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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 용문사
2016. 8. 12.
2016. 8. 11. 대학 78학번 친구들과 함께한 경북 예천군의 곤충엑스포 여행길에 들러본 예천 용문사이다 .........
용문사는 870년 (신라 경문왕 10년)에 두운 선사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전해온다. 고려 태조 왕건이 신라를 정벌하러 내려가다 이 사찰을 찾았으나 운무가 자욱하여 지척을 분간치 못했는데, 어디선가 청룡 두 마리가 나타나 길을 인도하였다하여 용문사라 불렀다고 한다.
고려 명종 때 ‘용문사 창기사’로 개명했으나 조선 세종대왕의 비 소헌왕후의 태실을 봉안하고 ‘성불사 용문사’로 다시 고쳤고, 정조 때 문효세자의 태실을 이곳에 쓰고 ‘소백산 용문사’로 바꿔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 때 영남 제일강원으로 불릴 만큼 큰 사찰이었으나 화재로 인해 사세가 크게 줄었다고 한다.
경전 한 권을 읽는 만큼의 정성으로 아름드리 소나무 숲길을 기대했지만 인적 없는 주차장에는 오후의 땡볕만 이글거린다.
사찰의 첫 문인 일주문은 1689년 초장했다. 기둥 2개에 지붕을 올린 구조로 사찰의 경계를 표시한다.
일주문은 성(聖)과 속(俗)을 구분 짓는 종교적 의미 뿐만 아니라 사(邪)됨을 막는 벽사의 기능도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일주문에는 사명(寺名)과 사찰이 소재한 산명(山名)이 적힌 편액 혹은 ‘자하문(紫霞門)’,‘ 조계문(曹溪門)’과 같은 편액이 걸리기도 하는데, 용문사 일주문에는 현재 ‘小白山龍門寺’ 란 편액만이 걸려 있다.
「속용문사적기續?門事蹟記」에는 1608년에 시작된 용문사 창의 막바지 불사로 1689년에 건립될 예정이라고 적고 있다. 이후의 중 창기록은 전하지 않지만 공포의 조각수법이나 장식은 17세기보다는 18세기 후반의 건축적 형식이 강하게 드러난다. 대장전의 공포와 유사 한 것으로 미루어 대장전 중창과 궤를 같이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주문 추녀마루에는 얼마 전까지도‘昭和十三年’명 암막새가 놓여있어 1938년에 보수가 되었음을 알수 있다.
공포대는 두 개의 간포(間包)와 두 개의 귀포로 이루어져 있으며, 출목은 앞뒤 모두 2출목이다. 공포는 하나의 수서와 두개의 앙서, 그리고 권비형(拳鼻形) 운공(雲?)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지붕 형태는 우진각 지붕으로 중국의 패루(牌樓)와 닮았다 한다.
소백산 자락이 흘러내려 이룬 용문산은 아름답다.
용문사 일주문에 이르면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왼쪽은 근래 새로 낸 길이고, 오른쪽은 옛부터 있던 길로, 옛길로 난 길의 계단을 오르면 회전문에 도착한다.
일주문을 지나자 마자 도로옆으로 난 짧은 숲길을 따라 오르면 용문사 경내까지의 거리는 매우 짧지만 울창한 숲이 주는 느낌이 너무 좋다.
소백산 용문사 현판이 쓰여진 일주문을 지나서 처음 만나는 문이 회전문(廻轉門)이다.
사천왕상이 모셔져 있는 회전문과 해운루를 통과하면 고요한 적멸의 공간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첫인상이 유난히 정갈한 사찰이다.
회전(廻轉)은 '윤회전생(輪廻轉生)'의 줄임말로 일반사찰의 사천왕문(四天王門)에 해당된다.
회전문은 불교의 윤회사상을 담고 있는 윤회전생(輪廻轉生)에서 온 말로 회전장치가 있는 건물의 회전문과는 다르다. ‘회전문(回轉門)인사’라는 말이 정치판에서 사용되고 있는데 불교의 연기사상을 담고 있는 ‘회전문(廻轉門)’을 이해한다면 정치인들도 달라지지 않을까 싶다.
용문사 회전문은 사천왕상을 모셨다. 양쪽 들보 위로 청룡과 황룡이 머리를 내밀고 있다.
서까래 양록 단청과 뒤에 댄 판재의 붉은 단청이 통도사 불이문 천장 같은 분위기를 낸다.
회전문 안에는 사방을 지키고 불법을 수호하는 4명의 천왕상이 있으며 좌우 2구씩 목책안에 안치되어 있다.
보광명전으로 들어가는 왼쪽 앞쪽에 서방 광목천왕(廣目天王)이, 뒤쪽에 북방 다문천왕(多聞天王)이, 오른쪽 앞쪽에 남방 증장천왕(增長天王)이, 뒤쪽에 동방 지국천왕 (持國天王)이 배치되어 있다.
사천왕상은 흙을 사용하여 의자에 걸터앉은 자세로 천왕이 든 지물은 다문천왕이 당(幢) 을, 광목천왕은 용(龍)과 보주(寶珠)를, 지국천왕이 비파를, 증장천왕이 검을 들고 있으며 얼굴은 불법을 수호하기 위하여 험상궂은 표정을 하면서도 눈썹과 수염 등에서 부드럽고 해학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사천왕 발아래에는 악귀들이 천왕의 다리를 받쳐 들고 있다. 1688년에 사천왕상이 제작되었다.
흙으로 빚어 칠을 한 소조상이다.
회전문 다음 석축에는 해운루가 올라서 있다.
해운루 입구쪽에서 바라본 회전문이다.
회전문에서 올려다본 불국토로 들어가는 길
회전문을 지나 계단을 올라 해운루 누각을 지나면 보광명전을 비롯 많은 전각들이 눈에 들어온다.
누각 아래를 통해 절 마당으로 드는 마지막 관문이고 1984년에 불타고 새로 지었다.
해운루 오른쪽으로는 자운루가 보인다.
'자운루'는 대장전에 대응하는 문루(門樓)이며, 보광명전과 대응하는 '해운루'와 나란하게 서 있다.
임진왜란 시 승병들의 지휘소로 이용되었던 자운루가 용문사에 아직도 남아있어 호국불교의 기풍을 후손들에게 전하고 있다.
