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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 대곡사(경북 의성군 다인면 봉정리)사찰여행/경상도 2022. 8. 26. 10:39
의성 대곡사
2022 . 8 . 26.
2022. 8 . 23. 108사찰 순레단에서 11명이 함께했던 의성 지역 사찰과 문화재를 탐방해 보는 힐링여행이다......9시 포항에서 출발하여 의성 대곡사 → 대곡사 산내암자 적조암 → 운람사 → 점심식사 남원 추어탕 → 고운사 → 의성 관덕리 삼층석탑 → 의성 탑리 오층석탑 → 논산식당에서 저녁 식사 까지 의성에서 즐긴 힐링여행....
오늘 첫번째 여행지는 대웅전이 보물이며 범종루가 아름다운 의성 대곡사 부터 탐방해 보기로 한다...
2019년에 올때도 비가 왔었는데 오늘도 우중에 찾은 고려시대의 대찰 대곡사 일주문이 큼직하게 보이는 넓은 주차장이 자리한 대곡사에 도착이다.
기둥의 굵기가 엄청 굵어 옛 대찰이었음을 보여준다.
바라보이는 대곡사를 향해...
일주문을 지나면 ‘세심교’라는 작은 다리 하나가 놓여 있다. 속세의 번뇌를 씻고 세심교를 지난다.
대곡사 입구에 서 있는 석장승이다.
석장승은 무섭지 않은 조금은 귀여운 모습(?) 이다.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짝 잃은 장승은 뭉퉁한 코, 왕방울 눈을 부라리고 치켜 올라간 눈매에 사찰외법 수호와 경계, 비보 등의 역할을 하며 벙거지 모자를 쓰고 송곳니와 윗 이빨을 드러내고 외롭게 서 있는 긴수염을 휘날리고 있는 대곡사 할아버지 석장승 ~
대곡사는 비봉산(579m) 동쪽 자락에 위치한 고려시대 사찰이다.
고려 공민왕 17년(1368년)에 왕사인 인도승려 지공선사와 나옹선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비봉산 일대 산내에는 본원을 비롯한 아홉 개의 암자를 지어 불교를 융성하게 하였으며 또한 호국불교 정신으로 많은 불제자를 배출한 고려시대의 대찰로 원래는 '대국사'라는 이름을 붙여 지었다.
조선 선조 31년(1598) 정유재란때 대부분이 무너져 선조 38년(1605)에 탄우대사가 다시 세웠다. 그 후 숙종 13년(1687)에 태전선사가 현재의 모습으로 고쳐 세우면서 이곳 태행봉에 올라가서 주위를 둘러 보았는데 백리나 되는 긴 계곡이 보인다해서 ‘대곡사’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일주문을 지나 대곡사로 들어가는 입구에 마을 공사 때 발견된 것이라고 하는 서 있는 돌장승과 또 다른 장승이 길 양 옆으로 있어 대곡사 분위기를 더욱 멋스럽게 하는 것 같았다.
도깨비 같은 형상의 무시무시한 돌장승의 잔재 ~
대부분 불상이 불두가 명실된 것에 비해 대곡사 장승은 몸둥아리를 잃어 버렸을까? 처음부터 두상만 만들었을까?
몸은 온데간데 없고 우락부락한 표정 속에서 석공의 재치가 느껴진다.
장승의 머리. 석장승과 안면의 표정이 흡사한데 눈썹이 굵게 표현되었다.
장승 주위에는 특이하게 보이는 연화문이 양각된 주인 모를 온전한 석종형 승탑 1기와 경내 곳곳에는 과거 대곡사의 규모를 짐작게 하는 양련이 또렷한 선조 대좌 하대석, 석 부재들이 흩어져 있다.
'나한전 대시주 권회준(權會俊) 공덕비'와 '대곡사 적조암 극락전 진입로 대시주 엄희섭(嚴熙燮) 거사 공덕비'도 세월이 흐르면 그러한 사실을 증언하는 작은 유적이 될 것이다.
정면에 걸린 편액도 글씨의 윤곽만 보인다. 범종루 정면에 걸린 대곡사 현판 을미 冬 金政 書
대곡사 범종루 (경상북도 유형 문화재 161호)
이 건물은 고려 공민왕(恭愍王)17년(1368)에 처음 건립된 후 조선 선조(宣祖) 31년(1568) 정유재란때 대부분 소실되어 조선 선조왕 38년(1605)에 탄우대사(坦祐大師)와 숙종(肅宗)13년 (1687) 태전선사(太顚禪師)가 중창하였다고 전하며, 1978년 보수 하였다.
