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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문화성지,인각사(경북 군위군 고로면 화북리 612번지)와 군위댐사찰여행/경상도 2015. 11. 5. 08:27
삼국유사 문화성지 인각사와 군위댐
2015. 11. 5.
2015. 11. 3. "한국불교대학 大관음사 포항도량" 의 '10기' (기장 김영숙 보살)에서 15명이 가까운 구미시에 있는 도리사와 군위군의 제2석굴암. 인각사 그리고 대구시의 동화사로 단합할겸 가을 나들이 기도를 출발한다.
구미의 태조산 도리사를 보고 군위군 고로면 화북리 612번지에 위치한 인각사로 향한다...
일연스님이 경북 군위의 인각사에 머물며 생애 마지막 5년(79~84세) 동안 '삼국유사'를 집필했던 그
흔적을 따라 그 이야기들에 이끌려 찾을 수 밖에 없는 절집....
인각사지는 사적 374호라 한다...
◯ 인각사 표주석
700년 전 스님을 여읜 인각사는 스님이 남긴 증거 속에 겨우 살아 있을 뿐이었다. 스님을 여의었듯 거듭된 슬픈 역사 속에서 천년의 도량을 모두 여의었다.
'삼국유사의 산실'이 지금은 일주문도 없었고 천왕문도 종루도 없어 지금은 목어도 법고도 없고 범종소리도 울리지 않는 절집이 되어 있다.
2차선 아스팔트 도로에서 바로 시작되는 도량엔 2001년에 세워진 국사전과 조선시대 당우로 유일하게 남아있는 명부전과 새로이 조성한 극락전만이 향을 올리고 있었고, 역사가 묻어 버렸던 차가운 돌무더기와 일연 스님의 부도(보물 428호)가 도량의 뒤뜰을 지키고 있었다.
인각사는 신라 선덕여왕 시대(11~12년)에 세워진 절로 일연 스님이 삼국유사를 완성하고 입적한 절이다. 사라진 인각사의 옛 모습은 자세히 전하는 문헌이 없어 가람의 형태를 유추하기 어렵다. 1992년부터 시작된 발굴 작업을 통해 절의 규모와 형태를 찾아가고 있었다.
인각사는 2차선 아스팔트 도로에서 바로 시작되는 도량으로 평지형이다
◯ 인각사 맞은편에 있는 절벽바위 학소대
절 입구에 깎아지른 듯한 바위가 있는데 세상에 전하기를 기린이 뿔을 바위에 얹었다고 하여 절 이름을 인각사(麟角寺)라 하였다고 한다.
인각사 건너편 학소대로 옛날에 학이 살았다하여 학소대라 불리운다 한다...
◯ 인각사 정비 계획도와 사찰 배치도
인각사는 경상북도 군위군 고로면 화북리 화산에 위치하고 있으며, 대한불교 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인 은해사의 말사로서 신라 선덕왕 11년(서기 642)에 의상대사께서 창건하였다.
그 뒤 고려 충렬왕 10년(서기 1284)에 일연성사가 중창하고 이곳에서 《삼국유사》를 저술하였다. 성사께서 저술하신 삼국유사는 우리 민족의 개국신화인 단군신화를 최초로 기록해 놓았을 뿐 아니라 문화와 사상, 불교관계 등 삼국사기에서 서술하지 아니한 민족의 귀중한 유산을 종합적으로 집대성한 역사서 이상의 가치가 있는 민족의 성서이다.
때문에 인각사는 민족의 주체성을 고증하는 사적지로서 소중히 보존· 전승되어야 한다. 또한 일연성사는 총림법회(叢林法會)등 대규모 불교행사를 개최하였다. 시대는 미상이나 조정의 명으로 김용검(金龍劍)이 절을 크게 중건하고 전·답 100여경을 헌납하였다. 조선 중기까지 총림법회를 자주 열고, 승속(僧俗)의 발길이 끊기지 않았다고 하나, 그 뒤의 역사는 전하지 않는다.
