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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과 문화재가 그득한 전북 완주군 종남산 송광사(전북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 569-2)사찰여행/전라도 2016. 3. 30. 18:01
보물과 문화재가 그득한 전북 완주군 종남산 송광사 ( 終南山 松廣寺)
2016. 3. 30.
2016. 3. 28. "한국불교대학 大관음사 포항도량" 에서 108순례로 이번에는 전라북도 완주의 위봉사. 송광사와 진안의 탑사로 나들이 기도를 출발하여 첫번째 순례지 전북 완주군의 비구니 도량 위봉사를 본 후 인근의 10분 거리의 전남 순천의 송광사와 이름이 같은 전북 완주군의 종남산 송광사로 이동한다...
송광사는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에 위치한 천년 고찰이다.
대한불교 조계종 송광사는 신라 경문왕 7년 (867년)에 구산선문의 개산조인 보조체징선사가 개창하였다. 원래의 사명은 백련사였으며, 현재의 일주문이 3km밖 나들이라는 곳에 서 있던 대찰이었으나, 역사의 변천속에 거의 폐찰이 된 것을 순천 송광사의 보조국사 지눌스님이 중창을 발원하신 후 현재의 도량 전각들은 1600년대 보조 지눌국사의 법손들이 대대적인 불사를 추진한 것이다.
특히 병자호란으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두 왕세자를 청나라에 볼모로 보낸 인조대왕이 두 왕세자의 무사환국과 국란의 아픔을 부처님의 가호로써 치유하고자 대대적으로 중창한 인조대왕의 호국원찰이다.
이렇듯 역사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한 호국원찰이어서인지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면 대웅전, 나한전, 지장전의 불상이 많은 땀과 눈물을 흘리곤 한다.
특히 대웅전의 불상은 KAL기 폭파사건, 12.12사건, 군산 훼리호 침몰사건, 강릉 잠수함 출몰, 그리고 97년 12월 2일부터 13일까지 엄청난 양의 땀과 눈물을 흘려 I.M.F한파를 예견하였다고 한다.
전국 4대 지장기도 도량답게 최대 크기의 지장전에 봉안되어 있는 지장보살상과 시왕상, 나한전의 석가여래와 500의 나한상은 대웅전과 함께 많은 이들의 참배처가 되고 있으며 평지가람으로 노약자가 편히 올수가 있으며, 대형버스 30대가 주차할 수 있는 대형주차장이 준비되어 있고 대웅전, 삼세불상, 아(亞)자형 종각, 사천왕상 등 4점의 보물 문화재와 8점의 유형 문화재 등 역사의 숨결을 느낄수 있는 사찰이다.
완주 송광사 초입의 약 2km 남짓의 봄철 송광사 벚꽃 터널의 아름다움은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전북 완주 송광사는 전남 순천에 있는 조계산 송광사와 동명이사(同名異寺)이다. 물론 승보사찰 조계산 송광사가 더 유명하나.. 이곳 완주 송광사 또한 크고 오래된 사찰이다.
완주 송광사 입구. 소양천 상류의 깊은 골짜기 안쪽에 위치한다. 너른 터를 가지고 있기에 큰 사찰로서 발전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완주 송광사 일주문(完州 松廣寺 一株門) - 전라북도의 유형문화재 제4호
송광사의 입구에 세워 속세와 불계의 경계역할을 하는 상징물인 일주문은 조선시대에 지은 것이다. 원래 지금의 위치에서 약 3㎞ 떨어진 곳에 세웠던 것인데, 절의 영역이 작아져서 순조 14년(1814)에 조계교 부근으로 옮겼다가 1944년에 지금 있는 자리로 옮긴 것이다.
건물은 2개의 원기둥을 나란히 세우고 그 위에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간결한 맞배지붕을 올렸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공포는 용 머리를 조각하는 등 조선 중기 이후의 화려한 장식적 수법을 엿볼 수 있다. 기둥의 앞뒤로 연꽃무늬를 장식한 보조기둥을 세워 안정감을 주고 있으며 앞면 중앙에는 ‘종남산송광사(終南山松廣寺)’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일주문의 보조기둥위에 힘없는 연꽃이랑 갸날픈 용머리가 삐쭉삐쭉 나온것이 인상적이다.일주문위의 용머리랑 포들 때문일까 이 일주문은 유달리 섬약하게 느껴진다.
송광사 일주문은 전체적인 균형을 잘 이루고 있어 단정하고 원숙한 비례감을 느끼게 하는 조선 중기의 일주문이다.
사찰의 문이란 일종의 정화장치이다.
주불전인 대웅전까지 가는 동안 일주문과 금강문, 사천왕문을 차례로 거치게 될 것이다. 과정이 거추장스러울수록 속세에서 묻혀온 티끌은 샅샅이 씻겨져 내리는 법이다.
'종남산 송광사(終南山松廣寺)' 편액 글씨는 일중 김충현 서예가의 글이며 불기2518년(1974년)의 작품이다.
일주문 뒤로 금강문이 보인다.
속세에서 묻혀온 티끌은 샅샅이 씻겨져 내리는 법이다. 그러나 두 번째 문인 금강문에 채 이르기도 전에, 아름다운 상념의 그림자가 하늘거리던 마음은 사라지고 만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일주문 옆 오른 편에 '백련다원'이라고 하는 전통 찻집도 새로 생겼다.
일주문 안으로 들어서니 양쪽으로 목장승이 방문객을 반기고 있다.
오른쪽의 장승에는 “좋은 인연입니다”라는 한글로 쓴 문구가 보인다. 왼쪽 장승에는 “入此門來者莫存知解(입차문래자막존지해)”라고 한자로 쓴 글귀다. 이 글귀는 부산의 금정산 범어사의 불이문에서 주련으로 보았던 그 글귀이다. 글귀가 반가운 경우도 있나보다.
일주문 밖에 있는 안내판에 써놓은 해석에 따르면 ‘이 일주문을 들어오는 사람은 세속적인 생각, 분별하는 생각을 버리고 오직 한마음으로 진리를 생각하여 불법에 귀의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부처님의 세계에 들어왔음을 알리는 것이니 맑은 마음으로 구경하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완주 송광사 금강문(完州 松廣寺 金剛門)- 전라북도의 유형문화재 제173호
송광사 경내로 들어가면서 일주문을 지나 다음으로 만나는 이 금강문은 조선 후기에 지은 건물이다. 금강문은 인왕문이라고도 부르며, 문 양쪽에는 손으로 권법을 짓거나 금강저 또는 칼, 창을 손에 든 금강역사를 모셨다.
왼쪽에는 밀적금강, 오른쪽에는 나라연금강을 모셨는데, 입을 벌리고 있는 것을 아금강역사,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은 우금강역사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금강문을 지나면서 금강의 지혜로 모든 번뇌를 쳐부수어 완전한 행복의 세계 즉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가라는 뜻이 있다.
송광사 금강문은 금강역사를 모시는 문으로 일주문 다음에 있는 문이다.
일반적으로 금강문은 새날개 모양으로 장식된 익공양식의 공포와 지붕 옆모습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되어있어 규모도 작고 화려하지 않다. 그러나 이 건물은 다포계 팔작지붕으로 처리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앞면 3칸· 옆면 2칸으로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 건물이다. 지붕 천장을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양식이고, 천장은 뼈대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연등 천장이다.