용문사 자운루(경북도지정 유형문화재 제476호)
자운루는 2층 누각집으로 고려 의종 20년(1166)에 자엄스님이 세웠으며, 조선 명종 16년(1561) 고쳐 짓고, 광해군 13년(1621)에도 고쳐지었다. 그 뒤, 1979년에 보수하여 오늘이 이르고 있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새 날개 모양으로 짠 익공 양식으로 꾸며져 있으며 안쪽 천장은 뼈대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연등천장이다.
임진왜란 때는 승병들을 지원하기 위해 이곳에서 짚신을 만들어 조달한 신방의 기능을 수행한 호국의 장소이기도 하고 건축 양식으로 보아 조선 중· 후기의 기법을 지니고 있으며, 불교 행사가 있을 때 법공양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해운루 보다 훨씬더 오래된 듯한 자운루는 용문사의 운치를 한껏 더 돋보이게 해주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해운루로 오르는것 보다 옛날을 느끼기에는 자운루로 오르는것이 더 나은듯 하다.
자운은 보랏빛 구름, 즉 상서로운 구름을 뜻한다.
누의 역할은 사찰마다 약간 차이를 보이는데 주로 휴식과 수행의 공간으로 사용되거나 출입문의 역할을 하는 등 복합적인 성격을 가진다. 자운루는 평면형의 구조나 대장전 쪽을 제외한 좌측과 정면에 개폐가 가능한 벽체가 설치되어 있는 점으로 미루어 수행과 휴식의 공간으로 사용되었다고 본다.
용문사 자운루에서 바라본 용문사 전경이다.
해운루'는 보광명전에 대응하는 문루(門樓)이며, 대장전에 대응하는'해운루' 문루(門樓)와 나란하게 서 있다. 해운루(海雲樓)에 걸린 '소백산용문사' 편액은 해인사에 머물렀던 불교계에 이름난 서예가 송월(淞月) 스님이 쓰셨고 왼쪽 관지에 '고희'라고 적혀 있는 걸로 보아 세속 나이 일흔이던 1995년에 쓴 것 같다.
해운루 또한 1984년 화재때 소실되었다가 1990년에 복원된 건물이다.
해운루 편액은 누각 올라서서 뒤쪽에 걸려 있다.
해운루에서 바라본 용문사 대광명전과 좌측의 5층석탑과 우측의 3층석탑과 이다.
해운루를 누하진입식으로 통과하면 높다란 계단 위에서 보광명전이 위엄있게 우리를 내려다본다. 험준한 소백산맥의 지형을 이용해 만든 사찰이다.
보광명전을 중심에 두고 거대한 쌍탑이 좌우로 굳건히 지키고 있는데 그 모습이 장엄하고 웅장하다.
좌측의 탑은 5층이고 우측의 탑은 3층으로 구성되어 있어 독특하다는 생각이 든다.
1984년 화재 이후 용문사는 중창불사에 힘을 쏟고 있다. 옛 건물과 신축한 시설물이 어울리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그런 것에 당황하거나 안타까워 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절을 찾는 이유는 채우러 가는 것이 아니고 비우러 가기 때문이요, 유명한 문화재가 있고 없고, 많고 적음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 숨은 부처를 찾으러 간다는 것 이상의 명분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도 계시는지 모르겠지만 주지스님인 청안스님은 모 이동통신사의 광고에 영화배우 한석규와 차밭을 거니는 스님으로 등장해 세인의 관심을 끌었던 분이다. 또한 용문사 중창불사에 대한 끊임 없는 원력을 가지고 계신 분이다.
해운루와 범종각. 자운루가 일렬로 늘어서 있다.
자운루를 지나 올라오다 보면 해운루 옆쪽으로 범종각을 만난다. 범종각은 범종을 달아 놓은 전각을 말한다. 모임 지붕중에 사모지붕에 속한다.
당호는 절에 따라 범종루· 종각· 종루라고 하는데, 일반적으로 단층일 경우 각(閣)이라 하고 중층일 경우 루(樓)라고 한다.
규모가 큰 사찰에서는 중층으로 세워 법전사물(法殿四物)을 함께 두기도 한다. 전각의 외양은 대개 기둥과 목책이 있는 사각의 단층 건물이거나, 2층 누각이다.
보통 불이문(不二門)을 지나 사찰 경내에 들어서면 법당 앞에 있거나 일주문 왼쪽에 있는데, 중층 누각의 경우는 다르다. 경상북도 영주 부석사(浮石寺)의 경우는 해탈문인 안양루 아래에 있고, 청도 운문사(雲門)의 경우는 누각 밑이 바로 사찰 진입로이다. 전라북도 완주 송광사(松光寺)의 경우는 평면이 십자형이다. 영암 불갑사(佛甲寺)의 범종루는 6각의 중층 누각으로, 1층에 목책을 두르고 범종을 안치했으며 난간을 두른 2층 다락은 비워두었다. 고창 선운사(禪雲寺)에서는 천왕문 2층에 범종과 법고를 함께 둔다.
범종각에 범종과 함께 두는 법전사물은 범종(範宗). 법고 .운판(雲板)·목어(木魚)이다.
바로 그것이 하늘의 소리(雲板), 땅의소리(法鼓) , 바다의 소리(木魚), 그리고 그것이 모여 울리게 되는 종소리(範宗) 이다.
영남제일강원
조용한 경내에는 햇살만 넘실거릴 뿐 아무도 없다. 그리고 그냥 지나칠수 없는 커다란 법문이라든지 설법을 하는 '영남제일강원'으로 가보자.. 넓은 마당을 두리번거리다 영남제일강원의 주련 앞에 섰다.
그곳엔 '화장찰해'란 현판이 걸려져 있다.
漢武玉堂塵已沒 (한무옥당진이몰) 한무제의 궁궐은 이미 티끌이 되었고
石崇金谷水空流 (석숭금곡수공류) 석숭의 별장에도 쓸쓸히 물만 흐르네
光陰乍曉仍還夕 (광음사효잉환석) 세월은 빨라 새벽이다 싶으면 이내 곧 저녁이 되고
草木在春卽到秋 (초목재춘즉도추) 초목은 겨우 봄인 듯했는 데 어느덧 가을이 되고마니
處世若無毫末善 (처세약무호말선) 세상을 살면서 털끝만한 선행도 못하면
死將何物答冥侯 (사장하물답명후) 죽어서 염라대왕에게 무엇으로 대답하리
약간의 나른함이 밀려드는 오후의 시간, 번쩍 정신이 든다. 갱년기로 우울해 있던 나를 향한 죽비였다. 고개를 들 수가 없다.
