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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완도 이순신 기념관과 묘당도 이충무공 유적(충무사)
    여행방/섬여행 2024. 10. 6. 12:32

    완도 이순신 기념관과 묘당도 이충무공 유적(충무사)

     

    2024.   10.    6. 

     

     

    2024.  10.   1 ~ 2 (1박  2일) ,  포항농협 농가주부 동 회장 13명과 함께한  완도여행으로

     

    1일 여행은

    포항에서 6시 출발하여  해남과 완도를 이어주는 완도대교를 지나 완도 빙그레 본점 식당에서 생선구이로 점심 식사 후 장보고 기념관 & 청해진 유적지,  완도 수목원,  정도리 구계동,  완도타워을 둘러보고  완도회타운 해양치유 밥상으로 저녁 식사 후  완도와 신지도를 이어주는 신지대교를 지나 완도 신지도 루미아호텔 & 리조트에서  1박을 하고

     

    2일 여행은

    완도 신지도 루미아호텔 & 리조트에서 전복죽으로 아침 식사 후   신지도 항일운동 기념탑,  신지도 명사십리 해변 맨발걷기,  신지도와 고금도를 이어주는 장보고 대교를 지나 고금도에 들어와 이순신 기념관 & 묘당도 이충무공 유적지(충무사),  고금도와 약산도를 이어주는 약산대교를 건너 약산해안 치유의 숲에서 숲길도 걸어 보고,  고금 휴게소를 지나 고금도와 강진을 잇는 고금대교를 지나 강진으로 들어와서 강진 사찰음식 전문점 도반에서 정진코스로 점심 식사 후 인근의 카페 목리에서 차 한잔 후 다시 먼길을 달려  포항으로 들어오는 완도 일주 여행길로  

     

    가족.지인들과  함께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아름다운 도시,  가고 싶은 섬 완도군 신지도에 위치하고 있는 루미아호텔 &리조트를 출발하며 2일째 여행을 시작한다...

     

    여행 2일째

    넓고 울창한 송림을 뒤로하고  부드러운 모래해변을 맨발로 걸으며 바다를 느낄 수 있는 명사십리해수욕장을 나와 여행2일세번째  여행지인   고금도에 있는 완도 이순신 기념관과 묘당도 이충무공 유적(충무사)을 만나러 향해본다...

     

     

     

     

     

    전남 완도군 신지면과 고금면을 잇는 교량으로 장보고대교는 2017년 개통되었다.   길이는 4,297m이며 해상 교량 구간은 1,305m, 폭은 9.5m, 교각과 교각 사이의 거리를 나타내는 경간장의 최대 길이는 220m이다.

     

     

     

     

    사장교 주탑 높이는 90.5m에 이른다. 장보고대교의 완공으로 완도와 강진군을 연결하는 3개의 해상교량 신지대교-장보고대교-고금대교가 국도 77호선의 해상도로로 완성되었다.

     

     

     

     

     

     

     

    아산과 남해 등지에 이어 완도에도 이순신 기념관이 문을 열었다.

    2023년 임진왜란· 정유재란 당시 조선 수군 본영이 설치됐던 완도군 고금면 덕동리에 이순신 기념관이 개관했다.

    1층에 기획전시관· 영상관· 사무실· 체험 공간,   2층에는 상설 전시관이 마련됐다.

     

    이순신 기념관은 조선 수군의 역사적인 공간인 묘당도의 가치를 알리고 역사·문화 관광자원으로 육성하기 위한 ‘묘당도 이 충무공 기념 공원 조성’ 사업 중 하나로 진행됐다.

     

     

     

     

    1층에서

     

     

     

     

    2층으로 올라와서

     

     

     

     

    2층 상설 전시관을 관람한다.

     '완도 이순신기념관'은 2023년에 개관한 아담한 2층 건물이지만 전시물은 매우 알차게 꾸며져 있었다.

    특히 '고금도와 이순신'에 관해 '백문이불여일견'이라는 말을 실감케 하는 전시물들을 둘러보면서 오길 잘했다 싶었다.

     

     

     

     

     

     

     

    난중일기

     

     

     

     

    전시장 안의 글귀가  마음에 남아 있다.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  고 외친 이순신 장군의 명언

     

     

     

     

     

     

     

     

     

     

     

     

     

     

     

     

     

     

     

    고금도(古今島)와 이순신(李舜臣, 1545~1598)

    고금도는 왜란 당시에는 강진에 속해 있었으나 현재의 행정구역은 완도군 고금면에 속해 있다.

