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옥산서원, 독락당, 정혜사지 십삼층석탑에 가다 (경북 경주시 안강읍)여행방/경상도 2014. 7. 10. 20:15
4산5대의 명당 옥산서원, 독락당, 정혜사지 십삼층석탑에 가다
2014. 7. 10.
2014. 6. 23. 딸과 함께 들러본 옥산서원, 독락당, 정혜사지 십삼층석탑 이다....
외곽 초입에 새롭게 세운 옥산서원 역사자료관
옥산서원은 보물인 삼국사기 완본과 이언적의 기록물등이 있는데 이런 각종 자료들과 역사를 정리, 전시하는 공간을 초입에 별도로 마련하여 방문객들로 하여금 살펴볼수 있도록 하고 있었다.
서원을 답사차 방문한다면 역사자료관도 살펴보면 좋을것이며, 서원내 여러곳에 걸린 현판들이 누구의 친필인지? 그 명칭의 의미는 무엇인지?를 새겨보는것도 또하나의 즐거운 숙제가 될 듯하다.
옥산서원(玉山書院)은 1572년(선조5)에 경주 부윤(府尹)인 이제민[1528-1608]과 유림의 공의로, 회재 이언적(李彦迪)[1491-1533]의 덕행과 학문을 기릴 서원자리가 정해지고, 다음해인 1573년에 이언적의 위폐를 모셔와 창건되었다.
회재 이언적의 학문과 뜻을 기리는 옥산서원은 4산5대의 명당으로 이름 높다.
자옥산, 무학산, 도덕산, 화개산의 네 산이 둘러싸고 탁영대, 관어대, 영귀대, 세심대, 징심대의 다섯 개의 반석돌이 계곡을 따라 자리하며 서원을 보호한다는 이야기는 높은 수준의 학문과 사상의 깊음을 자연 또한 흠모하고 아낀다는 뜻을 지닌다.
실제 이언적의 사상과 학문의 깊이는 조선 중기 성리학의 주리론을 중심으로 지금의 경상도 지역을 대표하는 영남학파의 선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퇴계 이황의 주리학파는 거슬러 오르면 그의 스승인 이언적에서 시작되었다 하여도 과언은 아니다.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황과 함께 조선의 5현 중 한 분으로 추앙받는 그의 학문은 제자들이 위패를 모셔와 사당을 짓고 옥산(玉山)이란 이름과 편액을 당시 선조로부터 하사받아 서원을 짓게 되었다.
외삼문... 亦樂門(역락문)이라고 하는데 중앙과 동쪽문에만 계단이 설치되었다
전면의 강학공간과 후면의 사당으로 이어지는 전형적인 서원의 구조를 갖춘 이곳은 명성에 어울리는 당대 최고 서예가들이 남긴 현판을 감상하는 것으로도 의미가 깊다.
추사 김정희가 남긴 옥산서원 현판을 시작으로 한석봉, 노수신 등 명필가의 솜씨가 담겨 있다. 정문인 역락문 앞으로 서원을 찾아가기 위해 계곡을 가로지르는 외나무다리를 두었다. 몸과 마음을 가다듬어 서원을 찾으라는 깊은 뜻을 담는 다리는 자연과 선계를 나누는 경계처럼 느껴진다.
옥산서원에선 한석봉이 쓴 편액을 두 개 더 볼 수 있다.
왼쪽에 두 줄 글이 붙어 있는데 노수신이 문 이름의 뜻을 주석(註釋)으로 달았다. 대략 '영재들이 도(학문)를 찾아 여기 오니 즐겁지 아니한가'라는 뜻인 듯... 서원은 큰 선비를 기리는 제향공간이자 인재를 키우는 사설 교육기관이기도 하다.
옥산서원 문앞에 선다. 태극 문양 그린 세 칸 외삼문이다.
입구 앞에는 작은 도랑이 흐른다. 물이 흘러서 그런지 공간이 조금 다르게 느껴진다.
연관성을 가진 구조
옥산서원의 구조가 가진 가장 큰 특징은 연관성이다. 옥산서원에는 따로따로 떨어진 여러 채의 건물이 있다. 언뜻 보면 이들 건물들은 주변에 대해 크게 관심을 두고 있지 않고 홀로 서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건물이 여러 개로 나누어진 것은 물론, 건물들 사이에 있는 뜰 때문에도 그럴 수 있다. 이 뜰이 건물들을 떼어놓는 것으로 본다면 더욱 그렇게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주변에 무관심한 채 덜렁 혼자 서 있는 건물은 거의 없다. 모든 건물은 주변에 있는 건물들과 서로 연관을 가진다.
