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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화8경 중 고구려 시대 지어진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 전등사(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전등사로 37-41)
    사찰여행/인천 2024. 6. 8. 18:26

    강화8경 중  고구려 시대 지어진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 전등사

     

      

    2024.   6.   8. 

     

     

    2024.  6.  5 ~ 6(1박 2일).  개배 테마여행에서 좋은 사람과 함께한 인천 강화도 여행길이다...

    6.  5일  1일 일정은 포항에서 7시 출발  휴게소 몇군데 들러  차량물결을 헤집고 강화도 제석봉 평화전망대 아래 남북 1.8평화센터에 13:15에 도착하여 점심식사 후 강화도 제석봉 평화전망대,  보문사,  전등사 여행 후 외포항에서 저녁 식사 후 편히 쉬는 일정이고

     

    6.  6일 2일 일정은  외포항에서 아침 산책 후 아침 식사 하고  강화도 본섬 옆 교동도로 이동하여  망향대,  화개정원,  대룡시장을 둘러보는  강화도 본섬과 강화 교동도를 둘러보는 1박 2일  일정이다.

     

    6월  5일 1일  양양 낙산사, 금산 보리암과 함께 우리나라 3대 해상 관음기도 도량인 오늘 두 번째 여행지 보문사를 나와 강화도 본섬으로 들어와 세 번째 여행지 대웅보전의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나부상(裸婦像) 때문에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전등사로 향해본다..... 

     

     

     

     

     

     

    남문주차장 도착이다....

    개방시간  :  09:00∼18:00

    휴관일  :  연중무휴

    주차정보  :  대형 50대

    주차료  :  대형4,000원,   소형2,000원

     

     

     

     

    남문 주차장에 남문 소보인다....   입장료가 없어졌으니 통과한다...  이젠 이곳에서 주차비를 징수하는 듯 ~

     

     

     

     

     

     

     

    송림으로 이어진 길따라 전등사로 향한다.

     

     

     

     

    전등사를  향하는 길에 노목이 힘차게 가지를 뻗어 길손을 맞는다...

     

     

     

     

    종해루

    전등사 남문 광장에서 나무우거진 솔숲길을  따라 50m  5분쯤 걸었던가?   종해루가 보인다....

    본래 삼랑성(정족산성)에는 동서남북 네 개의 문이 있었으나 지금은 동문 남문 이용된다.

     

    이 가운데 문루(門樓)가 있는 곳은 남문이 유일하며 남문의 문루를 ‘종해루’ 부른다.

     

     

     

     

     

     

     

     

     

     

    전등사가 특이한 것은 따로 일주문이나 산문이 없이 성문이 일종의 일주문 역할을 하는 절이라는 점이다. 일주문 치고는 아주 오래되고 견고한 일주문이라고 해야겠다.

    이 남문의 종해루는 영조 15년(1739)에 삼랑성을 중수하면서 건립한 문루라고 한다.

     

     

     

     

     

     

     

     

    부도전

    종해루를 지나 50미터쯤 올라 좌측을 보면   전등사에 주석하셨던 역대 조사들의 부도를 모셔둔 곳으로 전등사 역대 조사들의 부도가 세워진 부도전이 보인다.

     

     

     

     

    전등사에는 두 그루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다.

    수령이 5백 년이 넘는 나무들이다. 한 나무는 노승나무, 다른 한 나무는 동승나무로 불리는가 하면 암컷, 수컷으로 불리기도 한다.

    은행나무는 암컷과 수컷이 서로 마주보고 있어야 열매를 맺는다. 그런데 전등사 은행나무는 꽃은 피어도 열매가 맺지 않는다고 한다.

    이 신기한 나무들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강화도령 철종 임금 때의 일이다. 조정에서는 전등사에 은행을 스무 가마나 바치라고 요구한다. 전등사 은행나무는 기껏해야 열 가마밖에 열매를 맺지 않는데 스무 가마를 요구하니 관리들의 횡포가 이만저만 심한 게 아니었다.

     

    이 지시를 듣게 된 동승이 노스님께 고했다.

    “스님! 정말 관가에서 너무들 하는 것 아닙니까요?”

    “허허, 참으로 난감한 일이다. 얘야, 그렇다고 그 사람들을 미워해선 안 되느니라. 참아야 하느니…….

    ”노스님은 이렇게 타일렀지만 자신도 깊은 고민에 빠졌다.은행 스무 가마를 내놓을 수도 없었고 관리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더욱 더 불교를 탄압할 것이 분명했다. 노스님은 하는 수 없이 백련사에 있는 추송 스님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추송 스님은 도력이 높기로 소문이 난 분이었다.

    며칠 후 추송 스님이 전등사에 나타났다.

    곧 전등사 일대에 ‘전등사 은행나무에서 은행이 두 배나 더 열리게 하는 기도가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추송 스님의 3일 기도를 지켜보았다. 그 중에는 관리들도 섞여있었다.

    “어떻게 은행이 두 배나 많이 열린단 말인가?”

    “맞아! 추송 스님이 제 아무리 정성을 드려도 소용없는 짓이겠지.”사람들은 저마다 이렇게 수군거렸다.

     

    이윽고 기도가 끝나는 날이었다.

    갑자기 추송 스님의 기도를 지켜보던 관리들의 눈이 얻어맞은 것처럼 퉁퉁 부어버렸다.