범종루는 다포계(多包系)양식의 팔작 지붕으로 건축된 중층의 누각이다. 공포는 외2출 목내3출목을 두었으며, 이 들은 조선후기에 건립하여 대웅전의 조각 수법을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범종루 내에 걸린 편액범종루 (泛鐘樓) 편액과 편액 바로 밑의 화반, 범종루 안쪽의 가운데 칸 화반의 조각은, 줄기가 달린 여러 송이의 연꽃을 마치 한 송이의 연꽃처럼 구성하여 조각하였으며, 바깥쪽에도 연꽃을 조각하였는데 화려하기가 그지없다. 이는 조선 후기 양식의 특징이기도 한데, 불전도 아닌 종루를 이렇게 치장한 예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대곡사는 진입 축선을 향하여 범종루, 다층석탑, 대웅전이 동일선 상에 놓이고, 가운데 뜰(中庭)의 탑을 중심으로 상단에 대웅전을, 그 좌우에 명부전과 요사채를 대칭으로 배치한 산지형(山地形) 일탑식 가람이다.
범종루는 2층 누각으로 종루를 받치고 있는 12개의 아름드리 기둥 아래초석은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그랭이 기법으로 조성된 누각이고 그 남쪽 편에 새로 범종각을 건립하여 그 곳으로 옮겨 놓았다 .
범종루 아래 놓인 재목은 근래에 수리한 명부전의 보(樑)로 쓰였던 것을 교체하면서 옮겨 놓은 것 같다. 굽은 나무가 용(물고기인가) 그림과 잘 어울린다.
공포는 특이하게도 바깥으로 2출목, 안쪽으로 3출목을 두었으며, 공포의 앙서(仰舌) 안에는 연꽃을 화려하게 조각하였다. 그리고 누각 모서리 귀공포에는 여의주를 입에 문 용머리가 장식되어 있기도 하다.
공포 대신 들어간 화반(안쪽에서 본 모습)
공포 사이 화반의 연꽃 문양
범종루는 기둥과 기둥 사이에 공포를 하나씩 놓은 반면 가운데 칸에는 공포를 배치하지 않은 점도 특이하며 이것은 아마도 대웅전의 조각 수법을 모방한 것으로 보여, 대웅전보다 시대가 약간 떨어지는 조선 후기의 건축물로 추정한다고 한다.
단청없이 속살을 드러낸 채 세월의 풍파에 고혹미가 느껴진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운치가 살아 있다.
양서 안의 꽃문양
정교하게 짜맞추어진 내부 귀공포. 건물 지붕의 하중을 적절히 분산시키는 기능을 잘 수행하고 있다.
범종루 2층 내부에는 고려 말의 문신 이규보(李奎報 1168~1241)가 대곡사를 찾고 와서 지은 시를 새긴 " 제대국사(題大國寺)" 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고 전하는데,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동문선에 " 十七日入大谷寺(17일 대곡사에 들어 서면서)"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현재는 없어져 다시 볼수없으니 매우 안타깝다.
石路高低平不平 돌 길이 높고 낮아 울퉁불통하니
閑騎果下彈鞭行 한가한 손이 과하마 타고 채찍을 늘어뜨리고 가네.
輕風靜掃煙光去 가벼운 바람은 고요히 연기 빛을 쓸어 가고,
落月時兼曉色明 넘어가는 달 때로는 새벽 빛을 겸하여 밝다.
短麓前頭看寺榜 짧은 산기슭 앞머리에서 절[寺]의 현판을 보고,
橫舟側畔問灘名 배를 옆 언덕에 가로 대고는 여울 이름을 묻는다.
孤村何處吹寒笛 외로운 마을 어디에서 쓸쓸히 피리를 부는가,
抱疾他鄕易惱情 타향에서 병들어 있는 사람의 심정은 괴로워지기 쉬운데.
범종루의 우물천장
5량가의 가구(架構)는 사각형 대들보 위에 원형의 덧보를 포개고 충량(衝梁)없이 중도리로 왕지(모서리 기둥 밖으로 내민 도리)를 짜 우물 천장을 꾸몄는데, 이 우물 천장을 구성한 가구 수법은 주목되는 부분이다.
옛 범종루각 2층에서 바라본 대웅전 영역이다.
범종루에 본래 이 종각 안에 안치하였던 종은 예전에 예천 용문사로 가져갔다고 전하며, 지금은 엣 범종루 옆에 근래에 새로 조성한 범종각에 범종과 목어· 운판· 법고가 걸려 있다.
고즈넉하게 보여지는 대곡사 풍경은 텅 빈 범종각이 있었기에 더욱 멋스러운 것 같았다.
