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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잔 성당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 2016. 6. 15. 19:39
카잔 성당
2016. 6. 15.
2016. 5. 20 ~ 6. 1.(11박 13일) 러시아 + 북유럽 4개국 여행에서 5. 22. 3일째의 여행이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중심으로 이루어 진다.
오전 여행지 표토르대제의 여름별궁 관람 후 버스로 이동하여 점심식사 후 카잔성당 . 네프스키대로를 보고 피의 성당을 본후 러시아 최고의 박물관 에르미타쥐 박물관 관광 후 한식으로 저녁 식사 후 상트베테르부르크에서 묶는 일정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의 북서쪽에 있는 연방시이다.
네바 강 하구에 있으며, 그 델타지대의 형성된 자연섬과 운하로 인해 생긴 수많은 섬 위에 세워진 도시이다. 발트 해의 핀란드 만에 접해 있다.
예전에는 페트로그라드(러시아어: Петроград, 문화어: 뻬뜨로그라드, 1914년 – 1924년)와 레닌그라드(러시아어: Ленинград, 1924년 – 1991년)로 불리기도 했다.
1924년 1월 21일 레닌이 죽자 1924년 1월 26일 그를 기념하여 레닌그라드로 불리게 되었고, 1991년 9월 6일 다시 옛 이름을 되찾았다.
러시아 제국의 차르 표트르 대제가 1703년 설립한 이 도시는 1713년 모스크바에서 천도하여 1918년까지 러시아 제국의 수도였다.
1918년 수도는 다시 모스크바로 옮겨졌다.
2010년 기준으로 5,000,000 명이 살고 있으며, 러시아에서는 수도 모스크바 다음으로, 유럽에서는 네 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이다. 모스크바에 이은 러시아의 대공업 도시로 복잡한 정밀기계의 제조가 특색이다. 선박, 터빈, 발전기, 디젤기관, 트랙터, 공작기, 계기류(計器類), 각종 장치의 제조공장이 있고, 화학공업(고무제품·과린산비료·화학합성 자재·염료·도료·향료), 섬유공업, 인쇄업 등도 성하다.
다수의 학술 연구기관, 미술관, 박물관 등이 있어 학술·문화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도심은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레닌그라드 주와는 분리된 연방시를 이루고 있으나, 레닌그라드 주의 행정 중심 도시로 되어 있다.
모스크바 다음으로, 러시아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다. 인구는 510만 명으로 모스크바 다음으로 2번째로 인구가 많다. 면적은 1,439km²이다. 북위 59도 56분, 동경 30도 20분에 위치해 있다.
표트르대제의 여름궁전과 분수공원을 구경한 다음 30km를 달려 상트페트르부르크 시내의 명소들을 구경하러 다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향하면서 여전히 많이 보이는 자작나무 숲길이 이어진다.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들어 오니 먼저 숲 사이로 높이 72m 황금빛 첨탑을 인 옛 해군본부(해군성) 건물이 보인다.
실은 이렇게나 거대한 건물로 첨탑이 서 있는 전면 폭만 400m에 이르고 뒤쪽은 네바강변에 닿아 있다. 자료 사진을 보면 페테르부르크 시가지를 종단하는 3개 대로가 해군본부 정면 탑을 꼭지점 삼아 모여드는 형상을 하고 있는데 사진 왼쪽부터 네프스키대로, 고로호바야가(街), 보즈네센스키대로 이다.
해군본부 건물은 1823년 알렉산드르 1세 때 당대 최고 건축가 안드레얀 자하로프가 설계해 지었지만 정면 게이트와 첨탑은 그보다 훨씬 전인 1730년 이반 코로보프가 세웠고 그보다 앞서 해군본부 자리엔 1704년 표트르대제가 지휘해 지은 전함 조선소가 있었다.
