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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리산 법주사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사내리 209 )사찰여행/충청도 2019. 10. 25. 12:18
속리산 법주사
2019. 10. 25.
2019. 10. 23. 도린결테마여행 회원 45명과 함께한 충청북도 보은군 세조길 트레킹 .........
포항출발(06:30) → 낙동휴게소 → 법주사 주차장 도착으로 보은으로 2시간 30분 이동 후...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면 법주사 주차장 도착(10:00) 법주사에서 세심정까지 2.63km구간의 아름다운 길이다. 왕복 5.26km 트레킹 후...
그리고 내려오면서 법주사 들러 기도시간과 사진찍는 시간을 포함하여 약 2시간 30분 소요된 속리산 부처님 마중 트레킹 이었다.....
속리산 세조길을 둘러보고 이젠 속리산 법주사로 다시 와 보았다.
그리고 내려와서 찾은 법주사
청량한 공기를 맡으며 속리산 숲길을 따라 걷다보면 150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법주사가 자리 잡고 있다.
세조길에서 내려와 법주사에 들리기로 한다.
나귀에 불경을 싣고 와서 이곳에 머물렀다는 설화에서 유래된 법주사(法住寺)
사적 제503호.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의 본사이다. 553년(진흥왕 14)에 의신(義信) 조사가 창건했으며, 법주사라는 절 이름은 의신이 서역으로부터 불경을 나귀에 싣고 돌아와 이곳에 머물렀다는 설화에서 유래된 것이다. 776년(혜공왕 12)에 금산사를 창건한 진표(眞表)가 이 절을 중창했고 그의 제자 영심(永深) 등에 의해 미륵신앙의 중심도량이 되었다.
그후 법주사는 왕실의 비호 아래 8차례의 중수를 거쳐 60여 개의 건물과 70여 개의 암자를 갖춘 대찰이 되었다. 고려 숙종이 1101년 그의 아우 대각국사를 위해 인왕경회(仁王經會)를 베풀었을 때 모인 승려의 수가 3만이었다고 하므로 당시 절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으며, 조선시대에 태조와 세조도 이곳에서 법회를 열었다고 전한다.
임진왜란으로 모든 전각이 소실된 것을 1624년(인조 2)에 벽암(碧巖)이 중창한 후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법주사 초입의 탄성스님과 월산스님의 부도
능인교(能仁橋)를 건너면 법주사 부속건물로 템플스테이를 위해 신축한 건물이 보인다.
그 옆 다리를 건너
법주사 영역으로 들어선다...
전통찻집 차향도 지나
법주사 경내로 들어선다.
고운 단풍과 담장이 어울러져 참 곱다...
'속리(俗離)'란 '인간세상과 부처세상을 끊어지게 한다'는 뜻이다. 속리산은 천왕봉으로 중심으로 한 8개의 봉우리와 문장대, 입석대, 신선대 등의 8대가 있다. 속리산의 대표사찰은 법주사로서 여기서 ‘법주’란 '부처님의 법이 머문다는 뜻'이라고 한다.
담장너머로 청동대불과 당간지주가 보인다...
법주사 가람 첫 입구인 금강문이다.
금강문은 인왕상을 봉안하기 때문에 인왕문(仁王門)이라고도 부른다.
빛 바랜 금강문 단청의 색감이 너무 고와 한참을 올려다 보았다.
문수동자와 보현보살께도 눈 맞춤하고...
금강문 뒤로 사천왕상을 모신 법주사 천왕문이 보인다.
법주사 천왕문(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 46호)
천왕문 앞에 선 전나무 두 그루.'뜰에 잣나무로다'라는 이름난 화두와 연관이 있다 한다.
금강문을 지나니 눈앞에 천왕문을 호위하는 듯 인상적인 키큰 잣나무 1쌍이 우리를 맞는다.
