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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흥 능가사(전남 고흥군 점암면 팔봉길 21, 점암면 성기리 369)사찰여행/전라도 2024. 1. 30. 13:05
고흥 능가사
2024. 1. 30.
2024. 1. 24 ~ 25 (1박 2일). 가배와 함께한 전남 고흥과 인근 지역을 둘러 보는 여행길이다...
1. 24. 1일 일정은 고흥을 지나 벌교 중도방죽에서 갈대를 바라보고 인근 식당에 도착하여 점심식사 후 다시 고흥으로 들어와 우도에서 모세의 기적을 경험하며 우도를 한바퀴 트레킹 후 팔영산 편백치유의 숲에서 체험한후 트레킹 후 녹동항으로 이동하여 키조개 맑은 탕으로 저녁식사 후 숙소에서 쉬는 일정이고
1. 25. 2일 일정은 고흥 녹동항에서 아침 식사 후 소록대교와 거금대교를 지나 거금도 신양 선착장에서 배타고 영흥도 들어가서 연흥도를 트레킹 후 거금휴게소에서 한참을 쉬고 고흥에서 삼겹살로 점심 식사 후 능가사를 순례 후 우주발사 전망대에 올라 고흥반도의 섬들을 바라보고 미르나르길 일부구간도 걷고 팔영대교를 지나 남해고속도로를 달려 통도사 IC 근처에서 저녁식사 후 포항으로 오는 1박 2일 여행을 마무리 하는 일정이다.
1. 25일 여행 둘째날 두번째 여행지 거금도 휴게소를 둘러보고 점심 식사 후 2일 세번째 여행지 능가사로 향해본다....
거금도 휴게소를 둘러보고 거금대교를 건너고
소록터널을 지나
소록대교까지 지나
이제 고흥으로 들어와
무제한 삼겹살로 점심식사 한 후
능가사를 찾아간다.
능가사 가며 바라다보이는 팔영산
능가사 주차장 도착이다...
능가사까지는 100m
능가사 가는 길~ 3그루의 소나무가 일주문인듯 마을 입구에 늠늠히 서 있다...
막걸리병으로 만든 꽃 조형물이 그럴싸하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松廣寺)의 말사이다. 417년(눌지왕 1)에 아도(阿道)가 창건하여 ‘보현사(普賢寺)’라 하였다 하나, 지리적인 위치로 보아 창건자의 신빙성은 없다.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탄 뒤 1644년(인조 22)에 벽천(碧川)이 중창하고 능가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벽천은 원래 90세의 나이로 지리산에서 수도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밤 꿈에 부처님이 나타나서 절을 지어 중생을 제도하라는 계시를 받고 이곳에 능가사를 신축하였다고 한다. 그 뒤 1768년 (영조 44) 과 1863년 (철종 14) 에 각각 중수하였으며, 1993년에 응진전을, 1995년에 사천왕문을 각각 수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천왕문 앞에 있는 멋진 거목
주차장에 차 세우면 일주문도 없이 곧바로 천왕문이 방문객을 맞는다. 그 앞에 높다란 상록 침엽교목 한 쌍이 서 있는 풍경이 낯익다.
능가사 천왕문은 1995년 해체 복원할 때 발견된 상량문에서 절 중건 22년 뒤인 1666년 처음 세웠고 1824년과 1931년에 다시 지었다는 사실이 기록으로 밝혀졌다.
불법을 수호하는 목조 사천왕상(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24호)들
4.5m의 목조사천왕상(木造四天王像)
능가사 사천왕상은 여러모로 독특하고 그중에서도 가장 큰 특징이 머리에 쓴 보관이다.
사찰 불교장식 가운데 가장 화려하고 섬세하게 새긴 것이 사천왕 보관이지만 능가사 것은 종이를 말아놓은 듯한 원통형 관에 그림으로만 그려놓아 매우 평면적이다.
악귀는 사천왕 발아래 밟힌 채 독기를 뿜거나 살려달라고 사정하고 있다.
천왕문 들어서면 예전에 없던 대루가 우뚝 서 있다. 대루 누 아래로 올라서면
대웅전이 보인다.
천왕문과 일직선에 대웅전이 서 있는데 100m나 떨어져 있다.
능가사는 가람이 들어앉은 앉음새도 독특하다.
산 속에 석축을 쌓아 층층이 올라가는 여느 산중 사찰과 달리 마을 안 평탄한 지형에 자리잡은 평지 사찰이어서 더욱 넓어 보인다.
