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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살문이 아름다운 강화도 정수사사찰여행/인천 2016. 9. 14. 18:47
꽃살문이 아름다운 강화도 정수사(淨修寺)
2016. 9. 14.
2016. 9. 11. 산빛어울림 불교산악회와 함께한 강화도 마니산 산행 하산길에 들러본 정수사이다 .....
정수사 주차장에서 300m 가면 정수사가 있다..
1977년 3월 산 일대가 국민관광지로 지정된 산세가 아기자기하고 주변에 문화유적지가 많아 봄부터 가을까지 많은 관광객과 등산객이 찾고 있다는 강화도 마니산을 산행 후 정수사로 향해본다...
정수사는 인적이 드문 마니산 외진 곳에 있었다.
지금은 일차선도로가 뚫리고, 근처에 마니산 등산로가 생겼지만 아직도 사람들의 발길이 드물다.
다른 사찰들과는 다른 모습이거니와, 특히 정수사에는 일반적인 일주문이나 사천왕문이 없다.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고요함이 흐르는 사찰이다.
고요와 적막이 온몸을 적시던 그날, 정수사에는 산사의 고즈넉함이 있었다. 한동안.. 아니 꽤 오랜 시간이 흘렀을 것이다. 나는 시간을 잊은 듯 한없이 그 절을 바라 보았다.
신라 639년(선덕여왕 8) 회정선사가 세워 정수사(淨修寺)라고 했다.
조선시대 세종때 함허대사가 다시 지었는데, 건물 서쪽에서 맑은 물이 솟아나는 것을 보고 이름을 정수사(淨水寺)라 고쳤다고 한다.
대웅보전(보물 제161호 )
이 법당은 석가모니 불상을 모신 대웅보전으로, 1957년 보수공사 때 1689(숙종 15)에 적은 상량문이 발견 되었는데, 이에 따르면 세종 5년(1423)에 새로 고쳐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건물 양식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장대석으로 바른층쌓기 한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약한 배흘림이 있는 두리 기둥을 세워 기둥윗몸을 창방(昌枋)으로 결구하고, 기둥 위에만 공포를 올린 주심포식 건물 이다.
규모는 앞면 3칸· 옆면 4칸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고, 지붕 무게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으로 앞뒷면이 서로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앞면 퇴칸이 후대에 다시 설치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정수사는 마니산에 있는 사찰로서 대한불교조계종 직하교구 본사인 조계사의 말사이다.
낙가산의 회정이 마니산의 참성단을 배관한 뒤, 그 동쪽의 지형을 보니 앞이 훤히 트인 밝은 땅이 있어 불제자가 가히 선정삼매(禪定三昧)를 정수(精修)할 곳이라 하여 절을 창건하고
정수사(精修寺)라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1903년에 지어진 <정수사 산령각 중건기(淨水寺 山靈閣 重建記)>와 ≪강도지≫에는 절의 창건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없다고 전해지고 있다.사찰 이름과 관련된 또 다른 일화는 1426년(세종 8) 함허선사(涵虛禪師)가 중창하였을 때, 함허가 법당 서쪽에서 맑은 물을 발견하고 절 이름을 지금의 ‘정수(精修)’에서 ‘정수(淨水)’로 고쳤다고도 한다.
전등사 대웅보전 중앙 출입문의 꽃창살 (국보 121호인)
전등사 법당(대웅보전)에서 꼭 보아야 할것이 있다.
법당(보물161호)에는 국보 121호인 전면 중앙 출입문의 꽃창살 문짝이 있다. 양옆엔 빗살창 문이 네짝이 더 달려 있다.
청자 백자화병에는 모란과 연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부처님 방문을 장식했다. 국내 절집들 중에서 손꼽히는 아름다운 꽃살문이다.
고려청자병에 연꽃과 모란으로 가득한 어칸문
대웅보전 정면 가운데 전면 출입문인 사분합문(네짝 여닫이문) 에는 꽃병에 꽂힌 꽃의 모습으로 꾸며 놓았다. 화병 속에 담긴 모란 + 연꽃 + 연꽃 + 모란이 가득 담겨져 있는 화려한 창살모양으로 화려한 조각을 새겨 뒤어난 솜씨로 보기 드문 장식을 하고 있어 뛰어난 솜씨를 엿보게 한다.
문살이라기보다는 꽃 무늬를 조각한 것 같았다. 이 창살문의 창호 조각은 소박하면서도 깊이 있는 아름다움이 있어 주목을 끌고 있다.