    “이제 두 그루의 나무에서는 더 이상 은행이 열리지 않을 것이오.”추송 스님이 기도를 끝내고 사람들에게 말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바로 그때 때 아닌 먹구름이 전등사를 뒤덮더니 비가 무섭게 내렸다.사람들은 두려움에 떨며 일제히 땅에 엎드렸다.

     

    얼마 후 사람들이 고개를 들었을 땐 추송 스님은 물론 노스님과 동자승까지 모두 사라졌다. 사람들은 보살이 전등사를 구하기 위해 세 명의 스님으로 변해 왔다고 믿게 되었다. 그 때부터 전등사 은행나무는 열매를 맺지 않았다.

     

     

     

     

    암컷 노승나무

     

     

     

     

     

     

     

     

     

     

     

     

    수컷 동승나무

     

     

     

     

     

     

     

    이곳 노거수 아래로 8년전에 왔을때는 전등사 윤장대가 있었던 곳인데 지금은 없어졌다.

     

     

     

     

    운장대옆의 수령 500년이 넘는 나무 몸통의 두께가 대단하다. 마치 근육을 키운 나무처럼...

     

     

     

     

    보호수  은행나무

     

     

     

     

    죽림다원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며 녹음 짙은 전등사 경내에 있는 전통차 전문점이다.

    아담한 연못과 어울러진 외부, 품위 있고 아늑한 분위기의 찻집 내부는 색다른 느낌주어 가족,연인,단체가 함께 담소를 나누기 좋은 장소다.

    솔바람이란 이름의 솔잎차와 모과차 등 다양한 전통차와 간단한 다과를 함께 즐길 수 있다.  꽃과 나무, 그리고 구름도 쉬어가는 전등사.  지친 몸과 마음을 죽림다원에서 잠시 쉬어가심이 어떨지?

     

     

     

     

     

     

     

     

     

     

     

     

     

     오른쪽 언덕 아래에 요사 정행당이 자리하고 있다.

     

     

     

    1. 대웅보전   2. 약사전   3. 명부전   4. 삼성각   5. 무설전   6. 월송요   

    7. 대조루  8. 선불장/공양간   9. 적묵당(종무소)   10. 강설당   11. 정족사고 

    12. 취향당   13. 관음전  14. 극락암   15. 종루   16. 남문   17. 양헌수비   

    18. 동문   19. 화장실    20. 죽림다원   21. 삼랑성   22. 부도전   

    23. 정족산성진지   24. 전등각   25. 문화관광해설사

     

     

     

     

    종루와 대조루가 나란히 서 있다...

     

     

     

     

    단군왕검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전설을 간직한 삼랑성내에 아늑히 자리잡고 있는 전등사는 고구려 소수림왕 11년(381)에 아도화상이 처음 창건하고 진종사(眞宗寺)라 이름 지었다.   그후 고려 충렬왕비 정화궁주가 이 절에 귀한 옥등을 시주했다해서 전할 전, 등불 등자(傳燈寺)를 써서 전등사로 개명한 사찰이다.

     

     

     

     

    전등사의 남문이나 동문으로 올라와 두 길이 합치는 지점에 이르면 2층 건물이 보이고 1층 이마에는 ‘전등사’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이 건물이 바로 전등사의 불이문 구실을 하는 대조루이다.

     

     

     

     

     

     

     

    이절의 입구에 있는 대조루 밑을 지나들어가면 정면에 보물 제178호로 지정되어 있는 대웅보전이 자리잡고 있다.

    대조루에서 대웅전을 바라볼 때의 시선은 25도쯤 위쪽으로 향하게 된다.  대웅전의 석가모니불을 가장 존경하는 시선으로 보게 하는 각도로, 이런 부분까지 섬세하게 고려해 지어진 건물이 대조루이다.

     

     

     

    대조루(인천문화재자료 제7호)

     대웅보전 쪽에는 ‘대조루’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전등사의 남동쪽으로는 멀찌감치 강화해협이 내려다보인다.   강화해협은 일명 ‘염하’라고도 부르는데 이 염하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이 전등사 대조루이다.

    지금의 대조루는 1932년에 중건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건물 자체가 주변 경관과 잘 어울리며 전등사의 여러 건물 중에서도 아주 소중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대조루에는 1726년 영조 임금이 직접 전등사를 방문해서 썼다는 ‘취향당’이라는 편액을 비롯해 추사가 쓴 ‘다로경권’ 등 많은 편액이 보관되어 있다.

    본래 대조루는 기도를 하거나 법회를 열던 공간이었으나 지금은 불교 서적과 기념품 등을 파는 곳으로 사용되고 있다. 

     

     

     

     

    대조루는 2층 누각이지만 밑을 통과해 대웅전 쪽에서 보면 산지 가람의 배치 특성상 1층처럼 보이는 구조물이다.

     

     

     

     

    아름다운 대웅전을 보려왔는데   대웅전 (보물 제178호)이 대대적이 수리 중이다...

     

    현재의 건물은 1621년(광해군 13)에 지은 정면 3칸, 측면 3칸 형식의 목조 건물이다.   정면 3칸은 기둥과 기둥 사이를 같은 길이로 나누어 빗살문을 단 형식이다.   좌우 옆면은 벽이나 앞 1칸에만 외짝으로 문이 있다.   기둥은 대체로 굵은 편이며 모퉁이 기둥은 높이를 약간 높여서 처마 끝이 들리도록 했다.