    명랑해전에서 승리한 이순신은 목포 고하도를 거처 1598년 2월 17일 (선조 31) 완도 고금도에 삼도수군통제영을 설치하였다. 완도는 군사적, 지리적 요충지이면서 순천에 주둔하고 있는 왜군을 방어하기에 중요한 지역이었다.

     

     

     

     

     

     

     

     

     

     

    포탄이 없어 대신 사용했던 조란탄(조약돌)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하루전 완도 여행지 정도리 구계동에서 보았던 포탄과 비슷한 동글동글한 조약돌이다.

     

     

     

     

     

     

     

     

     

     

     

     

     

     

     

     

     

     

     

     

     

     

    고금도는 형세가 견고한 요충지이며 섬 안에는 기름진 농토가 많아 군량미 확보가 용이하였고, 또 군선을 제작하기에도 적당한 장소였다.

    따라서 완도 고금도는 7월16일 조선과 진린장군이 이끄는 명나라 수군이연합전선을 형성한 곳이면서 11월19일 노량해전을 통해 일본과의 임진. 정유재란 전쟁을 마무리 지었다는 뜻 깊은 전적지이다.

     

     

     

     

     

     

     

    1층의 기획전시관

     

     

     

     

     

     

     

    묘당도와 이순신

    고금도에 부속된 작은 섬 묘당도는 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마지막 본영이 있던 곳이다.

    묘당도는 남해에서 서해로 진입하는 길목으로 왼쪽으로는 마량, 오른쪽으로는 약산의 좁은 수로를 두고 있는 군사적인 요충지였다.  이곳을 거쳐야 완도, 강진, 해남, 진도 등지로 진입하기가 수월해 진다.

     

     

     

     

     

     

     

     

     

     

    묘당도 이충무공 유적은 정유재란 때 이순신의 조선 수군과 명나라장수 진린의 군사들이 힘을 합해 일본군을 물리친 장소이다.

    이곳은 충무공의 마지막 본영이 있었고, 조선과 명나라의 수군이 최초로 연합전선을 형성했던 곳이다.

     

    1598년 2월 17일 이순신은 고하도(高下島, 현재의 목포시 충무동)로부터 8천여 명의 수군을 인솔해 와 이곳 고금도 묘당도에 진영을 설치했다.

    진영을 설치한 후에는 본격적으로 수군 재건에 힘을 쏟기 시작했다.

    수군을 조련(調練)하는 한편에서 전선을 건조 수리하는 등 군비를 정비하여 수군의 역량을 확장했다.

     

     

     

     

     

     

     

    조선 수군이 이곳에 진영을 설치하고 몇 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서울 한강 일대에서 진을 치고 있던 명나라 수군 진린 함대가 이곳에 도착했다. 수군 도독 진린(陳璘)은 이보다 3개월 앞선 4월, 수군 5천 명, 전선 5백 척, 보병과 기타 1만 5천 명을 거느리고 요동을 거쳐

    압록강을 건너 조선에 들어왔다.

    2개월간 서울에서 지내다가 6월 동작나루에서 선조 임금의 전송을 받은 진린은 서해안을 따라 남진하여 7월 16일 당시 전라도 수군 본영이 있는 고금도 덕동리(古今島德洞里)에서 조금 떨어진 묘당도에 진을 쳤다.

     

     

     

     

     

     

     

     

     

     

     

     

     

    이때부터 묘당도는 조선과 명나라 연합 수군의 근거지가 되었다.

    이순신은 이곳에 본영을 설치하고 일본군을 물리쳤으나 그해 11월 노량해전에서 진린 도독과 함께 일본군과 싸우다가 적의 총탄에 맞아 전사했다.

    이순신의 유해를 이곳으로 옮겨 임시로 봉안했다가 나중에 충청남도 아산으로 옮겨 장례를 치르고 안장하여 모셨다.

     

     

     

     

    관왕묘비(關王廟碑)

    충무공의 유해가 일시 모셔졌던 이곳에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陳璘)이 관왕묘(關王廟)를 건립했다.   관왕묘비는 1713년(숙종 39)에 세웠다.

     

    관왕묘 창건 전후의 경위를 기록한 묘비에는 명나라군 수군 장수가 충무공의 전사를 애석히 여겼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비석의 규모는 높이 253cm, 폭 93cm, 두께 20cm이며,  비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팔작집이다.

     

     

     

     

     

     

     

    1층 영상관

     

     

     

     

     

     

     

     

     

     

     

     

     

    영상관에는 ‘이순신, 나라를 구한 불패의 영웅’을 주제로 고금도에 삼도수군통제영을 설치하고 고금도해전과 노량해전을 승리로 이끈 전투 장면 등을 볼 수 있다.