그것도 어느 한 방향으로만 연관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많은 방향에 있는 주변 건물들과 밀접하고도 아주 다양한 연관을 가진다. 이런 연관성은 건물 안에 있는 방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한 건물 안에 있는 하나의 방과 또 다른 방이 서로 연관되도록 되어 있다. 이런 연관성 때문에 옥산서원에는 아주 고유한 특성을 가진 장소들이 존재하게 된다.
옥산서원에는 무변루라 불리는 누각이 있다. 이곳 누각은 크게 방과 대청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대청은 누각의 가운데와 모서리, 두 곳 모두에 있다. 이 중 가운데 있는 대청은 앞과 뒤쪽으로 열려 있어서 앞, 뒤, 양쪽 모두에 연관되어 진다.
양쪽 모서리에 있는 대청은 앞과 뒤쪽은 물론 옆쪽으로도 열려 있다.
덩굴무늬 초익공이 무변루 것이다.
고개를 숙여야 할만큼 낮고 좁은 문으로 들어간다.
돌아서서 무변루 부터 보니 오히려 마당을 향해서는 트여 있고 난간도 둘러 놓았다.
통나무를 깎아 만든 계단을 양쪽으로 걸쳐 놓았는데 좁고 난간도 없어서 딛고 올라가기가 아슬아슬하다. 계단 끝에 더 들어가지 말라고 쓰여 있다.
계단 맨위에 엉거주춤 서서 누각 안을 찍어본다.
이름 '무변루'는 남송 유학자 주희가 북송 유학자 염계(廉溪) 주돈이를 찬양한 글 주염계찬(周廉溪贊) 중에 ‘풍월무변(風月無邊)’에서 따왔다. 원래 납청루(納淸樓)라고 했다가 역락문처럼 노수신이 이름 붙였다. '맑은 바람과 밝은 달, 아름다운 풍경이 끝없이 펼쳐지다'는 뜻이다.
무변루도 명필 한호가 쓴 전형적 석봉체다. 왼쪽에 노수신이 붙인 주석이 보이는데'모자람도 남음도 없고 끝도 시작도 없다.빛이여 맑음이여, 태허(太虛)에 노닐도다.' .
유생들의 휴식장소인 무변루를 들어서면 이곳은 전학후묘의 개념으로 앞쪽에 배치한 강학공간이다.
정면으로 강학당인 구인당이 보이고 좌우로는 동재 민구재와 서재 암수재가 마당을 가운데 놓고 대칭으로 놓여 있으며, 마당 한쪽으로는 밤에 필요하면 관솔불을 환히 밝히던 명료대(노주석)가 보인다.
끝이 없는 누각이라는 무변루를 고개숙여 들어서면 한단 높은 마당 맞은편에 강학당인 구인당이다.
옥산서원에는 명륜당이라 불리는 강당이 있다. 이 강당 안에는 커다란 대청이 가운데 들어앉아 있다. 그리고 대청 양쪽에 방들이 있다. 이곳 대청 또한 동재, 서재의 대청이 가지는 특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양쪽 방들이 분리되지 않고 서로 관계를 맺어갈 수 있게 하는 중매 역할을 하는 것은 물론 건물의 앞쪽, 뒤쪽의 주변과 관계를 맺어갈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와 함께 명륜당에서 주목할만한 요소는 양쪽 방에 놓인 개구부이다. 방에 있는 개구부가 앞과 뒤가 아닌 옆쪽으로 나 있는 것이다.
그것도 꽤 커다란 두짝문이 두 개나 놓여 있다. 이것은 명륜당이 앞쪽 뿐 아니라 옆쪽으로도 제법 적극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게 하는 조건이 된다. 명실공히 건물 주변 모든 방향과 관계를 맺고 있는 명륜당이 되는 것이다.
강학당의 구조는 중앙 세칸은 대청마루이며 좌, 우로 두칸짜리 온돌방이 있다.
동재, 서재, 이 두 건물 안에는 대청이 있다. 대청은 크게 두 가지로, 하나는 건물 가운데에 있고 다른 하나는 건물 끝 모서리에 있다. 이들 대청들은 주변에 열려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벽이 없이 틔어 있는 앞쪽은 물론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뒤쪽, 옆쪽으로도 열려 있다. 벽으로 막혀 있다 해도 거기에는 개구부가 있기 때문이다.
