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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화사(경북 봉화)사찰여행/경상도 2013. 7. 18. 20:54
각화사
2013. 7. 18.
2013. 7. 14 .불교산악회 산빛 어울림에서 함께한 왕두산 산행 후 둘러본 각화사.........
춘양목이라는 질 좋은 소나무로 유명해진 봉화군 춘양면 석현리에 있는 각화사는 태백산 지류인 각화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는데 의성 고운사의 말사다. 아주 오래 전 지금의 춘양면 서동리 춘양상업고등학교 교정 자리에 남화사라는 절이 있었으나 서기 665년(신라 문무왕 5년)경에 원효대사가 이곳으로 이건하여 남화사를 생각한다는 뜻으로 각화사라 명명했다고 한다.
한때 불에 소실되어 고려 예종때 계응이 중건하였다. 1777년 정조에는 이곳에 태백산사고를 지어 왕조실록을 수장하게 하였으며 수도하는 승려가 800여명이 넘어 한때는 3대 사찰의 하나가 되었다.
1910년 사고와 절이 아깝게 소실되어 다시 1926년에 달현이 이절을 중수하였는데, 옛 절터에 남아있는 3층 석탑과 귀부만 전해온다. 하지만 마멸과 파손이 심하여 정확한 고증이 어렵고, 특히 귀부는 비석이 없어져 유래와 시대를 알수 없다고한다.
현재에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너무나 아타까움과 문화재에 대한 애착을 새삼 느끼는 대목이다.
각화사가 자리한 태백산 자락은 삼재(三災)가 들지 않는 길지다. 사고(史庫)가 들어선 뒤 각화사는 800여 명의 스님이 주석하는 대도량이 되었지만, 1913년 이 절이 의병의 근거지가 되면서 일본군에 의해 불탔다고 한다. 이후 각화사는 달현· 금오· 경하· 현우· 현장 스님이 중건해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 각화사를 향하여
언제나 산사여행을 떠나는 마음은 학창시절 수학여행을 떠나는듯 설레이는 맘은 어쩔수 없는가보다.
각화사로 들어가는 계곡은 그다지 길거나 깊지는 않지만 울창한 숲과 맑은 계곡물, 청량한 바람과 귓전을 간지럽히는 새소리가 고적한 산사의 분위기를 돋우어 준다.
유난히 맑고 청정한 계곡수가 사시사철 경내로 흘러들어 물이 마르지 않아 산사의 분위기를 마음껏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또한 각화사로 들어가는 길은 하늘을 덮는 울창한 숲과 바람, 청아한 새소리에 초입부터 흠뻑 가슴이 젖어들게 된다.
경내에 오르기까지는 산세가 가까이 둘러앉아 마치 어머니 품속처럼 아늑하고 평화로움을 준다.
◯ 각화사 귀부 (覺華寺 龜趺) -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189호
고즈넉한 각화사를 향하는 발걸음이 빨라진다.
각화사 귀부(龜趺)는 비석의 대좌 역할을 하는 받침돌의 일종으로, 고려 전기의 문신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김심언(金審言: 신라 경순왕의 넷째 아들 김은설의 4세손이다)이 세운 통진대사비(通眞大師碑)의 일부로 알려져 있다.
이 귀부는 지대석과 한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거북이 등 중앙에 마련된 비좌(碑座)가 약간 파손되긴 하였으나 거의 본래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등의 무늬는 육각형이 전면에 덮여 있고, 그 안 마다 ‘왕(王)’자와 ‘만(卍)’자를 도드라지게 새겼다.
고려 전기의 정교하고도 웅대한 조각 솜씨를 이어받고 있으나, 몸통에 비해 머리가 작은 감이 있다. 1984년에 만든 '각화사기적비'와 머릿돌인 이수(螭首)를 대좌 위에 올려놓았다. 귀부의 크기는 높이 92cm, 길이 220cm, 너비 190cm이다.
바닥 돌과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등 무늬는 6각형이 전면에 덮혀 있고 육각형의 무늬에는 왕자와 불자가 도드라지게 새겨져 있다. 아마도 이 사찰이 태백산 사고를 외호하는 곳이어서 일 것이다.
◯ 각화사 부도
각화사에는 그 동안 덕 높은 고승을 아홉 분 배출했다고 한다.
사찰의 입구에는 이들의 부도라고 전해지는 오래된 부도가 있다. 부도는 스님이 입적했을 때 그 육신을 화장하여 수습된 사리나 유골의 일부를 넣어두는 무덤과 같은 것이다. 불가에서 육신이란 그저 껍데기에 불과하여 남긴다는 자체가 무의미 할 수는 있지만 남아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인연의 정표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부처의 사리가 아무리 귀한들 “너 자신에 의지하고 진리에 의지하라”는 부처님의 마지막을 새기지 못하는 한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이다.
