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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지사(경북 김천시)사찰여행/경상도 2014. 1. 15. 22:39
직지사
2014. 1. 15 .
2014. 1. 12. 산빛에서 함께한 황악산 산행하며 들러본 직지사다....
◯ 직지사를 향하여 ..
직지사는 신라 눌지왕 2년(418) 아도화상이 창건했다.
‘직지’= 直指人心 見性成佛(참선하여 사람의 마음을 바로 볼 때 그 마음의 본성이 곧 부처님의 마음임을 깨닫게 된다) 이라는 선종의 가르침에서 유래.
신라시대에 두차례 중수와 조선시대에 중수와 중건을 한차례씩 더 하여 조선8대 사찰중 하나로 사세를 크게 흥성시켰다. 이곳은 많은 국사 왕사가 수도 정진하던 곳이며 임진왜란때 큰 공을 세운 호국성사 사명대가사 입산한 곳이기도 하다.
벽계정심 선사가 조선조의 법난때 이곳에 칩거하여 한국 선종의 대맥을 이었다. 선조29년(1576) 왜적의 방화로 모든 전각, 당우가 소실된 것을 광해군2년(1610) 인수,명례스님등이 재건하였다.
근세에 들어서는 고종년간에 일부 중수가 있었다. 1963년부터 30여년간에 걸쳐 현재의 전각과 당우를 중수 하였다.
직지사를 찾는 여행자들이 처음 마주치는 것이 직지사 산문(山門)이다.
직지사 정문 편액에 '동국제일가람황악산문(東國第一伽藍黃嶽山門)'이라고 씌어 있다. 이 절은 신라 눌지왕 2년(서기 418년)에 신라에 불교를 처음 전한 아도 화상이 창건했다.
직지(直指)는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마음을 바르게 볼 때, 마음의 본성이 곧 부처임을 깨닫게 된다)'이라는 선종의 가르침에서 따왔다. 또 다른 설로는 아도 화상이 경북 구미시 도리사에서 황악산을 한 손으로 가리키며 '저 산 아래에도 절을 지을 길지가 있다'고 해서 직지로 불렀다고도 한다. 전설 하나를 더 보태면 고려 때 능여 화상이 절을 중창할 때 자를 사용하지 않고 자기 손으로 측지하였기에 직지로 불렀다는 설도 있다.
능여 화상은 고려 태조 왕건의 건국을 도왔고,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이끈 사명대사도 이 절에서 출가했다. 제일가람으로 불리는 데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직지사는 해동(海東)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는 으뜸가는 가람(절)이란 뜻에서 동국제일가람(東國第一伽藍)이란 말이 전해진다.
산문 들어서며 오른쪽에 위치한 '초향반다' 전통다원이다...
산문 들어서며 오른쪽에 위치한 직지사 시비다...
산문을 지나니 바로 매표소다...
매표소 통과 후 직지사를 향한다..
매표소를 들어서면 예쁜 산책로가 모습을 드러낸다. 약수정 입구까지 이어진 산책로는 깨끗해지게 포장되어져 있고, 그리 높지 않은 소나무가 늘어서 있어 상쾌한 느낌의 산책로이다.
만세교를 건너면서 산책로의 모습이 달라진다.
만세교 지나 왼쪽의 불교용품점이다...
불교용품점 맞은편 오른쪽 갈림길 위로 많은 사적비가 자리하고 있다...
직지사 안내판 뒤로 높이가 족히 10m는 훨씬 넘을 고목들이 줄지어 있어, 직지사가 천년 고찰임을 한눈에 느낄 수 있는 풍경이 펼쳐진다. 잎이 다 떨어진 고목들의 자태는 그 자체로 묵직한 안정감과 힘찬 진취성이 느껴진다.
사찰 경내 면적만도 3만여 평에 이르며 울창한 노송, 깊은 계곡의 맑은 물 등이 황악산과 잘 어우러져 4계절 내내 참배객과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다.
직지사 가는길에 고목들을 헤치고 걸어 들어가면 그제야 일주문이 나오고,
◯ 직지사 일주문
한쪽은 칡나무, 한쪽은 싸리나무라고 전해지는 일주문의 두 기둥은 1천여 년을 묵었다고 한다.
