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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가 다녀간 그 길, 기림사(경북 경주시 양북면)사찰여행/경상도 2013. 10. 10. 16:49
원효가 다녀간 그 길, 기림사
2013. 10. 10.
2013. 10. 1. 홀연히 혼자만의 여행을 하고 싶을 때가 있다.
마음이 공허해서도 외로워서도 아닌 그냥 나 자신을 확인 하고플때 어디론가 훌쩍 절(사찰) 바람이라도 쐬고 싶을 때가 있다.
좋은 것을 보면 사진으로 담아도 보고 자유로이 훨훨 나비가 되어 싶을때....
그래서 떠나온 기림사와 골굴사.........
혼자만의 여행길에서 난 오늘도 살아있음에 누릴수 있는 호사를 감사한 맘으로 내려 놓는다...
◯ 기림사를 향하여
사찰 입구의 임정교(林井橋)
임정교는 기림사의 옛 이름이 '임정사'였음을 말해준다
기림사 입구 좌측에 대나무 밭이 장관이다. 기림사 입구의 공덕비...
기림사 일주문 좌측 대나무 숲 속에 있는 율암대사 비와 부도
기림사 사적비다....
◯ 기림사 일주문
대숲 사이로 기림사 전경이 눈에 들어온다.
일주문 현판 ( 心泉 韓永久님이 글이다 )
동해에서 뜨는 달을 가장 먼저 본다고 하여 ‘달을 품은 산’ 이라는 뜻인 함월산(含月山)으로 명명 되었다. 함월산은 달뿐만 아니라 신라시대의 명찰 기림사도 품고 있다.
한편 기림사의 함월산과 석굴암의 토함산은 서로 달을 토해내고 머금는 관계라고 한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보면
1424년(세종 6년)에 교종과 선종 각 18개 사(寺)를 정하여 불교 사원을 통폐합 할 때 기림사는 선종사찰로서 경상도 4개 사원(경주 기림사, 합천 해인사, 진주 단속사, 거창 견암사)에 포함되었는데 이때 토지가 130결 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기림사는 높은 석단을 사이에 두고 상단부와 하단부로 나누어지는데, 상단부는 근래 들어 조성한 건물들이 들어서 있는 곳으로 삼천불전, 관음전, 범종각, 유물전시관, 요사채(화정당, 해행당, 백운당) 등이 있으며, 하단부는 창건 당시부터 이어져 오는 곳으로 일주문, 진남루, 대적광전, 응진전, 약사전, 삼층석탑이 있다.
기림사의 창건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진다.
인도 수다라국의 왕과 왕비, 후궁들이 광유스님의 제도 하에 세속과 왕좌를 버리고 부처님을 예배공양하기 위하여 차(茶) 시중을 들며 불법의 세계에 귀의하였다.
왕후에게서 태어난 태자 안락국은 수다라 왕이 도(道)를 얻어 열반에 들자 광유스님의 권유로 해동 계림국(신라)에 도착하여 명당을 찾아 조그만 암자를 세우고 이름을 '임정사'라 하였다고 한다.
임정사가 창건된 지 백오십년 후 신라 선덕여왕 때 원효대사가 절을 확장하고 절의 이름을 부처님 당시의 최초의 절인 '기원정사'의 이름을 따서 현재의 이름인 '기림사'라 개명하였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생전에 제자들과 함께 수행했던 승원 중에서 첫 손에 꼽히는 것이 기원정사와 죽림정사이다. 특히 기원정사는 깨달음을 얻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23번의 하안거를 보내신 곳이다. 그 기원정사의 숲을 기림(祇林)이라 하니 경주 함월산 기림사는 그런 연유에서 붙인 이름이다.
먼 옛날에는 불국사를 관장했던 큰 사찰 기림사. 그 위용을 알 수 있는것은 법당의 단아함과 가람배치의 단정함이다.
기림사는 이 지역 다른 사찰과 달리 임진왜란의 피해를 거의 입지 않은 사찰로 경주부 관아에 보관되어 있던 영부안선생’이나‘호장안’등 수많은 문헌들이 당시 호장 최락에 의해 기림사로 옮겨져 잘 보관 된 결과 오늘날까지 전해지게 되었으며 사찰 내 국가지정 문화유산으로는 보물로 지정된 대적광전(大寂光殿:보물 833호), 건칠보살좌상(乾漆菩薩坐像:보물 415호), 대적광전내 삼존불(三尊佛:보물 958호), 비로자나불의 복장유물(보물 959호) 등이 있다.
◯ 기림사 숲길
일주문에서 기림사로 가는 숲길, 흙길을 약 5분 걸으면 기림사이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11교구본사 불국사 말사 기림사(祇林寺)
주소 : 경북 경주시 양북면 호암리 419 번지
기림사는 신라초기 인도 범마라국사문(沙門) 광유성인(光有聖人)이 한건하여 한때는 임정사(林井寺) 라고도 불렀던 선종(禪宗)의 고찰(古刹)이었다.
광유화상이 부처님 도량을 마련하여 오백제자를 교화했다는 설화가 전해져 우리나라 설화문학의 귀중한 자료로 제공하고 있다.