당시 봉건 농업국가였던 러시아가 지닌 항구라곤 북극해로 나가는 아르칸젤스크항 하나뿐이었고 그나마 수시로 얼어붙어서 북구 강국 스웨덴을 물리쳐 유럽으로 나가는 발트해 부동항을 간절히 얻고자 했던
표트르에겐 전함 건조가 무엇보다 시급했다.
영특하고 호기심 많고 부지런한 스물다섯 살 젊은 짜르 표트르는 해군 하사 계급장을 달아 신분을 속이고서 1697년부터 1년 반 동안 서유럽 각국을 방문했던 러시아 사절단의 일원이 돼 선진 문명을 직접 보고 배웠다.
네덜란드에선 목수라고 속이고 조선소에 들어가 배 짓는 법을 익혔다.
그런 집념 끝에 이곳 조선소 설립 2년 만인 1706년 첫 전함을 완성해 네바강에 띄웠을 때 그의 감격이 어땠을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첨탑 꼭대기에서 돌아가는 풍향계 장식이 화살도, 물고기도, 수탉도 아닌 돛단 전함인 것이 표트르의 의지와 비전을 상징한다.
표트르는 조선소 터를 찾으면서 네바강 북쪽 건너편 베드로바울 요새에 서 대포를 쏘면 사정거리 안에 드는 이곳에 잡았다.
조선소가 적에게 점령당했을 때 포격해 파괴하려는 생각에서 였다.
조선소 사방에도 요새처럼 해자를 팠고 네 귀퉁이에 포대를 세웠다고 한다.
그만큼 조선소를 중시했다.
탑과 게이트 사이엔 360도 빙둘러 하늘, 지구, 물, 계절들을 상징하는 그리스신화 석상들을 세워 풍향계가 가리는 눈금으로 삼았는데 1860년 러시아정교회에서 '이교도'의 우상이라며 알렉산드르2세의 허락을 받아 대부분 부숴 버리고 여섯 개만 남아 있다.
카잔성당 앞에는 너른 광장 공원이 있는데1860년대 혁명의 열병에 걸린 대학생들이 모여 출정 집회를 갖고 전제정치를 비판한 뒤 겨울궁전까지 행진을 벌였던 곳이다.
근대 소설가 상허 이태준이 광복 후 월북한 뒤 1946년 소련을 여행하면 쓴 '소련 기행'에도 등장한다.
"나는 쿠투조프 동상이 선, 이것도 나폴레옹과의 전승기념관인 듯한 대운주낭하로 둘린 길녁 공원에 이르렀다."
궁전광장은 러시아 바로크 예술의 진수라고 알려져 있는 겨울궁전 반대편으로는 카를로 로시(Carlo Rossi)에 의해 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진 반원형의 개선아치를 갖춘 구 참모본부가 위치하고 있을 뿐 아니라 광장의 중앙에는 1834년, 나폴레옹과의 조국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여 세워진 47.5m 높이의 알렉산더 원기둥이 서 있다. 궁전광장은 수많은 정치적인 사건이 일어난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1905년의 제1차 러시아 혁명의 발단이 되었던 ‘피의 일요일’날 시위가 있었던 곳이 이곳이며, 볼셰비키 통치기간 중 ‘단결된 평화시위’와 군사행진을 위해 사용된 장소도 바로 이곳이다. 민주화된 오늘날에도 갖가지 종류의 정치적 집회(민주주의자, 공산주의자, 무정부주의자, 군주제 옹호자, 반시오니스트 등) 및 문화 공연이 이곳에서 행해지고 있다.
네프스키대로와 그리바예도프운하가 만나는 남서쪽 코너에 코린트식 기둥 94개가 폭 57m에 걸쳐 늘어선 거대한 주랑(柱廊)식 건물이 서 있다.
파벨1세의 명에 따라 1801년부터 10년에 걸쳐 지은 러시아정교회 카잔성당 이다.
