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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봉사(강원도 건봉사)사찰여행/강원도 2013. 6. 11. 13:24
적멸보궁 금강산 건봉사 !
2013. 6. 11.
2013. 6. 9. 불교산악회 산빛 어울림에서 함께한 금강산 건봉사 .........
맑은 아침의 구름냄새가 향내음처럼 싱그럽다....
포항출발(06:00) → 울진 → 동해 → 속초 → 고성 → 건봉사(11:30) 도착 ....
부처님의 인연있어 포항에서 너무 멀리 있어 좀처럼 가 보기가 쉽지 않던 우리나라 4대 고찰 중 하나인 강원도 고성군 거진면 냉천리에 위치한 금강산 건봉사는 진부령과 대대삼거리 중간에 들어서 있는 고찰이다.
건봉사는 금강산이 시작되는 초입에 위치한 해발 910m인 건봉산에 자리하므로 특별히 '금강산 건봉사'로 불리고 있다.
이름만 들어도 설레이는 금강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는 건봉사는 군사분계선 내에 있는 관계로 주변경관이 오직 길 하나만 있을 뿐 썰렁했다. 군사지역에서만 느껴지는 정적이 엄습한다...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냉천리 건봉사는 아미타 도량으로 금강산 남쪽 자락에 위치하고 한국전쟁 전만해도 한국 4대 사찰중 하나이고 강원도 제1의 사찰로서 설악산의 신흥사와 백담사, 양양의 낙산사를 말사로 거느릴 정도로 규모가 거대했다.
건봉사는 신라 법흥왕 7년(520)에 아도화상이 "원각사"로 창건 후 발징화상이 중건, 정신 .양순이 염불만회를 열어 염불만회의 효시가 되었다.
고려초 도선국사가 절 서쪽에 봉황새 모양의 바위가 있다하여 "서봉사"로 이름을 바꾸고 1358년 나옹이 중건하고, "건봉사"로 개칭함.
1464년 세조가 행차하여 자신의 원당으로 삼았으며 이후 왕실의 보호를 받는 큰 사찰이 되었다.
사찰 구역은 아직도 민간인 통제구격이지만 1988년부터 건봉사를 출입하는 길만 통행이 자유로워졌고 현재의 사찰 모습은 1989년 이후 복원된 것이다.
건봉사는 워낙 방대하여 아직도 전체 복원은 요원한 실정이다. 당시의 흔적으로는 금강저가 생겨져 있는 불이문(不二門)(문화재자료 제35호)과 홍예형 다리인 능파교(보물 제1336호), 비 11기와 50여기의 부도를 모아 놓은 부도밭 등이 남아있다.
큰 사찰답게 부도탑과 비들도 200여기에 달하였으나, 여기저기 방치되다 문화재급 석물들은 대다수 도난을 당해 1980년대 한 곳으로 모아 보전하고 있다.
야트막한 기와담으로 둘러친 부도전에는 50기에 달하는 부도와 10여기의 탑비가 있다. 원래 건봉사에는 2백개가 넘는 부도와 탑비가 흩어져 있었으나 한국전쟁 이후 많이 분실되었고 이를 더 이상 방관할 수 없어 이산 저산에서 옮겨와 부도전을 조성하였다 한다.
건봉사 들머리에 널찍하게 자리잡은 부도밭에서 예전 건봉사의 위상이 어떠하였는지 짐작하게 한다.
건봉사 입구부터 거대한 금강송이 위치하고 있다.
건봉사 가는길은 관광객이 거의 없고 숲에 둘러싸여 고요와 적막만이 흐른다. 이 호젓한 길이 끝나면 바로 주차장이다.
호국선열들의 명복을 빌면서....건봉사를 들어선다.. 날씨도 화창하고 공기도 좋고 ...하늘은 가을 하늘처럼 높고 뭉개 구름이 가슴설레게 한다.
불이문 좌측에는....
한국전쟁의 전화 속에서도 살아남은 불이문이 내방객을 반긴다.
이 팽나무는 강원도 기념물 제 51호로 지정된 건봉사지 내에서 약 500년 동안 자라왔던 나무로 한국전쟁중 766칸의 건봉사 사찰이 소실되었으나 유일하게 남아있는 불이문을 지켜주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고성군에서는 건봉사를 지켜주는 상징목으로 2008년 12월 12일 보호수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1920년 건립된 건봉사 중문인 불이문 (강원도 문화재 자료 제 35호)
이 문은 한국전쟁의 포화속에서도 유일하게 살아남아 건봉사의 옛날을 증언해 주고 있다.