그리고 팔영산을 등져 자리를 잡고 마을 쪽으로 난 입구에 맞추느라 대웅전이 북향을 하고 있는 드문 예이기도 하다.
능가사 대웅전 (보물 1307호)
대웅전은 인조 때 정현대사가 절을 다시 세우면서 지었고 1768년 영조 때와 1863년 철종 때 고쳐 지어 오늘에 이른다.
옆면 지붕선이 여덟팔자를 그리는 앞면 다섯 칸, 옆면 세 칸짜리 팔작지붕 집이고 전면 기둥 네 개에 모두 용머리가 내밀고 있는 게 보인다.
절에 가면 대개 법당 전면의 가운데 칸, 어칸의 양쪽 기둥머리에 하나씩 용머리, 용두가 내밀고 있다.
불교에서, 중생을 싣고 극락정토로 가는 배를 반야용선(般若龍船)이라고 하는데 진리(반야)를 향해 가는 뱃머리가 용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법당 전면에 용머리가 내밀고 있는 것은 바로 법당이 극락으로 가는 배라는 의미가 된다.
법당을 바라보고 서서 왼쪽에 좌 황룡, 오른쪽에 우청룡을 배치하는 두 용두 중에 대웅전 전면에는 웬일로? 청룡이 하나 더 있다. 위 청룡은 보주(여의주)를 물고 있는데 아래 청룡은 입에 아무것도 없다.
처마 아래 기둥 위뿐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꾸민 다포식 공포가 화려하다.
가운데 어칸문은 4분합, 그 양쪽 협칸문은 2분합, 마지막 끝 퇴칸문은 외여닫이문을 달았다.
편액 글씨는 구한말 전남 화순에서 태어난 염재 송태회(1872~1942)의 작품이다.
아홉 살에 '녹괴서실'이라는 큰 글씨를 써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 군대와 함께 머물던 원세계가 극찬했고 그가 중국으로 돌아갈 때 데려갔다고 한다.
염재는 청나라에서 새 문물을 배우고 돌아와 평생 제자를 키우며 많은 작품을 남겨 1922년 조선 전람회 1회부터 여덟 차례나 입선했다.
구례 천은사 수홍루와 설선당, 순천 선암사 장경각에서 그의 편액 글씨를 봤었다.
기둥 네 개에 모두 용머리가 내밀고 있다.
처마 바로 아래를 받치는 가로부재 외목도리까지 세밀하고 화려하게 단청했다.
겨울바람을 생각하면 문에 유리를 다는 것을 탓할 수는 없겠지만 아무래도 생경하게 보일 수밖에 없고 보물급 국가문화재라면 되도록 원형을 살리는 게 맞지 않을까 싶다.
공포와 공포 사이 포벽에는 부처님을 그려 넣었다.
대웅전은 넓이가 58평에 이르러 조선 후기 불전으로는 꽤 큰 편이라고 한다.
뒤쪽으로 두 칸쯤에 일렬로 실내기둥 고주(高柱) 넷을 일렬로 세워 벽을 만들고 불단을 꾸몄다.
대웅전인 만큼 당연히 석가모니불을 가운데 주존으로 모시고 불단 바라보고 서서 오른쪽(부처의 시선으로 보면 왼쪽)에 아미타불, 왼쪽에 약사불까지 삼불좌상을 봉안했고 세 불상마다 위에 각기 하나씩 닫집을 얹었다.
각기 뒤에 걸린 후불탱은 모두 석가를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왼쪽(우협시)과 오른쪽(좌협시) 중간의 대세지보살과 관음보살 입상
17세기 중반부터 18세기 전반까지 능가사에는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걸출한 조각승
색난(色難/ 1640년경~1730년 이후)이 주석(거주)하면서 호남을 비롯한 전국에 걸쳐 수백 점의 불상, 존상을 만들었다.
색난은 솜씨가 어찌나 좋았던지 솜씨가 교묘한 장인이라는 뜻으로 '교장'(巧匠)' '조묘공'(彫妙工)으로 문헌에 기록돼 전해 온다.
불단 중앙, 목조 석가여래좌상이 바로 1707년 색난이 남긴 작품이다.
그런데 양쪽에 있는 불상은 크기도 훨씬 작고 수법도 판이하게 다르다.
이 아이타불과 왼쪽 약사불은 색난보다 한 세대 앞선 1639년부터 1661년까지 20여년 동안 20여명의 제자를 거느리고 활동하면서 독특한 수법으로 일파를 이뤘던 조각승 희장(熙藏)이 1653년에 조성한 작품이다.