16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지주이자 상인 귀족 집안이었던스트로가노프가의 농노 출신 건축가 바로니킨이 로마의 산피에트로성당을 본떠 설계했고 알렉산드르 스트로가노프 백작이 기금 마련과 공사를 지휘했다.
카잔은 러시아 타타르스탄 지방의 도시인데 거기서 발견된 이콘(성상화) '카잔의 성모'에게 봉헌한 성당이어서 카잔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콘 '카잔의 성모'는 1579년 성모의 계시를 받은 볼가 강변의 카잔 마을에 사는 9세 소녀마토로나의 꿈에서
성모 마리아가 알려 준대로 찾아가 땅속에서 발견하여 가져왔기 때문에 "카잔성당" 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러시아정교회에선 성상화를 종교 작품으로만 여기지 않고 구세주나 성모, 성인이 출현한 것으로 보고 숭배 한다.
러시아정교회는 카잔의 성모를 기적의 힘을 주는 이콘으로 받들어 발견된 장소에 테오토코스(성모) 수도원을 지어 이콘을 모신다.
카잔의 성모는 러시아를 수호하는 대표적 이콘이 됐고
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 야로슬라프를 비롯한 여러 도시에 카잔의 성모 복제화를 모신 카잔성당이 들어선다.
1904년 카잔 테오토코스수도원에 도둑이 들어 카잔의 성모를 훔쳐 간다.
도둑은 나중에 붙잡혔지만 값비싼 보석들로 장식한 황금 액자를 탐냈기에 액자만 챙기고 성상화는 잘게 잘라 태워 버렸다고 진술 한다.
온 나라가 좌절과 공황에 빠져 앞으로 나라에 나쁜 일이 닥칠 거라고 걱정한대로 1905년 노동자들 시위에 군이 발포하는 유혈사태가 벌어지고 러일전쟁에서 패한다.
카잔성당이 지닌 의미는 1812년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쳐들어 오자 중요한 변화를 겪는다.
러시아군 총사령관 미하일 쿠투조프가 출정하기 앞서 카잔성당에 찾아와 카잔의 성모에게 경배하며 도움을 청한다.
쿠투조프는 모스크바까지 쳐들어온 나폴레옹군에게 온 도시를 비우는 작전을 벌여 나폴레옹군이 제풀에 물러가자 추격해 대파 한다.
69만 나폴레옹군은 9만3천명만 살아 퇴각 했다.
쿠투조프는 1812년 스몰렌스크전투에서 나폴레옹군을 무찌른 공적으로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고 '고귀한 스몰렌스크 공작 전하'라는 영광스러운 작위를 얻는다.
성당에는 나폴레옹군에게서 빼앗은 107개 군기(軍旗)와 승리의 트로피가 걸려 전승기념관의 성격도 겸하게 된다.
그리고 사람들은 카잔의 성모가 정말 기적을 일으키는 이콘이라는 믿음을 더 굳게 갖게 됐다.성당에는 이듬해 숨진 쿠투조프는 카잔성당에 묻혔고
러시아 국민시인 푸시킨이 그의 영묘에 유명한 애가(哀歌) '쿠투조프의 묘'를 바친다.
카잔 성당은 라틴 십자가(세로대의 아래쪽이 긴 십자가) 모양으로 서쪽, 북쪽, 남쪽으로 코린트 양식의 열주 회랑이 있고 동쪽에는 반원형 애프스(apse)가 위치한다. 건물의 상단은 거대한 장식 난간으로 둘러싸여 있다. 애프스 위에 조각된 프리즈(frieze, 띠 모양의 장식물)에는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의 모습이 담겨 있다. 회랑을 이루는 기둥과 같은 기둥으로 떠받쳐진 돔(dome)이 성당의 머리부분을 구성하고 있다.
