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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 삼화사 산내암자 관음암 (강원 동해시 삼화로 588-70 , 삼화동 855 )사찰여행/강원도 2019. 10. 14. 19:31
동해 삼화사 산내암자 관음암
2019. 10. 14.
2019. 10. 12. 델타산악회와 함께 동해 두타산 오르며 들러본 삼화사 산내암자 관음암이다. ...
무릉계곡을 올라 우리가 산행할 코스이다. 무릉계 탐방만을 목적으로 삼는다면 하늘문 길이 어울린다. 삼화사 ~ 쌍폭과 용추폭을 탐승한 다음 무릉계곡을 거쳐 하늘문 ~ 관음암을 거쳐 삼화사로 내려선다.
하늘문과 신선바위를 보고 점심식사 후 관음암으로 향한다.
쏟아지는 땀과 턱까지 찬 숨에 번뇌는 끼어들 틈이 없었다. 잡생각은 간혹 이는 바람과 무릉계곡을 흐르는 물소리가 삼켰다.
무릉계곡을 내려다보며 관음암까지 오르는 산길은 제법 험하고 인적이 드물었다. 암벽과 숲으로 둘러싸여 있는 한적한 관음사에 다다르면 더 이상 길이 없다.
관음암 도착이다. 관음암은 삼화사에서 서쪽 양지바른 학소대골 상류지점에 두타산성과 마주 대하고 있다.
관음암은 대한불교 조계종 삼화사 산내암자이다.
나무들 사이에 숨기듯 안겨있는 관음암은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놓치기 십상이다.
이렇듯 대부분의 암자는 사람을 피해 숲으로 들어간다. 관음 즉 관세음보살이란 중생의 고통에 찬 소리를 듣고 대자대비의 마음으로 고통을 걷어내고 왕생의 길로 인도하는 보살이다. 그런데 왜 관세음보살암자는 산으로 들어간 것일까? 왜 사람들의 소리를 듣지 않는걸까? 깨우침은 관계를 끊음으로써만 가능한 것일까? 깨우친 후에야 비로소 산을 걸어나오는 것일까? 청정한 곳에서의 깨우침은 과연 풍진 세상의 중생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설 수 있을까?
'두타'는 불교용어로 '속세를 버리고 불도를 수행한다'는 뜻이 있는 곳이다.
오늘은 가까운 곳에 있는 삼화사보다 더 깊고 깊은 산중에 있는 관음암을 찾아 왔다. 삼화사 입구에서 바로 오면 1.1km 거리지만 하늘재를 통해 올라오면 관음암 관음보살님을 뵙기가 그렇게 쉽지만은 않았다.
끝도없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듯한 가파른 산길을 따라 작은 폭포도 지나고 설명 할 수도 없을 만큼의 강인한 생명력을 지닌 소나무도 만나고 나서야 관음암이 모습을 드러냈다.
관음암, 고려 태조때 창건된 암자로 예로부터 영험함이 소문나면서 지금도 사시사철 기도하러 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절이라는데 이 깊은 곳에 이런 암자가 있다는게 신기하다.
무릉계곡을 안고 자리한 관음암은 자욱한 안개 속에도 선명했다. 7층석탑이 자리를 지키고 섰으며 낡은 법당은 고즈넉했다. 드문드문 관세음보살을 찾은 기도객들 걸음이 정겹다.
높고 깊숙한 곳 발아래는 무릉계곡 구름 뚫고 바위가 솟았다고 소동파는 읊었는데 고운 스님은 구름을 벗 삼고 수도하고 있었다.
깊은 산속 사찰 곳곳에서는 가을 정취가 물씬 풍긴다.
관음암 수조
관음암 편액을 단 법당과 요사
관음암은 두타산 삼화사의 유일한 산 내 암자로 민심 다독이려는 왕건의 불사로 관음암이 중건하는 계기 돼 고려 태조 4년 (921) 용비 스님에 의해 지조 암으로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는 암자이다. 그 뒤의 역사는 전하지 않으며, 6·25 때 회진된 것을 1959년 관일 스님이 삼화사(三和寺)의 주지로 취임하면서 부인신도회(婦人信徒會)를 만들어서 시주를 얻어 중건한 뒤 그 후 이곳에 모신 관음보살 상의 영험함이 계속 되어 이를 계기로 관음암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한다. 현재 비구니들의 수도처로 사용되고 있다.
관음암의 현존하는 당우로는 법당과 삼성각. 산왕대신과 요사 한 채가 전부인 전형적인 산내 암자다.
두타산을 마주하며 소박한 고향집과도 같은 분위기의 관음암을 참배한다...
활짝 열린 법당 문 안으로 금빛미소를 머금은 관세음보살과 눈이 마주쳤다.
관음암 법당의 주불이신 관세음보살....