천왕문은 앞면 5칸 옆면 2칸의 비교적 큰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사람 人 자 모양의 맞배지붕집이다. 가운데 1칸은 입구이고 양쪽 2칸은 사천왕상을 2구식 배치하였다.
천왕문 너머 몸을 숨긴 팔상전이 빼꼼히 고개만 내밀고 낯선 방문객들을 염탐하는 듯하다.
절을 지키는 사천왕상을 모시고 있는 문으로 신라시대 처음 세워졌다고 한다.법주사 사천왕상은 우리나라 최대의 걸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천왕문에서 바라본 금강문
법주사의 이미지라 할 만한 미륵대불
천왕문이서 바라본 팔상전
법주사는 탑이 없는 절이다. 그래서 천왕문 위쪽에 자리한 팔상전이 탑을 대신한다. 아니, 팔상전 자체가 나무로 지은 거대한 목탑이다. 그리고 석탑이건 목탑이건 탑은 모두가 나무를 닮았다. 특히 이곳의 팔상전은 잘 자란 한 그루의 침엽수를 보는 듯하다.
천왕문과 미륵대불. 팔상전
법주사 팔상전 (국보 제55호)
팔상전은 법주사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법주사의 풍경을 아름답게 만들어 준다.
건물 안쪽은 사리를 모시는 공간과 팔상도를 모시고 있는 공간, 그리고 예배를 위한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내부 기둥과 기둥 사이 4면에 석가여래의 일생을 8장면의 그림으로 나타낸 팔상도(八相圖)가 모셔져 있으므로 이 5충목탑을 팔상전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전체 높이는 약 22.7m로서 현존하는 한국의 탑 중에 제일 높은 것이라고 한다.
팔상전에 봉안된 석가모니불
팔상전에는 중앙 심주를 중심으로 사방에 부처님을 모시고, 뒷면에 탱화를 각 방향 2폭씩해서 석가모니 부처님의 일생을 표현한 팔상도를 모셨다.
흔히 와불이라고 불리우는 열반상 중에서 제가 본 중 가장 작은 열반상이 아닌가 한다. 보통 와불은 큼직하니 모시니까. 뒤에는 초전법륜상과 쌍림열반상이 모셔져 있다.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창
창호지 문 위 귀면상은 ‘용용 죽겠지’ 약을 올리는 것 같기도 하고...
목조 오층탑 절집은 우리나라에 유일하고 유명하지만 빛바랜 옆면 창호와 기둥과 들보와 단청이 새롭게 아름답다.
그 세월 만큼 문을 닫아 놓은 빗장
법주사 팔상전은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처음 건립되었으며, 그 후 임진왜란 때에 불타버려 조선 인조 4년(1626)에 다시 지어졌으며, 최근(1968)에 완전 해체 복원공사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팔상전은 법주사의 5층 목조탑 건축으로 1984년 4월 30일 쌍봉사의 대웅전으로 쓰이고 있던 3층 목조탑이 화재로 소실됨으로써, 한국 목조답의 유일한 실례가 된 중요한 건축물이다.
오층 전각이 탑처럼 상륜부를 얹고 있다. 너무나 유명한 팔상전이다.
1층과 2층은 앞.옆면 5칸, 3.4층은 앞.옆면 3칸, 5층은 앞.옆면 2칸씩으로 되어 있고, 4면에는 돌계단이 있는데 낮은 기단위에 서 있어 크기에 비해 안정감을 준다.
지붕은 꼭대기 꼭지점을 중심으로 4개의 지붕면을 가진 사모지붕으로 만들었으며, 지붕 위쪽으로 탑 형식의 머리 장식이 달려 있다
팔상전의 단청도 빛이 바래 희미한 자취와 드러난 나무빛깔이 고상한 분위기를 연출하는데 서까래 끝에만 선명히 남아있는 단청이 묘하게 매력있다.
건물의 양식 구조가 층에 따라 약간 다른데, 1층부터 4층까지는 지붕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고, 5층은 기둥과 기둥 이에도 공포를 설치한 다포양식으로 구몄다.