선행은 말로, 혹은 마음속에서만 머물다 늘 엉뚱한 것에 밀려 잊혀지곤 했다. 쫓기듯 하루를 보내고 잠자리에 들 무렵이면 정체 모를 허기감이 몰려왔다. 그것은 삶에 대한 경고였다. 땡볕에 우두커니 서서 나를 돌아본다.
석축 오른쪽 끝에 강원이 있는데 많은 학승을 배출한 유서 깊은 강원이지만 보광명전과 함께 불타 새로 지었다.
편액 글씨는 진주 서예가 죽헌 정문장님이 썼다.
보광명전은 1984년 화재때 소실된 것을 최근에 복원한 전각이다.
보광명전(普光明殿) 편액 -송월(淞月) 스님 글씨-
佛身普遍十方中 (불신보변시방중) 부처님 몸 두루하여 시방세계 충만한데
三世如來一切同 (삼세여래일체동) 삼세의 여래 또한 모두가 한 몸일세.
廣大願雲恒不盡 (광대원운항부진) 넓고 크신 자비원력 항상하여 다함없고
汪洋覺海渺難窮 (왕양각해묘난궁) 넓고 넓은 깨침바다 헤아리기 어렵다네.
보광명전으로 향하는 계단 위에 넝쿨식물들이 가지를 뻗고 일렁인다. 하염없이 쏟아내는 햇살의 고운 마음들이 잎새 위에서 빛난다. 햇살과 바람은 결코 서두르거나 분주해 보이지 않는다. 다만 서로를 위해 존재할 뿐이다. 잎새들이 다칠까 조심조심 계단을 오른다.
해운루 '소백산 용문사' 편액을 쓴 송월 스님이 대광명전 편액도 썼다.
원래는 용문사의 본전은 보광명전이지만 연륜은 대장전이 높다. 주요 전각이기는 하나 1984년 용문사에 큰불이 난뒤 새로 세운 건물이다.
화재로 소실되어 최근에 중수한 보광명전은 새 전각답게 깔끔하고 화려하다. 반들반들 윤이 나는 마룻바닥의 촉감이 채 가시기도 전에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에 매료되고 말았다. 흔들림 없이 빈 몸으로 불어오는 듯하지만 성성한 기운이 실려 있는 바람을 보광명전 기둥에 기대어 서서 온 몸으로 맞는다.
보광명전의 장엄한 용두
보광명전 내부 중앙에는 높은 수미단 위에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삼존불은 지권인을 결한 본존인 진리의 법신불(法身佛)인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서방 극락정토의 주존불인 아미타불(阿彌陀佛)과 동방유리광세계의 주존불인 약사불(藥師佛)을 함께 모셨다. 보광명전에 봉안된 세 부처님 중 아미타불상에서는 1515년에 중수한 발원문이 발견되었다.
법당 안에 모신 삼존좌상은 가운데 비로자나불, 사진 오른쪽(좌협시) 아미타불좌상, 왼쪽(우협시) 약사좌불이다.
본존불 아미타불이 한쪽으로 밀려나 있는 것은 비로자나불이 삼라만상의 진리 그 자체인 진신 법신불이어서가 아닌가 한다.
재미있는 것은 비로자나불상은 철불, 아미타불상은 목불, 약사여래상은 흙으로 빚은 소조불로 각기 다르다는 점이다.
문화재 가치가 큰 것은 오른쪽 목조 아미타불좌상으로 복장 유물에서 1515년 개조 시기와 제작자, 시주자 이름이 나온 보물 1637호이다.
철조비로자나불은 금분을 새로 입혀서인지 철불의 강인한 맛은 느끼기 어렵다.
불교신자가 아닌 친구 모자를 벗고 정성을 다해 절을 올린다. 친구의 일배(一拜)는 거룩해 보이기까지 하다. 뜨뜻한 무언가가 전신에 퍼진다. 신앙의 차원을 넘어 우리의 혼과 문화에 대한 사랑과 정성, 그것은 숭고함이다.
보광명전의 신중탱과 탑등
지장탱
칠성탱
보광명전에서 바라본 용문사 전경이다.
용문사의 주위 풍경은 참 아름답다.
바람도 쉬어 간다는 용문사의 주변 숲은 한여름에도 무더위를 뚫지 못할 만큼 시원한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용문사로 템플스테이 오시는 분들이 많다고 한다.
보광명전 편액 양쪽 기둥에 내민 용머리.
공포 익공 위 보머리를 봉황으로 처리했다.
보광명전과 대장전 사이에 위치한 포대화상이 넉넉한 웃음을 선사한다.
대장전(大藏殿:보물 145호)
대광명전에 참배 후 대장전(大藏殿)으로 향한다. 용문사에 오면 꼭 친견해야 할 곳이 바로 대장전이다. 대장전에는 세 개의 보물이 있다.
맞배지붕으로 단순하면서도 다포식으로 화려한 대장전은 이절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대장전(보물 제145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전형적인 다포계 맞배지붕 건축물로 처마는 겹처마이다. 고려시대 명종 3년(1173)에 건축되었다.
팔만대장경 경판의 일부를 보관하기 위해서 지은 건물이다. 대장전 전면에 새겨진 조각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기둥 위에 연꽃, 붕어, 귀면이 있다. 외부 공포 위 창방 뺄목에 붙인 귀면과 물고기, 그리고 연꽃 봉우리가 새겨져 있다.
공포는 내·외로 2출목이고 삼분변작에 가까운 건물이다
맞배지붕의 균형미를 자랑하고 있는 대장전(보물 제145호)은 남향으로 향한 법당으로서 고려 명종 3년(1173년)에 대장경의 일부를 보관하기 위해 지어 건축된 이래 수차에 걸쳐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천장의 서까래의 채색이 희미하게 남아 있어 고풍스런 멋을 풍기고 있다.
큰 맞배지붕을 이고 서 있는 전각에는 국보급 보물로 가득하다. 전각 모서리에 새겨진 연꽃과 물고기, 도깨비를 닮은 귀면의 주술적 방어력 때문인지 유일하게 화재를 면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대견하고 신통할 뿐이다.
예천 용문사 목조 아미타여래삼존좌상 (보물989-1호)
세월의 깊이를 품고 있는 법당에도 다양한 조각과 장식들로 화려하다.
용문사(龍門寺) 대장전(大藏殿)에 봉안되어 있는 목각탱의 앞면에는 대추나무에 불상을 조각한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아미타여래좌상과 목각좌상인 삼존목불좌상이 놓여져 있는데 본존상의 경우 머리에는 반달 모양이 표현되었고, 신체는 둥글며 옷은 두꺼워 신체 윤곽이 드러나지 않는다.