이 독특한 구조의 성당을 넵스키 대로와 조화롭게 배치하는 데는 기발한 해결책이 필요했다. 성당의 중심축(동서 방향)이 넵스키 대로와 평행을 이루었기 때문에 보로니힌은 북쪽으로 대로를 마주보는 웅장한 파사드를 만들고 동과 서 양쪽으로 육중한 기둥의 곡선형 열주 회랑을 배치시켰다. 당초 계획은 남쪽에도 같은 회랑을 건설하는 것이었지만, 현실로 실현되지 않았다. 서쪽 파사드의 중앙문은 북쪽 회랑에 가려졌다.
카잔성당은 러시아 정교회의 제단은 서쪽을 향해야만 했는데, 그렇게 할 경우 넵스킨 대로에서 볼 경우
측면을 바라볼 수밖에 없어 석고 대리석으로 이어 만들어진 94개의 코린트 양식의 기둥으로 주위를 둘러싸는 방법을 택하였다고 한다. 반원형의 모양을 만든 것이 성당을 한층 웅장해 보이게 한다.
카잔 대성당 (러시아어: Каза́нский кафедра́льный собо́р)은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위치한 성당 가운데 하나로 러시아 정교회에서 추앙하는 카잔의 성모상을 기리기 위해 지어졌다.
이탈리아 건축가 바로니킨이 설계를 맡아 1801년부터 10년에 걸쳐 지어진 반원형 구조의 건축물로, 바티칸의 산피에트로 대성당을 모델로 했다. 카잔 대 성당의 입구와 재단은 동쪽을 향해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카잔 대성당이 완성된 후 러시아는 나폴레옹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는데 그 기념으로 승리의 트로피와 상대군으로부터 탈취한 군기 등이 성당 내부에 전시되어 있다.
스트로하노프 백작의 농노 출신 건축가 바로니킨(A.Varonikhin)에 의해 1801년부터 10년에 걸쳐 지어진 성 카잔 성당이다.
처음에 이 성당을 세울 무렵 바로니킨은 고민에 빠졌다고 한다.
기독교 정교회의 제단은 서쪽을 향해야만 했는데 그렇게 하려면 입구가 넵스키 대로를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즉 넵스키 대로에서 볼 경우 성당의 측면이 보이게 됨) 이에 생각을 해 낸 것이 바로 석고대리석으로 1m정도씩 이어서 만들어진 94개의 코린트 양식 기둥으로 성당의 주위를 둘러싸는 방법이었다.
카잔 성당의 열주
성당의 벽돌벽은 러시아 서북부 도시 갓치나 인근에서 채굴한 푸도스트(갓치나 인근 마을 이름)의 돌, 즉 투파 석회석으로 마감됐다. 투파는 채굴 직후엔 다루기 쉬우면서도 공기에 노출되면 서서히 경화되기 때문에 세밀한 조각에 제격이었다. 투파의 이런 성질은 회랑 입구, 애프스, 세 회랑의 부조에 성경을 주제로 한 대형 프리즈를 만드는 데 활용됐다.
네 줄로 늘어선 회랑 기둥의 주신과 주두도 투파로 만들어 졌으며, 세 종류의 화강암과 석회암, 대리석으로 된 다채로운 장식으로 꾸며져 있다.
회랑의 양쪽 입구에 세워진 블라디미르 성인과 알렉산드르 넵스키 성인 동상을 비롯해, 조각상 제작에는 청동이 쓰였다. 거대한 문들은 로렌초 기베르티가 피렌체 세례당에 쓰기 위해 만든 것과 비슷한 모양의 동판으로 덮여 있다.
카잔성당은 입장료가 무료 이다.
좁은 출입구를 통해 성당 내부로 들어가니 석회암으로 지어 어두운 색조이나 규모가 웅장하고 엄숙하다.
