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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전 천정이 화려한 월악산 신륵사 (충북 제천)사찰여행/충청도 2012. 10. 30. 15:43
극락전 천정이 화려한 월악산 신륵사
2012. 10. 30.
2012. 10. 28. 07:00 " 한국불교대학 관음사 포항도량 도솔산악회"에서 충청북도 제천의 월악산 제비봉으로 10월 가을 단풍산행에 함께 동행했다.
07:00 포항 출발 → 영천 휴게소에서 시락국에 밥 말아서 김치랑 아침 먹고 한참 쉬고 안동 휴게소 한번 더 들러 10:40 충주댐 얼음골 제비봉탐방로에 도착, 화장실. 기타 준비하고 11:00 얼음골 들머리 들어서서 제비봉 정상으로 다시 장화나루까지 6.1km를 걸어 15:30에 장회나루에 도착 후 신륵사도 들러 기도 후 하산주 뒷풀이 후 17:00 포항으로 출발 21:10 포항에 도착 한다.
예정에 없던 신륵사를 덤으로 볼 수 있어 참 행복했다...
월악산의 풍광과 오염되지 않은 옛절의 그 느낌 한적함과 고요함 ..
다시한번 가고 싶은 사찰이다.
○ 신륵사를 향하여
신륵사 가는 길 - 이 길을 따라 오르면 월악산 영봉에 오르는 등산로가 나온다
멀리 월악산 영봉이 보인다.
신륵사가 있는 월악산은 달이 뜨면 영봉에 걸린다 하여 월악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입구의 건물은 최근에 지어진 것으로 천왕문을 지을려고 한 것 같으나 사천왕상을 모실 수 있는 공간만 있다.
신륵사
충청북도 제천시 덕산면 월악리 월악산(月嶽山)에 있는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의 말사이다.
582년(신라 진평왕 4) 아도(阿道)가 창건했다고 하나 이 때는 이미 아도가 입적한 이후이므로 나중에 창건자로 삼은 것으로 추정된다. 문무왕(재위:661∼681) 때 원효(元曉)가, 조선 초기에 자초(自超:1327∼1405)가 각각 중창했으며 명종(재위:1545∼1567) 때 유정(惟政)이 다시 중창한 바 있다.
1950년 6·25전쟁 때 폐사된 것을 1960년대에 중창하여 오늘에 이른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극락전과 산신각·국사당·요사채 등이 있다.
○ 신륵사 극락전
오랜 세월의 풍화로 단층은 퇴화되어 고풍스런 이미지를 나타내고 있었다...
신륵사 극락전(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32호)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多包系) 맞배지붕건물. 신륵사는 신라 진평왕 4년(582)에 창건되고, 그 뒤 문무왕 때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중수하였다고 전해오고 있으며, 조선 선조 때 사명대사(四溟大師)에 의해 중건되었다고 한다.
극락전 아미타삼존불
내부 가설된 불단에는 주불인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을 모시고 있고 협시불로 지장보살, 관세음보살의 삼존이 봉안되어 있으며, 탱화 중에서는 1806년(조선 순조 6) 경에 그린 아미타후불탱화가 가장 오래되었다.
본존을 모신 불단은 격자형으로 나눈 3단의 구성으로 각 격자 안에는 안상(眼象)을 새겼다. 불단 위에는 아미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협시로 지장과 관음보살을 모셨다. 모두 별도의 연화좌 위에 모셔진 목조의 좌불이다. 아미타여래는 결가부좌한 무릎 위에 양 손을 올려놓은 모습으로 어깨가 좁고 상체가 긴 편이다. 조선시대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본존 위쪽에는 간단한 형식의 닫집을 설치하고 그 아래 천장에는 두 마리의 용을 서로 마주본 모습으로 그렸다.
후불탱화는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모습의 아미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보살과 신장 및 나한을 대칭으로 그렸다. 역시 조선시대 후기의 탱화로 보인다.
후불탱화의 크기는 가로 280cm, 세로 300cm화기 아래 부분이 잘려져 있고, 탱화 좌우의 산중질과 연화질도 반쯤 잘려진 상태라서 정확한 연대측정은 어렵다. 다만 왼편 화기 연화질 부분에 ‘가경십○년(嘉慶十○年)…’ 이라는 기록이 있어 이 그림이 1806년에서 1814년 사이에 조성된 것을 추정해 볼 수 있는데 그림을 그렸다는 금어스님은 확인할 수가 없다.
