는 억새밭들이 그림처럼 펼쳐지고 있다.
올라가는 길 계곡물이 햇볕에 반짝 반짝... 안적사 아래 계곡도 정말 좋다..
안적사 가는 길은 아직도 흙길이었다. 장산의 깊은 골짜기에서 내려온 청아한 물소리며, 풀 섶의 서 있는 장승들이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반긴다. 이 호젓한 풍경에 나는 잠시 방랑자의 고독한 심사가 된다.
안적사 가는 길 정겨운 흙길 ...
안적사의 풍경은 이름 그대로 조용하고 평화로우면서, 어디론가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느끼게 한다는 것이다. 사찰의 입구까지 양쪽 진출입로의 도로 폭이 좁아서 차 한대가 겨우 지나다닐 정도이다 보니, 인근 장안사나 용궁사처럼 많은 사람이 북적거리지도 않고,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 이외 잡다한 소음들이 없다. 장산을 등반하고 내려오는 등산객들 마저도 사찰의 고요함과 평화로움에 동요되어서는 조용조용 말하고, 살금살금 발걸음을 옮기는 곳이다.
여름이 한풀 꺾여 슬픈 날.....
호젓한 산길을 따라 기장 안적사까지 녹음 냄새 퐁퐁 풍기는 산길을 올라 여름 끝 속으로 갔다.
길은 좁아도 아기자기한 산길이 주는 매력 또한 만만치가 않았다. 이렇게 도착한 안적사 주차장이다..
원통문 오른쪽으로 넓은 주차장이 있다.
그 뒤로 안적사로 들어가는 길(왼쪽)과 반송으로 넘어가는 산길(오른쪽)이 있다.
자동차가 겨우 비켜 갈수 있는 길을 한참을 올라 와서야 나오는 안적사 원통문
원통문 오른쪽으로 넓은 주차장이 있다. 그 뒤로 안적사로 들어가는 길과 반송으로 넘어가는 산길(오른쪽)이 있다.
사찰 입구에는 세상의 모든 문이 열리는 일주문으로 오르는 입구의 원통문(圓通門)이 중심을 잡고 있다..
안적사(安寂寺)는 신라 시대인 661년(문무왕 원년) 원효(元曉)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초창에 관한 문헌 자료는 전하지 않으나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반송동 운봉 부락 뒤편에 있었던 운봉사(雲峰寺)가 연원이라는 이야기도 전한다. 운봉사는 석탑 옥개석을 비롯해서 기와· 토기· 청자 파편 등이 발견되어 신라 말 고려 초의 사찰로 추정된다. 운봉사가 임진왜란으로 폐사되자 현재 지역으로 옮겨와 안적사가 되었다고 한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전소된 이후 범어사(梵魚寺) 묘전 화상(妙全和尙)이 중건하였다. 1873년에는 대웅전, 수선실 등을 경허(慶虛)· 해령(海嶺)이 중수하였으나 광복 후 거의 폐사되고 소실 되었다. 1973년부터 덕명이 대웅전, 삼성각, 수선실, 요사채 종무소 등을 다시 지어 지금의 가람 배치를 갖추었다.
안적사는 현재 조계종 제14교구 본사 범어사의 수사찰(首寺刹)이다. 전국에서 수선 납자(修禪衲子)들이 모여 수행을 하는 남방 수선 제일 도량(南方修禪第一道場)으로 그 이름을 떨쳐왔다.
그 곳을 통과하면 일주문까지의 108 계단이 천국의 계단처럼 하늘로 향해 뻗어 있다.
안적사는 천 년의 사찰이며 경남 기장군의 대표사찰이다.
안적사는 신라 30대 문무왕 원년 불기 1205년(서기 661년) 에 원효조사와 의상조사, 두 분이 수도의 길을 찾아 명산을 순방하며 다니다가, 동해가 환히 바라보이는 장산기슭을 지나갈 때 숲속에서 난데없는 꾀꼬리 떼들이 모여 날아와 두 스님의 앞을 가로 막으며 어깨와 팔에 안겼다고 한다.
