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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고택 함양 일두고택( 경상남도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 262-1 )여행방/경상도 2019. 5. 10. 08:37
명품고택 함양 일두고택 (咸陽一蠹古宅) - 중요민속문화재 제186호
2019. 5. 10.
2019. 5. 9. 포항농협 '고향을 지키는 주부모임'에서 다녀온 함양 일두고택과 한옥마을, 상림공원, 서암정사를 두루 살펴보는 여행길이다 ......
07:30 포항출발하여 휴게소 두군데 들러 지곡IC를 지나자 불과 몇 분 만인 10:50에 일두고택이 있는 개평마을 주차장에 도착했다.
마을이 댓잎 네 개를 붙인 介(개)자 모양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돌담이 댓잎처럼 포개져 이어지는 마을에 어울리는 이름이다. 고택에 이웃한 언덕에 오르니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 나가는 산세의 중앙을 차지한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산세 때문에 아늑해진 분지 마을에서 수옹 정여창(睡翁 鄭汝昌, 1450~1504)의 따뜻한 성품을 감지하고, 언덕을 내려와 천천히 일두고택으로 향한다.
함양 개평마을은 함양의 대표적인 선비마을로 일두고택을 비롯한 크고 작은 고택 60여 채가 모여 있는 곳이다. 함양의 중심에 위치한 개평마을은 '좌안동 우함양'이라 불릴 정도로 선비정신이 깊이 뿌리내린 지역이다. 특히 함양에서는 조선조 오현 중 한분인 일두 정여창선생의 고향인 개평마을에 선생의 뜻과 덕을 기리기 위해 일두고택을 중요민속문화재 제186호로 지정하며 일반인들에게 개방하고 있다.
15세기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유학자 정여창(一蠹, 1450∼1504)선생의 고택이 함양군 개평마을에 있다. 정여창 선생은 퇴계선생이 동방 4현의 한 분으로 추앙하던 유학자로 1610년(광해군 2) 문묘에 배향되었다. 개평마을은 약 오백 년 전부터 형성된 하동 정씨와 풍천 노씨의 집성촌으로 대전ㆍ통영 고속도로 지곡 IC 에서 자동차로 3분 거리에 위치한다.
이곳 주차장에서 오늘 5대 차량 중 1.2호 차량과 3.4.5호 차량 탑승자들이 두팀으로 나누어 문화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이동한다..
고택 들어가기 전에 위치한 노비집
전면의 노비집인데 현재는 해설사의 집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홍보관을 지난다.
개평마을은 마을 자체의 돌담이 참 아름답다.
담장을 옆에 끼고 걸으면 부푼 마음에 빨라졌던 걸음이 절로 느려진다. 돌담과 고샅에서 옅은 흙냄새가 걸음걸음마다 흩뿌려지는 개평마을의 담장을 돌아서면 골목의 중심에 드라마 토지의 촬영지로 알려진 일두고택이 드러난다.
우리는 3.4.5호 차량 탑승자들이로 1팀을 이뤄 문화해설사의 설명을 듣는다.
일두고택 들어가는 길. 시골마을이지만 골목이 꽤 넓은 편이며, 길에는 넓직하고 평평한 돌을 깔아 놓았다.
일두고택 앞 골목길과 담장 그리고 박석깔린 고샅
솟을대문을 향하는 길바닥이 다른 고택과는 다른 느낌이다. 이는 박석을 깔았기 때문인데 넓적하고 얇게 뜬 돌을 바닥에 깐돌을 말한다. 솟을대문으로 향하는 길에 박석을 깔아놓은 이유는 가마 혹은 말을 타고 오는 지체 있는 분이 집으로 향하는 소리를 짐작하기 위해서라 한다.
함양 개평마을에 진입에 일두고택으로 가는 길. 길 양쪽으로 정겨운 돌담이 쌓여져 있고 커다란 노송이 관광객들을 반기는 모습이다.
자잘하면서도 널찍널찍한 돌로 포장한 골목길에 들어서서 한참을 가야 막다른 듯한 곳에서 솟을대문을 본다.
돌담을 따라가다 보면 박석에 부딪히는 구두 소리가 훌쩍 앞서 걷는다. 어느새 도착한 일두 고택. 이번에는 돌담이 먼저 집 안으로 들어선다.
박석을 따라 들어간 곳에 일두고택 앞에는 솔송주 문화관이 자리잡고 있다. 솔송주는 봄에 나는 소나무 순과 찹쌀, 솔잎을 이용해서 만드는 술로 정여창 종가에서 전해내려오는 전통주이다.