    대웅보전의 외관상 특징은 우선 비슷한 시기의 다른 건물에 비해 약간의 변화를 보여 주고 있다는 점이다.   곡선이 심한 지붕과 화려한 장식(나부상, 동물 조각, 연꽃 조각 등)이 그런 특징을 잘 보여 준다.

     

     

     

     

     

     

    좌우 옆면은 벽이나 앞 1칸에만 외짝으로 문이 있다.  

     

     

     

     

    대웅전 공포의 귀면 조각이 익살스러움을 자아낸다..

     

     

     

     

     

     

     

     청동수조(인천유형문화재 제46호)

    전등사의 청동수조는 지름 112cm, 높이 72cm로 고려 충렬왕 때 정화궁주가 시주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수조는 보존 상태가 양호하며 수조 안에 물고기나 자라가 놀고 있는 모습이 조각되어있다.   청동수조는 불을 끄기 위해 만든 것으로 보이며 물을 항상 담아 두었다가 긴급할 때 사용하였다.   중국에서는 수조(드무)를 아주 중요시 여겼다.   공중에 떠돌아 다니는 불귀신이 불을 일으키러 큰 건물을 골라서 다니다가 드무 안의 물에 비친 자기의 흉악한 몰골을 보고는 동료가 불장난하러 와 있는 줄 알고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는 전설도 있다. 

     

     

     

     

     

     

     

     목조석가여래 삼불좌상(보물 제1785호)

    조선 광해군 15(1623)에 수연(守衍)이 수화승(首畵僧, 우두머리 조각승)으로 참여하여 1623년에 조성한 불상으로 원만한 상호와 양감. 균형감.조각 솜씨가 뛰어난 목조불상이다.

    삼존불은 삼세불(三世佛)이라고도 하며, 법신(法身)보신(報身)화신(化身)의 세 분의 부처님을 말하는데 현세불인 석가여래. 약사여래. 아미타여래를 모시기도 하고 과거. 현재. 미래불을 함께 모셔 삼존불이라고도 한다.

    주불인 석가모니불의 높이는 125cm이고 무릎폭은 88cm로 원만한 얼굴에 유난히 큰 귀를 하고, 당당한 어깨와 가슴, 항마촉지인의 수인을 한 채 결과부좌하고 있다신체는 우견편단의 법의를 걸치고, 가슴께에는 군의를 묶은 자락 위에 3개의 꽃잎 모양을 보이고 있다.

     

     

     

     

    대웅보전 신중도 (인천유형문화재)

    전등사 대웅보전 신중도는 20세기 전후, 필력이 뛰어난 화승이었던 금강산 유점사 승려 축연이 출초하고 보현이 함께 그린 것으로, 상궁들이 발원하여 순종의 천수를 기원한 왕실관련 불화임 축연의 대표작으로, 전통을 따르면서도 외래요소인 중국 판본류에서 예적 금강신과 종규, 요괴를 차용하거나 일본의 부동명왕을 한국 불교의 호법신으로 수용해 새로운 신중도 도상을 창안한 작품임이다.

    신중들의 얼굴이나 신체, 의습표현에 다소 과한 듯한 음영법을 구사하여 사실적인 느낌이 들며, 이러한 축연의 음영법은 근대적 모색으로 인정되어 근대기 불화연구의 중요 논의 대상이 되어 왔고 보존 상태도 비교적 양호한 점 등에서 문화재적 가치가 있다.

     

     

     

     

     

     

     

     

    업경대(인천유형문화재 제47호)

    1627년(인조 5)에 제작된 전등사 업경대는 죽은 사람이 생전에 지었던 죄업을 보이게 하는 거울로 염라대왕이 갖고 있다고 하며 업경륜이라 부르기도 한다.

    저승에 가면 생전의 선업과 악업이 그대로 비추어진다는 업경대는 죄를 짓지 말고 선행을 행하라는 경책을 담고 있다.

    전등사 업경대는 목각사자의 몸체와 등위에 커다란 불꽃이 활활 일어나고 있는 무늬의 거울이 꽂혀있는데, 불꽃 무늬를 사실적으로 드러내 저승의 무서운 분위기를 보여준다.  채색한 색상이 화려하고 이빨에서 머리, 꼬리에 이르기까지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다.   동경· 단청· 명문 등의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는 귀중한 유물이다. 

     

     

     

     

    대웅보전 후불탱(인천유형문화재)

    전등사 대웅보전 목조삼존불좌상의 후불탱인데, 탱화란 천이나 종이에 그림을 그려 액자나 족자 형태로 만들어지는 불화를 말한다.

    1916년에 제작된 그림으로 한 폭에 석가와 약사, 아미타를 그린 일폭삼세불화(一幅三世佛畵)이다전체적으로 황토색과 진한 녹색, 밝은 벽돌색의 색 배합을 보이고 있으며, 얼굴이나 의습에는 20세기 초기에 경기도 일대에서 유행했던 서양화식 음영법이 가해진 그림이다.

     

     

     

     

     

    묘법연화경(법화경)목판 (보물 제1908호)

    1544년 정수사에서 개판한 법화경 목판 104매가 보관되어 있다.