글씨는 조선말의 유명한 서예가 해강 김규진의 글씨다. 유명한 금강산 비룡폭포의 미륵불를 쓴 그분. 기둥을 바치고 있는 네개의 돌 기둥에는 불법을 수호하는 하늘신(제석천)의 무기 금강저를 조각하여 잡것의 출입을 금하고 있다. 이 문 너머가 부처님의 세계다. 불이 즉 둘이 아님은 차별이 없는 평등의 세계인 고로...
금강저(90cm)가 새겨진 불이문 돌기둥으로 불이문은 보통 기둥이 두갠데... 여긴 4개다. 사천왕문을 따로 건립하지 않고 금강저를 음각하여 사찰수호의 기능 까지 보탠거라 한다. 특이하게도 기둥에 새겨진 금강저가 이집을 지켜주었는지도 모른다.
서기1465년 세조 임금이 건봉사를 원당으로 삼은 뒤 어실각을 짓고, 전답과 친필 동참문을 하사하였다고 전한다.
그 후 1878년 4월 3일 큰 불로 인해 3183칸이 전소되었으나 여러차례 복원 작업을 통하여 1911년에 9개 말사를 거느린 31본산의 하나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에는 사명대사가 의승병을 기병한 호국도량이었으며 당시 통도사에 있던 부처님 진신 치아사리를 왜벙이 일본으로 가져간 것을 사명대사가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다시 찾아와 이곳에 봉안하였다.
또한 구 한말(1906년)에 <봉명학원>을 설립하여 개화사상과 신문화를 받아들인 관동지방교육의 도장이 되었으나 그 후 일제에 의해 강제 폐교 되었다.
이 지역은 한국전쟁 중 휴전 직전까지 2년여에 걸쳐 아군 5, 8, 9사단 및 미군 제 10 군단과, 공산군 5개 사단이 16차례의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건봉산 전투 전적지이며, 이 때 건봉사는 완전히 폐허가 되었으나 1994년 부터 대웅전, 팔상전, 염불만일원, 종각, 사지 등이 각각 복원되었고 지금도 사찰복원이 계속 이루어지고 있다.
한국 전쟁전 건봉사는 총 642칸과 보림암 등 124칸의 18개 부속암이 있었다고 한다
불이문을 들어서서
종각의 위치가 법당하고 많이 떨어져 있는 것은 옛날 사찰 의 규모를 미루어 짐작케 해 주는 것 같다.
범종에는 ‘평화의 종’이라고 새겨서 분단의 아픔을 울려 퍼지게 한다.
이곳 건봉사는 이미 옛날부터 호국불교의 요람이었다.
분단의 현장 가운데에서 평화의 종을 울리고 있는 건봉사는 어느 곳 보다 민족의 아픔을 함께하는 현장이었다.
종각입구에 세워진 나무아비타불석주로 석물이외의 모든 것은 전화에 인멸 되었던 것을 요즘 다시 복원 관리하고 있었다.
건봉사의 '건봉'이라는 이름은 바로 금강산 관음봉 자락에 잇는 봉암의 형태에서 따왔다고 하며 극락을 안내하는 영물이 바로 봉황과 용이기 때문에 이곳에 봉황을 새긴것은 극락으로 빨리 안내하기 위해서라는 의미가 있다 한다...
불이문을 지나면 왼쪽으로 솟대 모양의 돌기둥을 만나게 되는데 높이가 3m로 규모가 꽤 크며 나무가 아닌 돌로 만들어졌지만 꼭대기에 봉황이 앉아 있어 솟대라고 하는 이도 있다. 돌기둥이 서있는 부분은 널직한 공터로 되어 있는데, 과거 건봉사의 번창했던 규모를 짐작케 한다.
건봉사는 가운데 개울을 중심으로 동쪽에 대웅전 영역, 북쪽에 불사리를 모신 사리탑 영역, 서쪽에 극락전 영역등으로 사역이 펼쳐져 있어 그 경내가 매우 넓지만, 지금은 대부분이 주춧돌과 기단 등 돌로된 유규만이 남아 옛 영화를 말해주고 있다. 다행히 최근에는 대웅전 영역과 사리탑 영역의 일부만이 복원되었다.
건봉사의 가운데 개울을 중심으로 동쪽에 대웅전 영역을 지나 쭉 바로 오르는 북쪽에 불사리를 모신 사리탑 영역으로 향한다.경내 북쪽에 위치한 사리탑영역으로 향하는 오솔길에는 무너진 낙서암터에 하얗게 핀 들꽃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아직도 발굴중인지 수많은 석축들이 흩어져 있다.
적멸보궁 가는 길
적멸보궁으로 가는 길의 계단위에 두 개의 기둥이 보이는데...
2개의 연못을 지칭하는 표석인 것 같다
범어와 문양을 새기고 명문을 새겨 놓았다.
적멸보궁 가는길에 '龍蛇活地'로 용과 뱀이 상생하니 사부대중도 화합하라는 뜻을 담아 조성하였다 한다.