오늘 돌덩이로 서있는 고승들이 남기고자 했던 말은 무엇이었을까? 소소소 부는 골바람을 등으로 받으며 서있다가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 한 채 각화사로 발걸음을 옮긴다.
봉화 각화사에는 10기의 석종형 부도가 남아 있다. 1m 남짓한 고만고만한 크기다. 이중 5개 부도에 명문이 남아 있어 주인공을 알 수 있는데, 이중 하나가 이 절을 중창한 경하당 대현(京河堂 大鉉) 스님의 것이다. 탑신에 ‘중창주’라는 명문이 있어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소략한 기록 때문에 각화사의 내력을 자세히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대현 스님이 어느 시대에 살았던 분인지 알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재질은 화강암으로 방형(方形)의 지대석 위에 원형의 부도좌(淨屠坐)를 만든 후, 종형(從形)의 부도(淨屠)를 올려 두었다. 부도는 배흘림식의 몸통을 가졌으며, 상부는 원추형(圖錐形)으로 처리했고 그 밑에 2단의 몰딩 처리가 있으며 주위에 단변의 복연이 양각되어 있다. 부도중 5기에는 몸통에 종으로 부도의 주인을 나타낸명문( 銘文)이 새겨져 있다.
‘각화사기적비’에 따르면 각화사는 “18대 조사가 탄생할 자리”다. 9대 조사인 백월당 상정(白月堂 尙定) 스님은 이 절에서 9명의 조사가 더 나올 것이라 예언했다. 부도 10기 중 9기는 백월당을 비롯한 아홉 조사의 것이라고 한다.
각화사입구 선정비
◯ 각화사 월영루
각화사로 들어가는 누각의 모습이다. 태백산 각화사라고 씌어 있다. 이곳의 산은 따로 각화산이라고 부른다 한다.
월영루(月影樓)는 각화사의 종루(鐘樓)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루로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달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누각'이라는 멋스런 이름의 월영루가 나그네를 반긴다. 아닌게 아니라 달뜨는 밤에는 그림자에 취해 자신을 잊어버리고 헤매봄직한 풍광이다. 달과 노니는 것은 호수가 제격인데 실낱 같은 계곡을 옆으로 끼고 산을 두르고 섰는 월영루도 운치가 있을 듯 하다.
이 종소리 들으시고 번뇌 망상 끊으소서.
철위산의 깊고 어두운 무간지옥 다 밝아지며 지옥, 아귀, 축생의 고통과 도산의 고통을 모두 여의고
모든 중생 바른 깨달음 이루어지이다.
첩첩한 저 청산은 미타굴이요 망망한 푸른 바다는 적멸궁일세.
물물이 오감에 걸림이 없는데 소나무 정자에 학의 머리 붉음 몇 번이나 봤는가.
聞鍾聲煩惱斷。鐵圍幽暗悉皆明。三途離苦破刀山。一切衆生成正覺。
靑山疊疊彌陀窟。蒼海茫茫寂滅宮。物物拈來無가碍。幾看松亭鶴頭紅。
◯ 각화사 삼층석탑
오랜세월의 흔적이 탑에 낀 이끼에서 느껴진다.
세월의 풍파만큼이나 이끼 낀 석탑의 모습에서 수많은 인연들의 간절함과 기도의 정성이 담긴듯 말없이 서있는 영겁의 무게가 느껴진다....
삼층석탑은 요사 앞에 세워져 있다. 세월이 오래되어 다소 흔들린 듯하지만 각 부재가 거의 제대로 남아 있어 한국 탑파양식 연구에 도움이 된다. 지대석 위에 하층, 상층 기단이 있는데 특이하게도 하층과 상층 사이에 판석 1매가 끼워져 있어 마치 상층 기단을 바치는 듯하게 설치하였다. 이러한 형식은 드물다. 상층 기단은 4매의 판석으로 이루어졌는데 각 모서리마다 우주가 새겨졌고, 가운데는 탱주(撐柱) 하나가 새겨져 있다.
초층 탑신석 이상의 부재는 전부 1매석으로 되었는데 초층 탑신 위에 덮인 옥개석의 받침은 5단이며 옥개석 상부가 탑신부에 비해 과도하게 커서 불안정한 느낌을 준다. 2층과 3층 탑신부는 크기가 서로 비슷하며 옥개석의 받침은 3단으로 되어 있다. 상륜부 역시 한 돌로 되었는데 노반위에 보주형태가 아주 큼직하게 올려져 있다. 높이는 2.9m이다. 고려시대의 작품이다.
◯ 각화사 대웅전
각화사 대웅전 오르는 길
각화사의 대웅전은 팔작지붕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되어 있다.