열려 있다는 것은 그만큼 주변과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게 된다. 따라서 동재, 서재는 집 주변의 모든 방향과 연관을 맺고 있는 곳이 되는데, 이런 독특한 성격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대청의 덕이다.
동재, 서재 안에 들어앉아 있는 대청 중에 가운데 있는 대청의 양쪽에는 방들이 있다.
두 개의 방이 대청을 사이에 두고 마주 대하고 있는 꼴이다. 이 대청은 양쪽 방에 있는 사람 모두가 공유하는 장소이다. 그래서 서로간의 간섭, 접촉이 불가피한 곳이기도 하다.
달리 말하면, 양쪽 방들이 분리되지 않고 서로 관계를 맺어갈 수 있게 하는 중매역할을 하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무변루를 마주보고 있는 이곳은 강의와 토론이 열렸던 곳으로 서원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이다..
전면의 강학공간과 후면의 사당으로 이어지는 전형적인 서원의 구조를 갖춘 이곳은 명성에 어울리는 당대 최고 서예가들이 남긴 현판을 감상하는 것으로도 의미가 깊다.
추사 김정희가 남긴 옥산서원 현판을 시작으로 한석봉, 노수신 등 명필가의 솜씨가 담겨 있다.
강당 정면에 옥산서원이라고 당당하게 쓴 예서풍 편액이 걸려 있다.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 유배가기 전 쉰네 살에 쓴 작품이다. 1574년 옥산서원이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266년 뒤 기해년(1839년)에 강당이 타 버려 다시 지으면서 새로 써 달았다는 내력이 왼쪽에 쓰여 있다. 유홍준님이 추사체를 가리켜 ‘솜으로 감싼 쇳덩이, 송곳으로 철판을 꿰뚫는 힘으로 쓴 글씨’ 라고 했듯 그 힘이 그대로 느껴진다.
안쪽에 걸린 구인당 현판은 한석봉 글씨이다.
강당 이름 '구인'은 이언적이 세운 '회재 성리학'의 핵심을 나타내는 말로 그의 저서 '구인록'에서 따왔다.성현의 학문이 오로지 '인(仁)'을 구하는 데 있다는 뜻이다. 구인당 편액도 석봉 한호가 썼다.
대청 구인당 좌우로 한 칸짜리 작은 온돌방이 하나씩 있는데 왼쪽 해립재는 교수와 선비들이 지내던 곳으로 교무실에 해당한다.
오른쪽 양진재는 원장이 살던 원장실이다.
노수신의 주석은 서원의 크고 작은 편액 대부분에 붙어 있는데 이언적보다 스물네 살 아래인 노수신은 이언적과 함께 을사사화에 휘말려 19년 유배를 다녀온 사람으로 이언적의 성품과 학문을 잘 알고 흠모했다고 한다.
편액들 옆과 대들보에 글씨를 빼곡하게 쓴 현판 몇 개가 걸려 있다.
이건 까다롭기로 이름났던 옥산서원 원규(院規), 요즘으로 치면 학칙이다.
술을 마셔서도 들여와도 안 되고 서원에서 배우던 책을 바깥으로 갖고 나가서도 안 된다. 이렇게 곧게 운영한 덕분에 옥산서원은 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을 내렸을 때도 살아남은 47개 서원-사당의 하나가 됐다.
허균, 허난설헌의 아버지 허엽(1517~1580)이 성균관 대사성 때 서원 내력을 쓴 옥산서원기도 걸려 있다.
세 칸 대청마루로 된 강당 구인당이다. 이곳에서 공부해 정승 판서가 된 사람들이 숱하다고 하는데 뒷벽 분합문은 뒤쪽 사당에서 제사를 지낼 때 모두 들어 올려 걸게 돼 있다.
안쪽에 바깥현판과 마주 걸린 또 하나의 옥산서원 현판은 영의정 이산해 글씨로 최초 사액현판이지만 현종 5년(1839년) 화재 후 구인당을 다시 지으면서 받은 새로운 사액현판을 밖에 걸었다고 한다.
바로 뒷편 안쪽에도 옥산서원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선조가 영의정까지 지낸 명필 이산해에게 쓰게 해 내렸던 첫 편액의 글씨다. 여섯 살 때부터 붓을 든 이산해는 어려서 명종 임금에게 불려가 그 앞에서 글씨를 썼다고 한다. 원래 편액도 불타버려 옛 편액 글씨를 베껴 건다고 돼 있다.