두 분은 이곳이 보통 상시로운 곳이 아니라는 것을 간파하고 원효조사가 가람을 세웠기에, 개산조(開山租)가 원효조사(元曉租師)이다.
원효대사와 의상대사에 대한 일화는 전국 곳곳의 사찰의 유래만큼 많이 전해져 내려온다. '삼국유사'에 원효대사는 "이 세상에 얽매이지 않았고 거침이 없었다"고 쓰여 있지만, 모두에게 알려진 것처럼 원효대사에게는, 설총을 낳은 요석공주가 있었다. 그러나 의상대사에 대한, 고해를 건너 열반한 행적이 기이할 정도로 너무 깨끗하다.
아무튼 두 스님은 요즘말을 빌리면, 선의의 라이벌 관계이었다. 똑같은 시각에 공부를 시작하여 누구든지 먼저 오도(悟道)를 하게 되면 만나자고 맹세하고, 조금 떨어진 곳에 토굴을 지어 피나는 정진의 세월을 보낸 후, 성불에 먼저 입문하신 의상조사가 천녀(天女)가 나타나 천공을 매일 올리게 되었다.
이를 자랑하고 싶은 마음으로 '원효조사'를 청하여 천공(天供)을 같이 하려는데, 천녀가 나타나질 않아 원효조사는 기다리다 그냥 처소로 돌아가신 뒤에 천녀가 천공을 가지고 나타났다. 의상조사는 이에 심히 천녀를 나무라니 천녀는, '이곳 가람 주위에 화광(火光)이 가득 차 들어 올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그때야 의상조사는 원효조사의 신통으로, 의상조사의 교만한 마음을 알고 금강삼매화(金剛三昧火)를 놓은 것을 알아챘다. 그러나 의상조사는 원효조사의 도력이 자기보다 훨씬 높다는 것을 알고 교만하지 않고, 원효조사를 사형(師兄)으로 정중히 모시며 이곳에 수선실(修禪室)을 넓혀 큰 가람을 신축하여, 금강삼매론경등일심법계(金剛三昧論經等一心法界)의 진리를 후학에게 설파 지도하며, 신라 백성에게 화엄사상을 역설하시어 구국정신을 고취시켜 삼국통일에 근간을 이루었다.
후대에 두 분의 일화와 함께 안락사터의 산명(山名)은 앵림산(鶯林山)이 된다. 그리고 이곳에서 정진수도하여 안심입명(安心立命)의 경지를 요달하여 적멸상(寂滅相)을 통관하였다 하여, 사명(寺名)을 안적사(安寂寺)라 부르게 되었다.
지금도 전국에서 수선납자(修禪衲子)들이 구름 모이듯, 남방수선제일 도량(南方修禪第一道場)으로 불법의 바다를 넓히고 있다.
일주문, 천왕문, 경내로 이어지는 오밀조밀한 코스를 경건한 마음으로 걸어들어 가보길 권한다. 적멸의 계단 한 계단씩 올라갈 때마다 경내로 진입하는 동안 세진의 때를 말끔히 벗고 청정한 일심으로 부처님전을 참배하게 되는 감동을 느끼게 될 것이다.
108계단을 지나서 안적사 일주문이 보인다..
안적사 일주문에 '앵림산 안적사'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앵림산안적사(鶯林山安寂寺) 현판은 우재(玗齋) 이다우(李多雨)선생의 글씨다.
최근에 건립한 일주문의 안쪽 ' 불보적멸탑실상수신문(佛寶寂滅塔實相修信門)' 현판은 청남(菁南) 오제봉(吳濟峯,1908-1991)선생의 글이다..
'앵림산 안적사'라 적혀있는 일주문을 통과하면 잘 다듬어진 사철나무 뒤로 천왕문이 자리 잡고 있다. 일주문에서 바라본 천왕문(天王門)이다..
일주문 뒤쪽에 멋진 소나무 두 그루
멋진 두그루 소나무 앞에서 바라 본 안적사 전경이다..
천왕문이 보이고...
천왕문 들어서기 전에 좌측에 있는 부도와 각종 비석
좌측으로 부터 묘지광배처자추모비, 조선시대 부도, 안적사 적멸보탑건립 설판시주 방명록(1973년), 안적사 사적비명(1973년)이고 안적사 적멸보탑 관음회 방명록(1973년) 은 사진에 안보이지만 그 옆으로 있다.