금강문 편액 글씨는 이곳 서예가 우관 김종범(宇觀 金鐘凡)의 글씨로 예서체인 글씨가 독특하다.
금강문은 불법을 수호하는 금강역사를 모시는 문인데, 앞면 3칸 중에 가운데 칸이 출입구이고, 조선후기 금강문에는 중앙 통로 좌우로 두명의 금강역사와 문수보살, 보현보살이 함께 봉안되어 있다.
금강문엔 금강역사 한 쌍과 함께
하얀 꼬끼리를 탄 보현보살과
금강역사와 사자를 타고 있는 문수보살 이다.
금강문 지나면 만나는 문수. 보현동자 狀
절 밖에 있어야 할 당간지주가 경내에 있는 것을 보니 이것도 일주문 처럼 옮겨온 것이리라...
천왕문은 사천왕을 모시는 곳...
송광사는 사천왕을 모신 곳을 천왕문으로 하지 않고 천왕전으로 건축하여 이곳은 여닫는 문으로 되어 있다.
병술년 가을에 쓴 송헌(松軒)거사의 글씨가 멋지다.
천왕문 벽의 그림은 비천신도무. 비천나발주악도 인데 대웅전 천정의 비천도를 묘사한 작품이라고 하며 원본은 대웅전 안에 있다고 한다.
오른쪽의 비천신무도
왼쪽의 비천나발주악도
송광사 사천왕상 (보물 제 1255호) 은 소조상으로 국내 최고의 조형미 구비했다.
이 사천왕상은 조선시대 사천왕상 가운데 가장 빼어난 작품성을 지닌 조각상이다. 정확한 제작 연대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최소한 1649(인조 27)년 이전에 완성된 것은 확실하다고 보고 있다.
송광사 사천왕상은 임진왜란 이후에 행해진 일련의 사찰 재건 사업에서 당시 팔도 도총섭(八道都摠攝)이었던 벽암각성 대사(碧巖覺性大師)가 주도한 장인 계열을 중심으로 제작하였던 승주 송광사, 화엄사와 더불어 동시대에 만들어진 작품이다.
이 세 사찰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벽암 문도들이 임진왜란 당시 의승군의 활동이 활발하였다는 점에서 사천왕의 호국·호법 정신과 맞닿아 있다.
이 상은 조선 후기 사천왕상 가운데 작품의 완성도가 가장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전체적인 신체의 균형이 조화로울 뿐만 아니라 재질이 소조이기 때문인지 얼굴의 주름살까지도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높이 4.2m. 활달한 몸의 움직임과 함께 분노상이 잘 드러난 얼굴 표정은 이 작품의 우수성을 대변하고 있다. 4위(位) 모두 한쪽 다리는 악귀가 받들고 있고 다른 한쪽 다리는 수직으로 내리고 있다.
1994년 10월 사천왕상 개채 보수 작업 중에 보탑을 든 사천왕상의 보관 끈 뒷면과, 왼손에 받쳐 든 보탑의 밑바닥에서 묵서의 명문이 발견되었고, 여러 점의 복장품들이 나왔다.
보관 끈에는 “順治乙丑年十月日畢金山畵面主造?爲?(순치을축년시월일필금산화면주조?위?”라고 씌어 있었다. 송광사 개창비에는 숭정(崇正) 병자(丙子)년에 법당과 동서 재료(齋寮)를 완성하고 단청을 시채(施彩)하였으며 천왕전은 궁인(呂仁)이라는 승려에 의하여 완성되었다고 한 점으로 보아 1636년과 1649년 사이에 사천왕상이 제작되었음을 시사한다. 보탑 밑바닥에는 건륭(建隆) 51년(1786)에 중수하였다는 사실이 적혀 있다.
복장품으로는 용, 보주를 든 사천왕상을 제외한 3위(位)의 천왕상의 등 부분 속에서 법화경과 화엄경을 비롯한 경전류와 후령통 등이 나왔다. 경전류로는 정강(靖康) 정미(丁未)년(1129)과 천계(天啓) 8년(1443)에 제작된 귀중한 목판본이 포함되어 있다.
남방세계를 수호하는 증장천왕은 왼손에는 모든 일을 뜻대로 이루어지게 하는 여의주를, 오른손에는 진리를 지켜주는 용을 감고 있다.
서방세계를 수호하는 광목천왕은 왼쪽에는 부처님의 깨달음을 상징하는 탑을,오른손에는 악을 물리치는 창을 들고 있으며, 악인에게 겁을 주면서 수행을 하도록 깨우쳐 주고 있다.
오른손에 당을 쥐고 왼손엔 보탑을 올려놓은 서방 광목천왕이 쓴 보관의 뒷면에 조선 인조 27년(1649)에 조성된 것을 알 수 있는 글이 쓰여 있는데 제작 연대가 확실해서 조선시대 만들어져 버린 소조사천왕상의 기준이 되기 때문에 높이 평가받는 것이다.
병자호란 이후 국난극복의 강한 의지를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도 사천왕상이 지녀야 할 분노와 용맹의 표정을 잘 나타내고 있다.
북방다문천왕과 동방지국천왕
대웅전을 기준으로 오른쪽에는 동방 지국천왕과 북방 다문천왕이 있다.
동방 지국천왕은 동방세계를 수호하고 대개 왼손은 주먹을 쥐고, 오른손에는 팔꿈치를 높이 쳐들어 삿됨을 물리치는 칼을 들고 있다. 입을 달고 있으며 선한 이에게 복을 주고 악한 이를 벌하는 천왕이다. 북방 다문천왕은 양손으로 비파를 들고 있다. 입을 벌리고 있으며 어둠을 방황하는 중생을 깨우쳐 주고 있다.
절에 들를 때마다 칼을 잡고 금방이라도 내리칠 것 같은 동방 지국천왕 옆에서 태연히 비파를 연주하게 되는 다문천왕의 태평스러움에 혼자 빙긋 웃곤 한다. 그가 연주하게 되는 곡을 마음으로 들을 수 있는 경지에 이를 수 있으면 그때 내 마음은 얼마나 평화로울 것인가?
송광사를 들어갈 때는 이곳 천왕문으로 들어가고 들어와서 안쪽으로는 천왕전이라는 편액을 본다...
완주 송광사 포대화상의 미소가 하루의 피로를 풀어주는듯 하다.
일반적으로 천왕문을 지나면 불이문에 이르고, 불이문을 지나면 중심 법전인 대웅전 앞마당이 나타난다. 그러나 이곳은 불이문을 따로 두지 않고 바로 경내의 마당이다.
넓은 천왕문에 들어서니 시야가 탁트인다. 넓은 마당이 한눈에 들어온다.
넓은 마당의 왼쪽으로 십자형 형태의 2층 건물인 범종각이 있다. 일주문, 금강문, 천왕문, 대웅전이 줄을 맞춰 똑바로 서있다. 그리곤 다른 전각들이 띄엄띄엄 놓여 있다.
완주 송광사 대웅전 (보물 제 1243호)
완주 송광사 대웅전(完州 松廣寺 大雄殿)은 조선시대의 건축물이다.
