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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럽 .발칸반도 여행 3일째(폴란드 오쉬비엥침 + 크라카우)동유럽.발칸반도 여행 2013. 6. 6. 08:38
동유럽 .발칸반도 여행 3일째 (2013. 5. 24. 폴란드 오쉬비엥침 + 크라카우)
2013. 6. 6.
◯ Perla Hotel 에서 맞이하는 3일째 아침이다...
폴란드 올레시나차 Perla Hotel에서 맞은 3일째 아침 산책길...
우선 호텔 안의 정원을 둘러보고
이슬 머금은 물망초도 보고
부겐베리가 연꽃처럼 이쁘다..
호텔 근처도 산책해 본다....
폴란드 올레시나차의 Perla Hotel을 출발하여 브로츠와프를 경유해서 오쉬비엥침으로 4시간을 달려간다.
오쉬비엥침역에서 현지 가이드와 미팅후 현지의 레스토랑으로 이동 후 점심을 먹고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향한다.
오쉬비엥침에서 점심을 먹고은 현지 레스토랑
◯ 오쉬비엥침 (아우슈비츠 수용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150만명이 처형된 <이우슈비츠> 수용소에 도착했다.
이곳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 최대의 강제수용소이자 집단학살수용소인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있었던 곳으로 유명하다. 그 터는 현재 박물관이 되어 있다. 폴란드명은 <오슈비엥침>이다. 이 곳은 철도의 교차점으로 화학·피혁·농기구 제조 등이 이루어진다. 13세기 이후 도시로 발전하였으며,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39년에 독일군에게 점령당하였다.
오쉬비엥침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에는 독일 영토로 아우슈비츠(Auschwitz)라고 불렀으나, 제2차 세계대전이 연합군의 승리로 끝난 후, 독일 동부지역의 아우슈비츠는 폴란드 영토로 바뀌었으며, 이름 역시 오쉬비엥침(O'swiecim, '즐거운 마을'이라는 뜻)으로 바뀌게 되었다.
오쉬비엥침에는 독일 최대의 강제수용소이자 집단학살수용소인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있었던 곳으로,
1945년 1월까지 이 수용소에서만 110만 명의 유태인과 14~15만 명의 폴란드인, 2만3천 명의 집시, 만5천 명의 소련군 포로, 2만5천 명의 다른 민족 죄수들이 학살되었는데, 대부분 유태인임을 알 수 있다.
관리소에 들러 현지 가이드의 설명을 들을 수 있는 무선 헤드폰을 받고 수용소 정문으로 향한다.
제2차 세계대전의 비극이며 인류역사상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유대인들을 집단 살해했던 역사의 현장이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촬영지가 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정문 간판에는 독일어로 "노동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구호가 걸려있다.
철문에 붙어있는 'ARBEIT MACHT FREI' 라는 글자에도 유대인들의 처절한 저항의 표시가 있다.
원래 B자는 위가 작고 아래가 크지만, 이곳에 붙어있는 B자는 반대로 위가 크고 아래가 작게 붙어있는데,
그것은 유대인들이 저항의 표시로 일부러 거꾸로 B자를 붙였다고 한다.
이 입구 간판은 사실 복제품이라고 한다. 원본은 지난 2009년에 도난을 당한 뒤 훼손된 채 발견되었으며,
1년6개월의 복구작업 끝에 제모습을 되찾은 간판은 새로 지어질 수용소 박물관에 전시될 예정이라고 한다.
붉은 벽돌건물로 지어진 제1수용소...
전체 28개 동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현재는 박물관과 전시관으로 꾸며져 있다.
먼저 제4호 막사의 전시관으로 들어간다.
이곳에는 끌려오는 사람들의 사진과 희생된 사람들이 몸에 지니고 있던 유품들이 전시되고 있다.
전시관을 들어서자, '과거를 기억하지 않는 자들은 과거의 잘못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라는 글이 있고,
이어 유골함이 놓여져 있었다.
1940년 6월에 정치범 수용소를 시작으로 1942년부터 유대인 대학살이 시작되었다.
전시관에는 차례를 기다리며 그룹으로 이어지는 관람객들로 가득하다.
우측 테이블에는 수용소 입소부터 착취, 작업, 생활, 처벌, 죽음 등에 관한 당시의 문서들이 전시되어 있다.