대장전 안에 들어서면 가운데에 목조의 석가여래와 문수, 보현 보살이 굽어보고 있다.
목각탱과 같은 기법으로 동일한 작가에 의해 만들어진 작품임에는 확실하지만, 목각탱의 상에 비해 가슴표현이 유기적이며 조각기법에서 조각가의 정성을 엿볼 수 있다. 이 작품들의 조성기(造成記)가 하단에「강희이십삼년갑자계(康熙二十三年甲子季)」라고 묵서(墨書)되어 있어 숙종(肅宗)10년(1684)에 조성된 것이 분명하며 따라서 이들 조각은 17세기 후기의 조각양식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므로 그 역사적 의의는 매우 높은 것이다.
예천 용문사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 (보물989-2호)
삼존목불좌상 그 뒤에는 화려하지만 결코 지나쳐 보이지는 않는 목각탱이 법당 안을 환하게 밝힌다.
삼존불 뒤에 금빛으로 도금을 한 아미타후불목각탱도 조선 숙종 10년(1684)에 제작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작품이다.
기본구조는 상하가 긴 사각형이지만 좌우로 구름무늬 광선을 표현한 둥근 모양의 조각을 덧붙여 장엄하게 장식하고 있다. 중앙에 모셔진 얼굴은 앞으로 약간 숙여 사바세계를 굽어 살피듯 평담하게 묘사되었다.
두 손은 모두 무릎 위에 올렸는데 왼손은 손가락을 위로, 오른손은 아래로 하고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어 아미타불의 손모양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입은 옷은 두꺼운 편이며, 간략한 몇 개의 선으로 신체와 옷을 구분하여 주름이 없다면 신체의 근육으로 여길 정도다.
본존불 이외의 상(像)들은 상· 중· 하 3행으로 배치시키고 있다. 아랫줄에는 사천왕상이 본존의 대좌(臺座) 좌우로 2구씩 일렬로 서 있다. 가운데줄과 윗줄에는 각기 좌우 2보살씩 8대 보살이 배치되고, 윗줄의 보살 좌우에는 다시 무릎을 꿇고 손을 모은 모습의 2대 제자를 배치하여 구도의 미를 살리고 있다. 보살은 본존불과 동일한 기법을 보여주며, 불과 보살상 사이의 공간에는 구름, 광선 등을 배치했다.
탱화는 대부분이 그림들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곳의 탱화는 목각으로 새겨져 있어 독특하다. 옆에서 바라보니 목재가 보이고, 입체로 조각된 불상이 살아 있는 것 같다.
용문사 윤장대(보물 684호)
윤장대는 돌리면 업장이 소멸되고 소원이 성취된다고 하여 예로부터 참배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중수용문사기에 의하면 “계사년(명종 3, 1173)에 나라와 조정에 어지러운 일이 많았을 때에도 대선사(조응)가 발원하여 3만 명의 승려들에게 공양하는 재(齋)를 열었다고 한다.
윤대장(輪大藏) 두 개와 (이를 안치할) 건물 3간(間)을 만들고 7일간 법회를 열어 학자 300인을 초빙하였다. 낙성식 때에는 개태사(開泰寺) 영치(穎緇) 승통을 초빙하여 설법하였고 이를 통해 나라를 어려움으로부터 구했다”고 한다.
대장전의 윤장대(輪藏臺, 보물 제684호)
윤장대는 국내에 현존하는 사찰 가운데 유일하게 용문사에만 있는 불교 공예품이다. 내부에 불경을 넣고 손잡이를 돌리면서 극락정토를 기원하는 의례를 행할 때 쓰던도구이다. 경전을 장대 안에 넣어두고 돌려 가며 읽은 데서 윤장대라고 이름하였다.
윤장대의 상부 가구(架構)는 다포식 공포로 그 솜씨가 섬세하고 보는 이들의 감탄을 자아낸다. 마루 밑에 회전축의 기초를 놓고 윤장대를 올려놓았으며, 지붕 끝을 건물 천장에 연결하였다.
처마 밑에 빽빽하게 포작 올리고 문 안에 경전을 둬 전각에 대장전이라는 이름이 붙게 됐다.
현실적인 한 부분은 글을 읽지 못하는 신도들이 경전을 넣어 돌림으로써 경전을 읽은 대체 행위로 부처님께 예를 올린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러한 공예품은 티벳불교의 "마니차"와 그 기능을 같이한다.
티벳풍의 "마니차"를 경주 안강의 " 회재 이언적" 을 배향하는 옥산서원(玉山書院) 진입로 좌측에 있는 대한불교 염불종의 "대흥사"란 절에서 본 적이 있다.
용문사 대장전 안에는 회전식 불경보관대인 국내 유일의 두 개의 윤장대(輪藏臺: 보물 684호)가 있다.
목불좌상과 목각탱 앞 좌우에 한 쌍이 있으며 팔각등 모양을 하고 있다. 마루를 뚫고 그 밑에 중심축을 두었으며 중간 아래 부분에 손잡이를 만들어 돌릴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둘 중 왼쪽의 것은 꽃살 무늬로, 오른 쪽의 것은 격자무늬로 되어 있다.
모두 여덟 개의 창을 가진 구조로 되어 있는데, 부처님 왼쪽 편에 있는 윤장대의 창문은 모두 교살문이고, 오른쪽 윤장대의 창문은 섬세하고 화려한 꽃살문이다. 4개의 문은 꽃살창으로 되어 있고, 나머지 4개의 문은 빗살문창살로 되어 있다.
서쪽 윤장대에는 화려한 꽃살 장식이 베풀어진 반면 동쪽 윤장대문은 단아한 빗살이어서 대조적인 아름다움을 느낄수 있다. 양쪽 모두 빽빽한 포작을 올리고 지붕 처마처럼 구성하여 마치 서고로서 전각들을 법당안에 들여놓은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아랫부분에서 바닥 상부까지는 팽이처럼 점점 경사진 모양으로 판목을 대었으며, 한 쪽 모서리에 횡목 손잡이를 마련, 경장을 돌릴수 있도록 했다.
꽃살창은 꽃 새김을 한 살을 60도 각도로 교차시키고 그 교차점에 수직살을 댄 솟을 빗꽃살문 형태와 통판 투조 기법으로 연꽃을 새긴 것 등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통판투조란 통으로 된 하나의 판재에다 조각을 하는 것을 말한다.