    전등사 묘법연화경 목판은 1443년(세종 25년) 성달생이 정서하여 새긴 고산 화암사판을 저본으로 1543년(중종 38년) 마니산 정수사에서 복각한 것이다. 묘법연화경은 줄여서 법화경이라고 한다. 묘법연화경은 범어로 삿다르마 푼다리카 수투라라고 하며 ‘백련 꽃과 같이 올바른 가르침’이라는 의미다. 법화경의 내용은 제법(諸法)의 실상을 바로 깨치면 일체중생(一切衆生)이 모두 성불할 수 있다는 내용의 대승경전이다. 전등사 법화경 목판은 104판에 411장이 판각되어 있는데, 목판 한 면에 2장을 새겨 양쪽 총 4장이 판각되어 있다. 현재 전등사에서 보관중인 법화경 목판은 보존 상태가 아주 양호하지만 일부는 손상이 있어 보관에 특별히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원래 105판이 보존되어 있었으나 한국전쟁 당시 1판이 외부로 유출되어 104판이 보관되고 있다.

     

     



    보물 제178호로 지정된 대웅보전은 규모는 작지만 단정한 결구에 정교한 조각 장식으로 꾸며져서 조선중기 건축물로서는 으뜸으로 손꼽힌다.

    특히, 건물 내부 불단위에 꾸며진 닫집의 화려하고 정치한 아름다움은 건축공예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보마다 용틀임으로 장식되면서 용두가 네 귀퉁이에서 돌출해 나오며 천장 주변으로는 연, 모란, 당초가 화려하게 양각되고 중앙 우물 반자 안에는 보상화문이 가득 채워져 있다.

     

    더욱 희귀한 것은 물고기를 천장에 양각해 놓아 마치 용궁인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닫집 왼쪽 천장에는 양쪽에 용두장식을 하고 몸체에 용틀임을 한 작은 용가(龍架)의 배 부분에 아홉 개의 방울을 달아 놓고 끈을 달아 불단까지 늘여놓아 이를 잡아 흔들면 아홉 개의 방울이 동시에 울어 구룡토음의 장관을 이루게 했던 적도 있었다.

     

     

     

     

     

     

     

     대웅보전 수미단(인천유형문화재 제48호)

    전등사 대웅전 내부의 수미단은 1621년(광해군 13)에 제작된 것으로 가로 4.8m,   세로 1.2m, 폭 2m 규모이다.

    수미단이란 절의 법당 정면에 상상의 산인 수미산 형태의 단을 쌓고 그 위에 불상을 모시던 대좌를 말한다.  수미단이라고 한 것은 부처가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 계심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며, 단 곳곳에 수미산을 상징하는 무늬를 새겨 넣는데 상중하 3단에 연꽃구름·만(卍)자 등을 새기기도 하고 사자· 호랑이· 코끼리· 거북· 가재를 조각하기도 한다.   또 상상의 동물인 용과 봉황이나 스님· 동자· 사천왕· 비천· 도깨비 상을 조각하기도 한다.   아름다운 색상이 퇴색되어 오래된 세월을 보여주고 있는데 다행히 수미단 옆쪽에는 그 당시의 화려한 색상이 남아 있다.

     

     

     

     

     

     

     

     

     

     

     

     

    대웅전 문살

     

     

     

     

     대웅전이 많은 이의 관심을 끄는 것은 대웅전 지붕 밑에 조각된 벌거벗은 여인상(나부상) 때문이다.

     

    전등사의 대표적인 건물인 대웅보전은 그 자체만으로도 조선 중기의 건축 양식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이 나부상과 관련해서는 유명한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전등사는 여러 차례 화재를 겪었고, 때문에 대웅보전도 여러 차례 중건되었다.   지금의 나부상이 만들어진 것은 17세기 말로 유추된다.  당시 나라에서 손꼽히는 도편수가 대웅보전 건축을 지휘했다고 한다. 고향에서 멀리 떠나온 그는 공사 도중 사하촌의 한 주막을 드나들며 그곳 주모와 눈이 맞았다. 사랑에 눈이 먼 도편수는 돈이 생길 때마다 주모에게 모조리 건네주었다.

     

    “어서 불사 끝내시구 살림 차려요.”  “좋소. 우리 그림 같은 집 한 채 짓고 오순도순 살아봅시다.”

     

    도편수는 주모와 함께 살게 될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대웅보전 불사를 마무리하고 있었다.하지만 공사 막바지에 이른 어느 날 그 주막으로 찾아가보니 여인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며칠 전에 야반도주를 했소. 찾을 생각일랑 마시오.”이웃집 여자가 말했다.

     

    도편수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여인에 대한 배신감과 분노 때문에 일손이 잡히지 않았고 잠도 오지 않았다. 도편수는 마음을 다잡고 대웅전 공사를 마무리했다. 공사가 끝나갈 무렵 대웅전의 처마 네 군데에는 벌거벗은 여인이 지붕을 떠받치는 조각이 만들어졌다.

     

    이것이 전등사 대웅보전에 얽힌 전설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나부상들은 제각각 다른 모습이라는 점이다. 옷을 걸친 것도 있고 왼손이나 오른손으로만 처마를 떠받든 조각도 있으며 두 손 모두 올린 것도 있기 때문이다.

     

    만약 나부상 전설이 사실이라면 도편수는 왜 나부상을 조성했으며, 스님들은 왜 처마 밑에 나부상을 조성하는 것을 용인했을까?

    단순히 사랑하는 남자를 버리고 떠난 욕심에 눈 먼 여인을 단죄하고자 하는 의미만은 아닐 것이다. 도망간 여인이 잘못을 참회하고 세상을 올바르게 살아가라는 염원도 들어있는 것이다.