법당안에서 바라본 연꽃과 모란으로 가득한 정수사 대웅전 꽃살문
1848년(헌종 14)에 이르러 비구니 법진(法眞)· 만흥(萬興)스님 등이 화주가 되어 법당을 중수하였다고 한다.
이때 부화주(副化主) 비구니가 20여 명, 목수가 165명, 그리고 인근 동네의 자원 부역군 305명이 동원되어 대대적인 중창 불사가 이루어졌다.
1878년(고종 15)에는 비구니 계흔(戒欣)스님이 제자 성수(性修)스님 등과 함께 불상을 개금하고, 후불탱화를 비롯하여 칠성탱화· 독성탱화· 산신도 등 각단의 불화를 새로 그려 봉안하였다.
이 불사는 홍제· 보혜 등이 증명하고 금어인 서익(瑞翌)· 체훈(?訓) 등이 조성하였다.
또한 1883년(고종 20)에는 화주 비구니 근훈(根訓)스님이 가람을 수선하였다.
그후 5년 뒤인 1888년에는 비구니 정일(淨一)스님이 수좌 연오(演悟)와 함께 시주금을 모아 관음존상 1위와 후불탱화 1축을 새로이 조성하여 봉안하였다.
이후에도 정일스님은 여러 사찰과 촌락을 두루 돌아다니며 시주받은 돈과 면포로 재목과 기와를 마련하여 1903년에는 산령각을 중건하고, 1905년에는 법당을 수리했으며 1916년에는 불상 개금과 각단의 불화를 봉안하였다.
1937년에는 주지 김선영(金善英)스님이 본산 주지 김정섭스님과 상의하여 대웅전을 당국의 보호 건물로 편입시켰는데, 당시에는 대웅전· 산령각· 큰방· 노전· 요사 등이 있었다.
정수사 대웅보전에는 지장보살, 보현보살, 석가모니불, 문수보살, 관음보살과 아미나후불탱화가 모셔져 있다. 아미나후불탱화는 서방정토를 상징하며 서방정토를 다스리는 아미타불처님과 관세음, 대세지, 지장보살 등 8대 보살이 그려져 있는데, 전체 구도가 비교적 정밀하고 채색도 잘 보존되어 전해지고 있는 탱화입이다.
불단 바라보며 우측 벽면의 신중탱화
칠성탱화
대웅보전의 영가단
대웅전 부처님 바라보며 좌측 영가단 뒤로 현왕탱화(좌측) 와 지장탱화(우측)
죄측의 현왕탱화인 이 현왕도(現王圖)는 1851년에 그려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현왕(現王)이란 죽어서 3일 후에 만나는 심판을 주재하는 왕으로 염라대왕을 여래화하여 좌우보처로 대륜성왕(大輪聖王)과 전륜성왕(轉輪聖王)이 있다. 현왕 뒷편에는 동자가 있고 재판을 하는 판관(判官)과 기록을 담당하는 녹사(錄事)가 있다. 현왕 앞에 놓인 탁자에 책과 필기구가 보인다. 회의를 하는 듯한 모습이다.
대웅보전 현판 양 옆 위에 있는 귀면상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정수사 법당은 특이하게도 툇마루가 있다. 툇마루가 있는 절집은 안동 개목사 원통전을 포함해서 전국에 2곳뿐이다. 법당에 마루가 있으면 이미지가 소박해 보인다. 규모가 앞면 3칸 옆면 4칸이지만, 원래는 앞면과 옆면이 3칸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법당 뒷면의 공포
정수사 대웅전의 특이한 비대칭 맛배지붕, 공포가 앞뒷면이 서로 다르다. 이는 앞면 툇마루가 후대에 설치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측면에서 바라본 지붕은 앞뒷면이 비대칭이다.
원래 옆면 3칸을 마루를 붙이느라 4칸으로 개축하면서 지붕을 손보았을 것이다. 왜 수리할때 용마루를 가운데 두지 않았을까? 아마 내부공간의 분위기를 외부 모양보다 더 중시해서일 것이다. 겉모양보다 내실을, 형식보다 실질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암자의 공간미학을 느낄수 있다.
천년을 바위 틈새에 뿌리를 내리고 자란 고목이 무성하게 가지를 뻗고 있다.
