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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성지 (제주시 오현길 61)와 오현단(제주시 오현길 61), 동문시장여행방/제주도 2017. 3. 14. 20:00
제주성지(제주도기념물 제3호). 다섯 명의 현인을 기리는 제단, 오현단(제주지방 기념물 제1호), 동문시장
2017. 3. 14.
드디어 제주 한달 살기를 떠나, 제주도에 도착 후 한달살기 첫날이 시작된다...
먼저 제주항에 도착, 점심식사 후 제주 한달살기 첫날 여행지는 제주시를 중심으로 삼성혈, 제주성지.오현단, 동문시장, 제주목관아.관덕정, 용두암을 두루 들러볼 계획이다..
제주 한달살기 첫날 여행지 삼성혈을 둘러 본 후 두번째로 제주성지와 오현단으로 향한다...
오현단 일대에는 옛 제주성의 흔적이 또렷이 남아 있다.
바닷속에 대부분 묻혀버린 옛 자취, 제주성지는 제주도기념물 제3호로 지정된 탐라국 수부(首府)의 성곽으로 축성
축성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조선 초기에 처음 쌓은 것은 아니고, 탐라국 당시 쌓았던 것을 고려 때 왜구 방어용으로 보수하여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는 일부인 남수각 부분이 150여m 정도 복원되어 있다. 제주도의 중심지역을 지켰던 이곳이 보존상태가 좋지못한 것은, 일제강점기인 1925년부터 1928년 사이에 건입동 포구 앞바다를 매립할 때 성곽의 돌을 매립골재로 사용하면서 크게 훼손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헛놓인 돌 하나 없이 듬직한 성곽 주위에는 귤과 유자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어 가을철 귤이 익을 무렵 성주위는 가을색으로 절정을 이뤘다고 전해진다.
허물어져 가는 옛 성터가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하지만, 튼튼한 성을 쌓으며 왜침의 '바람'을 잠재우려 했던 선인들의 지혜를 느낄 수 있다.
제주성지는 제주목의 치소를 둘렀던 성터로 돌담을 쌓아 올린 외관 덕에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제주성을 언제 쌓았는가에 대해서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탐라국 당시 쌓았던 것을 고려시대에 확장 축조하였으며 조선시대에도 여러 차례 보수해 왜구 방어용으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오랜 역사를 이어온 제주성지는 그러나 일제강점기 들어 크게 훼손되고 만다.제주항을 개발하면서 성벽을 허물어 바다메우는 골재로 사용한 것.제주성의 옛 자취는 대부분 바닷속에 묻히고 극히 일부만 남았지만 옛 조상들의 축성법을 알게 해주는 귀중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현재 남수각 부분 150여m가 복원된 상태이며 제주성지의 역사적 가치를 높이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산지천을 따로 올라가 동문시장통을 지나 10분 정도 올라가면 오현단이 나온다.
오현단은 제주의 문화와 사상, 교육과 학문에 공헌한 다섯 사람을 기리는 제단이다. 오현은 제주에 유배 온 충암 김정, 동계 정온, 우암 송시열과 안무어사로 내려온 청음 김상헌, 제주목사로 부임해 온 규암 송인수를 말하는데, 김정이 1578년 처음 배향되고 송시열이 1695년 마지막으로 배향된 것을 보면 오현의 구성 기간이 100여 년에 걸쳐 있음을 알 수 있다. 1871년 흥선대원군이 유학의 전당이었던 서원을 대대적으로 철폐하자 이를 안타깝게 여긴 유생들이 조두석을 쌓아 제사를 지내면서 지금의 오현단이 되었다. 오현과 유생들의 깊은 뜻에 비해 오늘날의 유적은 다소 작고 초라해 보여 보는 이의 마음이 숙연해진다.
제주목 관아에서 동남쪽으로 약 500m 떨어진 지점에 오현단이 자리하고 있다. 현재 제주기념물 제 1호로 지정되어 있다.
입구 바위에 새겨진 오현단이라는 이름에서 이곳이 다섯 명현을 배향한 곳임을 알겠다.
거무튀튀한 높은 성벽을 따라 제법 장한 나무가 우거져 있고, 그 사이로 몇 채의 건물이 보인다. 오현단이다...