카잔성당의 화려한 내부
화려한 실내는 신랑과 익랑을 구분하는 28쌍의 코린트식 기둥으로 나뉘어져 있다. 주신은 붉은 핀란드산 화강암을 연마해 만들었고, 주두의 재료는 금도금을 입힌 청동이다. 원통형 궁륭은 장미 무늬가 새겨진 육각형 조각으로 채워져 있다. 바닥은 주로 우랄 산맥에서 캐낸 석재로 만든 모자이크로 덮여 있다.
성당 내부의 중심은 돔 하단의 공간이다. 굵직한 기둥이 네 복음서의 저자가 그려진 펜덴티브(pendentive)를 받치고 있다. 돔 밑부분은 예수와 성모의 생을 주제로 한 조각처럼 보이도록 그린 회색조 프리즈(그리자이유, grisaille)로 꾸며졌다. 격천정 돔은 두 겹으로 이루어졌다.
프레스코화와 캔버스화로 구성된 실내 회화는 제국예술아카데미가 감독했다. 성화벽은 바실리 보로비콥스키와 유명한 화가 알렉산드르 이바노프의 아들 안드레이 이바노프 등 주로 아카데미 소속 화가들이 그렸다.
줄을 서서 이 성당의 성물 카잔의 마리아에 입마춤하려는 순례자들
내부에는 의자가 없고 여자들은 머리에 두건을 쓰고 있는데, 성호를 긋는 모습이 우리나라 천주교와 반대 방향이다.
한쪽에서는 예배를 보고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줄을 서서 기다리며 수도사에게 세례를 받는 모습이 엄숙해 보인다.
1811년 공사가 끝날 무렵, 카잔 성당은 국가적 성지가 될 위용을 갖추었다. 1812년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이 이곳에 배치되었고, 1813년 7월엔 나폴레옹에 대항해 싸운 러시아 군대의 총사령관이자 톨스토이의 작품 전쟁과 평화의 주인공 미하일 쿠투조프 공작의 엄숙한 장례식이 치러졌다.
카잔 성당은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을 모델로 한 대형 고전주의 건물이며, 후에 자크 수플레의 파리 생트 준비에브 성당(팡테옹, 건설 기간 1755~1792)이 이 양식을 계승했다. 북쪽 회랑 덕에 카잔 성당은 장엄한 규모의 건축미와 개방된 공간을 동시에 가지게 됐다.
이태준이 봤던 그 쿠투조프 동상이 성당 왼쪽 앞마당에 서 있다.
2차대전 때 소련 정부가 만든 쿠투조프훈장은 소련방 해체 후에도 러시아 최고의 군사 훈장으로 이어오고 있고 소련군이 상트페테르부르크 봉쇄 끝에 퇴각하는 독일군을 섬멸한 작전명도
쿠투조프였다.
우리로 치면 충무공에 해당할 국민적 영웅이다.
성당 오른편에 쿠투조프와 대칭되게 선 동상은 나폴레옹전쟁 때 국방장관이었던 바클라이 드 톨리 이다.
넵스키 대로를 향한 문을 통해 성당 밖으로 나와 잠시 자유 시간을 갖는다.
카잔 성당 앞의 광장 정원이다.
분수가 있는 성당 광장에는 비둘기들이 평화롭게 거닐고 있다.
각국에서 온 관광객들과 시민들이 벤치에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수많은 비둘기들이 넵스키 대로를 향하여 떼를 지어 날아간다.
광장정원에는 분수가 시원스레 올라온다.
카잔성당 광장에서 마주 바라본 네프스키대로의 모습이다.
카잔 성당은 예카테리나(현 그리보예도프) 운하와 교차하는 지점에서 네프스키 대로와 만난다. 가로수길 맞은 편에 1902년부터 1904년 사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랜드마크 '싱거 빌딩'(현재는 돔 크니기(Дом книги)가 위치한 건물로 더 유명)도 성당과 나란히 넵스키 대로와 접하고 있다.
카잔성당 광장 인근의 반가운 한식당이 보인다.. 카잔성당과 마주한 대로변 네프스키대로로 나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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