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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풍류를 즐기기 위해 언덕 위에 지어진 정자, 함안 무진정(경남 함안군 함안면 괴산4길, 함안면 괴산리 547)
    여행방/경상도 2024. 6. 28. 16:05

    풍류를 즐기기 위해 언덕 위에 지어진 정자, 함안 무진정(경상남도의 유형문화재 제158호)

     

    2024.   6.    28. 

     

     

    2024.  6.   23.   가배산악회와 함께한  함안 무진정,  진주 청곡사와   2회 월아산 정원박람회 두루 돌아보는 함안. 진주 여행길로  오늘 첫 여행지는  풍류를 즐기기 위해 언덕 위에 지어진 정자,  함안 무진정다...

     

     

     

     

    주변으로 주차장이 넓찍하다.

     

     

     

     

     

     

     

    문진정 아래 괴산재 출입문과 괴삼재가 보인다...    괴산재는 무진정의 주인 조삼(1473~1544)을 기리는 종중의 재실이자 교육 전당이다.

     

     

     

     

    무진정 앞 연못  입구에는 카페가 있다.

     

     

     

     

    괴산재 출입문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무진정 앞 연못을 한바퀴 돌아보기로 한다. 

     

     

     

     

    무진정과 연못가 주변에는 수십 그루의 왕버들과 느티나무, 배롱나무, 팽나무 등 다양한 수형을 가진 노거수가  많아 사시사철 아름다운 풍광을 펼친다.

     

     

     

     

     

     

     

    연못 가운데엔 육모지붕 누각인 영송루(迎送樓)가 있는데 연못 위를 가로지르는 운치 있는 홍예교라는 다리로 연결돼 있다.

     

     

     

     

     

     

    무진정의 주변으로 지금은 찻길에 둘러싸여 답답할 것 같지만 무진정에 있으면 그런 막연한 느낌은 사라진다.

    무진정은 앞의 연못과 함께 지금도 사계를 즐길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고 있다.

    주세붕의 기문에 의하면 무진정이 처음 이곳에 지어질 때도 함안천이 남쪽에서 흘러들어 무진정이 세워진 절벽을 돌아 북쪽으로 들어간다고 묘사하고 있다.   풍경은 주변으로 나무와 산, 들판이 뻗어있고 조그만 집도 없다고 설명한다.

    자연이 가득하고 들판이 뻗어있던 주변 경관은 많이 바뀌었어도 무진정은 옛 풍류를 대변하며 지금도 뭇사람들에게 참 휴식을 선사하고 있다

     

     

     

     

    오른쪽으로 '부자쌍절각'이 보인다...

     

     

     

     

    이곳에서는 함안 낙화놀이가 열리는 곳이라 한다.

     

     

     

     

     

     

     

    부자쌍절각 출입문인 성인문

     

     

     

     

     

     

     

     

     

     

     

     


    생육신의 한 사람인 조려(趙旅)의 5대손이자 이곳에 정자를 세운 조삼(趙參)의 증손자인 조준남의 효행과 그 아들인 조계선의 충절을 함께 기리기 위해 숙종 32년(1706) 왕명으로 세워진 정려각이다.

     
    정려는 충신, 효자, 열녀 등이 살던 집이나 마을 입구에 정려문이나 정려각을 세워 기념하는 것이다.
    각(閣)은 정려를 받은 사실을 기록한 현판이나 비석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임금의 권위에 따라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었다.
     
    조준남(趟俊男)
    명종 5년(1547)에 태어나 효행으로 소격서 참봉이 되었다. 선조 30년(1597) 음력 8월에 왜적들이 부장품을 약탈하기 위해 증조부  집의공의 묘를 파헤치자 공은 적중을 뚫고 돌어가 흙으로 관을 덮으며 그들의 야만적 행위를 꾸짓었다. 

    왜적들이 의로운 자라며 죽이지 않고 강제로 포로로 끝고 가려고 하자 공이   "너회들은 우리나라의 불공대천의 원수다.  너희들에게 끌려가 더 이상 모욕을 당하기 싫다." 하고는 차고 있던 칼을 뽑아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하자, 왜적들이 의로운 자라며 옷으로 시신을 덮어주고 달아났다. 
    고종 5년(1866)에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참찬)이 가증(加增)되었다.
     