이 건물은 송광사의 중심 법당으로 신라 말기에 보조스님이 처음 지었다고 전한다. 원래 이층 법당이었는데 조선 철종 8년(1857년)에 재봉스님이 일층 건물로 다시 세웠다.
송광사는 통일신라 경문왕 7년(867)에 도의가 처음으로 세운 절이다. 그 뒤 폐허가 되어가던 것을 고려 중기의 고승 보조국사가 제자를 시켜서 그 자리에 절을 지으려고 했지만, 오랫동안 짓지 못하다가 광해군 14년(1622) 응호· 승명· 운정· 덕림· 득순· 홍신 등이 지었다고 한다. 이후로도 인조 14년(1636)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절의 확장공사가 있었고 큰 절로 번창하였다.
대웅전은 절의 중심이 되는 건물로, 기록에 따르면 조선 인조 14년(1636)에 벽암국사가 다시 짓고, 철종 8년(1857)에 제봉선사가 한 번의 공사를 더하여 완성하였다고 한다.
앞면 5칸· 옆면 3칸 규모에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다른 건물에 비하여 가운데 칸이 비교적 좁고, 문 위 벽면에 그림을 그려 넣은 것이 특징이다.
이 건물에서 특히 눈이 가는 곳은 상인방 위에 꾸며진 벽화이다. 보통의 경우 상인방과 창방의 사이에는 빗살무늬의 창인 교창으로 꾸미는데 이곳의 경우는 벽면으로 구성하여 한 칸에 3 점씩 15 점의 벽화를 그려 넣었다. 대웅전의 측면과 후면도 같이하였다.
'대웅전·의창군서’라고 쓰인 현판은 선조 제8왕자 광해군의 동생 의창군 광(義昌君 珖)이 쓴것이다.
의창군은 선조의 8번째 아들이며 광해군의 동생이다. 인조 14년(1636)에 세운 송광사개창비의 글도 의창군이 썼다. 현판은 이때에 쓴 것으로 보이는데 대웅전을 세운 시기를 아는데도 참고가 되고 있다.
소조삼불좌상 및 복장유물(보물1274호)
대웅전에 모셔진 부처님으로서는 규모가 매우크다.건 물 안쪽에는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아미타여래와 약사여래를 각각 소조(흙으로 빚어서)로 함께 모셔 놓았는데 진묵대사 점안하였다 한다.
대웅전에 모셔진 소조삼불좌상 중의 오른쪽에 있는 아미타 여래좌상은 국가에 나쁜 일이 생길 때마다 땀을 흘리는 불상으로 유명하다.
대웅전의 내부는 평주열보다 뒤로 후퇴시켜 4개의 고주를 세우고 후불벽을 친 후 그 앞에 가로 3칸, 세로 1칸 크기의 수미단을 구성하고 거대한 삼세불을 봉안하여 법당의 내부가 상대적으로 좁아 보인다.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불단 바라보며 좌에 아미타여래와
우에 약사여래를 모셨다.
삼세불 각각은 수인을 제외하고는 동일한 형식의 좌상이다. 머리는 예리하고 촘촘한 나발(螺髮 : 부처의 머리카락. 소라 껍데기처럼 틀어 말린 모양)이지만 육계(肉髻 : 부처의 정수리에 있는 뼈가 솟아 저절로 상투 모양이 된 것)의 윤곽이 불분명하다. 중앙 계주(中央髻珠)에 비해 정상 계주(頂上髻珠)는 작은 편이다. 얼굴은 넓적한 직사각형으로 크게 뜬 눈과 사다리꼴 모양의 두툼한 코가 인상적이다. 꽉 다문 작고 얇은 입가에는 밝은 미소를 머금었다
밋밋한 가슴 등 신체는 볼륨이 약화되었다. 여기에 걸쳐진 옷자락은 도식화되었지만 그 흐름이 복잡하면서도 유려하여 소조불 특유의 질감이 돋보인다. 법의(法衣)는 통견(通肩 : 어깨에 걸침)으로 착용하였다. 하지만 일반적인 착의법과는 달리 옷깃이 왼쪽 어깨에서 흘러내려 복부를 돌아 오른쪽 어깨 위로 덮인다. 마치 옷을 착용한 뒤 오른팔을 소맷자락에서 빼낸 듯한 특징적인 모습이다.
가슴 위로 노출된 군의(裙衣)는 상단이 평행이고 세 겹으로 접혀졌으며 이를 묶은 허리띠는 두 줄로 규격화되었다. 도식적인 골주름이 새겨진 오른쪽과는 달리 가부좌(跏趺坐)한 왼다리 위에는 왼쪽 손목을 감싸고 흘러내린 옷자락을 물결형으로 드리워 변화를 주었다.
중앙의 석가불은 오른손은 무릎 밑으로 내려 손가락을 펴고 손바닥을 안으로 하여 땅으로 드리우는 손 모양을 맺었다. 왼손은 무릎 위에 놓고 장지와 약지를 구부려 엄지와 맞대었다. 약사불은 오른손을 가슴 위로 들고 왼손은 무릎 위에서 약호(藥壺)를 쥐었으며, 아미타불은 중품하생인(中品下生印)을 맺었다.
거대한 세 부처님이 모여 계신 이곳은 천정이 곧 닫을듯 하건만 크게 답답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절 앞 넓은 마당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한껏 매달리고 싶은 우리의 마음을 거대 부처님조성을 통해 나타낸 것일까? 온갖 추측을 하게 된다.
송광사 대웅전에 있는 3개의 전패 중 중앙에 있는 목패는 임금의 것인데 주홍 바탕에 금니로 '주상전하수만세(主上殿下壽萬世)' 라고 쓰고 상부와 명문 좌우에 총 다섯 마리의 용을 누각했던 것이다. 오색구름 속에서 꿈틀거리는 용 무늬가 아름답고 섬세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연꽃과 그림 그리고 왕을 상징하는 용무늬로 화려하게 장식하였으며, 특히 왕을 상징하는 중앙 나무패에 있는 구름과 용이 섞인 그림은 불교 미술의 극치를 보여준다.
목조삼전패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70호)
얼른 소조삼존불에서 눈을 떼고 불상 사이에 세워진 전폐로 시선을 돌린다.
불교사찰에서 사용되어 온 패는 불보살의 명호를 적은 불명패, 경전의 이름을 새긴 경패, 불법승을 우러러 새긴 삼보패, 망자의 명호를 적어넣는 위패, 국태민안과 소원성취 등의 발원문을 쓴 원패에 이르기까지 그 경우가 참으로 다양하다.
전라북도 완주군 송광사 대웅전 삼존불 사이 앞쪽에 있는 나무로 만든 3점의 패(牌)이다.
대웅전 삼존불상 사이에 있는 이 나무패 세 개는 17세기에 만든 것으로, 이 삼전패는 목패, 원패라고도 한다.
마치 조각하고 채색한것이 비단에 자수를 놓은 듯한 분위기이다.
뒷면에는 각각 주상전사수만세, 왕비전하수제년, 세자전하수천추라고 적혀 있는데, 인조 임금과 왕비, 그리고 소현세자 봉림대군의 안녕을 빌어드린 조각이다.