박석이 깔린 돌담길을 가벼운 마음으로 걸어온 사람이라면 시나브로 대문에서 발걸음을 멈추게 된다. 박석을 따라 들어간 곳에 만난 솟을대문 앞에서면 충효의 상징인 홍살문이 드러난다.
세종(世宗)32년(年)(1450)에 태어나 성종조(成宗朝)에서 크게 활약하다가 연산군(燕山君)4년(年)(1493)에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루(連累)되어 종성(鐘城)에 귀양갔다가 불귀(不歸)의 객(客)이된 일두(一蠹) 정여창선생댁(鄭汝昌先生宅) 대문이다.
이 집은 선생이 타계(他界)하신지 1세기(世紀) 이후에야 중건(重建)된 것이라 하나 원래의 집이 이 터에 있어서 500여년을 연기(延基)하여오는 명기(名基)의 터전으로 알려져 있어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을 운위(云謂)하는 인사(人士)는 누구나 한번쯤 이 터를 열거(列擧)한다는데 이 집을 지정한 특색의 한가지가 된다.일두고택은 TV드라마 '토지'의 촬영 장소로 이용되면서 부터 널리 알려져 많은 문화유적 탐방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경남 함양의 전통 한옥마을인 지곡면 개평한옥마을이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촬영지로 알려지면서 찾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서구열강이 조선을 침탈하기 시작한 구한말이 배경인 이 드라마에서 여주인공 고애신의 집으로 등장하는 곳이 이곳 일두 고택이기 때문이다.
일두고택 안내판
그림의 윗면이 서쪽이다. 안채의 좌향은 남향이고, 사랑채의 좌향은 동향이다. 용맥은 동향으로 행룡한다.
표지판에 '정병호'가옥이라 쓰여 있다고 잠시 머뭇거릴 필요는 없다. 문헌공 일두 정여창 고택은 1570년대 후손들이 중건한 것으로 지정당시 소유주의 이름을 따라 변경된 것이기 때문이다.
정여창 고택의 유적 명칭은 지정 당시의 건물주 이름을 따서 '정병호 가옥'이라 한다.
2013년 문화관광부로부터 “명품 고택”으로 지정된 바 있는 고택은 사랑채, 안사랑채 및 행랑채를 일반인에게 개방하고 있으며 숙박 요금은 아래와 같다. 투숙객은 비치되어 있는 전통 혼례복과 남녀 한복, 도포 등을 체험해 볼 수 있다.
사랑채
4인 이내 300,000 방3, 대청 1, 누마루 1
6인 이내 350,000 방3, 대청 1, 누마루 1
8인 이내 400,000 방3, 대청 1, 누마루 1
※ 사랑채에는 1팀만 투숙하며 샤워 가능한 전용 화장실이 있음.
안사랑채
4인 이내 200,000 두칸 방, 대청마루 1
6인 이내 250,000 두칸 방, 대청마루 1
안사랑채에는 1팀만 투숙하며 샤워 가능한 전용 화장실이 있음.
행랑채
2인 이내 500,000 방1
행랑채에는 방이 4개가 있어 네 팀 숙박 가능.
조선조 5현의 한 분인 문헌공 일두 정여창 선생의 고택으로 이 집은 선생이 타계한지 1세기 후에 후손들에 의하여 중건되었고 9,917m²(3,000여 평)의 대지가 잘 구획된 12동(당초 17동)의 건물이 배치된 남도 지방의 대표적 양반 고택으로 18세기에 개축된 사랑채를 제외하곤 대부분의 현재의 건물은 조선 후기에 중건한 것으로 16~17세기에 건축되었다. 조선시대의 빼어난 건축물로 1984년에 국가지정문화재(중요민속문화재 제186호)로 지정되었다.
사랑채는 현 소유자 정병호의 고조부가 중건하였다고 하는데, 이 사람은 서산군수를 지냈다고 한다. 그러나 안채는 사랑채보다 건축연대가 올라가서 청하(淸河)현감을 지낸 선조가 300년 전에 중건하였다고 전한다.
실천 유학자 정여창을 따르던 집안의 내력이 솟을대문과 솟을대문 안쪽에 세워진 홍살문에 숨어 있다.
솟을대문 안쪽으로 붉은색을 칠한 얇은 기둥이 홍살문이다. 그 위로 정려패가 보인다.
솟을 대문 아래에는 효자충신 정려(旌閭)를 게시(揭示)한 정려패 5개가 편액(扁額)처럼 걸려 있어 눈길을 끈다.
일두 선생도 천하의 효자로 알려졌는데 그 가풍이 이어졌다는 뜻이다.
