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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흥 향교(경북 군위군 의흥면 읍내길 89-27)
    여행방/경상도 2021. 6. 28. 10:22

     의흥 향교

     

     

    2021.  6.  28.

     

    2021. 6. 26. 보슬비가 조금씩 내리는 날, 돌아가신 친정엄마 생신이라 여동생들과 엄마 산소에서 11시에 만나기로 하고 나는 서둘러 이른 아침 6시 포항을 출발해 엄마 산소 가기 전에 군위 화계서원과 수태사. 의흥향교를 둘러 보고 11:00 까지 엄마 산소로 향하기로 한다.....

     

    매년 행사인 11:00 엄마산소에서 동생들이랑 제부씨도 만나 할아버지.할머니 산소랑 엄마 산소에 인사드리고 엄마 산소 옆 정자에서 즐겁게 담소하며 맛난 점심 식사도 하면서 충분히 쉬고 15:00 내년을 기약하며 아쉬운 작별을 고하고...

     

    다시 포항으로 돌아오는 길에 군위 쪽으로 경유해서 군위지역 관광지인 '리틀 포레스트' 영화 촬영지와 남곡서원 , 신흥사를 만나고 바쁜 일정을 마무리 하고 포항에 도착하니 오후 7:00시가 되었다...

     

     

    엄마 산소 가기 전에 밀양 손씨 (密陽孫氏) 돈암공파(遯巖公派) 종중에서 소유와 관리를 맡고 있는 군위 화계서원과  군위의 시골동네 마을 끝자락에 숨은 수태사를 보고 나와서 15분 정도 달려 오늘 세번째 일정으로 의흥향교로 향해 본다...

     

     

     

     

     

     

    조선 인종 때에 현유 (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다.

    임진왜란 때 건물은 모두 소실되었으나 이곳 유림 손돈암 (孫遯巖)이 위패를 선암산 (船巖山)으로 피난시켜 병화를 면하였으며, 이로써 경상도에서 오직 이 향교만이 당초 그대로의 위패를 보존하고 있다.

     

     

    의흥향교는 1398년(태조 8년), 의흥 동남쪽에 건립되었다가 임란 때 1601년(선조 34)에 중건하고 1614년(광해군 6)에 읍 서편으로 이건하였다가 1641년(인조 19)에 현재의 위치로 이건 하였는데 현재의 건축물은 중건 당시의 목재를 옮겨 지은 것이 아니라 새롭게 이건한 것 같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삼성재 (三省齋)·노사(奴舍) 등이 소실되었으며,  대성전과 광풍루를 겨우 남기고 명륜당과 그 외의 부속 건물 대부분이 전화를 입은 까닭에 현재의 대성전과 명륜당 그리고 문루인 광풍루 등의 여러 건물은 중수되거나 재건축된 것들이다.

     

    1968년에 광풍루 (光風樓)를 중수하였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대성전, 정면 4칸. 측면 2칸의 광풍루,   4칸의 사물재(四勿齋),  신문 (神門) 등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 부터 토지와 전적· 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 1 명이 정원 30명의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 (釋奠)을 봉행 (奉行)하며 초하루· 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다.

     

     

     

     

     

     

     

     

     

     

     

     

    광풍루 (光風樓)

     

    1952년 찍은 사진을 근거로 해서 1968년에 정면 4칸, 측면 2칸의 광풍루 (光風樓)를 중수 후 현재 다시 원래되로  5칸으로 복원한 광풍루 누각이다...

     

     

     

     

     

     

     

     

     

     

     

     

    입구에   광풍루가 있는데 역시나 다른 서원들과 비슷하게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역시 향교 안은 이렇게 담장너머로 들여다 봐야한다.  입구의 광풍루와 마주 보는 명륜당 그사이로 서재역할을 하는 삼성재가 보인다...

