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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프스키대로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 2016. 6. 16. 06:39
네프스키대로
2016. 6. 15.
2016. 5. 20 ~ 6. 1.(11박 13일) 러시아 + 북유럽 4개국 여행에서 5. 22. 3일째의 여행이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중심으로 이루어 진다.
오전 여행지 표토르대제의 여름별궁 관람 후 버스로 이동하여 점심식사 후 카잔성당 . 네프스키대로. 피의 성당을 보고 에르미타쥐 박물관 관광 후 한식으로 저녁 식사 후 상트베테르부르크에서 묶는 일정이다.
카잔성당을 보고 다시 카잔성당과 마주한 대로변 네프스키대로로 나가 본다.
상트페트르부르크는 모스크바 보다 관광하기가 수월하다. 관광지들이 중심도로인 네프스키 대로를 따라 모여 있어서 걸어서 다니면 왠 만한 곳을 다 둘러 볼 수있다.
'네프스키 대로에 볼 일이 있어서 오지만, 네프스키 대로에 들어 서는 순간 그 일을 잊고 만다. 그저 그 거리에 취해 거닐 뿐이다' 라고 19세기 사실 주의자 고골이 표현한 그대로 볼거리가 풍부한 도로이다. 최고 번화가인 네프스키 대로는 일직선으로 뻗어 있어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대로의 처음인 궁전 광장을 지나서 끝 자락에 위치한 모스크바 기차역 까지 어어져 있다.
네프스키대로 북쪽 인도를 조금 더 걸어가면오른쪽 안으로 박공 앞에 천사가 십자가를 받들어 세우고 있는 교회가 있다.
독일계 루터 개신교 성베드로바울교회 이다.
페테르부르크 도시 초기인 18세기 초반에 들어섰고 지금 건물은 1838년 지었다.
네프스키대로는 종교적 관용에 넘치는 길이어서 가톨릭 예카테리나성당, 아르메니아 정교회당도 있다.
더 가서 모이카강과 만나는 네프스키대로 남쪽 건너편에 분홍빛으로 선 바로크 건물은 카잔성당 건축을 주도한 스트로가노프가문의 저택 스트로가노프궁이다.
네프스키대로에서 원래 바로크 양식을 잘 간직한 몇 안 되는 건물로 이탈리아 출신으로 러시아에서 활동한 18세기 건축가 바로톨로메오 라스트렐리가 18세기 중반 세르게이 그리고리예비치 스트로가노프 남작의 새 저택으로 지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겨울궁전과 남쪽 차르스코예 셀로의 예카테리나궁을 설계한 사람이다.
코린트식 기둥이 받치는 정면 박공에 스트로가노프 가문의 문장(紋章)이 남아 있다.
나중에 백작 가문으로 승격된 스트로가노프가는 시베리아 개발에 앞장서면서 모피 거래로 부를 쌓은 집안 이어서 시베리아의 상징으로 담비 두 마리를 넣어 문장을 만들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스트로가노프 일가는 외국으로 떠나고 궁은 혁명 정부에게 몰수돼 국유화 됐다가 박물관, 정부 부처 청사를 거쳐 1988년부터 다시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안에 있는 왁스 박물관이 유명하다.
스트로가노프가에서 길쭉하게 썬 쇠고기를 볶아 러시아식 사워크림 스메타나에 걸쭉하게 담아 먹던 '비프 스트로가노프' 는 세계적으로 유행해 해외에서 러시아를 대표하는 음식이 됐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중심축 네프스키대로의 카잔스키다리에서 북쪽으로 꺾어 그리바예도프운하를 따라가는 길 풍경이다.
오벨리스크가 들어선 로터리 보스타니야광장 건너 1851년 문을 연 모스크바역이 서 있다.
러시아에선 역에 그 선로의 종착지 이름을 붙인다.
그래서 이 역에서 650km를 달려가는 모스크바를 따 모스크바역이다.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출발하는 역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사회주의 시대 이름을 딴 레닌그라드역 이다.