국보 55호 근대 이전에 제작된 우리 나라의 유일한 5층 목탑인 법주사 팔상전(捌相殿)은 법주사 가을 풍경의 주인처럼 우뚝 서 있다.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목탑 형식 건물 중 하나인 팔상전은 전혀 화려하지 않은 빛 바랜 단청들이 온화함을 전해준다.
1984년에 화순 쌍봉사의 대웅전으로 쓰이고 있던 3층 목조탑이 소실되면서 한국 목조탑 중 유일한 것이다. 팔상전 건축물 내부에는 석가여래의 일생을 8장면의 그림으로 나타낸 팔상도가 모셔져 있다. 팔상전이라고 부르게 된 이유가 팔상도 때문인 것으로 추측한다. 전체 높이가 상륜까지 22.7m이며 현존하는 한국의 탑파 중 제일 높다.
법주사 범종각
법주사 감로수
법주사 종무소
몇번 다녀간 길이지만 오늘은 왠지... 더 설레인다.
거대한 청등미륵대불로 1990년에 새로 만들어졌고 기단까지 합친 전체 높이가 33m라고 하는데 사용된 청동이 무려 100여 톤이 넘는다고 한다.
원통보전과 대웅보전.쌍사자석등, 가람배치의 중심축에 따라 팔상전을 지나면 석등이 있다.
법주사 쌍사자 석등 (국보 제5호)
국보 제5호인 보은 법주사 쌍사자 석등은 암수 한 쌍의 사자가 석등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이다. 신라 석등 중 뛰어난 작품 중의 하나로 조성 연대는 성덕왕 19년으로 추정되고 있다고 한다.
독특한 형태의 쌍사자석등은 신라의 것으로 추정되는 신라 석등 중 뛰어난 작품으로 별로 관심이 없는 이들도 신라 석공의 솜씨에 놀라실 것이다.
선원의 고운 돌담
약사전
약사불은 좌우에 일광(日光),월광보살(月光菩薩)은 없다. 손은 중품중생인을 결하고 왼손에 약함을 들고, 결가부좌한 자세로 연화대좌 위에 정좌하고 있다. 볼륨감 있는 얼굴과 신체에서는 현실감이 느껴지고, 통견식으로 걸친 법의는 신체를 따라 비교적 밀착되어 자연스럽게 주름을 형성하고 있다. 머리는 나발로 큼직한 중앙계주를 갖추고, 육계는 평편하고 낮다.
뒤에 봉안된 약사불탱은 약사회상을 묘사한 것으로 원형의 두광과 신광을 갖춘 약사불 주위로 보살을 비롯한 권속들이 에워싼 군도형식을 취하고 있다.
법주사 약사전은 원래 20세기초까지는 원통보전 동쪽 정면에 있었다. 지금의 약사전은 최근에 지은 건물이다.
약사전 중앙 불단에는 약사불 좌상을 독존으로 모시고 뒤에 약사후불탱을 걸었는데 모두 1997년에 조성되었다.
스님 수행공간 담장에는 담쟁이가 곱게 단풍이 들었다...
가을이 되어 붉게 단풍든 담쟁이가 흙담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담쟁이는 낙엽활엽수 덩굴식물이다. 꽃은 암꽃과 수꽃이 따로 있는데 여름에 작은 황록색 꽃이 핀다. 열매는 하얀 가루로 덮여 있으며 가을에 검게 익는다.
고운 담장...
절에 와서는 담도 볼거리 가운데 하나이다. 법주사에서는 부서진 기와조각들을 주워 모아 황토에 섞어서 담을 쌓은 곳이 많다. 폐자재의 재활용 측면에서 좋은 예가 된다.
원통보전
앞면과 옆면이 각각 3칸인 정사각형 1층 건물로 지붕은 중앙에서 4면으로 똑같이 경사진 사모지붕이다.