발길을 멈추게 한 것은 솟을대문 안의 홍살문이다. 홍살문 위에는 시기를 달리하여 나라에서 내린 다섯 개의 정려패가 걸려 있다. 충과 효라는 시대적 도덕 실천에 남달랐던 집안의 내력을 한눈에 알 수 있다.
고택(古宅)의 위상을 알리려는듯 돌로 된 문턱이 높게 여겨진다.
바깥행랑채 솟을 대문 안쪽으로 대문채 옆에 문간방을 배치하고 있는데, 구한말 한양의 도시형 한옥을 모방해 만든 것으로 보인다.
마구간이나 외양간이 있는 전통적인 대문채와는 달리 문간방을 양쪽에 2개씩 두고 있다.
바깥 행랑채에 있는 방
행랑채는 집안 일을 돌보던 사람들이 거주하던 곳이다. 과객들이 머물기도 하였다.
대문간을 들어서서 직행하면 안채로 들어가는 일각문이 있고, 동북으로 비스듬히 가면 사랑채가 나온다.
홍살문을 감싼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골목길을 따라 동행하던 담장이 집 안으로 그대로 이어진다. 건축 재료가 때로 공간을 나누는 기준이 된다는 점을 헤아리면, 이는 집의 안과 밖이 다르지 않다는 건축가의 내면세계를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집은 집 밖의 세계와 다르지 않기에 자연 안의 자연이고 우주 안의 우주인 셈이다.
빈틈없이 지은 사랑채에 완결미를 더하는 것은 좋은 부재가 아니라 주변을 두른 어수룩한 담장이다. 문틈, 건물 사이의 틈, 그리고 자연까지 담아내는 마당의 틈. 일두고택에서 틈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정여창이 동방오현(東方五賢)으로 존경을 받는 것도 그의 엄격한 유학자의 면모 뒤에 숨은 인간적인 성품, 바로 그 작은 틈 때문이 아닐까? 여행은 우리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작은 틈이 아닐까?
좌측인쪽 일각문과 오른쪽의 사랑채가 보인다.
사랑채는 가장이 주로 머물던 곳으로 손님 접객을 하기도 하였다. 젊은 시절 허백련 화백이 체류하며 그림을 그렸던 곳이고도 하고, 최근에는 토지ㆍ백치 아다다ㆍ다모 등 각종 프로그램을 촬영한 곳이기도 하다.
사랑채는 세벌대 화강석기단 위에 원기둥. 굴도리를 사용한 팔작지붕의 격식 높은 기법의 건물이다.
사랑채를 지은 이는 완벽주의자였는지도 모르겠다. 날렵하게 올라간 지붕 선이 더 자유롭게 느껴지는 까닭이다. 석가산의 외로운 소나무는 외로움을 훌훌 털어 버리고 날아오를 기세다.
수령 300여년 된 노송이 불의에 굴하지않는 선비의 기상을 보여주며 허리를 한껏 구부리고 있다.
주목되는 구조로는 사랑채 앞마당 끝 담장 아래에 석가산(石假山)의 원치(園治)가 있다. 보통은 후원에 주력하여서 앞마당에는 취평(取平)한 채로 반듯하게 두는 일이 고작이나 이 집에서는 사랑채의 내루에서 내려다보며 즐길 수 있게 조산(造山: 인공산)을 꾸몄다.
산석(山石)을 떠다 삼봉형(三峰形)으로 주산(主山)을 높게, 좌우를 그보다 낮게 하고 그 아래에 심곡(深谷)을 의태(擬態)하는 석곡(石谷)의 형성과 알맞은 배열로 나무를 심어 아름답게 꾸몄는데, 엄격한 법도에 따르고 있고 고형을 남겼다.
지금은 나무들이 웃자랐고 후대에 적절하지 못한 나무들이 첨가되어서 옛 모습을 그대로 볼 수는 없게 되었다. 이 집은 전기한 대로 여러가지 특색이 있어 구조적인 특성을 보일 뿐만 아니라 세간 살림살이들이 비교적 예스러운 대로 제자리에 보존되고 있어서 당시의 상황을 공부하는 데에 좋은 자료가 된다. 따라서, 조선 중기·후기 주택연구에 있어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일두 고택의 가장 큰 특징으로 다양한 나무와 돌들을 가져다 놓은 정원이다. 원래는 현재보다 더 다양하게 크고 작은 나무를 심어 인공적으로 정원을 조성했다고 한다.
일두고택의 사랑마당에는 꽤 큰 돌로 쌓은 가짜 산인 석가산이 자리한다. 사랑마당은 자신의 일부를 떼어 내 작은 틈을 만들고 거기에 자연을 들였다. 마당이 자연을 품은 것이다.