동쪽 벽 중앙에는 고주 사이에 본존을 모신 불단과 동일한 형식의 불단을 만들어 중단(中壇)을 구성했다. 불단 위의 벽면에는 검은 바탕에 금색으로 그리고 약간의 채색을 한 신중탱을 걸었다. 1987년에 조성된 것으로 하단 중앙에 화기(畵記)가 있다.
칠성탱화
신륵사 극락전 천장을 쳐다보면 우리 나라 나라 어느 절집과 비교해도 화려함이 뒤지지 않는 장엄한 그림과 조각들로 빽빽하게 채워져 있다.
천장 가운데에는 용을 비롯한 여러 모양을 조각하였고, 좌우 벽면에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각각 사자와 코끼리를 타고 있는 고색창연한 그림을 비롯해서 천동․천녀 주악도 등의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주악상을 중심으로 잉어인 듯한 30여 마리의 물고기가 양각으로 새겨져 있는 것이 색다르다.
천장 가운데의 네 귀에는 네 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기상으로 그려져 있다. 이렇듯 천장을 화려하고 현란하게 장식하는 이유는 법당은 부처님이 사부대중을 위해 설법을 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석가모니여래불이 영취산에서 제자들과 함께 법화경을 설법할 때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져 내렸던 꽃의 환상과 신비를 법당 안에 재현하기 위함이다.
내부 우측벽면상단 보현동자상
내부 좌측벽면 중앙상단 문수동자상
천정판벽화 악기를 연주하는 천인들
아무래도 천정화의 백미는 이 주악도 인것 같다. 다른 절에서도 주악비천이 보이기는 하지만 벽의 한쪽에 작은 그림으로 있는 경우가 많은데 신륵사는 천정 중앙에 크게 6분의 주악비천을 모셨다.
쌍룡이 노니는 그림도 재미 있다.
내출목이 봉두이다. 대부분의 절은 용으로 조각되어 잇는것이 보편화 되어 있는데 신륵사는 봉황으로 조각되어 있는것도 특이 했다..
천정은 격자로 만들어서 여러마리의 학이 방향을 바꾸어 가면서 날아가는 모양을 그렸다.
삼존불상단의 과거칠불
또, 천장 가운데에 용을 비롯한 여러 모양을 조각하였고, 좌우에는 문수(文殊)·보현(普賢) 두 보살을 그렸다. 한편 바깥 벽면에도 여래상(如來像)을 장엄(莊嚴)하게 하였다.
내부 뒷면의 신장벽화
내부 뒷벽면의 민화풍의 모란 공화
단청은 많이 낡아 있었다.
외출목도 봉두이다.
외부 좌측
외부 좌측 방풍 천판의 魚之圖
외부 좌측 방풍 천판의 魚之圖 : 小魚 ← 中 魚 ← 大魚
큰 물고기가 中물고기를, 중간물고기가 小물고기를 잡아 먹는 모습인데, 이 그림은 석가모니의 전생설화의 내용을 표현한 것이다.
외부 좌측면 벽화
사명대사행일본지도
泗溟大師行日本之圖: 극락전 외벽의 좌측 중앙에는 일본관료들이 성밖에서 사명대사일행을 성대히 맞이하는 장면과
일본군을 무장해제, 포승줄로 묶어 무릎을 꿇어 앉히고 도끼로 무기를 부수며 소총을 불태우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위왕조조도(魏王曹操圖): 위(魏)나라가 왜(倭)를 정복할때 말을 타고 장검으로 위협하거나 쌍검으로 왜를 굴복 시키는 장면을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위왕조조도>(魏王曹操圖).
浙仙圖 물고기를 낚아 올리는 장면과 수상선
절선도 수상선: 강물위에서 물고기를 낚아올리며 피리를 연주하며 흥에겨워 춤을 추는 장면.
극락전 뒷면의 가운데 칸에 판문이 구성되어 있다.