지붕 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으로 구몄다.
단순하지만 특이한 건축양식을 갖추고 있어서 건축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으며 안에는 목조관음보살좌상(보물 제1361호)이 모셔져 있다.
좌대 아래 해상용왕(海上龍王)과 남순동자(南巡童子)가 좌우에 합장하고 있는 모습이 특이 하다.
목조관세음보살좌상(木造觀世音菩薩坐像)
건물 안에는 앉은 키 2.8m의 금색 목조 관세음보살상을 모시고 있다. 관세음보살상은 머리에 화관(花冠)을 쓰고 있으며, 얼굴에는 자비로운 웃음을 머금고 있다.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용화전, 원통보전, 명부전, 능인전, 조사각, 진영각, 삼성각 등 8개의 전각과 5개의 부속건축물 등 귀중한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이쯤되면 국보와 보물을 품은 사찰이라고 소개해야 될 것이다.
법주사 석조회견보살상(보물 제1417호)
법주사 석조희견보살입상으로 높이는 213cm로 신체, 공양물, 대좌의 3부분으로 구성이 되어 있다.
진영각
정면 7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인 진영각은 개산조(開山祖)인 의신조사(義信祖師)를 중심으로 24분의 진영을 모시고 있다.
역대 고승들의 영정을 모셔놓은 전각이다.
금강문, 천왕문을 지나 팔상전, 대웅보전으로 이어지는 가람배치가 '일'자형 배치를 하고 있다. 대웅보전 앞 보리수 두 그루.
대개 대웅보전 마당에는 나무를 심지 않는게 원칙이다. 목조건물은 습기에 약하기 때문이다. 또 대웅보전 앞에 나무를 심어 놓으면 대웅보전 안으로 들어가는 빛의 반사를 가로막기 때문이다. 그런데 법주사에는 대웅보전 앞에 잘 자란 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 표찰에는 '염주나무'라고 되어 있지만 불자들은 보리수(菩提樹)로 알고 있다. 가끔 이름만 듣고 이 나무가 부처님이 성도 하신 그 보리수나무인 줄 알고 열심히 합장하는 이들도 있지만 인도의 보리수나무는 이 나무가 아니다.
사천왕석등 (보물 제15호)
대웅보전 앞쪽으로는 보물 제15호인 법주사 사천왕 석등이 자리를 하고 있다.
신라의 전형적인 팔각 석등의 대표적인 양식으로 조각수법으로 보아 혜공왕 때에 진표율사가 법주사를 다시 고쳐 지을 때의 작품이라고 한다.
사천왕 석등 화창으로 바라본 대웅전
석등을 지나면 대웅보전이 자리한다. 안쪽으로는 법주사 대웅보전이 근엄하게 자리를 하고 있는데 신라 진흥왕 14년에 의신조사가 처음 건립하여 혜공왕 12년 진표율사가 고쳐지었으나 임진왜란 시 불타 버린 후 인조 2년에 벽암대사가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대웅보전은 옛 기록과 기단석의 양식으로 보아 고려 중기에 처음 세운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앞면 7칸, 옆면 4칸의 2층 팔작지붕인 대웅보전은 1624년(인조 2년)에 중건하였고 이후 잦은 중수를 거듭하였지만, 조선중기의 건축양식을 잘 갖추고 있어 보물로 지정 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2005년 10월에 벽암대사가 중창한 이후 400년만에 원형을 복원한 것이다.
대웅전은 앞면 7칸, 옆면 4칸 규모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칠한 지 얼마 안 된 것 같아도 대웅전 단청은 보통 솜씨가 아닌 듯...
내부에 모신 삼존불은 벽암이 다시 지을 때 조성한 것으로 법신(法身)비로자나불, 왼쪽에 보신(報身)인 노사나불, 오른쪽에 화신(化身)인 석가모니불이 있다.