도처에서 끌려오는 유대인들의 모습... 이외에도 여러 종류의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어린애들을 포함한 가족들이 영문도 모르는 채 끌려오고...
가스실과 화장장의 모형이 있었고, 이어 유대인들을 살상했던 가스통...
치클론(Cyklon) B라는 독가스 한통으로 약 400명을 살상할 수 있다고 한다.
가스실로 끌려갔던 사람들의 안경을 모아놓은 더미...
노동력이 없는 장애인들이 가장 먼저 죽임을 당했으며, 그들이 착용했던 의족,의수,목발 등을 전시해 놓은 것...
가스실로 끌려갔던 사람들의 신발을 모아 놓은 더미...
이외에도 죽은 사람의 머리카락과 그 머리카락으로 짠 모포를 비롯해, 가죽가방이나 머리빗 더미, 어린애들의 옷과 신발, 구두약통 등 여러가지 전시물이 있었다.
그들의 유품들에서 볼 수 있듯이 이곳에 수용된 당시의 유태인들은 부유한 인텔리 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안전한 곳으로 이주시켜 준다는 나치의 말을 믿고 중요한 현금과 귀중품만 가지고 가족과 함께 도착한 곳이 바로 이곳 아우슈비츠 수용소였으며, 샤워를 하고 난 후에 자신들의 귀중품을 돌려 받는 다는 말을 믿고
가방에는 커다랗게 자신의 이름이나 표시를 해 두었다고 한다. 결국 머리카락까지 전쟁 군수물자로 이용되고 정작 본인들은 강제 노동이나, 노동력이 없는 사람들은 곧바로 가스실로 끌려가 죽음을 맞이했다.
이 수용소에 수용되었던 사람들 사진이 벽면 가득히 걸려있다.
사진 아래의 수용기간을 보면 불과 2,3년간이고 나중에 도착한 사람일수록 그 기간이 점점 짧아진다.
나치는 이 전쟁의 패배를 전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모든 사실을 자랑스럽게 기록해 두었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구출된 체중 23~35kg의 여성 수용자의 모습...
가스실 다음의 사망 원인은 굶주림이었으며, 살아남은 어린이에게 영양식을 먹이자 며칠새로 몸이 회복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아침식사로 '커피라고 불리우는 액체' 500 cc와 점심으로는 거의 물 뿐인 썩은 야채로 만든 수프 1리터, 저녁식사로는 300g의 검은 빵과 소시지 20g을 먹고 중노동에 시달렸기에, 대부분 영양실조로 죽어갔다고 한다.이하 독일인들의 만행과 처참했던 유대인들의 모습을 사진과 그림으로 보여준다.
독일군은 수용소내에서는 여러 생체실험을 자행했으며, 남녀 단종실험(성기절단실험)을 비롯해 쌍둥이나 장애인을 이용한 잔인한 실험도 있었다.
전시관 관람 마치고 나오자, 좀 넓은 공터에는 3개의 기둥을 철봉처럼 연결해 놓은 곳이 있었다.
탈출자가 있을 때 수용자를 모아놓고 동료 수용자나 탈출을 도와준 지역주민을 교수형에 처했던 자리라고 한다.
수용자들의 탈출을 막기 위한 고압선 울타리들이 수용소를 감싸고 있다.
가스실로 가던 수용자 중에는 가스실의 고통스러운 죽음이 두려워 고압선에 몸을 던져 자살한 사람도 있다고.
가스실 옆에 있는 이 교수대는 탈출을 시도하다 잡힌 유태인들은 포로들을 모아 놓고 본보기로 이곳에서 처형장소로 이곳 수용소 소장을 지낸 '루돌프 헤스'를 처형한 교수대라고 한다.
전쟁이 끝난 뒤 달아난 수용소 소장을 붙잡아 와서는, 특별히 만든 이 교수대에서 처형을 했다고 한다.
한번 들어가면 한줌의 재가되어서야 나올 수 있는 악명높은 아우슈비츠 가스실 옆모습으로, 한번에 약 200명의 사람들이 샤워하라는 독일군의 말에 속아 들어갔다가 영문도 모르는 채 죽임을 당한 곳이다.
빨간 굴뚝은 처음에 없었으나 너무 많은 사람을 화장하다 보니, 그 연기를 감당할 수 없어서 만들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학살당한 대부분의 피해자들은 노동력이 없는 노인과 여성,그리고 어린이들이었는데, 수용소 도착즉시 선별되어 이곳 가스실로 보내졌다고 한다.