그 이후 신라 선덕여왕12년(643)에 하늘기둥을 깎은 후 다시 승문(僧門)에 들어간 원효(元曉)에 의해 "임정사"는" 기림사(祇林寺)" 로 개칭 되었다.
그리고 왜구가 동해로 침입하는 길목에 놓여 호국사찰(護國寺刹)의 구실을 해왔다. 고려 고종때 삼국유사를 지으신 보각국사 일연스님의 노숙(老叔)인 대각선사 각유(覺猷)가 이 절의 주지로 주석해 있었다.
조선선조 11년(1578)에 축선(竺禪)이 중창하였고, 현종8년(1668)에 승호(勝浩)가 대웅전을 불사했으며, 정조때에는, 경주부윤 김광묵(金光默)이 사재를 털어크게 중수하였다.
철종13년(1862)에는 대 화재로 113칸의 당우가 소진되었으나 열성어필(列聖御筆), 도선생안(道先生案), 부선생안(府先生案) 등의 중요한 유물을 보존해온 까닭에 이듬해 경주부윤 송우화(宋迂和)등의 시주를 받아 복원 하였으며, 그 뒤 고종15년(1878) 중수를 거쳐 1905년에 혜훈(慧訓)이 다시 중수 하였으며 최근에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함월산 기림사는 1911년 31본산(本山)의 하나로 불국사를 비롯한 60 여개의 말사를 감리한 거찰이었다. 그러나 광복이후 교통의 불편과 불국사의 복원으로그 사세가 상대적으로 위축되어 지금은 꺼꾸로 불국사의 말사가 되어 있으며 서산대사의 직전을 이은 스님들이 주지로 주석하여 왔다.
한편 왜구가 동해를 거쳐 경주로 침입하는 길목에 위치한 기림사는 임진왜란 때 승군의 지휘본부로 사용되었으며 진남루, 나팔, 목비, 등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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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냄새가 좋은 '기림사' 숲길
◯ 기림사 천왕문
얼마되지 않은 오르막길을 올라가면 갈림길이 나온다. 그 갈림길에서 오른쪽의 천왕문으로 향해 들어가면 기림사로 갈수 있다. 좌측에는 높은 석축이 쌓여 있다.
소나무 몸매가 너무 아름다워서
언덕위에는 불법을 수호하는 외호(外護), 신장(神將)을 모산 전각인 사천왕문이 나온다. 이 천왕들은 수미산 중턱의 동, 서, 남, 북에서 그들 권속과 살면서 인간의 선악을 관찰하며 불법을 수호한다.
천왕문 주련
擁護聖衆滿虛空 (옹호성중만허공) 허공 중에 가득한 옹호신의 무리여,
都在毫光一道中 (도재호광일도중) 모두가 호광의 한길 속에 있도다.
信受佛語常擁護 (신수불어상옹호) 부처님 말씀을 받아 믿고 늘 지키며
奉行經典永流通 (봉행경전영유통) 경전이 늘 유통토록 받들어 모시네.
◯ 기림사 수각
사천왕문을 지나 무병장수의 상징인 거북상이 있는 약수터가 있다. .
목마른 참배객들에게 시원한 물맛을 전해주는 수각이 나온다.
◯ 기림사 종무소와 차실
법(法)의 집 금당을 향해 들어가면 오른쪽에는 종무소가 자리한다..
종무소 한쪽의 차실방
절 한켠에 비켜있는 다실(차실)의 고즈넉한 분위기는 저절로 마음을 끌리게 한다.
다실이용은 무료이고 지키는 사람도 없으니 한번쯤 들러 비치되어 있는 차 한잔 셀프로 우려내고, 창너머로 바람에 일렁이는 대나무잎들을 바라 보아도 좋을 것 같다....
◯ 기림사 불교용품점
◯ 기림사 진남루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251호)
진남루는 이 절의 중심 건물인 대적광전 남쪽에 자리잡고 있다. 지은 시기는 알 수가 없고 다만 조선 영조 16년(1740)에 쓴 사적기에도 기록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그 이후에 세운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건물은 호국 사찰로 승병 활동과 관련이 있던 것으로 추정한다.
임진왜란 당시 기림사는 전략요충지로서 경주지역 의병과 승병 활동의 중심 사원이었으며, 이 지역 다른 사원과 달리 피해를 거의 입지 않았다.
이때 이 진남루는 승군의 지휘소로 사용되었던 건물이다.
기림사는 왜구가 동해를 거쳐 서라벌로 침입하는 길목에 놓여 호국사찰의 구실을 해 왔다고 한다.
현재 진남루는 기림사에서 운영하는 탬플스테이시에 강의장과 숙소로 활용되고 있다
진남루 내부는 거대한 강당이라고 할정도로 공간이 넓었는데 건물 형태는 익공계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상부 구조 수법이 돋보이는 독특성을 지니고 있다.
나무로 된 여닫이 문이 독특하면서도 아름답다.
정면 7칸, 측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보면 '사람 인(人)' 모양의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새 날개 모양인 익공 양식으로 꾸몄다.
일반적으로 누(樓)라고 하면 중층건물이나 다락집의 형상을 의미하나 여기서는 일반적인 형태를 벗어나 있다. 전통칸으로 우물마루를 깔았고 판벽에 창호를 설치하였으나 현재 사용용도가 바뀌게 되면서 창호가 개체되어 원형을 알 수 없다.