직지사 일주문은 경계의 역할을 한다. 안과 밖을 나누면서 안의 복이 밖으로 나가는 것을 막으며 밖의 좋지 않은 기운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도 한다. 그런데 사찰의 일주문은 문은 문이되 문짝을 달지 않은 문이다. 즉 마음의 문인 것이다. 일심(一心)을 가지라는 뜻이다.
일주문이라는 뜻은 기둥이 일렬로 서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편액 '황악산 직지사'는 조선 후기 명필 송하(松下) 조윤형(1722~1799)의 글씨로 추사가 인정하고 감복한 명필 원교 이광사의 제자이다.
시-서-화 삼절(三絶)이라는 자하(紫霞) 신위의 장인이기도 하고 조윤형은 벼슬을 못하고 지내다 글씨를 잘 써서 발탁됐고 임금의 인정을 받아 공조참판까지 지냈다고 한다. 여유있고 부드러운 해서체가 일품이다.
◯ 직지사 대양문
대양문 입구 좌측으로 만덕전 들어가는 입구도 있었는데 만덕전은 국제 불교연수회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다른 사찰에는 거의 없는 대양문은 부처님의 큰 광명을 상징하는 문으로 1990년 신축한 팔작지붕이다.
대양문 편액에는 호가 청명(靑溟)이라는 분이 썼다(題)는 관지가 딸려 있다.
한학자 임창순 선생님(1914~1999)의 글씨로 독학과 검정고시로 공부해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까지 지낸 청명 선생님은 서예와 서예사, 금석학에 관해 숱한 저술을 남기고 학교 은퇴 후에도 사설 연구소를 차려 후학들을 가르쳤다.
◯ 직지사 금강문
금강문
◯ 직지사 천왕문
일주문이 나오고, 대양문, 금강문, 천왕문을 차례로 지나 만 세루 앞에 닿게 된다.
일주문에서 만세루 앞까지의 이 길은 예쁜 전나무길로 아기자기한 풍경이 연인들의 산책길로 딱 맞아 떨어지는 길이다.
◯ 직지사 만세루
만세루를 지나면 대웅전 앞이다.
대웅전 앞에 있는 만세루
일중 김충현님의 만세루 편액에 눈길이 멈춘다. 현대 명필이라는 이름에 손색없이 빼어난 서예가의 글씨가 서투르듯 소박하면서도 예스럽다.
만세루를 지나면 대웅전 앞이다.
◯ 직지사 범종각
범종각은 만세루 옆에 위치하고 있었다...
◯ 직지사 대웅전 (보물1576호 )
만세루를 지나니 대웅전과 동. 서 삼층석탑이 길손을 맞는다...
대웅전은 임진왜란때 소실되었으나 선조 35년(1602) 사승 인수 명례 등에 의하여 중창 되었다.
현 건물은 이로부터 150여 년 후인 영조 11년(1735) 중건되었으며 당시 중건에는 주지 수변화상 전 주지 설운 종익 그리고 감화상을 비롯하여 산중 대중의 협력과 시주로써 이룩 되었다. 그 관계자는 상대목 동래 운수사의 치백과 도목수 설인을 비롯하여 목수 20여 명과 야장, 개와공, 도감, 그리고 화사, 총찰도감, 도와도감등 50여 명의 산중대중과 900여 명의 시주가 참가하고 있는데, 이 명단은 중창 상량문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들은 주지 녹원 화상에 의하여 연목 교체 및 기와를 번와 (1969. 3. 1 ~ 1970. 11. 30) 할 때 확인 되었다.
그 후에도 계속해서 대웅전의 주위 석축 및 축대를 새로 조성 (1973. 4. 10 ~ 1975. 6. 20) 하여 필역 하였다.
다시 녹원 화상에 의하여 재차 연목 및 기와가 번와(1979.10.25~1980.1.14)되었고 1980년 8월에는 부분적으로 고색금단청을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웅전 편액은 선조의 아들 의창군 이광이 쓴 것인데 여러 절에서 모각(模刻)해 달고 있을 만큼 잘 쓴 글씨 이다.
대웅전의 글씨가 이완용이가 써서 내려 보낸 것이다 아니다라고 말들이 정말 많았다. 덕분에 직지사 대웅전은 더욱 유명해 졌다.