사람들이 죽어가는 고통으로 가스실 벽을 손가락으로 긁어, 벽에는 끍힌 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었다.
"그곳에 들어가면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습니다.
모두들 어찌할 바를 모르며 손톱으로 벽을 긁으며 가스에 질식할 때까지 울부 짖었습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 모습이 떠오릅니다, 아이를 품에 안고 서있던 어머니들의 마지막 모습이..."
- 다리오 감바이, 아우슈비츠 수감자, 유대인 -
가스실내에서 유일하게 외부로 뚤린 저 굴뚝에서 연기가 외부로 솟아 오르면 유태인들이 시신을 처리
가스실 바로 옆에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시체 화장장이다.
독일군들은 시체를 옮기는 수고를 덜기 위해 가스실 바로 옆에 호장장을 만들었는데, 하루에 1,500~2,000구의 시신을 화장했다고 하니 그 규모와 만행이 놀라울 따름이다.
천정과 벽 전체가 시체에서 나온 기름으로 쩔어 검은색으로 변색되어 있다
당시 수용소 독일군 관리국장은 '너희들에게 출구는 화장터 연기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한다.
독가스실 앞에는 독일군 장교 막사 겸 파티장이 있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촬영지였던 아우슈비츠 수용소
관람을 마치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말없이 주차장을 향하며...
그리고, 3km 정도 떨어진 위치에 있다는 아우슈비츠 제2수용소를 못가본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촬영지가 되었던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생각해 본다.
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쉰들러 리스트'는 1994년도 아카데미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 등 7개 부문을 수상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47년 폴란드 의회는 벽돌 건물 28동이 남아 있는 제1수용소를 영구보존키로 결의하고 현재 박물관과 전시관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나치의 잔악행위를 잊지 않기 위해서 유네스코는 1979년 아우슈비츠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우리에게는 유태인들이 독일군에게 학살당한 곳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2차 대전 초기 폴란드의 지식인들이 훨씬 더 많이 죽었다고 한다. 폴란드 사람들이 휠씬 많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유태인들이 더 많이 죽은 것으로 소문이 난 것은 짐작 컨데 유태인들의 언론플레이가 휠 씬 뛰어 났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도 그렇지만 유태인들은 철저하게 자기위주로 생각하여 자기들만의 이해를 위해 무서우리 만큼 행동했다는 것이다.
자고로 이웃나라들끼리 관계가 좋은 경우가 극히 드물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나라와 일본이 그렇고, 독일과 프랑스가 그렇고, 여기 폴란드와 독일도 과거의 이런 저런 악연으로 인해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앙숙관계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관람 후 1시간 20여분을 달려 소금광산을 보기위해 비엘리츠카로 이동한다.
역사의 현장이자 관광코스라 돌아 보긴 했지만, 섬찟하고 두려움마저 느끼게 되는 어찌보면 한많은 영혼들의 울부짓음이 들리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질 것만 같은 곳으로 두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은 박물관이다.
◯ 비엘리츠카(Wieliczka) 소금광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 지하 200m 에 건설되어 세계적으로 유명한 명소 모든 조각품이 소금으로 만들어 졌다.
소금광산입구
노천에서 소금을 채광하던 곳이었는데 지금은 그곳을 관광지로 개발한 것이다. 지하 1000m정도 갱으로 들어가는데 소금으로 만든 각종 조각물, 건물들이 흡사 우리 나라의 석류굴에 들어온 느낌인데 동굴 안의 모든 것들이 소금이란다. 무척 신기했다.
소금광산을 구경하기 위해 줄서있는 일반 관광객들... 소금광산 입장권을 우측상단에 덧붙였다.
우리는 사전에 예약된 단체관광객이라 그런지 폴란드인 현장가이드가 동행해서 줄을 서지 않고 구경할 수 있었다.
이곳 소금광산을 관광하기 위해서는 이곳을 전문적으로 안내하는 현장가이드와 동행해야 하며, 소금광산 가이드는 이곳 비엘리츠카 소금광산에서 일했던 광부들만이 자격이 있다고 한다.
700년 역사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소금광산은 내부장식물이 모두 소금(암염)으로 만들어져 있다.