범종루는 맞배지붕에 앞면과 옆면 각 3칸의 규모인 2층 누각 건물로,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윗부분에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와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에는 외부로 뻗쳐 나온 재료의 윗몸에 연꽃을 조각하여 조선 후기의 조각 수법을 보이고 있는 아름다운 건물이다.
나란한 옛 범종루와 새로운 범종각
새로운 범종각도 팔작지붕의 모습이다.
범종각 영역과 요사영역이 다함께 보인다...
대웅전과 범종각 사이에는 연꽃문이 양각되어 있는 석재, 부도 등을 모아 놓은 석조물 2점이 있다.
불상대좌로 보이는 부재 위에 다른 부재를 올려놓아 탑이나 석등 같은 느낌이 들게 해 놓았다. 위에 올려놓은 용도를 잘 알 수 없는 사각 부재는 자세히 보면 조각이 섬세하다.
화강암 기단석에 잘 조각된 연꽃무늬가 무척이나 안타깝게 느껴지는 것은 어째서일까......
역사를 알 수 없는 이끼 낀 석탑이 아름답다. 석부재들을 쌓아 올려 탑 형태로 나타내었다. 사각의 복련받침이 눈길을 끈다.
정교하거나 화려하지도 매끈한 아름다운도 없다. 이끼낀 돌에서 자연스러움이 묻어난다. 인위적 아름다움을 추구하기 보다는 자연석을 얼 만큼 다듬어 쌓은 돌탑에서 주변과 조화됨을 배운다.
범종루 마당에서 바라본 대곡사 전경이다... 대웅전 영역의 대웅전을 중심으로 불조전과 명부전...
대곡사에 들어서면 탑신이 없는 다층석탑 청석탑을 중심으로 전방에 누각형식의 범종각이 있고, 좌측에 요사체, 우측에 명부전이 마주보고 있으며, 뒤쪽에 대웅전이 있는 口형의 가람배치를 이루고 있다.
대곡사 다층석탑 (지방문화재자료 제405호)
대웅전 앞에 높이는 173㎝의 색다른 다층석탑은 고려말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점판암 13개로 된 13층 청석탑으로 지금은 완전한 모습은 아니다.탑 꼭대기인 상륜부는 유실되었다고 한다.
이 다층석탑은 탑신이 점판암으로 만든 고려 초기의 청석 탑으로, 대곡사 다층석탑'이라고 하며 상륜부는 없어졌으나 화강암으로 된 기단부와 점판암으로 된 탑신부는 약간의 손상을 입은 상태로 남아 있다.
이 다층석탑 기단부 지대석은 사각의 돌로 되어 있고 그 위에 함께 기단부를 형성하는 하대석이나 중대석· 연화대좌· 상대석이 차례로 놓여져 있다.
탑신부는 현재 12층이 남아 있는데 각층은 탑신석은 없고 옥개석만 놓여 있는데 각층의 옥개석이 위로 갈수록 일정한 비율로 축소되어 있는데 6층과 7층의 체감비율이 급격히 줄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사이에 있었던 한 층의 옥개석이 없어진듯 하여 본래 13층을 이루었으리라 추정한다 .
단촐 하면서도 고아한 고려시대의 석탑양식을 엿볼 수 있는 대곡사 13층 석탑은 대곡사의 또 다른 볼거리이다.
대곡사 대웅전(보물 1831)
의성 대곡사 대웅전은 대곡사의 주불전으로 고려 공민왕 17년 (1368)에 처음 건립한 후 조선 선조 31년 (1598) 정유재란 때 부분 소실되어 조선 선조 38년 (1605)에 탄우대사와 숙종 13년(1687) 태전선사가 중창하였다고 전하고 그 후 중창과 중수를 거쳐 오늘 날에 이르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기둥위에 평방을 돌리고 기둥 위와 그 중간에도 각각 공포를 배치한 다포계 양식의 불전으로 다포식 팔작지붕 건물이다.
구조 수법이 비교적 건실한 편으로 조선 중기의 특징이 나타나고 있다. 화려한 단청은 전혀 없이 오로지 나무의 색상만으로도 아름답고 멋진 불교 건축물이었다.
대웅전 건물은 장대석을 두 벌대로 쌓은 기단 위에 동향으로 앉았는데, 막돌 덤벙주초 위에 배흘림이 있는 두리기둥을 세우고, 앞면은 창호로 개방하였다. 대웅전은 단청이 모두 벗겨져 애당초 단청을 하지 않았던 것처럼 보이는데, 기둥을 원목 그대로 사용하여 한결 자연스런 멋을 더해주고 있으며, 더구나 초석마저도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썼다.
