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4. 8. 라온제나 테마여행과 께했던충남 서산 여행으로 충남 서선의 유기방 가옥과 인근의 해미 읍성도 둘러볼 예정이다...
6 : 30 포항을 출발하여 휴게소 두군데 들리고 11 : 45에 유기방 입구 800m 전방 삼거리에 도착하여 차가 밀려 진입이 어려워서 내려서 걸어 오늘 첫번째 여행지 유기방 가옥을 만나고 나와 유기방 입구 800m 전방 삼거리에서 13:00에 오늘 두번째 여행지 해미읍성을 만나러 20분정도 이동한다. 두번째 다시 와 보는 해미읍성이다...
해미읍성 주차장에서 바라본 해미읍성의 동문 잠양루
해미읍성의 동문 잠양루. 해미읍성의 관아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문루 형식에 팔작지붕을 얹었다. 성문은 아치 모양의 홍예문이며 옹성이 없다. 잠양루는 화재로 등으로 소실되었다가 1974년에 복원되었다.
해미읍성(사적 116호)
서산을 대표하는 여행지 해미읍성은 유기방가옥에서 자동차로 20분 내외 거리다. 지난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문해 화제를 모은 서산 해미읍성(사적 116호)은 천주교 성지로 이름이 높다.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46년 병오박해, 1866년 병인박해를 거치며 천주교도 수천 명이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다.
주차장에서 해미읍성의 정문 진남문으로 향한다.
해미읍성의 정문 진남문
해미읍성의 정문인 관아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문루 형식에 팔작지붕을 얹었다. 성문은 아치 모양의 홍예문이며 옹성이 없다. 진남문은 해미읍성의 세 관아문 중 유일하게 본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잘 쌓아진 성벽과 펄럭이는 깃발들이 참 인상적이다. 해미읍성의 정문인 진남문
입구에 다가가니 읍성을 지키는 포졸분들이 계셨다. 옛느낌을 주기위한거 같은데 들어갈때 인사도 해주시고 참 정겨운 분위기였다.
진남문 위 누각에는 북이 있다.
해미읍성 정무인 진남문을 들어서면 좌측으로는 주막이
우측으로는 문화시설사업소가 자리하고 있다.
포항은 제법 나무의 새순이 돋아 푸른색을 많이 띄는데 서산은 아직 잎이 안 난 나무가 많다.
가족나들이로 오기도 좋고... 연인들끼리 산책으로 즐기기에도 참 좋다. 아직은 유료화가 되지 않아서인지 많은 분들이 찾아 주시는 것 같다.
해미는 1414년(태종 14)에 충청병마절도사영이 덕산(德山)에서 이곳으로 옮겨진 뒤 1651년(효종 2)에 청주로 이전할 때까지 군사전략상 중심지였다. 읍성은 1491년(성종 22)에 축조되었으며, 영장(營將)이 머물면서 서해안 방어를 맡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당시 절도사영이 해미현의 동쪽 3리에 자리하였는데,돌로 쌓은 성으로 둘레는 3,172척이고, 높이는 15척이며, 우물 3곳과 군창(軍倉)이 설비되어 있다고 기록되었다.『해미읍지(海美邑誌)』에는 성벽의 둘레가 6,630척이고, 높이가 13척이며, 성벽을 돌출시켜 쌓은 치성(雉城)이 380첩(堞)이며, 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서 성문 앞을 가려 쌓은 옹성(甕城)이 2곳이라고 하였다. 또한 남문은 3칸인데 무지개 모양의 문인 홍예(虹霓)와 2층의 다락을 두었다고 하였고, 동문과 서문은 3칸이지만 북문은 없다고 하였으며, 우물이 6곳으로 성 밖에는 호(壕)가 없다고 하였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조선 초기에 설치된 충청병마절도사영과 해미읍성은 별개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순신(李舜臣)이 1579년(선조 12)에 충청병마절도사영에서 훈련원봉사(訓鍊院奉事)로 근무한 적이 있다.
현재 성벽의 둘레는 2㎞ 정도인데, 남문인 진남문(鎭南門)과 함께 동문·서문이 있다. 성 안에는 동헌(東軒)· 어사(御舍)· 교련청(敎鍊廳)· 작청(作廳)· 사령청(使令廳) 등의 관아(官衙) 건물이 분포해 있다.
현재 전하는 우리나라의 읍성 가운데 가장 잘 남아 있는 유적이다. 읍성의 표본으로 삼기 위해서 성 안에 자리하였던 민가와 학교 등을 철거하고 연차적인 보수 공사를 실시하였다. 곧 1974년에는 동문과 서문을 복원하였고, 1981년에는 성 안의 일부 지역을 발굴하였다. 그 결과, 현재의 동헌 서쪽에서 객사(客舍)터가 확인되었고, 현재의 아문(衙門) 서쪽 30m 지점에서 옛 아문터가 발견되었으며, 관아를 둘러쌌던 돌담의 자취도 확인되었다.
해미읍성(사적 116호)
서산을 대표하는 여행지 해미읍성은 유기방가옥에서 자동차로 20분 내외 거리다. 지난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문해 화제를 모은 서산 해미읍성(사적 116호)은 천주교 성지로 이름이 높다.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46년 병오박해, 1866년 병인박해를 거치며 천주교도 수천 명이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다.