소금광산은 본래 바다였으나 물이 증발한 후 소금만 남아 암염이 되기까지 약 1만5천년이 걸렸으며, 200만 년 전에 형성된 것으로 추측되는데 東西로 약 10Km에 이르고 두께는 약 500m에서 1.5Km에 달한다고 한다.
13세기 경 소금을 채취하기 시작해 1996년까지 이어졌고, 지금은 채굴을 중단한 채 관광지로 활용되고 있다.
나무계단을 따라 내려서면서 관람이 시작되는데 사진촬영을 위해서는 3유로를 지불하고 인증 스티커를 발부 받아 카메라 등 잘 보이는 곳에 부착해야 한다.
계단 틈으로 보듯이 나무계단을 한참이나 내려간다. 지하 65m까지 내려가는 동안, 378개의 나무계단이 있다.
지하 136m를 들어 가면서 설명을 듣는데 천장에나 벽 바닥이 다 소금이다.
마지막 54번 숫자가 적힌 층의 나무계단을 내려오면, 꾸불꾸불한 갱도를 따라 지하 130m까지 약 2.5Km를 걸어서 관광한다.
약 300Km에 이르는 소금광산의 갱도는 3Km 정도만 관광객들에게 공개되고 있으며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곳곳을 통나무로 보강해 놓았는데 미로와 같은 갱도를 독자적으로 관람하던 관광객이 길을 잃고 사망한 사건이 발생한 이후로 관광객은 반드시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야 관람이 가능하다.
처음으로 맞이하게 되는,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 소금 조각상'...
1493년 근처 크라카우에서 공부했던 코페르니쿠스가 이 곳 소금광산을 방문한 것을 기념하여, 광부들이 그의 탄생 500주년인 1973년에 둥근 지구를 손에 든 코페르니쿠스 소금 조각상을 세웠다고 한다.
이 소금광산과 관련된, 킹가 공주 전설의 한 장면을 소금조각으로 보여주고 있다.
비엘리츠카 소금광산의 전설이 얽힌 킹가 공주에 대한 전설을 조각으로 만들어 놓은 방이다.
헝가리 벨라4세의 딸인 킹가 공주는 폴란드의 브로츠와프 왕과 결혼하게 되었을 때 ‘폴란드는 부유한 나라지만 소금이 없으며, 헝가리에는 소금이 부족하지 않으니 광산을 하나 달라’고 아버지에게 간청하자, 왕은 ‘마라무레’라는 광산을 결혼 지참 항목에 포함시켰다.
폴란드로 떠나기 전날 밤 특수한 능력이 있는 킹가는 그 소금광산에 가서 주문을 외우며 예물로 받은 약혼반지를 구덩이 속에 던지고 출발하였다.
공주의 행렬이 비엘리츠카에 이르렀을 때 영감을 얻은 공주가 행렬을 멈추고 그곳을 파보라고 하였다.
그러자 그곳에서 헝가리에서 묻었던 반지와 소금 덩어리들이 나왔다고 한다.
더 깊이 파들어 갈수록 많은 소금이 나왔는데, 그것은 폴란드의 모든 사람들이 먹을 수 있는 양이었다.
소금이 귀했던 이 지역 사람들은 킹가 공주를 마을의 수호천사로 받들게 되었다고 한다.
광산내에서 작업중에 발생되는 메탄가스를 횟불로 태우는 모습을 보여주는 모형들이다.
1740년 버팀목에 불이 붙으면서 화재가 발생하여, 천정이 그을린 방이다.
이 소금광산에는 몇 번의 큰 화재가 있었는데, 그 중 가장 큰 화재는 1644년에 일어났으며, 여러 달 동안 계속된 이 화재로 많은 사람들과 말이 죽었다.
지하의 또 다른 위험은 바위틈에서 새어나오는 메탄가스로, 5~14%의 메탄가스는 공기와 접촉하면 폭발한다.
그래서 광산에는 가스를 태워버리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며, 긴 막대기 끝에 불을 붙여 가스가 있을 것으로 보이는 구석에 기어들어가 불을 붙이는 위험한 일을 했다.
광부들이 암염을 생산하고 운반하던 모습 등 여러가지 모형 전시물들이 있었다.
갱도 벽에는 소금꽃이 하얗게 피어 있다.
말은 소금을 운반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어렸을 때 이곳에 들어와 소금을 밖으로 운반하는데 이용되며, 오랫동안 햇빛을 보지 못해 눈이 멀고 끝내 죽어 간다고 하며, 갱도에서 일생을 마친 말을 박제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말들의 수명은 밖에서 사는 말들에 비해 평균 수명이 훨씬 길었다고 한다.
