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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제 때 창건돼 고려 초 크게 번창했던 폐사지 사산 보원사지(사적 제316호)-서산시 운산면 마애삼존불길 192-25
    여행방/충청도 2025. 2. 12. 20:50

    백제 때 창건돼 고려 초 크게 번창했던 폐사지 사산 보원사지(사적 제316)

     

    2025.   2.    12. 

     

    2025.  2.   3 ~  2.  6(3박 4일).  참 좋은 사람들과 함께한 

    25.  2.  3.  1일 여행은

    포항 출발하여  충남 서천으로  이동하며  서천 여행의 필수코스 서천  신성리 갈대밭,   목조아미타삼존불 보물이 있는 서천 봉서사,  한산모시 홍보관,  서천 희리산 자연휴양림 도착  저녁식사 후  휴식하고

     

    24.   2.  4.  2일 여행은 

    서천 희리산 자연휴양림을 출발하여  서천 마량리 동백나무 숲,  마량포구,   보령 오천항,  안면도 수목원,  안면도 자연휴양림 도착 후  휴식이고   

     

    25.   2.  5.  3일 여행은 

    안면도 자연휴양림에서 출발하여  안면도 꽃지해변,  백사장 항,  안면암,  서산 용현자연휴양림 도착  저녁식사 후  휴식이고   

     

    25.   2.   6.   4일 여행은

    서산 용현자연휴양림에서 출발하여 서산 보원사지,  용현리 마애여래 삼존불,  공주 솥뚜껑 매운탕으로 점심 식사 후 세종 송암사를 둘러보고  4일간의  여행을 마무리하고 포항으로 향해보는  서천.  보령.  안면도.   서산 등 서해안 겨울 마중 여행길  일정이다.

     

    3일째  여행을  편안하고 아늑한 숙박시설과 용현계곡의 물소리와 새소리, 천년을 지켜온 백제문화를 멋진 설경과 함께 즐길 수 있는 서산 국립용현자연휴양림에서 하루를 여유 있게  보내고

    4일째 여행아침을 서산 국립용현자연휴양림에서 맞이하고 체크 아웃 후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으로 향하다가 서산 보원사지부터 보고 가기로 한다....

     

     

     

    용현 자연휴양림  주변에는 백제의 미소로 불리는 서산마애삼존불상, 보원사지와 개심사 등 백제 후기 문화 유산과 접해 있어 서해안 관광 시대의 발달과 함께 자연 교육과 문화 유적 탐방을 겸할 수 있는 곳으로 각광받고 있다.

     

     

    백제 때 창건돼 고려 초 크게 번창했던 폐사지 서산 보원사지(사적 제316호)

    절에 대한 역사는 전혀 전하지 않으며 현재 넓은 절터만이 있다.  북위 양식을 띤 6세기 중엽경의 금동불입상과 8세기 후반으로 추정되는 금동불입상이 출토되었다.  현재 절터에는

    당간지주(보물 제103호)· 석조(보물 제102호)· 5층석탑(보물 제104호)· 법인국사보승탑(法印國師寶乘塔:보물 제105호)· 법인국사보승탑비(法印國師寶乘塔碑:보물 제106호)가 남아 있다.

     

     

    보원사지의 규모가 끝없이 넓어 보인다.

     

    용현자연휴양림 주변에는 화려했던 백제문화가 숨 쉬고 있다.

    휴양림 입구의 보원사지는 정확한 기록이 없어 창건연대와 폐사시기를 알 수는 없지만 서산마애삼존불과 금동여래입상이 출토된 점으로 미뤄 백제 때 창건돼 조선까지 1000년 이상 유지됐던 사찰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에 위치하며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법통을 이어왔던 절의 터에 있었으나, 1970년대 일대의 대대적 목장경영으로 인하여 마을주민은 다른 곳으로 이주하고 현재는 절터만 남아 있다.

    절터에는 10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석조(보물, 1963년 지정)를 비롯하여 1963년 보물로 지정된 당간지주·오층석탑·법인국사보승탑·법인국사보승탑비 등의 유물과 초석이 남아 있다.

    특히 1968년 절터에서 백제시대의 금동여래입상(높이 9.5㎝)과 통일신라시대의 금동여래입상(높이 7.5㎝)이 발견되었다. 

