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달산성은 고구려와 신라의 전투가 치열했던 격전지이자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의 애틋한 사랑이 전해지는 곳이다.
산성에 오르면 영춘면 소재지를 휘돌아 흐르는 단양강과 넓은 들판을 두고 아기자기하게 모여 있는 마을의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온달산성 안의 전망대 정자가 운치를 더한다.
우리나라 산성 중 조망이 가장 좋다는 충북 단양의 온달산성에 오르면 단양군 영춘면 소재지를 휘돌아 흐르는 단양강과 넓은 들판을 두고 아기자기하게 모여 있는 마을의 전경과 겹겹이 보이는 소백산 능선이 한눈에 들어와 가슴을 트이게 한다.
온달산성 동문
성벽을 한 바퀴 돌다가 중간쯤에서 뒤를 돌아보는 순간, 아 ! 감탄사가 절로 터진다.
청자색 하늘 아래 소백산 봉우리들이 어깨를 겯고 줄달음친다. 마치 말들이 경주를 하는 것 같다. 시선을 조금 내리면 시리도록 푸른 북한강이 들어온다. 그리고 풍경에 점안(點眼)이라도 하듯 들어서 있는 사람의 집들과 논밭. ‘조망이 가장 아름다운 산성’이라는 말이 결코 허튼 소리가 아니었구나. 이 순간만큼은 세상이 꿈속인 듯 아름답다.
산성은 해발 427m의 성산(城山) 정상부에 반월형(半月形)으로 축조된 테뫼식 협축(夾築) 산성이다. 성벽은 남고북저의 지형을 따라 쌓았는데, 남쪽 봉우리 정상부와 북쪽 벽의 안쪽에는 평탄한 땅이 자리하고 있다. 서북쪽은 남한강에 접한 가파른 절벽이며, 동쪽과 남쪽 성벽은 잘 다듬은 성돌을 쌓아 올렸다.
산성의 북동쪽 아래에는 온달동굴(천연기념물, 1979년 지정)이 있고, 강 건너 주변 지역에도 휴석동 윷판바위, 장발리 선돌 등 온달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또한 영월 태화산성(太華山城)은 온달산성에서 패한 온달을 위하여 누이동생이 쌓았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이를 통해서 이 산성은 물론 주변 지역이 신라와 고구려가 남한강을 사이에 두고 치열하게 대치하였던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온달산성 북치와 동문
강돌을 가져다가 무기로 사용했다고 한다.
온달산성 북치
온달산성은 고구려 평원왕의 사위인 온달이 신라가 쳐들어오자 이 성을 쌓고 싸우다가 전사하였다는 이야기와 관련되어 이름 불렸다. 하지만 발굴조사 결과, 신라 석축산성의 축성 방법이 확인되었고 신라 토기 등도 출토되어, 신라에 의해 축성된 것으로 보인다.
역사적으로는 이곳 온달 산성이 고구려 온달이 성을 지키다 죽은 중원의 그 장소인지 아닌지 의견이 분분하다. 산성의 축조 방식은 신라의 산성이라고 하니 신라인들이 지은 것이라면 신라와 맞서 싸우다 산성을 지키고 죽은 온달 장군의 이야기로 맞지 않는다는 점이다. 산성을 쌓고 싸운 것이 아니라 최후의 보루로 목책을 지어 싸우다 온달이 죽고 신라가 이곳을 차지한 후 산성을 쌓았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온달산성에서 바라본 산성 밖 풍경이다...
산성에서 바라본 영춘면 소재지를 휘돌아 흐르는 단양강과 넓은 들판을 두고 아기자기하게 모여 있는 마을의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산에도 가을과 겨울이 교대의식을 치르고 있다. 병아리 닮은 햇살들이 비탈마다 너부죽 엎드려 있다. 숨 가쁘게 한 고비 오르고 나니 전망대가 나타나고 저만치 강이 보인다. 남한강이다. 푸른 강물은 백사장을 끼고 굽이굽이 흐른다. 강물은 산의 높음을 탐하지 않아 발치를 낮게 흐르고, 산은 강물의 흐름을 욕심내지 않아 그윽한 시선으로 맞이하고 보낸다.
산은 높지 않지만 산세는 제법 가파르다. 계단을 하나씩 오르면서 혼자 묻고 대답한다. 그 옛날 이 길을 먼저 오른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세상의 모든 길에는 걸어간 사람이 각인되기 마련이다. 그 속에는 기쁨도 있지만 눈물도 있다. 그래서 길은 인생이다. 그 안에 사람들의 희로애락이 배어 있다. 물음은 장군이 되어 이 산을 올라갔을 온달로 이어진다. 그는 이 길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죽음을 예감했을까 ? 온달의 행적은 삼국사기 제45권 열전 제5(三國史記 卷第四十五 列傳 第五)에서 확인된다. 기록은 이렇게 시작된다.
온달(溫達)은 고구려 평강왕(平岡王) 때 사람이다. 용모는 구부정하고 우스꽝스럽게 생겼지만 마음씨는 빛이 났다. 집안이 몹시 가난하여 항상 밥을 빌어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떨어진 옷과 해진 신발을 걸치고 시정(市井) 사이를 왕래하니, 당시 사람들이 그를 ‘바보 온달’이라고 불렀다.
저잣거리의 ‘바보’ 온달과 궁궐을 나온 ‘울보’ 평강공주가 만나 부부가 되는 과정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온달은 평강공주에 의해 다시 태어나고 고구려의 장군이 된다. 어쩌면 그는 애초부터 바보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착한 사람들이 바보 취급을 받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을 테니...
온달산성은 성벽의 보존 상태가 양호하여 고대 성곽의 축성법 연구에 좋은 자료이다. 성벽의 축조 방법이나 보강 축조 모습, 유물의 출토 현황 등으로 보아, 처음에는 고구려에 의해 축조되었지만, 6세기 중엽경 신라에 의해 다시 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때문에 6세기 중엽경 신라와 고구려의 각축과 함께 신라가 남한강 유역 이북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지방지배를 추구하였던 모습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산성으로 평가된다.
온달산성 남문
일행과 떨어져 온달이라는 인물의 서글픈 죽음이 서린 산성을 오롯이 혼자 느끼는 기분이 그럴싸했다.
치열했던 삶의 현장이자 애틋한 사랑의 무대로 누구나 한번쯤 걸어보고 싶은 멋진 길인 온달평강로맨스 길에 만난 온달산성을 내려간다 .
이 땅 위의 산성 중 조망이 가장 좋다는 온달산성에서 온달관광지 방향으로 1㎞ 정도 내려가면 온달평강로맨스길의 여정이 끝나는 온달관광지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