가운데 칸(어칸)은 4분합 굽널 띠살문이고 좌우 협칸은 3분합문이다. 배흘림 기둥 위에 평방을 돌리고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공포를 꾸민 다포계 팔작지붕 건물이다.
대웅전 안의 목조여래삼존불로 주불로는 아미타부처님을 모시고 관음과 대세지보살을 협시로 하였다.
7출목의 공포와 겹처마로 장식된 화려한 보궁형 닫집 아래 삼존불과 부처님 뒤의 후불탱화가 장엄하게 다가온다..
내부는 우물마루 바닥 위에 수미단을 꾸미고 후불벽을 두었으며, 대들보 윗부분에 충량을 얹고, 그 위에 다시 들보를 놓아 화반대공으로 종보를 받치고 있는데, 주목되는 부분이다.
4년전에 왔을때는 고승존영을 이곳 대웅전에서 보관 하지 않았는데 지금와 보니 이렇게 조금은 변해 있었다...
향 불단 좌측 서향 벽면으로 유정 사명당 진영과 신중탱화
향 불단 우측 동향 벽면으로 한때 대곡사에서 활약한 지공선사. 나옹선사. 무학대사를 함께 그린 존영과 우측의 청허당 진영
한때 대곡사에서 활약한 지공선사. 나옹선사. 무학대사를 함께 그린 존영
불단후면
한편, 불단이 후열 평주선 보다 뒤쪽에 위치하였는데, 이런 불단의 위치는 평면 구성이 같은 다포계 팔작지붕 불전에서는 18세기 이후 점차 줄어드는 모습으로, 중건 당시인 17세기 후반의 건축 경향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불단 바로 위에는 닫집으로 장엄하고 보궁으로 장식하였으며, 7출목의 공포와 겹처마로 장식된 보궁형 닫집의 화려한 장엄.
수미단
창방의 용 그림
대곡사 대웅전의 내부는 대들보 밑까지 초각으로 연결하였으며 내부의 천장은 우물천장으로 꾸몄고 구조 수법이 비교적 건실한 편으로 전체적으로 조선 중기 건축 양식을 띠고 있다.
대웅전 법당의 부처님을 모신 닫집의 단청도 퇴색되어 가고 있었다.
향 대웅전 불단 좌측 천정에 매달린 반야용선. 불교의식 때 사용하던 기물로 소종이 9개가 있었을걸로 사료되는데 악착보살은 없어졌지만 작은 종은 현재 4개가 달려 있으며 당겨 흔들던 노끈줄이 없으며 한쪽 용두가 없는 상태로 보전되어오니 그나마 귀한 자료이다.
천장은 소란반자 우물천장으로 꾸몄다.
우물천장의 꽃무늬 단청이 비록 퇴색되긴 했으나, 창건 당시의 화려함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대웅전 옆면의 모습. 앞면과 마찬가지로, 자연석 초석 위에 배흘림 기둥을 세우고, 창방과 평방(기둥과 기둥 사이에 가로로 올려진 부재로서 밑의 것이 창방이고 위의 것은 평방이다)을 올렸다. 또한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공포가 둘씩 꾸며져 있어 지붕의 무게를 적절히 견뎌 내고 있다.
대웅전의 정면과 양 측면의 기둥 아래에는 마루가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큰 구멍이 있는데, 이러한 불전 정면에 마루를 둔 구조나 배면의 영쌍창 등은 18세기 이전 건물에서 주로 찾아볼 수 있는 고식(古式)이다.
처마 끝의 무게를 받치기 위하여 기둥머리에 짜 맞추어 댄 나무쪽을 공포(包 또는 貢包)라 하고, 이 공포를 기둥머리 위와 기둥과 기둥 사이의 공간에 짜 올린 것을 다포(多包)라 한다.
옛날 나무 건물을 지붕 아래에서 위로 쳐다볼 때 반듯반듯한 목재들이 복잡하게 박혀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다포이다. 이 기법은 주로 조선 전기부터 많이 썼다.
대웅전 옆면의 모습.
대웅전 뒤에 어처구니가 없는 규모가 큰 맷돌이 있다....
역시 단청 없이 나무의 속살 그대로 노출된 대웅전 편액이다. 있는 그대로 꾸미지 않은 자연스러움이 베어 나온다.
단청도 무채색이 되었고, 대웅전 현판의 글씨도 희미하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더욱 멋스러워 보인다.