     

    한때 사찰에 머문 승려가 천여 명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지금의 기준으로 보아도 깊은 산속에 자리한 절터가 한눈에 아우르지 못할 만큼 크다. 보원사지에서 출토된 금동여래입상과 철조여래좌상, 철불좌상은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졌지만 지금도 절터 곳곳에서 천년 고찰의 위용을 짐작하게 하는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1987년에 사적으로 지정되었고, 특히 백제시대에는 이 지역이 중요시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당간 지주, 통일신라시대에 지금의 위치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기도나 법회 등의 의식이 있을 때 부처나 보살의 은덕을 표시한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 두는데, 이 깃발을 매달아 두는 깃대를 ‘당간’이라 한다. 그 깃대를 지탱하기 위해 설치한 2개의 받침대가 당간지주다. 현재 남아있는 당간지주는 통일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보원사지 당간지주 (보물 제103호)

    높이 4.2m로 당간을 지탱하기 위해 세운 석조물이다. 당간(幢竿) 은 절 앞에 세워 부처나 보살의 위엄과 공덕을 표시하고 사악한 것을 내쫓는 의미를 가진 당(幢) 이라는 깃발을 다는 깃대다.

    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원래의 위치에 놓여있다.

    마주보고 있는 두 지주의 안쪽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으며, 바깥쪽에는 양측 가장자리를 따라 돌대(突帶)가 돋을 새김되어 있다. 기단부가 없어진 것을 화강암으로 새로 보강하였는데, 주위에 흩어져 있는 여러가지 석재들로 보아 원래는 직사각형의 기단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절에 행사가 있을 때 당(幢, 깃발)을 매다는 당간(幢竿)을 지지하는 당간지주(幢竿支柱) 사이로 저 멀리 5층석탑이 보인다.

     

    기둥의 윗부분은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모를 둥글게 깍아 놓은 형태이고, 아래로 내려 올수록 폭이 약간 넓어져 안정감이 느껴진다.

    지주의 마주보는 안쪽에는 꼭대기에 네모난 홈을 중아에 팠고, 아래 부분에도 네모난 구멍을 뚫어 당간을 고정시키도록 하였다.

     

     

     

     

    간대,  아랫부분에도 구멍(원공)을 뚫어 당간을 고정시키도록 하였다.

     

     

     

     

     

     

     

     

     

     

     

     

    서산 보원사지(瑞山 普願寺址) (사적 제316호)

    백제시대에 창건되었다고 전하는 보원사의 옛터로 통일신라~고려초에 크게 융성하였고 왕사, 국사를 지낸 법인국사(法印國師) 탄문(坦文, 900~975)이 묻힌 곳이며 주변에 100개의 암자와 1,000여명의 승려가 있었다고 전하는 대사찰이었다.

    이 절터에 신라와 고려시대 작품으로 추정되는 대형 철불 2구가 있던 것을 중앙박물관에 전시중이며 1967년도에는 백제시대 작품으로 추정되는 금동여래입상이 출토되는 등 유물로 보아 당시에는 매우 융성했음을 알 수 있으며 백제와 신라, 고려 초 불교미술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있는 사적지이다.

    유물로는 백제계의 양식 기반위에 통일신라와 고려 초의 석탑양식을 갖춘 5층석탑(보물 제104호), 통돌을 장방형으로 파내어 만든 한국 최대의 석조(보물 제102호), 975년(고려 광종 26)에 법인국사가 입적하자 광종의 지시로 세운 승보탑(보물 제105호), 법인국사의 생애가 기록된 승보탑비(보물 제106호), 사찰에 불교행사가 있을 때 불기나 괘불을 걸기 위해 만든 당간지주(보물 제103호)가 있다.

    가까이에 서산마애삼존불상을 비롯한 백암사지 등 불교유적이 집중되어 있어 불교사 연구에 중요한 곳이다.

     

     

     

     

    보원사지 석조 (普願寺址 石槽) (보물 제102호)

    화강석의 돌을 파서 만든 것으로 절에서 물을 담아 쓰던 용기다.  안쪽과 뒷쪽만 정교하게 다듬고 바깥쪽은 거칠게 다듬은 것으로 보아 땅에 묻어두고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무런 장식을 하지 않아 간결하고 소박해 보이지만 거대한 크기로 인해 웅장한 느낌을 주고 있다. 내부에도 아무런 장식이 없으며, 밑바닥은 평평하고 한쪽에 물을 내보내는 구멍이 있을 뿐이다. 현재 남아있는 것 중에서 가장 큰 석조이다.