광산안에서 말이 소금을 운반하였으며 광내부에 마굿간이 있었다고 한다.
말을 이용해 소금을 밖으로 올려보내는 기구들의 모형도 전시되어 있다.
큰말은 들어 올수가 없어서 망아지때 데리고 와서 말이크면 일을 시키고 죽어서야만 말의 인생이 끝난다고 한다.
폴란드를 건국한 왕의 소금 조각상 앞에서 ...
지하 갱도를 따라 점점 깊이 내려간다.
계단 위에서 아래 광장을 내려다보는 느낌은 조용히 음악 감상도 하고 내려 갔다.
소금광산 내부
벽과 천정이 온통 암염으로 이루어져 있다.
요정들의 방이다.
전설에 의하면 오래 전부터 이 광산에 귀중한 소금을 지켜주는 요정이 산다고 여겼으며, 물로 부터 소금을 보호하고 광부들에게 소금광맥이 있는 바위에 그림을 그려서 위험을 알려주었다고 한다.
요정의 우두머리는 ‘하얀 손(White Hand)'으로 그녀는 아름다운 크리스탈 소금이 가득한 방에서 사는데, 절대로 늙지 않는다. 그래서 소금은 음식을 오랫동안 보존하는 것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외에도 광부들에 의해 만들어진 소금 조각상들이 곳곳에 만들어져 있었다.
광산안의 광장
성모마리아와 예수님의 소금 조각상...
소금광산 안에 유일하게 나무로 만들어진 예수 조각상이다.
약 1시간 갱도 관광을 하며 내려가자, 지하 110m 위치에 킹가 대성당이 나타났다.
소금광산 관람의 클라이막스인 킹카대성당은 길이 54m에 폭 17m, 높이 12m로, 1896년 부터 만들기 시작해 약 70년의 작업 끝에 1963년 완공되었는데 예술가가 아닌 광부들이 소금을 캐내며 쉬는 시간을 이용해 틈틈이 조각한 작품으로, 킹카대성당 벽면에 가득하고, 샹들리에를 장식하고 있는 크리스탈도 암염을 조각해 만들었다고 한다.
맨 처음 광부였던 '요셉 마르코브스키'가 암염으로 조각작품을 만들기 시작했으며, 그후 광부이면서 예술적 재능이 뛰어난 10살 아래의 동생 ‘토마스 마르코브스키’가 이 성당을 만드는데 동참했다.
형 요셉이 4년에 걸쳐 만든 주제단과 인물은 성모 마리아가 아닌 성녀 킹가였는데 반투명한 암염으로 만들었다.
1920년 형이 세상을 뜨자 동생 토마스는 벽에 소금으로 예수의 일대기를 조각하기로 하고 작업을 진행하던 중 1927년 토마스 마져 죽게 되어 작업이 일시 중단 되었다.
다음에 이어받은 광부인 '안톤 비로데크'는 1935년 마침내 최고의 걸작인 '최후의 만찬'을 만들어 낸다.
광산내의 소금으로 만든 조명등
킹가 대성당 내부 벽면에는 예수님 일대기를 묘사한 소금 조각상들이 있다.
성당 정면 제단 풍경... 제단에는 성모 마리아가 아닌 성녀 킹가가 조각되어 있다.
대성당의 최고 작품이라는 '최후의 만찬'은 불과 2~3Cm 깊이로 조각하여 원근감을 완벽하게 묘사했다고...
이곳의 소금조각품 중에 유일하게 광부가 아닌 예술가에 의해 만들어진 요한바오로 2세 조각상이다.
폴란드 출신 교황 요한바오르 2세 조각상은 3명의 광부가 이어가며 조각하여 1999년에 완성되었으며, 이들 3명의 이름이 옆에 있는 벽에 붙어 있고, 그중 1명은 지금도 생존해 있다고 한다.
킹가 대성당을 지나자, 소금광산 내에 있는 연못... 연못 바닥에는 던진 동전이 많이 있었다.
광산 내부에 있는 커다란 광장의 붕괴를 예방하기 위한 나무 구조물(?)...
커피나 음료수, 기념엽서나 기념품 등을 판매하는 작은 가게도 있었다.