대웅전의 신중탱화
외관은 팔작지붕의 2층 건물이나 내부는 천장까지 그대로 이어진 통층구조로 대규모 건물이다.
원숭이상 -1500년 고찰 대웅전 앞 양지바른 자리에 코믹한 원숭이가 햇볕을 즐긴다.
대웅보전 계단 면석에 새겨진 태극무늬와 대웅전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소멧돌 마지막 계단엔 연꽃을 새겼다.
보물 제915호인 대웅보전 계단에는 불교를 지켜주는 돌원숭이 두 마리가 조각되어 있다.
대웅보전 옆으로는 명부전과 삼성각이 있다.
명부전
명부전은 진영각과 삼성각 사이에 있는 건물인데 맞배지붕 건물이다. 청동미륵불을 조성하면서 삼성각과 함께 지었다. 원래 법주사에는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지장전이라 하여 지장보살을 봉안한 전각이 있었으나, 이후 18세기와 20세기초의 가람에는 지장전이 사라졌다.
건물 평면은 정면 3칸, 측면 3칸인데 측면 간살은 좁다. 장대석으로 낮은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다듬은 원형초석을 놓았다. 기둥은 민흘림으로 다듬은 원형기둥을 세웠고 기둥머리는 창방을 끼운 뒤 다포계 공포를 올렸다. 구조는 간결한 5량가로 결구하였다. 처마는 서까래 위에 부연을 쓴 겹처마를 얹었다. 지붕은 한식기와를 올려 맞배로 만들었으며 기와골 끝은 막새를 끼웠다. 지붕 좌우에는 풍판을 달지 않아 구조가 드러나 있다. 정면은 모두 4분합문을 달고 측면에 외짝 출입문을 설치하여 드나든다.
현재 명부전 안에는 지장보살과 도명존자, 무독귀왕을 봉안하였다. 그 좌우로는 각각 5구씩의 시왕상이 있는데 모두 동자상을 대동하였다. 또한 각 2구씩의 판관·녹사·인왕상도 배치되었다. 지장보살상 뒤에는 1996년에 조성한 지장보살도가 있고, 1992년에 주조한 동종도 있다. 명부전 외벽에는 삼면에 걸쳐 지옥세계의 무서운 장면을 벽화로 그렸다.
삼성각
삼성각은 명부전 옆에 있는 건물인데 팔작지붕 건물이다.
내부에는 독성탱, 칠성탱, 산신탱을 모셨다.
법주사의 마스코트라할 수 있는 국내 최대의 2002년에 청동에 금 80㎏을 들여 전체를 개금한 높이 33m 미륵대불은 법주사 내부 어디서나 너무나 잘 보인다.
법주사의 이미지라 할만큼 법주사 하면 미륵대불을 떠올린다.
법주사는 신라 혜공왕 때인 776년, 진표율사가 금동미륵대불을 처음 지었다고 한다. 하지만 높이 8m의 기단 위에 25m 높이로 우뚝 선 미륵대불이 법주사에 자리 잡은 것은 불과 40여 년 밖에 되지 않는다.
미륵대불이 위치한 곳에는 옛날 산호전(珊瑚殿)· 산호보광명전(珊瑚普光明殿), 또는 용화보전(龍華寶殿)이라 불리던 법당이 있었다. 이 법당 안에는 신라시대 진표 스님이 조성한 금색의 미륵장륙상이 있어 오랫동안 법주사의 구심적 역할을 해왔었다. 그러나 1872년(고종 9) 경복궁 복원을 위한 당백전(當百錢) 주조란 명분을 들어 흥선대원군은 미륵장륙상을 압수하여 녹이고 말았다.