외부 우측면
극락전의 우측 바깥 벽에도 많은 그림들이 있는데 대체로 민화풍의 그림들이다. 밤, 대추 등 과일을 바구니에 가득 담아 놓은 것은 자식을 많이 얻기를 원하는 마음이고 석류도 마찬가지의 뜻이다.
우측면 벽화
우측면 풍판 천판에 나타난 대형 물고기
건물의 兩側面 風板의 “天板 大 魚之圖”. 석가모니 부처가 전생에 보살행를 닦을 때 바닷속에 살고 있는 물고기를 보았더니, 큰 물고기가 작은 물고기를, 또 작은 물고기는 그보다 더 작은 물고기를 서로 잡아 먹고 있었다.
이 때 석가모니가 이 물고기를 잡아 먹었는데 훗날 그 물고기는 새 세상을 얻게 되었다. 이 물고기가 후에 경어(鯨魚)의 왕이 되었다.
그때 마침 해변에 기근이 든 사람들이 인육살생을 하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본 경어(鯨魚)가 스스로
몸을 해변에 대어 기근이 든 사람들이 먹도록 하여 인민을 구하였다고 한다.
우측면 벽화: 소림굴달마대사(小林窟達摩大師 ) - 신광선사단비전신(神光禪師斷臂傳信) - 청법대신(請法大臣) 혜가가 눈속에서 팔을 잘라 달마에게 법을 청함을 '혜가(慧可)의 단비구법(斷臂求法)'이라고 하는데. 안심법문(安心法門) 이후 달마는 신광의 입문을 허락한후.「혜가(慧可)」라는 법명을 지어주고 제자로 삼았다고하는 장면의 벽화.
우측면 아미타여래삼존불. 차사창건중창주 시주자 내영도
아미타삼존불이 此寺創建重修化主施主共德主들이 탄 배를 이끌어주는 장면
우측면 중앙 극락세계 왕생에 대한 중생의 간절한 염원을 상징화한 반야용선도 - 인로왕보살이 서방교주미타여래좌상을 뫼시고 중생들을 서방정토로 인도하는 장면.
제천 월악산 신륵사에는 앞쪽에는 용머리, 후면에는 용꼬리 모습을 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 흑룡이 아닌, 4개 발톱을 가진 황룡이 배를 짊어지고 헤엄치고 있는 가운데 선두와 선미에서 인로왕보살과 지장보살이 천의를 휘날리며 장대로 노를 젓고 있다.이런 모습을 '극락을 향해 항해한다'는 뜻에서 '용(龍)' 자를 쓴 '반야용선'이라고 한다.
중생을 고통의 세계로부터 피안(彼岸)의 세상으로 건너게 해주는 도구가 배이며, 이 배를 용이 호위하므로 반야용선이라 한다. 이 용선이 바로 반야(般若), 즉 지혜를 의미하는 것으로 지혜를 깨달아 저 피안에 도달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용선(龍船) 앞 선두에는 인로왕보살(引路王菩薩)이. 맨 뒤에는 지장보살(地藏菩薩)이 육환장을 들고 서 계신다. 지장보살님은 육도윤회의 세계에 몸을 나투어 중생들을 구제하도록 서가모니불로부터 수기 받은 보살이시다.
배 중앙에는 비구, 선비, 양반, 여인, 노인 등의 사람들이 다양한 표정으로 용선(龍船)에 몸을 싣고 있다. 앞 뒤에 큰 돛을 각각 세우고, 전진하는 배의 위상을 나타내고 있다.
배 중앙에는 장형(帳形) 지붕으로 건물을 짓고 보탑(寶塔) 모양으로 표현하기도한다.
배 아래로는 푸른 파도가 출렁이고, 흰 연꽃을 구름위로 솟아 내어 연태(蓮胎)를 상징화하고 있다.
○ 신륵사 삼층석탑 (보물 제1296호로 지정)
극락전 정면 약 20m 지점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이형적인 탑이다. 불국사 석가탑을 옮겨놓은 것처럼 정교하고 간결하며 장중한 아름다움과 비례가 잘 맞는 조화미를 지니고 있다.