역사(驛舍)는 코린트식 기둥을 세우고 베네치아 스타일 창문을 낸 이탈리아 르네상스식이다.
처음 이름은 19세기 중반 철도 건설에 힘을 쏟은 니콜라이 1세를 따 니콜라에프스키역이었다가 레닌이 이끄는 러시아 볼셰비키가 사회주의 정권을 세운 1917년 10월혁명을 기념해 1924년 옥티아브르(10월) 스키역으로 바뀌었고 1930년 모스크바역이 돼 오늘에 이른다.
상트페테르부르크가 레닌그라드(레닌의 도시)였고 네프스키대로가 10월25일대로 였다가 제이름을 되찾은 것과 비슷한 곡절을 겪었다.
광장은 격동의 시대 혁명의 집회 장소로 자주 쓰였기에 볼셰비키혁명 후 사회주의 정부는 '봉기' 광장으로 이름을 바꿨고 1937년엔 광장 복판에 서 있던 걸작 조각품 알렉산드르3세 기마상도 치워버렸다.
보스타니야라는 지금 광장 이름은 1955년에 들어선 지하철역에서 따 왔다.
광장 복판에 화강암을 쌓은 높이 36m '레닌그라드 영웅 도시 오벨리스크'는 1945년 소련이 나치 독일에게 거둔 승전의 40주년을 기념해 1985년 세웠다.
이 오벨리스크가 2차대전 승전보다 각별하게 기리는 것은 현대 전사에서 가장 끔찍한 사건으로 꼽는 '레닌그라드 봉쇄'다.
나치 독일군이 1941년부터 900일 동안 레닌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를 포위하다 퇴각하기까지 당시 시민 3분의 1 100만명이 굶주리거나 질병으로 죽고 군대 30만명이 전사한 전무후무한 참극이다.
스탈린은 1945년 레닌그라드에 '영웅 도시' 칭호를 부여했고 그 이름이 오벨리스크에도 붙었다.
오벨리스크 꼭대기에 '영웅 도시'의 상징으로 올린 황금 별(실은 스테인리스) 높이만 1.8m 이다.
네프스키 거리의 돔끄니끼 서점
주어진 자유시간이 얼마 안되어 명소들을 내부까지 구경하기는 아예 포기했고 부지런히 네프스키대로를 따라 걸으면서 겉만 보고 지나치기에도 벅찬 시간이다. 수박 겉 핥기에 번갯불에 콩 구워먹기까지 겸한다. 페키지 여행의 한계점이다.
네프스키대로 북쪽 인도를 따라가면서 건너편 남쪽 건물도 본다.
가게, 극장, 카페, 식당이 밀집한 쇼핑과 문화, 나이트라이프의 중심 네스프키대로는 폭이 넓은 곳은 60m에 이른다.
대로 양쪽엔 모두 240채에 이르는 중대형 빌딩이 늘어서 있다. 대부분 18~19세기 근대 건축물이거나 19세기 말~20세기 초 아르누보식이어서 고풍스럽고 아름다운 빌딩가를 이룬다.
번짓수가 대로 북쪽은 짝수, 남쪽은 홀수로 간다.
모스크바역에서 한 블록 서쪽, 건너편에 푸시킨로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선 두 건물 79와 77번 건물은 1874년 같은 건축가가 똑같이 설계해 지은 쌍둥이 빌딩이다. 일층에 가게가 들어섰고 나머지 네 층은 아파트이다. 왼쪽 79번 아파트에선 한때 차이코프스키가 살았다고 한다.
노천 카페가 손님 맞을 준비를 마쳤다.
1828년 리모델링한 이래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북쪽 104번 건물엔 시립 '실내 극장'이 들어 있다.
25년 동안 고전에서 현대에 이르는 실내극을 공연하고 있다고 한다.
대로 건너편 남쪽 65번 건물과 63번 건물을 보니 왼쪽 65번은 1834년에 지은 건물의 기초와 층 구조는 그대로 두고1904년 거죽만 아르누보로 리모델링 했다.