구인당의 뒷모습, 활주를 세운 팔작지붕에 정면 다섯칸, 측면 두칸의 건물이며 왼쪽편으로 개흘레를 내단 모습이다.
동재인 민구재는
강당에 걸린 옥산서원기를 쓴 허엽이 지은 이름이다.
툇마루를 돌로 괴어 놓았다.
강당인 구인당의 앞 좌우에는 유생들이 학문을 닦으며 기거하던 동재인 민구재(위)와 서재 암수재(아래)가 마주 보고 있다. 유생들간에는 위계질서가 있어 나이가 많은 유생들이 동재에 기거했다.
서재 암수재
암수재 역시 허엽이 주자에서 따온 말로 '드러나지 않게 학문을 닦는다'는 뜻이다
조그마한 뜰을 가운데 두고 서재, 명륜당, 비각, 외부로 통하는 문, 이들 넷이 마주 대하고 있다. 더불어 뜰과 대하고 있는 쪽 서재의 일부는 대청으로 되어 있고 개구부가 있으며 명륜당 또한 문이 나 있다. 비각의 출입구 역시 뜰 쪽에 나 있다.
그래서 이들 넷은 서로 간에 간섭이 일어날 수밖에 없게 된다.
바꾸어 말하면 이들은 서로 깊게 연관된 것이다.
마당 가운데 돌기둥처럼 생긴 것은밤에 관솔불을 피워 어둠을 밝히던 정료대로 외등인 셈이다.
그래서 앞과 뒤는 물론 옆쪽 주변으로도 연관되어진다고 할 수 있다. 크게 보면 누각은 네 방향 모두에 열려 있고 그들 모두와 연관을 맺고 있는 집이 된다.
커다란 뜰을 가운데 두고 명륜당, 강당, 동.서재, 누각, 이 네 개의 건물들은 마주 대하고 있다. 그리고 이 네 건물들 모두 마당을 향하여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각 건물의 출입구는 물론 창문등의 개구부들이 모두 마당 쪽으로 나 있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러다 보니 이들 각 건물들에 대한 출입은 모두 마당 쪽에서 일어나게 된다. 또 서로 보여지게 된다.
그만큼 이들 사이에는 간섭이 일어난다. 바꾸어 말하면 관계가 깊어진다고 할 수 있다.
곧 가운데 마당이 이들 넷을 서로 연관시켜 주는 중매자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옥산서원은 서원의 이론에 맞게 매우 교리적으로 충실하게 지어졌다. 전학후묘에서 앞쪽에 ㅁ자형태의 강학공간은 단순명료하다.
그 뒷쪽이 제향공간인셈인데 이 역시 매우 간단한 구성이나 다만 왼쪽 옆으로 이언적의 신도비가 있는 비각이 서 있다.
전사청 바깥쪽에는 經閣(경각)이다. 각종 어필이나 어서, 내사본등을 보관하고 있다.
체인문
제향공간은 내삼문을 세우고 담장을 둘러 신성한 구역임을 나타내고 사람이 들어가고 나오는 동, 서문에만 계단을 놓았다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 전사청과 제사를 지내는 체인문
삼문 안으로는 위패를 모신 體仁廟(체인묘)와 제사를 준비하고 제기를 보관하는 典祀廳(전사청)이 있다.
관리용 건물 중에 서원청이 있다. 서원을 관리하는 사람 중에 제법 지위가 있는 자가 기거했음직한 건물이다. 그곳에도 대청이 있다. 이 대청은 세 면이 열려 있어 세 개의 다른 조건을 대하고 있다. 가장 크게 열린 앞면은 큰 뜰과, 다른 한 면은 뒤쪽의 장판각과, 나머지 한 면은 중문과 면해 있다. 따라서 서원청은 그들 모두와 연관을 맺고 있는 집이 된다.
이언적의 묘소는 현 포항시 남구 연일읍 달전리에 모셔졌으며, 신도비는 기대승의 글을 1577년(선조 10년)에 영의정 이산해 글씨로 써서 비석에 새겨 넣었으나 후에 망실 되었다. 1586년(선조 10년) 손엽이 다시 신도비를 쓴 것이 현재까지 전한다.
회재 이언적 신도비.
원래는 서원 앞 계곡가에 있었는데 한번 망실된터라 훼손을 막고 잘 보존하기 위해 서원 안으로 옮겨 왔다고 한다. 문과 들보 사이로 비 위에 얹은 용조각 이수가 들여다 보인다. 3m가 넘는 큰 비석이다.