향 불당 우측의 신중탱
영조 때 이중환(李重煥)의 기록에 의하면 옛날 일본 류큐(琉球:지금의 오키나와)의 태자가 표류하다가 이곳에 이르렀는데, 이 절의 관세음보살에게 기도하면서 고국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빌었더니 7일 만에 승려가 나타나서 태자를 끼고 파도를 넘어갔다고 하며, 절의 승려들이 법당 벽에 그 모양을 그려놓았던 것이 영조 때까지 남아 있었다고 전한다.
부속 암자로는 만경암(萬景庵)과 서불암(西佛庵)이 있었다고 하나 현존하지 않는다.
향 불단 좌측의 지장탱
향 불단 좌측 입구 문위의 감로탱
향 불단 우측의 감로탱
닫집 안을 지키는 용은 사악한 것을 물리쳐 부처 주변을 상서로운 공간으로 만든다는 의미를 지니는데 여느 보궁형 닫집 안에는 보일 듯 말 듯 용 서너 마리가 구름 속을 날고 있는 데 이 닫집은 한 마리가 전신을 드러낸 채 틀임하고 있다.
천장은 우물 정(井)자처럼 반자를 대 서까래를 가린 우물천장인데 반자 문양이 꽃 다음으로 많은 새이다.
새들이 자유롭게 나는 모습은 깨달음을 통해 얻은 자유, 해탈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새 중에서도 봉황을 단청한 경우가 많지만 이곳 반자의 새는 보주를 물고 날아가는 학이다.
뒤쪽으로 두 칸쯤에 일렬로 실내기둥 고주(高柱) 넷을 일렬로 세워 벽을 만들고 불단을 꾸몄다.
紫羅帳裏撒眞珠 자라장리살진주 '보랏빛 비단 장막 뒤에는 진주를 뿌린 듯'
四五百株垂柳巷 사오백조화류항 '사오백 그루 늘어진 버드나무 숲'
二三千處管絃樓 이삼천처관현루 '이삼천 관현루(법음이 울려퍼지는 누각)에서'
犀因玩月紋生角 서인완월문생각 '무소가 달 구경하며 아롱진 달무늬를 뿔에 새기고'
象被雷驚花入牙 상피뢰경화입아 ‘코끼리는 우뢰에 놀라 꽃무늬를 상아에 입히네'
대웅전 앞의 괘불대 2쌍
뒷벽도 격자살 문을 셋이나 내고 판벽을 내 신경을 많이 썼다.
대웅전 바깥 평방의 별화에도 학을 타고 나는 비천상이 단청돼 있다. 공포와 공포 사이 여백, 포벽에 석가모니불과 아미타불을 번갈아 모셔져 있다.
능가사와 저 멀리 공룡 등을 닮은 팔영산의 조화가 멋스럽다.
능가사 종무소
공룡 등을 닮은 병풍처럼 8개의 봉우리가 이어지는 팔영산 아래에 자리하는 능가사
대웅전 뒤에 솟은 느티나무 거목
능가사는 템플스테이 명소로도 유명 하다.
편백나무로 둘러싸인 고즈넉한 산사에서 하루를 보내며 지친 일상에 쉼표를 찍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템플스테이
당일형. 인당 20,000
체험형 매주 금토일 1박2일 성인 100,000, 학생 60,000
휴식형 매일 1 박당 성인 70,000 학생 40,000
능가사 템플스테이 안내 061ㅡ832ㅡ8090
승방 첨성각의 편액을 본다.
대웅전과 응진전 편액을 쓴 염재 송태회의 글씨다.
경주 첨성대처럼 별(星)을 쳐다본다(瞻)는 뜻으로 스님들이 새벽에 일어나 별을 보며 열심히 수행하라는 의미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능가사에서 바라본 공룡 등을 닮은 병풍처럼 8개의 봉우리가 이어지는 팔영산
응진당은 1644년 절을 새로 세울 때 대웅전과 함께 지은 것으로 짐작된다. 안에 모신 불상과 존상들을 1685년에 만들었다는 기록이 전해 오기에 늦어도 그 전까지는 응진당을 완공했다. 그렇다면 적어도 지방문화재로 지정할 만한 가치를 지녔겠지만 문화재가 되지 못한 것을 보면 근현대에 새로 지었을 가능성이 있다.