안에는 최근에 조성한 금동석가여래좌상과 후불탱, 신중탱이 봉안되어 있다. 내부 장엄에는 부처님 당시 때 부설거사 타병법시와 자비동자 토병공양, 설산동자 위법망구가 그려진 그림의 내용이 보는 이의 신심을 불러일으킨다.
대웅전 내부에 석가여래좌상만 모시고 있는것이 특징이다...
신중탱이 봉안되어 있다.
대웅전 주련
天上天下無如佛。 천상천하 어디에도 부처님같이 존귀한 분은 안 계시고
十方世界亦無比。 시방 세계를 다 둘러봐도 역시 비교될 만한 분 없도다.
世間所有我盡見。 세간에 있는 것 모두를 내가 다 보았어도
一切無有如佛者) 모두가 부처님같이 존귀한 분 없도다.
참으로 아름다운 문 살이다.
볼륨있는 양각으로 새기고 단청으로 생명을 불어 넣어 둔 장인의 들숨과 날숨이 느껴지는 듯 하다.
대웅전 창문의 도깨비 문양
산운각에서 바라다본 대웅전
◯ 각화사 산운각
사찰에서 제일 높은 곳에는 예외 없이 산신각이 자리 잡고 있다.
불교가 우리 땅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민중신앙을 버리지 않고 수습하여 보존했다. 우리의 인식에는 높은 지형적 위치를 중요시 한다. 그럼에도 산신각을 위에 배치했다는 것은 불교의 포용적 서고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규모가 큰 절에는 여기에 산신, 칠성, 독성이 같이 있기도 한다. 이른바 우리 민족 고유의 삼신사상의 표현이다. 오늘날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종교분쟁들은 다른 종교를 인정하지 있는데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념에 의한 분쟁보다 종교와 같은 신념에 의한 분쟁이 훨씬 많다는 것이다. 오래 전 역사부터 상고해보면 종교적 신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살상된 인간의 수는 그야말로 천문학 적이라 할 것이다. 과연 종교는 인간에게 있어서 복인가 화인가?
맞배지붕에 앞면과 옆면 각 1칸씩의 규모를 하고 있다.
안에는 산신상과 산신탱, 그리고 칠성탱과 독성탱이 봉안되었는데 전부 최근에 조성한 것이다.
산운각 천정에는 황룡과 청룡이 자리하고 있다.
산운각 내부 벽화다.
산운각 외부 벽화다.
◯ 각화사 태백선원
봉화 각화사 15개월 가행정진
지난 15일 전국 선원에서 3개월간 수행정진에 들어갔던 2천200여 승려들은 만행(萬行)을 떠났지만 봉화 각화사(주지 철산 스님) 태백선원에 든 스님들은 아직도 용맹정진을 계속하고 있다. 지난해 11월19일 동안거에 들어가면서 장장 15개월의 가행정진(加行精進)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전국에서 찾아온 뭇 수좌들 가운데 30여명만이 입방을 허가 받았다. 가행정진의 일과는 오전 1시 일어나 공양시간을 제외하고 15~18시간 참선을 하는 고된 과정. 잠자는 시간은 2~3시간에 불과하다.
각화사 선풍을 이끌고 있는 스님은 태백선원장 고우 스님(67). 직지사에서 출가해 40여년 동안 전국의 선방만 돌며 수행에 전념해 온 선승이다.
고우 스님은 한국의 대표적인 선원인 문경 희양산 봉암사를 조계종 특별종립선원으로 격상시킨 주역으로, 1968년 봉암사 주지 등 소임을 맡아 봉암사의 선풍을 세우고, 사찰을 지켜 냈다.
이런 각화사가 우리나라 선(禪) 수행사상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운 15개월 용맹정진을 마치고 의미있는 회향(廻向)을 맞을지에 불교계 안팎의 비상한 관심이 쏠리고 있다.
동암으로 가려면 선원을 지나야 된다.. 선원 입구. 이곳을 지나 산위로..
많은 경고판 ..수행중이라 출입을 금함...
◯ 각화사 요사
1. 대웅전 옆 요사
종무소가 있는 대웅전 옆 요사
2. 범종각에서 대웅전쪽으로 좌측의 요사
3. 범종각에서 대웅전쪽으로 우측의 요사
공양당이다.
◯ 각화사 전경
법당 앞에 서서 멀리 경치를 조망하니 이곳이 제법 높은 곳인지 시원한 풍광이 박하향이 입안을 가득 메우듯 눈을 시원하게 한다.