기둥마다 신화풍 얼굴의 부조상으로 장식했다.
그 오른쪽 분홍빛 63번은 장식이 더 복잡하고 화려하다. 1872년 17세기풍 파리 건축과 바로크 양식을 결합한 절충식으로 지어 볼셰비키혁명까지 40년 동안 은행과 러시아 최초의 항공우주 전문 잡지사가 들어 있었다고 한다.
네프스키대로는 이미 1720년에 돌을 깔아 포장했고1883년 전기 가로등이 들어와 진작부터 유럽풍 거리로 번창했다.
작가 고골리는 단편 '네프스키대로'에 "네프스키대로는 수도의 미인, 페테르부르크 공통의 커뮤니케이션" 이라고 썼다.
도스토예프스키 '죄와 벌'과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에도 등장 한다.
47번은 1874년 완공과 함께 유명 식당 팔킨이 개점한 이래 콘서트홀, 영화관, 카지노가 들어섰고 다른 곳으로 떠났던 팔킨이 2002년에 돌아와 성업하고 있다한다.
네프스키대로와 네바강 지류 폰탄카강의 교차점 남동쪽 코너에 있는 41번은 19세기 상트페테르부르크 최고의 사교장으로 각광받았던 벨로셀스키-벨로제르스키 궁전이다.
원래 암적색이었던 외벽이 많이 바래 분홍색처럼 보이긴 해도 화려하면서도 우아한 로코코 장식이 눈을 사로 잡는다.
벨로셀스키 공작 가문이 예카테리나 여제 시절인 1747년 지은 저택으로 출발했다.
이 집 2대 주인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벨로셀스키는 저택을 증축하면서 친하게 지내던 황제 파벨1세 에게 부탁해 벨로제르스키라는 옛 대공 성씨를 받아 낸다.
그때부터 이 가문의 성(姓)은 벨로셀스키-벨로제르스키가 되고 저택 이름에도 붙게 된다.
19세기 초 저택을 허물고 지금의 아름다운 궁으로 새로 지은 것은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의 미망인 엘레나 파블로브나 였다.
우랄 광산을 운영하던 친정의 부를 쏟아 부어 자기 취향대로 화려한 궁전을 세웠다.
황제 니콜라이 1세의 허락을 얻어 궁정 건축가 안드레아스 스타켄스나이더가 공사를 지휘하게 했다.
스타켄스나이더가 왕궁 아닌 귀족 사저를 설계한 유일한 사례라고 한다.
벨로셀스키궁은 새로 짓자마자 러시아에서 가장 화려한 저택이자 가장 멋진 무도회와 콘서트장이 됐고 엘레나 파블로브나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사교계의 여왕이 됐다.
1848년 개축 때 벨로셀스키궁은 대형 응접 홀, 콘서트 홀, 실내 교회와 함께 지금의 화려한 로코코풍 외부 장식을 갖췄다.
1883년 궁을 사들여 새 주인이 된 대공작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제정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가 전횡과 호사와 민중의 굶주림 끝에 몰락을 예고한 1차 러시아혁명 때 폭탄 테러로 사망한다.
미망인은 수녀가 되고 궁은 후견인 드미트리 공작 소유가 됐다.
1차대전 중에는 영국 적십자 의사 간호사들이 와 부상한 러시아 병사들을 치료하는 적십자 병원으로 쓰인다.
궁은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고 2년 뒤인 1919년 국유 재산으로 몰수돼 시립 문화센터가 된다.
2차대전 때 내부 로코코 장식이 많이 부서져 1950년대 복원됐고 지금은 시 재산이 돼 콘서트홀, 미술관 그리고 러시아의 역사적 인물과 문호들의 밀랍인형 80여개를 모아놓은 밀랍박물관으로 쓰고 있다.
전면 기둥들을 떠받치듯 선 부조상들은 제우스로부터 하늘을 떠받치는 형벌을 받은 그리스 신화 타이탄족 아틀라스이다.
