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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륜사 (경북 경주)사찰여행/경상도 2014. 5. 17. 10:49
흥륜사
2014. 5. 17.
2014. 5. 13. 오늘은 인근 경주를 추억의 수학여행을 떠올리며 다녀 본 경주 여행길이다...
먼저 분황사, 황룡사지, 그리고 첨성대, 계림, 반월성보고 점심식사 후 동부사적지대를 보고 흥륜사로 향해 본다...
골목길을 들어서자 바로 흥륜사 도량이다.
천경림 흥륜사는 원래 '천경림'이라고 하여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에 이 땅에 있었던 신성 지역, 즉 소도터였다. 사람들은 소도를 하늘과의 통로라고 믿었고, 소도를 통하여 하늘과 통하였다. 그런데 점점 신라에 불교가 들어오면서 선도문화의 소도터들이 사찰로 바뀌게 되었다.
한민족 고유의 선도문화가 점점 그 힘을 잃고 외래에서 들어온 불교문화에 밀려 선도문화가 가지고 있는 신성한 지역, 소도를 하나씩 내주었다고 생각하니 왠지 가슴이 짠하고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아아. 이렇게 우리 민족의 선도문화가 쇠락해 갔었구나....
지금의 흥륜사가 있는 곳은 경주사람들이 구전으로 전해온 것을 흥륜사지로 확정한 것이지만, 진짜 흥륜사지는 지금의 자리에서 조금 떨어진 경주공업고등학교 부지일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얼마 전 경주공고에서 배수로 공사를 위하여 땅을 팠는데, 그 자리에서 '대왕흥륜사(大王興輪寺)'라고 쓰인 기왓장이 다량 출토된 것이다. 그래서 학자 중에는 지금의 흥륜사 자리는 선덕여왕 때 지어진 '영묘사'터 였고, 원래 흥륜사지는 지금의 경주공고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 대웅전
흥륜사 대웅전 편액
흥륜사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하여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협시를 이루고 있다...
장엄한 닫집 아래는 용과 학이 불단의 부처님을 호위하고 있다..
너무나 단아한 불단이다...
부처님 우측의 지장단과 신중단
불단 좌측의 칠성탱과 스님 존영들.. 그리고 영가단
흥륜사는 창건설화와 중창설화로 구분할 수 있다.
흥륜사의 창건 설화
고구려에 불교가 전해진 것은 소수림왕(372년) 때 중국 승려 순도에 의해서이고 백제는 침류왕(384년) 때 인도승려 아라난타에 의해서이다. 전남 영광에 가면 마라난타사가 있다. 신라는 고구려 불교 전래 후 약 250 여년 쯤 뒤의 일이다.
위나라의 아굴마가 고구려에 대사로 임명을 받아오게 된다. 당시 고위대작의 딸 고도령은 아굴마를 우연히 보고 서로 사랑을 하게 되었는데, 아굴마는 임기가 되어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고 고도령은 잘생긴 옥동자를 낳으미 '아굴마'의 '아'자와 '고도령'의 '도'자를 따서 이름을 아도라 짓는다. 아도는 어릴 적부터 총명하였지만 아버지가 없는 것에 대한 의혹을 많이 품는다.
어느 날 친구들과 놀던 아도는 울면서 집에 와서 어머니 고도령에게 하는 말이 '어머니, 강아지도 아버지가 있고 송아지도 아버지가 있는데, 왜 난 아버지가 없어요?'라도 묻는다.
지금은 어려서 자세한 얘기를 해 줄 수 없었던 고도령은 '네가 어른이 되었을 때 아버지에 대한 얘기를 자세히 해주겠다' 라고 약속을 한다.
드디어 16세가 된 아도가 호패(지금의 주민등록증과 같음)를 허리에 차고 들어와 아버지 얘기를 해 달라고 조른다.
이에 아도는 아버지가 위나라라는 중국인이라는 얘기를 듣고는 '아, 나도 아버지가 있긴 있구나' 라고 하며 크게 기뻐하면서 아버지를 찾아 위나라로 떠난다. 위나라로 가서 보니 아버지 아굴마는 지금의 국무총리 쯤 되는 벼슬을 하고 있었고, 결혼도 하여 자식도 있는 상태였다. 하여 아버지와 함께 생활을 할 수가 없었고, 당시 유명한 스님 밑에서 불법을 익히게 된다.