길 오른편에 나 있는 작은 사립문을 통해서 오현단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사당 주변에는 보통 홍살문을 설치하며 유교건축상 외삼문을 건립할 만도 한데 정체를 알 수 없는 의외의 문이 자리하고 있다.
이 터에는 중종 15년(1520)에 기묘사화로 인해 제주도에 유배되었던 김정, 중종 29년(1534) 제주목사로 부임했던 송인수, 선조 34년(1601) 안무사로 제주에 건너왔던 청음 김상헌, 광해군 6년(1614) 폐모살제의 부당함을 비판하다 유배되어 왔던 정온, 숙종 15년(1689) 기사환국을 겪고 제주도로 유배왔던 송시열까지 다섯명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세종 때의 제주 출신 문인 고득종을 모신 향현사
원래 이 터는 제주판관 조인후를 중심으로 한 지방유림의 공의로 김정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귤림서원이 자리하고 있던 곳이라 전한다.
그들은 먼저 김정을 모시는 사당으로 '충암묘'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고 이후 정온 · 김상헌 · 이약동 · 송인수 등의 인사를 추가적으로 배향하게 되는데 숙종 8년(1682)에 정부로 부터 사액을 받게 되면서 사액서원이 되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이 집권하던 시기 서원철폐령의 서슬을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 훼철되었고 이후 고종 29년(1892) 비어있던 터에 제주 사람 김의정이 중심이 되어 단을 새롭게 정비하였다. 그는 옛 귤림서원 자리에 오현의 뜻을 후세에 기리고자 조두석을 세우고 제단을 쌓아 제사를 지냈다.
오현은 이 곳에 유배된 충암 김정, 동계 정온, 우암 송시열을 비롯해 제주목사와 안무사로 각각 부임했던 규암 송인수, 청음 김상헌을 말한다.
오현단의 다섯 조두석은 그 흔한 명문조차 없을 정도로 제주를 닮아 소탈하기 그지없다
이 조두석에는 그 흔한 이름마저 새겨 있지 않을 정도로 소박하다. 아무런 글씨도 없이, 그저 제주의 자연에서 얻은 돌을 그대로 세운 그 무미한 소탈함에 진한 감동마저 온다. 큼직한 비석도 아닌, 화려한 글씨가 새겨진 것도 아닌데도, 이 작은 비석 다섯이 주는 여운과 신성함은 이루 다 표현할 길이 없다. 이따금 성벽을 훑고 지나가는 바람이 비석을 휘감아 돌아 신성한 기운을 더해준다. 비석 뒤의 일산처럼 가지를 뻗은 검양옻나무 한 그루와 제법 장한 나무 몇 그루들이 길게 그늘을 드리우며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어 제단으로서의 신성한 기운을 한껏 살려주고 있다.
귤림서원이 대원군때 헐리게 되자 그 옛 터에 이들의 위패를 모시고 배향한 단이 곧 오현단이다. 고종 29년(1892)에 제주사람 김의정이 중심이 되어 비를 세우고 제단을 쌓았다.
오현의 위패를 상징하는 조두석은 높이 43~45cm, 너비 21~23cm, 두께 14~16cm 이며 다섯 기가 33~35cm 간격으로 나란히 서있다.
우암 송시열선생의 '적려유허비'
우암 송시열의 적려 유허비도 오래된 세월 속에 초록색 이끼가 가득 끼었다. 그렇게 세월의 무게가 고스란히 이 비석에 내려 앉아 있는 셈이다.
지금도 단 내에는 옛 터의 흔적을 나타내 보여주는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데 그 중에서 '증주벽립'의 마애각석이 눈에 띤다.
'증주벽립 (曾朱壁立)'이라는 이 각자는 우암 송시열 선생이 서울 혜화동 집터에 남겼던 각자의 명문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를 제주 판관이었던 홍경섭이 우암 송시열 선생의 적려유허비 뒤편에 송시열을 추모하며 각자로 새로 새긴 것이다.