특히 연꽃 사이를 유연히 헤엄치는 물고기, 상승의 기운을 타고 피어나는 연꽃의 묘사가 매우 사실적이어서 연밭을 눈앞에 대한 듯하다
불단 오른쪽의 윤장대 꽃살문
꽃살문에 주로 새겨지는 꽃의 종류를 보면, 연꽃, 모란꽃, 국화꽃, 해바라기꽃, 또는 백일홍과 같은 모양의 꽃도 있으며, 때로 정확한 이름을 알 수 없는 개념적 형태의 꽃들도 보인다.
사찰에서 부처님 앞에 올리는 공양물에는 다음의 여섯 가지가 있다. 6종 공양물은 향(香). 화(花). 등(燈). 다(茶). 과(果). 미(米)이다.
6종 공양물은 다시 정신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으로 나누어지는데, 정신적인 것 중에서 향은 법신을, 꽃은 보신을, 등은 화신을 상징한다. 따라서 꽃은 법신을 회복해 가진 부처님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말하자면 법신의 덕을 형상화한 보신의 모습을 꽃에다 비유한 것이다. 흔히 부처님께 꽃공양을 올리면 내세에 미색(美色)을 갖추게 된다고 하는 까닭도 있다.
그래서 사찰 법당 문에 새겨진 꽃들은 그 하나하나가 부처님의 상(相)일 수도 있고, 부처님을 향한 뭇 중생들의 환희심을 담은 공양화일 수도 있다. 부처님이나 보살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자신의 모습을 여러 형태로 바꾸어 세상에 나타나는 권화(權化)의 한 부분이다. 결례를 무릅쓰고 꽃살문을 여러장 촬영했다.
꽃살문은 재질이 단단하고 결이 부드러우며 향기가 온 방을 진동하는 붉은 소나무인 춘양목을 최고로 친다.
춘양목 중에서도 북쪽에서 100년이나 300년 정도 자라야 나이테가 촘촘해진다. 이것을 북 남풍 부는 쪽에서 다시 3년을 말려 4년째에 작업을 한다. 그런 다음 부식과 충해를 막기 위해 오방색으로 단청을 입힌다. 오방색중에서도 부처의 세계를 의미하는 녹색은 석록이라 하여 제일 귀한 색으로 친다.
그래서 다른 색깔들이 다 벗겨진 뒤까지 가장 오래 남아 있다.
이 세상에 좋고 나쁜 것은 없다. 다만 서로 다른 것이 있을 뿐이다.옳고 그른 것은 없다. 다만 판단이 다를 뿐이다좋은 사람, 나쁜 사람은 없다. 다만 서로 다른 사람일 뿐이다. 부디 나하고 같지 않다고 분별하지 말라. 분별하는 마음은 모든 괴로움의 원인이 된다.
그리하여 불가(佛家)에서는 망심(妄心) 즉, 분별심(分別心)을 경계하라고 가르친다. 어떤 것들을 분별(分別)하여 열고 닫는 것는 오직 자신만의 일이다.
그러나 모두가 보고 느끼고 행하는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을 모으는 마음의 꽃살문은 자신의 어디쯤 달려 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한번 돌리는 것으로 불경 1만번을 읽는것과 같은 공덕이 쌓이는 윤장대 이다
염송을 하며 돌리면 소원성취 할수 있다는 용문사의 윤장대(보물 제684호)는 훼손우려가 있어 음력 3월 삼짓날과 9월 9일, 일년에 두번 돌릴수 있는 날이다
대장전의 윤장대는 고려 명종3년(1173년)에 자엄스님이 조성했다.
글을 읽지 못하는 중생을 위해 돌리는 것만으로도 경전을 읽는것과 같은 공덕을 얻을 수 있도록 하기위해 “회전씩 불경보관대"를 양쪽에 한개씩 두개를 만들었다.
높이4,2m, 둘래 3,3m의 팔각형 모양으로 마루속에 세워 아래부분을 팽이처럼 만들고 손잡이를 달았다.
800년이 넘는 오랜 세월동안 중생과 함께해온 이 윤장대가 언제부터인가 돌아가지 않을 정도로 심하게 훼손되어 1998년 주지로 부임한 청안스님이 정부의 지원을 받아 보수를 하여 다시 돌릴수 있도록 했다.
돌려서 공덕을 쌓아 업장을 소멸시키고 성취하도록 하기위해 만들었다는 윤장대를 훼손우려 때문에 돌리는 것을 제한 한다는 것이 못내 아쉬워 사찰측은 성보박물관에 모형 윤장대를 만들어 놓아 누구나 언제든지 돌릴 수 있도록 조성되어 있다.
대장전 건물 천정은 우물 모양의 사각 안에 다양한 조각과 그림이 그려져 있고 단청이 희미한게 고귀한 멋이 느껴진다. 천정의 퇴색된 단청이 그 세월의 깊이를 말해준다.
대장전은 이 절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다.
곰삭은 기둥이며 서까래와 특히 연꽃과 국화꽃으로 각기 다른 꽃살무늬를 정교하게 조각하여 만든 창호는 그윽한 아름다움을 풍긴다. 실내.외의 퇴색된 단청은 고건축의 미를 느끼게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질풍노도의 시간들을 견뎌온 대장전 건물과 작은 법당을 지키고 있는 보물들을 호젓하게 감상할 수 있는 기회도 쉽지 않은데, 오늘은 이래저래 운이 좋다.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제대로 보이는 것들이 있어 때때로 삶은 숙연하다. 엉뚱한 것에 한눈을 팔고 있던 나를 기다려준 세월과의 조우, 가슴이 뭉클하게 젖어 온다. 장구한 역사를 버텨온 우리 것에 대한 자랑스러움과 나의 무관심, 다양한 감정들이 교차된다.
윤장대를 돌리면 번뇌가 소멸되고 공덕이 쌓여 소원이 성취된다고 한다. 정성을 다해 한번 돌리면 한 권의 경전을 읽는 것과 같다는데 지금은 일 년에 단 두 번만 돌릴 수 있다. 손때가 묻어 노쇠한 흔적이 느껴지는 윤장대는 어떤 소리를 내며 돌아갈까? 나는 두 손을 모으고 탑돌이를 하듯 주위를 돈다. 삐거덕삐거덕 낡은 마룻바닥이 걸을 때마다 고통을 호소한다.
경전 한 권을 읽는 것과 같은 `정성`이란 얼마 만큼을 말하는가? 돌고 돌아도 감이 오질 않는다. 습관처럼 흔하게 썼던 말이다. 정성이란 말로 몇 번이나 내 삶을 기만했던가? 그 말이 가지는 무한한 힘을 생각해 본다.