     

     

     

     

     

     

     

     이순신장군 관련 자료, 유적, 스토리 등은 보고 또 봐도 느껴지는 존경과 감흥이 잦아들지 않는다.

     

     

     

     

     

     

     

    이순신 기념관에서 2층 상설 전시관을 보고 내려와  1층 기획전시관· 영상관을 보고  이제 충무공 유적지 충무사로 향해본다....

     

     

     

     

    이순신 기념관 옆의 충무리 마을회관이 멋스럽다...

     

     

     

     

     

     

     

    묘당도 덕동마을과 덕동항은  1598년 2월17일 이순신이 이곳에서 삼도수군통제영을 설치하였고, 진린 장군이 이끄는 명나라 수군이 머물렀던 지역이다.

    또한 1681년(숙종 7) 고금도진을 설치하였고, 1895년(고종 32)에 폐진 되었던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다.

     

    묘당도는 간척사업으로 인해 지금은 육지와 잇닿아 있는데, 원래는 관왕묘(關王廟)가 있던 섬이라 하여 묘당도(廟堂島)로 부르다가 1971년 덕동리에 분리되면서 충무사(忠武祠)의 이름을 따서 충무리(忠武里)로 바뀌었다.

     

     

     

     

     

     

     

     

     

     

    덕동항

     

     

     

    충무공을 제향하는 충무사를 중심으로 하는 완도 묘당도 이충무공 유적은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14호로 지정되었다.

    충무공의 넋 기리는 고금 묘당도 이충무공 유적 충무사 (완도군 고금면 충무사길 86-31)

     

     

     

     

     

     

     

    충무사 입구에는 하마비(下馬碑)가 세워져 있다.

    이는 아무리 지체 높은 사람도 홍살문 앞에서부터는 말에서 내려 걸어 들어가란 뜻이다.

     

     

     

     

    충무사 홍살문

    충무사 입구에 홍살문이 세워져 있다.

    홍살문이란 능· 원· 묘· 궁전 또는 관아,  향교 등에서 정면에 세우는 붉은 칠을 한 나무문인데 홍전문(紅箭門) 또는 홍문(紅門)이라고도 한다.

    사찰의 일주문과 다른 것은 둥근 기둥 두 개를 세우고 위에는 지붕이 없이 화살모양의 나무를 나란히 세워 놓았고, 그 중간에는 태극 문양이 그려져 있다.

    능묘의 경우 홍살문의 옛 이름은 신문(神門)으로 신문은 글자 그대로 성(聖)과 속(俗)의 공간을 구별한 임금의 신령이 들어가는 문을 의미한다.

     

    홍살문을 붉게 칠한 것은 붉은색은 벽사(辟邪)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 풍속에 동짓날 붉은 팥죽을 쑤어 먹거나 대문에 뿌리는 것 등은 붉은색을 귀신이 꺼리는 색이라 하여 악귀를 물리치고 집안의 안녕과 무병을 기원하는 의미가 있다.

    홍살문의 붉은색도 이와 같은 의미로 쓰인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하마비에서 조금 걸어들어 가면 홍살문이 세워져 있고 그 뒤에 충무사가 있다.   홍살문부터는 청정하고 신령스런 공간이라는 상징성을 갖고 있다.

     

     

     

     

     

     

     

     

     

     

    홍살문을 지나면 충무사 경내로 들어가면 솟을 대문격인 외삼문이 세워져 있고 외삼문을 들어가면 3개의 비가 조성되어 있다.

     

     

     

     

     

     

     

     

     관찰사 이공규 현영세불망비.  묘당도 이충무공 유적비

     

     

     

     

    충무사(忠武祠)

    선조 31년(1598) 명나라 수군이 고금도에 주둔하고 있을 때 진린(陳璘) 도독이 관왕묘(關王廟)를 건립했다.

    진린은 그의 꿈에 나타난 관운장(關運將)을 제향하여 휘하 장병들의 안녕과 승전을 기원하기 위해 지은 것이 ‘관왕묘(關王廟)’이다.

     

    1666년(현종 7) 동무(東廡)를 지어 진린 장군과 이순신 장군을 배향했다.

    1713년(숙종 31) 관왕묘비를 세웠다.

    이후 서무(西廡)를 신축하여 이순신 장군을 단독 배향했다.

    그 후 현종 7년(1666년) 수군절도사 유비연(柳斐然)이 중수하여 동무(東廡)에는 진린(陣璘), 서무(西廡)에는 1683년 충무공을 모셨다.