◯ 직지사 대웅전 후불탱화 ( 보물 제670호 )
대웅전 수미단 위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약사불과 서쪽에는 아미타불이 모셔져 있다. 불상 뒷면에는 각 부처들의 설법장면을 그린 석가모니후불탱 약사후불탱 아미타후불탱이 등 3폭의 불화가 걸려 있다. 비단바탕에 그린 이 불화들은 모두 길이가 6미터가 넘는 거작으로 영조20년(1744년)에 직지사의 세관스님을 비롯한 16명의 화승들이 그린 것이다. 각 폭마다 여래를 중심으로 보살 나한 천왕 신장 등을 배치하였고 적색 녹색 황색을 주조색으로 채색하였다. 짜임새 있는 구도 각 존상표현에 보이는 뛰어난 묘사력 차분한 색조와 조화로운 배색 화려하고 섬세한 표현 등이 어우러져 장엄한 불교 회화의 아름다움을 보여 준다. 직지사 삼존불탱화는 작품성과 규모에 있어 18세기 불하를 대표하는 우수한 작품이다.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을 모신 건물이다. 직지사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약사불과 아미타불이 모셔져 있다.
삼존불상을 길게 받치고 있는 수미단은 1651년 제작 기록이 발견 되면서 대웅전 중건과 함께 만든 17세기 중반 대표적 목조 불단으로 밝혀져 삼존불상보다도 17년 빠른 셈이다.
용, 구름, 사슴, 봉황, 거북, 꽃, 나비를 비롯해 다양한 소재와 문양, 깊이 새긴 투각, 화려한 채색이 불교 목조각의 진수라는 평가를 받았다.
한쪽 벽에 그린 수월백의관음도도 꽤 내력 있어 보인다.
직지사 대웅전의 뒷모습 임진왜란 후에 다시 지은 후 지금까지 여러번 중창이 있었지만 그 역사만큼이나 빛이 바랬다. 벽화가 자꾸 떨어진다. 그리고 포작이 특이하다.
모두 끝이 치켜 올라간 앙서를 하고 있고 마구리엔 매화점을 찍었다.
평방 위 공포 사이 여백에 그리는 별지화는 대개 여러 화불(化佛)을 그려 넣지만 직지사 대웅전은 모두 꽃 그림이다.
그것도 화병에 담겨 잎 덩굴과 함께 만발한 꽃들이다.
연화, 주화, 모란들 이다.
정면 공포는 안팎 모두 삼출목으로 짰다.아래 셋은 끝이 하늘을 향해 꼬부라진 앙서仰舌)로,위쪽 한 개는 끝이 아래로 꼬부라진 쇠서(牛舌)로 처리했고 맨 위 보머리엔 용이 내밀고 있다.
둥근 서까래와 네모난 부연이 내민 겹처마 단청도 적당히 바래 보기 좋다..
맨 위 도리엔 동자를 태우고 하늘을 나는 학을 그려 놓았는데 동자상 부분만 단청이 날라 갔는지 하얗다.
모퉁이 귀공포 보머리엔 풍경 다는 고리가 달렸는데 거기엔 네잎 주화를 그렸다.
중앙 어칸의 쌍여닫이 문에 작은 쪽문을 달았다.
문짝 아랫부분 궁창엔 대개 연꽃이나 귀면상을 그려두던데 이곳 궁창엔 육엽 주화 한 쌍과 덩굴 무늬를 그려 놓았다. 간단하고 아름다워서 단청에서 연꽃 다음으로 많이 그리는 꽃이다.
다른 궁창엔 가운데는 주화, 바깥은 파련화를 그린 '속 주화 겉 연화'가 있다. 파련화는 꽃잎이 나선형으로 오므라든 모양이 쇠코를 닮아 쇠코화라고도 한다.
◯ 문경 도천사지 동. 서 삼층석탑 ( 대웅전앞 3층석탑, 보물 제606호 )
대웅전 앞 3층석탑
직지사에는 대웅전 앞 동서삼층석탑, 비로전 앞 삼층석탑, 청풍료 앞 삼층석탑 이렇게 4개의 삼층석탑이 있다.
하지만 원래 이곳에 있는 석탑이 아니라 모두가 주변의 절터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었다.
이 두 탑은 통일 신라시대 9세기의 석탑이다 비로전 앞 삼층석탑과 함께 원래는 경북 문경 산북면 서중리의 도천사지에 쓰러져 있던 것을 1974년 이곳으로 옮겼다 .