대장전 우물천장엔 학이 날고 들보 위로 용머리가 내밀고 있다. 용이 똬리를 틀고 있는 모습도 특이하다.
대장전 정면 공포의 익공 장식을 살펴본다.
공포 장식은 대장전을 바라보며 오른쪽 모퉁이 보머리의 귀면, 보를 받치는 연꽃, 평방 뺄목 아래 용 목각이 어우러져 어떤 큰 불전 귀공포 보다 화려하다.
연꽃 바로 아래로 뭔가 머리를 내밀고 있다. 입을 조각했고 점을 찍어 눈을 표현했다. 대장전 공포에서 숨은 그림 찾기 하듯 찾아 볼 만한 또 한 마리 물고기 이다.
귀면상이 붙은 보 뺄목 아래엔 연꽃 봉오리 둘을 조각했다.
옛 사자국(獅子國) 서남쪽에 물고기 한 마리가 있었는데 사람 말과 염불을 해 아미타어(魚)라고 불렀다. 사람이 아미타불을 부를 때마다 물고기도 반기면서 물가 언덕 밑으로 다가오곤 했는데 사람들이 잡아 먹어보니 맛이 매우 좋았다고 하는데 이 물고기가 중생을 구제하려고 모습을 바꿔 나타난 아미타불의 화신이었다는 설화이다.
대장전 귀공포 연꽃 장식 아래 기둥 속에 몸을 감춘 채 머리만 밖으로 내밀고 있는 물고기가 바로 아미타어를 상징한다고 한다.
그런데 반대편 오른쪽 보머리의 귀면은 물고기를 물고 있다. 대웅전 용머리가 여의주 대신 물고기를 물고 있는 건 봤어도 귀면상에서 물고기는 처음 본다.
뒤쪽 모퉁이로 돌아가면 물고기가 평방 뻘목을 받치는데 빼어난 조각 솜씨를 뽐낸다.
전각 정면 기둥 위를 가로 지르는 평방엔 화려한 꽃이 피었다.
문살에 얹는 꽃문처럼 국화 목각을 새겨 평방에 붙였다. 용문사 대장전의 공포는 아름답고 다채로운 목각 작품 경연장이다.
전각 모퉁이 귀공포에 튀어나온 보마구리에 목각 귀면상이 붙어 있다. 여느 귀면상처럼 연꽃봉오리를 물고 있다.
쇠서가 둘 내민 이출목이고 인동문 아래에 연꽃 봉오리가 내민 형태이다.
나무를 파내고 다듬어갓 벌어지는 봉오리를 놀랍도록 입체적으로 표현했다.
공포 별화(別畵)로는 보통 부처나 조사들, 사군자을 그리는데 대장전엔 꽃과 새, 화조도가 붙었다.
별화, 또는 별지화(別枝畵)는 벽체나 공포 벽의 빈 여백에 회화적 수법으로 그려 넣은 장식화를 가리키는데 불-보살이나 조사들처럼 불교 신앙과 관련된 그림과 불법을 지키는 동물, 상서로운 동식물 그림이 많다.때로 연꽃과 모란, 새와 사슴, 사군자, 풍경화도 등장하는데 대장전 공포 별화는 모두 꽃과 새 그림이다.
연꽃과 모란에 노니는 새, 화조도가 민화처럼 친근하다.
화려한 공포에 비해 문살은 소박 담백한 격자 빗살문으로 처리했다.
세월이라는 것, 연륜이라는 것이 지닌 무게는 과연 얼마나 되는 것일까? 대장전앞에 서면 이 자그만한 건물이 주는 무게가 그런 질문을 품게 한다.
처음 설치한 것은 1173년이며 대략 300년은 넘을 것이라 짐작된다.
대장전은 용문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조선 중기에 지어졌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아한 맞배지붕집이다. 공포양식은 다포계를 취한다. 맞배지붕이 주는 단아함과 다포계 결구방식이 주는 화려함이 묘하게 공존하고 있다.
나직한 자연석 기단 위에 막돌 주초를 놓고 민흘림기둥을 세웠으며, 기둥높이에 비해 지붕이 큰 편이다. 맞배지붕이라 측면에는 공포는 배열되어 있지 않고, 박공에는 방풍판도 없다.
보광명전과 대장전 위 석축을 따라 가운데로 나가면 정면 여섯 칸, 측면 네 칸 기와 한옥이 있다.
대장전과 명부전 사이에 자리한 진영당은 과거 용문사에 주석 했던 선사들의 진영을 봉안하는 곳이다.
현재 이전각에 <진영당眞影堂>이란 편액이 걸려 있지만 본래 기능을 상실하고 지금은 종무소로 쓰고 있고사찰 요사로 사용하고 있다. 편액 외에 건물 전면 고주에는 일제강점기에 작성한 진영당에 관한 현판이 있다. 이 현판 기록에 따르면이 전각은 조사전(祖師殿)인 동시에 시왕전의 노전이었다.
1681년에 희인(希仁)대사가 신암자(新庵子)를 이건한 뒤 1893년에 혜옹강백이 중수하고 1934년에 주지 이광하(李晃夏)가 중수한 후 이 어 1935년 다시 중수하였다. 이 외에 진영당으로 추정되는 건물로「속용문사적기續龍門事蹟記」에 적힌 1649~1670년에 건립된 삽삼전이 있다. 삽삼은 삼십삼명의 조사, 즉 조사전을 가리키는 것 같지만, 삽삼전을 지은 행변과 신암자를 이건한 희인이 일치하지 않고 조성시기도 맞지 않는다. 용도가 비슷한 건물이 한사찰 안에 여러 채가 있었는지는 좀더 검토가 필요하다.
진영당은 정면 6칸, 측면 4칸의 건물로 향 우측 전면 2칸은 통칸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향 좌측의 전면 4칸은 앞쪽에 툇마루를 두고 있는 홑처마 납도리 집이다.
현재의 평면으로 추정해 보면, 후면의 퇴칸은 감(龕)이었을 것이며, 그 앞의 실(室)과 툇마루는 예를 올렸던 사당형 공간이었을 것이다. 현재 건물에서 보이는 선자연(扇子椽)구성수법은 조선중기까지 지속적으로 쓰이던 수법으로, 1681년에 지어진 후 큰 변화 없이 오늘날까지 유지되었다고 생각된다.
진영당에서 바라본 용문사 전경이다.