이후 1939년 주지 석상(石霜) 스님의 원력과 김영곤(金永坤) 거사의 시주에 의해 미륵불 조성불사를 착수하였으나 완성하지 못하였다. 미륵불을 조성한 것은 1964년에 이르러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시주로 완성하였다. 그러나 시멘트로 조성한 불상은 시간이 흘러가면서 점차 외관이 볼썽사납게 변하였다. 1990년 이를 안타깝게 여긴 주지 월탄 스님과 사부대중들이 힘을 합쳐 지금의 청동미륵대불과 용화전을 완성하였다. 여기에 소요된 청동의 무게는 무려 160톤에 달한다. 점안식 날 하늘에서는 서광이 비추고 머리 위에서는 백호광명(白毫光明)이 치솟아 모든 대중이 환희와 감탄에 젖었다고 한다. 최근 청동 위에 금칠하였다.
이 상은 미륵불입상으로 통통하고 원만한 얼굴에 머리는 나발로 중앙계주가 있는 육계를 갖췄다. 머리 뒤의 두광은 투각으로 화염문과 법륜, 화불을 장식하였다. 법의는 통견식으로 걸치고 법의자락은 상반신에서는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허리로 자연스럽게 흐르고, 하반신에서는 무릎 밑으로 U자형 주름을 이룬다. 대좌는 복련과 앙련으로 구성된 연화대좌이다. 이 상은 최근 개금불사를 하여 금색의 휘광을 내뿜고 있다.
미륵대불의 대좌 아래 지하
미륵대불의 대좌 아래 지하에는 반가사유상을 모신 용화전이 마련되어 있고, 그 안에는 중앙의 반가사유상을 본존으로 주변에 전시공간을 만들어 절과 산내 암자 등에 있던 성보를 전시하고 있다.
미륵반가사유상
화강석으로 만든 높이 8m의 기단부 안에는 용화전이 있는데, 미륵보살이 머물고 있는 도솔천의 모습을 형상화하였으며 용화전 벽면에는 13개의 미륵십선도가 부조되어 있다.
화강석으로 만든 높이 8m의 기단부 안에는 용화전이 있는데, 미륵보살이 머물고 있는 도솔천의 모습을 형상화하였으며 용화전 벽면에는 13개의 미륵십선도가 부조되어 있다.
미륵대불과 천왕문.팔상전 범종루가 차례로 보이는 법주사의 전경이다...
법주사 세존사리탑. 능인전(能仁殿) 일명 적멸보궁(寂滅寶宮) -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32호
능인전(能仁殿)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조선 인조 2년(1624)에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법주사 중건시 벽암대사(碧巖大師)에 의해 중창되었다고 한다.
삼존불(三尊佛)
여기 모셔진 중앙의 부처님은 수인으로 보아 비로자나불인 것 같다. 좌우엔 석고로 두 부처님을 모셨는데 어느 부처님인지 확실치 않다. 비로자나불이라면 대개 노사나불과 석가모니불을 모신다. 그런데 또 특이한 것은 중앙의 부처님 뒤로 광배가 있을 자리는 창을 내어 고려 공민왕이 법주사에 행차했을 때, 통도사에 있는 석가모니의 사리 가운데 일부를 이곳에 옮겨오도록 하여 세워놓은 세존사리탑을 보며 참배하도록 되어 있다.
삼존불 좌우에는 16아라한상을이 모셔져 있다.
능인전 전각 처마에 용의 전신을 묘사한 조각도 본다.
법주사 자정국존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 79)
자정국존(1240~1327)은 국령사. 장의사.법주사 등 여러 사찰의 주지를 지냈으며 도승통이 되기도 하였고, 호는 '보명'이다.
비는 길쭉한 직사각형의 모습으로 자연암반을 파내어 비몸을 세운 특이한 형태이다.
비 몸 앞면에는 자정국사에 관한 비문을 새겼는데 아랫부분이 일부 파손되어 있다.
고려 충혜왕 복위 3년(1342)에 세운 것으로 왕의 명을 받은 이 숙기가 비문을 짓고 전 원발이 글을 썼다.
법주사 석련지(국보 제 64호)
돌로 만든 작은 연못으로, 물을 담아두며 연꽃을 띄워 두었다고 한다.