아틀라스상들은 궁이 지닌 파란만장한 러시아 근대사도 함께 떠받치고 있다.
노천 카페가 늘어선 네프스키대로
화장품 가게도 보인다.
계속 서쪽으로 가면서 맨처음 만나는 강이 네바강 지류 폰탄카강이다.
거기 아니치코프다리에 서서 북쪽 네바강으로 흘러가는 폰탄카강을 본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네바강에 떠 있는 42개 섬과 주변 늪지에 돌을 메워 세운 인공 도시이다.
그래서 네바강 지류와 운하를 포함해 93갈래 물길이 나 있고 그 위를 342개 다리가 가로 지른다.
아니치코프다리는 표트르대제가 명해 1716년 나무다리로 만든 이래 여러 차례 고쳐 놓았고 1842년 지금 돌다리 형태를 갖췄다.
18세기 초 도시 건설 초기 이 일대에 미하일 아니치코프 중령이 이끄는 연대가 주둔하며 처음 나무다리를 놓아 아니치코프라는 이름이 붙었다.
아니치코프다리를 유명하게 만든 명물이1851년 다리 양쪽 끝에 하나씩 세운 네 마리 말과 조련사 동상이다.
힘 센 아라비아 종마 아말라트벡을 누드의 남자 조련사가 각기 네 가지 모습으로 다루는 형상을 표현했다.
조련사가 말을 감당 못해 쩔쩔매는가 하면 날뛰는 말에 깔려 죽을 지경에 처하기도 하고 그런대로 겨우 수습하거나 고삐를 단단히 쥐고 의연하게 말을 길들인다.
인간의 현명함과 어리석음을 네 단계로 표현해 어떤 인간형이 이상적인지를 말한다.
뒤로 길게 보이는 건물이 18세기 중반 예카테리나 여제가 지어 연인 알렉세이 라주모프스키에게 선물한 아니치코프궁이다. 그렇듯 아니치코프라는 군인 이름은 궁전과 이 일대 동네 이름으로도 남았다.
조련사 조각상은 로마 퀴리날 언덕에 있는 4세기 조련사상 한 쌍에서 유래한다.
난폭한 말을 다루는 조련사의 몸짓과 근육이 역동적이어서 영감을 얻은 여러 버전이 프랑스, 영국, 독일, 현대 뉴욕에 이르기까지 세계 여러 곳에 섰다. 그중 가장 유명한 작품이 이곳 조련사상이다.
역동적이고 사실적인 조각 솜씨가 빼어날 뿐 아니라 한 쌍인 로마 오리지널 작품을 넷으로 늘려 네 가지 인간형을 묘사해, 예술성이 떨어진다는 로마 오리지널 조각상보다 유명하다.
조각가는 발트 독일계 혈통을 지닌 포병장교 출신 페테르 클로트 폰 유르겐스부르크 남작이다.
그는 동물, 특히 말을 좋아해 말 애호가였던 황제 니콜라이 1세와 가까웠고 황제의 의뢰로 조련사상을 만든다.
1842년 황제는 그중 둘을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에게 선물했고 1846년엔 이탈리아 여행 때 환대해줬던 시실리 왕 페르디난드 2세에게 보낸다.
그래서 상트에 남아 있던 주조 거푸집으로 다시 지어부어 만든 것이 이 조련사상 이다.
운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베네치아나 암스테르담처럼 수상 운송과 교통이 발달해 있다.
운하나 강물은 불그스레하고 뿌옇기 때문에 오염된 것으로 오해하기 쉽지만 철분과 석회석 성분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 실제로는 깨끗하다고 한다.
물고기가 많아 낚시를 즐기기에도 좋다고 한다.
아니치코프다리는 도스토예프스키가 첫 작품 '가난한 사람들'의 원고를 들고 평론가를 찾아가며 건넜던 바로 그 다리이다.