한때 영남제일강원으로 불릴 만큼 큰 사찰이었으나 화재로 인해 사세가 크게 줄었다고 하니 이전의 모습은 얼마나 웅장하고 장대했을런지?
용문사는 산기슭에 자리잡은 지형의 탓인지 계단식으로 땅이 조성되어 있고 각 단마다 전각이 비치되어 있다. 보광명전을 중심으로 서쪽으로 가보면 응향각이라든지 원통전이라든지 산신각, 천불전이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있다.
보광명전을 중심으로 서쪽으로 가보면 계단아래 스님처소인 응향각이 있고
돌담장이 이쁘다...
그 위로 원통전이 이어지고 있다.
원통전은 관세음보살을 모신 전각이 사찰의 주된 전각일 때 붙이는 이름이다. 사찰 내의 1개 전각일 때는 관음전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중국에서는 관세음보살의 자비를 강조하여 대비전이라고도 한다. 관세음보살은 다른 부처나 보살과 달리 현세적인 이익을 주는 보살로, 모습이 다양하고 중생이 원하면 어느 곳에나 나타난다. 성관음(聖觀音)·천수천안관음(手千眼觀音)·마두관음(馬頭觀音)·십일면관음(十一面觀音)·여의륜관음(如意輪觀音)·준제관음(准提觀音)·불공견 삭관음의 칠관음이 대표적이다.
이 전각에는 관세음보살상이 단독으로 모셔진다.
원통전에서 바라본 용문사 전경이다.
질서 정연하게 자리잡은 건물들의 풍경이 참 인상적이다.
원통전과 산신각의 처마가 곱다...
원통전에서 1단을 오르면 산신각이 자리잡고 있다.
산신각은 산신을 모시는 전각이다. 사찰에 따라서는 산령각(山靈閣)이라고도 부른다. 또 삼성각(三聖閣)을 두어 칠성신·독성(獨星)과 함께 모시는 경우도 흔하다. 본래 산신은 도교에서 유래한 신으로, 불교가 전래되기 전에 많이 믿던 토착신이다. 특히 산지가 70%나 되는 한국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조선 말에 이르기까지 산신신앙이 널리 유행하였다. 이 산신이 불교에 수용되면서 호법신중(護法神衆)의 하나로 자리잡았다.
불교가 대중화되기 시작한 것은 삼국시대부터이므로 산신도 비교적 일찍 불교에 수용되었을 것을 여겨지나, 산신각이 세워진 것은 조선중기 이후부터이다. 대개 전각의 뒤쪽에 세우며, 크기는 정면1칸, 측면 1칸이 보통이다. 산신각 내에는 산신을 그린 탱화를 모시는데 대개 흰수염, 대머리, 긴 눈썹이 휘날리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측면에서 바라본 산신각
산신각에서 바라본 용문사 전경이다.
보광명전을 중심으로 서쪽으로 가보면 응향각이라든지 원통전이라든지 산신각, 천불전이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용문사 경내가 한눈에 들어오는 절터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극락보전이다. 극락세계로 오르는 길이 결코 쉽지는 않다...
극락보전(極樂寶殿) 내부에는 중앙의 비로자나불을 주불(主佛)로 좌우에 석가모니불과 약사여래불을 모시고 천불(千佛)을 봉안하였다.
극락보전(極樂寶殿)의 천불상(千佛象)
극락보전에서 바라본 산신각과 원통전
극락보전에서 바라보는 산사의 풍경은 그야말로 평온함과 고즈넉함의 극치를 보여주게 된다. 산사의 단아한 지붕과 소백산 줄기의 능선이 조화롭게 펼치는 아늑한 풍경이다. 일순간 절로 마음이 평안해짐을 느께게 된다. 주변은 고요함과 적막함만이 가득할 뿐이다.
산신각. 극락보전에서 명부전으로 가는 길...
진영당 바로 아래쪽으로는 명부전이 있다.
명부전에는 목조지장보살을 중심으로 둘러앉아 있는 명부시왕들은 아무리 지옥에서 받을 벌로 위협한다고 해도 고개숙이게 될것 같지 않은 편안한 얼굴들이다. 조선 후기 불교가 가졌던 친근성과 민중성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한다.
1682년 초창, 정면 3칸 측면 2칸
강원 뒤 제일 오른쪽 끝에 있는 명부전은 지장보살을 무독귀왕과 도명존자가 협시하는 목조 지장삼존상을 모셨다.
명부전 내부에는 지장보살을 주존으로 좌우에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의 지장삼존과 후불탱
명부 시왕상과 금강역사상등을 봉안하고 있다.
죽어 명부에 오는 사람의 업을 심사해 내세를 결정하는 시왕(十王)상이 벽을 따라 앉아 있다.
오른쪽 끝에 책을 면류관처럼 쓴 이가 다섯번째 시왕 염라대왕으로 죄 짓고 명부에 간 중생에겐 겁나는 존재이지만 편하고 친근한 얼굴을 하고 있다. 민중에 보다 가까이 가려 한 조선 후기 불교를 말해준다.
현재 명부전은 전면과 후면의 공포양식에 큰 차이를 보이는데, 전면의 공포는 조선 말기의 공포인 반면에 후면은 쇠서의 곡서의 곡선이 완만한 주삼포식(柱三包式)의 공포로 전면에 비해 세련된 조형미를 가지고 있어 조성시기를 17세기 후반까지 올려볼 수 있다. 특히 측면에 고주가 직접 종보를 받치는 수법은 측면의 고주가 대들보를 받치고 있는 대장전의 가구수법보다 선행하는 수법으로 17세기 후반에 중창되어 가구법의 기본형식을 그대로 유지한 채 현전하는 것으로 보인다.
명부전에서 바라본 용문사 전경이다.
깊은 생각에 잠겨 응진전으로 향하는데 스님 서너 분이 뙤약볕에서 풀을 뽑고 계신다. 스님의 미소 뒤로 마중을 나오는 순백의 꽃 물결들, 마가렛 무리가 꽃등이 되어 길을 밝힌다. 일하는 스님들과 하늘 빛이 아름다운 용문사, 그곳에 가면 `정성`을 눈으로 만날 수 있다.
명부전에서 북동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응진전이 나온다. 응진전은 1785년 다시 짓고 1884년에 고친 정면 3칸, 측면 3칸의 자그마한 맞배지붕 건물이다.
응진전 불단에 모신 소조 석가삼존불상이 눈길을 끈다.