이색이 저술한 목은집의 무무당기에는 당시 이절은 크고 높은 본당을 중심으로 하여 그 앞에 탑, 좌측에는 회랑, 우측에는 이선당(以善堂)이 있었고, 본당 뒤에는 무무당(無無堂)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면석부가 매몰된 3층석탑을 중심으로 극락전, 국사전, 명부전, 요사채2동과 산령각, 비각이 전부이다.
◯ 인각사 극락전
서향을 하고 있는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집으로 기둥의 놓이만 13尺 (어칸 15尺, 협칸 8 尺), 측면이 28척(어칸 12尺, 협칸 8尺)으로 정면과 측면의 비율이 1:0.9이다. 이러한 평면은 비슷한 시기 주불전의 일반적인 경우보다 측면의 길이가 길어 건물에 깊이가 있어 보인다. 사찰 불전의 특성상 같은 자리에서 修廢를 거듭하므로 극락전과 비슷한 시기의 불전의 평면비가 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이례적이라 할 수 있다.
기단은 자연석과 치석된 돌을 섞어서 축조를 했는데, 치석된 돌들은 다른곳에 쓰였던 것을 이곳에 다시 쓴 것으로 보인다. 이들 중에는 기둥이 모각된 석재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어 이전에 기단으로 쓰였던 면석들을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초석은 자연석을 사용한 덤벙주초를 하고 있다.
기둥은 민흘림기둥인데 의도적이라기 보다는 나무를 거칠게 다듬어 자연스럽게 민흘림기둥이 된 것으로 생각된다. 추녀의 처짐을 막기 위해서 기단의 네 귀에 팔각의 활주를 밖으로 기울여 세웠다. 이렇게 활주가 있음으로 해서 자연스레 기단를 포함하는 극락전의 주변공간이 극락전의 내부공간과 외부공간의 완충공간으로 기능하는 효과가 생기는 것이다.
극락전은 아미타불을 주불로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을 협시불로 모신 현재 인각사의 중심법당이 되고 있다.
삼존불이 앉으신 좌대가 참으로 장엄하다.
후불탱화도 장엄함의 극치를 보여 주었다.
우물정 (井) 천정으로 단청이 장엄하다.
극락전 신중탱화
칠성탱
영가단의 반야용선
극락전의 공포는 연봉과 연화가 반복적으로 장식되어 건물의 정면과 측면에 놓여져 있으나, 후면에는 이러한 연꽃장식이 없다.
전면과 측면의 공포는 쇠서의 아래쪽에서 당초줄기가 새롭게 나와 파련을 이루며 뻗어 있고 후면의 공포는 쇠서의 밑에서 花頭子가 나와있는 것으로 그쳐 장엄의 차이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차이도 느낄 수가 있다. 이런 식으로 전면과 측면의 공포대는 장엄에 있어서 차이를 두고있는데 이러한 장엄의 차이는 건물내부를 보면 더욱 확연하다. 전면과 측면의 공포는 외부와 마찬가지로 연화와 연봉이 반복적으로 장식되어 살미의 끝이 하나의 당초문을 이루고 있는데 반하여 후면의 공포는 이러한 장식이 생략된 체, 교두형으로 마무리 되어있다. 이는 같은 시기의 건물에서 종종 보이는 수법으로 공력을 아끼려는 의도로 보인다.
이것 말고도 극락전의 장엄 차별이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전면만 부연을 설치한 수법이다.
이 건물의 교통은 전면에 설치한 분합문을 제외하고는 우측에 있는 외짝문으로 출입한다. 후면을 보면 향좌측에 판문이 설치되어 있으나, 이는 현재 그 안쪽을 콘크리트벽돌로 막아 벽으로 처리하였고, 이 판문 또한 처음부터 달았던 것이 아니라 후에 달았던 것으로 보인다.