적멸보궁과 아치문
龍蛇活地 작은 연못을 지나 숲속 사리탑전에 이르니, 관광객마저 찾지 않아 고요한 정막감 속에 스님의 염불소리만이 도량에 가득했다
도굴 당했던 사리를 12과중에서 8과를 일본에서 되찾아와서 석가세존 진신치아사리 3과를 모신 적멸보궁
적멸보궁에는 한 손에 잡은 목탁이 힘겨워 보이는 노스님이 기도를 집전하셨는데, 기력이 없으셔서 염불소리는 알아들을 수 없을 만큼 작았지만, 노구를 이끌고 불전에 기도하시는 그 모습에서 평생을 수행으로 일관했을 스님의 일생을 읽을 수 있었다.
정성을 다해 부처님을 예경하고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였다.
사리탑전으로 불단에는 방석만 잇고 부처님은 모시지 않았다. 바로 뒤의 금강계단에 부처님 진신이 계신 가닭이다.
오른쪽으로는 금박으로 새긴 금강반야바라밀경이 보인다....
기록에 의하면 당초 건봉사 불사리탑에는 12과의 차시리가 봉안되었는데, 86년 도굴범들에 의해 도난당한 뒤 모두 8과만이 회수되었다. 12과가 모셔져 있다가 4과를 분실한 것인지 아니면 도굴범들이 8과만 꺼냈는지는 현재로선 알수 없다. 그 후 3과는 다시 탑속에 봉안하고 5과는 만일염불원 법당에 봉안하여 불자들로 하여금 친견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유리 창 밖 보탑에 새로 만들어 봉안한 부처님 진신치아사리 3과가 탑에 봉안되어 있다...
이곳은 통도사의 금강계단을 모디파이 하였다.
새롭게 조성된 사리탑, 왠지 낯설기만 하다. 세월의 무게가 더 많이 필요 하려나?
적멸보궁 오른쪽에는 독성각이 자리 하고 있다.
독성각 전각 안에는 독성존자가 재미있게 조성되어 있다.
적멸보궁 안에서 밖으로 본 전경
내려오다가 산신각에 들린다.
적멸보궁서 내려오며 낙서암 지역의 산신각
목각산신탱이 조성된 산신각 내부
산신각에서 내려다보는 폐사지와 새로 지어진 건봉사의 요사체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산신각 앞, 용사활지 뒤로 보이는 전각이다..
스님 수행공간 처럼 보이느데 현판은 없었다.
탐플스테이 수련관과...
스님수행공간이다...
멀리 봉서루가 보인다. 능파교에서 바라본 대웅전 영역이다.
계곡을 가로지르는 능파교 (보물 제 1336 호)
극락전 영역과 대웅전 영역의 계곡을 잇는 능파교는 무지개 모양의 돌다리로 자연지형을 잘 이용해 조선 숙종 38년(1708년)에 축조했다.
우리나라 돌다리의 아름다움을 잘 표현하여 보물제 2336호로 지정되었으나 몇년전 보수공사를 하다가 무녀져 내리는 바람에 옛맛을 잃어버렸다. 능파(凌波)란 사바세계의 고통을 부처님의 지혜로 헤쳐나간다는 뜻이다.
능파교인 이 돌다리는 건봉사의 수많은 건물터 중에 그래도 형상이 제대로 남아있는 것으로 주위 풍경과 잘 어울려 아름답다.
고성 건봉사의 대웅전 지역과 적멸보궁 지역을 연결하고 있는 무지개 모양의 다리로, 규모는 폭 3m, 길이 14.3m, 다리 중앙부의 높이는 5.4m이다.
다리의 중앙부분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를 틀고 그 좌우에는 장대석으로 쌓아서 다리를 구성하였는데, 홍예는 하부 지름이 7.8m이고 높이는 기석의 하단에서 4.5m이므로, 실제 높이는 조금 더 높다.
조선 숙종 34년(1708)에 건립된 경내 불이문 옆의 '능파교신창기비(凌波橋新創記碑)'에 의하면
이 다리가 숙종 30년(1704)부터 숙종 33년(1707)사이에 처음 축조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후 영조 21년(1745)에 대홍수로 붕괴되어 영조 25년(1749)에 중수하였고, 고종 17년(1880)에 다시 무너져 그 석재를 대웅전의 돌층계와 산영루(山映樓)를 고쳐 쌓는데에 이용하기도 하였다.
규모가 비교적 크고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다리로, 축조연대와 건립자 등을 알려주는 비석을 갖추고 있어 홍예교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능파교를 지나면 새로 지어진 건물들과 함께 금강산 건봉사가 자리 잡고 있다.능파교 좌우의 냇가 풍경
십바라밀은 이승의 번뇌를 해탈하여 열반의 세계에 도달하기위한 10단계의 수행을 가리키는 것이라
고 한다.