불교에서의 연꽃은 극락세계를 뜻하며 사찰 곳곳에서 이를 본뜬 여러 형상들을 만날수 있다.
석련지는 8각의 받침돌위에 버섯 모양의 구름 무늬를 새긴 사잇돌을 끼워서 큼지막한 몸돌을 떠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국보 제64호인 법주사 석련지가 보인다.
8각의 받침석 위에 3단의 굄과 한 층의 복련대를 더하고 그 위에 구름무늬로 장식된 간석을 놓아 거대한 석련지를 떠받쳐 마치 연꽃이 둥둥 뜬 듯한 모습을 표현한 걸작품이라고 한다.
밑의 난간벽에는 여러가지 무늬를 새겨 놓아 화려함을 한층 더 살려준다.
윗난간에 세워진 기둥은 아주 기발한 착상이라 할 수 있는데, 블국사 다보탑에 새겨진 돌난간의 기둥과도 비슷하며 예스러움을 간직하고 있다.
8세기경에 제작된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절제된 화려함 속에 우아함이 피어나는 아름다운 자태는 석련지의 대표작이라 불리울 만 하다.
법주사 철확 (보물 제 1413호)
법주사 철솥이 보이는데 높이 1.2m 지름 2.7m로 무게는 20톤이라고 한다. 번창했을 당시의 3,000 승도가 이용했다고 한다.
하늘 높은 곳에 머리를 내밀고 있는 법주사 당간지주, 당간이란 솟대와도 같은 기능을 갖게 되어 신성구역임을 표시하는데 쓰이기도 한다.
이번엔 속리산 법주사 당간지주이다. 원래 당간이란 찰 또는 찰주라 불리고 일반적으로 절을 사찰이라 말함에 절에 당간 즉 찰이 세워져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예전에는 종파를 표시하기 위해 당간 위에 특정한 색깔의 깃발을 내결었기도 하였다한다. 한편 당간이란 솟대와도 같은 기능을 갖게 되어 신성구역임을 표시하는데 쓰이기도 한다. 현재 전하는 법주사 당간지주는 고려목종 7년에 조성된 것으로 조성 당시의 높이는 전체 약 16m에 이른다.
보은에 위치한 법주사의 가을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국보급 문화재가 많아 방문객들이 오랜 시간을 몸으로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거대한 암반이 보이는데 저 암반 사이로 법주사 마애여래의좌상이 세겨져 있다.법주사는 미륵신앙의 중심자고도 할 수 있는 곳이다.
법주사 마애여래의상(보물 제216호)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마애불(암벽에 새긴 불상)로 높이가 약 6m나 되는 큼직한 바위에 볼록 새겨진 이 여래 조상은 보기 드물게 의자에 앉아 있는 의상으로 옆에 조각된 지장보살과 함께 법주사의 성격을 알려주는 미륵불상이라고 한다.
아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그 옆 바위의 지장보살상. 마모가 심하고 뚜렷하지 않아 모르면 모르고 지나간다.
마애불 왼쪽의 또 다른 숨은 그림찾기. 법주사의 창건설화가 이 속에 담겨져 있다.
짐을 싣고 가다 멈춰선 말과 사람. 꿇어 앉은 소와 주인...
마애불 아래의 공간
마애불 왼쪽 주변에 법주사 석상대종사(石霜大宗師)와 금오선사(金烏禪師)의 부도와 탑비가 있다.
마애불을 참배하고 왼쪽 주변을 돌아보니 부도전 옆으로 수정암 가는 길이 보인다. 비구니 도량이라서 초입부터가 출입이 쉬워 보이지 않는다.
수정암 입구에 자연석을 이용한 탑과 탑비가 1기씩 서 있다.
법주사 산내 암자 수정암, 이름같이 아름다운 수정암이 정갈하게 자리잡고 있다.
무엇을 기원했을까? 수정암 앞 냇가에는 소원탑이 많다....