후면의 어칸에 인방과 중깃이 연귀짜임으로 결구되어 있는데, 이는 우측면의 외짝문과 같은 방식의 연귀짜임인 것으로 봐서 중깃은 윈래 문설주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현재와 같이 개조하기 전에는 후면의 어칸에 제법 큰 출입문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극락전 기구상의 특징으로는 팔작집임에도 불구하고 충량이 없다는 것이다. 이시기의 대부분의 건물을 보면 측면의 桂上包위에서 충량이 대들보위로 휘어져 올라와 마구리를 용두 등으로 마무리하는 것이 보편적이나 이 건물은 아예 충량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대들보 위에 충량을 얹었을 만한 흔적 또한 없어 지을때부터 충량이 설치되지 않은 것같다. 극락전 전면에서 보이는 교창의 위치에는 창이 설치되지 않은 대신 불단에서 볼 수 있는 당초문의 초각 하여 붙여 놓아 불단과 건물의 장엄물이 같은 시기에 꾸며졌음을 알 수 있다.
◯ 인각사 삼층석탑과 연화좌대
극락전 앞에 세워져 있는 인각사 삼층석탑은 노반부까지의 높이가 3.35m이고 하대갑석한변의 폭은 1.97m 이다.
탑은 고려 초기 수법을 따르고 잇으며 탑에서 면석이 우주 탱주의 보각이 도중에서 끝나는 것과 상단을 위한 턱을 마련한 독특한 구조를 하고 있다.
극락전 초입의 삼층석탑과 연화좌대가 길손을 반긴다. 사찰에서 야간 행사를 할때 불을 밝혔던 늘씬한 연화좌대
◯ 인각사 국사전
극락전 발굴로 인해 해체된 후 2001년에 건립되었다.
일연선사 존영을 모신 국사전
일연 스님은 고려 희종 2년(1206), 최충헌이 세상을 잡은 무신의 시대에 태어난다. 9세 때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광주의 무량사로 들어가 공부를 시작한 스님은 14세에 강원도 양양의 진전사에서 머리를 깎고 구족계를 받는다. 그리고 충렬왕 9년(1283)에 국사가 된다.
스님이 살아야 했던 시절의 역사는 참으로 어려웠다. 정치적으로 어려웠고 몽고의 침략으로 더욱 어려웠다. 백성이 견뎌야 할 어려운 시절과 국사로서 스님이 감당해야 했던 위태로운 역사가 삼국유사라는 역작을 쓰게 한다.
고조선에서 삼국시대까지의 역사를 기록한 삼국유사는 다른 역사서와 많이 다른 책이다. 우선 역사서라 불림에도 불구하고 삼국유사는 완벽한 ‘사실의 책’이라고 보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사료와 문헌을 중심으로 연대를 따라 역사를 기록한 보통의 역사서와 다르게 삼국유사는 스님이 평생 이 땅의 곳곳에서 보고 들은 이야기들을 자유분방하게 엮어 놓았다. 이야기마다 동원된 무한의 상상력이 그것이며, 마지막 책장을 덮을 때 자연스럽게 용인되는 그 상상력은 역사를 확장시키고, 우리의 문화와 불교를 확장시킨 이 책의 매력이며 값어치다.
힘들고 위태로운 시절을 함께 살았던 한 나라의 국사가 백성들이 알아야 할 역사와 문화, 종교, 신화 등을 백성을 생각하며 쓴 삼국유사는 단군 신화로 시작하는 민족의 족보이자 ‘순도가 고구려에 오다’로 시작되는 불교 문화서이고, 삼국 시조의 탄생 이야기와 향가가 수록된 설화와 신화의 모음집이자 문학서인 동시에 역사와 철학이 지나간 인문서다.
삼국유사는 완벽한 사실의 책이 아닌 역사서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게 해준 기록이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생각하게 해준 물음이다.