절절함 하나 들고 가면 들어 주는 관음보살. 기도를 올리는 이가 적지 않았다. 향을 피우고 108배를 올렸다.
조용히 법당 안을 바라보며 두손을 모아 참배를 드린다. 힘겹게 산길을 올라 올때는 영험한 관음보살님께 이런 저런 구원을 드리려 마음먹었는데 막상 이곳에 와서는 그저 아무 생각이 없다. 무념 무상이란 이런 것일까?
관음암 법당의 신중탱
관음암 법당의 소종
관음암 법당의 북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같은 지혜를 전했다. 누구는 깨닫기도 했고, 누구는 여전히 방황했다. 목건련 존자가 물었다. “똑같은 가르침에도 결과가 다른 이유는 무엇인지요?” 부처님은 답했다. “다만 길을 가르쳐 줄 뿐이다. 그 길을 가고 아니 가는 것은 그들 몫이다.”
관음암 법당에서 바라본 풍경이다. 예전에는 저 계단을 통해 관음암을 오갈수 있었는데... 지금은 새로운 길을 만들어 두었다.
주변에 소나무와 암벽, 그리고 폭포가 있어 경관이 매우 좋으며, 특히 계곡 건너편 산을 바라보는 전망이 뛰어나다. 이 절에서 1㎞ 이내의 지점에 두타산성이 있다.
관음암은 부침을 겪었다. 조선 정조 17년인 1793년 화마로 소실된 암자를 당시 삼척부사였던 윤청의 주선으로 재건했으나, 민족의 비극 한국전쟁 때 연기와 함께 잿더미가 됐다. 1959년 다시 중건되면서 관음암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작은 암자에 모셔진 관세음보살님이 중생을 자비로 품었다는 얘기가 퍼지면서 수많은 이들이 관음암에 걸음해서다.
관음암 왼쪽 돌계단을 따라간다.
시선을 돌려 법당 오른쪽을 보니 돌계단이 정겹다.
밟아 올라가니 독성과 칠성, 산신을 함께 모신 작은 법당이 있고
그리고 돌에 새긴 산왕대신이 나란히 앉았다.
‘산왕대신은 10년 전 주지 효림 스님이 열심히 기도해 불사했다’고 공양주보살이 귀띔했다. 1,000년 뒤에도 찾아올 기도객들을 위한 불사란다. 마음 닦아 부처님 지혜로 올라가기 위한 돌계단이다...
관음암 주변은 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어, 마치 한 폭의 산수화를 보는 듯하다.
산왕대신 앞에서 바라본 종무소 겸 공양간으로 쓰는 요사와 관음암의 법당이다.
관음암 장독대도 정겹다. 바람이 심한지 장독 두껑은 돌을 하나씩 이고 있다...
소박한 관음암 법당의 뒷모습이다.
종무소 겸 공양간으로 쓰는 요사와 법당
법당 옆의 요사
변변한 삭도 하나 없어 공양물 직접 들고 간다.
불자들은 공양물을 지고 온다. 가스통이며 향초를 어깨에 들쳐 메고 관음암을 오른다. 변변한 삭도도 없어 기도객들이 이고 지고 공양물을 날라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이 오히려 고맙다. “업 닦는 거예요.” 그 한 마디면 충분했다. 움직이지 않는 두 다리를 관세음보살을 부르며 수도 없이 관음암에 올랐던 그들을 보며 고개가 숙연해진다.오후, 두타산에 안개가 내려앉았다. 관음암이 모습을 감추기 시작했다. 무릉계곡 물소리도 잠잠해졌다. 관세음보살의 금빛미소도 숨었다. 구름과 안개는 하늘을 가렸다. 잠깐 얼굴 내민 이곳의 천년신심이 무릉계곡 안개 품에 안겼다. 아니다. 운무 위에 해는 찬란했다. 잠시 안개로 가려졌지만 관음암에 이르는 길은 그대로였다. 길은 발걸음만 그리워했을 뿐.
약초로 노모 모시던 심씨 총각 백일관음기도 영험담 유명해
전설(?) 같은 심씨 총각 이야기가 여기서 탄생했다. 삼화사 아랫마을에 살던 심씨는 늙고 병든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용모가 수려하고 마음씨도 고왔으나 서른이 다 되도록 배필이 없었다. 그 는 두타산에서 약초를 캐다 장에다 내다 팔면서 어머니와 끼니를 잇고 있었다. 약초 캐러 갈 때면 늘 산중 암자를 지나다녔다. 그럴 때마다 관세음보살을 모시고 기도드리는 스님의 염불소리를 듣곤 했다. 매일 같이 이곳을 지나다니다보니 그는 어느새 자기도 모르게 염불을 조금씩 흉내 냈다. 한참 약초를 캐다가도 목탁소리가 들리면 장단 맞추듯 나지막이 ‘관세음보살’을 불렀다.