좌측으로 부터 묘지광배처자추모비, 조선시대 부도,
좌측으로부터 안적사 적멸보탑건립 설판시주 방명록(1973년), 안적사 사적비명(1973년)
우측에 위치한 '안적사사적비(安寂寺事績碑)'는 거북좌대로 입석인데, 사적비의 원문은 최범술(崔凡述,1904∼1979) 선생이 지었으며, 글씨는 청남(菁南) 오제봉(吳濟峯,1908-1991) 선생이 썼다고 한다. 최범술 선생은 일제강점기 경남 곤양의 다솔사에서 다도(茶道) 연구에 몰두하고, 우리의 차문화 정립에 기여한 바있다. 어떤 인연으로 안적사의 사적비를 지었는지 궁금하다.
안적사적멸보탑관음회방명록(1973년)
천왕문 들어서기 전에 우측에 있는 감로수
천왕문은 불법을 수호하는 외호신(外護神)인 사천왕을 모신 건물이다. 사천왕들은 수미산 중턱의 동서남북 네 방향을 지키면서 불법을 수호한다고 한다.
천왕문에서 본 사리탑과 대웅전
천왕문 뒷편은 '반야문'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천왕문 들어서 대웅전을 바라보며 왼쪽의 범종
법고, 운판, 목어가 보이지 않은채 동종만 있는 범종각이 산사에 울려 퍼지는 종소리가 듣고 싶어진다.
경내에 들어서면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해둔 적멸보탑(1973년 조성)을 먼저 볼수 있다..
천왕문을 통과하면 비로소 사찰의 전체 윤곽이 한 눈에 들어온다. 정면으로 사리탑과 대웅전이, 그 좌우로 삼성각, 수선실, 범종 등이 질서정연하게 균형을 잡고 있다.
여래 진신사리 보탑(如來眞身舍利寶塔)
재일불자 신수일께서 소장하고 계시던 천축, 지금의 인도에서 천년전에 조성한 비로자나 불상에서 수급한 부처님 몸에서 나온 사리를 고향인 탐라 관음사 향운스님에게 증정한 것을 안적사, 1973년 사리보탑 불사에 동참하여 불사리 3과를 기증받아 모시게 되었다.
대웅전을 바라보며 우측에 ‘안적사(安寂寺)’현판을 달고 있는 요사이다.
‘안적사(安寂寺)’현판은 만당(晩堂) 성주표(成周杓) 선생의 글씨이다.
만당 성주표 선생은 '감옥으로 부터의 사색' 의 저자, 소주 '처음처럼'글씨로 유명한 신영복(1941~2016) 교수의 서예 스승이다.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20년이 넘는 수감생활을 할 동안 감옥에서 서예를 배워서 어계동무체라는 글씨체를 유행시켰다. 소주 이름을 부탁 받았을 때 “가장 서민들이 많이 즐기는 대중적 술 소주에 내 글이 들어간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다” 고 했다고 한다. 이에 따라 마침내 2006년 2월 신 교수가 직접 쓴 ‘처음처럼’이 그의 저서 ‘감옥으로 부터의 사색’ 속 ‘새 그림’과 함께 소주병에 찍혀 세상에 알려졌다. 신 교수는 저작권료도 받지 않았다. 업체가 여러 차례 지불을 시도했으나, “나는 돈이 필요하지 않다”며 극구 사양했고, 결국 두산주류는 저작권료 대신 신 교수가 몸 담고 있는 성공회대학교에 1억원을 장학금 형식으로 기부했다.
대웅전(大雄殿)은 1990년 지어졌으며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식 팔작지붕 건물이다.
적멸보탑의 위쪽으로는 안적사의 중심을 잡아주고 있는 대웅전이 자리하고 있다..
1990년에 새로 지은 대웅전 내부에는 아미타불을 주존으로 좌보처에 관음보살, 우보처에 대세지보살을 봉안하였는데 주존불인 아미타불은 1654년(효종 5년)에 경주 남석(南石)으로 조성한 것이라고 한다.