    조계선(趙繼先)
    조준남의 큰 아들로 선조 3년(1570)에 출생했다.  왜적의 침입으로 나라가 어지럽게 되고 부친이 왜적으로 인해 작고하자 무과를 준비해 선조 35년(1603) 급제했다. 인조 5년 정묘호란 때 (1627년)답) 공은 선전관으로 평안도 의주 부윤 이완(李莞 ,이순신 장군의 조카 19세 때 노랑해전 참전)에게 왕명을 가지고 갔다가 음력 1월 14일 후금(청)의 3만 대군이
    침략을 하자 이완과 함께 선봉에 나가 적을 무수히 무찔렀으나, 화살은 떨어지고 힘이 다해 이완,  최몽량과 함께 순국 했다.
     
    묘소는 함안군 법수면 사정리 토현에 있는데 생전에 남긴 손톱, 머리털, 웃과 함께 초혼장(
    휴) 으로 모셨다.   고종 5년에 병조참판에 가증되었다

     

     

     

     

     오횡묵은 낙화놀이를 시로 읊었다.

     

    붉은빛은 꽃이 피어 봄이 머무는 듯하고

    밝음은 별 무더기 같아 밤은 돌아오지 않네

    ~  '함안총쇄록'  오횡묵 ~

     

    밤을 잊은 듯 불꽃놀이로 사방이 밝고 주변이 봄처럼 화사한 정경을 표현하고 있다.

     

    조선 후기인 1889년 4월에 함안 군수로 부임한 오횡묵은 한 달 후에 무진정에 처음 올랐다.   그에게 무진정은 가뭄 속 단비 같은 장소였다.  산도 좋고 물도 좋고 사람도 좋은 그런 자리였다.  그는 저서 '함안총쇄록'에서 못가에 있는 정자 무진정에 대해 말한다.

     

      "부자쌍절각 아래에 못이 있고, 못 가에 조그만 정자가 날아갈 듯 서 있는데 무진정(無盡亭)이라 한다. 집의(執義) 벼슬을 지낸 조삼(趙參) 선생이 창건했는데 초목이 깊이 우거졌고 대숲이 맑고 기이하였으며 기암괴석이 장관을 이루었다."

     

       그는 연못에 대해서도, 처음엔 못이 둥글고 널찍했는데 후손들이 부강해지자 지역 양반들이 흙을 져다 부어 못을 메우자 이상하게도 그 뒤로 조 씨들이 많이 쇠퇴했다고 적었다. 인터넷에 있는 정보처럼 후손들이 파서 만든 인공 연못이 아니라 원래는 강물이 흘러와 자연스럽게 조성된 연못이었을 가능성이 크고 한때 흙을 메워 축소되기까지 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연못 주변에 조삼의 후손들을 기리는 비석들이 있다.

     

     

     

     

     

     

     

     

     

     

     

     

     

     

     

     

     

     

     

     

     

     

    버드나무 고목

     

     

     

     

    연못 가운데엔 육모지붕 누각인 영송루(迎送樓) 정자가 있다.

     

     

     

     

     

     

     

    다리를 통하여 연못가 언덕 위에 오르면 함안 무진정의 대문인 동정문(動靜門)이 있다. 

     

     

     

     

    연못 다리에서  연못 주변의 바라본 카페 

     

     

     

     

    무진정 동정문 앞에서 바라본 풍경이다.

     

     

     

     

     

     

     

    연못 주변에 왕버들 나무 늘어져 운치가 풍성하다.

     

     

     

     

     

     

     

    무진정의 대문인 동정문(動靜門)

     

     

     

     

     

     

     

     

     

     

    무진정은 1542년 조삼(趙參)선생 (1473~1544)이 후진양성을 하고 여생을 보내기 위해 지은 정자이다.선생은 생육신 조려 선생의 손자이며 자신의 호를 따 무진정 (無盡亭)이라고 명명하였다.

     

    정자는 출입문인 동정문( 動靜門)과 정면 3칸, 옆면 2칸으로 이루어졌다.

    정자의 중앙에는 마루방을 두고, 양쪽에는 뒷마루를 두었다.    마루방과 뒷마루에는 개방이 가능한 들문을 설치하여 공간 활용을 더하였다.   단순하고 소박한 조선 전기의 정자 형식을 잘 보여준다.

    후손들이 원래 있던 무진정을 1547년(명종 2) 다시 중수했고, 현재의 건물은 1929년 4월에 중건한 것으로 1976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58호로 지정되었다.

     

    기둥 위에 아무런 장식이나 조각물이 없이 단순 소박하게 꾸민 팔작지붕의 건물로 조선 초기의 정자형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서원인 소수서원의 창시자 주세붕이 무진정 기문을 지었으며, 무진정 정자 앞에는 함안낙화놀이가 열리는 연못이 있다.