    통일신라시대의 일반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978년(고려 경종 3년)에 제작된 보원사 법인국사 보승탑을 비롯한 다른 석조물과 관련시켜볼 때 고려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높이 90㎝. 통일신라시대 석조(石槽)의 통식(通式)을 따른 장방형 석조로서 하나의 암석을 장방형으로 다듬고 그 속을 역시 장방형으로 파내었다.

    현재는 두 곳에 길이로 균열이 나 있다. 표면에 선조(線條) 등 아무 장식이 없어 오히려 장중해 보인다. 내부의 각 면에도 조식이 없으며 밑바닥면은 평평하고 한쪽에 배수공(排水孔)이 있을 뿐이다.

    이 석조는 길이가 3.5m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인데 이렇게 큰 석조는 드문 일이다. 이 절터에서는 백제시대의 금동여래입상이 발견된 일이 있으나 이 석조를 이 때의 것으로 볼 수는 없다.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 남아있는 것 중 가장 큰 석조이다. 우측 면 아래 배수구가 보인다.

     

     

    가야산에서 발원한 용현계곡을 걸어 중문터로 향해본다...  계단 난간 기둥을 끼웠던 부재도 보인다.

     

     

    서산 보원사지 오층석탑(瑞山 普願寺址 五層石塔) (보물 제104호)

    서산 보원사지 오층석탑은 옛 보원사 터에 있는 고려시대의 석탑이다.

    현재 보원사 터 가운데 서쪽 사찰 구역의 중심에 위치한다.

    이 탑은 상하 2층의 기단 위에 5층의 몸돌과 지붕돌을 올리고 정상에 머리 장식이 있는 구조다.

    현재 머리장식은 네모난 받침돌만 남아있고, 그 위에 머리 장식을 고정하기 위한 철제 찰주(擦柱-탑의 중심 기둥)가 꽂혀 있다.

    ​보원사지 오층석탑은 백제와 통일신라 양식을 계승한 석탑이다.

    기단의 이중 구조, 상하층 기단 양옆에 돋을 새김한 팔부중(八部衆-불법을 지키는 여덟 신)의 배치나 조각 수법 등은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석탑 모습이지만 조각이나 돌을 다듬는 기술 등이 다소 섬세하지 못한 점은 고려 석탑의 특징이다.

    또한 지붕돌이 얇고 넓어 완만한 경사를 이루면서 네 모서리 끝이 살짝 들린 것은 옛 백제 지역에 남아있는 백제탑의 특색이다.

    1968년과 2003년에 해체 보수 작업이 진행되었는데, 1968년 해체할 때 사리구(舍利具-사리 용기) 내갑.외갑과 함께 사리병, 납석제 소탑(小塔-작은 모형탑) 등이 출토되어 국립부여박물관에 보관·전시 중이다.

     

     

    동(앞면)

    좌측 용(龍),  원래의 인도의 나가라고 불리는 코브라신인데 중국에서 용으로 번역, 용을 두른 인간의 모습으로 표현되는데 왼손에 금강저를 들고 오른손은 용꼬리를 잡고 있다.

     

    우측 긴나라,  힌두교의 장조신인 브라흐마의 손톱끝에서 태어나 천계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신으로 머리 위에 새가 올려져 있고 말머리가 표현되었다.

     

     

    (좌면)

    건달바(乾達婆), 음식을 먹지 않고 대신 향을 즐기며 음악을 들려주며 천신들을 공양하는 신으로, 머리에 사자관을 쓰고 공후고대 현악기를 켜고 있는 모습이다.   우리나라에서 놀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건달이라 부르는 것은 여기서 유래한 말이다.

     

    우측의 야차, 나무의 신이자 지하의 광물을 지키는 신으로 염주와 같은 구슬을 입에 물고있는 모습이다.

     

     

    서(뒷면)

    가루라(迦樓羅), 광명의 신 비슈누의 상징이자 상상의 새를 신격화한 것으로 새 중의 왕이며 뱀과 용을 잡아먹는 신으로 새의 부리가 표현되었다.

    황금빛 새라고 하여 금시조라고도 한다. 오른손에 금강저를 들고 왼손에는 불꽃무늬 보주를 쥐고 있다.

     

    우측의 아수라,  귀신의 왕으로 얼굴이 셋이고 팔이 여섯개인 모습이다.  우리가 흔히 질서가 없이 흐트러진 상황을 아수라장이라고 하는 것은 여기서 유래된것이다.