     

    또한 나부상들을 보게 될 후대의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자비로운 마음을 본받으라는 뜻도 담겨 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학계에서는 대웅보전 처마 밑의 조각상들이 나부상들이 아니라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이 조각상들이 나찰(羅刹) 내지는 야차(夜叉)이라고 주장한다. 전통상징 연구가인 허균에 따르면 이 조각상들은 “불교 외호 신중인 나찰로서 부처님을 찬탄하고 공양하며 불전을 수호하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반면 전등사 대웅보전 추녀 조각을 연구한 신은미는 “불법을 수호하는 야차”라고 해석했다. 나찰은 주로 동남아시아에서 사찰의 수호신으로 조각되고, 야차는 인도 초기 석굴과 석탑의 출입문에 불법을 수호하는 수문장으로 조각되었다.

     

    전둥사 대웅보전 추녀를 받치는 조각상의 역할은 불법과 불전, 불자를 수호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전등사 대웅보전 추녀 밑 조각상들의 연원을 고구려 고분벽화의 ‘천장을 받치는 역사상’에서 찾고 있기도 하다.

     

    일부 학자들은 전등사 대웅보전 추녀 밑 조각상들을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에 등장하는 원숭이로 해석하기도 한다.

     

    또 다른 일부 학자들은 나부상이 원나라 제국대장 공주라고 주장한다. 그려 충렬왕의 첫 부인인 정화궁주가 자신을 괴롭히는 두 번째 부인인 제국대장 공주를 조각으로 형상화하여 지붕을 받치는 벌을 줬다는 것이다. 정화궁주는 충렬왕과 태자 시절 1남 2녀를 낳고 14년간 부부로 지냈다. 그런데 남편이 원나라 세조(쿠빌리아 칸)의 막내딸인 제국대장 공주와 정략결혼하자 후궁으로 전락해 전국대장 공주로부터 온갖 괴롭힘을 당했다. 충렬왕과의 만남이 금지되고 별궁으로 쫓겨났다. 고난의 시기에 정화궁주는 전등사에 옥등과 대장경을 전하였다. 전등사(傳燈寺)라는 사명(寺名)도 정화궁주가 전한 옥등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대웅전 좌측의 관음전은 자비로 중생의 괴로움을 구제하는 관세음보살을 주불(主佛)로 모시는 전각으로, 신도들의 수행정진과 기도에 도움이 되는 공간이다.

     

     

     

     

    관음전 내부 전경

     

     

     

     

     

     

     

    약사전( 보물 제179호)

    약사전은 대웅보전 서쪽에 위치하는 건물로 대웅보전과 거의 같은 양식의 건물이다.  조선 중기 다포계열의 정면 3칸, 측면 3칸 단층 팔작지붕 건물이다.  장대석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약한 배흘림이 있는 기둥을 설치하였으며, 정면 각 기둥 위에는 공포를 배열하고,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공간포(기둥과 기둥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공포)를 설치하였다.

     

     

     

     

     

     

     

    내부 천장은 중앙 부분에 우물천장을 두고 주위에는 빗천장을 만들었으며, 거기에 돌아가면서 화려한 연화당초문을 그려 놓았다. 대웅보전과 함께 지붕을 수리했다는 기록 말고는 다른 기록이 없어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다. 건물의 겉모습이나 내부 장식도 대웅보전과 비슷하다.고려 말기나 조선 초기에 석조로 조성한 약사여래상을 모시고 있다. 이 약사여래불은 최근 금박으로 개금되어 있다.

     

     

     

     

     

    약사전 석불좌상 (인천유형문화재 제57호)

    고려 말기나 조선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고, 최근에는 1621년에 약사전을 건립하면서 만들었을 가능성도 제시되었다.

    두껍게 개금된 현재의 상태로는 조성 당시의 불상 원형을 파악할 수 없지만, 경기와 서울에 있는 사찰 가운데 약사전에 봉안된 석조약사불좌상과는 양식적으로 차이가 있다.   

    하나의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불상이다. 머리가 신체에 비해 작은 편으로 안정감이 있다. 어깨가 넓은 각진 신체, 간략한 옷주름 표현 등에서 단순하고 도식적인 느낌을 준다.

    머리 위의 육계는 높이 솟아 있고, 둥글고 큰 나발(螺髮)을 새겼다. 불상을 개금하기 전 사진을 보면 육계를 중심으로 정상계주와 중앙계주가 있었지만 개금을 두껍게 하여 현재는 보이지 않는다.

    타원형의 얼굴에 반쯤 뜬 것 같은 작은 눈은 수평에 가깝고, 코는 원통형으로 곧게 뻗어 있으며, 입가에 살짝 미소를 띠고 있다.

    두 손은 결가부좌한 다리 위에 손바닥을 위로 하고, 왼손 위에 오른손을 포갠 다음 중지를 구부려 맞대고 엄지의 끝과 닿게 한 상품중생의 아미타 수인을 취하고 있다.   하지만 이 불상은 약사불로 불리고 있는데, 약사전에 봉안되어 있어 그렇게 인식된 것인지, 혹은 아미타 수인으로 후에 보수된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이러한 수인(手印)은 고려 말 조선 초에 제작된 예가 있을 뿐이다.

     

     

     

     

    약사전 후불탱(인천유형문화재 제44호)

    약사전 후불탱은 그림 중앙에 약사여래좌상과 좌우협시인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을 배치하고 상하좌우에는 사천왕을, 약사불 뒤에는 가섭과 아난 존자를 그린 병렬식 구도의 그림으로 1884년 혜과 스님이 그렸다.