상당한 경지의 불법을 익힌 아도에게 아버지는 네가 너희 나라로 돌아가서 절을 짓고 포교를 하며 살라고 한다. 고구려로 돌아온 아들에게 고도령은 지금 고구려는 이미 불법이 성행하고 있으니 신라로 보낸다. 신라로 가되, 지금은 신라의 형편의 여의치 않으니 신라로 가서 은둔을 하고 있다가 흰눈 속에서 복숭아꽃이 피는 때를 맞춰서 절을 지으면 되니 그 때 까지 '때를 기다리며' 있으라고 한다. 그리고 고도령은 덧붙인다. 신라에는 8개의 절터가 있으니 그 터에 절을 지으라고...
신라로 들어온 아도는 지금의 선산군 도개마을까지 오게 되는 데 그 곳에 '모례'라는 엄청난 부자가 살고 있었다. 모례는 큰 부자여서 수많은 전답을 소유하고 있었고, 삼천 마리나 되는 짐승(말 천마리, 소 천마리, 양 천마리)을 기르고 있었다. 하루는 아도가 모례에게 찾아가 저 삼천마리를 내가 혼자 길러보겠다며 호언장담을 한다. 모례가 그렇게 하라고 하니 아도는 말,소,양의 우두머리격을 찾아서 귀에다 대고 뭐라고 소근거리나 그 날부터 그 우두머리를 중심으로 질서를 지키며 모이를 뜯어먹게 된다. 이를 계기로 아도는 모례의 신임을 얻어 모례 집에 기거하면서 때를 기다리게 된다.
그 때 미추왕의 딸 성국공주가 몹쓸 병에 걸려 백약이 무효였는데, 복숭아 꽃이 특효약이라는 말을 듣게 되었지만 때는 엄동설한에 눈까지 뒤덮힌 상태라 복숭아 꽃이 필리가 만무했다. 이에 미추왕은 전국에 방을 내어 만약 공주의 병을 고쳐주는 사람이 있으면 '만약 미혼이라면 공주와 결혼을 시킬 것이며, 기혼이라면 무엇이든지 한 가지 소원을 들어줄 것이며, 이도저도 아니라면 논 천 마지기를 하사하겠노라'고 공표를 한다.
신라의 젊은이들 중 19세 된 한 젊은이가 복숭아꽃을 찾아 전국을 누비던 중 도개 마을에 이르게 되는데 이 곳에서 문제의 복숭아 꽃을 발견하게 된다. 이를 급히 왕궁에 알리니 왕은 궁졸을 보내 복숭아꽃을 속히 가져오라고 명한다. 궁졸이 도개에 와서 복숭아꽃을 가져가려고 하는데, 한 스님(바로 아도스님)이 나타나 이것은 나의 것인데 어디 함부로 가져가냐고 호통을 친다.
궁종을 웃으면서 '이 나라 전체는 이 나라 왕의 것이데, 어찌 네 것이라 우기느냐' 하니 과연 '이게 왕의 것인지 나의 것인지 보자'고 아도가 말한다. 이에 복숭아밭 전체가 약 2미터 높의로 치솟아버리자 놀라서 궁졸은 다시 왕에게 가서 사실을 아뢴다. 왕은 아도를 궁궐로 불러 올린다. 여태까지 모례는 아도가 보통 인물은 아님을 짐작은 했으나 복숭아밭 기적을 보고는 과연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알고는 절을 하면서 큰스님 어디로 가시냐며 묻는다. 아도는 어느날 마당에 칠넝쿨이 나면 그 넝쿨을 따라 오면 나를 만날 수 있다고 얘기해 준다.
한편 아도를 만난 왕은 너의 소원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아도가 답하기를 '두 가지 소원이 있는데, 하나는 이 땅에 절을 짓게 해달라는 것과 절을 국교로 삼아달라'는 것이었다. 이에 왕은 공주의 병을 고쳐주면 무엇이든 소원을 들어주겠노라고 약속을 하였기에 아도에게 그렇게 하겠노라고 한다.