도스토예프스키가 "네프스키대로에서 이뤄지는 사람들의 만남,이것 하나만으로도 웬만한 책 한 권은 쓸 수 있을 것" 이라고 했듯 사연도 이야기도 많은 네프스키대로 이다.
대로 북쪽 56번, 청동 창틀에 스테인드글라스를 달고 조각상을 세운 '엘리세예프스키 상점'은 상트를 대표하는 아르누보 건물 이다.
1902년 백만장자 엘리세예프스키 형제가 세운 고급 식료품점으로 사회주의 체제를 지나면서도 변함 없이 화려한 100년 명성을 이어온다.
3층 화강암 건물 외벽 코너를 돌아가며 조각상 넷을 세웠다.
대로 쪽 전면, 오른쪽 조각상은 뱀이 휘감은 지팡이를 들고 있어서 그리스 신화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 인 줄 알았다가 뱀이 두 마리인 걸 보니 헤르메스dl다.
여러가지를 상징하는 신이지만 이 건물에선 상업의 수호신으로 세웠다.
왼쪽에 배 모형을 들고 뒤쪽에 톱니바퀴를 묘사한 조각상은산업을 상징한다고 하고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토스가 아닌가 한다.
나머지 왼쪽 외벽엔 과학과 예술을 뜻하는 여신상 둘이 서 있는데 워낙 잰걸음으로 다니느라 건너 뛰었다.
거의 건물 꼭대기까지 올라간 전면 창문 위 아치엔 조금 기괴한 여인 두상이 붙어 있다.
머리카락을 뱀으로 묘사한 메두사이다. 모든 조각상과 부조상은 에스토니아 조각가 아만두스 아담손 작품 이다.
이 건물 진열장 모습으로 위쪽엔 악기를 연주하는 아기 천사상이 매달려 있다.
아래쪽엔 갖가지 식품을 상징하는
이 대형 식품점은 아르누보 건물 못지않은 구경거리가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바로크식 실내라고 한다. 개점 당시 실내장식과 매대가 그대로 남아 쇼핑보다 구경하는 게 더 매력적이라고 한다.
대로 남쪽 35번은 200m에 이르는 블록 하나를 기다란 이층 아케이드 '바흘쇼니 고스트니 드보르'가 차지하고 있다.
무슨 대단한 궁궐인 줄 알았더니 고스트니 드보르가 '고객의 마당' 또는 '상인의 정원'을 뜻하듯
정해진 시간에 인근 각지에서 모여든 상인들이 작은 가게를 벌이는 장마당으로 출발했다.
그중에서도 상트에서는 바홀쇼니(큰) 시장이라는 의미이다.
뒤쪽으로는 길이가 1km 가까운 역삼각형으로 건물이 뻗어 있어 넓이가 1만5천평에 이른다. 네프스키대로에서 보기보다 훨씬 더 크다.
1757년 상트 최초, 유럽 초기 아케이드(실내 시장)이자 마차를 몰고 온 상인들의 숙소로 출발해 200개 가까운 점포가 들어선 쇼핑몰로 번창했다.
정면 박공에 새겨놓은 것은 아케이드 이름 '바흘쇼니 고스트니 드보르'이다. 양쪽 1761와 1785는 20년 넘게 이 시장 건물을 네오클라식 스타일로 리모델링한 착공-완공 연도이다.
그 앞을 지나는 이층 관광버스에 상트 명소들이 선묘로 그려 있다. 맨 오른쪽에 아니치코프다리의 말 조련사상이 보인다.
고스트니 드보르가 차지한 블록 옆 붉은 시계탑이 선 33번 건물은 1750년 길드 건물로 출발해 1786년부터 1804년까지 시청으로 썼던 두마 빌딩이다.
1847년 르네상스 양식으로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른다.
왼쪽에 있는 신전풍 33a 건물은 18세기 말 고스트니 드보르 시장의 귀금속 거래-환전소였다고 한다.
두마 빌딩 모퉁이에 선 진홍빛 시계탑은 네프스키대로에서 손 꼽히는 랜드마크 이다.