이탑들은 대체로 통일 신라 삼층석탑의 양식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인 삼층석탑에서 보이는 이중기단이 아니라 단층 기단인 것이 특이하다. 기단에는 면마다 안기둥과 귀기둥을 돋을 새김 하였을 뿐 다른 장식은 없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을 각기 하나의 돌로 만들었는데 몸돌에는 다른 장식 없이 귀기둥 모양만 돋을 새김 하였다. 지붕돌에는 수평을 이룬 처마 아래로 1층부터 차례로 5.5.4단의 처마 받침을 두었으며 1층 지붕돌에는 추녀 끝마다 풍경을 달았던 구멍이 뚫어져 있다. 상륜부는 1976년 추정 복원하였다.
이탑들은 단층기단인데다가 1층 몸돌이 유난히 길게 올라가 있어서 시원한 상승감이 돋보인다.
직지사에 있는 석탑들은 모두가 상륜부가 있었는데 그것은 추정하여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 직지사 신검당
대웅전을 바라보며 오른쪽 전각으로 스님들의 요사다...
대웅전 마당 오른쪽엔 선방 심검당이 있는데 검여 유희강을 사사해 이병철 삼성 창업주의 서예 스승이었다는 원로 서예가 송천 정하건님이 편액 글씨를 썼다.
◯ 직지사 육화당
대웅전을 바라보며 왼쪽 전각으로 육화(六 和)란 몸, 입, 뜻, 계율, 견해, 이해 여섯 가지가 조화를 이뤄야 깨달음을 얻는다는 뜻인 맞은편 마당 왼쪽 육화당은 심검당과 함께 템플스테이 숙소로도 쓴다고 한다.
편액은 김천 출신 시인이자 서예가 심연(心 然) 노중석님이 쓰셨다.
대웅전에서 바라본 직지사의 가람배치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 직지사 포대화상
대웅전을 바라보며 왼쪽전가인 육화당 옆에 위치해 있다.
포대화상 모습은 번뇌와 고통은 자루에 담고 웃음과 기쁨은 내어 주시는 스님이다...
◯ 직지사 성좌각
대웅전 우측에 있다.
성좌각은 쉽게 볼수 없는 편액인데 삼성각과 같은 역할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익공형식으로 겹치마 팔작지붕이다. 빗살문살로 짠 문을 달았다. 안에는 독성. 산신. 칠성을 모시고 있다.
◯ 직지사 향적전
대웅전 뒤쪽 옆에 위치한다. 스님 수행공간이다...
◯ 직지사 약수
약수정에 들러 물 한 모금 마시는 것을 잊지 말 것! 이 물은 한국의 명수로 지정된 물이다. 맛은 그냥 깔끔하다.
언제나 들어도 맑은 물 흐르는 소리.자연의 소리는 참 경이롭다
◯ 직지사 관음전
대웅전을 돌아보고 대웅전 왼편으로 길을 잡으면 관음전 앞이다.
관음전은 관세음보살을 모신 곳이다.
협시로는 남순동자와 해상용왕이 있으나 이들은 대부분 후불탱화로 나타난다. 대승불교가 낳은 수많은 보살중에서 관세음보살만큼 대중의 신앙대상이 된 보살도 드물다
모든 중생의 애환을 대자대비로 거두어 주는 관세음보살은 중생의 근기에 맞게 32응신으로 화현하여 중생을 구제 한다.
◯ 직지사 응진전
응진전은 고려 태조 14년(931) 능여 대사가 창건 하였으나,임진왜란에 전소되었던 것을 효종 7년(1656) 관음전으로 중건 하였다가 뒤에 응진전으로 개액 하였다. 이 건물은 그 후 주지 녹원 화상에 의하여 중수 되었는데 이때는 기와 번와 단청 및 석조 축대까지 신축(1970.3.1.~1971.11.30)되었다
응진전에 모셔진 나한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많은 제자들 중 상수제자 16인이다. 이들은 일찍이 말세의 중생에게 복덕을 성취하게 하고 정법으로 인도하겠다는 원을 세운 성자들이다 따라서 이들은 많은 영험담과 함께 민간에서 신봉되어 나한 신앙을 형성하게 되었다.
◯ 직지사 명부전
명부전의 지장보살
시왕들...
박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영정이 직지사 명부전에 모셔져 있다..