인조는 병자호란을 맞아 어지러운 민심과 피폐해진 재정을 회복하고자, 최고 승병대장인 16도청섭 벽암 스님과 승병을 보내 송광사를 대대적으로 복원하고 이 절을 호국원찰로 삼았다.
모두다 왕, 왕비, 왕세자의 만수무강을 비는 내용이다.
송광사 대웅전의 신중탱
불상 위 천장에는 간단한 운궁형 천개를 가설하였다. 천장은 중앙 3칸이 우물천장이고 주위는 빗천장이다. 중앙의 천장에는 칸마다 돌출된 용조각, 판형으로 새겨 부착한 게, 물고기, 거북 등이 있고, 빗천장에는 주악비천도가 선명하게 그려져 있어 마치 천장 전체가 하나의 천개처럼 법당 안을 장엄한다.
대웅전 천장에는 부처의 진리를 찬탄하며 부처에게 음성과 춤 공양을 올리는 11점의 비천상이 그려져 있다. 다른 사찰의 벽화와 달리 채색과 선이 완벽하게 살아 있으며, 한국민중예술과 불교 미술이 함께 어우러진 아름다운 천장 벽화이다.
마음을 차분히 하고 대웅전 안을 서성이다 보면 11명의 선녀들을 만날 수 있다....
이곳은 천정이 아름답다.
완전히 바다세계를 보는 듯하다. 9마리의 용은 기본, 물고기, 게, 거북이..
공간마다 차지하고 있는 그림들.. 각종 악기를 연주하고 소리없는 그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고..
한동안 천정을 쳐다보고 있자니 보물찾기 하는 기분이다. 곳곳이 그림들이다.
대웅전 불단 뒷벽의 팔상도
공포는 다포계 구조이다. 주칸마다 한 조씩의 간포를 배치하였다. 외 3출목 내 4출목 구조로서 살미는 가늘고 곡선진 앙서형이며 내부는 모두 연봉을 초각하여 장식하였다.
그러나 후면의 공포는 좌우 퇴칸을 제외한 어칸과 협칸의 쇠서 모양이 화암사 극락전 배면의 공포 하앙재와 같이 사절(斜截)하여 간략히 처리되었다. 전면에 비해 후면의 공포를 약화시키는 것은 조선 후기의 일반적인 경향이다.
대웅전 앞의 오래된 석물 거북돌은 ' 화강대'가 아닐까 생각한다..
대웅전 문살
송광사 대웅전의 외부 벽화
대웅전의 측면, 후면 벽에는 이렇게 벽화가 그려져 있다. 큰 그림은 비천상인데 대웅전 내 천장에 그려진 비천상을 모사하여 이렇게 외벽에도 걸어 놓았다.
이 모든 비천(날아가는 천사)상이 대웅전 안에 실재하고 있다. 송광사는 보는 이들의 편의를 위해
이 그림들을 선명하게 그려 대웅전 외벽에 전시하고 있다.
송광사에서 주악비천도를 널리 알리는 노력이 참으로 정성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모사도를 통하여 방문객이 쉽게 그림을 대할 수 있도록 한 것이 포교라는 측면에서도 적극적임을 알 수 있다.
비천횡적주악도
가느다란 눈에 작은 입술과 둥글고 통통한 얼굴, 굵은 팔에 가는 손가락, 정갈하게 빗은 머리칼은 전형적인 선녀상이다.
비천장고무
장고를 들고 군관모자 비슷한 형태의 보관을 쓰고 있다.
천도헌정무
천도는 도가에서 많이 등장하는 소재인데, 여기서는 사실적으로 그리지 않고, 여성의 가슴모양으로 그려져 있다.
비천나발주악도
선녀들의 전형적인 머리모양을 하고 있다. 비천의 움직임을 드려내려는 의도보다는 아기자기한 장식으로 여성미를 강조하고 있다.
비천비상무
춤을 추어 부처에게 공양하는 남성적인 여성을 표현했다. 휘날리는 천의와 뛰어 오르는 몸동작이 하나되어 매우 힘이 넘쳐 보인다.
비천당비파주악도
당비파를 오른쪽 무릎에 올려 놓고 연주를 하며 부처님께 공양하는 장면이다.
비천타고무
북을 길게 어깨에 메고 양손에 화려한 부채를 들고 있는 비천상이다. 화려하고 복잡한 구성이 돋보인다.
비천바라무
날카로운 각이 많아 딱딱한 형상을 이루지만, 바라 앞으로 휘날리는 천의가 둥근 원을 그리며 날리는 모습으로 부드러운 인상을 준다.
비천신무도
날카로운 눈매가 검무를 추는 인물의 내면 심상을 잘 나타내고 있다.
비천무당무
불교가 도래하면서 민속신앙을 수용하게 되는데, 이는 무속춤이 불당 안에 들어와 있는 매우 드문 경우에 해당한다. 발에 버선을 신겨 춤 공양임을 강조하고 있다.
비천승무도
의상이 단조롭고 꾸밈이 별로 없는 상태에서 묵선이 강조돼 색채보다는 선에 의해 그림이 결정되고 있다. 주름진 얼굴에 입술을 빨갛게 발라 해학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대웅전에 뒷문도 있었다.
송광사 대웅전에는 동. 서. 남. 북면에 각각 다른 현판이 걸려 있는데 동쪽면에는 ' 琉璃光殿 (유리광전)'이란 편액이 걸려 있다.
서쪽면에는 '無量壽殿 (무량수전)'이란 편액이 걸려 있고
북쪽면에는 '普光明殿(보광명전)'이란 편액이 걸려 있다.
대웅전의 뒤편에도 나한전과 삼성각 사이의 공간에 쉼터를 조성하였다.
대웅전 주련
불신충만어법계 (佛身充滿於法界) 부처님은 온 세상에 가득해서
보현일체중생전 (普現一切衆生前) 널리 모든 중생들 앞에 나타난다네
수연부감미부주 (隨緣赴感靡不周) 연따라 두루 나아가 감응하지만
이항처차보리좌 (而恒處此菩提座) 항상 깨달음의 자리를 떠난 적이 없구나
천상천하무여불 (天上天下無如佛) 천상과 천하 어디에도 부처님 같은 분 안 계시고
시방세계역무비 (十方世界亦無比) 시방세계를 둘러봐도 역시 비교할만한 분 없도다
대웅전 왼쪽편으로는 1999년에 봉안한 거대한 석조미륵대불입상이 있다.
송광사 오층석탑(五層石塔)은 1998년에 건립 되었다.
완주 송광사 범종루 (보물 제1244호)
종루는 범종. 법고. 목어. 운판 등 사찰에서 의식때 사용하는 불전사물을 봉안한 곳이다.
일반적으로 종루나 종각이 사각형으로 지어지는데 반해 송광사 종루는 보궁에 주로 채택되는 십자형이라는 점에서 독특하다.
완주 송광사 종루는 종을 달아 놓은 십자형의 2층 누각이다. 종루나 종각은 보통 사각형 평면인데 비하여 십자형 평면을 취하고 있어 주목된다.
범종루(梵鐘樓) 현판은 산민 김용(山民 金鏞, 서예가) 선생의 글씨이다.
현존하는 건물 중에서는 창덕궁 부용정과 수원 방화수류정이 십자형 평면을 기본으로 하나 다른 건물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던 구조이다.