정면이 긴 건물에서 목조구조의 허약성을 보완하는 구조 수법이 돋보이는 건축이다.
◯ 기림사 주지실
너무나 고즈넉하다
진남루와 평행한 위치에는 주지스님 거처인 요사채 '노전'이 있다.
약사전쪽에서 바라본 노전 전각이다.
◯ 기림사 대적광전 ( 보물 833호 )
천왕문을 들어서서 진남루를 향해 응진전과의 사잇길로 접어들면 기림사의 고전각들을 한눈에 둘러볼 수 있도록 가람의 형태가 구성되어 있다. 지형적으로 낮은 사역(寺域)이 곳의 가장 안쪽에 대적광전(大寂光殿)이 있다.
고색창연한 대적광전을 바라보며, 남루하고 낡은듯한 마루에 앉아 그냥 바라만 본다 해도, 세월의 무상함을 통해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을게다.
기림사 대적광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조선 중기의 다포계(多包系) 단층 맞배지붕 건물이다. 신라 선덕여왕(善德女王:재위 632∼647) 때 세운 기림사의 본전(本殿)으로 여섯 차례 고쳐 지었다. 현재의 건물은 5차 중수(重修) 때 형태를 갖추고 있는데, 조선시대인 1629년(인조 7) 무렵에 중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장대석의 낮은 기단에 초석을 놓고 두리 기둥을 세웠으며 앞면에는 화려한 꽃살 분합문(分閤門)을 달았다. 웅장한 건물 내부는 넓고 화려하며 장엄한 분위기를 지닌다. 다포 양식의 이 건물은 조각을 많이 넣은 공포(栱包) 및 내부의 가구(架構) 수법이 17세기 초의 다포 양식을 갖추고 있는데, 특히 중수할 때 옛 모습을 재현하였다. 장엄하고 견실한 구조를 지닌 조선시대의 대표적 불전(佛殿)이다.
진남루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건물이 기림사의 본전인 대적광전이다.
대적광전(大寂光展)은 주불이 비로자나불을 모신 전각이다. 적(寂)은 번뇌를 멸한 고요한 진리의 세계, 니르바나의 세계를 말하며, 광(光)은 그 세계에서 나오는 참된 지혜가 온 우주를 찬란히 비춘다는 것을 말한다.
삼신불의 교리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1. 법신불(法身佛)
비로자나불, 순수하고 차별상이 없는 영원불멸의 진리를 형상화한 부처님이다. 일체의 존재는 그것의 나타남이다.
2. 보신불(報身佛)
노사나불, 과거의 수행에 의한 공덕, 모든 미덕을 구비한 이상적인 인격으로서의 부처님이다. 과거 세상에 모든 만행 선근공덕의 보답으로 갖추어지는 부처님의 모습이다.
3.화신불(化身佛)
중생을 교화 구제하려고 부처님 자신이 중생의 모습으로 변화하여 나타난 것을 말한다. 현세에 인간의 모습으로 출현하신 석가모니 부처님이 바로 천백억 화신불이다.
삼신불(三身佛)은 세 부처님이 따로 존재한다는 뜻이 아니라 한 부처님의 세 가지 관점을 묘사한 것이다. 형상을 여윈 진리에서의 법신불과 만행공덕의 측면인 보신불과 실제 역사 속에서 이 모든 것을 구현하시고 중생을 구제하신 교화의 관점인 화신불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대적광전 부처님, 지혜의 빛으로 세상을 비춘다는 비로자나 불을 본존불로 모시고 있다. 대적광전 소조비로자나 삼존불상으로 중앙에 비로자나불, 조우에 노사나불과 석가불이 모셔져 있다.
대적광전은 절의 본당으로 내부에는 전단토상(栴檀土像)의 비로자나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는데 이 불상은 중원(中原)의 장인이 조성하였다 하며 불상 조성에 얽힌 전설이 전한다.
1986년 9월에 가운데 주존불의 복장에서 ≪대반야경≫ 등 금·은 사경 14권과 조선시대에 만든 불경, 부처님 진신사리 4과 등이 발견 되었다. 이 유물들은 고려시대 이래로 기림사에 전해 내려오던 것을 임진왜란 이후에 이 불상을 만들면서 봉안한 것으로 추정된다.
대적광전 내부에 있는 보물 958호인 삼존불상으로 가운데 비로자나불 왼쪽에 노사나불 오른쪽에 석가모니불을 모셔 삼신불(三身佛)을 이루는데, 향나무로 틀을 만든 뒤 그 위에 진흙을 발라 흙으로 빚은 이 세 불상은 손의 위치와 자세만 다를 뿐 표정과 모양이 거의 같고 옷 주름까지도 비슷하다.
삼존불 가운데 본존불인 비로자나불은 높이가 3.35m로 거대하다. 높은 육계와 촘촘한 나발, 둥글고 박력 있는 얼굴에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다. 장대한 상체보다 상대적으로 하체가 빈약해 보이지만 당당한 체구를 하고 있다. 결가부좌로 앉아 두 손을 가슴에 모아 주먹을 아래위로 포개고 있다.