     

     

    북(우면)

    좌측 마후라가(摩睺羅伽), 원음악을 담당하는 신으로 머리 위에 뱀을 올려놓은 모습이다. 오른손은 금강저를 잡고 왼손은 뱀 꼬리를 잡고 있다.

     

    우측 천(天), 하늘을 다스리는 천신으로 오른 손에 금강저를 들고 왼손을 머리에 두른 큰 물고기의 꼬리를 잡고있다...금강저는 하늘의 신을 대표하는 제석천의 지물부처나 보살 등이 손에 지니고 있는 물건이다.

     

     

    서산 보원사지 오층석탑

    전체적으로 미려하고 경쾌하며 안정감이 있다. 상륜부에는 긴 찰주만 남아 있지만 1945년 광복 전까지 아름다운 복발, 양화, 보륜, 보개, 수련, 용차, 보주 등의 부재가 완전하게 있었다고 한다.

     

     

    오층석탑 팔부중상 배치도

    부처의 법을 지키는 8명의 선신, 인도 각지에 있던 토착신들이 불교가 발전하면서 부처의 법을 수호하는 선선으로 수용

     

     

    서산 보원사지 오층석탑(보물 제104호)

    높이 900㎝. 기단은 2중기단으로 하층에는 사자상이, 상층에는 팔부중상이 얕은 부조로 조각되어 있다. 상층기단 위에는 별석을 끼워 5층의 탑신부를 받치고 있으며, 초층 탑신에는 우주와 문비가 모각되어 있다. 2층 이상의 탑신은 체감이 완만하며, 옥개석은 넓고 끝이 반전되어 백제석탑의 단면을 볼 수 있다. 상륜부에는 찰주가 남아 있으나 부재는 노반만 남아 있다. 탑의 형식으로 보아 고려 초기에 보원사가 중건될 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금당지

    금당지의 중앙에는 철조불상을 모셨던 연화좌대가 남아 있다.

     

     

     

     

    석탑 앞에 큰 전각이 자리 잡았을 '금당지'를 앞뒤에서 바라본다.

     

     

    보원사지는 까마득한 옛날에 거대한 사찰이었던 축구장 2배 가량의 넓이에 백제 시대의 보원사(普願寺) 절터로 10 세기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사지(寺址)이다.   거기에 당시의 화려했던 불교 유적 모습이 석물과 그 잔해인  사찰 지붕의 개와, 탑의 파편들의 석재도 그렇지만 보물로 지정된 석물들이 완벽하게 옛날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금당터 뒤쪽의 법인국사 승탑(보물 제105호)와 탑비(보물 제106호)가 남아 있다.

     

     

    우측은 법인 국사 사리가 봉안된 법인 국사 탑, 머리 장식 부분을 제외한 모든 석재가 팔각형으로 신라 시대 기법을 띠고 있는 고려 초기의 양식이다.

     

     

     

     

    서산 보원사지 법인국사탑(瑞山 普願寺址 法印國師塔) (보물 제105호)

    ​서산 보원사지 법인국사탑은 옛 보원사 터에 세워진 탄문(坦文, 900~975)의 승탑(僧塔)이다.

    탄문은 고려 초의 대표적인 화엄종 승려로서 광종(光宗) 때 승려 최고 직위인 왕사와 국사를 지냈으며, 말년인 975년(광종 26)에 보원사로 내려와 머물다가 3개월 만에 입적하였다.

    ​고려 왕실은 탄문에게 '법인(法印)'이라는 시호(諡號-공덕을 칭송하여 붙인 이름)를, 그의 승탑에 '보승(寶乘)'이라는 이름을 내리고 국가의 최고 장인(匠人)을 보내 승탑과 탑비(塔碑-승려의 행적을 기록한 비)를 제작하도록 하였다.

    승탑은 탄문이 입적한 975년에서 탑비의 비문이 완성된 978년 사이에 완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승탑은 승려의 사리를 모셔놓은 탑으로 사리탑(舍利塔), 부도(浮屠), 묘탑(妙塔)이라고도 하며, 사리를 넣어두는 몸돌을 중심으로 아ㅐ에는 기단을 쌓아 받치고, 위에는 머리 장식을 얹었다.

    ​보원사지 법인 국사탑은 통일신라 승탑 양식에 따라 머리 장식을 제외한 모든 석재가 팔각형으로 제작된 고려 초기의 승탑이다.

    이 승탑은 몸돌의 사천왕상과 보관을 쓴 인물상, 지붕돌의 귀꽃(지붕돌 모서리에 새긴 꽃모양의 장식) 등의 조각이 매우 뛰어나다.