사랑채와 석가산과 안사랑채가 차례로 보인다.
사랑채 처마밑에는 문헌세가(文獻世家)라고 적힌 현판이 걸려있다. 일두 정여창 선생의 시호가 ‘문헌공’이니 정여창 선생의 일가가 사는 집이란 뜻이다.
충효절의(忠孝節義), 사랑채의 힘찬 이 글은 대원군의 글씨라 한다.
일두 선생을 흠모했던 흥선대원군은 서원철폐령을 내렸지만 일두의 '남계서원'에는 손도 대지않았다고 한다.
일두 고택에서 상징적인 건물이 이 탁청재다. 마음을 맑게 닦는다는 뜻이다.
마당이나 마을 경치를 감상하면서 손님을 접대하는 공간인 누마루. 구한말에 지어진 대저택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구조이다.
마당이 자연을 담았다면, 건물은 우주를 품었다. 누마루는 네모 기단으로 땅을 딛고, 원기둥으로 하늘을 받쳤다. 그 사이의 팔각기둥이 땅과 하늘을 잇는다.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 누마루는 천지 만물을 하나로 담아낸 것이다. 우주의 중심을 선언한 만큼 사랑채는 건축적으로 완벽하게 느껴진다. 창과 문으로 밀봉된 사랑채에는 어떤 틈도 보이지 않는다. 비어 있기 마련인 누마루와 대청, 그리고 툇마루 아래까지도 나무 판을 둘러쳤다. 인방 위에는 소로(작은 접시 모양의 부재)를 얹어 집의 격을 높였다. 툇보(툇마루 쪽의 짧은 보) 역시 유려한 곡선으로 힘이 넘쳐 집의 완벽함을 거들고 나선다. 이 모든 것이 건물을 마주한 사람을 압도한다. 이 때문에 오히려 답답함이 느껴진다. 어쩔 수 없이 눈길이 쉴 틈을 찾아 주변으로 움직인다. 완전함이란 부족함이 없는 것이 아니라 부족함을 포함하는 것이다. 이는 여백을 중시하는 한옥의 미덕이며, 우리 건축이 도달한 매우 우월한 경지다. 사랑채에는 여백이 모자란다.
사랑채는 건물로서의 완성도가 매우 높다. 우람한 툇보, 툇보를 받기에 모자람이 없는 굵은 두리기둥, 툇마루에까지 해 단 고급스러운 난간. 언뜻 보아도 세심하게 신경을 쓴 건물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누마루 아래는 판벽을 둘러 고방으로 쓰는 실용적인 면도 보이는데, 사랑채의 마루아래에서 볼수있는 시건장치 에서도 품격이 보이는듯 하며, 사랑채 누마루는 네모 기단에 원기둥으로 세웠으며 그 사이의 팔각기둥이 땅과 지붕을 잇는데,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 등 누마루는 천지 만물을 하나로 담아낸 것으로 우주의 중심을 표현한 만큼 사랑채는 건실하고 완벽하게 여겨지며, 누마루의 아래 목재의 결구에서도 장인의 솜씨를 엿볼수 있다.
사랑채는 ㄱ자형 평면에 내루(內樓)가 전출(前出)한 구조이다.
‘文獻世家(문헌세가)’·‘忠孝節義(충효절의)’·‘百世淸風(백세청풍)’ 등을 써 붙인 사랑채는 전퇴(前退)가 있으며, 높직한 댓돌 위에 지그시 앉아 있는 것같이 보인다.
사랑채의 내루는 구조가 간결하면서도 단아하고 소박한 난간과 추녀를 받치는 활주(活柱 : 굽은 기둥)를 세우되 세간(細竿)한 석주(石柱)로 초석을 삼은 특색을 지녔으며, 또 누하(樓下)의 주간(柱間)을 판벽(板壁)으로 막아 수장처로도 이용할 수 있게 배려하였다.
사랑채는 'ㄱ'자형 평면에 내루가 앞 쪽으로 달린 전출 구조이며, 내루는 구조가 간결하면서도 단아하고 소박한 난간과 추녀를 받치는 활주(活柱 : 굽은 기둥)를 세우되 가늘고 긴 석주(石柱)로 초석을 삼은 특색을 지녔으며, 또 누하(樓下)의 주간(柱間)을 판벽(板壁)으로 막아 수장처로도 이용할 수 있게 배려하였다.