    주존불인 약사여래좌상은 왼손에 약합을 들고 있으며 자비스러운 표정이다.  육계에는 정상계주와 반달계주를 갖추었으며 녹색의 이중광배를 띄고 있다.  붉은 해와 흰 달을 보관에 이고 있는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은 변형된 윤왕좌(輪王坐)로 손을 무릎에 대고 있으며 몸에서는 파상문신광이 퍼져나가고 있다.

     

     

     

     

     

     

     

    약사전 현왕탱(인천유형문화재 제43호)

    인천유형문화재 제43호로 지정된 약사전 현황탱은 1884년(고종 21)에 조성된 것이다.   이 탱화는 사람이 죽은 지 사흘 만에 심판하는 현왕과 그 권속을 묘사한 것으로 동호진철 긍법(肯法)이 그렸다.

    화면구도는 현왕을 크게 그리고 판관· 녹사· 동자 등을 둥글게 배치한 원형구도로 현왕을 비롯한 모든 존상들은 얼굴 방향을 제각기 달리한 채 자연스러운 구도로 서있어 화면 전체에 생동감을 준다.

     

     

     

     

    약사전 옆의 서남쪽에 세워진 명부전도 정확한 창건 연대는 밝혀지지 않는다.

     

     

     

     

     

     

    명부전에는 지장보살상을 비롯해, 시왕·귀왕 등 모두 29존상이 모셔져 있다.

    대개 명부전은 지장전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죽은 이를 재판하는 시왕이 있는 곳은 명부전, 지장보살을 모셨을 경우에는 지장전이라고 부른다.   이 전각은 죽은 사람들이 49일이 지나 재판을 받을 때까지 그들의 넋을 위해 치성을 드리는 곳이다.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 (보물 제1786호)

    지장보살상과 그 좌우에 무독귀왕, 도명존자, 시왕(十王)과 귀왕, 판관, 사자상, 동자상, 인왕상 등 명부전의 권속 총 31구의 상은 조선 인조 14년(1636)에 조성되었다.

    전등사 본말사지에 보면 조선 영조 43년(1767)에 한영대사에 의해 시왕(十王)을 채색했으며 헌종 5년(1839)에 시왕전을 중수한 사실과, 고종 21년(1884)에 지장상에 개금하였다고 한다. 목조지장삼존상과 시왕상 및 그 권속들은 모습이 독특하고 아름다우며 보존이 잘 되어있다.

     

     

     

     

    지장보살은 모든 중생이 극락을 가기 전까지는 결코 성불하지 않겠노라는 원을 세운 보살이다.   그래서 지장보살은 녹색의 머리를 깎고 주장자를 짚은 채 지옥 문 앞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이처럼 명부전에는 부처님 원력으로 극락왕생을 기원하며, 제사의 공덕으로 극락을 가라는 정성어린 마음이 담겨 있다.

     

     

     

     

     

     

     

    명부전 앞 석축아래 모셔진 작은불상

     

     

     

     

    측면에서 바라본 명부전 

     

     

     

     

    삼성각 오르며 바라본 약사전과 명부전

     

     

     

     

    삼성각은 산신, 독성(나반존자), 칠성 등 삼성(三聖)을 모신 건물이다.

     

    본래 삼성은 중국의 도가 사상과 관련이 있는 성인들이지만 이 땅에 불교가 전래하면서 불교 사상과 융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족사고  (인천시 기념물 제67호)

    삼성각 옆 언덕을 약100m 오르면 조선 왕실의 실록을 보관했던 정족산 사고터가 복원되어 있다.  강화에는 마니산에 사고를 설치하였다가 1660년 이곳 전등사 경내로 옮겨 1678년 이래 실록 및 서적을 보관하였고 그 후 정족산 사고가 복원되었다   

     

     

     

     

    사고란 고려 및 조선시대에 나라의 역사 기록과 중요한 서적 및 문서를 보관한 전각을 일컫는 말이다.

     

    옛 선조들은 특히 사고 안에 따로 역대 왕조실록을 보관한 곳을 사각(史閣)이라 해서 그 보존에 힘을 썼다.  실록이 처음으로 사찰에 보관되었던 것은 고려 때인 1227년(고종 14)의 일이다.  고려 왕실에서는 합천 해인사에 사고를 마련하여 실록을 보관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궁궐의 춘추관과 충청도 충주, 경상도 성주, 전라도 전주에 사고를 설치했다.   춘추관 외에 이들 충주· 성주· 전주의 사고를 3대 사고라 해서 여기에 역대 실록을 분산 보관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춘추관과 충주 및 성주의 사고가 소실된 반면 전주의 사고만 유일하게 보존되어 그곳의 실록 등을 한때 내장산으로 옮겼다.

     

    1606년(선조 39), 명종까지의 실록이 여러 벌 복원되자 묘향산에 사고를 설치하여 전주 사고본을 옮겼다.  또한 오대산, 태백산, 적상산에도 사고를 마련하여 새로 간행한 실록을 보관하였다.  1628년(인조 6), 조정에서는 강화 마니산에 새로 사고를 설치하여 묘향산 사고에 보관했던 전주본을 옮겼다가, 1660년(현종 1) 강화 정족산에 사고를 마련하여 마니산 사고에 있던 전주본을 이곳에 비장하였다.