삼국유사가 없었다면 우리는 단군을 모른 채 살았을 것이고, 수많은 우리의 설화와 신화를 모른 채 살았을 것이다. 또한 삼국유사가 없었다면 우리는 700년 전 우리 곁에 왔다 간 일연이라는 가슴 따뜻했던 한 스님의 이름을 모른 채 살아야 했을 것이다.
측면의 국사전
국사전의 처마 단청
국사전의 고운 문살
국사전 댓돌의 주춧돌
◯ 인각사 명부전
인각사 건물중 가장오래된 건물로 남아 있는 유일한 조선시대의 건물로 조선 숙종 연대에 건립되었다고 전해지며 정확한 연대는 밝혀지지 않았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정방형 건물이다.
명부전안의 지장보살
염라대왕을 비롯한 지옥시왕(地獄十王)이 모셔져 있다.
극락전 바로 옆에 있는 명부전 또한 맞배집으로 전면만 부연을 달아 극락전과 공통점을 보이고 있다.
미륵당에서 바라본 명부전
◯ 인각사 미륵당
비록 온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진 않지만 정감이 가는 모습이다. 전쟁과 환란으로 수족이 떨어져 나간 모습이지만 이 부처님 모습을 종이에 그려 가슴에 품고 21일 기도하면 아들을 내려주신다고 전한다..
미륵당 부처님 모습
◯ 인각사 산령각
절의 북동쪽에 자리한 인각사에서만 볼 수 있는 소박한 산신각인 산령각
1963년에 건립되었으며 안에는 호랑이를 옆에둔 산신탱이 있다.
예전의 번창했던 깨어져 흩어진 기와장을 모아 만든 산령각 근처의 기와탑들
◯ 인각사 보각국사비 (보물 제428호 )
보각국사 탑비는 충렬왕 19년에서 21년(서기 1293 ∼ 95)사이에 죽허(竹虛)대사가 중국 왕희지의 글자를 집자해서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임진왜란의 병화로 크게 훼손되어 글자를 알아보기 어렵다.
지금은 비의 형체가 많이 훼손되었으나 다행히 비문은 오대산 월정사(月精寺)에 그 사본이 남아 있다.
군위 인각사 국사전 뒤편 비각 속에 일연스님의 비가 모셔져 있다. 보각국사정조지탑과 함께 보물 제428호로 지정되어 있다 .
비석의 재질은 점암판이며, 지금 비록 깨어져 본모습을 짐작키 힘들지만 왕희지의 글씨를 집자하여 만든 것이라 멀리 중국과 일본에까지 소문이 날 정도였다.
보각국사탑비(普覺國師塔碑)는 스님이 입적한지 6년 만인 충렬왕 21년에 세워져는데, 비문은 당대의 저명한 문장가 민지(閔漬, 1248~1326)가 글짓고 ,글씨는 일연스님의 제자인 죽허가 칙명을 받고 중국 진(晉)나라까지 가서 명필 왕희지(王羲之)의 행서를 모았고, 국사의 제자인 법진(法珍)에 의하여 세워졌다.
탑비의 재질은 점판암(粘板巖)이며, 행간(行間)을 음각으로 구획하고 글자를 새겨 넣었다.
비명 맨 끝에는 '겁화가 모든것을 살라 산하가 재가 되어도 이 비석은 홀로 남아 이 글은 마멸되지 않으리.'라고 제자 민지는 글을 맺었다...
비의 앞면에는 일연스님의 행적과 추모의 정을 담았고, 뒷편의 음기에는 비를 세운 경위와 다비식 때의 영험담과 더불어 일연스님 문도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 인각사 보조국사정조지탑 (보물 제428호)
고려 충렬왕 15년(1289)에 입적한 보각국사 일연의 행적을 기록해 놓은 사리탑인 보각국사 정조지탑(靜照之塔) 이다.
일연은 『삼국유사』를 저술하는 등 많은 업적을 이룬 승려인데, 노년에 인각사에서 늙으신 어머니를 지극히 봉양하였다고 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아침에 해가 뜰 때 이 탑에서 광채가 나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일연스님 어머니의 묘를 비추었다고 한다.