     

     

     

     

    ‘無盡亭’이라고 쓴 편액글씨는  주세붕(周世鵬)의 글씨로 추정된다.

     

     

     

     

    무진정은 풍류를 즐기기 위해 언덕 위에 지어진 정자이다.

     

     

     

     

     

     

     

    무진정 주련

     

                                           어찌 홀로 전원에서 즐기기만 했겠는가.

                                           한서에 말하는 관리의 치적이 있었다네.

     

                                           어려운 시기에 처세에 지혜로웠고

                                           칠형제 입신양명하여 술잔을 올리네.

     

                                          육경을 공부하다 먹는것도 잊으니,

                                          (육경 ; 시경,서경, 역경, 춘추, 예기 = 오경 + 악기)

                                         위아래 구름 그림자 하늘 빛 띄네.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을 보내고 맞이하니,

                                         오히려 백성과 나라를 먼저 걱정하네.

     

     

     

     

    생육신은 누구가?

    세조가 조카인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함에 대하여 절개가 굳은 사육신은 목숨을 잃었다.

    죽지는 않았으나 절의가 높았던 생육신은 김시습, 원호, 이맹전, 조려, 성담수, 남효온 이다.

    사육신과 생육신 개념은 남효온의  추강집에 의거한 명칭이다.

     

     

     

     

    바위 언덕 위에 무진정이 소박하면서 깔끔한 모습을 드러낸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정자인데 전후 좌우에 마루를 두고 중앙 1칸에 방을 배치한 조선 전기의 정자 형식이다.   담양의 면앙정과도 같은 모양으로 남부 지방의 영호남 정자 문화의 공통점을 갖고 있다.

    들문을 열면 방과 마루의 구분이 따로 없이 개방감과 공간 활용을 극대화하고 있다.

    우리가 갔을 때도 들문을 열어두어 무진정의 멋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었다.  가운데 방 한 칸을 핵으로 마루를 빙 둘러친 모습은 정자라기보다 한 칸의 작은 우주이다.

    사방 4면이 열려 기둥만 남고 모든 것이 무애한 상태로 자연을 받아들이고 있는 모습은 무진정마저 그저 자연의 일부로 존재함을 보여준다.

    우리나라 최초 서원인 소수서원의 창시자인 신재 주세붕(1495~1554)이 무진정에 대해 "온갖 경치가 모인 조물주의 무진장"이라고 극찬한 이유가 이해된다.

     

     

     

     

     

     

     

    우리나라 최초 서원인  영주의 소수서원 창시자이며  함안이 고향인 주세붕은 무진정(無盡亭) 기문을 지었다

     

    삼도의 자줏빛 비취색 같은 좋은 경치와 통하고 通三島之紫翠

    십주의 노을빛보다 낫다. 挹十洲之煙光

    맑은 바람이 저절로 불어오고 淸風自來

    밝은 달이 먼저 이르니 明月先到

    반걸음을 옮기지 않아도 不出跬步

    온갖 경치가 모두 모여 萬像咸集

    진실로 조물주의 무진장이라 하겠다 信乎造物者之無盡藏也

    '무진정기無盡亭記'  주세붕

     

    조삼이 교유했던 주세붕이 조삼이 사망하기 전인 1542년(중종 37)에 '무진정기'(주세붕의 문집 ‘무릉잡고’에 실림)를 쓴 것을 근거로 들 수 있다.

    ‘무진정기’엔 귀거래사한 조삼의 용기를 칭찬하면서 "정자의 경치가 다함이 없고 선생의 즐거움이 또한 다함이 없다. 정자의 이름과 선생의 이름이 모두 다함이 없음을 환히 알겠네"라고 하여 조삼이 벼슬에서 물러나 정자를 지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무진정 아래 괴산재  출입문

     

     

     

     

    괴산재는 무진정의 주인 조삼(1473~1544)을 기리는 종중의 재실이자 교육 전당으로 1670년 괴산마을 서편 산기슭에 창건되었다.

    1899년 더 높은 자리에 새로 지었다가 산 중턱에 있어 이용이 불편해 현재의 자리에 다시 새로 짓고 1992년 괴산재라는 이름은 그대로 가져와 낙성식을 한 건물이 지금의 괴산재 건물이다.