신라시대의 지인(智印)과 조선시대의 권인(拳印)을 묘하게 결합한 지권인(智拳印)을 하고 있다.
법의는 일정한 두께로 두꺼워진 통견의(通肩衣)를 걸치고 있으며, 넓고 굵게 표현된 옷 주름은 장대한 체구와 어우러져 위엄을 느끼게 한다.
근엄하면서도 정제된 얼굴, 양감이 풍부하지 않은 신체의 표현, 배부분의 띠로 묶은 옷 등에서 16세기 초에 만들어진 불상으로 추정된다.
대적광전의 신중탱
대적광전의 벽화
대적광전 내부는 넓고 화려하여 장엄한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다 . 넓은 전각 안은 장엄한 맞배식 건물의 특성이 그대로 드러나며, 단청이 퇴색하여 느낌이 더 고색 창연하다.
단청이 바랜 기림사의 대적광전
공포에 조각을 많이 넣어 17세기 건축 흐름을 알 수 있고, 특히 수리를 할 때 옛 모습을 손상시키지 않아 중요한 건축사 연구 자료가 되고 있다.
대적광전에 맨살을 들어내고 있는 창살 문양은 그 규칙적인 배열과 나이테의 조화를 음미하기에 넉넉하고...
이 건물에서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앞면에 있는 꽃창살 문이다. 오랜 세월의 흔적을 그대로 드러낸, 색 바랜 그 모습에서 편안함과 포근함을 느낀다.
대적광전 문살, 오랜 세월의 흔적을 그대로 드러낸, 색 바랜 그 모습에서 편안함과 포근함을 느낀다.
좌.우는 6각 원형테두리 솟을 모란 꽃살문 , 중앙 2칸은 솟을금강저 꽃살문
대적광전 협칸 솟을모란 꽃살문
다포계 익공이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대적광전은 전면 5칸, 측면 3칸이고 본존불로 비로자나불을 모신 기림사의 주요 전각이다. 그 대적광전을 중심에 두고 대적광전을 향하여 오른쪽에는 약사전, 왼쪽에 응진전, 대적광전과 마주한 남쪽으로는 진남루를 배치해 사각의 성지를 이루고 있다.
단청을 하지 않은 대적광전에서의 풍경소리를 들으며....
世尊坐道場 (세존좌도량) 부처님께서 도량에 앉으시매
淸淨大光明 (청정대광명) 맑고 깨끗한 큰 빛을 발하시네.
比如千日出 (비여천일출) 마치 천개의 해가 한꺼번에 떠 오른 듯
照曜大千界 (조요대천계) 온 세상을 비추시네.
諸法從本來 (제법종본래) 모든 법은 본래부터
常自寂滅相 (상자적멸상) 항상 적멸한 모습이라네.
◯ 기림사 응진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14호)
응진전과 고려3층석탑
응진전 안에는 오백나한상(경상북도유형문화재 214호)이 봉안되어 있다.
오백아라한은 정확히 526분의 성자이다. 부처님 당시의 제자들 중에 가장 뛰어난 10대 제자, 16성중(聖衆)과 500성중(聖衆)이다. 모든 번뇌를 끊고 열반에 들어간 최고 단계에 있는 사람이다.
제각기 표정, 자세가 모두 다르다.
응진전을 '나한전'이라고도 한다.
나한전으로는 영천 거조암, 영산전을 포함하여 경주 기림사 응진전이 유명하다고 한다.
나한님들의 표정과 웃음을 눈여겨 보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편해진다.
나한전은 석가모니부처님을 중심으로 좌우에 마하가섭존자와 아난존자를 모시고 그 좌우로 16나한 등을 모셔 영산회상을 나타낸다.
물론 삼존불도 없이 나한만 모시는 경우도 있지만, 후불탱화로는 영산회상도, 나한탱화를 모시기도 한다.경주옥석을 재질로 만든 석조 오백나한상 이다.
응진전은 오백나한상을 모신 건물로 전면 5칸, 측면 2칸 겹처마 맞배지붕이다.
장대석 1단의 얇은 기단 위에 화강석 주초를 놓고 전 후면에는 두리기둥을, 측면에는 각진기둥을 세웠는데 후면의 기둥은 1개를 제외하고는 모두 동바리를 하였다.
공포는 내외 2출목이다. 내부 살미의 형태는 주심포에다 교두점 차단과 양봉이 주간포에는 교두점 차단과 삼분도 요두(要頭)를 각각 얹었다.
가구는 5량가이며 대량과 종량위에는 파련대공을 세웠다. 천장은 빗반자를 치고 단청을 하였는데 천장 전체가 빗반자로 된 경우는 드물다. 바닥은 우물 마루를 깔았으며 문비 구성은 전면 각칸에 이분합(二分合)교살문을 달았다.
이러한 형태를 볼 때 관룡사 대웅전의 모양과 흡사한 조선중기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2002년 4월 개분불사를 하는 중에 오백나한 복장에서 조성당시에 씌여진 것으로 보이는 발원문이 나왔다. 여기에 보면 조성년도가 옹정7년(擁正七年)이다 서기로는 1729년이고 우리나라 연호로는 영조5년이다.
대적광전의 왼쪽이 응진전이고, 그 앞이 기림사 삼층석탑이다.