흙으로 빚었는데 마치 석불 같은 질감에 부드러운 파스텔 색조를 칠해 아름답고 고풍스러워 보인다. 과거 부처의 화신 보살로 석가에게 수기를 전한 제화갈라보살과 석가로 부터 미래 부처가 되리라는 수기를 받은 미륵보살이 협시 한다.
관복차림 전령의 모습을 한 입상은 사자(使者)상이라고 한다.
석가의 제자 16나한상이 벽을 따라 앉아 있다. 역시 흙으로 빚은 소조상이고 삼존상 보다는 늦은 임란 후 17세기 전반 작품으로 추정한
17시기 중반 초창한 대장전 서편 위쪽에 위치한 응진전은 삼존불 좌우로 16나한이 모셔져 있다.16나한상을 모신 전각으로 십육전(十六殿)이라고도 한다.「
속용문사적기續龍門事蹟記」에 의하면, 이 전각은 17세기 중엽 학문(學文)에 의해 건립되었다. 응진전은 1785년에는 자하루와 함께 중창되었고, 1884년에는 명부전과 함께 보수되었다.
응진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집으로, 어칸에 분합문(分閤門)으로만 출입이 가능하다. 건물 내부의 삼면에는 많은 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이를 위해 측면에 문을 내지 않고 들창을 설치 한 것으로 생각된다. 들창은 채광과 환기를 위한 것이다. 수서와 앙서가 한 쌍을 이루고, 연봉과 봉두로 장식된 전형적인 주삼포(柱三包) 건물로 기둥 사이의 공포대에는 화반이 놓였으며 뒤뿌리가 짧은 부연을 달았다. 투박한 익공의 초가지 표현이나 나지막한 천정, 소규모 평면에 맞는 가구 처리 등에서 19세기 후반 혹은 이보다 늦은 시기에 중수 과정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응진전 주련
圓覺山中生一樹 (원각산중생일수) 원각산에 한 그루 나무가 생겼는데
開花天地未分前 (개화천지미분전) 천지가 나누기 전 이미 꽃이 피었다네.
非靑非白亦非黑 (비청비백역비흑) 푸른색도 흰색도 검은색도 아니며
不在春風不在春 (부재춘풍부재춘) 봄바람 하늘에도 있는 것이 아니라네.
동향각으로 명부전 위쪽에 있는 스님 수행공간으로 가는 길로 1857년에 기록된 상량문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주차장 위쪽 또 다른 스님 수행공간이다.
수행이 저절로 잘 될것만 같은 공간이다.
스님들의 생활공간인 감로당 이다.
공양간 앞마당 장독대에 크고 작은 장독들이 많기도 많다.
용문사를 충분히 돌아 보고 이제 기념사진도 남긴다.
용문사 성보박물관 앞에서 다시금 용문사를 돌아본다.
성보 박물관의 현판은 이곳 예천(醴泉)출신의 서예대가 초정(艸丁)권창륜(權昌輪)선생, 주련(柱聯)은 석재 서병오 선생의 글씨다. 초정 선생은 문경 김용사(金龍寺)에도 많은 편액글씨를 남기신 분이다.
성보박물관은 연면적247평, 건평 118평(지하1,지상1)로 2006년에 지어진 신축건물이다. 이곳에는 모형 윤장대, 탱화·영정, 불상·존자, 불교 제례도구 등 230여점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민속공예품과 첨단영상물을 함께 전시하는 공간으로써 산사(山寺)의 역사와 자연을 동시에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
예천 용문사 팔상탱 보물1330호
팔상탱화(八相幀畵)는 석가모니의 일생을 잉태로부터 열반에 이르기까지 여덟 장면으로 나누어 묘사한 그림이다.
이 팔상탱화(八相幀畵)는 한 폭에 두 장면씩 네 폭으로 이루어져 있어 형식상의 특징을 보여 준다.
제1폭은 석가모니가 도솔천에서 코끼리를 타고 사바세계로 내려오는 장면인 도솔래의상(兜率來儀相)과 석가모니가 룸비니공원에서 마야부인의 옆구리를 통해 출생하는 모습을 그린 비람강생상(毘藍降生相),
제2폭에는 태자가 성문 밖의 중생들의 고통을 관찰하고 인생무상을 느끼는 장면의 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 부모의 반대를 무릎쓰고 출가하는 장면을 묘사한 유성출가상(踰城出家相),
제3폭에는 설산(雪山)에서 신선들과 수행하는 모습을 그린 설산수도상 (雪山修道相), 태자가 수행 중 온갖 유혹과 위협을 물리치는 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이 그려져 있고
마지막 폭에는 부처가 녹야원에서 최초로 설법하는 모습을 나타낸 녹원전법상(鹿苑轉法相), 부처가 쌍림수 아래에서 죽음에 이르는 모습을 표현한 쌍림열반상(雙林涅槃相)으로 구성되어 있다.
황토색 바탕에 붉은색과 녹청색을 주로 사용하여 주된 장면만을 강조하여 나타낸 비교적 간단한 구성을 하고 있다. 용문사(龍門寺)의 팔상탱화(八相幀畵)는 조선 전기의 도상과 화풍의 흐름을 이은 것으로, 이후 제작된 팔상도 작품과는 차별화된 특징을 지닌 작품이다.
성보박물관 옆길의
돌담길을 따라 내려 와서
주차장으로 향하면서 바라본 하늘이 참 아름다운데 용문사는 오랜세월 만큼이나 진한 정취를 담고 있는 사찰이 아닌가 생각된다. 용문사에서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마음속의 복잡한 찌꺼기를 씻어 버릴수 있어서 좋앗던 용문사 순례길이었다.
일주문을 돌아서 용문사를 나선다.
부처님의 지혜와 방편, 중생을 구제하시려는 대자대비의 은혜는 한량없어 그 은혜를 헤아리기 어렵고 다 말할 수 없다. 부처님은 우리의 귀의처 이며, 부처님의 가르침은 곧 진리이며 삶의 최고 가치임을 확신하고 불세계에 도달하는 최선의 방법이다.
부처님의 은혜 속에 살고 있는 우리는 행복하다. 늘 공경하는 마음으로 예경하면서 부처님법을 배우고 실천하는 불자가 되어야 하겠다. 부처님께서 일러 주신 계.정.혜 삼학을 언제나 마음 깊이 간직하여, 몸과 마음을 맑히고 고요히 명상하며 자신의 실상을 가다듬는 불자로, 보다 마음을 넉넉하게 가지고 따뜻하고 부드러운 말, 온화한 미소를 띠고 정심정행(正心正行)하며 살아가기를 합장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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