높이가 4m이며, 1.46m의 정방형 기단 위에 3층의 탑신부가 올려져 있으며, 상륜부는 노반, 복발, 앙화, 보륜, 보개, 찰주 등이 완전하게 원형 그대로 남아 있는데 남아있는데 이 같은 예는 다른 탑들에게서는 보기 드문 일이다. 방향이 극락전 정면과 약간 어긋나 있어 조화스럽지 못한 점으로 보아 극락전과 다른 시기에 조성되었거나 혹은 다른 곳에서 이전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1981년 4월 해체 복원하던 중 석탑의 기단 부에서 소형토탑 108개와 사리함 조각 두개가 발견되었는데 사리함은 금동편과 동편으로 그 양식은 서로 다르다. 소형 토탑은 높이 3.5~5cm의 방형다층탑 양식을 보이고 있으며 흙을 빗고 선을 그어서 탑층을 표현한 것이다. 이 유물들은 현재 국립청주박물관에 보관 전시되고 있다.
머리장식으로 노반, 복발, 앙화, 보륜, 보개 등이 있으며 무게중심을 지탱하기 위한 찰주가 꽂혀 있다.
통일신라의 석탑양식을 잘 계승하고 있는 고려 전기의 탑으로, 특히 이처럼 머리장식이 잘 남아있는 예는 드문 편이다.
○ 괘불지주
법당 앞에 있는 것은 괘불지주다. 큰 행사가 있을 때 밖에 내거는 대형 부처님 걸개그림인 괘불을 지탱하는 기둥이다.
○ 극락전 우측 뒷편의 모습
○ 산신각
최근에 불사한것 같아 보였다...
정면3칸 측면 2칸의 맞배기 지붕이다.
산신각 좌측 측면
산신각 우측 측면
칠성탱 위의 화려한 닫집 아래로는 용이 칠성을 호위하고 있었다...
신륵사 삼성각내 칠성탱
신륵사 삼성각내 독성탱
신륵사 삼성각내 산신탱
산신각 내 벽화
산신각의 화려한 용
○ 국사당
국사당은 월악산 삼봉 쪽을 바라보며 절을 지키고 있다.
국사당은 맞배지붕에 사방 한칸의 규모 건물로 내부에 보살상 1구와 산신도가 있다. 본래 제천시 현수면 송계리의 월악산 수경대(水鏡臺)에 있던 신사(神祀)의 전통을 따른 건물이다.
국사당 내부에는 작은 보살상과 중앙의 신령, 좌우에 어린 남자와 여자가 신령을 모시고 있는 탱화 한폭이 봉안되어 있다.
국사당은 원래 제천시 하수면 송계리의 월악산 수경대(水鏡臺)에 있었다. 신라 때부터 월악신사(月岳神祀)를 설치하여 제천(祭天)하던 곳이며, 1256년(고종 43) 몽고병이 침입했을 때나 임진왜란 때 부근 사람들은 이곳에 모여 난을 피하였다고 한다. 이 월악산신사는 국가적 기도처에서 뒤에 마을의 수호신격으로 성격이 달라졌는데, 일제강점기에 폐허화되었다.
그 뒤 주위 마을은 흉년이 들고 대홍수가 났으나 그 이유를 아는 자가 없었다. 하루는 신륵사에 있던 승려가 그 까닭이 월악신사의 폐허에 있음을 느끼고 신륵사 경내에 국사당을 지어 월악산에 상주하는 신령님을 봉안하게 되었다고 한다.
○ 요사채
○ 신륵사 전경
신륵사 안마당의 풍경
○ 신륵사를 내려가며...
신륵사는 월악산에 깊숙히 자리잡고 있어서 찾아 다니기 어려웠던 때문일까. 좀 특이한 벽화들이 많이 남아 있어서 오히려 우리의 정감을 자아내는 곳이다.
그림의 솜씨도 좋지만 그냥 마음 푸근하게 바라볼 수 있는 그런 사찰이 아니었나 싶다.
너무나 화창한 가을가운데 인데도 인적이 없는신륵사 극락전 안에 한동안 고요히 머물다가 왔다.
충만한 마음이 가득해진 우연히 방문했던 신륵사 !!!!!
작은 단풍잎이 구르는 소리만이 친구가 되어 월악산의 정기와 옛절의 정취를 흠뻑 받고 돌아온 포항길, 기회가 주어지면 다시 한번 가 보고픈 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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