소금성분 지하수가 모여 형성된 깊이 7m의 지하 연못... 일명 쇼팽의 방이다.
어두워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작은 연못 주변 난간으로 일행 모두들 빙 둘러서니 한 줄기 조명 속에서 4분 정도에 걸쳐 피아노 곡이 흘러 나왔다. 곡명은 쇼팽의 '이별의 곡'...
1차 세계대전 당시 폴란드군 최고사령관이자 독립의 아버지, 대통령이었던 피우수드스키(Josef Pilsudski)의 조각상...
지하 130m에 위치한 또다른 연못...
다시 갱도를 지나자, 엄청 넓은 광장 동굴(?)에는 기념품 판매점을 비롯해 카페, 레스토랑 등이 있었다.
지상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트를 타기 위해 기다리는 일반관광객...
역시 현장가이드와 동행하는 단체 관광객 그룹이라 그런지, 별도 빠른 코스로 이동했다.
또다른 작은 예배당 앞을 지나서
폴란드 크라코프의 남동쪽 13길로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고, 700년 역사로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내부장식이 소금으로 만들어져있는 소금광산..........
소금광산 내려갈때는 계단으로 내려가면서 소금바위, 전시장, 복도, 예배당, 식당 등 수많은 조각품을 감상하면서 내려가고 올라올때는 엘이베이타 타고 올라왔음
관람을 마치고 승강기를 타기 위해 기다리는 관광객들...
상하 2대의 승강기는 130 여m를 고속으로 운행되는데, 약 40초만에 지상으로 올라간다.
비엘리츠카의 소금광산 관광후, 폴란드 옛 수도로서 오랫동안 번영을 누렸던 크라카우로 버스로 약40분 정도 이동 후 바벨성 겉모습만 보고...
'크라카우'는 독일어 이름이고, '폴란드어로'는 크라쿠프...
소금광산 비엘리츠키 지상건물
◯ 바벨성
바벨성은 크라카우 남쪽 비스와강의 상류 둔치에 있다.
로마네스크·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등 다양한 양식이 혼합된 건축물로, 1000년 크라쿠프 주교에 의해 건설되었다.
11세기 중반부터 17세기 초까지 폴란드 통치자들의 거주지로 사용되었고, 특히 르네상스 양식의 성격이 강하다.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성 외에 바벨 대성당과 주변 건물들, 커다란 정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바벨성 옆으로 흐르는 비스와강 하류 쪽 강변 풍경...
슬로바키아로 이동하면서 바라 본 비스와강 상류 쪽 강변 풍경...
크라카우는 아이러니하게도 독일군사령부가 있었던 덕에 세계 대전의 참화를 피할 수 있었다.
그래서 폴란드 왕국의 수도 시절에 만들어진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 덕에 크라카우는 거의 대부분 지역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고, 많은 여행자들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걸어서 크라카우 중앙광장 관광으로 향했다.
◯ 크라카우(Krakau)의 중앙광장
중앙시장 광장은 크라코프의 사교장 역할을 했던 곳으로 구시가지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며 베니스 산마르코 광장 다음으로 유럽에서 두번째로 넓은 광장이다
중앙광장으로 가는 길에 이런 공원을 가로질러 간다.
그리고, 옛 크라카우 귀족들의 저택이 있는 거리로 들어서니
저 멀리 성당의 종탑이 보이고
드디어 중앙광장에 도착했다. 중앙광장의 가운데 직물회관 보인다....
중앙광장은 유럽에서 이탈리아의 베네치아 광장 다음으로 큰 광장이라고 한다. 맞은편 건물이 중앙광장 가운데 위치한 직물회관인데, 14세기에 지어졌다고 한다.
그 당시는 옷과 천을 교역했으나, 지금은 1층에 각종 목공예품과 액세사리 등을 파는 기념품 가게가 있고,
2층에는 폴란드 화가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갤러리가 있다.
길이가 100m나 되는 직물회관 1층에는 각종 기념품점이 있고 2층에는 18.19세기의 폴란드 조각과 회화를 전시하는 국립박물관이 있다.
고딕과 르네상스 양식이 혼합된 직물회관(Sukiennice)
직물회관 1층 내부 전경
폴란드 크라코프의 직물회관 전경으로 1층에는 관광객들이 기념품을 살수있는 수 많은 잡화점들이 있으며, 2층에는 18~19세기 폴란드 화가들의 대표작을 전시해 놓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직물회관의 후문쪽 방향
직물회관을 나와 광장으로 나선다.