응진전
처마는, 서까래 위에 짧고 각진 서까래를 덧대 달아낸 겹처마이고 처마 아래 공포는, 지붕선이 일자로 반듯한 맞배지붕과 조합을 이루는 주심포식으로 기둥 위에만 공포를 꾸미는 방식이다.
가운데 어칸에는 빗살문을, 양쪽 협칸에는 여염집같이 소박한 격자살문을 달았지만대웅전처럼 유리를 덧대 아쉽다.
정면 불단에 석가여래 삼존상을, 좌우로 벽을 따라 이어진 단 위에는 나한상을 모셨다.
목조 석가여래 삼존좌상은 걸출한 조각승 색난이 대웅전 석가상보다 22년 앞선 1685년에 조성한 작품이다.
삼존상 뿐 아니라 응진당 안 모든 존상들까지 색난이 제자들을 지휘해 만들었다.
석가를 중심으로 오른쪽(좌협시)에는 미륵보살이 왼쪽(우협시)은 제화갈라보살이 연꽃가지를 대칭되게 들고 있다.
미륵보살은 미래불인 미륵불로 성불하기 전 단계의 보살이고, 제화갈라보살은 과거 석가가 수행자이던 시절 장래 부처가 될 것이라고 알려준 과거 보살이다.
그런데 중앙 불단 좌우를 살펴보면 이상한 점이 있다.
나한전에 모시는 나한상은 기본적으로 열여섯 구여서 한쪽에 여덟 구씩 있어야 하는데 오른쪽으로 열하나,
왼쪽으로 열하나씩 모두 스물둘의 존상이 있어서 여섯 구가 더 많다. 나한 말고 다른 존상들이 섞여 있는 것이다.
나한상들은 명부전의 판관 열 명, 시왕상처럼 중앙의 석가(명부전 지장보살)의 시선에서 본 왼쪽(사진 오른쪽)으로 제1 존자부터 제 15존자까지 홀수 나한이,
반대편에는 2존자부터 16 존자까지 짝수 나한이 앉아 있다. 고흥 능가사 응진당엔 나한 말고도 저승사자와 제석천, 산신령도 있다.
응진당 한쪽에 자그마한 단을 차려 모신 산신탱
응진은 나한을 가리키는 또 다른 호칭이어서 나한전 대신 응진전이라고도 하는데 아담하고 소박한 건물이어선지 전각의 전(殿)자 대신 집 당(堂)자를 붙였다.
편액 글씨는 대웅전 편액을 쓴 염재 송태회의 솜씨다.
응진당 앞 법성도에 심어진 차나무
해인도(海印圖) 마당이다.
팔만대장경의 오묘한 이치를 담은 도안이라는데 따라 돌면 공덕과 소원을 이룬다고 한다.
그런데 능가사의 도안은 법성게 요잡도(圖)라고 조금 다른 것인 듯하다. 의상대사가 화엄경을 7언 30구로 요약한 노래 법성게(法性偈)를 읊으며 부처를 중심으로 그 둘레를 따라 걷는 요잡(繞匝) 의식을 함으로써 마음의 평온을 찾는다고 한다.
주심포식 공포는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복잡하고 화려하게 꾸미는 다포식에 비해 단순하다.
응진당 측면을 본다.
맞배지붕은 팔작지붕과 달리 구조가 단순하고 옆면 사람 인(人)자 처마가 아주 짧아서 측면을 비바람으로부터 보호하는 풍판(風板)을 달았다.
형태가 단순하다고 장식을 포기할 순 없는지 맞배집의 박공널과 널이 맞닿는 부분에 많이 붙이는 지네철이라고 하는 지네 모양 철물을 달았다. 박공널 틈새가 벌어지는 것을 잡아주는 기능이 더 중요한데 여기서는 쇠가 아니라 나무를 깎아 붙였다. 지네목이라고 해야 할까?
응진당 왼쪽 뒤, 절 맨 안쪽 언덕 아래 새로 지은 듯 깨끗한 건물이 서 있다.
사방에 울타리를 두른 비각인데 전남 유형문화재 70호 '고흥 능가사 사적비'를 모신 곳이다.
울타리 사이로 보이는 귀부(龜趺) 위에 세워진 높이 5.1m의 사적비(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70호)가 천장에 닿을 듯 크다.
전체 높이가 3.6m에 이르고 비 몸돌(비신)만 높이 2.9m에 너비 133㎝, 두께 42㎝이다.
절 사적비는 크게 두 가지 형태가 있는데 비를 꽂아 세우는 대좌로 거북모양 귀부를 쓰게 된 것은 거북이 장수를 상징하는 신령스러운 동물이어서 비문을 후세에 영구히 전하려는 염원을 담기에 적절했기 때문이다.