대웅전 후불탱화가 부조형식으로 되어있다.
대웅전 삼불 위의 장엄한 닫집
신중목각탱
지장탱
지장단과 영가단 사이로 법당 한쪽에 오늘의 안적사를 중건하신 덕명(德明, 1926~2003) 스님의 진영이 봉안되어 있다.
영가단
부산광역시 문화재 자료 제 29호인 안적사 지장시왕도..
「안적사 지장시왕도(安寂寺地藏十王圖)」는 중생의 사후 세계를 관장하는 지장보살과 명부(冥府)에서 중생들의 죄질을 심판하는 십대 명왕들, 그리고 그 권속들을 도설하고 있는 불화이다.
지장시왕도는 명부전의 후불탱화로 제작되는 경우와 대웅전·극락전 등의 전각에 중단 탱화(中壇幀畵)로 조성되는 경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는데, 「안적사 지장시왕도」는 후자의 경우에 해당한다. 현재는 범어사 성보박물관으로 옮겨져 보관하고 있다.
부산광역시 문화재 제 30호인 안적사 아미타 극락회상도
「안적사 아미타극락회상도(安寂寺阿彌陀極樂會上圖)」는 아미타여래가 서방 극락세계에서 설법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보통 아미타극락회상도는 극락전의 본존불인 아미타여래의 후불탱화나 감로 탱화 등의 상단탱화로 그린다. 아미타 설법도(阿彌陀說法圖), 극락 내영도(極樂來迎圖), 관경 변상도(觀境變相圖), 극락 구품도 등으로 나뉘며, 모두 정토 삼부경(淨土三部經)[『대무량수경(大無量壽經)』,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 『아미타경(阿彌陀經)』]의 내용에 따라 그려진다.
그림의 구도는 의도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아미타여래와 좌우 보처보살(補處菩薩)인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만 그려 설법 광경을 나타내기도 하고, 여래와 두 보처보살 외에 여러 보살상과 사천왕·성문중(聲聞衆)을 그려 설법을 베푸는 자와 듣는 자를 같이 표현하기도 한다. 또 설법 청문도에 더 많은 성중(聲衆)을 그리고, 여기에 극락 내영도를 함께 나타낸 것도 있다. 대체로 후기로 갈수록 그림의 구성이 복잡하고 화려해지는 경향을 보인다.
대웅전(大雄殿)의 종
대웅전(大雄殿)의 벽화
대웅전(大雄殿)의 꽃살문
대웅전(大雄殿)에서 바라본 안적사 전경이다..
대웅전 바라보며 왼편에 주지스님이 거처 하고 계시는 보림원(寶林院)이 자리하고 있다. 보림원(寶林院) 현판은 우재(玗齋) 이다우(李多雨) 선생의 글씨이다.
대웅전 바라보며 오른편에 요사인 설현당(說玄堂)
대웅전 바라보며 오른편에 요사인 설현당(說玄堂) 한쪽에는 '신검당'이란 현판도 달고 있다..
대웅전 바로 옆에 안적사 삼성각
'삼성각' 좌우 벽에 원효와 의상의 천공벽화가 각1점씩 그려져 있다는데 보지를 못해 또 언제가서 한번 볼수 있을런지?
1973년에 조성한 독성탱
근래에 조성한 칠성탱
1973년에 조성한 산신탱
삼성각에는 칠성탱·산신탱·독성탱과 원효· 의상(義湘)· 동산(東山)의 진영이 있다.
삼성각 입구에서 우측벽면에 좌측부터 윤필거사, 원효대사, 의상대사
삼성각 입구에서 좌측 벽면에는 동산대선사(東山大禪師, 1890~1965) 진영이 있다..
현재의 안적사를 중건하신 덕명 스님이 동산 스님의 법손(法孫)이라 안적사에 동산 스님의 진영을 모신 것으로 인물화의 대가라는 동호(東湖) 정형모(鄭炯謨) 선생이 1981년(신유년)에 그린 것이라 한다.
안적사 한 쪽 켠에 이곳에서 30년간 주석한 남곡당 덕명스님의 부도탑과 탑비가 세워져 있다.