사랑채내부와 사랑채 마루. 통로로 사용하는 안채 툇마루 앞퇴
두리기둥이 반복되며 건축에 힘을 더한다. 툇보는 유려한 선으로 집의 완성도를 높인다.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 사랑채는 우주의 중심을 선언한다. 네모 기단과 원기둥 사이의 팔각기둥이 땅과 하늘을 잇는 역할을 한다.
사랑채 왼쪽 중문 앞 마당으로 들어가는 작은 출입문인 일각문. 사랑채가 있는 마당과 중문 앞 마당을 분리하기 위한 목적으로 담장을 쌓고 있다.
일각문
일각문을 들어서면 안쪽에는 2칸짜리 마루와 온돌방이 있는 작은 사랑으로 중문간채 이다.
너무 완벽한 사랑채가 건축적인 완결미를 얻기 위해서는 주변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중문간채로 들어가는 문은 담장을 끊어 놓은 것이어서 허술하기까지 하다. 담장이 높지도 않기에 실용적이지 않아 보인다. 허점투성이여서 사랑채의 모습과 대조적이다. 그러나 이 허술한 담장이 없었다면, 집에 들어선 사람은 사랑채의 단호함에 숨도 쉬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 틈이 있어 사랑채가 전체적으로 살아난다. 결국 사랑채의 완결미를 살려 낸 것은 사랑채 자체의 완전함이 아니라 낮은 담장과 담장을 끊어 만든 틈이다. 별채의 담장을 사랑채와 함께 지은 것이라면, 사랑채를 지은 이는 이를 감안했을 것이다. 사랑채와 둘레를 전체적인 안목으로 하나로 묶은 것이다.
이런 넘쳐 나는 틈에 대한 반발이 사랑채의 닫힘을 조장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랑채라고 틈 없이 완성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랑주인은 사랑채에 통쾌한 틈 하나를 준비했다. 중문마당에는 사랑의 작은 대청이 있는데, 대청 앞에 낯선 물건이 있다. 여물통과 그 위를 가린 나무 판이다. 이곳에 들어와 이를 처음 본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린다. 이게 무엇일까? 해설사의 이야기에 따르면, 사랑채 뒷면인 이곳에서 사랑채 술손님들이 나와 대청에 선 채로 소변을 보았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지속되어 오던 긴장감이 빵 터지고 만다. 완벽함을 강조하던 사랑채 뒤에 커다란 틈이 있었던 셈이다. 일두고택의 틈은 이렇듯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
작은 대청 앞의 여물통은 사랑채의 손님이 소변을 해결하던 해우소다. 발상이 독특하다.
이제 일두고택의 틈을 따라가 보자. 중문간채와 안채를 나누는 담장과 문이 보인다. 일두고택에서 공간의 밀도가 제일 큰 곳이다. 담을 끊어 만든 문을 지나면 중문간채다.
담장을 끊어 만든 문은 틈으로서 고택의 운율을 살려 내고, 집 전체의 완성도에도 영향을 준다.
안채와 사랑채의 중간에 위치한 중문간채는 규모와 공간배치 등을 볼 때 이곳은 아마도 사랑채의 손님들은 술자리가 길어져 돌아갈 때를 놓치면 이곳에서 잠을 청했으리라.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중문간채와 안채를 나누는 담장도 그리 높지 않다는 점이다. 안채의 여인들은 이따금 담 너머에서 들려오는 사내들의 목소리를 통해 바깥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낮은 담장이 틈으로 작용하고 있다. 결국 이 틈을 통해 중문간채가 안채와 이어진다. 이 집에서 틈은 중요한 건축적 테마다. 틈은 늘 닫힘을 동반한다. 닫혀 있지 않으면 틈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닫힘 역시 틈 없이는 있을 수 없다.
원래 중문간채와 문밖의 곳간채는 따로 있었다고 한다. 중문간채 마주보고 있는 마당 한쪽편 곶간채. 가운데에 담장으로 공간을 분리하고 있다.
일각문을 들어서서 사랑채 측면을 통과하고 중문간채 옆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이 보인다... 일각문을 들어서서 사랑채 측면을 통과하고 문을 지나야 안채에 들어서게 되는데....
중문간채의 오른편에 있어 외부인의 안채 출입에 제약이 많았을 것이다.
일각문을 들어서서 사랑채 측면을 통과하고 다시 문을 지나야 안채 영역으로 들어서게 되는데, 또 한번 중문을 통과해야 한다. 중문을 들어서면 남향한 一자형의 큼직한 안채가 있다.
중문 사이로 보이는 안마당. 안채를 중심으로 안채 뒤로 사당, 별당 등이 들어서 있다. 넓은 마당에 건물들이 배치되어 있는데 개방적인 느낌을 준다. 중문에서 바라본 안채 대청의 모습. 사랑채와는 다르게 외벌대 기단위에 각기둥과 납도리를 사용했다.