◯ 기림사 고려 삼층석탑 (지방유형문화재214호)
푸른 이끼가 내려앉은 고래시대 석탑
643년 (선덕여왕 12)에 창건된 기림사 대적광전(大寂光殿) 앞뜰에 있는데 통일신라시대의 일반적인 석탑 양식을 따르고 있는 세월의 흐름을 짐작하게 하는 탑이다.
하층기단은 갑석(甲石)부터 남아 있고, 상대중석(上臺中石)에는 우주(隅柱: 모서리기둥)와 탱주(撑柱: 버팀기둥)가 하나씩 모각(模刻)되어 있다.
그 위에 놓인 상대갑석의 윗면에는 4단으로 된 옥신 괴임이 있다. 각 탑신석에는 상대중 석면에 모각되어 있는 우주와 같은 것이 있다.
초층의 옥개석 (지붕돌)에는 4단의 옥신괴임이 갖추어져 있다. 2·3층의 옥개석 역시 4단의 옥신괴임이 갖추어져 있고, 체감률이 고르다.
옥개석의 추녀는 낙수면이 완만하며 전각이 약간 반전되어 있다.
현재 상륜부에는 노반과 복발 · 앙화가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다.
크기는 3m밖에 않되지만 노반 복발 앙화까지 온전한 아담한 삼층석탑이다. 특이한 것은 몸돌 모서리에 기둥을 새겼는데 이 기둥이 배흘림(엔타시스) 기둥이다
◯ 기림사 약사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52호)
대적광전과 평행한 위치에 약사전이 있다.
중심 건물인 대적광전 동쪽에 있는 약사전은 정면 3칸의 맞배지붕의 건물로 약사여래를 모시고 있는 불당이다.
세운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조선 효종 5년(1654)에 고쳐 세운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겉모습이 부드러우면서 균형이 잘 잡혀있는 건축물이다.
약사전의 공포와 겹처마
약사전 삼존불상
약사전은 동방 만월 세계에서 중생 교화를 맡고 계신 약사 여래불을 모신 전각이다.
사람의 병을 고치고 번민에서 구제하시는 부처님으로 약사유리광여래불(藥師琉璃光如來佛), 대의왕불(大醫王佛)이라고 한다. 보살로서 수행하고 있을 때에 12대원(大願)을 발했다고 한다. 중생의 병을 제거하며 모든 감각기관을 완비시켜 해탈로 인도하는 능력이 있다.
일광(日光)보살. 월광(月光)보살을 각각 좌우 협시(脇侍)로서 약사삼존(藥師三尊)으로 삼으며, 권속에는 호법신(護法身)으로서의 12신장을 모신다.
삼존불은 당초 조선시대 후기 혹은 일제시대 작품 소조불로 알려져 왔으나, 삼존불을 옻칠하는 과정에서 덫칠을 벗겨낸 결과 그 밑에서 통일신라시대 채색 소조불이 밝혀지면서 학계에 비상한 관심을....
장엄한 약사전 내부
약사전 내부벽화
약사전에는 약사삼존상과 사천왕상, 사라수왕(沙羅樹王)의 탱화가 봉안되어 있는데, 이 탱화는 기림사 창건의 연기설화를 보여 주는 특이한 불화로서 근래 이를 모사하여 다시 그렸다.
약사전 꽃살살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약사전 앞 소나무 다행송
◯ 기림사 목탑지
선덕여왕이 목탑을 세웠던 자리
약사전 동측으로 약사전 앞의 건물터와 기초석 모습으로 목탑지였던 곳임을 알려주는 유구물이 있고 보리수나무가 있다.
원래 500년이나 된 보리수나무가 있었지만, 태풍 매미로 쓰러져 새 나무가 자라고 있다.
◯ 기림사 요사
대적광전과 약사전 뒷편에는 요사가 자리하고 있는데 요사와 대적광전 배면 사이에는 동서 양쪽으로 길게 담장이 설치되어 있다.
요사입구 작은문 양쪽의 담장의 오른쪽과 왼쪽의 담장 쌓은 형태가 달라서 특이 하다.
◯ 기림사 범종각
법(法)의 집 금당을 향해 들어가면 왼편에는 범종각으로 사용되는 2층규모의 종루를 확인할 수 있다.
범종루는 북, 종, 운판(雲版), 목어(木魚)등 사물(四物)을 두는 곳이다.
북은 걸어 다니는 축생을 위해 두드린다.
종은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을 위해 친다. 아침 예불시에는 28번, 저녁 예불시에는 33번을 친다 이 종소리를 들으면 지옥 옥졸들이 지옥 중생을 괴롭히다가 잠깐 쉰다고 한다.
목어는 물고기 모양으로 나무의 속을 파서 만들었으며 물 속에 사는 중생들을 위하여 두드린다.
운판은 청동이나 철로 만든 구름 모양의 넓은 판인데 날아다니는 중생들이 이 소리를 듣고 해탈하라고 친다.
◯ 기림사 관음전
대적광전 왼편 계단을 따라 올라서면 바로 관음전이 나타난다.
응진전의 동측과 대적광전 서측사이에는 절안의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도록 인도해주는 돌계단이 있다.