십자형은 내부 공간구성이 어려울 뿐 아니라 지붕을 구성할 때도 회첨이 많이 생겨 구조적으로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기단은 자연석을 외벌대로 돌렸는데 부분적으로 유실된 상태이며 서측의 기단은 흙에 묻혀있는 상태이다. 2층 누마루는 우물마루로 처리되었으며, 기둥 위에 창방을 걸고 그 위에 평방을 서로 반턱맞춤으로 결구하여 공포를 배치하였다.
종루에는 사물이 가지런히 자리하고 있다. 한쪽에는 사용하지 않는 범종이 하나 바닥에 놓여 있다. 문화재로 지정된 종인데 손상을 막기 위해 보존하고, 새로 만든 종을 매달아 사용하고 있다.
완주 송광사 동종 (전라북도의 유형문화재 제138호)
조선시대 만들어진 높이 107㎝, 입 지름 73㎝의 종이다.
종을 메다는 고리는 용이 여의주를 갖고 있는 형상이며, 옆으로 소리 울림을 도와 주는 음통이 있다. 종 윗부분에는 꽃무늬로 띠를 두르고, 아래 구슬 모양의 돌기가 한 줄 돌려 있다. 밑으로는 8개의 원을 양각하여 그 안에 범자를 새겨 넣었다.
몸통의 중심에는 머리 뒤에 둥근 광배를 두르고 보관을 쓴 보살 입상과 전패(殿牌)가 있고, 보살 입상 사이에는 사각의 유곽을 배치하였다. 유곽 안에는 9개의 꽃무늬로 된 유두가 있다. 종의 가장 아랫부분에는 덩굴무늬를 두르고 있다.
동종에 씌여있는 글을 통해 숙종 42년(1716) 광주 무등산 증심사에서 만들어졌으며, 그 뒤 영조 45년(1769)에 보수 하였음을 알 수 있다.
1977년 범종이 새로 조성되기 전까지 사용해 왔으나 이후 범종에 균열이 생겨, 1981년 두 차례에 걸친 균열방지 작업 후 타종이 불가능해져 현재와 같은 상태로 보관되어 있다 한다.
평면은 중앙에 범종을 걸고 사방으로 돌출된 4칸에는 법고, 목어, 운판을 매달아 기본 불구(佛具)를 갖추었다. 나머지 한 칸은 승강계단이 설치된 입구이다. 주간은 모두 8.15자(尺)로 일정하며 마루 주위에는 계자난간을 돌렸다.
공포는 다포계 구조이다.
내외 3출목의 공포를 주상과 주간에 1구씩 짜올려 빈틈없이 공포가 처마 밑을 받치고 있다. 출목간의 순각판은 내·외부 모두 생략되고 오제공 상단에 도리와 직각방향으로 널을 깔아 처리했다.
내부의 초가지에는 연봉, 연화, 봉두가 조각되었으며 회첨귀한대 내부 제공은 모두 교두형으로 처리되었다. 특히 내부에서는 짜 올라간 공포로 별도의 천장 없이 천개식(天蓋式) 구성을 하여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벽이 없는 건물로 벽화는 없다.
지붕은 평면형에 맞추어 십자형 팔작지붕을 구성하고 직교하는 용마루의 중앙 교차점에 절병통을 얹어 마무리하였다. 기와는 신재로 교체되어있는 상태이며 용머리기와 및 망와는 일부가 옛 형태를 가지고 있다. 단청은 외부는 모로단청, 내부는 모로단청과 긋기단청이 혼용되었다.
송광사 종루는 기단 위에 12개의 기둥을 세워 완전한 십자형 누각을 구성하였다. 누하주(樓下柱)는 굵은 나무를 민흘림을 주어 8각으로 치목하였고 그 위에 다시 원기둥을 세워 2층 누각을 지지하고 있다.
이 건물은 건물의 규모에 비해 공포대가 크고, 중첩되는 살미선과 아름답게 치켜 올라간 추녀선 그리고 계자난간 등이 어우러져 마치 정교한 공예품과 같다. 공포는 화려하지만 가냘프게 휘어 올라간 앙서형 살미와 양끝이 사절된 교두형 첨차 등으로 인해 섬약해 보인다. 대웅전 공포와 비교해 볼 때 장식적 수법은 덜하지만 쇠서의 앙각 등 전체적인 분위기가 비슷하여 대웅전이 중건되던 시기에 같이 건축된 것으로 보인다.
종루에 달려 있는 풍경
좌로부터 첨성각. 지장전. 종루
대웅전을 중심으로 좌측에 지장전과 극락전이 위치한다.
극락전
대웅전을 중심으로 좌측에 위치한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단층 맞배지붕 건물로 공포를 사용하지 않고 대들보 위에 바로 도리를 얹은 단순한 구조로 되어 있다.
극락전에 봉안되어 있는 아미타 삼존불은 아미타불은 중심으로 좌우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협시를 이루고 있다.
대웅전 우측에 있는 지장전이다.
지장전 두번째, 네번째 화반벽 (기둥과 기둥 사이 문 위에 창방과 장여 사이의 구조물) 에 불교를 상징하는 문양이나 불화가 아닌 단청도 안한 도깨비 부조로 되어 있어 연이은 파격이 잘 기획된 연출 같은 느낌이다.
지장전이 넓직하고 환하다. 평지사찰이다 보니 크게 공간 제약을 받지 않았을 수도 있고 넓직해서 우선 답답하지 않아서 좋았다.
지장보살님도 훤칠하시고... 좌우보처인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이 그렇게 큰 몸집인것도 처음 보았다.
완주 송광사 지장전 소조지장보살삼존상 및 권속상 일괄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68호)
송광사 지장전에는 지장보살삼존상, 시왕상 10구, 동자상 8구, 귀왕 및 판관상 6구, 장군상 2구로 구성된 총 31구의 상이 벽면을 따라 배치되어 있다. 1993년에 지장보살좌상에서 발원문이 출토되어 명부전 권속들의 제작 시기를 알 수 있다. 발원문에 의하면 명부전 존상들은 승명(勝明)이 주도하여 1640년에 조성되었다.
지장전 화주(化主) 승명은 송광사를 중창한 6명의 승려 중의 한 명이자, 1641년 대웅전 소조삼세불좌상의 불상대화사(佛像大化士)로도 이름이 나와 송광사의 중창에 꾸준히 관여를 했던 승려임을 알 수 있다.
목조 지장보살좌상은 어깨가 넓고 허리가 긴 장대한 체구를 보인다. 지장보살좌상은 오른쪽 팔을 어깨 높이까지 올리고, 왼팔은 복부 앞에 두고 있다. 따로 제작된 양손 모두 엄지와 중지를 맞댄 수인을 결하고 있다. 지장보살좌상의 두상은 원형에 가까운 형태이다. 상호는 눈초리가 올라간 눈, 높게 솟은 코, 좁은 인중과 양 끝이 살짝 올라간 입술로 구성되고, 목 아래에는 완만한 삼도가 새겨져 있다. 특히 양미간에서 코끝까지 곧게 내려오는 코로 인해 이목구비가 명확하게 보인다. 지장보살좌상은 승각기, 편삼, 대의를 걸친 전형적인 조선 후기 착의법을 따르며 주름은 깊은 선으로 간략하게 표현되었다.