'증주벽립' 이 네 글자는 중국의 선현인 증자 · 주자와 관련된 말이다. 증자는 '대용(大勇 :큰 용기)'에 대하여 "스스로 반성하여 의롭지 않으면 비록 상대가 보잘것없는 사람이라도 두려워할 것이며 스스로를 반성하여 의롭다면 비록 천만 명이라도 두려워하지 않고 나의 길을 갈 것이다." 라고 하였다.
주자는 자신과 부젼의 인사들이 탄압을 받을 때 죽림정사에서 강학에 열중하고 있었는데 당시 주변 사람들이 화를 피하라고 충고하자. "이제 나에게 화를 피하라는 말을 하는 것은 본래 서로 아끼는 마음에서 한 말이이라. 그러나 내가 이에 굴복하지 않고, 온갖 비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만 길 되는 저 높은 절벽처럼 꿋꿋이 서서 버틴다면 나의 도를 위해 한 가닥 빛이 되기에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라고 사람들을 타일렀다고 한다.
결국 이 암벽의 글은 증자와 주자의 뜻과 같이 천만인이 나를 막거나, 만 길 되는 절벽이 나를 막아서다라도 의(義)로운 나의 길을 가겠다는 송시열의 결연한 의지를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증주벽립', 송시열의 글씨로 '증자와 주자가 이 벽에 서 있는 듯이 존경하고 따르라'는 뜻이다
문화의 불모지였던 제주에 건너왔던 인사들...
그것이 죄인의 처지였던 관리의 처지였던 제주인들의 의식과 문화에 많은 영향을 미쳤으리라. 제주인들은 그들을 잊지 않고 지금도 이곳에서 해마다 제사를 지내고 있다.
오현단 근처에는 다양한 먹거리와 상업의 중심, 제주 동문 재래시장이 있다..
전통이 있는 따스함과 정겨움으로 가득한 제주 동문 재래시장을 구경해보자...
제주에서 제일 크고 오래된 시장인 제주 동문 재래시장은 1945년에 형성되었으며 점차 관광객이 늘어나 발걸음이 잦아지면서 상업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금복국수집의 고기국수
제주 동문 재래시장하면 떠오르는 것이 먹거리이다.
오메기떡, 빙떡이나 한라봉, 귤, 흑돼지와 관련한 먹거리가 가장 유명해 방송매체에서도 소개된 적이 있다.
대표적으로 대게 그라탱, 대게 크로켓, 우도땅콩 아이스크림 등이 있고 제주 특산물 또한 유명하다.시원하면서 달콤한 한라봉주스와 감귤 미니 돌하르방, 시장상인들의 인심에 또 반한다..
귀여웠던 주스가게
고기국수
볼거리 먹거리 많던 동문시장
동문시장 성게미역국
동문시장 한치물회
동문시장 대게그라탕 & 모듬꼬치
대게 그라탕 대게고로케 꼬치까지
크림치즈 대게 고로케 착한가격 한번쯤 먹어볼수 있는 먹거리
동문시장에 가시면 흑돼지 문어구이를 먹을 수 있다. 컵에 담아 주어 꼬치로 찍어 먹는다. 치즈까지 추가하면 비주얼 최고~
동문시장은 올레시장보다 규모면에서 크고, 다루는 품목이 다양. 특히 수산물이 다양하고 신선해서, 개인적으로는 횟집에서 먹는 것보다 동문시장에서 회를 사는 것도 좋은 방법. 회를 떠서 숙소에서 먹거나, 만원의 자리세를 내고 식당에서 먹을수도 있다.
말육회
왠지 모를 따뜻함과 정겨움이 가득한 제주 동문 재래시장에서 제주도의 대표적인 먹거리와 시장의 인심을 만나보러 가보기를 추천한다.
곡식, 야채, 생선, 과일 등을 포함한 축산물, 수산물, 건어물뿐만 아니라 생활용품, 신발,
의류 등을 판매하고 있다. 또한 사시사철 각각 다른 가격, 맛으로 유명한 귤을 만나볼 수 있다.
그나마 옛 제주성과 오래된 나무들이 있어 신성한 기운이 넘치는 오현단을 나서 인근의 다양한 먹거리와 상업의 중심, 제주 동문 재래시장도 보고 서북쪽으로 약 500m 떨어진 지점에 자리하고 있는 제주목관아.관덕정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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