중앙광장 왼편에 보이는 시계탑 건물은 원래는 구시청사였는데 19C에 방화범에 의해 시청사는 전소하고 시계탑만 남았다.
우측으로 연결되어 있던 본건물은 소실되고 첨탑만 남아 지금은 박물관으로 이용되고있다.
광장의 왼편에는 성당의 종탑이 보이고
보이체크 성당 - 조그만 성당이지만 60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보이체크성당은 600년 역사를 가진 성당으로 기네스북에 등록된 세계에서 가장 작은 성당이다.
독일인 아담 베르크가 설계한 성당으로 그는 폴란드에서 처음으로 순교하여 성인 칭호를 받는 사람이다. 이 성당은 11세기 때 지어진 성당으로 20명이 미사를 드릴 수 있는 세계 최소 성당이다
고작 장의자 4개인 미니성당으로 규모는 아담하지만 교황이 성직생활을 수행했던 역사적 건물로 미소를 머금케한다
직물회관 오른쪽의 넓은 광장 풍경으로, 트랜드마크인 성 마리아 성당이 보인다.
성 마리아 성당의 전경으로, 1222년 세워진 고딕양식의 건축물이다.
몽고군 침입 당시에는 적군의 습격을 알리는 감시탑 역할을 했다고 한다.
성당 내의 각종 장식물들은 폴란드 국보로 대부분 지정되어 있을 만큼 뛰어난 가치를 지녔다는데, 아쉽게도 성당 내부 구경은 하지를 못했다.
광장 중앙에 세워져 있는 동상은 폴란드 국민시인으로 존경받는 '아담 미츠키에비치'라고 한다.
뒷편 건물은 직물회관의 오른쪽 옆 모습이고, 건물 왼편 위쪽에 구시청사의 시계탑도 보인다.
이탈리아 베네치아 산마리코 광장 다음으로 유럽에서 두번째로 큰 폴란드 중앙광장의 활기찬 모습
폴란드 국민시인으로 존경받는 '아담 미츠키에비치'의 동상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관광객들
광장에서 관광객을 기다리는 마부도 보이고...
백마차를 타고 구시가지 관광을 하는 관광객도 있었다...
폴란드 크라카우의 구시가지를 관광할 수 있는 백마차가 관광객들을 기다리고 있다.
중앙광장 주변의 거리 카페...
이제 다시한번 중앙광장을 돌아보고...
전용버스가 있는 곳으로 가는 길가 철망 너머로 또 바벨성이 보인다.
크라카우 시내로 이동하여 바벨성 외관만 보고 중앙광장을 구경하고 저녁 무렵 브로크로우에 도착했다.
폴란드에서는 우리 나라의 경주와 같은 천년고도로 도시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재로 지정된 도시였다. 도시 중심 가에 성당이 있고 도심에는 마차만 다니도록 허용된 그야말로 전원적인 도시이다.
서구의 다른 나라들에 비해 경제적으로는 약간 뒤떨어지지만 거리 사람들의 얼굴모습에는 전혀 그런 기색을 찾을 수가 없었다. 2달러를 주고 마차를 타고 중심 가를 관광하는데 말을 모는 마부가 얼마나 흥겹게 관광안내를 하던지. 그 모습이 너무나 정겹다.
도시 한가운데서 돼지갈비를 안주 삼아 맥주를 먹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들이 모두들 너무나 정겨운 얼굴들이다. 역시 문명이 발달할수록 점점 더 여행의 느낌은 줄어드는 것일까. 폴란드인들.. 어렵지만 나름대로 즐기면서 만족하면서 사는 모습들이다. 언제 기회가 되면 다시 한번 배낭여행을 오고 싶은 곳이다
크라코우는 한때 폴란드의 수도이기도 했던 곳이다. 해서 궁궐과 각종 유적들이 매우 많이 남아있다. 도시전체는 매우 소박한 느낌을 주면서 풍요로운 느낌이다. 사실 폴란드라는 나라의 느낌이 그랬지만 경제적으로는 독일이나 프랑스에 비해 약간 뒤떨어지지만 문화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매우 안정되어 있고 풍요로운 느낌이다.
저녁 9시 30분이 넘어 도척한 폴란드 크라카우의 호텔에서 3일째의 밤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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