누군가가 빨래를 널고 있다. 깊은 산골이고 풍광이 좋은 곳이니 번잡스러운 세상의 경계를 넘어와 공부중인 사람인 모양이다. 각화사도 관광객들이 몰리는 여느 절들과는 달리 고즈넉해서 공부하기에 적당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이곳은 불교계에서도 아주 유명한 길지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지금의 각화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선원으로 등록하여 전국의 수좌들이 모여 공부하는 도량으로 이름이 나있다. 유난히 강한 기운이 넘쳐 오래 정진을 해도 몸이 쉽게 가라앉지 않고 정신이 맑아 전국에서 발심한 납자 스님들이 안거에 들기 위해 많이 찾아온다. 그래서 다른 선방의 결재기간이 3개월인데 비해 이곳 각화사만은 오래 정진을 해도 지치지 않아 결재 기간이 무려 9개월이나 된다고 한다.
선(禪)이란 바로 내가 나를 깨닫는 길이며, 그 길을 통해서 목적지에 도달할 수가 있는 것이다. 아무리 내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가 있다 하더라도, 그 목적지에 도달하는 바른 길을 알고, 또 열심히 행하지 않으면 그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나를 깨달아서 생사해탈을 하고 불조(佛祖)의 혜명(慧命)을 이어 받음으로써, 나도 영원히 행복하고 모든 중생도 영원히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깊은 발원이 있다 하더라도, 바른 수행법을 알지 못하면 그 발원을 이룰 수가 없는 것이다. 또 바른 길을 알았다 하더라도, 쉬지 아니하고 중단하지 아니하고 열심히 가지 아니한다면 성취할 수가 없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각화사엔 쉼없이 정진하는 수좌들의 기운들로 가득하다.
또한 각화사는 조선시대 때는 태백산 사고의 수호사찰이었다. 태백산 사고는 1606년 (선조39년)에 지어져 1913년까지 약 300년간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해왔다. 현재 태백산 사고는 불타 없어졌고 그 자리에는 부서진 기왓장과 축대만이 들풀 속에 흩어져 있다. 사고에 보관되어 있던 조선왕조실록은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보관 중이다.
태백산의 정기가 오롯이 전해지는 이 곳은 마치 산의 품에 든 것처럼 편안하다. 산도, 들도, 물도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그런 곳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 곳을 우리는 길지(吉地)라고 한다. 각화사도 이름난 길지여서 다른 절에서 3개월 동안 하는 안거를 여기 태백선원에서는 9개월이나 한다고 한다. 그만큼 공부하는 자연적 조건이 좋다는 것이다.
대충하지 않는 다는 것이야 말로 수행자의 마땅히 갖추어야할 덕목이다. 누구나 태어나 죽는 그 날까지 무었인가를 추구하는 수행자적 삶을 산다. 살아간다는 것이 곧 수행의 삶인 것이다. 나는 매일을 매 순간을 치열하게 살고 있는지 반성해 본다.
◯ 각화사 암자 二見庵
각화사 월영루 영역과 이견암을 이어주는 다리
다리는 늘 저쪽과 이쪽을 이어주는 매개이다. 강이나 계곡은 이쪽과 저쪽의 경계였음은 동서양이 동일하다. 서양에서도 사람이 죽으면 요단강을 건넌다고 하고 동양 역시 강을 건너간다. 강을 건넌다는 것은 현실에서의 도피이기도 하고 동시에 이상세계에 도달하는 것이기도 하다.
각화사 가까이의 이견암
흙담벽의 너무나 단아한 암자다...
이견암에서 바라본 각화사
◯ 각화사를 내려가며
월영루 영역에서 다시금 바라다본 각화사 대웅전을 뒤로하고....
월영루를 나선다.........
월영루 계단 내려와서 주차장에서 바라본 이견암이다....
한가로운 숲속엔 옛 선사의 법향만 흐르고 .............
흥망성쇠는 세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출세간의 납자들이 모여 수행하는 사찰도 흥망성쇠를 피해갈 수 없다. 때로는 수 백, 수 천의 납자가 본지풍광(本地風光, 어떠한 미혹이나 번뇌도 없는 부처의 경지)을 향해 정진하는 수행도량이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근근이 법등을 이어가는 쇠잔한 고찰이 되거나 옛 영화를 잃고 흔적마저 가늠하기 힘든 폐사가 되기도 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무상(無常)하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니 사찰인들 어찌 그 진리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허허로운 폐사지에 서서 ‘제행무상(諸行無常)’의 가르침을 되새기는 것도 수행의 한 방편이 되리라.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라는 반야심경의 마지막은 ‘가자 가자 피안으로 가자 우리 함께 피안으로 가자’라는 뜻이다. 산다는 것은 영원한 시간의 저쪽에서 권태를 잊어버리기 위해 잠깐 산보 나온 것은 아닐까? 천상병 시인의 시에서처럼 소풍 나온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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