안채
- 자형 건물으로 가운데 넓은 대청마루를, 양쪽에 온돌방을 두고 있다. 앞면 8칸으로 상당히 큰 규모의 건물이다. 300년 전 이 저택을 중건할 때 지은 건물이다. 안채 왼쪽으로 부엌이 있다.
一字형의 큼직한 안채는 경북지방의 폐쇄적인 공간과는 달리 개방적으로 분할되어 집이 밝고 화사하다. 안채 좌측으로는 아래채가 있고, 뒤편으로는 가묘(家廟)와 별당, 그리고 안사랑채가 따로 있다.
옛 손길이 고스란히 베어 있는 세간들을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정여창 고택은 양반가의 정갈한 기품이 가득하다....안채는 여성들의 생활 공간으로 부인과 자녀들이 머물던 곳이다.
일곽(一廓)을 이룬 안채는 청하현감(淸河縣監)을 지낸 덕제선생(德濟先生)이 300여년 전에 중건하였다고 한다.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안채 방문 문살 모습..
안채 부억의 정교하게 깎아 만든 문살
안채 이곳은 1987년 KBS대하드라마 토지의 최참판댁의 무대가 된 곳이기도 하다.
안채 왼쪽에 앞면 3칸 규모의 아랫채가 있다. 독립된 생활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자식들이 분가하기 전 머물기에 적합한 구조이다.
중문 옆 곳간채인 안곳간과 아래채와 안채
왼쪽에 아랫방채가 있고 안채의 뒤편으로 별당과 안사랑채가 있으며, 그와 별도로 일곽을 이룬 가묘(家廟)가 또 있다.
안채들어가는 안행랑채 - 열린문이 보이는 곳은 큰 독들과 옹기그릇 등이 있는 곳간이다.
안채가 있는 안마당. .
정여창(1450~1504)은 조선 성종 때의 대학자로 함양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홀로 독서에 힘쓰다 김굉필과 함께 김종직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했다. 관직에 나간 이후 성리학의 대가로서 저술 뿐 아니라 1495년 현감에 임명되서는 백성들의 어려움을 알고 법령을 만들어 시행한 지 1년 만에 정치가 맑아졌다는 백성들의 칭송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 화를 입었는데 당시 사초에 기록된 내용을 제대로 고하지 않았다고 해 유배길에 올랐다. 1504년에 사망한 뒤에는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부관참시(剖棺斬屍)까지 당했다. 사관 김일손은 그를 “그는 도(道)가 하늘과 사람에 통하고 학문이 체와 용을 갖추었으며 성정이 고요하고 기질은 단정하다. 몸가짐은 깨끗하고 고난에도 안주하며, 사물을 어질게 대한다”고 기록했다. 임금과 학자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그였지만 그는 항상 겸손함을 잃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일두’라는 호에서 드러난다. ‘한 마리 좀벌레’라는 뜻을 지닌 그의 호에서 겸손함 행실이 엿보인다. 정여창은 ‘용학주소’, ‘주객문답설’, ‘진수잡저’ 등의 저서가 있었으나 무오사화(戊午士禍)때 부인이 태워 없애 그 유집 일부가 ‘정문헌공실기(鄭文獻公實記)’속에 전해지고 있다.
정여창은 명성에 비하면 글을 거의 남기지 못했다.
정여창이 사화에 연루되어 곤경에 빠지자 가족은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그의 글을 모두 불살라 버리고 말았다. 만약 그의 글이 제대로 남아 있었다면, 그의 학문적 성과가 좀 더 또렷하게 역사에 기록됐을 테지만, 실천을 중시하던 당시 유학에서 그의 삶은 그 자체만으로도 큰 산이 되었다.