     

     

    기단부는 아래받침돌(下臺石)을 8각으로 된 2개의 돌로 쌓았다.

    밑돌에는 각 면마다 움푹하게 새긴 안상(眼象) 안에 사자 한 마리씩을 도드라지게 조각하였고, 윗돌에는 구름 속을 거니는 용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하였으며 모서리마다 꽃이 새겨져 있다.

     

    보원사지 법인국사탑은 통일신라 승탑 양식에 따라 머리 장식을 제외한 모든 석재가 팔각형으로 제작된 고려 초기의 승탑이다.

    이 승탑은 몸돌의 사천왕상과 보관을 쓴 인물상, 지붕돌의 귀꽃(지붕돌 모서리에 새긴 꽃모양의 장식) 등의 조각이 매우 뛰어나다.

     

     

    서산 보원사지 법인국사탑비(瑞山 普願寺址 法印國師塔碑) (보물 제106호)

    총높이 4.25m, 폭 1.15m/화강암

    법인국사의 탑비로 978(고려 경종 3)에 경종의 지시로 세워졌다.

    비몸 높이 230Cm, 폭 115Cm, 글자 수 5,000여 자나 되는 거비이며 국공(國工)을 파견하여 이들이 세우게 했다.

    이분은 신라말~고려초의 고승으로 법호는 탄문(坦文)이다.

    비문의 내용은 탄문의 일대기이며 900년(신라 효공왕 4)에 출생하여 15세에 계(戒)를 받고 968년(고려 광종 19)에 왕사(王師), 974년(광종 25)에 국사(國師)로 지내다가 이곳 보원사에 와서 975년(광종 26)에 입적하였다.

    ​역대 왕들과 가까웠으며 국가 시행 불사를 도맡아 시행하였고, 특히 광종은 왕권강화 작업기간 이후 정신적인 지주로서 왕사, 국사로 가까이 있게 했으며 입적하자 매우 슬퍼하였다.

    이분은 학승으로 제자가 많아 말년에 보원사에 올 때 선(禪), 교승(敎僧) 천여명이 영접했으며 이곳을 「고산(故山)」이라 하고 여기에 와서 묻혔다.

     

    귀부(龜趺) 앞면

    부리부리한 눈매에 뿔이 달려있고 코에는 수염이 날리고 입에는 여의주(如意珠)를 물고 있다.

     

    이수(螭首)

    이수(螭首)라고 부르는 옥개석(屋蓋石)을 얹었다.

    비 머리의 가운데에는 편액처럼 면을 다듬어서 부도비의 주인 이름을 새기는 제액(題額)을 만들고 네 모서리에는 용을 조각하고 운룡문(雲龍紋)을 새겼다.

     

    귀부 뒷면

    비신 받침은 등에는 육각형의 귀갑문(龜甲文)을 새기고 네모난 비석 받침구멍을 파서 비좌(碑座)를 올렸다.

    거북 등의 중앙에는 등뼈 모습을 새겼고 꼬리는 한 바퀴 감아 돌렸다.

     

    귀부 측면

    옆에서 보면 거북의 몸에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머리 모습을 하고 목을 곧추 세우고 앞발은 땅을 힘차게 밟고 있다.

     

    기단부는 아래받침돌(下臺石)을 8각으로 된 2개의 돌로 쌓았다.

    밑돌에는 각 면마다 움푹하게 새긴 안상(眼象) 안에 사자 한 마리씩을 도드라지게 조각하였고, 윗돌에는 구름속을 거니는 용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하였으며 모서리마다 꽃이 새겨져 있다.

     

     

     

     

     

     

     뒤로 개심사로 넘어가는 고갯길이 열려있다.

     

     

     

     

    오늘날에는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수덕사의 말사로 재건되어 가고 있다.

     

     

     

     

     

     

     

     

     

     

    주변에는 같은 백제 불교 문화재인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이 있고, 그 외에도 용현계곡,  가야산,  고풍저수지 등이 있다. 그리고 서산 아라메길 천년미소길과 천년미소길 순환 코스가 경유하므로 연계하여 관광해도 좋다.

     

     

     

    바라보고 있으니 마음이 차분해진다. 모습이 너무 아름다웠다던  하얀 눈이 쌓인 보원사지를 뒤로 하고 다음여행지  마애불 중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백제의 미소'로 널리 알려져 있는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을 만나러 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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