이수와 비신, 귀부를 갖춘 모습이나 비신을 꽂는 비좌 없이 바로 거북등에 홈을 파고 끼웠다.
사당의 담장 밖 왼쪽에는 회재의 신도비가 있는 비각이 있다. 신도비는 1577년에 세운 것으로, 거북이 지고 있는 비석의 글은 퇴계와 8년간에 걸쳐 사단칠정 논쟁을 벌였던 성리학 대가 고봉 기대승(高峰 奇大升, 1527~1572)이 짓고 글씨는 옥산서원의 첫 사액 현판을 쓴 영의정 이산해가 썼다.
이수에 새겨진 두 마리 용에는 누른빛과 푸른빛의 단청이 뚜렷이 남아 있다. 석조물에 단청을 올렸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실증적인 예다.
원래는 회재의 무덤 앞에 있던 것을 옮겨온 것이다. 『산중일기』를 보면 정시한이 옥산서원을 찾았던 1688년 이전에 이미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음을 알 수 있으나 옮긴 때가 정확히 언제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좁은 창살 틈으로 겨우 찍은 사진이어서 이수가 잘렸다.
어각 앞쪽, 강학공간의 동편 공간은 고직사이며 현재 관리동으로 사람이 기거하고 있어 동측문을 이용한다.
옥산서원에서 가장 눈에 띄는 나무가 향나무다. 역락문 들어서서 양쪽으로 몇백 살은 돼보이는 향나무가 한 그루씩 서 있다.
늘 푸른 기상과 우직한 줄기는 어떤 고난에도 흔들리지 않는 선비의 기개를 상징한다.
경주.안강.세심마을의 옥산서원과 독락당 주변 경관을 찿는 이들은 한폭의 잔잔한 동양화를 연상 시키기에 충분하다고 이야기를 한다.
회재 이 언적 선생이 주변 아름다운 경관의 산과 바위들에 손수 이름을 지어 사산오대(四山五臺)라 하여
동으로 화개산. 서로 자옥산. 남으로 무학산. 북으로 도덕산을 사(四)산(山)이라 하고 옥산서원 앞의 세심대(洗心臺), 독락당 계곡의 관어대(觀漁臺), 관어대 맞은편 영귀대(詠歸臺) 등 五臺라 한다.
용추계곡. 폭포치고는 작지만, 나름 용추폭포라는 당당한 이름을 가진 폭포가 보인다
용추계곡의 명물, 외나무다리.
정문인 역락문 앞으로 서원을 찾아가기 위해 계곡을 가로지르는 외나무다리를 두었다. 몸과 마음을 가다듬어 서원을 찾으라는 깊은 뜻을 담는 다리는 자연과 선계를 나누는 경계처럼 느껴진다.
큰바위에 새겨진 세심대(洗心臺)와 옆 조그만 소(沼)를 용추(龍楸)라 이름 지어 그 글씨가 퇴계 이 황의 필적으로 유명하다
다리를 건너 1km 정도 걸으면 독락당 입구가 나온다. 독락당 역시 회재 이언적 선생과 관련된 곳으로 이언적 선생이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살 때 지은 집이라 한다. 여기는 올 때마다 공사 중이라 아쉽다. 공사가 끝나면 제대로 둘러보고 싶다.
입구로 들어가 봐야 별거 없어서 오른쪽 계곡을 따라 나 있는 길로 들어간다. 멋진 담장과 시원한 계곡을 조화를 이루며 이어진다. 그러다가 갑자기 담장에서 햇빛이 새어 들어온다. 담장에 있는 살창이란 곳에서 새어나온 것이었는데 담장 안 대청에서도 밖을 볼 수 있도록 담장 일부를 창처럼 고친 것이다.
바로 옆에 있는 시원한 정자인 계정과 더불어 독락당의 자연 친화적인 건축을 알 수 있게 한다. 계정까지 보고 잠시 담 사이에 나 있는 길로 들어가 본다. 연륜이 느껴지는 나무가 담에서 자라나 햇빛을 가려준다. 짧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독락당에서 마음에 들어 하는 곳이다. 공사 중임에도 불구하고 안락하고 평화롭다는 인상이 드는 아름다운 고택이다.
다행이도 그 사이에는 자계천을 끌어들인 맑은 물줄기가 인공수로를 타고 흘러 시원한 느낌을 준다. 작은 돌다리를 건넌다.