보각국사 비문은 오대산 월정사(月精寺)에 그 사본이 남아 있다.
비문에 의하면 비를 세운 시기가 1295년(충렬왕 21)이므로 부도탑의 건립 역시 일연이 입적한 해인 1289년에서 1295년 사이의 일로 짐작된다.
탑은 자연석으로 된 바닥돌 위에 8각의 아래받침돌을 놓았는데 윗면이 급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가운데받침돌 역시 8각으로, 동물을 조각하였으나 뚜렷하지 않다.
얕게 돋음새김한 조각과 음각한 연잎이 보인다.
몸돌 각면에는 신상을 조각하여 일연스님에 대한 존경을 나타냈다.
부도의 주인을 알수 있게 글씨도 ...
윗받침돌은 8각이지만 원형에 가깝고, 단조롭고 소박한 연꽃이 새겨져 있다. 탑몸도 8각으로 정면에는 ‘보각국사정조지탑’이란 탑이름이 있고, 뒷면에는 문모양의 조각이 있으며 남은 6면에는 사천왕입상(四天王立像)과, 연꽃 위에 서있는 보살상(菩薩像)을 새겼다.
지붕의 두꺼운 추녀 밑은 위로 느리게 들려 있고, 낙수면은 급한 편이며 지붕선 끝부분에 꽃장식이 달려 있다. 지붕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이 큼직하게 올려져 있다.
부도 꼭대기에는 불꽃형 부주를 세웠지만 통일신라 전성기의 부도와 비교하면 형식적이고 투박하다.
이 탑은 본래 인각사에서 동쪽으로 2㎞ 지점에 세워졌으나 도굴배의 만행으로 쓰러져 있던 것을 1962년에 이곳으로 옮겨 보물로 지정하였다.
옥개석은 두꺼운 편으로 밑에는 낮은 받침이 있고, 윗면에 우동(隅棟)이 표현되어 있으며 그 끝에는 귀꽃이 장식되어 있다. 상륜부에는 앙련(仰蓮)이 새겨진 보개(寶蓋)와 보주(寶珠)가 있다.
이 부도는 통일신라시대 이래의 8각원당형을 따르고 있지만 형태나 조각수법이 둔중한 느낌을 준다.
보조국사정조지탑 옆에는 석조불상이 모셔져 있다....
◯ 인각사 석조불좌상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39호 )
광배를 등지고 결과부좌한 석불좌상
본래는 인각사에서 남동쪽으로 약 10㎞ 가량 떨어진 고로면 괴산 2리의 한 절터에 있었으나 1963년에 이 자리로 이운하였다 한다.
형태를 보면 불신(佛身)과 한돌로 된 광배를 갖추고 결가부좌하고 있다. 육계는 높고 큼직하며 머리카락은 굵게 나발(螺髮)로 처리되었다. 상호는 원만하며 대체로 풍만한 편이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분명하고, 귀는 어깨까지 드리워져 있다. 통견(通肩) 형식의 불의(佛衣)는 가슴에 승가리가 표현되었고, 그 아래로 군의(裙衣)를 묶은 띠 매듭과 띠 자락이 나타나 있다. 수인은 오른손으로 촉지인(觸地印)을, 왼손으로 선정인(禪定印)을 취하며 손바닥 위에 보주 형태가 놓여져 있다. 이 수인으로 보아 약사불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이러한 전체적 양식으로 볼 때 10세기에 조성한 불상으로 추정된다. 크기는 현재 높이 150.3㎝, 머리 높이 53.5㎝, 어깨 너비 64㎝, 무릎 너비 97.5㎝이다.
오랜세월로 인해 얼굴은 비바람에 마모되어 알아볼수가 없다.