흙으로 빚어 조성된 지장보살은 나무로 만든 연꽃무늬 대좌 위에 모셔져 있다.
지장보살은 지옥의 중생이 모두 구제되고 한사람도 지옥으로 가지 말기를 바라며 지옥중생이 모두 성불한 다음에 성불하겠다는 서원을 세웠다.
지장 보살상 속에서 발견된 기록에 따르면, 1640년에 지장보살삼존상과 시왕상 등이 함께 만들어졌다. 옆에 10왕님들이 모셔져 있다.
지장보살의 좌우로는 무독귀왕과 도명존자가 협시한다. 무독귀왕은 정면에 보상화문이 있는 원류관 형태의 관모를 쓰고 있으며 턱이 긴 얼굴에 수염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다. 무독귀왕은 양손을 비단으로 감싼 채 보함을 들고 있다. 무독귀왕의 가늘게 뜬 눈과 전반적인 이목구비와 전신을 덮는 단령포, 의대, 수직으로 흘러내린 광다회와 세조대를 걸친 모습은 시왕상들과 큰 차이가 없다. 젊은 비구 형상의 도명존자는 장삼과 법의를 걸치며 양손을 합장하고 있는 모습이며 전반적인 이목구비는 지장보살좌상 보다 좀 더 온화한 인상을 풍긴다.
지장보살님을 중심으로 좌측 시왕들...
10구의 대왕들은 모두 의자에 앉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반복된 자세가 없다. 진광대왕, 초강대왕, 염라대왕, 오관대왕은 모두 홀을 쥔 모습이지만 세부적인 손의 형태에서 차이점이 발견된다. 진광대왕과 초강대왕은 오른손이 왼손을 덮으며 홀을 쥐지만, 염라대왕과 오도전륜대왕은 한 손을 다른 손 위에 살짝 올린 채 홀을 쥔다. 홀을 쥐지 않는 태산대왕은 반가좌를 하고 수염을 쓰다듬는 자세이고, 도시대왕은 암석을 밟은 채 무릎 위에 오른손을 뻗고 있다. 변성대왕은 의대를 쥐고 옷매무새를 고치고 있고, 평등대왕은 오른손으로 관모를 살짝 쓰다듬는 모습이다.
지장전 내부에는 지장보살과 10대 시왕이 모셔져 있으며 업경대가 있다.
지장보살님을 중심으로 우측 시왕들...
지장전은 전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로 1999년 신축되었다.
지장전 좌측면 모습이다.
지장전 우측과 소대
지장전의 뒷쪽 모습으로 시원스런 공간과 곳곳에 쉼터가 있고 송광사 담장 너머는 대나무가 안온하게 감싸고 있다.
지장전 뒷편에 병풍처럼 서 있는 산봉우리들...
완주 송광사 나한전(完州 松廣寺 羅漢殿)- 전라북도의 유형문화재 제172호
이 건물은 조선 효종 7년(1656년)에 지은 것으로 보이는데, 규모는 앞면 3칸· 옆면 3칸으로 옆면 지붕선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 건물이다. 또한 지붕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으로 되어있다.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짜맞추어 천장 윗부분을 가리게 꾸민 우물천장이다.
근래에 몇 차례 보수하면서 천장과 서까래 일부의 변형이 있었지만, 기본 구조와 부재는 원형을 유지하고 있어 17세기 사찰 건물이 갖는 주된 특징을 보여주고 있고 전체적인 모습으로 볼 때 현재 건물은 20세기 초를 전후로 고친 것이다.
낮은 받침부위에 커다란 자연석 주춧돌을 놓고, 위아래 굵기의 변화가 없는 반듯한 둥근 기둥을 세웠다. 벽에는 돌아가며 벽화를 그려 놓았으며, 전체적인 건물의 모습은 단정하고 균형이 잡혀있다
본존인 석가여래좌상은 어깨가 넓고 허리가 긴 장대한 체구를 보인다. 석가여래좌상은 육계의 구분이 없는 둥근 형태이다. 머리의 중앙에는 반원형에 가까운 중간계주가, 정상에는 원통형의 정상계주가 조각되어 있다. 석가여래좌상의 상호는 넓은 미간, 두툼하게 솟은 눈두덩이, 반개한 눈과 오뚝한 코, 살짝 미소를 머금고 있는 입술로 구성된다. 착의법은 대의를 걸친 편단우견식으로 착의하여 오른쪽 어깨를 가렸지만 오른팔은 드러나 있다. 가슴을 가린 승각기는 살짝 주름이 잡혀 있으며 하반신에는 좌우 4가닥씩의 큰 주름이 펼쳐져 있다.
송광사 나한전 내부에는 목조 석가여래좌상을 중심으로
좌측에 좌측 미륵보살과
우측에 제화갈라보살 이시다.
좌우 협시보살좌상의 착의방식은 이형대칭으로, 좌측 미륵보살은 승각기·편삼·대의를 걸친 가사를 걸쳤고, 우측 제화갈라보살은 천의를 입고 하반신에는 각대를 착용하고 있다. 좌우 협시는 모두 보상화문, 화염, 구름문양으로 장식된 보관을 쓰고 있고, 귀걸이와 팔찌를 두르고 있다. 좌측 미륵보살의 상호는 본존과 비슷하지만 두상을 타원형으로 조각하였고, 우측의 제화갈라보살은 방형의 얼굴에 눈두덩이와 양 볼의 양감이 훨씬 줄어들었고 눈 윗꺼풀을 길게 표현하였다.
우협시불 제화갈라보살과
16나한과 오백나한· 인왕상· 동자상·사자상을 모시고 있다.
16나한상은 암석 대좌 위에 결가부좌, 반가좌, 유희좌 등 다양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나한상들은 해태, 호랑이, 학, 용, 코끼리 등과 같은 서수나 동자들과 함께 있는 모습이다.
좌우 제석은 보관을 쓰고 소매가 긴 포를 입고 조끼와 같은 하피(霞帔)를 걸쳤다. 길게 흘러내린 소맷자락은 좌우의 동자들이 들고 있다. 좌우 사자는 모두 갑옷을 입고 있는 무장의 모습이다. 좌측 사자는 해태 얼굴이 새겨진 두건을 쓰고 있으며, 오른쪽 사자는 뿔이 2개 솟은 듯한 모자를 쓰고 있다. 나한전 벽면에는 20~40㎝ 크기의 나한상들이 빼곡히 배치되어 있다.
중앙의 목조 석가여래좌상
좌협시불 미륵보살과
16나한과 오백나한· 인왕상· 동자상·사자상을 모시고 있다.
완주 송광사 나한전 목조석가여래삼존상 및 권속상 일괄(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69호)
석가여래(본존) 높이 192㎝, 제화갈라보살(우) 높이 181㎝, 미륵보살(좌) 높이 181㎝ , 526구 (삼존상 3구, 나한상 16구, 나한상 500구, 제석상 1구, 동자상 2구, 장군상 2구, 사자상 2구)
나한전. 화려하지 않고 서까래 끝머리와 부연에만 단청을 한 절제미에 더 눈이 간다.
나한전에 작은 쪽문이 정겹다.
나한전 좌측의 삼성각
어느 사찰이나 가면 대웅전의 뒷편이나 더 높은 곳에 삼성각을 둔다.