이언적은 경주 양좌촌에서 태아났다.그는 사화가 자주 일어나던 시대를 살면서 이 우위설을 주장하여 퇴계 이황으로 이어지는 영남학파의 선구가 된 인물이다.
그는 1530년에 김안로와 대랍하다가 관직에서 쫓겨나 이곳 자옥산에서 성리학 연구에몰두한 바가 있다.뒤 다시 관직생활을 했으나 1547년(명종2)에 윤원형 일당이 조작한 사건에 연루되어강계로 유배되었다가 63세에 죽었다. 독락당은 이언적의 옛 집 사랑채이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구조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데, 조선중기 양반집의모습을 보여주는 중요한 건축에 속한다
가는 길에 독락당 안에 있는 천연기념물 조각자나무가 보인다. 이언적 선생 친구가 중국에서 돌아오면서 가져와 심은 주엽나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것이라고 한다. 나중에 보수가 끝나면 자세히 보러 가야겠다.
독락당은 현재 후손들이 살고 있어 무시로 드나들수가 없다.
독락당 담장 길. 연륜이 있어 보이는 나무는 담장 길의 아늑함과 신비함을 더해준다.
독락당 조각자 나무
특히 담장에 창살을 내어 집 안에서 바깥쪽 개울을 내려다 볼 수 있게만든 것이, 자연과 더불어 살고자 했던 주인의 의도를 읽을 수 있게 한다.
계곡 쪽 담장의 살창. 햇빛이 살에 부딪혀 여덟 갈래로 나뉜다.
계정. 여름에 책을 읽으며 쉬기에 딱 좋다.
계정을 가까이서 보니~
맑은 시냇가 정자라 溪亭(계정)인가?... 한석봉 글씨이다. 한쪽면을 자계천을 연하여 개방한 구조가 시원스럽다.
독락정의 '계정'과 앞 개울의 풍경
독락당 앞 계곡
독락당을 나와 정혜사지 십삼층석탑으로 향한다.
길을 따라 쭉 걷는다. 가게 주인아저씨가 코앞이라 하셨는데 조금 걸어야했다. 얼마 정도 걷자 정혜사지 심삼층석탑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나오고 야트막한 언덕 위에 세워진 특이한 모양의 석탑이 노을빛을 받으며 서 있다. 국보로 지정된 귀한 석탑으로 '다보탑', '석굴암 삼층석탑'과 더불어 경주의 대표적인 이형탑이다.
일층은 넓은데 2층부터는 급격히 좁아진다. 왜 이렇게 만든 지는 잘 모르겠다. 지층에는 감실이 있어서 안에 불상을 안치했을 가능성도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몸돌에 뭔가 쓰여 있는데 읽지는 못하겠다.
통일신라시대 후기의 석탑이다. 정혜사의 창건연대는 불분명하나, <동경통지>에 의하면 신라 선덕왕 원년(780)에 당나라의 백우경이 자옥산 아래에 자리를 잡고 경치가 좋은 곳을 골라 영월당과 만세암을 세웠는데, 후에 이곳에 절을 짓고 ‘정혜사’라고 했다고 한다.
탑의 1층 몸돌은 매우 높게 조성되어 각 면에 별도의 판석을 끼워 문을 형상화하였다. 그러나 2층부터는 몸돌(옥신석)의 높이가 급격하게 줄어 마치 지붕돌(옥개석)만 겹쳐놓은 듯이 보인다. 극단적으로 얕아진 몸돌과 3단의 받침이 있는 지붕돌이 한 돌로 이루어져 있다. 1층의 기단 위에 13층의 탑신을 올린 형태로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한 형식이다.
포항 인근이라 가까운 곳인데도 와 본지가 한참이나 된것 같은 옥산서원, 독락당, 정혜사지 십삼층석탑까지 딸과 함께 둘러 보고 천천히 아름다운 옥산리를 뒤로 하고 포항으로 향한다..
'여행방 > 경상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생사에서 만난 경주 낭산 마애보살삼존좌상 (보물 제665호) (0) 2014.11.19 아사달과 아사녀의 애틋한 사랑과 슬픈 전설을 간직한 영지와 영지 석불 좌상(경북 경주시) (0) 2014.10.19 수령 200~300년 된 20여 그루의 왕 버드나무가 아름다운 곳, 반곡지(경산시) (0) 2014.07.09 달아공원 (경남 통영시) (0) 2014.06.13 동부사적지대(경북 경주) (0) 2014.0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