     

     

     

     

     

     

     

     

     

     

    생육신 조려 선생 손자 조삼 선생은 17세인 성종20년(1489)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중종2년(1507)문과에 급제하여 함양 .창원 대구.성주 . 상주에서 지방관을 지냈고, 중앙에서는 사헌부 집의 겸 춘추관 편수관을 지냈다.

    독서를 좋아한 올곧은 성격으로 성균관의 생원일 때 연산군 폭정의 주도적 역할을 한 유자광을 처벌하자는 상소를 올려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단종에 대한 절의를 지킨 생육신 어계 조려 선생의 손자이다.

     

     

     

     

    무진정 정문 동정문을 나간다.

     

     

     

     

     

     

     

     

     

     

     

     

     

     

     

     

     

     

     

    효자담 孝子潭

    조삼(趙參)의 7대손 조경송(趙景松 ; 1678~1747)은 열 살에 어머니를 잃은 후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마저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해지자 멀리 외출을 하지 못했고 외아들이 젊은 나이에 요절해도 아버지와 친지들이  상심할까 슬픈 표정을 보이지 않았으며 날씨가 아무리 추워도 넷가에 나가 물고기를 잡아 아버지를 봉양했다.

     

    혹독하게 추운 어느 겨울날 넷가 이수지(二樹池)에서 얼음을 깨고 물고기를 잡으며 혼자 슬피 울었다. 

     

    암행어사 박문수(1691~1756)가 지나가다 우는 사유를 물었는데 "행인이 알 바가 아니오." 라고 하자 더 이상 물지를 못했으며 지나가는 사람을 통해 선생의 효행과 슬픈 사연을 들었다.

    박문수는 하늘이 낸 효자라며 탄복을 한 후 함안을 떠나면서 문서로 함안군수에게 쌀과 어육을 내리게 했고 훗날 경상감사로 부임해서 다시 어물을 내렸으나 그때는 이미 선생이 작고한 후였다.

     

    이 표지석은 조경송 선생이 물고기를 잡던 넷가인 이수지 옆에 처음 세웠으나, 쌍절각 옆으로 옮겼다가 정비 사업을 하면서 다시 이곳으로 옮겼다.

     

     

     

     

    무진정 조선(조삼)선생 신도비로   신도비는 고관의 무덤이나 유적지 근처에 유적지가 있음울 알리는 비이다.

     

     

     

     

     

     

     

     

     

     

    무진정과 연못가 주변에는 수십 그루의 왕버들과 느티나무, 배롱나무, 팽나무 등 다양한 수형을 가진 노거수가 많아 사시사철 아름다운 풍광을 펼친다.

    연못 가운데엔 육모지붕 누각인 영송루迎送樓가 있는데 연못 위를 가로지르는 운치 있는 홍예교라는 다리로 연결돼 있다.

     

     

     

     

     

     

     

     

     

     

     

     

     

    무진정에서 조남산 쪽으로 오르면 성산산성으로 오를 수 있는데 정비관계로 통제중이었다.

     

     

     

     

     

     

     

    넓은 주차장 위로  '함안 낙화놀이 전수관'이 있었는데  문이 잠겨있어 내부는 볼수 없었다.

     

     

     

     

     

     

     

    함안 9경에  '무진정의 사계'가  들어간다고 한다.  무진정의 여름을 눈에 담아간다.

     

     

     

     

     

     

     

    주차장 한쪽의 푸드트럭

     

     

     

     

    함안 낙화놀이는 드라마중에서  영상으로 보고 너무 아름다워  기회가 되면  곡 한번 보고 싶었던 곳이었다.

     

     

     

     

     

     

     

    조선중엽부터 시작되어 매년 4월 초파일에   "무진정"에서 열리는 "함안 낙화놀이(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 33호)"는 우리나라 무형문화재 가운데 불놀이 문화로는 최초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행사로  참나무 숯가루를 한지에 싸서 댕기머리처럼 엮은 것  "낙화봉"이라고 하는데, 이것을 줄에 매달아 저녁 무렵 불을 붙이면  숯가루가 꽃가루처럼 무진정 연못 위로 흩날리는 "불꽃놀이"이다

    불꽃이 바람에 흐드러지는 풍경은 황홀할 정도로 아름답다고 하는데 올해 2회 함안 낙화놀이를 추진했다고 한다.

     

     

     

     

    무진정 연못 위. 꽃가루처럼 흩날리는 불꽃놀이  그 불꽃. 바람에 흐드러지는 풍경 너무나 궁금하다...

    참 휴식 선사하는 우주를 담은 무진정을 마주하고  이곳에서 점심 식사 후 다음 여행지 진주청곡사로 향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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