부처님께 기도를 올리고 툇마루를 밟고 내려서니 오백나한전이 보인다.
나한전은 대웅전 오른쪽으로 새롭게 중창했다.
정수사 오백나한전에는 오백 나한을 모시고 있는데, 그 형태가 일반적이지 않은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다.
정수사 오백나한전에는용왕탱과 독성탱도 있었다.
정수사 오백나한전에서 스님요사로 연결된 문이다...
정수사 오백나한전 담장에는 담쟁이가 어룰렸다. 가을에 단풍이 고울것 같다...
대웅보전(오른쪽)과 닿을듯 보이는 삼성각(왼쪽)
삼성각으로 오르는 돌계단. 근래에는 1974년 소실된 산신각을 삼성각으로 고쳐 지으면서 보다 넓게 확장 했다.
대웅보전 뒤쪽에는 이렇게 멋진 삼신각이 있다. 삼신각은 참 아기자기하게 보기도 좋고 아담하면서 아름답기까지 하다.
좌로 부터 삼성각의 목각 독성탱화· 목각 산신탱· 용왕탱화 등이 있다. 삼성각의 탱화는 전부 근래의 작품들이다.
삼성각 앞의 나무에 걸린 고운 말씀...
삼성각각 앞에 놓여진 불상들....
삼성각각 앞 석등 속에도 부처님이..........
삼성각 옆으로 멋진바위와 온통 고운 숲이 우거져 있다..........
법당 앞의 왼쪽 언덕에 고목이 있었다.
하늘에 펼쳐진 가지와 나무 기둥의 크기가 수령이 꽤나 오래일 것 같다.
바위 위에 나무가 자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바위 위의 나무 옆으로 새로운 전각이 보인다..
새로운 전각 옆 좁은 공간에는 하얀 석탑 하나가 있다. 보주와 보륜은 창공을 찌를 듯 솟아 있다.
정수사 삼층석탑과 석등
1992년에는 법당 앞에 부처님 진신사리탑을 세웠다.
삼성각에서 내려다본 정수사 약수
삼성각 앞에는 거북 모양의 석상이있었다.
정수사 약수는 여러 일화가 많은데 세종 8년, 사찰을 다시 중건할 때 사찰 가운데에서 맑은 물이 나왔다 하여 사찰이름의 뜻이 바뀌었다, 이름까지 바꾸게(精壽에서 淨水로) 했다는 서쪽의 맑은 물이 바로 이 물이다.
정수사의 자랑이었던 수각을 차의 달인이었던 함허대사가 차를 달일 때 정수사 약수를 자주 사용했다고 한다.
다시 대웅전 마당으로 나와 스님 요사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서면 함허대사 부도로 가는 길이다.
오백나한전 옆 계단을 내려서면 스님 요사가는 길에 예쁜 돌담이 보인다...
오백나한전 옆 계단을 내려서면 바로 만나는 스님 요사가 참으로 소박하다...
오백나한전 바로 뒤쪽의 요사 이다.
중앙의 위쪽 전각이 오백나한전 이다.
함허대사 부도가 70m 남았다 한다.
마음의 짐을 이 곳에 내려 놓는 순간 조금은 가벼워졌을 이들을 잠시 생각해 본다.
정수사 인근에는 지금의 정수사(淨水寺)라는 이름을 지어준 함허대사의 부도가 위치하고 있다. 정수사를 둘러보고 산책하듯 들러보시면 좋을 것 같다.
≪강도지≫에는 정수사와 관계된 함허스님에 대한 설화에서는 스님을 원나라 사람이라고 하였다.
즉 ‘고려말 원나라 승려이자 한림학사였던 함허 득통이 이곳에 와서 도를 닦았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그의 부인이 바다를 건너 이곳에 찾아와 함께 돌아갈 것을 청했다고 한다.
그러나 득통이 그 청에 응하지 않자 부인이 바다에 빠져 죽어 돌로 변했는데, 지금 절 앞 극포(極浦) 가운데의 세칭 각씨암(閣氏巖)이 그것이다’라는 것이다.
그러나 함허스님은 우리나라의 승려로 여러 책에 행장이 전해오고 있을 뿐 아니라 저술도 많이 남아 있는 실존 인물로 중국 원나라 승려가 아니다.
따라서 이 기록은 정수사에 주석하면서 교화로 이름을 크게 남기고 절을 중수한 함허스님의 발자취가 사찰 곳곳에 적지 않게 남아 있었다는 것을 암시해 주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조선전기의 역사는 전해 오는 자료가 없어 알 수 없다.