사찰 곳곳에서는 가을 정취가 물씬 풍긴다.
단풍은 가을을 알리듯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고, 활짝 핀 코스모스는 산들 바람에 나부끼며 단아한 자태로 벌들을 유혹한다.
법주사 주변은 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어, 마치 한 폭의 산수화를 보는 듯하다.
숲을 끼고 흐르는 계곡물이 너무나 맑아, 지니고 온 세속의 온갖 잡념이 다 비치는 것 같다.
법주사는 신라 진흥왕 14년(553년)에 창건된 사찰이니 천 년이 지난 고찰이다.
오랜 역사를 지닌 만큼 수많은 국보급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어 법주사는 열린 문화재 박물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그 모습 그대로 잘 보존돼 있고 많은 사람들이 자연에서, 또 사찰에서 마음을 쉬고 평안을 얻을 수 있는 장소라고 할 수 있다.
맑은 공기와 가을을 알리는 단풍, 천년의 역사까지 법주사는 지금 가을이 한창이다.
일주문에 들어설 때는 오직 일심(一心)으로 불법에 귀의해야 하겠다는 마음을 다지며, 세속의 번뇌로 흩어진 마음을 사찰에 들어섬으로써 하나로 모아 진리의 세계로 들어왔었는데..... 이제 다시 그문을 나선다.
안쪽의 편액에는 속리산 대법주사(俗離山 大法住寺)라고 적혀 있으며, 제일 왼쪽편에 작은 글씨로
광무 6년 임인 사월 일 중건 (光武 六年 壬寅 四月 日 重建)이라 적혀있다. (대략 1902년도쯤 될려나?)
‘호서제일가람(湖西第一伽藍)’이라고 적혀있는 일주문이 보인다. '호서'는 충청북도 제천의 의림지호를 중심으로 서쪽에 위치한 충청도를 가리키며, 그 중 으뜸의 가람을 알려 준다.
노란 빨강 파랑 단풍 가로수길, 법주사 일주문 옆길을 따라 내려간다.
주차장에서 법주사까지 가는 숲길의 거리가 5리쯤 된다고 해서 오리숲으로 불리는데 전나무와 소나무 등이 우거진 멋진 길이다. 길가 중간에는 동글동글한 황토를 밟을 수 있는 황톳길이 조성되어 있어 맨발로 걸을 수 있게 해놓았다. 좀처럼 흙을 밟을 일이 없는데 법주사에 들르면 맨발로 걸으며 자연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법주사 오리숲은 아이들이 물놀이를 할 수 있는 얕은 계곡물도 있고 잠시 쉬었다 갈 수 있는 넓은 잔디밭도 있다. 가을이 법주사에서 더욱 깊어진다.
황톳길 체험장을 지나자 조각공원이 나온다.
황톳길은 만성피로, 각종 성인병 예방에 좋다고 하니 맨발로 걸어보면 좋을것 같다.조각공원에서 대형 솥단지를 보게 된다.
밥그릇은 속리산에서 제일 높은 천왕봉 1,058m를 상징하는 것으로 매년 10월 속리축제 때, 속리산에서 자생하고 있는 산나물로 비빔밥을 만들어 1,058명이 먹을 수 있도록 한다고 한다. 진짜 왕 크다.....
정이품쌀 200kg숲길 옆에 황톳길도 만들어 놓았다.
단풍과 어우러진 조각상들 ~
조각공원에서 바라본 속리산 쪽
속리산 조각공원도 나와서
상가쪽으로 이동하여...
점심식사 후 13:30 청남대를 향해서 이동한다...
속리사에서 청남대로 이동중 정이품송과 다시 만난다.
속리산 국립공원 입구에 서 있는 정이품송. 천연기념물 103호로 현재 서쪽 가지가 부러진 상태로 남아 있다.
멋진 정이품송 ~ 오래 견디어 오래동안 우리들 곁에 남아 있어주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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