◯ 직지사 사명각
사명각은 임진왜란 당시 나라를 구한 호국대성 유정 사명대사의 영탱을 봉안하여 유덕을 기리기는 건물로서 조선 정조 11년(1787년)에 창건하였다.
대사의 속성은 임씨, 자는 이환이다. 법명은 유정, 법호는 사명 도는 송운이다.
1544년 출생하여 유촌 황여현으로 부터 유학을 수학하다 출가하여 직지사 주지 심묵화상의 제자가 되었다 . 18세 되던 해 선과에 합격하고 30세인 선조 6년(1573년)에 직지사 주지가 되었으며 49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승병장이 되어 공을 세운다.
61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역류되어 있던 포로3000여명 데리고 귀국하므로 선조가 가의대부로 삼아 어마를 하사 하는 등 대우 극진하였다. 광해 2년(1610년) 67세로 가야산 해인사에서 입적하니 시호를 자통홍제존자라 하였다.
◯ 직지사 비로전
직지사에서 가장 유명한 곳으로 안에는 천불이 있다.
비로전은 고려 태조때 능여 조사에 의해 처음 세워진 비로전은 천불상을 모시고 있으므로 천불전이라고 한다
임진왜란떄 병화를 모면한 3동의 건물중 하나로 근년에 개수 하였다.
정면 7간,측면 3간의 맞배지붕이며 크기는 53평에 금단청을 하였다 천불상도 같은 시기에 조성되었으며 과거, 현재, 미래의 삼천불 중 현겁 천불을 모신 것으로 1992년 개금 불사가 완료되었다.
비로전은 고려 시대에 만들어졌고 그 안에 있는 천개의 불상도 그 때 만들어 졌다고 하니 역사가 오래된 건물이다.
비로전(毘盧殿)은 임란의 소실을 면한 유일한 불전으로 천불은 경주 옥돌로 조성하였으며 소원 성취의 효험이 있는 기도도량이다.
흑마 해에 완월 궤홍이 썼다는 관지가 딸려 있다. 완월은 궤홍대사의 호이다
비로전은 천 개의 불상을 모시고 있어 천불전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재미있는 속설이 전해 오고 있다. 천 개의 불상중에 옷을 벗고 있는 동자상이 하나 있는데, 비로전에 들어서서 이 동자상을 찾으면 아들을 낳어 준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누군가 동자상을 보고 아들을 낳았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동자상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결혼을 앞둔 연인 사이라면 비로전에 들어가 한 번 이 동자상을 찾아볼 일이다.
비로전 안의 불상이 실제로 천 개인지는 모르겠고 아마 많다는 의미로 천불전이라 부르는 것 같다.
물론 가운데 불단에는 비로자나불이 있고 각기 다른 모습으로 천개의 불상이 모셔져 있는 비로전에 들어서니 천개의 불상에도 놀랍지만 어찌 하나도 똑같은 불상이 없어 어떻게 각각의 디른 모습의 부처님을 만들었을까 경의롭다....
봉황 대신 연꽃 옆 모습으로 처리한 보 머리도 있다.
공포엔 연꽃으로 장식한 앙서 이출목이 내밀고 있고 그 위엔 보머리로 봉황을 새겼다.
창방 평방을 비롯한 정면 가로 부재엔 화려한 금(錦)단청을 했다. 갖은 무늬와 채색을 빈틈없이 그려 넣어 비단처럼 가장 화려하고 다채로운 단청이다.중간 화반 사이 별지엔 범자도 그려놓고 그 위엔 고리가 얽혀 있는 듯한 칠보 무늬도 있다.
시선이 아래로 갈수록 눈이 휘둥그레진다. 정면 어간문 위 작은 들창의 문살 좀 보면 파란 양청으로 문틀과 문살을 칠하고 앙증맞은 꽃문양을 얹은 빗꽃살 문이다.
비로전 꽃살문의 옅은 파랑색과 주황색의 멋진 조화가 눈길을 끈다..
비로전 앞의 석등
◯ 직지사 비로전 앞 삼층석탑 ( 보물 제607호 )
이 석탑은 통일신라 말기9세기의 석탑이다. 대웅전 앞 2기의 석탑과 함께 도천사지에 있던 것을 옮겨 온 것으로 이 역시 1974년에 옮겨와 1976년에 상륜부를 추정 복원하였다.