     

     

     

     

     

     

    출입문인 광풍루. 서재 역할을 하는 삼성재.  강당인 명륜당. 명륜당 우측 뒤로 대성전. 동재 역할을 하는 4칸의 사물재(四勿齋)가 차례로 보인다...

     

     

     

     

     

     

     

     

     

     

     

    명륜당은 강학공간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명륜당은 한국전쟁 이후에 지어진 것이다.

     

     

     

     

     

     

     

     

     

     

     

     

    서재 역할을 하는 삼성재와 동재 역할을 하는 4칸의 사물재(四勿齋) 그리고 출입문인 광풍루.

     

     

     

     

     

     

     

    강당인 과  동재 역할을 하는 4칸의 사물재(四勿齋)와 서재 역할을 하는 삼성재

     

     

     

     

     

     

    명륜당과 광풍루 그리고 서재인 삼성재

     

     

     

     

     

     

    광풍루와 명륜당 그리고 동재인 사물재

     

     

     

     

     

     

    명륜당 뒤로 대성전이 있다...

     

     

     

     

     

     

    옆에서 바라본 의흥향교 대성전

     

     

     

     

     

     

    정면 3칸. 측면 3칸의 대성전에는 5성 (五聖), 송조4현 (宋 朝四賢), 우리나라 18현 (十八賢)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이 향교의 대성전은 경상북도 유 형문화재 제19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운영은 전교 (典校) 1명과 장의 (掌議) 수명이 담당하고 있다.

     

     

    현재 의흥향교에 모시고 있는 오성위판은 임진왜란당시 손공 (孫公)이 8년간 선암산(船巖山)에 피난하였던 위판(位版)으로서 경상도내에서는 당시의 위판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유일한 원판이라고 경상북도 관광문화체육과의 경북문화재자료에 실려있다.

     

     

    많은 역사적 곡절 위에 대성전은 그나마 17세기 초의 옛 모습을 비교적 유지하고 있어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98호로지정되었다.

     

     

    1957년의 중수기문를 보면 “명륜당과 삼성사물 두 재실이 다 같이 없어졌으나 다만 대성전이 홀로 그 화를 면하였다. 부러지고 깨어진 기와와 허물어진 벽이라 여러 가지 피폐한 것이 이루 말할 수가 없어 사방으로 돌아보아도 소연하기 그지없다…” 고 밝히고 있어 당시의 황폐한 상황이 눈에 어른거리듯이 짐작된다. (성균관장 이가원의 중수기문을 현대식으로 윤문했다)

     

     

    약 370여 년의 풍상을 겪어온 대성전은 정면의 네 기둥을 비롯하여 12개의 굳건한 기둥이 맞배집의 건물을 받쳐주고 있어 그 옛스러움의 품위에 위용을 더한다. 붉은 주칠을 한 기둥은 세월의 나이테가 고루 배어 있고 더러는 비바람에 갈라진 흠집이 성성하다.  몇 차례 벽채를 고치고 서까래와 공포를 한두 차례 갈아 끼워넣었지만, 기둥은 오랜 시간의 하중을 든든하게 버티어 주고 있다.  자그마한 배갯돌로 3층 석축을 쌓아올린, 그리 높지 않은 기단 위에 굵은 두리기둥을 바치고 있는 널찍한 초석이 놓여 있다.초석은 인근의 산자락에서 날라 온 듯 크기도 고르지 않거니와 별로 다듬지도 않고 자연석 그대로를 사용한 흔적이 역력하다.

     

     

    3칸 집의 맞배집은 기왓골의 경사도가 비교적 빠르다. 단촐한 외양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함부로 범할 수 없는 묵직한 위엄을 안고 있는 건축구조다.

    임란과 6.25를 겪으면서 그 원형이 보존되기가 쉽지 않았지만, 대성전은 조선 중기의 건축미를 보여주는 등 그나마 옛 모습을 가늠하게 한다. 그리고 기둥 위에 하나씩 얹혀 있는 익공포는 그리 큰 기교를 부리지 않았지만, 그에 비하여 대들보를 바치는 포대공 위의 종도리와 나란히 놓인 네 개의 첨차가 흔하지 않은 양식이라 시선을 끌고 있다.