대곡사 명부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39호)
이 명부전의 건립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며 구조 및 형식과 형태는 오량, 맞배, 겹쳐마집으로 17~18세 형식을 유지하고 있다.
명부전 건물 안에는 목조지장보살과 명부 시왕(冥部 十王)이 봉안되어 있는데, 지장보살이 앉아 있는 목조 대좌가 화려하면서도 섬세하다.
명부전은 저승의 유명계를 사찰 속으로 옮겨 놓은 전각으로 죽음과 저승을 느끼며 현세에 내가 할 바를 생각헤 보는 곳이라고 한다.
향 지장보살님 좌측의 시왕들...
향 지장보살님 좌측의 시왕들과 지장탱
향 지장보살님 우측의 시왕들...
대곡사 명부전 대들보의 용, 꿈틀거림이 예사롭지 않다.
명부전 기둥 위의 단청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어 처음 지었을 당시의 화려함을 짐작할 수 있다.
측면 산신각 쪽에서 바라본 대곡사 명부전
대곡사 불조전
명부전과 마주한 대곡사 불조전에는 소조로 된 소형 13위의 여래좌상이 놓여 있을 전각인 듯 한데 2019년에도 이번네도 미쳐 안을 살피지를 못했다. 아쉽게 못 살피고 온 불조전 내부를 또 언제 가 볼수 있으려나?
이 소조로 된 소형 13위의 여래좌상들은 화엄경에 나오는 선재동자 53분을 의미하여 만든 것으로, 53불존에 모셔져 있던 것인데, 1850년 무렵 당시의 정인조라는 주지가 그 땅을 지방민에게 매각하였다고 전한다. 53불전을 헐고 땅을 파는 과정에서 불상들이 여기 저기로 흩어져 버렸다. 이로 인하여 화상은 부처님의 노여움을 입었기 때문인지 나병에 걸려 죽었다고 한다.
이 때 53불이 방치되어 산 속으로 흩어졌는데, 일제강점기에 최인찬 주지가 주석하고 있을 때 한 여신도가 발견하고 불자가 된 마음에 가슴이 아파 촛불을 켜고 3일간을 정성껏 불공을 드렸더니 결혼 20년 동안 잉태하지 못했던 몸에서 옥동자를 분만할 수 있는 영험을 발휘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 이후로 몇 위씩 찾았으나 결국 지금은 13위만 남았다고 하며 13위 가운데 중앙에 모셔진 불상은 개금하였다고 하며 12불은 호분으로 입혀졌으며 이 13위의 불상은 조성 양식으로 보아 조선 중기에 봉안된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이 13구의 불상들은 모두 다른 모습의 수인을 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그리고 크기 또한 다른 것이 있어, 이 불상들이 모두 같은 시기에 만들어 진 것은 아닌 것으로 짐작된다고....
나한전 쪽에서 바라본 대곡사 불조전
불조전 뒤로 향 대웅전 좌측의에는 나한전이 있다...
나한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전각으로 조선 후기에 조성된 나한상이 안치되어 있다.
나한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깨달았다고 하여 아라한의 경지에 이른 제자들이다. 나한전은 부처님의 제자인 나한들을 모신 전각으로 16나한, 500나한, 1,200나한 등이 있다.
대곡사 나한전 내 향 법당 우측의 나한들....
대곡사 나한전 내 향 법당 좌측의 나한들....
산신각 쪽에서 바라본 나한전
대곡사 산신각에는 산신상과 산신탱화 있다.
대곡사를 둘러 싸고 있는 멋진 송림
불조전.종무소. 공양간.요사들과 아한전이 차례로 보인다...
공양간과 종무소. 요사. 나한전. 불조전.....
대곡사 종무소와 공양간
대곡사 공양간
나한전 옆 공양간 뒷쪽의 새로 불사한 요사채
대곡사 이쁜 전각이 오밀조밀 붙어있는 모습이 참 정겹다.
천년고찰로 조금도 손색이 없는 옛 모습 그대로 지키고 있음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1975년 이전 아주 짧은 기간이지만 주경야독을 하며 사법고시 공부를 하던 때, 이곳 대곡사를 찾아와 약 20일 동안 공부를 하며 머물렀었다고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죽기 얼마 전에 의성 어디를 가면 대곡사란 절이 있다고 하며, 그 때 생각이 난다고 한 곳이다....
세심교를 지나...
대곡사의 일주문을 나서며 오늘 첫번째 여행지 대곡사 순례를 마친다... 4년만에 다시 와보는 대곡사, 감회가 새롭다... 대곡사를 나와 1.2km 떨어진 곳의 대곡사 산내암자 적조암으로 오늘 두번째 여행지로 향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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