동방오현 중 한 명으로 존경을 받게 된 까닭도 거기에 있다. 그래서 그에 관한 전설적인 이야기들이 실록 등에 여럿 전해 내려온다. 무관인 아버지가 난을 일으킨 이시애에게 죽임을 당하자 전쟁터까지 달려가서 악취가 진동하는 시신들을 일일이 들춰 보고 아버지의 주검을 수습해 돌아왔다든가, 전염병에 걸린 어머니를 바로 옆에서 지극정성으로 돌보면서도 전염병에 걸리지 않았다든가 하는 이야기들이다. 한술 더 떠서 어머니가 소 잡는 일을 보고 놀랐다는 이유만으로 평생 소고기를 먹지 않았다고 할 정도니, 조선 시대 유교를 뿌리내리는 데에 남다른 기여를 한 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
그의 미담에 감동한 임금이 정여창에게 여러 번 벼슬을 내렸지만 그는 번번이 이를 거절하였다. 당연한 일을 하고 이를 구실로 벼슬을 얻는 것이 옳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래도 거듭 벼슬이 주어지자 그가 선택한 길은 과거였다. 이유는 단지 그것이 도덕적으로 정당하기 때문이었다. 누구에게나 주어진 공정한 길을 가는 것. 이처럼 일관된 도덕적 태도가 임마누엘을 떠올리게 한 것이다. 임마누엘 칸트는 영원히 선(善)한 것은 '선하려고 하는 의지'밖에 없다고 하며, 의지적인 도덕 실천을 중요시했다. 동정으로 거지에게 돈을 주어서는 선한 것일 수 없으며, 그것이 옳기 때문에 돈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옳은 일을 하려는 의지, 오직 그것만이 그에게 도덕적인 것이었다. 죽기 나흘 전, 주치의가 방문했을 때 임마누엘은 병석에서 나와 서서 의사를 맞았다고 한다. 당황하던 의사가 앉고 나서야 몸을 누였다는 그의 일화에서는 동양 군자의 일면을 보는 것 같다. 정여창의 삶이 임마누엘의 그것과 겹쳐지는 까닭이다. 그래서 좀벌레를 뜻하는 일두(一蠹)보다는 정여창의 또 다른 호인 수옹(睡翁)이 더 마음에 와 닿는다. 자신을 한 마리 좀벌레에 비유한 결연한 겸양보다는 '졸고 있는 늙은이'라는 빈틈 많고 수수한 겸양이 정여창을 훨씬 인간적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정여창(鄭汝昌)이 지은 시(詩)를 가져와 본다.
風蒲獵獵弄輕柔 바람에 부들이 휘날리어 가볍고 부드럽게 희롱하는데
四月花開麥已秋 사월에 화개(땅 이름)에는 보리가 벌써 가을일세
觀盡頭流千萬疊 두류산 천만 골짜기 다 구경하고서
扁舟又下大江流 조각배로 또다시 큰 강 흐름에 내려가네
아래채 앞에서 바라본 안채. 사랑채. 중문간채
안채와 아래채 사이에 위치한 우물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는 이 마을에 관한 이야기로 마을이 배의 형상을 하고 있어 자연암반 위에 난 다섯 개의 우물 말고는 다른 우물을 파면 가라앉는다는 전설이 흐르고 있다. 그래서 우리민족 기운을 가라앉힐려고 일본사람들이 팠다고 전해진다.
안행랑채 곡선재
안대문 좌측으로 한칸씩 행랑방과 부엌 두 칸의 안변소가 있고 북으로 세칸의 곡간이 있다.
안채 앞에서 바라본 중문간채 굴뚝
중문 옆에는 작은 사랑을 출입하는 중문간채 문이 있다.
안마당이 ‘ㅁ’자 구조를 더 돋보이게 한다. 이곳에서 오늘 5대 차량 중 3.4.5호 차량 탑승자들이 문화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있다..
일두고택에서 건축적으로 공간의 밀도가 가장 높은 곳은 안채와 곳간이 있는 엣 중문간채 사이다. 중문간채에 들어가서 몸을 왼쪽으로 틀면 건축적으로 꽉 채워진 공간이 나타난다. 사랑채, 안채, 곳간, 사당, 그리고 지금 서 있는 별채까지 일두고택의 모든 건물이 안채와 별채를 가르는 낮은 담장을 중심으로 한곳에 모여 있다. 일두고택에서 공간적인 밀도가 가장 높은 영역이다. 낮은 담장이 바퀴통 구실을 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담장이 조금만 더 높았다면, 공간의 밀도감은 현저하게 떨어져서 안채와 중문간채, 사랑채가 전혀 별개의 건물로 느껴졌을 것이다. 사랑채에서 사당으로 이어지는 길과 안채에서 곳간으로 이어지는 길도 여기에서 교차한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담장 안쪽 곳간 마당이다. 그러나 담장과 붙어 있어 담장과 하나로 느껴진다). 여인의 공간인 안채와 바깥 사내들의 공간인 중문간채가 낮은 담을 사이에 두고 만나 긴장감도 매우 높다. 공간의 밀도와 긴장감이 가장 높은 곳이지만, 이 긴장감은 안채로 들어가면서 해체된다.