어머니 병세를 걱정하던 그가 하루는 스님에게 불쑥 물음을 던졌다. “스님, 관세음보살한테 기도하면 정말 소원이 이뤄지나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던 스님이 이렇게 답했다. “그대가 100일 동안 지성으로 기도해도 소원 성취가 안 되면 소승이 이뤄 드리지요.” 원을 반드시 이루겠다는 굳은 발심과 꼭 이뤄진다는 단단한 믿음, 그리고 신심이 있어야 한다는 말은 삼갔다. 스님은 ‘지성으로’라는 말과 눈빛에 담아 그에게 전했으리라. 다음날부터 그는 산으로 가는 길과 집에 가는 길에 꼬박꼬박 관세음보살 앞에 마음을 바쳤다. 그는 세 번 절을 올리고 이렇게 빌고 또 빌었다. “속히 어머니 건강이 좋아지시고, 저도 예쁜 색시 얻어 장가가고 싶습니다.” 그냥 빌진 않았다. 산나물도 올리고 싸갔던 점심을 공양하기도 했다. 그렇게 100일이 다 돼 되도록 관세음보살을 마주하니 낯설지가 않았다. 하루는 약초 캐러 가는 길에 비를 만났다. 그는 법당 추녀 밑에서 비를 피하다 시간이나 달랠 요량으로 맨땅에 고누판을 그려놓고 고누놀이를 했다. 땅에 선을 그어놓고 장기마냥 한 칸씩 돌을 움직여 상대방 돌이 못 움직이게 만들면 이기는 놀이였다.
혼자 놀기는 심심했다. 문득 관세음보살이 바라봤다. 웃을락 말락 하는 미소를 보고 그가 말을 건넸다. “관세음보살님, 저하고 고누 한 판 해요.” 대답이 없어도 그만이었다. 그는 내기까지 걸었다. “제가 이기면 소원을 들어주시고, 관세음보살님이 이기면 제가 소원을 들어드릴게요. 일단 제 소원은 예쁜 색시랑 사는 겁니다.” 그는 혼자 맞장구치며 돌을 이리저리 옮겼다. 처음엔 이겼고, 다음 판은 졌다. 삼세판. 그는 마지막 판이 수세에 몰리자 한 수 물려달라고 억지를 부렸다. 관세음보살은 말없이 웃음만 보냈다. 그는 재빨리 법당으로 들어가 세 번 절하고 말했다. “절값으로 한 수 물릴게요.” 그러자 마지막은 그가 이겼다. “제 소원 아시죠? 들어주세요.” 그는 비가 물러나자 기분 좋게 집에 돌아와 잠이 들었다.그날 저녁, 하얀 옷을 입은 귀부인이 꿈에 찾아왔다. “지조암 관세음보살입니다. 제가 고누에 졌으니 약속대로 하겠습니다. 내일 장에 가서 약초를 팔면 한 처녀가 약을 구하러 올겝니다. 약을 팔면 필시 좋은 일이 생길 겁니다.” 과연 꿈대로 처녀가 약초를 구하러 나타났다. 처녀는 막무가내로 외상으로 약을 달라고 했고, 그는 처음 본 사람이었으나 위중한 아버지를 위해 어떻게든 약초를 구하려는 처녀의 청을 받아들였다. 대신, 아버지가 낫거든 반드시 약값을 갚는 조건으로. 며칠이 지나자 문밖에 인기척이 났다. 그가 밖으로 나가보니 장에서 만났던 처녀와 아버지로 보이는 노인이 서 있었다. 약값을 치르러 온 게다. 그는 용기를 내 대뜸 “따님과 결혼하게 해달라”고 청했다. 뜻밖의 제안이었지만 노인은 그를 사위로 맞았다. 첫날 밤, 그는 아내에게 지조암 관세음보살 얘기와 꿈을 털어놨다. 그러자 아내도 비슷한 말을 꺼냈다. “저도 지조암 관세음보살님에게 아버지 병을 낫게 해달라고 100일 기도를 했어요. 회향하던 날 꿈에 한 귀부인이 장에 가보라고 해서 나갔던 거예요.” 부부는 짚이는 데가 있었다. 날이 밝자 부부는 절을 찾아 관세음보살의 상호를 살폈다. 꿈 속 귀부인이었다. 부부는 수차례 절을 올리며 고마워했다.
이야기 탓일가? 관음암에는 기도객 발길이 이어졌다.
단풍은 아직 이르지만 활짝 핀 코스모스는 산들 바람에 나부끼며 단아한 자태로 벌들을 유혹한다.
힘들게 올라오는 자리에 위치한 만큼 영험함도 뛰어난 모양이다.
코스모스와 놀다가 마당바위로 향한다.
예전에 없던 계단이 새로 만들어저 있다. 작은 철제 계단을 내려서서
삼화사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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