함허대사 부도(향토유적 제 19호)
1426년 절 이름을 정수사로 고치고 가람을 중수했던 함허 기화의 부도이다. 곧 함허대사가 정수사에서 입적하자 그의 수도처였던 뒷산 중턱에 현 부도를 봉안한 것이다.
부도는 승려의 사리나 유골을 안치한 묘탑으로 부두, 포도, 불도 등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함허대사는 조선 초기의 고승으로 1431년(세종 31)에 입적하자 그가 오랫동안 주석했던 정수사를 비롯하여 연봉사, 현등사, 봉암사에 부도를 세워 그의 덕화를 기리도록 하였다.
승탑의 구조는 한 장의 돌로 된 지대석 위에 기단부를 만들었다. 아래위로 구성된 기단부에 연꽃무늬가 장식된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무늬장식도 없다.
그 위에 원형의 탑신과
육각형의 옥개석을 올려 놓았다. 그리고 다시 그 위로 상륜부를 두어 장식했다.
옥개석이 육각형이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신라 말 고려 초 승탑의 기본 형태였던 팔각원당형의 구조를 이루고 있다.
부재는 화강암이며 총 높이는 164cm이다.
다시 정수사 마당으로 돌아와
1942년에 편찬된 ≪전등본말사지≫에 의하면 대웅전 12칸· 산신각 2칸· 대방 14칸· 노전 6칸· 요사 15칸 등 현재보다 더 많은 건물이 있었다고 하는 정수사를 그려본다...
정수사는 그리 크지 않은 사찰이지만 유서가 깊은 사찰로 아담하고 고즈넉하니 기도하기 참 좋은 곳인 거 같다. 작지만 참 아름다운 절이라는 느낌이다. 잠시 들려 내 마음 한 자락도 내려 놓아 보았다.
정수사는 전각이 3동에 불과한 작은 절집이다.
주불전인 법당에는 마루를 달아 친근하고 소박한 느낌을준다. 그래서인지 아기자기한 마당과 잘 어울린다. 절집이야 사람이 바글거리는 것을 좋아하겠지만, 나는 한적한 산사의 정취가 조금이라도 오래가기를 소망해 본다.
이제 가을로 접어든 이 계절에 강화도의 전망 좋은 절 정수사에서 멋진 전망도 보고 마음도 가다듬는 시간이 되었다.
강화에 오면 강화 3대 사찰이며 천년사찰인 정수사에 들러 마음의 평온함을 느껴보시기 권하고 싶다. 이곳을 찾으면 시름도 사라지고 마음도 청명해지는 것이 참으로 좋다.
강화도 가볼만한 곳으로 추천하고 싶다.
보문사, 전등사와 함께 강화도 3대 사찰이지만 규모가 작아 많은 이들이 찾지 않아 조용해서 좋은곳 이다.
정수사에서 내려 갈때는 넓은 차량 도로를 버리고 바로 아래에 돌계단을 걸어서 내려 간다.
강화도 정수사에 잠시 들렸다고 하자 신랑이 "전등사가 아니고?" 라며 의아해 했다.
왜 사람들은 모든 크고, 유명한 것만 선호할까?...
그저 잠시 머물다 왔을 뿐인데... 이 아련함은 뭘까?
마니산 서쪽자락에 있는 이 작고 고요한 절은 이미 내 마음을 담고 있었다.
길 옆으로는 나무들이 잘 관리가 되어 있어 아담한 오솔길을 겉는 듯 했다.
오래된 고목나무가 눈길을 사로 잡는다.
정말 웅장한 자태를 맘껏 뽐내고 있다. 많은 세월을 이겨낸 이런 멋진 나무를 보면 기분도 너무나 좋아 진다..
독특한 외형을 간직하고 있으며 마니산의 아름다움까지 감상할 수 있는 정수사는 천년사찰의 신비스러움마저 느낄 수 있는 사찰이다.크지 않은 사찰이니 여유 있게 천천히 둘러보면서 마음을 정화하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정수사 입구 민가의 가을에 만난 미니 장미가 발랄하다..
정수사를 내려와서 큰 도로를 만난 후 큰 도로를 끼고 한참을 걸어서 함허동천 주차장으로 가서 대기중인 전세차량을 타고 다시 석모도 보문사로 길을 달려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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