이렇게 동일한 3기의 석탑이 한곳에 있는 경우는 아주 특별한 경우에 속 한다. 또한 이 탑은 삼층석탑이면서 이중 기단이 아닌 단층기단의 석탑으로 이러한 예들은 문경. 상주. 선산 지역에 집중적으로 분포하는 것으로 보아 이 지방의 특색으로 이해되고 있다.
비로전 앞에는 수령 500년이 넘는 측백나무가 있었다.
◯ 직지사 명월료
스님의 거처로 1976년에 중창하였다...
◯ 직지사 약사전
약사전은 동방유리광 정토를 표출시킨 법당으로 약사여래가 봉안되어 있다
약사여래좌상은 통일신라시대의 조성 양식을 반영하는 것으로 마멸이 심하나 전체적인 윤곽은 광배와 함께 부드러움을 간직하고 있다. 현재 성보박물관에 모셔서 상시 전시하고 있다. 보물 제 319호이다.
아미타신앙이 사후의 신앙을 기본으로 하는 반면에 약사여래신앙은 현실적 이익을 바탕으로 한다. 따라서 약사여래는 인간을 질병으로부터 보호하여 줄 뿐만 아니라 죽음을 물리치는 힘을 갖고 있는 부처로 대중의 신앙대상이 되었다
손에는 약사여래의 특징적 모습인 약합을 들고 있다.
눈빨이 흔날린다...
◯ 직지사 황악루
황악루 앞 살구나무는 박정희 대통령이 어린시절 직지사로 놀러와서 많이 오르내리며 놀았다고 한다.
일중 김충현이 쓴 황악루 편액은 많이 낡았지만 또 그대로 예스러운 맛이 있다.
◯ 직지사 서별당과 망일전
왼쪽 전각이 서별당, 오른쪽 전각이 망일전이다..
◯ 직지사 청풍료
명월료로 주지 화상의 거처로서 주지 녹원 화상에 의하여 녹원화상에 의하여 신축 (1966. 4. 1 ~ 1971. 11. 30), 중창 (1973. 4. 30 ~ 1976. 6. 30) 되었으며 본래는 7간 이었으나 현재는 정면9간 측면 5간의 금단청 팔작지붕으로 형태는 팔작지붕이면서 귀틀을 낸ㄱ자형이다.
건물이며 크기는 총 92.76평이며 화려한 금단청을 하였고 접객실과 시자실을 겸하여 잘 정비된 건물이다.
청풍료 편액은 일중 김충현의 동생 여초 김응현이 썼다.
비로전 앞으로 나오면 바로 성보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는 청풍료가 있다. 성보박물관에는 석조약사여래좌상, 김룡사 동종 등 국보급 문화재들이 있다...
청풍료엔 꼭 보고 싶은 소장품이 있었다. 말사인 문경 김룡사에서 갖다 놓은 목조 동자상으로 김룡사 명부전에서 시왕들의 시중을 들던 동자들이다..
이 건물은 현재 성보유물전시관인 박물관으로 사용 중이다
◯ 직지사 청풍료 앞 삼층석탑 (보물 제 1186호)
이 탑은 통일 신라 말기 9세기의 석탑으로 원래 구미시 선산읍 원동 낙동강변 강락사터로 전해지는 절터에서 무너져 있던 것을 1968년 선산군청 앞뜰로 옮겼다가 1980년 다시 이곳으로 옮겼으며 이때 상륜부를 추정 복원하였다.
기단이 단층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전형적인통일 신라시대 석탑양식을 고루 갖추고 있다. 기단은 한면을 두장의 돌로 짜맞추었는데 안기둥과 귀기둥을 골을 새김 했을 뿐 별다른 장식은 없다. 탑신을 이루는 몸돌과 지붕돌은 각기 하나의 돌로 만들었다 몸돌에는 다른 장식 없이 귀기둥만 돋새김을 하였으며 지붕돌에는 수평을 이룬 처마선 아래로 5단의 처마 받침을 두었다. 1층의 모돌의 높이가 2.3층에 비하여 성큼하게 높으면서 지붕돌의 두께와 폭이 알맞아 단층 기단의 탑이면서도 차분하고 안정감과 경쾌한 균형감을 가지고 있다.
◯ 직지사 향경다례원
◯ 직지사 천불선원 입구
천불선원 입구 도피안교
삶의 괴로움에서 번뇌와 고통이 없는 경지의 안식처로 건너는 다리 저편에 안양루가 있다.