당시 해미고을은 서산과 당진, 홍성과 예산을 아우르는 내포 지역의 중심지로, 현감에게 군사력과 독자적인 처형권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토록 비극적인 사연을 품었으나, 봄날의 해미읍성은 평화롭기만 하다. 드넓은 잔디밭이 연둣빛을 띨 무렵이면 벚꽃도 흐드러지게 핀다. 복원한 옥사와 천주교도를 매달아 고문했다는 회화나무(충남기념물 172호) 한 그루가 목숨과 맞바꾼 신념을 기억할 뿐이다.
지금은 비극의 흔적보다 아늑하고 평화로운 분위기다...
해미읍성 회화나무(충청남도 기념물 제172호)
해미읍성 안에 있는 수령 약 300년으로 추정되는 회화나무로, 나무 뒤에는 천주교 신자를 가두어두었던 감옥이 있었는데, 1790~1880년 사이 이곳 옥사에 수감된 천주교 신자들을 이 나무의 동쪽으로 뻗어 있던 가지에 매달아 고문하였다고 한다. 동쪽 가지는 1940년대에, 가운데 줄기는 1969년 6월 26일에 폭풍으로 부러졌으나 여러 차례 외과 수술을 시행하고 토양을 개량하여 보호, 관리하고 있다.
수령 300년의 해미읍성 회화나무(기념물 제 172호)로 읍성 옥사에 수감된 천주교 신자들을 끌어내서 이 나무에 매달아 고문한 곳이다.
1801년(순조 1) 신유박해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맞이했을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역사 속으로 떠나보자.
1839년(헌종 13) 풍양 조씨 세력은 천주교 신자에게 “만약 처형장으로 가는 길에 있는 빨간 줄을 밟고 지나간다면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고 협박했다.
하지만 천주교 신자들은 협박에도 불구하고 단 한사람도 빨간 줄을 밟고 지나가지 않았다.
천주교를 믿으면 하나뿐인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데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처형장으로 발걸음을 뗐다. 이에 화가 난 풍양 조씨 세력은 회화나무 가지에 철사 줄을 걸고 천주교 신자의 목을 메달아 고문을 가했지만 매서운 고문에도 신자들은 고개조차 조아리지 않았다.
회화나무를 보면 철사자국이 남아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조씨 세력은 많은 천주교 신자를 한꺼번에 죽이기 위해 해미읍성 위에서 떨어뜨리는 잔인함까지 보였다. 1839년에 일어난 기해박해 사건은 표면적으로 천주교를 박해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천주교에 관대한 안동 김씨 세력으로부터 권력을 탈취하기 위해 풍양 조씨 세력이 의도적으로 일으킨 것이다.
이 박해로 천주교인 100여명 이상이 목숨을 잃고 400여명 이상이 유배됐다. 단지 천주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100여명 이상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것이 마음이 아프다. 박해의 현장을 견학하면서 목숨을 잃은 천주교인들이 하늘에서 평안하기를 염원한다.
해미읍성의 옥사
고문 체험장
옥사에서 옥고를 치르는 모습들 ~
옥사에서 나와
민속가옥으로 향해 본다...
관아 오른쪽 108 계단을 오르면 청허정 정자 가는 길이다.
관리들이 머물며 일을 보는 동헌으로 이동해 본다.
동헌의 출입문 정문이다.
동헌 마당에서 바라본 동헌의 출입문 정문이다.
성 안에는 동헌(東軒)·어사(御舍)·교련청(敎鍊廳)·작청(作廳)·사령청(使令廳)등의 관아(官衙)건물이 분포해 있다.
관리들이 머물며 일을 보는 동헌
동헌 오른쪽 문을 나서면 청허정 가는 108계단 길이 이어진다...
청허정 가는 108계단 길...
108계단 길 오르며 내려다본 동헌
청허정 가는 길 ~
청허정 앞 대나무 숲 옆에도 멋진소나무들이 있다.
청허정에서 바라본 소나무 숲길 ~
청허정 뒤로 아름다운 소나무 숲이 자리한다.
누운 소나무도 어쩜 이리 귀티가 나는지...
그렇게 천천히 소나무 숲길을 걸어 서문으로 내려간다...
뒤돌아봐도 또 멋진 소나무 숲길 ~
동헌 뒷 쪽에 있는 소나무 숲으로 이곳의 소나무들은 적당히 휘어지고 굽었는데 황토 숲길이 걷기 좋은 길이다.
아까 올라 본 청허정이 소나무 사이로 보인다.
해미읍성 안에 습지도 있다...
해미읍성의 서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문루 형식에 팔작지붕을 얹었다. 서문은 화재로 등으로 소실되었다가 1974년에 복원되었다.
활 체험장
입구 진남문 방향으로 향하면 파전과 막걸리를 먹을 수 있는 주막들이 보인다.
동헌 방향도 바라보며...
해미읍성의 정문인 진남문을 나온다...
해미읍성의 정문 진남문에서 주차장에서 가는 길이다. 지금은 비극의 흔적보다 아늑하고 평화로운 분위기의 공원 같은 성 안을 산책하며 옛스러운 정취를 즐기고 돌아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