     

     

    의흥향교의 자랑거리는 수백 년 동안 올곧게 지켜온 위패다. 대성전에는 문성왕의 시호를 쓰는 공자를 비롯한 다섯 분의 성인과 최치원, 퇴계 등 스물두 분 현인들의 위패가 마치 살아있는 성현처럼 모셔져 있다. 그 당시, 위패를 훼손하거나 잃어버린다거나 전란 중에 적의 수중에 들어간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수치였을 것이다.

     

     

    돈암의 행동이 귀감이 된 듯, 6·25전쟁 때는 도우암 선생이 앞서서 박경환 및 박기환의 도움을 얻어 의흥향교의 성현 위패를 또 다시 선암산으로 피난시켜 재앙을 막게 된다. 수백 년의 세월을 뛰어넘는 두 선비의 올곧은 유가정신과 원리실천의 덕업은 영원히 의흥지방의 미담으로 전해지고 있다.

     

     

    지금도 의흥향교 대성전 안에는 공자를 가운데로 모시고 다섯 개의 성인 위패와 스물 두 개의 현인 위패가 좌우로 가지런하게 정렬되어 있다.

    하얗고 단단한 밤나무를 깎아 판을 만들고 그 위에 시호와 이름자를 쓴 위패는 각각 나무갑 속에 넣어두다가 가을 향사 때 꺼내서 사용한다.   밤나무로 위패를 만드는 것은 밤이 한 송이에 한 낟의 알 암을 담고 있기에 유일의 군주임을 상징하고 충절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세월을 따라 향교의 돌담이 허물어지고 일주문조차 낡아졌지만,  대성전을 앞에 두고 사는 의흥 사람들의 삶 속에는 충절의 정신이 고스란히 이어져 나가고 있다.

     

     

     

     

     

     

    의흥향교가 개교되면서 제작된 스물일곱 분의 위패는 임란과 6.25 등 두 번의 전란을 거치면서 갖가지 우여곡절을 겪는다.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다. 향원이던 돈암 손기남은 남의 눈을 피해 성현의 위패를 모두 지겟짐으로 지고 선암산으로 향했다.

     

    동편으로 약 30여 리 먼 곳에 있는 선암산에는 큰 바위굴이 있었는데 평소에 산을 다니면서 봐 두었던 그 굴을 떠올린 돈암은 일본군이 경주를 거쳐 영천~신령 갑티재를 넘어올 것을 예상하고 위패를 선암산으로 옮길 생각을 한다.   그는 먼저 노부모를 선암산 인근의 조림산으로 옮겨 모시고 거기서 다시 선암산 더 깊은 곳으로 성현의 위패를 옮겨 어떻게든 전화로부터 막아 내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유림에게 위패는 살아있는 신위로서 생전의 모습과 같은 의미를 가진 대상이다. 

     

     