원래 화재를 감시하는 소방탑이었는데 오히려 1998년 화재로 불타 새로 지었다고 한다.
카잔스키 다리 건너 28번 건물은 앞서 본 엘리세예프스키 상점보다 더 유명하고 더 논쟁적인 아르누보 건물 싱어 빌딩이다.
1901년 미국 재봉틀 회사 싱어가 러시아 판매 본부로 지었다.
싱어는 뉴욕 본사처럼 마천루로 짓고 싶어했지만 상트시 조례는 예카테리나 겨울 궁전 높이 23.5m보다 높게 짓지 못하게 했다.
당시 네프스키대로에 아르누보 건축의 새 바람을 일으켰던 건축가 파벨 수조르가아이디어를 냈다.
대로 맞은 편 카잔 성당이나 뒤쪽 피의 사원에 기 죽지 않으려고 건물 제한 높이를 넘어 유리 지구상을 한껏 높이 세우는 편법을 썼다.
그 유리탑 정면에 미국의 상징 독수리상도 크게 올려 상트 시민들의 반감을 샀다고 한다.
그래도 싱어 빌딩은 당시로는 획기적인 엘리베이터, 중앙난방, 에어컨부터 지붕에 쌓인 눈을 자동으로 녹이는 제설 시스템까지 획기적인 첨단 시스템을 자랑했다.
역시 러시아 혁명 후 국유화된 뒤 정부 출판사가 됐고 국영 서점 '돔 크니기(책의 집)'로 오늘에 이른다.
"7월 초 굉장히 무더울 때 저녁 무렵 한 청년이 s 골목의 세입자에게 빌려 쓰고 있는 골방에서 거리로 나와 왠지 망설이듯 천천히 K 다리 쪽으로 걸어갔다."
도스토예프스키 '죄와 벌'의 첫머리 이다.
이곳 그리바예도프 운하 카잔스키다리에서 서쪽으로 1km쯤 떨어진 코쿠시킨다리(Kokushkin moct)가 라스콜리니코프가 걸어가는 K다리 이다.
싱어빌딩 앞에서 오른쪽으로 그리바예도프 운하를 따라 피의 사원으로 가는 길가 건물 위에 또 대단한 옥상 장식이 있다.
바로 옆 싱어 빌딩을 설계한 아르누보 건축가 수조르가 싱어보다 11년 앞선 1890년 금융업자 협회 건물로 지었다
승리의 여신 니케(나이키)가 아래 오른쪽 교역의 신 머큐리와 왼쪽 바다의 신 넵튠을 거느리고 있다.
이 건물을 지나 운하를 따라가면 이름보다 더 치명적으로 아름다운 피의 사원을 만난다.
온 도시가 고풍스런 건물이다.
모코코브스키 다리 지나 건너편 동쪽에 웅장한 건물이 있는데 대학 건물인 듯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네바강에 떠 있는 42개 섬을 연결하고 메워 습지 위에 세운 인공 도시 이다.
그래서 네바강 지류와 수로를 포함해 93개 물길이 나 있고 그 위를 다리 342개가 가로 지른다.
길이 63m 로모노소프(Lomonosov)다리는 1787년 중간을 들어 올리는 도개교 체르니쇼프로 출발했다.
산업시대를 거치며 다른 다리들은 교통을 원활하게 하려고 다리 위 탑들을 없앴지만 체르니쇼프 다리만은 작은 돔을 얹은 도리아식 정자 네 개를 그대로 보존해 오늘에 이른다.
나무로 만들었던 중간 도개 부분은 1912년 금속으로 바뀌었다.
다리 이름은 1948년 미하일 바실리예비치 로모노소프의 이름을 따 로모노소프가 됐다.
18세기 중반 모스크바국립대를 세운 학자이자 사상가 이다.
싱어 빌딩 건물을 지나 운하를 따라 이름보다 더 치명적으로 아름다운 피의 사원을 만나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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