능파교를 건너자 입구에 십바라밀석주가 양 옆에서 호위하고 있다. 다른 사찰에서는 보지 못했던 모습이다.봉서루 앞 약수
능파교를 건너면 만나는 누각 봉서루 앞에는 두개의 돌 기둥이 서 있는데, 각각의 기둥에는 초승달, 가위, 원 등 다양한 문양이 다섯개씩 새겨져 있다. 이는 불자가 불법을 닦아 이승의 세계에서 해탈의 세계로 나아가는 10개의 단계 '10바라밀'를 상징한다고 한다.
봉서루 입구에서 바라 본 대웅전
대웅전 마당에서 바라 본 봉서루
추녀의 들림을 잡아주는 강다리
봉서루를 지나면 절 마당에 북쪽끝에 위치한 석가모니부처님을 주존으로 모시고 있는 대웅전을 만난다. 대웅전에서는 마침 사시 예불중이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불공에 동참하고 있었다.
석가모니불을 주존으로 문수보살. 보현보살을 좌우협시불로 한 삼존불
대웅전 탱화
설악산 신흥사와 백담사, 양양의 낙산사를 말사로 거느렸던 사찰이 건봉사이다.
임진왜란 때는 사명대사가 승병들을 훈련시켰는데 그들이 공양할 쌀을 씻은 물이 개천을 따라 10리도 넘게 흘러 갔다고 한다.
건봉사가 위치한 건봉산에 큰 불이 난 것은 1878년으로 그때 건봉사의 건물 중 3천칸이 소실되었다.
대웅전 앞 약수
대웅전 좌측에는 만일염불원이다.
만일염불원에는 종무소. 불교용품점. 진신사리친견당이 있고 .........
종무소
불교용품점
만일염불원 법당에 모셔진 불치사리 5과
정현 건봉사 주지스님
대웅전 우측에는 공양당이 있다...
공양당의 조양신탱
대웅전 좌측 종무소 뒤편, 대웅전 옆에는 명부전이 자리하고 있다...
명부전의 지장보살님...
그리고 스님 수행공간도 여러곳에 있었다...
대웅전 옆 명부전 뒤길로 오르니
'등공대 해탈의 길, 표지판이 나온다.
비무장 지대임을 말해주는 표시 같다. 우리의 슬픈 역사...
건봉산 도인인 문화해설사님....
외양 모습에서 부터 범상함이 보인다....
현존하는 등공탑비는 서기 782년에 염불만일회에 참가 했던 31인이 아미타불의 가피를 입어 극락왕생 하였다고 전하고 그 부도를 모신 것이다.
등공대에서 바라본 산과 하늘
멀리 우리나라 군사 경계선이 보인다
전해오는 기록에 의하면 신라때 발징스님은 이곳에서 28년동안 쉬지 않고 아미타불기도를 올리는 만일 염불회를 주최하였는데, 이 기도가 끝나는 날 기도에 동참했던 모든 이들이 극락세계로 승천하였다 한다. 그 터가 등공대란 이름으로 전해온다.
최근 이 전통을 이어 만일염불회를 새롭게 주창하고 이를 실천하자는 운동이 이절을 중심으로 펼쳐지고 있다 한다.
저 산 너머는 동해 바다란다.
대웅전에서 40여분 오른 등공대에서 다시 내려 간다...
이 나무문 지나 그늘에서 맛난 점심 도시락을 먹고 다시금 하산 한다...
다시 대웅전 옆 명부전 뒤쪽이 보인다...
대웅전 쪽으로 안 가고 주차장쪽으로 내려가는 길이 보이는 쪽으로 내려 간다.
다시 뒤돌아 본 건봉사 전경이다...
탐플스테이 체험공간 같았다...
불이문을 나선다.
건봉사 '불이문' 현판은 해강 김규진님의 글씨다...
불이문을 나와 주차장 옆에 지어진 사명당의 승병기념관을 들러 본다.
사찰 경내 여기저기에서 쉬거나 책을 읽고 있는 군인들을 여럿 보았는데, 이 절에서는 일요일 마다 장병들을 위해 법회장소와 점심 공양을 제공하기 때문에 많은 군인들이 종교활동을 위해(혹은 쉬기 위해) 절을 찾고 있다고 한다.
사명당의 승병 기념관
입구 좌측에는 1926년도 당시의 건봉사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건봉사 소개 및 1926년도 당시의 모습을 보니 그 크기가 실감난다...
건봉사 입구의 거대한 금강송을 뒤로 하고 머나먼 건봉사에 다시 와 볼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며 애잔한 건봉사를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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