열반에 이르고자 하는 스님들의 수행길 이다...
안양루의 뒷산인 황악산은 산수화를 그린 수묵화 같아 한참을 바라 본다...
◯ 직지사 전통다원
◯ 직지사 능여계곡 건너의 새로운 전각들...
스님들께서 기거하는 곳이다.
흙과 돌맹이가 만든 담장은 언제나 포근하다.
청풍료를 지나면 계곡을 따라 절을 나오는 길이 이어지게 되는데, 이 길 주위에 법화궁, 남월료, 만덕전 등의 거대한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새롭게 이렇게 아치형 다리를 만들었다...
◯ 직지사 설법전
비로전을 나오면서 황악루에서 바라본 설법전... 직지사는 절 전각 중앙으로 냇물이 유유히 흐른다..
청풍료에서 바라본 설법전은 단층 건물로 보인다..
설법전을 능여계곡쪽에서 바라보면 3층 건물이다...
측면 1.2층은 3간, 3층은 2간, 정면 11간의 팔각지붕으로 총 295평의 복합건물이다.
-1층 : 100평 규모의 식당 (후원)
-2층 : 스님 방사 및 템플스테이 숙소 3개
-3층 : 설법전 법당 (템플스테이 운영 공간 및 숙소)
직지사 공양간이 1층에 있다. 그래서 그런지 장독이 아주 많다.
'설법전' 편액 반대편으로는 '법화궁'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 직지사 남월료
승가대학(강원)으로 이용되고 있다...
'남월료' 편액 반대편으로는 또다른 이름의 편액이 걸려 있다...
◯ 직지사 제하당
남월료와 만덕전 사이에 위치한 스님 수행공간이다...
◯ 직지사 만덕전
만덕전은 ㄷ자형의 83간 주심포 겹처마 팔각지분의 총 362평의 목조 건물이다
- 강당 : 200평규모의 대형 강당
- 소강당 : 80평규모 (소강의실 및 숙소사용가능)
- 회의실 : 35평 규모 (회의실 및 숙소 사용가능)
- 세면실 : 남ㆍ녀 세면실 각 25평(만덕전 뒤쪽)
만덕전은 국제 불교연수회관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2,000명을 수용할수 있다. 1994년에 준공했다.
◯ 직지사 전경
담장 너머로 바라본 대웅전과 탑이 참으로 인상적이다....
◯ 직지사 부도
고찰답게 고승들의 부도도 많다.
◯ 직지사를 내려가며..
만덕전의 높은 돌담을 따라 이어진 길은 일품이다. 계곡을 끼고 있어 계곡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휘어져 버린 돌담은 이곳 직지사에서만 보이는 아름다움이다.
능여계곡을 끼고 내려 간다...
이 길을 나오면 일주문 옆이다. 계곡을 따라 이어져 버린 길을 따라 계속 걸어나오면 안내판에서 들어갈 수 있는 길과 만나 산문으로 이어지는다.
안내판이 있는 이곳이 돌아나오는 길에 있는 만덕전 앞 돌담길과 함께 직지사에서 가장 시원하고 장쾌한 풍경이다.
일주문 앞에서 주차장으로 가는 길인데 소나무를 비롯하여 커다란 나무들이 많아 운치가 있다...
사천왕문. 금강문. 대양문. 일주문 까지는 좌측의 계곡을 끼고 지형에 맞추어 자연스럽게 길이 휘어져 있었다.
직지사의 산문을 나오며 보게되는 현판에 씌여있는 글 '覺城林泉高致(각성임천고치)' - '숲과 샘이 솟는 높은 산사에 올라서야 깨닿게 되는구나'
인생에 즐거운 인연의 끈을 맺는건 참으로 행복한 일이다.
좋은 분들과 함께 했던 오늘도 나에겐 참 행복한 하루 였다.
행복한 하루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신 분들께 깊은 감사드리며, 올 한해도 함께 많이 행복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내 가슴 안에는 인생의 교향곡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음악, 감사라는 교향곡이 잔잔히 연주되고 있다 ....오래도록....
직지사를 나오는 길이니 불가에서 속세로 이어지게 되는 길인 셈인데, 다 걸어나온 후에도 못내 아쉬움이 남아 자꾸 뒤를 돌아보게 만드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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