자연석 막돌로 쌓은 3층의 축대가 내부담장을 이루듯 둘러쳐있으며 그 가운데에 석계가 있다. 그 계단을 오르면 삼천불전(三千佛殿)과 삼성각(三聖閣). 관음전(觀音殿). 명부전(冥府殿) 등이 나온다.
대적광전 왼편에는 천수 천안 관세음보살님을 모신 전각인 관음전이 있다.
관음전의 천수천안 관세음보살상
천수 천안 관세음보살은 천개의 손과 천개의 눈과 열 한 개의 얼굴을 하고 있고 천(千)은 광대무변(廣大無邊)의 뜻을 나타낸다.
수없이 많은 중생의 고통소리를 보아야 하므로 그렇게 많은 눈이 필요하고, 수많은 중생을 손을 내밀어 구제해야 하므로 그렇게 많은 손이 필요하다는 것을 상징한다.
열 한 개의 얼굴을 한 십일면(十一面) 관세음보살은 아수라도에 있는 것을 구제하는 보살이다.
맨 위의 불면(佛面)은 불과(佛果)를 표현한 것이고, 전후좌우 십면은 보살이 수행하는 계위(階位)인 10지(地)를 나타낸다.
'천수천안관세음보살'은 천개의 손과 천개의 눈은 관음보살의 대자비와 방편을 상징한다.
그러나 실제 조각된 숫자는 마흔개이다. 그 하나 하나 손들이 25유를 구제한다고 보기 때문에 40 x 25 =1,000수가 되는것이다.
일반적으로 관세음보살은 연꽃을 들거나 정병을 잡고 있는것이 대부분이다.
천수천안관세음보살 같은 경우는 저마다의 손들이 구슬, 도끼, 활, 법륜 등의 물건을 손에들고 있고 그 손마다 눈이 달려있다.
'천수관음'에 대한 신앙은 고려 이후 "천수경"보급과 함께 오늘에 이르고 있다.
관음전 내부 벽화
관음전 주련에는
白衣觀音 無說 說 백의관음은 설한 바 없이 설하시고,
南巡童子 不聞 聞 남순동자는 듣는 바 없이 듣는구나.
甁上綠楊 三際 夏 병에 꽂은 버들가지 언제나 여름인데
巖前翠竹 十方 春 바위 앞의 푸른대는 시방에 봄이로다.
관음전 외부벽화
◯ 기림사 삼천불전
관음전 옆으로 삼천불전... 삼천의 부처가 봉안되어 있는 곳이다.
관음전 왼쪽에는 1817년(순조17년)에 초의선사가 기림사 근방에서 나는 옥돌로 천불을 조성해 모신 삼천불전이 있다.
현재의 삼천불전은 최근(1990년경)에 지어진 전각으로 정면 7칸 측면 3칸 108평의 거대한 크기다.
삼천불전 내부에는 삼천불이 모셔져 있는데 이는 항상 어디에서나 부처님이 계신다는 사상에서 유래된 것으로 과거 천불, 현재 천불, 미래 천불의 의미를 담고 있다.
손동작과 모양이 조금씩 다른 천불을 옥돌로 만들어 한꺼번에 보는 모습이 장관이다.
삼천불전의 외부 벽화들
삼천불전 앞의 넓은 마당에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향나무가 서 있다.....
삼천불전 앞 수각
예로부터 기림사는 오정수(五井水)가 유명하였다고 한다
• 명안수(明眼水)
- 이 물을 마시면 눈이 밝아진다고 한다.
• 장군수(將軍水)
응진전 삼층석탑 아래에 묻혀있다.
- 이 물을 마시면 천하무적의 장군이 된다고 하는데 ,혹시 반역자가 생길까봐 우물 위에다 석탑을 세웠다 한다. 지금도 고요한 밤 탑 밑에 귀를 귀울이면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 화정수(華井水)
- 마실수록 마음이 편안해지고, 대중들이 이물을 마시며 정진하면 서로 화합한다고 한다.
• 감로수(甘露水)
북암에 있는 감로수는 물빛이 우유빛이지만 일단 바가지로 뜨면 무색으로 , 이 물로 차를 끓이면 최고로 맛있는 차가 된다고 한다.
• 오탁수(嗚啄水)
동편 산마루에 있는 오탁수는 물맛이 하도 좋아 까마귀가 쪼아 먹었다고 한다.
그 중 장군수(將軍水)는 마시면 힘이 용솟음친다 하여 인근에 널리 알려졌는데, 조선시대 어떤 사람이 이곳에서 역적모의를 하다가 발각된 뒤 나라에서 삼층석탑을 옮겨 샘의 물줄기를 막아 버렸다는 이야기들이 기림사의 전설로 남아 있다.
응진전 앞쪽 탑 자리에도 샘이 있었다고 하나 이미 자취를 감추었고, 또 하나는 절 입구에 있었으나 최근 도로확장 때 매몰되었으며, 지금은 북암에 있는 감로수와 후원의 화정수만이 마실 수 있다.
◯ 기림사 삼성각
삼천불전옆 명부전 구역에 있는 정면 3칸의 맞배지붕인 삼성각 이다.
삼성각은 나반존자(독성,獨聖), 칠성(七星)과 산신(山神) 세분을 한꺼번에 모셔 놓은 전각 이다.