불교가 들어와 토착화되면서 우리의 전통종교를 존중하려는 뜻도 있지만 종교가 지향하는 지점이 같기에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의식에서 비롯 된 것이리라 생각한다.
독성
칠성
산신
삼성각은 불교 사찰에서 산신(山神)·칠성(七星)·독성(獨聖)을 함께 모시는 곳이다.
삼성을 따로 모실 경우에는 산신각·독성각·칠성각 등의 전각 명칭을 붙인다.
삼성을 함께 모실 때는 정면 3칸, 측면 1칸 건물을 짓고 따로 모실 때는 정면 1칸, 측면 1칸의 건물을 짓는다.
산신(山神)은 한국의 토속신 산신령에 해당하는 호법선신으로 산신이라는 인격신과 화신인 호랑이로 나타난다. 독성은 천태산(天泰山)에서 홀로 선정을 닦아 독성(獨聖)·독수성(獨修聖)이라 불린 나반존자(那畔尊子)를 일컫는다. 칠성은 수명장수신(壽命長壽神)으로 일컬어지는 북두칠성을 뜻하며, 본래 중국의 도교사상과 불교가 융합되어 생긴 신앙이다. 송광사는 이 삼성을 다 모시고 있다.
삼성각 옆에 있는 송광사 중창비
뒷쪽으로 송광사 요사 있었는데 홈의 가람배치도에는 향로전이라고 했다. 주지스님 요사인듯.. 앞쪽은 요사채로 쓰이는 첨성각이며 첨성각은 예전에 천체를 연구하는 건물이었다고 한다.
송광사 경내를 돌아보고 요사채로 쓰이는 첨성각 앞에 꾸며진 작은 정원으로 발길을 옮긴다. 대웅전 옆에는 편하게 걸터앉아 바람에 마음을 씻을 수 있는 세심정이 있다. 정자에 걸린 시를 읽어보며 잠시 쉰다..
정원은 인공 동산 형태로 조성하였는데 예쁜 꽃을 심는 등 정성을 들여 규모는 작지만 쉼터로 손색이 없다. 가운데는 ‘세심정’이란 편액을단 작은 정자를 세워 방문객이 편히 쉬면서 경내 전체를 조망하기 좋게 꾸몄다.
세심정에 앉아 있으니 불어오는 바람이 가슴을 깨끗이 씻어주는 듯하다.
보기만 해도 마음이 밝아지는 천진동자불
대웅전을 오른쪽 옆으로 돌아 뒤로 가면 나한전이 있고 나한전 옆으로 편액도 단청도 없는 약사전을 다시 돌아 나가면 아직 정리가 되지 않은 후원이 나온다.
새로 지었다고 하는 약사전이 있다. 아직 단청도 되어있지 않았고, 편액도 없었다.
대웅전 오른편 약사전 담장을 따라가면 사적비와. 부도전이 있다.
‘송광사개창비’가 있는데는 주변 정리 작업을 하려는지 다소 어수선하다. 이름 그대로 중창 작업을 마친 후에 그 과정을 소개하는 기록을 남긴 비이다. 1 636년에 세워진 이 비는 비머리의 앞면에는 비명이 기록대고 뒷면에는 사호선종대가람사(賜號禪宗大伽藍寺)라고 사찰의 성격을 밝히는 문구가 전서체로 새겨졌다.
부도밭 가는 길에 대리석으로 세워진 송광사 개창비 (전라북도의 유형문화재 제5호)
가다가 보면 먼저 절의 내력이 적힌 '송광사 중창비'를 만나게 해도 된다.
조선 인조 14년(1636)에 세운 비로, 선조의 부마였던 동양위 신익성이 비문을 짓고, 선조의 여덟번째 아들인 광해군의 동생 의창군 광(義昌君 珖)이 글씨를 썼다.
송광사 개창비는 창건불사가 마무리 된 1636년에 세워진 비로 불교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다.
송광사 뒷뜰에 놓여 있는 비로, 절의 개창(開創:절을 처음으로 세움)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형태는 거북받침돌 위에 비몸을 올리고 용을 새긴 머릿돌을 얹은 모습이다.
비의 앞면에는 비 이름과 비문이 새겨 있는데, 고려 보조국사가 전주 종남산을 지나다가 절터를 잡아놓고 제자들에게 절을 지을 것을 당부하였다는 내용과 보조국사에서 벽암대사에 이르는 스승과 제자의 계보가 주된 내용이다. 뒷면에는 송광사를 짓는데 참여했던 스님 가운데 한 분이었던 승명의 말을 인용하여 절을 짓게 된 경위 및 벽암대사의 제자와 시주한 사람, 개창 당시 기술자들의 이름을 기록하였다.
송광사의 험난했던 역사를 말하듯 개창비에는 한국 전쟁 때 입은 총탄자국이 선명이 남아 있다..
절의 성격을 알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자료이다.
비를 지나면 부도밭이 가지런히 자리하고 있고 그 가운데에 벽암선사의 부도도 있다.
대웅전 한 참 뒤편으로, 담 안에 사셨던 분들이, 지금은 담 밖에 계신다...
돌각담이 정겨운 부도밭은 16 기의 부도와 2개의 비가 나란히 서있지만, 아늑한 맛은 없다. 모두 석종형 부도로 푸근한 맛은 없지만 좀더 관심을 기울여 관리하였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모두 20여기의 부도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부도밭은 작은 대밭 아래 있다.
완주 송광사 승탑군은 대웅전에서 북쪽으로 약 130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 승탑군 주변은 돌담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120여구의 승탑과 2기의 비가 있다.
상당히 보존 가치가 있음에도 너무 방치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송광사는 부처님의 크기로 보나, 부도밭의 부도수나 넓은 절터로 보나 예전엔 대단한 절이었을것이다. 지금은 금산사의 말사이지만...
벽암당대사 부도비. 벽안당 부도. 벽허당 부도. 벽파당 부도. 무경당 자수대사 부도. 서봉대사 부도. 추계당 유문대사 부도. 허곡당 성심대사 부도. 목은당 법성대사 부도. 추월당 처일대사 부도. 선월당 상헌대사 부도. 대선사 해광당 부도. 한계 부도비. 기타 석종 부도 등 모두 20여기의 부도탑과 2기의 석비를 3열로 모셔 놓았다.
완주 송광사 벽암당 부도(完州 松廣寺 碧庵堂 浮屠) - 전라북도의 문화재자료 제144호
조선시대의 승려 각성(覺性)의 승탑이다.
벽암스님(1575 ~ 1660)법명은 각성(覺性), 호는 벽암(碧巖), 속성은 김씨, 충북 보은 출신이다.
10세때 화산(華山)의 설묵(雪默)을 스승으로 모시고 출가하여 14세에 스님이 되었다. 1593년 19세 때 승병에 가담해 자운(慈雲) 스님을 따라 해전에서 공을 세웠으며, 광해군때 봉은사에 머물면서 판선교도총섭(判禪敎都摠攝)이 되었고, 부휴(浮休)스님의 법을 이어 받았다.
인조때 남한산성축성시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이 되어 승군을 거느리고 축성작업을 감독, 3년만에 축성사업을 마쳤으며 보은천교원조국일도대선사(報恩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의 칭호를 받았다.