남곡당 덕명스님의 부도탑비
작은 암자였던 절을 이렇게 대작불사를 하신 남곡당 덕명스님 공덕비로 비문의 내용과 글씨를 하동 칠불사 큰스님이신 통광스님께서 작성하였다고 한다.
남곡당 덕명스님의 부도탑
전국에서 수선납자(修禪衲子)들이 구름 모이듯 하여 남방수선제일도량(南方修禪第一道場)으로 그 이름을 떨쳐온 안적사는 전시에는 호국도량으로, 평상시엔 선지식을 키워내는 정진도량으로서의 역할을 오랜 세월 일구어 내 왔다. 그러나 기장에서 가장 오래된 이렇게 유서 깊은 안적사도 신흥 관광사찰에 현혹된 불자들이 집중화로 점차 쇠락해 가고 잊혀져 갈 뿐이다.
변방의 바닷가 마을의 작은 사찰이라고들 하지만 조사스님들이 창건설화나 그간 안적사를 거쳐간 큰 스님들의 행적을 되짚어 볼 때 그 사격이 영원히 빛을 발할 것으로 확신한다. 예전 노장스님네들은 그랬다고 한다. 절에 사람들이 많이 찾아들면 절이 절답지 못하게 된다고. 역시 절은 절 다워야 하고 수행자가 사는 곳다워야 한다는 말씀이다.
몇 년 전에 열반하신 남곡당 덕명 대종사의 지론도 그러했다고 한다. 그것은 아무래도 숭유억불이라는 탄압에 가까운 조선왕조를 관통해 오면서 스님들의 마음 속 깊이 자리한 일종의 응어리가 아닐까. 근 5백년 동안 절 살림을 착취 당해오던 스님들의 그러한 의식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덕명스님은 안적사에 근 30여년을 주석하면서 사찰을 다시한번 일으켰다. 안적사는 그래서 발목을 잡아 매어두는 묘한 매력이 있는 절이다. 해방 후 소실되었던 안적사는 이곳에 30년간 주석한 덕명스님의 원력으로 다시 대가람을 이루었다. 더우기 절을 절답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인 수행력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 전통도량으로서 안적사는 이제 새로운 역사를 시작했다.
남곡당 덕명스님 부도에서 내려 와서 바라본 안적사 전경이다..
대웅전 뒤편으로 삼소굴(三笑窟)이라는 아담한 선원이 자리하고 있는데 일반인 통제구역이었다..
오밀조밀하게 배치된 건물들이 참 편안하다는 느낌을 준다..
다시 돌아와 대웅전 마당에서 안적사와 작별인사를 한다..
반야문 현판을 단 천왕문을 나서..
일주문도 지나..
여름 깊숙한 곳에서 다소곳이 자리를 잡고 있는 안적사를 나간다.
내 마음은 어디로 헤매지 않고 지난날의 음악과 함께 이곳에 머물 것이다....
위대한 것에는 반드시 전설이 따른다고 한다. 원효조사와 의상조사의 창건설화가 깃든 안적사의 전설에 의해, 여름산은 적멸 그 자체이다.
오늘따라 안적사는 더욱 고요하고 계곡물은 더 투명하고 밝다. 산과 계곡과 안적사는 나를 위해 그곳에 있는 것처럼…
저녁연기 모락모락 올라오는 옛 마을에 닿은 발길은, 어디에서 만나지 못한 마음의 절 한 채를 만난다.
신비한 저녁 운무가 맴도는 앵림산, 그러나 내 마음의 귀는 아직 어두워 꾀꼬리 울음이 들리지 않는다. 평생 진리의 소리를 찾아 전국 산하를 누비며 호국의 횃불을 당긴 두 분 고승의 원대한 염원처럼 저녁 산사의 종소리는 징하게도 크게 울린다.
저 종소리에 문득 가슴이 미어지는 까닭 또한 나는 알지 못한다. 푸르른 녹음은 더욱 짙어, 산은 안적사를 품고 더욱 깊어만 간다.
안적사 둘레에는 원시의 바닷 냄새가 종소리처럼 퍼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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