삼성각은 나반존자(독성,獨聖), 칠성(七星)과 산신(山神) 세분을 한꺼번에 모셔 놓은 전각이다.
나반존자는 남인도 천태산에서 홀로 선정을 닦아 십이연기(十二緣起)를 깨달은 성자이다.
칠성은 본디 중국에서 유입된 도교신앙의 신으로 한국에 들어와 토착화되었다. 처음에는 약사 신앙과 결합되었다가 조선중기 이후 수명신의 본디 모습이 강조 되었다.
산신은 주로 호랑이와 같이 있으며 산을 주재하는 신이다. 불교에 들어와서 호법신중(護法神衆)의 하나로 흡수되었다
◯ 기림사 명부전
삼성각 왼쪽에는 정면 3칸 맞배지붕의 건물로 안에는 지장보살과 시왕상을 모신 명부전이 있다.
지장보살은 도리천에서 석가여래의 부촉을 받고 매일 아침 선정에 들어 중생의 근기를 관찰한다.
석존이 입멸 후부터 미륵불이 출현 할 때까지 몸을 6도에 나타내어 천상에서 지옥까지 일체중생을 교화하는 대자대비한 보살이다.
석장을 짚은 사문의 모습의 형상을 하고 계시며 지옥에 있는 모든 중생을 다 구제하고 나서 부처가 되겠다는 거대한 서원을 세운 대비대원(大悲大願)보살이다. 좌우로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이 협시(協侍)하고 있다.
명부시왕은 죽은 자의 영혼이 가는 명계(冥界)를 다스리는 열 분의 왕이다.
시왕은 진광대왕(秦廣大王), 초강대왕(初江大王), 송재대왕(宋宰大王), 오관대왕(五官大王), 염라대왕(閻羅大王), 변성대왕(變成大王), 태산대왕(泰山大王), 평등대왕(平等大王), 도시대왕(都市大王), 오도전륜대왕(五道轉輪大王)이다.
명부전은 영험있는 지장보살상과 지장 시왕상 그리고 지장 탱화가 전하여 지장기도의 참배객이 발길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명부전 뒤의 요사
명부전에서 바라본 기림사 전경이다..왼쪽이 명부전이고 중간이 삼성각, 오른쪽이 삼천불전 이다.
◯ 신문왕 호국행차길
명부전과 화정당 요사 건물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숲길로 나가면...
멀리 정자가 보인다...
문향정이다...
문향정에서 바라본 연못
문향정에서 바라본 암자
이 길은 신문왕이 다닐적 기림사에서 점심을 먹었다고 한다..
다시 기림사로 돌아온다...
◯ 기림사 템플스테이 요사채 (화정당과 해행당)
밖에서 본 화정당
화정당의 안쪽
화정당과 해행당
해행당이다.
◯ 기림사 유물전시관
기림사에는 유서깊은 사찰에 걸맞게 많은 성보문화재가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경주기림사 건칠보살반가상 : 보물 제415호
건칠불이란 나무로 골격을 만든 뒤 삼베를 감고 그 위에 진흙을 바른 다음 속을 빼낸 불상을 말하는데, 우리나라에는 남아 있는 예가 매우 적어 이 불상의 가치가 더욱 크다.
타래머리 위에 보관(寶冠)을 따로 만들어 올렸으며 관 표면에는 덩쿨무늬가 화려하게 새겨져 있다. 얼굴은 둥글고 풍만하며 눈· 코· 입 등이 단아하게 묘사되어 보살상의 특징있는 얼굴을 만들어 내고 있다. 양 어깨에는 천의(天衣)를 걸치고 있으며, 목에는 3가닥의 장식이 달린 목걸이를 하고 있다. 가슴 부분에 있는 독특한 띠매듭은 조선시대에 나무로 만든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왼손은 대좌(臺座)를 짚고 다리는 대좌 아래에 내린 반가좌(半跏坐)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이런 자세로 보아 관음보살을 형상화한 것으로 짐작된다. 전반적으로 얼굴 모습이나 체구는 당당한 편이나 손과 발이 작게 만들어져 비례감이 떨어진다. 보살상의 대좌에 홍치(弘治) 14년(연산군 7년, 1501)에 만들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유례가 드문 건칠불이라는 점에서 매우 귀중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유물전시관 뒷문으로 나와 본다...
◯ 기림사 백운당
화정당과 해행당의 왼쪽에, 공양당 위쪽에 위치 한다.
기림사 보살 직원들의 처소 같았다...
◯ 기림사 공양당
정갈한 공양당의 장독대
백운당과 공양당
◯ 매월당 영당
삼천불전에서 보면 오른쪽 낮은 언덕위로 매월당 김시습의 사당이 있다.
이 영당은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의 영정을 모신 곳이다.
선생은 세종17년(1432) 서울에서 태어나 신동으로 장래가 촉망하였으나 단종3년(1455)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세상사에 뜻을 버리고 불교에 귀의하여 전국을 유랑하다가 세조10년 경주 금오산 용장사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를 저술하였다.
그후 성종2년(1471) 경주를 떠나 일시적으로 환속하였다. 성종24년(1493) 충청도 홍산의 무량사에서 일생을 마쳤다.