◯ 인각사 일연선사 생애관
인각사 일연선사 생애관 전경
이웃집 할아버지처럼 친근한 모습의 일연스님 표준 존영
보국국사 비 기단의 탁본
생애관 안의 충렬왕이 일연선사를 청하여 지어 부친 시
일연스님의 생애관 앞에 세운 高銀 시인의 일연찬가비
<삼국유사의 내용>
제 1의「왕력편(王曆篇)」은
신라시조(新羅始祖) 혁거세(赫居世)로부터 후삼국의 고려 태조 통일에 이르기까지의 王代와 年表를 도표식으로 정연하게 보이고 있으며, 그 위쪽과 말미 부분에 중국의 역대 왕조와 年號를 표하여 시대적인 준거가 되게 하고 있다.
왕력(王曆)은 현재의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는 편(篇)으로 처리되어 있지 않지만 이는 부록으로써 단순한 연대표가 아니다. 즉 이에는 각 왕의 대수(代數), 즉위 연대, 존위년수(在位 年數), 릉(陵)의 명칭, 소재(所在), 화장기사(火莽記事), 왕모(王母)에 대한 기록, 왕비(王妃)에 관한 기술, 연호(年號)의 사용, 중국과의 교섭관계, 국호(國號)에 대한 설명, 사찰 건립, 수도(首都)의 옮김, 축성(築城), 제방(堤防), 시장(市場)에 대한 기록, 외침(外侵) 기사 등, 국가적인 중대 사건이 기록되어 있어 단순한 연대 대조표가 아니라 일연의 선대(先代) 역사에 대한 지식과 관점을 알 수 있는 한편의 저술이라 할 것이다.
제 2의「기이편(紀異篇)」은
고조선 이래로 후백제까지 이르는 우리 고대사의 광범위한 영역을 신이(神異)를 바탕으로 하여 1, 2권에 걸쳐 59항목으로 다루고 있다.
권 1은 단군조선(檀君朝鮮)의 고대사(古代史)로부터 신라의 통일 전인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대에 이르기까지의 요사(要史) 및 질문(秩文)을 왕조 중심으로 모은 36항목의 내용이 들어 있다.
권 2는 문호왕법민(文虎王法敏)에서 가락국기(駕洛國記) 등 통일이후 국망(國亡)까지의 신라를 중심으로 하여 백제와 후백제 및 가락 등에 대한것을 권1의 예에 따라 수록한 23항목이 들어있다. 특히, 가락국(가야)의 역사는 삼국유사 이외의 다른 사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제 3의「흥법편(興法篇)」은
삼국(三國)에서 불교가 공인되기까지의 불교 전래에 대한 기술로, 이에는 사실적인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여기도 설화적인 내용이 일부 들어 있지만 대부분 문헌자료에 의거한 것이다.
제 4의「탑상편(塔像篇)」은
불교신앙의 대상인 석탑(石塔), 범종(梵鐘), 불상(佛像), 사찰(寺刹)에 대한 기록이다. 이는 불교문화사(佛敎文化史)에 대한 것으로 기왕의 고승전(高僧傳)에 없는 내용이다. 여기에도 설화(說話)로 전하는 영험적인 내용을 일부 전하고 있으나 사지(寺誌), 금석문(金石文) 등을 통하여 비교적 구체성이 있는 내용을 전해주고 있다.
제 5의「의해편(義解篇)」은
불교 교리(佛敎 敎理)에 능통한 승려에 대한 전기이다.
그러나 종교적(敎宗的)인 철학에 능통한 자만이 아니라 이미 도에 통하여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행동한 고승 이야기, 공예(工藝)에 신통한 양지(良志)의 전기, 신이(神異)를 일으킨 고승의 영험 등이 다루어졌다.
고승전에서 자료를 취하면서도 설화를 함께 실었다.
제 6의「신주편(神呪篇)」은
고승들의 신통한 신술력(神術力)에 대한 설화를 모은 것이다.