용을 새겨 장식한 머릿돌 이수(螭首)를 올려다본다.
이(螭)는 뿔이 없는 교룡(蛟龍), 이무기를 가리키는데 이름과 양식이 중국 한나라 때부터 유래한다고 한다. 용 여러 마리가 구름 속에 어우러진 채 앞면 중앙과 좌우에만 용머리 셋이 내밀고 있다.
사적비는 1726년(영조 2)에 건립한 것으로 불교의 유래와 절의 역사를 기록해 놓은 귀중한 자료이다. 전설에 의하면 이 비석은 원래 탑 앞에 있었는데, 덕목이 도술을 부려 절 뒤로 옮겨 놓았다고 한다.
왼쪽에 자그마한 비가 서 있다
평일이라곤 해도 방문객은 오로지 우리 일행뿐. 이 호젓함, 한가함을 한껏 누린다.
사천왕문 지나서 새로이 불사한 대루가 어쩐지 능가사의 문화재와는 안 어울려 생뚱맞아 보인다.
호랑가시 나무
못 가운데에 섬을 만들고 돌다리를 연결했다.
‘즉심시불(卽心是佛)’이라고 새긴 석비가 서 있다.
8세기 당나라 선승 마조(馬祖) 조사가 남긴 선(禪) 화두인데 글자 그대로는 '마음이 곧 부처' 라는 뜻이다.
자기의 마음을 떠나 따로 부처를 구할 수 없고 마음을 찾아 깨우치면 곧 부처가 된다는 의미라고 한다.
연못 건너편에 보이는 곳이 동종을 봉안한 종각인데 종각도 지은 지 얼마 안 돼 보인다.
높이 157㎝의 능가사 동종(보물 1557호 )
능가사 동종에는 강희 37년이라고 기록된 연대와 시주자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안에 높이 157cm에 입술지름 101.5cm, 아담한 동종이 걸려 있다.
조선 후기 주종장(鑄鐘匠)인 종 명장 김애립(金愛立)이 1698년 숙종 때 만든 김애립의 마지막 현존 작품이자 최고의 역량을 발휘한 대표작이며 17세기를 대표하는 범종으로 평가된다.
종신에 새긴 제작 연대를 딴 정식 명칭은 '고흥 능가사 강희 37년 명 동종 (高興 楞伽寺 康熙 三十七年 銘銅鍾)'이다.
김애립이 33년 앞서 만든 흥국사 강희4년명 동종과 함께 2008년 보물로 지정됐다.
종을 거는 용 모양 끈, 용뉴(龍鈕)
100m쯤 걸어간 오른쪽 길가의 두 문화재 승탑을 보기 위해
다리 건너 남쪽으로 난 넓은 포장길을 간다.
제자 사영당
사영당 탑은 받침 지대석 없이 네모난 하대석이 한 돌로 돼 있고 한 면에 두 장씩 모두 여덟 장 연꽃잎이 아래를 향한 복련을 새겼다.
무엇보다 하대석 네 귀퉁이에 하나씩 용머리를 입체감 있게 조각한 것이 독특하다.
스승 추계당의 승탑을 본다.
탑신이 돌로 만든 종과 같아서 석종형(石鐘形)이라고 부르는데 규모와 양식이 천차 만별이지만 아무래도 팔각 원당형 보다는 조각이 적고 소박하다.
고려시대 이후에 많이 만들었고 울산 태화사지 승탑이 유일하게 전해오는 통일신라 석종형 부도이다.
평일이라곤 해도 방문객은 오로지 우리 일행 뿐. 이 호젓함, 한가함을 한껏 누린 능가사를 나와
능가자 주차장으로 향한다.
가끔은 예전의 기억을 더 오래 기억하고플 때가 있는데 능가사도 대루를 중간에 불사하여 천왕문에서 대웅전으로 향하는 일직선상을 차단한 것이라던지 대루로 답답해 보이는 능가사를 둘러 보며 대루가 없었다면 훨씬 여유로운 능가사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불사하시느라 고생하신 스님~ 많이 죄송합니다. 앎이 짧은 불자가 한번 해본 소리였습니다...
편백나무로 둘러싸인 고즈넉한 산사에서 하루를 보내며 지친 일상에 쉼표를 찍어보는 것도 좋을 듯한 능가사를 나와 다음 여행지 고흥 우주발사대로 향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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