무량사 김시습 사당에 그려져 있는 자화상을 모사하여 다시 봉안하였다 한다.
선생의 시호는 청간이다. 매월당은 김시습의 호이다.
매월당은 경주 남산 용장골에 조그만 산실을 짖고 7년을 머물면서 금오신화를 지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곳에 사당이 있었다.
영조 44년(1768)에 부윤 홍술해가 당을 개축하여 위판(位板)을 봉인하려다가 이루지 못하고 , 후에 금령에 의해 훼절되니 , 고종15년(1878)에 이를 애석히 여긴 경주유림이 기림사 주지스님에게 부탁하여 기림사로 옮겨 세워 초상(肖像)을 봉안하고 여기에 딸린 논밭을 함께 넘겨 주었다.
최근(1996)에 당이 무너질 염려가 있자 경주유림의 요청으로 경주시가 시비를 들여 절 담장 안에 새로 사당을 지었으며 , 강원김씨 종친에서 무량사 김시습 사당에 그려져 있는 자화상을 모사하여 다시 봉안하였다.
백운당에서 바라본 매월당 영당
유물전시관 후원에서 바라본 매월당 영당
◯ 매월당 영당 옆의 기림사 요사
유물전시관 후원에서 요사로 오르는 길이 너무나 정겹고 친숙하다.
얼마전에 와 봤을때도 없었던 새로이 개축한 요사다..
새로이 개축한 요사 앞에서 바라본 기림사 전경이다.
◯ 기림사 전경들...
◯ 기림사 산내암자 여운암을 향하며...
매월당 영당과 새로이 개축한 요사를 지나 기림사 산내암자를 향하여 본다..
기림사 산내암자를 향하다 보니 기림사 직원 처사용 숙소가 보인다.
거기서 조금 더 오르니 온통 도솔천을 연상하는 꽃 무리 속에 전각하나가 보인다.
◯ 기림사 선원
고즈넉한 분위기를 더욱 한층 느낄 수 있을것 같은 곳...
그곳에 선원이 있었다.. 내 기억 속에는 남암이 있던 전각 이었던 걸로 기억 하는데 현판이 바뀌어 있었다...
공부하시는 스님들께 방해가 될까봐 고요한 선원을 조심스러 빠져 나와 여운암으로 향해 본다...
◯ 기림사 여운암
선원에서 지척에 있는 여운암 가는 길....
여염집 같은 소박한 여운암이 있었다.
댓돌에 고무신 한켈레가 보이길래 법당에 부처님만 조용히 뵙고 가고자 아주 조심스레 입구 유리 미닫이문을 밀고 들어서니 노스님께서 기침을 하신다...
방해가 된것같아 송구해 하며 부처님 뵙고 나갈려니 방해 안된다며 쉬어 차 한잔 하고 가라하셨다.
소박한 여운암 법당의 관세음보살님
법당 한쪽에는 정갈한 스님 가사장삼이 보이고..
다른 한쪽에는 찻잔도 보인다.
돌에 그려진 연꽃이 스님 거쳐 방문앞을 장식하고 있었다.
기림사 여운암 종현스님께 귀한 말씀 듣고 맛있는 차까지 얻어 마시는 행운도 누렸다.
여운암 법당 앞 툇마루에서 바라본 함월산
암자를 기틀집 형식으로 나무와 나무 사이를 진흙으로 매워서 만든 참으로 아담하고 예쁜 암자였다.
정겨운 여염집같이 소박한 기림사 여운암을 뒤로 하고 기림사의 숲길을 내려온다.
내려오면서 마주친 구절초가 내게 작별을 고한다.....
기림사의 숲길은 오래묵은 나무냄새가 사람들의 코를 자극하며, 눈을 만족 시켜준다.
불국사의 그늘에 가려 기림사의 아름다운 자태가 묻혀 있지만, 오히려 그로인해 고즈넉한 분위기를 더욱 한층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한번 기림사를 다녀온 사람은 불국사 보다는 기림사를 찾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찬란하고 아름다운 불국사의 문화가 낯선 느낌으로 다가오는 사람이 있다면, 고즈넉하고 고요한 기림사의 분위기, 그리고 오래된 숲의 향취에 빠져볼 것을 권한다.
그 오래된 숲에는 나이많은 느티나무들의 잔가지마다 햇살의 부서짐 또한 장관을 이룬다.
다섯 가지 물 맛을 낸다는 기림사의 오정수처럼 절 또한 다양한 느낌을 주고 있다. 그 느낌 속에서 자신만의 빛깔을 찾아내는 소중한 경험을 할 수 있을게다.
주말이면 사람이 많아 한적한 오후를 즐기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경주의 기림사를 추천한다. 기림사 하면 그저 경주의 한 사찰이거니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혼자 사색하고 싶을때 떠난다면 이 가을의 향취와 기림사의 숲길이 사색에 더욱 도움을 줄것이다.
만약 누군가의 동반이 필요하다면, 바람과 기림사의 고요한 분위기가 동반이 되어 줄것이다.
그 자유로움 속에서 나 만의, 온 우주속의 모든 만물과 대화하는 사색의 시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일주문을 나와
임정교도 지나
기림사를 떠나 원래의 나의 자리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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