다시 도개로 돌아온 아도가 절을 짓기 위해 돌아와 있을 때에 칠넝쿨을 따라와서 아도를 만난 모례는 곳간에 있는 쌀을 얼마든지 퍼가도 좋다고 하니 아도는 내 바랑에 조그만한 망태기에만 채워주면 된다고 말한다. 이에 하인을 시켜 곳간의 문을 활짝 열고 망태기에 쌀을 붓게 되는데, 한 말을 부으면 그 쌀이 한톨이 되고, 또 한 말 부으면 쌀이 두 톨이 되고 하여....어쩔 수 없이 천 섬이나 되는 쌀을 붓고서야 망태기를 채울 수 있었다. 결국 모례를 전재산을 아도에게 준 셈이 되고 이를 기반으로 절을 지으니 초기에 도개(복숭아꽃이 핀)의 도리사이고 후에 서라벌에 맺은 인연으로 지은 사찰이 흥륜사이다. 지금도 도개면에 가면 마천리, 우천리, 양천리 마을이 있고 모례장자터에는 맑은 물이 샘솟고 있어 모례장자와 아도화상이 실존인물임을 뒷받침하고 있다.
대웅전의 소종
대웅전 법당에서 바라본 대웅전 문살...
흥륜사의 중창 설화
당시 신라에는 불교가 국교로 지정되지는 않았지만 암암리에 민간을 줌심으로 불교가 상당히 알려져 있었다. 이차돈 (본명 박염촉) 역시 불교에 귀의하여 상당한 경지에 올랐는 바, 늘 불교가 국교로 지정되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겼는데, 법흥왕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게 된다.
당시의 왕은 형식적이었고, 실권은 육부 촌장들이 쥐고 있었다. 이차돈은 절을 짓게 해 달라는 상소를 하게 되면 육부촌장들이 벌떼처럼 반대를 할 것이고 그러면 이차돈 자신을 죽이면 된다고 한다.
실지 육부촌장의 반대로 사찰건립이 무산되면서 이차돈은 마침내 순교의 길을 택한다. 죽기 전에 이차돈은 말한다. 만약 내가 죽어서 이적이 일어나면 불교를 국교로 삼을 수 있냐고 물으니, 육부촌장들은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을 한다. 이 약속을 받은 후 이차돈의 목을 베니 목부분은 바로 밑이 아니라 저 멀리 소금강산(지금의 백률사)까지 날아가서 떨어지고 몸에서는 희디 흰 피가 솟구치었다. 이에 놀란 육부촌장들도 법흥왕에게 거스러지 못하고 사철건립에 찬성하게 되니, 이차돈의 순교로 인해 신라에서 불교가 성행하는 계기가 되고, 그 순교터에 절을 지으니 지금의 '흥륜사' 이다...
대웅전 모서리 기둥위에는 용과 봉황이...
정면 우측에서 바라본 대웅전 전경이다...
정면 뒤쪽에서 바라본 대웅전 전경이다...
정면 좌측에서 바라본 대웅전 전경이다...
대웅전 뒤쪽의 야외 유물들...
◯ 공덕비
대웅전 정면 뒷쪽에 자리한 공덕비 이다...
◯ 범종각
팔각의 범종각이다...
시원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왠지 바람 속에서도 200년이 넘도록 끈질기게 이 땅에 들어오고자 계속 기회를 엿본 불교와 끝까지 선도 전통을 지켜내고자 저항을 하였지만 결국 시대의 흐름에 거스르지 못하고 스러져버린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 이차돈 순교비
흥륜사 경내를 돌아보았다. 경내의 중앙에는 비석은 '만고대광명 이차돈 성자'라는 말과 함께 이차돈 순교비의 부조를 그대로 옮겨 놓은 비석이 있었다.
이차돈 순교비 앞의 배례석
◯ 금당
비구니스님들의 수행공간 강원인 금당이다.
비구니 스님들의 선방이 있는 곳... 고요하고, 정갈하고, 아담하면서, 소박한 사찰...
경주시 사정동에 위치한 흥륜사는 금강산 신계사에서 출가하시어 한국비구니사를 고스란이 간직하신 혜해스님께서 조실로 계시는 비구니스님들의 수행도량이다.
선원장 혜해스님
금당 옆의 채전
◯ 백련당
요사인듯...
◯ 신검당
대웅전 우측에 위치한 전각으로 요사다...
◯ 요사 겸 공양당
공양당 너머로 강원인 금당이 보인다...
◯ 신검당 옆 주차장 입구의 요사
금강산 신계사에서 출가하시어 한국비구니사를 고스란이 간직하신 혜해스님께서 조실로 계시는 비구니스님들의 수행도량인 경주시 사정동에 위치한 흥륜사를 나와 오릉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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