틈이 사방으로 퍼지면서 안채는 틈에 에워싸인다. 그래서 사랑채와는 전혀 다른 공간감을 가진다. 봉해진 ㅁ자 한옥의 모퉁이를 모두 끊어 안채를 틈이 에워싼다. 이제 틈이 공간 이용을 주도한다. 그리하여 안채 마당은 사방으로 통한다. 안채가 집 안의 베이스캠프 역할을 할 수 있는 것도 바로 틈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건축적으로 일두고택을 지배하는 것은 밀봉된 사랑채가 아니라 탁 트인 안채다. 사랑채의 건축 기준도 안채에 있다. 안채 기단에 맞추어 사랑채 뒷면 높이를 결정하고, 사랑채 앞쪽으로 난 경사지에 높은 기단을 세웠다. 안채는 사방으로 이어지는 틈을 통해 집 안 어느 곳으로도 통한다.
집 안의 베이스캠프 구실을 하는 안채는 틈으로 에워싸여 있다. 틈은 일두고택의 중요한 테마다.
마당이 틈을 만들어 자연을 들인 것처럼, 사랑채 역시 틈을 배후에 두고 우주를 담은 모습이다. 닫힌 우주는 온전할 수 없다. 그리하여 일두고택을 감상하는 이는 사랑채와 안채 모두를 보아야만 한다.
안채에서 본 사랑채 뒷편. 사랑방으로 출입하는 문들이 있다. 앞쪽에서 본 웅장한 모습의 사랑채와는 달리 뒷편에서는 소박하게 보인다.
안채 옆 마당에서 바라본 사랑채 아궁이
안채 뒷마당
장독대가 있고, 뒤쪽에도 통로로 사용하는 툇마루와 작은 마당이 있다. 궁궐 후원같은 느낌을 준다.
안채 굴뚝
안채 뒤 우물
안채 옆 통로. 안채 뒷편 사당과 안사랑채로 연결된다.
안채의 건너방을 지나면 곳간채가 보이고 양옆으로 사당과 안사랑채, 장독이 놓은 여분의 공간으로 통하는 협문이 보인다. 여성의 공간으로 쓰였던 안채와 조상들을 모시는 사당은 아무나 들어서지 못하도록 높은 토담으로 구획을 나눴다. 사랑채를 제외한 나머지 동들이 함부로 노출되지 않도록 고려한 탓이다. 언뜻 보면 미로처럼 복잡하지만 고택을 둘러보면 오히려 이동할 때마다 각 공간에 부여한 특징이 도드라져 구경하는 맛이 있다.
안채 뒷편 사당 입구
안채 뒷편에는 별당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곳간채가 들어서 있다.
사당과 곳간 (옛별당터)
안채 옆 마당 사당 앞에서 바라본 안사랑채 쪽
쪽문을 통해본 안사랑채
사랑채 옆의 안사랑채는 며느리에게 안채를 물려준 윗대 안방 마님이 머물던 곳이라 한다.
사랑채 앞 석가선쪽에서 바라본 안사랑채
안사랑채 앞 마당. 사랑채와는 담장으로 분리되어 있다. 쪽문을 지나면 안채와 연결된다.
안사랑채 좌측면은 객사로 사용했다. 담장에는 문화재 안내소로 이어지는 개구부(구멍)가 뚫려 있다.
안사랑채 마당에서 비리본 사랑채쪽 돌로 쌓은 가짜 산인 석가산, 사랑채 오른쪽 누마루 앞으로 수령 300여년 된 노송이 허리를 한껏 구부리고 있다.
안채 뒤편 사당쪽을 바라 본다...
안사랑채에서 사랑채 마당으로 나온다... 학문을 중시했던 집안답게 서재처럼 잘 꾸며놓은 사랑채 누마루는 학자의 철학이 공간에 고스란히 반영된 셈이다. 아쉬운듯 사랑채를 바라보며....
천천히 일두 고택을 나선다...
뒤돌아본 돌담장과 골목길....
다시 일두 홍보관을 지나
주차장으로 향하다가
주차장 가는 길에 멀리 바라본 고택 풍경
정성을 다해 축조된 한옥은 수십 년의 세월 속에서도 건재하다. 쉽게 무너지지 않으며 탄탄한 기반으로 빛이 바랄지언정 부서지지는 않는다. 천년의 가옥으로 여전히 숨 쉬고 있는 고택은 사람들의 오고 감으로 더 건재할 것이다. 조용한 걸음으로 살펴본 일두고택의 주변으로 산책로가 나 있어 돌담으로 난 골목골목의 전경을 걸음에 담아보는 것도 참 좋다.
날씨조차 화장한 봄날.... 온통 봄을 느끼며 다음 여행지 상림으로 향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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