     

    1781년( 정조 5, 신축년) 임금이 ‘탄보묘(誕報廟)’편액을 하사하여 사액 묘우가 되었다.

    1792년(정조 16) 등자룡(鄧子龍)이 동무에 추배되었다.

    1795년(정조 19) 임금이 ‘이충무공 전서’를 하사하였다.

    1940년쯤 일제강점기에 관우상과 위패 등 유물이 훼손되고 제향이 중단되었다.

    이후 1953년 관왕묘(탄보묘)의 옛 자리인 고금도 덕동포구에 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모시면서 명칭을 ‘충무사(忠武祠)’로 개칭하였다.

     

    1959년 동무에 이순신 장군의 보좌관 격인 조방장을 지내고 노량해전에서 공을 세운 가리포진 첨사였던 이영남(李英男)을 추배하였고,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14호 지정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81년에 다시 대대적인 보수 공사가 이루어졌다.

    매년 4월 28일(양력) 탄신기념제와 11월 19일(음력) 순국제를 봉행하고 있다.

     

     

     

     

     

     

     

    내삼문 왼쪽 건물이  정면 3칸, 측면 2칸, 팔작지붕의 동재이고 

     

     

     

     

     

     

     

    맞은편이 정면3칸, 측면 2칸, 팔작지붕의 서재이다.

     

     

     

     

     

     

    충무사 관왕묘비(關王廟碑)

    서재 뒤편에  관왕묘비가 있다.

    관왕묘비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 팔작지붕이다.

     

    충무공의 유해가 일시 모셔졌던 이곳에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陳璘)이 관왕묘(關王廟)를 건립했다관왕묘비는 1713(숙종 39)에 세웠다.

     

     

     

     

    비석의 규모는 높이 253cm, 폭 93cm, 두께 20cm이며, 비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팔작집이다.

     

     

     

     

    관왕묘 창건 전후의 경위를 기록한 묘비에는 명나라군 수군 장수가 충무공의 전사를 애석히 여겼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관왕묘비에 관한 일화도 전해지고 있다.

    일제 강점기말 고금 주제소 순사부장 마전이라는 사람이 관운장 상을 불사르고 건물을 불태우려 했으나 지역 유림들이 간신히 막았는데 순사부장이 관왕묘비를 도끼로 쓰려 뜨리고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관왕묘비에는 관왕묘가 세워진 역사적 유래와 이순신 장군과 진린장군의 인연과 관계 등이 비교적 상세히 기록되어 있고 전라남도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묘당도 충무사에는 관왕묘비 외에도 전라남도 문화재 163호로 지정된 작은 수첩 형식의 우수영 전진도첩 필사본이 있다.

    전진도첩은 해전에서의 진법으로 이충무공이 직접 만들고 실전에 활용했다고 알려지고 있으며 충남 아산 현충사 유물관에 전시된 전진도첩은 고금 충무사에 소장된 전진도첩의 모사본이다.

     

     

     

     

    내삼문 안쪽 좌측의 건물이 동무이고 맞은편이 서무이며 사당은 그 중앙에 있다.

     

     

     

     

    고금도는 정유재란 당시 마지막 수군 본영이었던 곳이며 명나라 수군과 조선 수군이 연합군을 이루어 왜군에 맞섰던 유서 깊은 곳이다.

    고금 묘당도에는 이충무공의 신위를 모시고 해마다 제사를 모시고 있다.

     

    충무사가 있는 묘당도는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이 승전을 기원하기 위해 세운 관왕묘가 있고 이순신 장군이 남해 노량해전을 마지막으로 주검이 되어 돌아온 곳이다.  전쟁이 끝난 뒤 고금도 사람들은 관왕묘에 관우와 진린, 이순신장군의 신위를 모시고 해마다 제사를 모셔왔다.

    해방 후 충무사로 이름을 바꾸고 이충무공과 정유재란 당시 가리포진(현재 완도) 첨사였던 이영남 장군을 모시고 있다.   지난 1960년 국가사적 114호로 지정되었으며 매년 음력 4월 28일에는 이충무공 탄신제를, 음력 11월 19일에는 순국제를 봉행하고 있다.

     

     

     

     

    서무.  사당.  동무

     

     

     

     

    정전(사당)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 맞배지붕이다.

     

     

     

     

    이순신 장군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사당문이 채워져 문사이로 이순신 장군 영정을 보며 잠시 참배를 했다.

     

     

     

     

    사당 한 단아래의 우측에는 정면 3칸, 측면 1칸 반, 맞배지붕인 동무가 있다.