     

    이처럼 실록 등 국가의 귀중한 사서는 소실 등의 피해를 막기 위해 중앙과 지방에 분산하여 보관했다. 그러다 구한말인 1908년, 정족·태백·오대·적상산 등 4대 사고의 장서들은 규장각의 관할 하에 두었다. 이렇게 보면 세계문화유산인 조선왕조실록도 수난을 많이 겪은 셈이다. 그러나 역사의 기록과 교훈을 생명처럼 여겼던 우리 선조들의 지혜와 정성은 오늘날까지 한민족의 문화적 역량을 한껏 보여주고 있다.

     

    본래의 정족산 사고는 1931년 무렵 주춧돌과 계단석만 남긴 채 없어졌다.  다만 사고에 걸려 있던 ‘장사각’과 ‘선원보각’이라는 현판만 전등사에 보존되어 있어 당시의 실상을 알려주고 있다.  폐허가 되었던 장사각 건물은 1999년 복원되어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조선왕조실록은 한 왕조의 역사적 기록으로는 가장 긴 시간에 걸쳐서 작성되었고,  가장 풍부하면서도 엄밀한 기록을 담고 있다.  또한 국왕에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조선인들의 일상적인 생활상을 자세히 보여 주며, 세계에서 유일하게 활자로 인쇄되었고, 보관과 관리에도 만전을 기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에 따라 조선왕조실록은 1973년 12월 31일에 국보 제151호로 지정되었고, 1997년 10월 1일에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정족산성  진지

     

     

     

     

    다시 명부전 앞을 지나  스님의 수행공간인 극락암

    명부전과 종각 사이의 계단을 오르면 아담한 전각이 세워져 있다.   비교적 근래에 세워진 극락암 건물은 전등사 조실이었던 서운 큰스님과 상묵 큰스님이 열반할 때까지 머무신 곳이다.

     

     

     

     

    400살 넘는 전등사 느티나무

     

     

     

     

     

     

     

    대웅보전 앞마당 대조루와 나란히 서 있는 종루이다.   왼쪽에 목어, 오른쪽에 법고도 보인다.

    현재 대조루 옆의 종루에는 보물로 지정된 범종이 있었으나 2004년에 명부전 앞의 종각으로 옮기고 지금은 일반 범종이 보관돼 있으며 조석 예불 때 사용된다.

     

     

     

     

     

     

     

     2004년 보물로 지정된 범종을 보관하는 또다른 종각

     

     

     

     

     범종(보물 제393호)

    범종(보물 제393호)로 지정된 전등사 범종은 우리나라의 전형적인 종과는 그 형태가 판이하다. 이 종은 1097년 중국 하남성 숭명사에서 조성된 것으로 음통이 없으며 겉에 상ㆍ중ㆍ하로 구획이 지어져 띠가 둘려 있는 형태를 보이고 있다.   또 표면에 8개의 네모진 구획이 마련되어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많이 마멸되어 판독하기가 어렵다.

     

    이 종은 기하학적 무늬로 장중하고 소박한 중국 종의 솜씨를 보이며 종소리가 맑고 아름다운 게 특징이다.   이 종은 일제 말기 군수 물자 수집에 광분한 일제가 공출이란 명목으로 빼앗아 가는 바람에 한때 전등사를 떠나기도 했다.   하지만 광복 이후 부평 군기창에서 발견되어 다시 전등사로 옮겨왔다.   하마터면 귀중한 범종이 일본의 만행으로 없어질 뻔 했으나 부처님의 가피로 본래의 장소로 옮겨져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고목에서 다시 태어난 부처님

     

     

     

     

    적묵당은 스님들이 참선하던 선원이었는데 지금은 스님들의 숙소와 종무소로 사용되고 있다.

     

     

     

     

     

    적묵당 편액

     

     

     

     

    전등사 편액  글씨는  해강 김규진이 쓴 글이라 한다.

     

     

     

     

     템플스테이 공간 월송요

     

     

     

    공양간인 선불장

     

     

     

     

     

     

     

    무설전 및 서운갤러리,  전등사의 현대식 법당 갤러리 형식의 ‘무설전’ 모습으로  입구 오른쪽 위 ‘어린왕자’ 조형물이 이채롭다.

     

     

     

     

     

     

     

     밖에서 본 설법전 전경이다..

     

    기존 가람의 분위기를 해치지 않으면서, 지하에 새로운 공간을 조성하게 된 배경이다.   외부는 크게 표 나는 부분이 없지만, 내부는 현대식 공간으로 조성한 이색적 법당이자 복합 문화공간이다.   젊은 세대의 감각에도 부담감을 주지 않도록 디자인 특성을 배려했다.

     

    새로운 불사를 위해 전등사는 현역 미술가 중심의 전문 창작단을 조직했고, 이들에게 새로운 불교미술의 실행을 당부했다. 미술대학 교수이자 미술계에서 주목받은 작가로서 새로운 불교미술의 창출에 의지를 모은 것은 국내 초유의 일로 기록된다.   창작단에 참여한 전문가들은 전통과 현대, 종교와 미술, 독창성과 시대정신, 민족성과 국제성 등의 주요 사항을 숙지하고 평소 작품에 반영한 경우에 해당한다.

     

     

     

     

    서운 갤러리는 무설전의 입구 부분의 공간을 특화하여 운영하는 특수공간이다.   이 갤러는 바로 불교와 미술의 만남 즉 종교와 예술의 공존 / 조화를 기도하는 공간이지 않을 수 없다.    이 갤러리는 현대 미술작가의 창작품을 전시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 운영된다.   이를 위해 전등사는 이미 오래전부터 현역 미술작가의 창작품을 구입하여 상당량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템플스테이 공간 지하에 자리한 설법전이 장엄하다.