    이른 새벽 옷을 정제한 돈암은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곧바로 향교에 들어 대성전 문을 열었다. 동문의 고리를 잡은 손이 떨리고 심장이 요동쳤다.  어둠이 채 걷히지 않은 성전 안은 난디기름 불빛만이 희미하다.   돈암은 숨을 죽이고 위패 앞에 경건하게 공수를 하여 4번의 큰절을 올리고는 비장한 마음으로 신위들에게 아뢴다.   그리고는 위패를 하나하나 말끔하게 닦아 나무 상자에 넣었다.   지게에 실은 위판은 족히 한 짐의 무게였다.  그 길로 돈암은 선암산으로 총총 사라져 30리 길을 단숨에 걸었다. 늦은 봄날의 아침 해가 동산을 훤하게 밝힐 무렵 돈암의 바지저고리는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실로 먼 길이었다.  사람이 많이 다니는 산길을 피하여 숲이 가려진 바위굴 앞에 다다른 돈암은 만에 하나라도 위패가 손상될까 싶어 조심스럽게 하나씩 꺼내어 바위 구멍 속에 차곡차곡 쌓았다.   해를 끼칠 사람도 무서웠지만, 혹시나 비바람에 젖어 썩어지면 어찌하나 하는 걱정이 여간 아니었다.   돈암은 안전하게 정리해 놓은 위패 앞에 다시 엎디뎌 절을 하고 하산하였다.  그 후 돈암은 조림산의 부모와 선암산 바위굴을 왕래 하면서 부모 봉양과 함께 위패를 극진하게 지켰다.   그러던 어느 날, 준비해 간 대나무초배기로 저녁밥을 대신하고 적막한 산속의 위패를 숨겨둔 바위굴 앞에 앉아 쏟아지는 별들을 헤고 있는데 숲 속에서 뭔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긴장한 돈암은 돌을 하나 집어들고서 나무들이 움직이는 방향으로 눈을 떼지 않고 주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난데없는 큰 짐승이 자신 앞에 다가서면서 엎드렸다.   정신을 차리고 살펴보니 범이었다. 큰 범은 살찐 토끼 한 마리를 입에 물고 친근한 몸짓을 하면서 돈암 앞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부모를 봉양하고 충정심으로 위패를 보존하는 자신의 지극정성이 산신령에게 전달된 것인가?  그 후부터는 호랑이와 동무가 된 돈암은 산길과 밤이 무섭지 않았고 위패를 조금의 훼손도 없이 잘 지켜나갔다.   전란이 끝나고 세상이 안정되자 돈암은 다시 위패를 그때의 대성전으로 옮겨 놓았고 그 덕분에 의흥향교의 위패는 처음 만들어진 그대로 지금까지 잘 보존되고 있는 것이다. 돈암의 정성으로 위패를 지켜냈던 의흥향교는 경북도내 여러 향교 중에서 훼손 없이 원형 그대로를 보존하고 있는 유일한 곳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의흥향교 관리 회관인 일신당이다...

     

     

     

     

     

     

    의흥향교 좌측 권역에 위치한 모성비각과  모성기공비

     

    흥향교의 왼편의 작은 비각 속에는 숙종대에 세워진 오래된 비석과 현대에 들어 다시 세운 비석이 함께 자리를 지키면서 오고 가는 사람들에게 몸을 바쳐 실행한 충효정신을 일깨워 주고 있다.

     

     

     

     

     

     

     

     

     

     

     

     

    돈암손선생모성효의비각

     

    임란 이후 선조대왕은 돈암을 ‘나라에 충신이고 부모에게는 효자이며 성현에게는 어진 제자’라고 칭송하면서 네 결의 땅을 하사하였으나 돈암은 끝내 받을 자격 없다며 되돌리자 임금은 돈암에게 충절의 뜻으로 하사주를 내리고, 그가 세상을 떠나자 다시 성균관 첨정의 품계와 통정대부의 작위를 수여하였다.    뿐만 아니라 1718년(숙종 44년) 의흥군수 조하성은 돈암의 충효유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돈암손선생모성효의비’를 세우고 오늘날까지 숭모하고 있다.

     

     

     

     

     

     

    의흥향교 앞에는 ‘돈암손선생모성효의비각’ 비석이 하나있다.

     

     

     

     

     

     

     

    돈암손선생모성효의비각 안의 ‘돈암손선생모성효의비’

     

    경북도내 여러 향교 중에서 훼손 없이 원형 그대로를 보존하고 있는 유일한 곳인 의흥향교를 담장 밖에서 보며 예전의 선인들의 충정심을 다시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이제 오전 일정으로 여기까지 보고 경북 의성군  단밀면에 있는 친정엄마 산소를 향해 1:15  정도 달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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