     

     

     

     

    좌측에는 정면 3칸, 측면 1칸 반, 맞배지붕인 서무가 있다.

     

     

     

     

    동무. 내삼문. 서무

     

     

     

     

    동재.  외삼문.  서재

     

     

     

     

    외삼문

     

     

     

     

     

     

     

    이곳에는 고금도 충무사(忠武祠)는 1842년 밀양손씨(密陽孫氏)가 이주해 들어오면서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순신 장군이 활동했던 당시에는 무인도(無人島)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충무사로 연결되는 계단과 숲은 어떤 말로도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아름다웠다.   감탄이 절로 나오는 곳이다.   이 산책로가 가장 마음에 들어왔다.

     

     

     

     

     

     

     

     

     

     

     

     

     

     

     

     

     

     

     

    이 충무공 유적사업 기념비

     

     

     

     

    충무사 홍살문 아래 해남도가 보이는 바닷가에 관리사가 충무공 이순신 장군 유적 기념비와 함께 있다.

     

     

     

     

     

     

     

    관리사와 충무공 이순신 장군 유적기념비

     

     

     

     

     

     

     

     

     

     

    해남도(海南島)

    관리사와 기념비가 있는 바로 앞에 보이는 작은 섬이 해남도인데 정유재란 당시 이순신 장군은 이 섬에 많은 허수아비와 횃불, 조개껍데기를 태워 만든 가루를 이용하여 수많은 군사가 주둔하고 있는 것처럼 위장하기도 했던 섬이다.

     

     

     

     

    관리사와 충무공 이순신 장군 유적기념비 앞에서 바라본 충무사 방향

     

     

     

     

     

     

     

    충무공 사당인 충무사(忠武祠) 맞은편에 월성대가 있다.

     

     

     

     

     

     

     

    충무공 이순신 사당 건너편, 솔바람이 향긋한 솔 숲 월송대(月松臺, 고금면 충무사길 86-31)에 올랐다.

    보름 밤이면 휘영청 밝은 달이 노송 사이로 두둥실 떠 올랐을 그 월송대에서 소나무 사이의 먼 바다를 바라다본다. 

     

     

     

     

     

     

     

    월송대는 이순신 장군이 고금도에 머물 당시 군사들의 훈련과 장비 등을 점검하는 장소였다.

     

    충무공이 고금도에 진을 치고 있던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했다. 조선군과 명나라군은 그의 죽음을 알지 못했으나 일본군이 철수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이들에 대해 추격 태세를 갖추었다.

    9월 15일 이순신의 조선 수군과 진린의 명나라 수군이 연합하여 순천에 출몰한 일본군을 소탕했고, 9월 20일부터 10월 7일까지 순천왜성(외교성)전투에 참가했다.

    순천왜성 공격 당시 수군은 이곳에서 발진했다.

    10월 9일에는 고금도 덕동포구로 돌아와 전열을 재정비했다.

    11월 19일 연합함대가 노량을 향해 출진했고 전투를 지휘하던 이순신 장군은 순국했다.

     

    월송대는 이충무공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이순신 장군의 유해를 경상남도 남해군 관음포에 임시로 안치했다가 본영이 있는 이곳으로 옮겨와 83일간을 모셨다. 이듬해인 1599년에 충청남도 아산(현재의 현충사 부근)으로 옮겼다. 순국한 후 충남 아산으로 운구하기까지 83일을 안치했던 유서 깊은 장소로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 소금을 뿌렸던 부위인 유해를 모셨던 자리에는 지금도 풀이 자라지 않은 채 남아있어 주민들과 관광객들은 장군의 기가 서려 있기 때문라고 생각할 뿐이다.

     

     

     

     

    충무사 건너편에는 월송대라는 작은 동산이 있다.   월송대는 이 충무공이 밤이면 찾아 깊은 생각에 잠기곤 했는데 소나무 사이로 보이는 달이 약 여섯 시간 정도 이곳을 비추었다고 해서 월송대라 불리고 있다.

     

     

     

     

     

     

     

     

     

     

    고금도는 강진 마량과 연륙되어 차를 가지고 들어갈 수 있고 주변에는 약산도 등 연계관광이 가능하다.

    고금도를 비롯한 남해의 여러 섬이 다리로 연결되어 승용차로 어렵지 않게 접근할 수 있었던 점도 매우 좋았다.  완도 여행을 기획한 분들이라면 고금도로 건너가  '고금도와 이순신' 의 삶을 한번 돌아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고금도에 있는 완도 이순신 기념관과 묘당도 이충무공 유적(충무사)을 만나고 다음 여행지 '약산해안 치유의 숲'으로  향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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