     

    무설전 내부 공간 디자인은 여타의 법당과 커다란 차별상을 보일만큼 하나부터 열까지 새롭게 시도한 창작품이다.   천정 공간의 연등 디자인으로 부터 기둥 처리 그리고 벽면 공간처리 등 모든 것이 조화와 개성을 기본으로 하여 이룩한 성과물이다.   공간 디자이너 이정교 교수는 이미 국내 유수의 건축물에서 실력을 발휘하여 높은 평가를 받은 바 있다.   그의 이번 무설전 디자인은 사찰 불사의 첫 사례라는 점에서 남다른 주목을 받을 것이다.

     

     

     

     

    설법전 중앙의 석가모니부처님

    불상 작품은 전통성을 바탕으로 하여 현대적 감각 특히 인체 비례를 반영시켰다.   주불 석가모니불 좌상은 토함산 석굴암 본존상을 연상시킬 만큼 당당한 대장부의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주불의 늠름한 기상은 예배 대상으로서의 존엄미와 더불어 깨달음에 이르는 인도자로서의 원만함과 장엄함을 보여준다.

     

     

     

     

    주불이 봉안된 공간은 궁륭형(돔)으로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곳 후벽에 벽화작업을 시도한 바, 화가 오원배 교수는 서구식 프레스코 기법을 활용하여 제작했다.  정통 프레스코 벽화제작 기법은 이번 무설전 후불벽화 제작에 응용되어 새로운 불교회화의 장을 마련했다고 평가된다.   프레스코 기법의 벽화와 천정화 작품은 국내 유일의 사례에 해당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을 바라 보며 우측의 부처님들...

     

     

     

     

    석가모니 부처님을 바라 보며 좌측의 부처님들...

    반면에 협시보살은 현대인의 인체 비례 감각을 감안하여 제작된 바, 지장보살 좌상은 이웃집 아저씨처럼, 관음보살 좌상은 이웃집 보살님처럼 친근미와 더불어 품격 있는 원만상이다. 이들 다섯 분의 불보살상은 비슷한 것 같지만 相好와 옷매무새 등을 자세히 보면 각기 다르다. 주불을 비롯해 협시보살상과 1천불 원불은 모두 청동주물 작업에 백색 도료를 입힌 작품들이다.

     

     

     

     

    설법전의 신중탱

    신중탱은 紅幀의 일종으로 붉은 색 바탕에 銀線으로 작업한 것이다. 여기의 인체 비례는 서구식에 익숙한 젊은이들도 호감 갖도록 배려했다.

     

     

     

     

     

     

     

    전통 불교사찰인 전등사도 변화하고 있다. 최근 K명상의 본산을 목표로 역사문화교육관 설립 추진에 한창이다.   전등사는 이미 2012년부터 현대식 법당 갤러리 형식의 ‘무설전(無說展)’을 운영하고 있기도 하다.

     

     

     

     

     

     

     

    종루와 대조루가 나란히 보이는 이곳을 지나

     

     

     

     

    동문 근처의 양헌수 승전비를 만나러 간다.

     

     

     

     

    양헌수 승전비

    1866년 병인양요때는 승군 50명이 전투에 참가 하기도한 호국 불교의 사찰로 당시 조선수비대장이던 양헌수 장군 승전비가 전등사 동문 입구에 세워져 있다.

     

     

     

     

     

     

     

      양헌수 승전비(인천기념물 제36호)

     

     

     

     

    전등사의 출입문 삼랑성 동문을 뒤로하고

     

     

     

     

     

    요사 정행당 앞에서

     

     

     

     

    이쁜 꽃들과 눈 마춤하고

     

     

     

     

     

     

     

     

     

     

     

    전등사의 출입문 삼랑성(정족산성) 남문을 나간다..

     

     

     

     

    삼랑성(국가사적 제 130호)

    전등사 일대를 에워싸고 있는 삼랑성은 국가사적 제130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성은 고대 토성의 흔적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단군의 세 아들인 부여· 부우· 부소가 쌓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후 토성 자리에 표면이 거친 할석(割石)으로 성을 쌓아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삼랑성은 성 안팎을 할석으로 겹축했으며 할석 사이마다 할석 부스러기로 쐐기를 많이 사용한 구조를 보이고 있다.

     

    해발 222m인 정족산의 정상에서 동향한 계곡을 포용하고, 동남향한 계곡에 수구와 남문이 있다.   북문은 북벽의 서쪽에 치우쳐 산봉우리 사이의 안부에 있고,  서문도 서남쪽 안부에 있으며,   동문은 남문의 북쪽으로 해발 107m의 봉우리 북쪽 안부에 있다.

     

    성벽이 꺾어 도는 곳마다 10여 개의 곡성을 이루며, 성벽 일부를 돌출시켜 적을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는, 치성(雉城)이 마련되기도 하였다.

     

     

     

     

    삼랑성 남문을 지나  잘생긴 노거수를 지나면

     

     

     

     

    남문 주차장 입구 도착이다...

     

     

     

     

    남문 주차장 입구에는 멋진 송림이 군락을 이룬다...

     

     

     

     

     

     

     

     

     

     

    8년 만에 와보는 고구려 시대 지어진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 전등사를 언제 또 와 볼지 찬찬히 충분히 둘러보고  이제  숙소가 있는 외포항으로 길을 달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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