스님은 8원 81암자의 화엄사가 임진왜란으로 소실된것을 인조(1630 ~ 1636)때 대웅전, 보제루, 적묵당, 천왕문, 일주문 등을 중창하였다.
병자호란때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파천한 소식을 듣고 남도 의승 3천명으로 항마군을 조직하여 호남의 관군과 호응하여 북으로 올라가던 중 화의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도반인 고한(孤閑)스님과 더불어 화엄사로 돌아와 주석하시면서 그후 사신으로 임명되어 일본으로 가던 중도에 병으로 사퇴하고 화엄사에 와서 후학을 지도하시던 중 이곳에서 입적하시니 세수는 86세요, 법랍은 72세요, 법 제자로는 백곡처능(白谷處能)이 있으며 화엄사와 완주 송광사, 해인사 속리산 법주사에 부도탑을 세웠다.
설허당 지장대사 부도
碧虛堂(벽허당) 부도
화강암의 지대석 위에 세워진 석종형 부도. 상륜부는 별도로 조성하여 올려 놓았는데 높은 괴임대를 마련하고 그 위에 보주를 돌출시킨 형태이다.
벽허당 당호를 음각했다.
碧岸堂(벽안당) 부도
부도탑의 윗면에 16판의 단엽 연화문을 돌려 장식했고 정상의 보주까지 모두 1石으로 조성하였으며 보주의 아래에는 연주문을 올렸다. 그 밑으로 또 한단의 지붕형태를 하다.
탑신에 벽안당이라는 당호를 음각했다.
추월당 처일대사 부도
허곡당 성심대사 부도
대선사 해광당 부도
이 석물은 예전에 명부전(지금은 지장전을 새로이 신축) 앞에 세워져 있었으며 지대석과 그 위에 연화석으로 하대를 마련 단엽 복판의 연꽃문양이 간결하다.
돌꽃이 피어 명문도 희미하여 잘 알아볼수 없어 좀더 관심을 기울여 관리하였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는 송광사 부도를 뒤로 하고...
부도 앞에서 보조국사와 벽암스님 이야기를 떠올리며 천천히 걸어서 다시 대웅전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 온다..
대웅전 바라보며 좌측, 관음전 옆의 완주 송광사 종무소
종무소 담밑에는 예전 물건인듯 한것이 있었다.
대웅전 바라보며 좌측 종무소 옆의 관음전
마당을 사이에 두고 지장전 맞은편 종각뒤에 정면 7칸. 측면 3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관음전 내부에 관음보살을 모셨다.
관음전은 탐플스테이 공간 및 공양간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관음전의 종무소쪽 측면
송광사는 큰스님과 세상사는 이야기를 나누고 부처님 앞에서 108배 하며 큰 마음으로 살아 갈것을 약속하는 템플스테이를 운영하고 있다.
관음전 뒤쪽과 템플스테이 장으로 사용되는 곳인 적묵당이 관음전 옆으로 있다.
요사로 사용중인 적묵당 마주보는 보현당
보현당 뒤쪽으로 장독대가 있고 고운 햇볕에 다시마를 말리고 있었고 장독대 담장너머로 약사대불과 5층석탑이 보인다.
대웅전 마당에서 바라본 전경이다.
이제 송광사를 나서야 할 시간이...
종각 옆에 있는 석조로 가서 물 한 바가지를 떠 마신다.
차디찬 물이 폐부를 찌른다. 언제 이 절에 와서 다시 이 물맛을 볼 수 있을까? 조금만은 감상에 젖어 가람을 되돌아 보고 먼 산들을 바라본다.
봄 숲도 정갈하다. 쓸쓸하기 때문에 정갈한 편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어쩐지 정갈해지게 보여지는 사람은 어딘가 모르게 쓸쓸해 보이는 사람이다.......
요즘의 절은 자꾸만 사람의 마음을 닮아간다.
사람의 마음을 닮아서 규모를 키우는데 급급하고 사람의 마음을 닮아 꾸미기를 좋아한다. 사람들은 절의 마음을 닮으려 바쁜 시간 내서 절에 오는 법인데 본말이 뒤바뀐 셈이다. 어느 때는 절도 하나의 바람이다. 아주 스산해질 수 있게 불어오는 바람이다.
송광사를 들어올 때는 이곳 천왕문으로 들어오고 나갈 때는 천왕전이라는 편액을 보면서 나간다...
절을 빠져나오기 전에 다시 한 번 천왕문에 들른다.
다문천왕이 연주하는 비파소릴 들으려 두 귀를 쫑긋 세운다. 어디선가 칼칼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누구신데 제 비파 소릴 들으려 하십니까?
절이 쓸쓸할 정도로 조용하다. 말 그대로 절 속 같다. 그래서 마음을 채우려주고 찾은 절에서 마음의 공동만 확인하고 간다.
완주 송광사 금강문도 나와서..
이제 마지막문 일주문으로 향한다..
일주문 나서기 전에 돌아본 송광사 전경이다.
일주문을 나와 보물과 문화재가 그득한 완주 송광사를 다시 한번 되돌아 본다..
송광사 주변의 고인돌도 찾아보고 이제 주차장으로 향한다
완주의 송광사는 평지의 넓은 절이었다.
요즈음 사찰을 탐방하다 보면 예전과 많이 달라진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전에는 사찰이 기본으로 갖추는 전각과 탑을 비롯한 석물 등이 일반적인 볼 거리였다. 그러나 요즈음은 사찰의 정원화에 정성을 많이 기울이는 모습을 여러 곳에서 보게 된다.
여행 문화가 향상되면서 사찰을 찾는 이들이 불교 신도에 국한되지 않는다. 불교라는 종교를 갖고 있지 않아도 사찰이 보유하고 있는 문화재를 돌아본다든가, 사찰이 갖고 있는 특유의 고즈넉함에 취해서 찾는 이들도 많다.
하루하루를 바쁘고 고단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사찰은 더없이 좋은 휴식 공간이다. 이런 점에 착안하여 전국의 이름난 사찰에서는 여러 가지로 기획 행사를 치루고 있다.
템플스테이(산사체험)라든가, 산사음악회의 개최라든가 하는 문화 행사로 일반인들이 불교문화에 접할 기회를 많이 제공하고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사찰의 경내를 정원같이 예쁘고 아늑하게 꾸며 더욱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참으로 바람직한 변화가 아닌가 싶다. 사찰이나 사찰이 보유하고 있는 문화재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경내를 공원같이 아름답게 꾸며 끌어들인다면 포교 활동이란 측면에서도 긍정적이지 않을까 싶다. 일부 사찰의 외형의 초대형화 사업 보다는 이런 방향의 친일반인적인 노력이 더욱 불교를 가까이 알게 하는 활동이 아닌가 싶다. 오늘 이곳의 세심정에서 편안한 마음으로 이곳 송광사의 서비스를 받고 돌아가는 기분이 참으로 좋다.
연꽃이 만발할 계절이면 송광사 연꽃은 또 다른 송광사의 서비스를 제공하며 나그네들에게 아름다움을 제공한다...
보물과 문화재가 그득한 완주 송광사를 나와 40여분을 달려 진안의 마이산 탑사로 길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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