이는 「기이편(紀異篇)」과 더불어 신이적(神異的)인 내용을 가장 많이 담고 있다. 하지만 「기이편(紀異篇)」이 왕(王)에 대한 설화가 주(主)라고 한다면 「신주편(神呪篇)」은 승려의 신이(神異)에 대한 설화가 주(主)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제 7의「감통편(感通篇)」은
지극한 신심(信心)이 인간적인 능력의 한계를 뛰어넘는 설화를 다룬 것이며 이 편(篇)도 신이(神異)로운 내용으로 일관되고 있다.
제 8의「피은편(避隱篇)」은
세속적인 부귀를 탐내지 않고 초연히 벗어날 수 있는 사람에 대한 기록으로, 여기에는 승려에 국한시키지 않고 화랑이나 일반 사람도 주제로 포함되어 있다.
기본사상은 모두 세속사(世俗事)를 영원한 것, 절대적인 것으로 보지 않는 불교의 가르침과 일치함을 강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의 「효선편(孝善篇)」은 가정의 기본 윤리인 효가 불교에서도 존중되는 덕목이라는 것과 불교적인 선과 연결되는 것이 더욱 값지다는 점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일연시비
◯ 인각사 발굴 조사시 출토 부재
2009년 인각사 발굴 조사 출토 유물 부재
금동병향로, 청동정병 등 통일신라시대 때 조성된 불교의식구가 군위 인각사에서 발견됐다. 군위군과 재단법인 불교문화재연구소(소장 범하스님)는 사적 374호 인각사 5차 발굴조사 과정에서 9세기에 제작된 금동병향료와 청동정병 2점, 청동향합, 청동이중합, 청동반자 등을 수습했다.
◯ 인각사 일연학연구소
◯ 인각사 종무소
인각사 주지 도권 스님
종무소의 보각국사비명
전각 뒤에서 바라본 종무소
◯ 인각사 보각국사 재현비와 부도전
인각사에서 동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한 재현비와 부도밭이다...
최근에 복원한 보각국사 재현비는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강진 백련사의 것을 본땄다.
설명이 없어 어떤이의 부도인지는 정확히 알수는 없으나 3기 모두가 석종형 부도로 만월당(滿月堂)과 청진당(淸眞堂)의 부도로 짐작되어 지고..
◯ 인각사 전경
인각사는 임진왜란때 화약 제조창이었다는 이유로 정유재란때 왜군이 인각사를 파괴했고 그 뒤 중창되었지만 단 한번도 옛날의 영광을 회복하지 못했다고 한다...
스님의 부도 곁으로 이름모를 새 한 마리가 다가간다.
인각사를 찾는다면 절을 찾는다는 마음보다는 선산(先山)을 찾는 후손의 마음으로 가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백성과 후손을 생각했던 조상을 만나러 가는 것이다. 삼국유사의 뜨거운 의미를 떠올리며 찾아간 역사의 도량 인각사. 당우 세 채만이 서있는 아쉬운 도량의 뒤뜰에는 스님의 부도가 그 옛날 스님의 마음처럼 차가운 돌무더기 사이에서 따뜻하게 서있었다.
그리 볼거리가 많은 절은 아니지만 일연스님의 이야기를 따라 가다보면 어느새 풍성한 볼거리가 많은 절집으로 느껴지는 곳이 아닌가 싶다.....
인각사를 나와 골짜기로 1km 남짓 가면 군위댐이 자리하고 있다...
예까지 왔으니 군위댐도 들러서 가기로 한다..
워낙 가문 날씨탓에 댐에 남은 물이 적다...
아름다운 군위댐 까지 둘러 본 후 인각사를 나와서 인근에 있는 군위군의 제2 석굴암으로 향해 본다.
비우는 마음에서 행복은 시작 한다.
제 아무리 큰 행복이라 하더라도 마음을 비우지 못한다면 그것은 불행이다.
작은것의 소중함! 그것은 행복의 지름길이다.
오늘 우리 도반들과 함께 하루도 비우는 마음에서 참 행복을 느껴보며 룰루 랄라 군위군의 제2 석굴암으로 향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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